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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쿠시마 방문기④/ 그곳의 행복한 사람들

<미야자키 하이오 감독이 묵은 민박집의 여주인 이와카와 야스코씨>


<3편에서 계속>

야쿠시마 여행에서 건진 또 다른 재미는 현지에 정착한 한국여성 두 명을 만난 일이다. ‘풋고추’라는 간판을 달고 민박 겸 식당을 하는 부산 출신의 아줌마 김모씨와 모스버그에서 일하는 김모씨였다.


‘풋고추’는 부부가 함께 운영한다. 가게를 방문하던 날, 일본인 남편은 부지런히 음식을 만들어 내왔다. 가게의 메뉴는 모두 한국 음식들이다. 한국에서 먹던 맛 그대로. 부산 아줌마 김씨는 상당히 유쾌하고 재미있는 분이었다.


여행 중 어느 날, 점심을 놓쳐 오후 2시쯤 안보강 다리 근처에 있는 모스버그에 들어갔다. 일본어 억양이 이상한지 “한국분이시죠”라고 물었다. “그렇다”고 하니 자신도 한국여성이라고 했다. 더없이 반가웠다. 이 여성은 “도쿄 경시청에서 일하던 남편이 퇴직해 야쿠시마로 내려오게 됐다”고 말했다. 공교롭게 두 김씨 아줌마들이 최근에야 서로의 존재를 알았다고 한다.


애니메이션 감독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묵었던 민박집 여주인(오카미상)과의 짧은 만남도 인상적이었다. 여주인의 이름은 이와카와 야스코씨. 민박집 위치는 안보강 인근. 민박집 이름은 ‘스이메이소우’. 이 민박집에 직접 숙박을 하지는 않았지만 현지인 소개로 여주인을 만날 수 있었다. 현관에 들어서자 하야오 감독이 이와카와씨의 세 아들에게 그려줬다는 캐리커쳐들이 피아노 위에 나란히 놓여 있었다.


이 민박집에서 하야오 감독은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를 구상했고, 영화 개봉 이후엔 또 한번 찾아와 여독을 풀었다고 한다. 이와카와씨는 그런 인연을 소개하면서 “남편이 만들었다”며 작은 열쇠고리를 선물로 줬다.


센삐로다키 폭포 근처에는 작은 기념품을 만들어 파는 한 프랑스 노신사가 있다. 그 역시 흥미로운 사람이었다. 도쿄에서 야쿠시마로 와서 산지가 벌써 십 여년이 넘었다고 했다. 일본어를 너무 유창하게 구사해 적잖이 놀랐다.


안보강 다리 근처에 있는 카페 ‘니나’의 젊은 주인장도 좋았다. 직접 낚시를 해서 잡아온 고기들을 사시미로 내준다. 지인과 함께 들렀는데, 야쿠시마산 게찜은 유달리 맛있었다. 야쿠시마 특산품인 미다케 소주를 곁들여 잠시 여흥을 즐겼다.


아 참, 3일 밤을 묵고 자동차까지 빌려준 민박집 ‘야쿠스기소우’의 여사장님도 잊을 수 없다. 푸근한 인상의 여장부 스타일이다. ‘야쿠스기소우’는 미야노우라다케 마을 강가에 있다. 테라스에서 내려다 보면, 높은 산을 타고 강에 내려 앉는 저녁 노을이 정말 장관이다.


지난 여름 두 차례 야쿠시마를 다녀왔다. 그 결과물인 4편의 야쿠시마 연재를 이제 마무리한다. 여전히 내 눈엔 '푸른 이끼의 섬'이 아른거린다. 다시 그곳에 갈 수 있을까. 끝.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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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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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하의 친척에 측근에 개국공신인데 왜 그러셨대? 허저 : 암만 그래봐야 저 사람은 방면 맡는 바깥사람이고 난 전하의 신변경호를 맡았는데 내가 왜 전하의 허락없이 외부인을 만납니까... 이 에피소드가 조조의 귀에 들어가자 안그래도 이쁨받던 허저는 더욱 조조의 사랑을 받았다. 허저와 조조는 아무래도 주군과 호위관이다보니 서로 붙어있는 시간이 길었는데, 허저는 종종 옷매무새가 허술하거나 한 경우 조조가 이를 먼저 보면 직접 옷매를 다시 챙겨주기도 했고, 조조가 식사시에 조조곁에 서서 조조의 식사를 지켜보는 허저에게 같이 식사를 권해서 허저가 응하면 함께 먹기도 했다. 허저는 자신이 좋아하는 찬이 있으면 응했으나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자신의 임무를 수행해야 한다며 응하지 않았다.... 허저가 체격이 체격인지라 허저가 타는 말은 금새 지쳐 여러 마리를 번갈며 탔는데, 허저가 탈 말은 조조가 직접 선별해 골라줬고 경우에 따라 자신이 타고 있는 말과 바꿔타기도 했는데, 주군이 신하와 말을 바꿔 타는 것은 당시 "말"이라는 동물의 군사적, 물질적 가치를 고려하면 대단한 호의를 베푸는 것이였다. 게다가 당시의 조조가 타는 말이 예삿말들도 아니였고.. 이는 마치 내가 새로 간 회사 사장님이 외근 나가며 업무용 레이를 타는 내게 자신의 아우디 Q7을 타고 가라며 바꿔 주는 것이나 진배 없는 것이다. 조조의 경호실장이면 거의 대부분 조조의 가장 근처에 있다보니 전장에 나가 지휘를 맡은 적이 드물지만 없진 않다. 양에서의 장수와 전투 당시 돌격대를 맡아 돌진하여 적의 기세를 꺾었던 적도 있고, 관도대전과 원소 사후, 원소의 잔당들을 정벌하는 중 업군 포위전 당시에도 소수나마 병력을 이끌고 나선 적 있다. 하지만 사람을 적재적소에 잘 쓰는 조조가 그를 호위관으로만 거의 중용하고 전장에 내보낸 횟수가 다섯 손에 꼽히는 걸 보면 통솔능력은 별 볼일 없었던 것 같다. 삼국지연의를 보면 종종 허저의 일기토 내용들이 나오던데 올뻥이다. 허저는 누군가와 1vs1로 전투에서 맞붙은 적이 없다. 전위와 조조의 경호패키지로 묶음처리 되기도 하지만, 놀랍게도 둘은 연의에서처럼 서로 맞붙은 적도 없고 심지어 둘이 얼굴을 마주한 적조차 없다. 왜냐 하면 실제 역사에서는 전위가 이미 사망한 후에 허저가 조조휘하에 들어갔기 때문이다. 삼국지연의의 내용 및 이를 토대로 캐릭터들의 능력치를 데이터화시킨 코에이의 삼국지 게임 내의 허저 어빌리티만 보면, 왠지 자기 이름이나 쓸 수 있을지.. 1부터 10까지 숫자는 셀 수나 있을런지 싶을 힘 쎈 바보로 그려지지만 절대 그런 사람은 아니였다. 조조에게 임관 전에도 고향에서 도적떼를 상대로, 또 조조에게 임관 하면서도 자신을 따르던 적잖은 무리들이 있었던 점 등으로 봐서 아주 근본도 없는 사람이 아니였고 정사나 위서, 그의 열전 등 어딜 봐도 '허저는 빠가였다'는 식의 언급은 진짜 1도 없다. 다만... 워낙 별 말이 없고, 게다가 이게 좀 치명적인데 허저는 평상시에 입을 약간 벌린 눈도 촛점없는 멍한 어딜 보는지 모를 표정을 짓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바로 이 표정 탓에 그의 별명은 "호치(虎癡)"가 된 것.. 저 허저의 유명한 닉네임 호치의 호는 범 호, 다시 말해 전장이나 임무수행 및 조조곁을 지킬 때의 그의 호랑이같은 무시무시한 기세를 뜻하는 것이지만 문제는 뒤에 붙은 저 '어리석을 치(癡)' 인데... 저 치가 바로 허저의 그런 평상시 표정 탓에 붙은 것이였다. 그치만 허저입장에서 이것도 좀 억울한게, 조조곁에 있거나 전장이거나 뭐 그러면 모르지만 진짜 아무일없는 평상시에 조조가 내전에서 업무 보거나 천자를 알현, 또는 자거나 등등 그럴 때의 허저는 혼자 긴 시간을 문앞에 서 있어야 하는데 이 당시에 무슨 스마트폰이 있어서 허저가 유튜브나 빙글을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어쨌건 근무시간인데 이어폰끼고 음악 들을 것도 아니고, 진짜 할 수 있는거 없이 서 있는데 누군들 표정이 저리 멍해지지 않았을까 싶다. 그렇다고 영국 왕실근위병들처럼 뭐 교대를 하는 것도 아니였을 것이고.... 당연히 허저는 본인의 저 별명을 싫어했고 위나라 내부에도 감히 허저앞에서 저 별명을 입에 담을 수 있을 힘과 용기를 지닌 자도 없었지만 어쨌건 허저가 기피하던 저 닉네임은 훗날... 동관에서 마초, 한수와 마주할 때 마초가 바로 달려가 조조를 개 때려잡듯 하려다 조조가 데려간 허저의 비쥬얼을 보고 짐짓 쫄은 마초가 "조공에게는 호후(虎侯)가 있다는데, 어디에 있습니까?" 라고 말해준 후부터 "호후(虎侯)"로 격상된다. 삼국지연의에서 업을 함락 후, 깐죽대는 허유를 빡친 허저가 죽이는 씬이 나오지만 허구다. 저런 일 자체가 없었고, 허저의 성격상 단지 저렇게 깝친다고 하여 아무나 썽큼썽큼 죽이는 스타일이 아니였다. 일에 있어서는 더할나위없이 용맹무쌍했지만 평상시도 거칠고 격한 그런 사람이 아니였다. 평소에는 온순하니 풀 뜯지만 맹수가 다가오면 날뛰는 아프리카 물소같은 타입이였던듯 싶다. 조조가 죽자 탈진하여 쓰러질만큼 울부짖었으며 어찌나 심신이 상할만큼 슬퍼했는지 각혈까지 했다고 한다... 조비 또한 허저를 근위로 삼았는데, 조조가 허저를 자신의 최측에서 경호하는 소수의 경호대를 이끄는 경호실장역을 시켰다면, 조비는 황실전체를 경호하는 황실근위대를 이끄는 근위대장같은 직책을 맡겼다. 허저는 생몰연대가 명확히 사료에 나와있진 않지만 조조의 죽음에 이어 그 아들 조비의 죽음도 봤다. 물론, 조비가 그리 오래 못산 탓도 있으나 아무튼 주군부자의 죽음을 모두 겪고 조조의 손자인 조예대에 사망한다. 여러 정황들 볼 때, 조예재위기에는 사실상 은퇴상태로서 원로예우를 받았던거 같고, 조예 재위 후 그리 오래지 않아서 사망한 듯. 사인에 대한 별 다른 언급도 없고 정확한 나이는 알 수 없으나 사망당시의 허저나이가 상당한 고령이였음으로 추정되기에 그냥 노환에 의한 병사였을 듯 싶다. 사실... 주군의 최측근 경호는 그리 공을 세우기가 쉽지 않은 자리다. 그럼에도 허저를 아끼던 조조는 그런 허저가 혹여라도 기가 죽을까, 늘 그가 있음에 자신이 마음 편할 수 있고 이것이야말로 큰 공이라며 그를 치켰고. 가끔은 허저를 전장에도 내보냈다. 허저가 근위대장임에도 몇 차례 전투에 나섰고 비록 몇 차례 안된다고는 해도 어쨌건 모두 승리했는데 추측해 보건데 이는 조조가 허저를 장수로서의 공을 세울 수 있도록 별 다른 지휘통솔능력이 없어 대병을 이끌기는 무리인 그가 소수병력을 이끌고나마 충분히 승리할 법한 전투에 가려 보내 허저로 하여금 주워 먹게끔 했던 배려로 보여진다. 허저 또한 박식똘똘이까진 아니여도 자신을 아끼는 그런 조조의 마음씀씀이를 캐치할 정도는 충분히 되었고 조조를 깊게 공경해 따랐으며 심지어 조조가 그에게 휴식을 명해도 허저는 이를 따르지 않고 거의 자는 시간을 제하면 조조의 지근거리에서 머물렀다. 삼국지 등장인물들 중 통틀어도 손 꼽힐만한 막강한 피지컬과 그에 따른 용맹과 괴력을 겸한 그가 전장을 휘젓고 싶지 않았을리가 없다. 하루종일 자신의 엄청난 신체를 서 있는데 써야함이 실로 괴로웠거나 자괴감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는 오로지 책임감과 충성으로 묵묵히 해냈다. 비록 자신의 능력과 적성에 맞지 않는 일을 부여받더라도 이를 최선 다해 충실히 해내는 프로패셔널. 그렇기에 조조는 늘 자신 곁에 시립해 서 있는 그를 대함에 있어, 외지의 수만 병력을 이끌고 요충지를 지키는 사령관, 전장에서 대규모 전투를 승리한 개선장군들에 못지 않게 대했던 것이다. 어찌보면 허저 본인도 그런 자신의 성품 덕에 그 험한 난세에서 난전이나 내부적 정치싸움에 휘말림없이 내내 인정받다 천수를 누렸는지도 모르겠다. 다들 즐거운 주말 잘 보내시고 사전투표 안하신 분들은 돌아오는 화요일에 꼭! 잊지 마시고 투표 하시길 바랍니다ㅎ 자신의 정치적 신념과 대의명분에 입각해 각자가 생각하는 최선의 후보분께 소중한 한 표를 반드시 행사하세요! 사려깊은 문후보님, 구여우신 홍후보님, 총명하신 안후보님, 기개있는 유후보님, 혁신적인 심후보님 모두 화이팅 하시길. 그리고 누가 대권 잡건 부디 국가와 국민을 진정으로 위하는 참지도자 되길 기원합니다... 얼마나 좋은 기회입니까ㅎ 무슨업적도 필요없이, 앞 둘이 워낙 10년 깽판이라 평타만 쳐도 성군소리 들을 각인데...
아사히 맥주를 위기에서 구한 남자①
간단한 질문 하나로 시작해 보자. 교세라(京セラ)의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 명예회장, 일본전산(日本電産)의 나가모리 시게노부(永守重信) 회장, 아사히맥주의 무라이 쓰토무(村井勉) 전 회장은 한 가지 공통점을 갖고 있다. 이나모리 가즈오와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은 많이 알려져 있지만, 무라이 쓰토무 전 회장의 이름은 다소 생소할 지도 모르겠다. 결론부터 말하면 세 사람 모두 기업 재생에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들이다. ‘아베마 경영’으로 유명한 이나모리 가즈오 회장은 일본기업재생기구(ETIC)의 요청으로 2010년 파산을 신청한 JAL(일본항공)을 3년 만에 우량기업으로 부활시켰다. 그에게는 ‘경영의 신’, ‘기업 회생의 신’이라는 수식어가 따라 다닌다. ‘죽어가는 회사도 살려 낸다’는 나가모리 시게노부 회장은 M&A계의 전설과도 같은 인물이다. 그런 그에겐 ‘기업 재생의 신’이라는 별명이 따라 다닌다. 그럼, 아사히 맥주의 무라이 쓰토무 전 회장은 어떨까? 그는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인 2008년 10월 31일, 세상을 떠났다. 아사히신문은 그의 부음을 전하면서 <기업 ‘재건옥’이라는 별명을 지닌, 무라이 쓰토무씨가 사망했다>(企業再建屋の異名, 村井勉さん死去)고 전했다. 아사히신문의 보도처럼, 무라이 쓰토무에겐 ‘사이켄야’(再建屋)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사이켄야는 ‘재건 전문가’쯤으로 해석하면 된다. 그에게 이런 별명이 생긴 건, 스미토모(住友)은행 (현재의 미쓰이 스미토모 은행) 중역으로 일하던 현역 시절, 경영 위기에 빠진 기업들을 잇달아 재생시키는 수완을 발휘했기 때문이다. 주거래은행의 무라이 쓰토무가 구원투수로 투입된 대표적인 회사는 스포츠카 메이커인 동양공업(현 마쓰다)과 맥주기업 아사히다. 자동차 마니아라면, 일본 최고의 스포츠카로 평가받는 ‘마쓰다 RX-7’를 잘 알 것이다. 이 스포츠카를 만든 회사의 전신이 동양공업이다. 무라이 쓰토무는 1976년 스미토모 상무 시절, 경영 부진에 빠진 동양공업의 대표이사 부사장으로 파견돼 재건에 올인했다. 그는 이후 스미토모에 복귀해 부행장직을 맡았다. 그가 장기간 실적 부진을 겪던 아사히 맥주 사장에 취임한 건 1982년이었다. 당시 아사히맥주는 최대의 위기를 맞고 있었다. 경영잡지 ‘기업가구락부’(kigyoka.com)라는 매체를 좀 참고해 보자. 이 잡지는 1999년 12월호에서 ‘아사히 맥주 기적의 진실’(アサヒビール奇跡の真実)이라는 제목의 기고문을 실었다. 기고자는 아사히 맥주 명예고문을 지낸 나카죠 다카노리(中條高徳:1927~2014)다. 그는 당시 잡지에 이렇게 썼다. <1982년, 아사히 맥주는 난공불락인 기린맥주 타도를 향해 점유율 탈환에 나섰다. 당시 챔피언 기린의 점유율은 60% 이상이었다. 한편 아사히는 10%미만까지 떨어져, 후발주자인 산토리에도 밀리는 침몰 직전의 상황이었다.> (원문:1982年、アサヒビールは難攻不落といわれたキリンビール打倒に向けて、シェア奪還を目指した。当時、王者キリンのシェアは60%強。一方アサヒは10%弱まで落ち込み、新参のサントリーにも抜かれそうな、沈没寸前の状況にあった。) <2편에 계속>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쇼핑난민’이라는 말을 처음 만든 이 사람
일본에서 ‘쇼핑난민’(買い物難民 또는 買物難民)이 급속하게 증가하고 있다. 쇼핑난민은 거동이 어려워 생필품을 사거나 장보기가 어려운 고령인구를 말한다. 쇼핑난민 외에 쇼핑약자(買い物弱者 또는 買物弱者), 쇼핑빈곤자(買い物困難者 또는 買物困難者)라는 말도 쓰인다. 쇼핑난민이라는 말은 일본에서 언제 생겼을까.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인 2008년 9월 책이 한 권 출간됐다. ‘쇼핑난민-또 하나의 노인 문제’(買物難民-もうひとつの高齢者問題)라는 제목의 책이다. 저자는 오비히로(帯広) 축산대학의 스기타 사토시(杉田聡) 교수.(오비히로 축산대학은 홋카이도 오비히로 시에 있다) 스기타 사토시 교수는 책에서 ‘두부 한 모 조차 사기에도 힘겨운’ 자신의 어머니 체험을 묘사했다. 쇼핑난민이라는 말의 출처를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기 위해 우베프런티어대학(宇部フロンティア大学)의 사토 준이치(佐藤祐一) 교수의 논문을 참고했다. (우베프런티어대학은 야마구치현 우베(宇部)시에 있다) 2010년 발표된 이 논문의 제목은 ‘지역사회와 구매행동’(地域社会と買い物行動). 사토 준이치 교수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쇼핑난민은 오비히로(帯広) 축산대학 교수 스기타 사토시(杉田聡)씨가 명명한 말로, 식료품과 생활필수품 쇼핑에 곤란을 겪는 사람들을 가리킨다.> (원문: 買物難民とは 帯広畜産大学教授の杉田聡氏により 名づけられた言葉で, ‘食料品や生活必需品の 買い物に困る人々’の ことを 指す。) 사토 준이치 교수는 논문에서 “요미우리신문이 2009년 6월 5~12일에 걸쳐 쇼핑난민에 대한 특집기사를 싣고 각 지역의 다양한 상황을 보도했다”고 썼다. 그는 “쇼핑난민이라는 단어가 위화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어 TV 등에서는 쇼핑약자(買物弱者)라는 말로 바꾸고 있다“고 했다. 일본에는 쇼핑난민이 얼마나 될까. 일본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일본의 65세 이상 인구 4명 중 1명이 이미 쇼핑난민’이라고 한다. 농림수산성의 농림수산정책연구소는 지난 6월 ‘식료품 접근이 곤란한 인구 추계’(食料品アクセス困難人口の推計)를 발표했다. 연구소는 “가장 가까운 소매점까지 직선거리로 500미터 이상 떨어져 있고, 자동차를 사용할 수 없는 65세 이상의 사람은 2015년 기준으로 전국에 824만6000여 명”이며 “이는 2005년에 비해 약 21.6% 증가한 수치”라고 했다. 신체만 문제가 되는 것은 아니다. 소규모 상점이 줄면서 쇼핑할 곳이 없는 경우도 많다. 소매업의 한 관계자는 시사매체 주간아사히(11월 9일 발매 예정)에 “노인이 걸어서 쇼핑 갈 가게가 점점 사라지고 있다”며 “전국 어디서나 쇼핑난민이 생겨 날 위기에 직면하고 있다”(高齢者が歩いて買い物に行ける店が、どんどん消えています。全国どこでも買い物難民が生まれる危機に直面しているのです。)고 말했다. 쇼핑난민은 비단 농촌 지역만의 문제가 아니다. 도쿄나 오사카 등 대도시 지역도 심각한 수준까지 이르렀다. 농림수산성에 따르면, 전국 쇼핑난민(824만 6000 명) 중 지방권은 447만 명, 도쿄, 오사카, 나고야 등 3대 도시권에선 377만6000 명에 달한다. 이는 2005년과 비교해 보면 큰 차이가 난다. 지방권은 416만 3000 명(2005년)에서 10년 새 30만7000 명이 늘어났다. 비율로 보면 7.4 % 증가에 불과하다. 하지만 3대 도시권은 262만1000 명(2005년)에서 10년 만에 115만 5000명이나 불어났다. 44.1% 대폭 증가세를 보인 것이다. 저출산, 고령화가 불러오는 쇼핑난민은 한국에도 이미 들이닥친 심각한 사회문제임에 틀림없다. <김재현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장합 준애 (張郃 儁乂) A.D.?~231
누차 말했듯... 픽션(허구)이 가미된 "소설"인 삼국지연의는 여러 인물들을 영웅으로 만들기도 했지만, 반면 그네들의 영웅화 ~ 신격화를 위해 숱한 이들을 엿 먹이기도 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오늘도 역사범죄자 나관중에 의해 너프 당한 또 한 명의 피해자, "장합"에 대해 다뤄 보기로..! 장합은 삼국지정사, 위의 역사록인 위지, 후한의 역사록인 후한서, 본인의 열전인 위서의 "장악우장서전(張樂于張徐傳)"에도 생년기록이 없어서 정확한 사망 당시의 연령을 알 수는 없지만 원소에게서 조조 휘하로 들어갈 당시 대략... 40대쯤으로 추정하고 있다. 덧붙이자면 저 '장악우장서전'은 조조가 자신이 공을 이루는데 그 기여가 으뜸이라며 추켜세운 다섯 장수인, 장료, 악진, 우금, 장합, 서황을 묶어 편찬된 열전이다. 저 다섯을 일컬어 당시에 "오자양장(五子良将)"이라 불렀고, 촉한의 "오호대장군(五虎大將軍)"과 살짝 비슷한 뉘앙스인데, 오호대장군이란 별칭은 그 때는 없었고 후대 사람들이 붙인데 비해 저 오자양장은 당시 사람들이 붙인 것이다. 그래서 엄밀히 말해, 오호대장군같은 저 시절의 '드림팀' 또는 '어벤져스' 느낌의 패키징은 위의 다섯 장수가 원조다. 고향은 당시로는 기주의 하간군 막현(오늘날 중국 허베이성 중남부 인근)이라는 그때 치고도 꽤나 궁한 시골 작은 마을 출신이였다. 참고로 진짜 중국이 겁나 드넓긴 드넓은게... 삼국지 게임 내의 맵에서 기주는 작은 주로 나오나, 조운의 고향인 기주 상산군과 장합의 고향인 기주 하간군의 거리는 무려 166km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대전까지의 거리보다 멀다..ㅎㄷㄷ 만화, 게임, 책, 기타 여러 미디어물들을 봐도 다른 네임드급 인물들과는 달리, 외형 이미지가 일관적이지 못한 편인데... 이는 사료 어디에도 장합의 외모 묘사가 일언반구도 없고 그를 그린 그림조차 몇 없는데다, 그것들 마저 묘사가 모두 중구난방이다보니 도무지 이미지 통일이 안된 것. 다만, 장합의 리즈시절이 펼쳐지는 것이 조조에게 투항 이후인데 그 당시의 추정 연령이 위의 언급처럼 40대로 보고, 조조세력 합류 후부터도 거의 30년 가까운 세월을 활약하다 전장에서 전사한만큼, 사실상 각종 미디어에서 묘사되는 '젊은'느낌의 장수로 표현하는 것은 어색한 감이 없지 않다. 장합은 조조 휘하 장수들 중 가장 많은 전장에 참전했고, 위의 역사를 통틀어도 가장 전공이 많은 장수였으며, 주/부장을 가리지 않고 크고 작은 여러 숱한 전투에서 닳고 닳은 백전노장이였다. 그러다보니 큰 전장의 주요한 임무는 물론, 작은 전장의 자잘한 임무까지 가림없이 두루 맡았고 야구로 치면 4~5선발과 롱릴리프, 경우에 따라 급하면 불펜으로까지 던지면서 하루 걸러 등판하며 혹사 당하는 노예투수 비슷한 포지션의 장수였다. 그 깐깐한 조조가, 또 당시 휘하에 숱한 명장, 용장, 맹장들이 수두룩 빽빽 채이고 밟히고 널렸던 위에서 저토록이나 빈번히 굴렸다는건 그만큼 능력 있기에 믿고 쓸만큼 훌륭한 장수였다는 증거다. 심지어 백발노인 되어 집에서 손주들 재롱이나 보고 탑골공원가서 장기두며 야쿠르트나 얻어 마실 나이에 전장에서 한창 싸우다 전사하니... 죽어 눈감는 그 순간까지 위의 군밀레에 갈려나간 군돌이였다. 삼국지연의나, 연의를 바탕으로 데이터베이스를 구축한 각종 미디어물들을 보면 장합은 그냥 본인의 무예와 전장에서 구르며 익힌 짬밥으로 밀어붙이는 단순한 장수로 그려지나... 위에서 언급하듯, 저렇게 숱한 전장을 누볐고 또 깐깐깐돌 조조에게 신임받으며 주장으로도 쓰인만큼 사실 전략적 대국안도 상당히 뛰어난 "지략을 갖춘" 장수였다. 본래 기주의 군소 군주인 한복 휘하에 있다가 한복이 패망하자 원소의 세력에 속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전장의 시국을 살핀 후 원소나 원소의 책사들에게 여러 전략들을 입안 했으나 거의 다 씹혔다.... 원소는 사람 자체가 선입견, 편견 이런 게 가득한 고지식하고 융통성 없는데다 또 고집은 있는 전형적 꼰대인 우리 회사 김대현 이사님같은 스타일이라 그저 야전에서 뒹구는 장수인 장합의 계책을 귀 담아 들어주질 않았고, 사공이 많으면 배가 산 정상에 올라 야호를 외치는 전형적 예였던 당시 원소의 책사들 역시, 지들끼리도 서로 내가 옳네, 내가 맞네 하기도 바빠 죽겠는데 장합까지 거기 껴서 자기 의견을 제출하니 고스란히 즈려밟아 무시했다. 이렇듯, 자기 아이디어와 의견이 매번 밟히던 끝에, 원소 VS 조조의 관도대전에서도 자기가 낸 계책이 원소의 책사 중 한 명인 곽도에게 씹혔고... 그 전투에서 결국 패하며 장합이 옳았음이 드러나자 곽도가 원소에게 장합을 모함하였으며, 이에 겁 먹은 장합은 결국 원소군 내에서 베프면서 역시 원소의 아쉬운 대우에 불만가득하던 '고람'과 함께 원소군의 망루에 불을 지르고 투항한다. 역사기록에는 이 "방화 후 이적"이 관도대전에서 원소의 패배 전인지, 후인지가 안나와 있으나 어쨌건 장합과 고람이 불 싸지른 망루는 당시로는 적군의 동태를 살피는 '레이더'역할을 하는 중요한 군사시설이였기에 이를 없앤 것 자체는 어쨌건 원소군에게 치명적이긴 했다. 삼국 정립 이후에는 주로 대촉전선에 투입되었고 이유는 조조가 양쯔강을 끼고 있던데다 북진의사가 거의 없는 손권에 비해, 명목상 "한실부흥" 내세워 줄기차게 자신들에 덤벼 오는 유비세력을 훨씬 더 위협적으로 여겼기 때문. 그때 손권과 대립하는 동부전선은 장료와 악진으로 묶어 두고 가용 가능한 네임드 장수들은 대부분 대촉전선에 투입되던 시기였다. 장합은 유비도, 유비 사후의 제갈량도 상당히 껄끄러워 하던 장수였다. 대촉전선의 총사령관 역할을 하던 하후연과 조홍보다 장합의 위치는 아래였으나 이는 위에서의 커리어, 또 하후, 조 두 장수는 조조와의 친인척 관계인지라 그럴 뿐... 장수로서의 자질은 저 둘을 뛰어넘던 장합이였으며 그래서인지 조홍과 하후연은 장합을 꽤나 견제했다. 아무리 자신들의 커리어가 앞서고 조조와 혈족이긴 하다지만 철저히 능력 위주로 사람을 쓰던 조조는 언제던 장합이 더 유능하다 드러나면 속절없이 자기들보다 장합이 더 상전될 가능성이 농후했기 때문... 제갈량의 1차 북벌 당시, 이를 막아낸 위방어군의 총사령관은 연의와 달리 사마의가 아닌 장합이였고, 4차 북벌 때, 목문도에서 유인책 쓰며 거짓 후퇴하는 촉군을 사마의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뒤쫓자며 바득바득 우기고 쫓아가다 기어이 전사하는 연의와 역시 또 달리... 당시 제갈량의 흉계가 의심된다며 추격을 만류하던건 오히려 장합이요, 이에 대해 군령까지 내세워 제갈량을 추격할 것을 밀어붙여 장합을 사지로 내몬게 사마의였다. 이에 대해서도 또 제기되는 설이.... 당시 장합과 사마의는 위의 대촉전선에서 은연중에 경쟁관계였었다. 쟁쟁한 커리어의 백전노장 장합, 그리고 위 군부 신진세력의 주축이던 사마의는 서로 견제하던 관계였으며 당시 직급상 사마의가 높았지만 그렇다해도 사마의에게 장합은 결코 직위로 쉽게 누를 수 있는 상대가 아니였고.... 그런 장합을 이이제이 방식으로 간접 제거 하고자 제갈량의 계책을 눈치채고도 등 떠밀었다는 설이다. 연의에서의 묘사처럼 빗발치는 화살에 벌집이 되어 바로 죽기보다 화살을 여기저기 맞고 후퇴하던 중 과다출혈에 의한 쇼크사였다. 기록에는 허벅지에 맞은 화살로 인한 과다출혈이 결정적 사인이라 나와 있다. 참고로 허벅지는 대동맥을 비롯 여러 혈관 뭉치들이 지나는 곳이라 흉기에 잘못 찔리면 지혈도 힘들만큼 과다출혈이 발생하여, 옛날 야쿠자나 조폭들도 서로 칼부림 당시 오히려 방어하기 좋아 찌르기 여의치 않은 복부나 흉부보다 허벅지를 많이 노렸다고 한다. 동물을 좋아했는지, 직접 먹이를 주며 키우던 개가 있었다는 설이 있고 자신이 타던 말이 힘들까봐 행군하는 경우에는 중간중간 말에서 내려 걷기도 했다는 이야기가 있다.(사료기록은 아니다.) 원소 휘하에서는 고람과만 거의 이야기를 나눴으나 조조에게 투항 후 각기 다른 부대에 배치되며 연이 끊어진 듯... 여러 장수들과 열전이 묶음으로 나온 것만 봐도 알 수 있듯, 신상과 일상에 대한 기록이 그닥 없다. 쉽게 말해 위의 장수로서의 공적인 기록은 좀 있지만 인간 장합으로서의 사적인 기록이 많지 않다.. 장합이 커리어나 능력에 비해 그닥 인기 많은 인물은 아니다보니 왠지 이번편은 반응이 별로일거 같은 좀 불길한 예감이... T-T 그래도 많은 관심과 격려를 부탁 드린다는 ;;;
요시다 쇼인 '최인아 책방'을 가다
제일기획 부사장을 지낸 최인아씨가 자신의 이름을 내걸고 강남 한 복판(지하철 선릉역 인근)에 ‘최인아책방’을 오픈한 건 2016년 8월이다. 어른 키 3배쯤 되는 높은 책장, 서점의 시원시원한 레이아웃, 조용하게 책을 읽으며 차를 마실 수 있는 공간까지. 강남에서 알음알음 소문이 나면서 핫한 문화공간으로 자리 잡은지 오래다. 그동안 꽤나 알려진 작가들의 북콘서트(강의)가 이곳에서 열렸다. 그런데 1월 22일, 무명의 젊은 작가가 이 공간의 주인공이 됐다. 누굴까. 그를 3개월 만에 다시 만났다. 지난해 10월 12일 서울 종로구 삼청동의 한 한옥 카페에서 그와 마주 앉았었다. 그는 막 출간된 자신의 책에 자부심을 느끼며 조금은 상기된 표정의 육사(67기) 출신 청년이었다. 2016년 2월 육군 대위로 전역한 김세진(31)씨. 그가 세상에 내놓은 책은 ‘요시다 쇼인, 시대를 반역하다’(호밀밭출판사)이다. 요시다 쇼인은 아베 총리가 가장 존경하는 인물로, 이토 히로부미 등 일본 근대화 추진자들의 사상적 스승이다. 일본의 한반도 진출 야욕 이른바 ‘정한론’의 사상적 뿌리를 제공한 인물이기도 하다. 2시간 인터뷰(기사 하단 관련기사 참고) 내내 줄곧 듣기만 했었다. 할 말이 많은 청년이었다. 그는 요시다 쇼인이라는 인물에 대한 책 출간을 두고 “내가 할 일이었다”고 말했다. 그는 미래혁신학교 건명원(建明苑)에서 인문학을 공부하면서 그야말로 ‘맨땅에 헤딩하기’식으로 책을 썼다. 일본어도 전혀 모른채 접근했고, 현지(야마구치현 하기시)에서 요시다 쇼인의 관련 자료를 ‘싹쓸이’해 왔다. 장교 아버지를 둔 청년 장교 출신이었기에 그랬을까. 당돌하고 저돌적인 면을 보았다. 그런 김세진씨가 1월 22일 ‘최인아책방’에서 북콘서트를 가졌다. 저녁 7시 30분이 되자 강의를 들으려는 사람들이 속속 모여들었다. 책방의 한 쪽에 강의 공간이 자리하고 있다. 참석자는 20여 명. 먼저 책방지기인 최인아 대표가 말문을 열었다. “사실, 저자가 누구인지 궁금했다”. 내공 있는 작가들과 교분이 많은 최대표지만 그도 낯선 이름에 호기심이 생겼던 듯하다. “전공자도, 학자도 아닌 젊은이가 뜨거운 마음으로 뛰어서 쓴 책인 것 같다”. 책에 대한 최대표의 짧은 평가다. 그는 “그런 뜨거운 마음을 가진 분(작가)이라면 우리가 함께 공유해도 되지 않을까 싶어서 자리를 마련하게 됐다”고 말했다. 김세진 작가는 일본 역사를 축약해서 소개한...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브리지스톤 창업가와 총리 가문의 '결혼 동맹'
하토야마 지로 자민당 중의원, 일본 국회의원 부자 1위 타이어회사 브리지스톤 창업주의 장녀가 그의 할머니 총리 4번 지낸 하토야마(鳩山) 가문-브리지스톤 인연 하토야마 지로(鳩山二郎, 41) 자민당 중의원. 그를 아는 한국인은 많지 않다. 그런 그가 일본 국회의원 부자 1위에 올랐다. 상위 1~9위까지 자민당 의원이 독점했다. 일본 중,참의원은 8일, 국회의원 698명(중의원 457명+참의원 241명)의 재산내역 보고서를 공개했다. 일본 국회의원 자산공개법에 근거, 1년 이상 국회의원 적(籍)을 둔 의원은 재산 공개 의무가 있다. 일본 언론에 따르면, 하토야마 지로 의원의 재산은 17억 4490만엔(약 190억원)으로 전해졌다. 하토야먀 지로 의원이 이렇게 돈이 많은 이유는 뭘까. 이야기는 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2013년 2월 11일, 일본 타이어회사 브리지스톤 창업주의 장녀가 세상을 떠났다. 하토야마 야스코(鳩山安子, 옛날 이름은 이시바시 야스코)였다. 당시 90세. 야스코의 아버지는 브리지스톤을 일군 이시바시 쇼지로(石橋正二郎)다. 기업가 쇼지로는 1942년 딸 야스코를 정치인 가문에 시집 보냈다. 쇼지로의 사돈이 된 사람은 정계의 거물인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 1883~1959). 자민당 초대 총재를 맡았던 하토야마 이치로는 52,53,54대 일본 총리를 지낸 인물이다. 그렇게 정재계의 유력 가문이 결합했다. 이시바시 쇼지로는 하토야마 이치로의 아들 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 威一郎:1918~1993)를 사위로 얻게 되었다. 이이치로 역시 외상(외무대신)을 지내는 등 정치 가문의 경력을 이어갔다. 야스코-이이치로 부부는 슬하에 정치인 아들을 둘 뒀다. 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와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 1948~2016)다. 하토야마 유키오? 맞다. 한국에도 자주 방문하고, 우리가 잘 알고 있는 93대 총리를 지낸 이다. 하토야마 유키오의 동생 하토야마 구니오는 중의원 13선에 법무대신과 총무대신 등을 역임했다. 하토야마 유키오와 구니오의 모친 야스코는 아버지 이시바시 쇼지로(1976년 사망)로부터 100억엔 이상의 브리지스톤 주식을 물려받았다. 그런 야스코는 생전에 두 아들(유키오, 구니오)에게 각각 42억엔 상당을 증여했다고 한다. 이번에 최고 부자 의원에 오른 하토야마 지로는 이 하토야마 구니오의 아들이다. 총리를 지낸 거물 정치인을 큰아버지로 뒀고, 브리지스톤 창업주의 장녀를 할머니로 둔 ‘금수저’인 것이다. 1979년생인 하토야마 지로는 중의원 2선 째다. 후쿠오카현 오카와(大川) 시장을 지낸 그는 아버지(하토야먀 구니오)가 사망한 후 지역구(후쿠오카 6구)에서 치러진 보궐선거(2016년 6월)에서 중의원 배지를 처음 달았다. 이후 2017년 10월 치러진 제48회 중의원 의원 총선거에서 재선했다. 아사히신문은 8일 “하토야마 지로의 재산은 아버지로부터 상속받은 주식 매각소득이 16억엔에 달한다”고 전했다. 하토야마 이치로(鳩山一郎)~하토야마 이이치로(鳩山 威一郎)~하토야마 유키오(鳩山由紀夫), 하토야마 구니오(鳩山邦夫)~하토야마 지로(鳩山二郎)로 이어지는 하토야마 가문은 이렇게 총리를 4번 지낸 일본의 대표적인 정치 명문가다. 그 명성은 결코 아베 총리 집안에 뒤지지 않는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23 ..................... ᐅ재팬올의 ‘후원금 친구’가 되어주세요! 재팬올에 대한 후원금은 차후 백페이(backpay) 방식으로 원금을 다시 돌려드립니다. 일종의 작은 투자입니다. http://www.japanoll.com/com/com-4.htm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CEO 열전/ 닛산의 쿠데타?...곤의 몰락①
20년에 가까운 장기 집권이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위기에 빠진 일본 닛산자동차를 부활시켜 ‘기업회생 예술가’(Turnaround Artist)라는 별명이 붙었던 카를로스 곤(Carlos Ghosn‧63) 회장. 그는 소득 허위 신고 등 금융상품거래법 위반 혐의로 도쿄지검 특수부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닛산 자동차가 조세회피처 회사에 투자 자금을 옮기고, 곤 회장의 자택용 물품을 구매했다"는 말도 흘러 나온다. "닛산 내부에서 특수부의 칼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켰고, 특수부도 이에 가담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1999년 닛산 개혁의 해결사로 일본 땅을 밟았던 그는 현재 닛산, 르노, 미쓰비시(三菱)자동차 3사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이번 체포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며 ‘곤 사마(樣)’로 불렸던 곤 회장은 이제 불명예 퇴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재팬올이 그의 일본 진출기를 되돌아본다. 아래 기사는 국내에 번역 출간된 ᐃ‘카를로스 곤, 변화와 개혁으로 이끄는 성공 경영’(오토미 히로야스 저, 은미경 옮김, 삼호 미디어, 2002년) ᐃ‘기적을 만드는 카를로스 곤의 파워 리더십’(이타가키 에켄 저, 강선중 옮김, 더난출판, 2002년) ᐃ‘카를로스 곤 효과’ (미구엘 리바스 마이카으므 저, 김현모 옮김, 일신서적, 2008년) 등 서적과 일본 언론들 보도를 참고로 작성했다. 1. 왜 체포됐나?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미쓰비시 회장이 500억 원의 소득 신고를 누락한 혐의로 ...<김재현 기자> <기사 더보기 ...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 >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야쿠시마 방문기③/ 이끼로 도배된 초록숲
<2편에서 계속> 야쿠시마 여행의 묘미는 ‘숲 트레킹’이다. 그 숲을 제대로 보려면 야쿠스기랜드, 시라타니운스이계곡, 조몬스기 코스 등 세 가지를 다 보는 게 좋다. 야쿠스기랜드에서는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를,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의 배경지인 시라타니운스이계곡에서는 신비함을, 야쿠시마의 상징 조몬스기가 있는 코스에서는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야쿠시마를 두 번 방문하고서야 알았다. 세 코스가 제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역시 비를 피해갈 순 없었다. 시라타니운스이계곡과 조몬스기 코스에선 비옷을 입은 채 우산을 들고 산을 올랐다. 물 먹은 나뭇뿌리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끝장. 단단히 발 아래를 주시하며 걸었다. 시라타니운스이계곡은 녹색 숲을 즐기기엔 그만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이끼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야쿠시마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조몬스기. 예전에는 7200살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과학적 방법으로 실제 측정 해보니 이 할아버지 삼나무의 나이는 2700살 정도란다. 조몬스기를 찾았던 그날도 전망대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신령스러운 삼나무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몬스기 코스는 과거 벌채한 삼나무를 실어 나르던 철길을 2시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왕복 4시간을 꼬박 걸어야 하는 셈. 야쿠스기랜드를 찾은 날은 비 대신 안개를 만났다. 몸은 희뿌연 안개에 젖고, 마음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젖었다. 그것도 충분히 흠뻑. 세 코스를 돌다보면 야쿠시마 원숭이, 사슴과 자주 마주친다. 이 섬에는 ‘사람 2만, 원숭이 2만, 사슴 2만’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모두가 어울려 사는 섬이다. 지인이 민박집에 부탁해 여사장님의 소형차를 빌렸다. 그 차를 타고 이틀 동안 섬을 일주했다. 야쿠시마에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라는 농부시인의 집도 방문했다. 그는 오래전 고인이 됐다. 지금은 그의 아내가 집을 지키고 있지만, 찾아간 날은 70세가 넘은 산세이의 남동생분이 안내를 해줬다. 야쿠시마, 철학, 자연 등에 대해 많은 책을 쓴 산세이의 서재에 들어서자 책 냄새가 코 끝으로 스며들었다. 오래된 흔적들의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주인 없는 서재를 둘러보며 한 개인의 위대함을 다시 느꼈다. 책상 위에 방명록이 있었다. 산세이의 남동생분이 기록을 남겨도 좋다고 했다. 짧게 몇 줄 적었다. 다음 방명록을 쓰는 한국인이 있다면 누군가 내 이름을 볼 것이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인연이 아닐까. 산세이 남동생분의 배웅을 받으며 골짜기를 내려왔다. 한 가지 물음을 안고. ‘우리는 어떤 삶을, 우리는 어떤 인연을 맺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4편에 계속>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닛산은 닛폰산교(日本産業)의 약칭
닛산 자동차는 도요타, 혼다차와 다르게 창업자의 이름을 따지 않았다. 지금의 브랜드명 닛산은 ‘닛폰산교’(日本産業)라는 회사의 약칭이다. 닛산(日産)자동차는 1933년 12월 도바타주물(戶畑鑄物)을 이끌던 아유카와 요시스케(鮎川義介:1880~1967)라는 이가 설립했다. 이때의 이름은 ‘자동차제조주식회사’이다. 1934년 6월, 통칭 닛산으로 불리는 닛폰산교(日本産業)의 전액 출자를 받아 회사 이름을 닛산자동차주식회사로 바꿨다. 아유카와는 어떤 인물이었을까. 도쿄 제국대학 공과 대학을 나온 그는 신분을 속이고 직공으로 일했다. 야마구치 현 야마구치시에서 태어난 그의 집안은 평범하지 않다. 그의 외할머니가 유력 정치인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1836-1915, 조선 주재 공사 역임)의 누나다. 아유카와는 1910년 이노우에의 지원을 받아 도바타주물(현 히타치 금속)을 설립했다. 아유카와는 1928년 ‘구하라 광업’이라는 회사를 인수하면서 이를 바탕으로 ‘닛폰산교’라는 지주회사를 만들었다. 아유카와는 닛폰산교를 중심으로 일본광업, 히타치제작소, 일본수산, 닛산자동차를 거느렸다. 신흥 재벌 닛산콘체른(Konzern)이었다. 닛산콘체른의 중심인 닛폰산교는 1937년 만주국으로 이주해서 만주중공업개발로 이름을 바꾸고, 일본과 만주에 걸쳐 콘체른을 형성하려 했다. 당시 아유카와를 만주를 불러들인 이는 현 아베 총리의 외할아버지인 기시 노부스케(岸信介:1896~1987, 56-57대 총리)였다. 일본 상공성의 유능한 관료였던 기시는 만주국의 산업차장으로 발탁돼 1936년 부임했다. 당시 만주에서 일했던 ...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7 )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④/ 재난과 메이와쿠
메이와쿠 문화는 일본 가정교육의 근간이기도 하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이런 교육은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대중교통 이용 매너 등 공공장소 예절부터 가르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탑승객이 내린 뒤 타기, 버스·지하철 등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않기 등 매우 구체적이다. 초등학교에서도 ‘도덕’ ‘생활’ 등의 과목을 통해 공공장소 예의나 대중교통 이용 예절 교육을 이어간다. 한마디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기조가 강하다. 심지어 일본 부모는 아이에게 몇 달 동안 자기물건 정리하기만 가르치기도 한다. 자기 물건 정리도 안 된다면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생각이다. “수준 높은 질서의식을 갖추려면 꾸준한 반복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게 일본의 가정교육이다. 뿐만 아니라 거리가 정돈이 되고 늘 깨끗하게 청소 되어 있는 것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인식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집, 혹은 건물 앞을 스스로 치우기도 한다. 이러한 가정교육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지난 2011년 대지진 참사에서 일본 공영방송 NHK는 절제된 보도를 했다. 강진 발생 직후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냈고 즉시 특보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한 시간여 뒤에는 센다이(仙臺) 상공에 헬리콥터를 띄워 쓰나미가 도로·주택·비닐하우스 등을 삼키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그렇게 화재 정보, 정부 발표 등을 신속 생중계하면서도 과도한 공포감을 막기 위해 절제된 톤을 유지했다. 이는 비탄에 빠진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식에서였다. 또한 일본인들은 복구 과정에서도 경이적이고 절제되며, 성숙된 국민성을 보여주었다. 재해로 인해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에서 신호등 파란불이 바뀌어야 길을 건넜다. 자연재해 앞에서도 줄을 서서 마트를 이용하고 일체의 약탈행위가 없었다. 규슈지역에도 대지진이 났다. ..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9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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