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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향일암에 다녀왔습니다

새벽 3시 좀 넘어서 부산에서 출발하여 5시쯤 여수가는 길목에 위치한 광양에 다다랐습니다. 공업도시라 그런지 새벽 야경이 온통 하얀색 불빛과 공장에서 나오는 하얀 매연들이 대부분이내요.
향일암에서 바라본 일출과 주변 풍경. 아직 겨울이 오지 않은 가을이라 선선해서 드라이브겸 다녀오기 좋았습니다. 부산에서 향일암까지 다이렉트로 3시간 좀 넘게 걸립니다. 광양까지는 길이 좋지만 광양 이후부터 향일암 까지는 길 노면 상태도 별로고 향일암이 약 10키로 정도 남은 구간에는 오르막과 내리막이 반복되는 왕복 2차선 도로에요. 초보운전자들은 새벽에는 가로등이 없으니 조심하셔야할거같습니다.
3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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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 사는 1인이요~~~~~ 미세먼지 서울보다는 적어요^^ 화학단지가 있어서 냄새가 쫌...ㅠ 향일암은 안쪽이라 공기는 좋아요^^
예쁘긴 한데 미세먼지 괜찮으세요...?
@thddkwl1998 새벽에 가서 그런지 심하진 않더라구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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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차 수장들이 사찰서 회동한 이유
... 도요타 자동차가 스바루(SUBARU)에 추가 출자 방침을 굳혔다”고 니혼게이자이 신문이 27일 보도했다. 도요타와 스바루는 이미 자본 제휴를 맺고 있는 상태다. 니혼게이자이는 “출자 비율을 현재의 약 17%에서 20%이상으로 끌어 올려 경영에 영향력을 더 미치도록 하겠다는 것”이라고 했다. 스바루도 새롭게 도요타의 주식을 취득, 상호 출자한다는 계획이다. 도요타 아키오-스즈키 오사무 등 4개사 수장 나가노현에 있는 사찰 성광사(쇼코지)에 모여 “앞으로 자동차업계 도요타 중심으로 재편” 앞서 도요타는 지난 8월 28일 스즈키 자동차와도 자본 제휴를 발표했다. 도요타가 1조1000억 원을 출자해 스즈키의 주식을 5% 보유하고, 스즈키는 도요타 주식 0.2%를 갖기로 했다. 이로써 이로써 다이하츠와 히노를 자회사로 거느린 도요타는 스즈키, 스바루와 모두 관계를 맺게 됐다. 이런 가운데 지난 7월 18일 도요타의 도요타 아키오(63) 사장, 스즈키의 스즈키 요사무(90) 회장을 비롯 마쓰다, 스바루의 수장들이 나가노현에 있는 성광사(聖光寺, 쇼코지)라는 사찰에 모습을 드러냈다. 나고야는 잘 알려진대로 도요타 자동차의 거점 도시다. 업계의 수장들이 이 사찰을 방문한 건 왜일까. 성광사는 1970년 도요타와 도요타 판매 회사가 교통 안전을 기원하기 위해 설립한 절이다. 특히 도요타 자판 사장이던 가미야 쇼타로(神谷正太郎)의 제안으로 세워졌다고 한다. 이런 성광사는 도요타그룹 관계자들이 정신을 공유하는 중요한 장소로 알려져 있다. 도요타 임원진들은 매년 여름(7월) 이곳을 방문한다. 방문 행사를 ‘하계대제’(夏季大祭)라고 부른다. 이날 마이크를 잡은 아키오 사장은 “마쓰다, 스바루, 스즈키 사장들도 왔다”며 “우리가 모두 할 수 있지 않을까 생각한다”고 말했다. 경쟁관계이면서 협력을 제안한 것이다. 27일 니혼게이자이는 “앞으로 도요타 중심으로 업계 재편이 진행될 것”이라고 전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9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Travel KOREA> 전등사
전등사 위치 : 인천광역시 강화군 길상면 전등사로 37-41 (길상면) 문의 : 전등사 032-937-0125 템플스테이 032-937-0152 대한불교조계종 한국불교문화사업단 02-2031-2000 이용시간 : 07:30~18:30 쉬는날 : 연중무휴 체험안내 : [전등사 템플스테이] 체험형/휴식형 ※ 자세한 내용은 관련 홈페이지 및 전화문의 관람료 : 개인 - 어른 3,000원 / 청소년 2,000원 / 어린이 1,000원 단체- 어른 2,500원 / 청소년 1,500원 / 어린이 800원 ※ 단체 30명 이상 ※ 어른(19세 이상), 청소년(중.고등학생), 어린이(초등학생) ※ 미취학 아동 무료 화장실 : 있음 주차요금 : 소형 2,000원 / 대형 4,000원 주차시설 : 있음 신용카드 가능여부 : 가능 애완동물 동반 가능 여부 : 불가 관련 홈페이지 : 전등사 http://www.jeondeungsa.org 전등사(템플스테이) http://jeondeungsa.templestay.com 무장애 관광정보 지체장애 화장실 : 장애인 화장실 있음_무장애 편의시설 지도 : http://naver.me/GpvZgDEh 개요 단군 왕검의 세 왕자가 쌓았다는 정족산 삼랑성(사적130호)내에 위치한 전등사는 창건연대는 확실치 않으나 고려 왕실의 원찰로서 진종사(眞宗寺)라 불리워 왔다. 지금의 전등사란 명칭은 고려 충렬왕 8년(1282)에 왕비 정화궁주가 옥등잔을 부처님께 바친 데서 생겨났다고 전해진다. 보물 178호인 대웅보전은 정면3칸, 측면2칸의 팔작집으로 광해군 13년(1621)에 지어진 조선 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이며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정치(華麗精緻)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고 있다. 고종 3년 병인양요시 프랑스군에 대항하여 결사호국의 각오로 전투에 임했던 장병들이 무운을 부처님께 빌기 위해 대웅보전의 기둥과 벽면에 자신들의 이름을 써놓은 흔적이 지금도 곳곳에 남아있다. 보물179호인 약사전을 비롯한 10동의 건물과, 11세기 중국 북송때 만들어진 보물393호인 범종, 유형문화재 26호인 순무천총양헌수승전비, 지방문화재인 7호인 대조루와 실록과 왕실세보(王室世譜)를 보관했던 장사각지와 선원보각지, 전설이 서려있는 나녀상, 열리지 않는 은행나무, 우는나무 등 많은 고목이 있다. 보물 제 178호로 지정된 대웅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중기 건축물로서는 으뜸가는것으로 꼽아야 하겠다.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집의 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 전등사 대웅전 대웅보전은 규모는 작지만 단정한 결구에 정교한 조각 장식으로 꾸며져서 조선후기 건축물로서는 으뜸간다. 특히, 내부의 불단위에 꾸며진 닫 집의 화려 정치한 아름다움은 건축공예의 극치를 이루는 것이며, 보마다 용틀임으로 장식되면서 용두가 네 귀퉁이에서 돌출해 나오며 천장 주변으로는 연, 모란, 당초가 화려하게 양각되고 중앙 우물 반자안에는 보상화문이 가득 채워져 있다. 더욱 희귀한 것은 물고기를 천장에 양각해 놓아 마치 용궁인 듯한 착각을 일으키게 하는 것인데, 닫집 왼쪽 천장에는 양쪽에 용두장식을 하고 몸체에 용틀임을 한 작은 龍架의 배 부분에 아홉 개의 방울을 달아 놓고 끈을 달아 불단까지 늘여 놓아 이를 잡아 흔들면 아홉 개의 방울이 동시에 울어 구룡토음의 장관을 이루게 했던 적도 있었다. * 전등사 대조루 전등사 대웅전에 오르는 중정 바로 앞에 있는 목조 건물이다. 대웅전을 오르는 문루의 역할을 하며 2층 문루 처마 밑에 전등사라고 쓴 현판이 걸려 있다. 앞면은 2층 건물로 그 풍채가 아담하나 대웅전에서 바라보면 1층 한옥이다. 1839년 승탄인이 건립하여 전등사의 정문으로 사용한 2층 누각으로 정면 5간, 측면 2간의 모조와가인데 각내에는 장사각, 선원보각, 취향당의 형판이 있다. 원래는 이층누각이었으나 퇴락되어 현재는 단층 건물로 남아 있다. 초립공집 팔작지붕으로 단청이 되어 있다. * 전등사 명부전 시왕전이라도 불리우는 명부전은 약사전 서남편에 있다. 창건 연대는 알 수 없고, 영조 43년(1767), 헌종 5년(1839), 고종 21년(1844)에 보수했다고 한다. 정면 3칸, 측면 2칸으로 내부에 지장보살을 모시고, 그 외에 시왕, 귀왕, 판관, 장군, 동자 등 29상이 모셔져 있다. * 전등사 목불삼존불상 조선 광해군 15년(1623)에 조성된 불상으로 원만한 상호와 양감·균형감·조각 솜씨가 뛰어난 목조불상이다. 삼존불은 삼세불이라고도 하며, 법신(法身)·보신(報身)·화신(化身)의 세 명의 부처님을 말하는데 현세불인 석가여래·약사여래·아미타여래를 모시기도 하고 과거·현재·미래불을 함께 모셔 삼존불이라고도 한다. 전등사 대웅보전에 보관되어 있다. 주불인 석가모니불의 높이는 125cm이고 무릎폭은 88cm로 원만한 얼굴에 유난히 큰 귀를 하고, 당당한 어깨와 가슴, 항마촉지인의 수인을 한 채 결과부좌하고 있다. 신체는 우견편단의 법의를 걸치고, 가슴께에는 군의를 묶은 자락 위에 3개의 꽃잎 모양이 있다. * 전등사 약사전 대웅보전 서쪽에 위치하는 건물로 대웅보전과 거의 같은 양식의 건물이다. 건물의 겉모습이나 내부 장식도 대웅보전과 비슷하다. 법당 안의 불상은 역시 약사여래 좌상인데 약간 딱딱하지만 아담하고 그런대로 잘 조화된 모습이다. 불상양식으로 보아 고려 말기에 속하는 석불로 볼 수 있다. 이 전각은 건축 양식은 조선 중기의 다포식으로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단층 달작집이다. 장대석 쌓기를 한 기단 위에 막돌 초석을 놓고 두리 기둥에는 약한 배흘림이 있다. 공포는 외 1출목 내 2출목으로 초제공과 이제공에 높이는 살미첨자의 끝은 모두 앙서로 되어있고 안쪽은 가둥위의 높이는 공포에서는 관형으로 되어 초각을 하였으나 기둥 사이의 공포에서는 교두형을 취하고 있다. 이 전각의 특징은 다포식 건축이면서도 창방위에 평방이 놓이지 않았다는 것이다. 내부 천장은 중앙 부분에 우물 천장을 두고 주위에는 빗천장을 만들었으며, 거기에 돌아 가면서 화려한 연화당초문을 그려 놓았다. * 전등사 향로전 향로전은 대웅전의 오른쪽에 있는 건물로 노전스님이 지내시는 곳이다. 정면 3간, 측면 2간의 8작 지붕으로 불공용 제물의 저장고였으며 병인양요때 에는 중군의 거처였다고 전한다. 전등사는 단군의 세 아들이 쌓았다는 삼랑성 안에 위치하며, 고구려 소수림왕 11년(서기 381)에 고승 아도화상(阿道和尙)이 축조하였다고 전하여 온다. 창건 당시에는 진종사(眞宗寺)라 불리었다. * 전등사 범종 보물 제 393호로 지정된 범종은 전형적인 우리나라 종과는 그 형태가 판이함을 금방 알 수 있다. 완전히 중국의 종으로서 전체 높이가 163cm이며 밑 지름이 1m로 종루는 쌍용이 움크리고 있고 음통이 없으며 종 몸에 상ㆍ중ㆍ하로 구획이 지어져 띠가 둘려 있는 형태를 보이고 있다. 이 범종은 중국 북송의 철종 소송 사년(1097,고려 숙종2년)에 회주 수무현 백암산 숭명사에서 주조된 철제 종이다. 일제가 세계제2차대전시 약탈하여 부평 병기창에 놓아 두었던 것을 광복후 독실한 불교신자에 의해 다시 전등사에 보관되어 현재에 이른 종이다. 종의 형태는 정상에 쌍룡을 갖추고 용두 주변에는 16개의 연꽃잎을 둘렸는데 종의 몸체에는 위쪽에 8잎을 돌리고 그 밑으로 여러개의 옆띠로 위·아래를 구분한 다음 종선으로 위·아래 각 8개의 네모 구획을 마련 하였다. 이 네모 구획과 구획 사이의 길쭉한 공간에는 명문을 양각하였다. 종구는 중국 종에서 보이는 물결 모양을 이룬 듯한 8모로 되어있고 그것을 따라 소문의 구연대를 돌렸다. 전체적인 형태는 개성 연복사 동종과 유사하나 우리나라에서 중국의 철제 종이 보물로 지정된 유일한 종으로 중국제 철종 연구에 귀중한 자료다. 특히 명문중에는 이 종을 주조할때의 시주인, 동역인, 장인 등의 성명이 양각되어 있고, 종구 하란 가까이에는 "대송회주"라는 27자가 있다. * 정족산 가궐지 고려 고종46(1259) 풍수도참가 백승헌의 진언에 의해 고종이 건립했던 가궐터이다. 당시 백승헌이 낭장으로 있을때 고종이 적당한 도읍지를 문의하자 삼랑성및 신니동에 가궐을 짓도록 했고, 원종5년(1264) 몽고가 왕의 친조를 요구 했을 때 가궐을 짓고 마니산 첨성대에 제사를 하면 친조 문제가 해결되고 주위의 대국들이 와서 조공할 것 이라고 진언하였다 한다. 건물은 몽골군의 침입으로 소실되었으며 당시 이 가궐에는 왕이 거처하지 않을 때에도 평상시 처럼 금침을 깔고 의복을 놓아두었다고 한다. * 정족산 사고 임진왜란 전에 실록을 보관하였던 사고는 내사고인 춘추관과 충주, 성주, 전주등 3개의 외사고가 있었으나, 임진왜란때 전주사고만이 화를 면하고 모두 소실되었다. 그 후 임란의 병화를 피한 전주사고본이 한양에서 가까운 강화로 옮겨져 선조 39년(1606) 4월 복인 작업을 완료하고 전주사고본인 원본은 마니산 사고에 나머지 4부는 춘추관, 태백산, 묘향산, 오대산사고에 봉안되었다. 마니산 사고는 병자호란의 피해와 효종 4년(1653) 11월 사각의 실화사건으로 삼랑성내 정족산 사고가 건립되어 이안 봉안되어 왔으나, 1910년 일제에 의해 국토가 강점되면서 정족산사고본은 태백산사 고의 실록 및 규장각의 도서와 함게 조선 총독부 학무과 분실에 이장되었다가 1930년 경성제국대학으로 옮겨진 후 광복과 함께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보관되어 오고 있다. 정족산 사고는 1930년 전후에 파손되어 빈터에 주춧돌만 남아있던 것을 1999년 강화 문화 사업으로 복원, 정비하였다. * 전등사 강설당 전등사의 설법당이나 삼랑성이 정족산성으로 불릴 때 병영지로 확인되고 있다. 1866년 병인양요때는 이곳에서 강계포수 800명이 취사하던 곳이었으며, 이곳에는 항마촉지인을 한 석가여래를 중심으로 관음, 대세지보살을 비롯한 12보살과 사천왕, 10대 제자를 그린 영산회상도(가로 240cm×세로 150cm)가 있다. 정보제공자 : 강화군청 전등사 [사진] 한국불교문화사업단 템플스테이팀 출처 :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main_search.jsp?cid=125534
쏨분씨푸드 시암스퀘어원점
이제 겨우 방콕 3일짼데 와입이 조식을 먹지 않겠답니다. 대신 백종원의 스푸파에 나온 국수집엘 가겠다고 장모님과 나서더라구요. 마침 숙소 바로 뒷편에 있더라구요. 이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퍼왔답니다 ㅎ. 이름이 릉르엉이라고 했던가 쉬운 이름은 아니었어요 ㅋ 와입이 사진을 보내왔네요. 저 중간에 비주얼 이상한 아이는 생선껍질 튀김이라는데 맛보라고 가져왔더라구요. 그냥 바삭바삭한 튀김이라고 할까요 ㅋ 오늘은 씨암스퀘어 구경 왔어요. 투어리스트 카드도 만들었는데 덩작 써보지도 못하고 그냥 왔네요 ㅋ. 여권만 있음 저 기계에서 카드 발급받을수 있답니다... 오늘 씨암스퀘어에 온 목적은 그 유명한 쏨분씨푸드 때문... 씨암파라곤, 씨암스퀘어, 씨암센터 등이 전후좌우로 연결돼 있어서 여기저기 구경하다 출출하면 가면 되겠더라구요. 여기 어딜가나 이분 사진이... 지점이 많네요... 자, 뭘 먹어볼까나... 중국인들, 한국인들 대박 많아요... 음, 오후 2시부터 5시까지 주류는 판매하지 않는다고... 밥을 시켰더니 이만한 그릇에 나와서 다 먹을수 있을까 걱정했는데 기우였어요 ㅋ 요 푸팟퐁커리가 넘 맛있어서 밥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기적이 ㅋ 이번 방콕여행에서 모닝글로리는 실패... 장모님께서 샐러드를 드시겠다고해서... 게살 볶음밥도 맛있더라구요. 요 새우는 제가 거의 다 먹었습니다 ㅋ 이건 직원들이 표시한건데 이걸 들고 계산대로 갔다는요 ㅋ. 아, 여기서 진짜 배부르게 먹었답니다... 저희 좀 먹었네요 ㅋㅋㅋ 스벅에 가서 아아 한잔 마시며 다음 일정을^^
“한일 관계 걱정”…박삼중 스님과의 단독 만남
... <사진= 경북 경주 자비사에서 만난 박삼중 스님.> ... “일본은 과거 우리에게 나쁜 짓을 많이 했지만, 일본인 개개인들을 그렇지 않은 사람들도 많아요.” 경북 경주 자비사에서 만난 박삼중 스님의 첫 마디다. 지난 50년 동안 한국과 재일교포 재소자 교화 활동에 힘써온 스님은 올해 4월부터 이 절로 거처를 옮겨 생활하고 있다. 2019년의 마지막 달력 한 장이 뜯겨 나가기 3일 전인 11월 28일, 스님이 계신 경주로 향했다. 스님을 찾아간 건 최근 이 절에 한일 관계 개선에 노력을 기울인 한 일본인 스님의 유품 봉안식이 거행됐기 때문이다. 박삼중 스님과의 인연도 궁금했던 차였다. 경주 남산 자비사에서 박삼중 스님 만나 경주 남산 끝자락에 자리잡은 자비사에 도착한 건, 낮 12시 무렵. 대웅전 법당에서 주지인 현도 스님을 먼저 잠시 뵙고 삼중 스님이 거처하고 있는 삼중정사(三中精舍)로 향했다. 현도 스님은 삼중 스님의 상좌(上佐: 큰제자)라고 한다. 정사가 있는 경내 중앙에 9층짜리 탑 하나가 보였다. 일본인 스님의 유품이 봉안된 탑이었다. <사진= 삼중 스님의 활동이 담긴 복도의 액자들.> ... 정사에 들어서자 삼중 스님의 식사를 돕는 여신도는 “스님이 곧 점심 공양(식사)을 하러 나오신다”며 “스님은 연로한 탓에 귀가 잘 들리지 않는다”고 했다. 잠시 후, 몸이 불편한 스님이 공양을 위해 식탁으로 걸어 나왔다. 풍채 좋던 그 옛날의 스님 모습은 아니었지만, 얼굴색 만큼은 맑아 보였다. “사리탑 이야기를 들으러 왔다”고 소개하면서 스님이 식사하는 모습을 잠시 지켜보았다. 스님이 드시는 반찬은 두부와 백김치 등 흰색 일색. 여신도는 “스님은 30대부터 당뇨가 있었다”며 “6년째 이틀에 한번 씩 투석을 받고 있다”고 했다. 밥의 반을 덜어낸 스님의 식사 모습이 힘겨워 보였다. 공양 후 서재로 이동한 스님은 먼저 보청기를 귀에 꽂았다. 비록 귀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목소리는 분명하고 또렷했다. 스님은 아직도 한 달에 한번 씩 서울로 교화 활동을 다닌다고 했다. <사진= 일본인 가키누마 센신 스님의 유품이 안장된 사리탑.> ... 일본 스님의 머리털이 사리탑에 봉안된 이유 삼중 스님에 따르면, 11월 17일 일본인 가키누마 센신(枾沼洗心·1932~2009) 스님을 추모하는 사리탑 제막식이 자비사 경내에서 열렸다. 9층 사리탑의 상단에는 후쿠오카의 사찰 난죠인(남장원; 南藏院)에서 갖고 온 목련존자 등의 사리가 봉안됐고, 하단에는 가키누마 센신 스님의 유품(머리털)이 안치됐다고 한다. “16년 전 세계 최대 청동와불이 있는 남장원에서 사리 일부를 모셔 왔어요. 또 10년 전엔 가키누마 센신 스님의 모발도 가지고 왔어요. 그동안 바빠서 상좌인 현도 스님에게 그것들을 맡겨 뒀는데, 얼마 전에 현도 스님이 봉안식을 하자고 했어요. 아마 한국에서 최초로 일본인 승려를 추모하는 사리탑일 겁니다.” 가키누마 센신, 그는 도대체 누구이길래 죽어서까지 한국에서 추모되고 있는 걸까. 삼중 스님은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한국에는 좋은 일을 많이 했지만. 일본에서는 배척받은 분”이라고 했다. “요즈음 한일 관계가 너무나 좋지 않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일본 스님의 추모 사리탑을 세운 이유에 대해서 궁금해 하시는 분도 계실 것입니다. 스님은 한국인이 하지 못하는 일을 하신 분입니다. 일본이 탈취해 가서 야스쿠니신사 한켠에 방치돼 있던 북관대첩비(임진왜란 당시 함경도 의병의 전승을 기념한 전공비)를 한국으로 돌아오게 했고, 귀(耳)무덤과 코(鼻)무덤을 한국으로 이장시켜서 영혼을 달래게 하는 데 도움을 준 분이지요.” <사진= 1989년 무렵부터 가키누마 센신 스님과 인연을 맺기 시작한 삼중 스님.> ... 교토 귀무덤을 한국으로 가져오는데 도움 삼중 스님이 가키누마 센신 스님을 처음 만난 건 1989년 무렵이다. 삼중 스님이 쓴 <박삼중의 인연 이야기1, 다시 태어나면 스님 안될래>라는 책에 의하면, 당시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도쿄에서 ‘세계만국평화회’라는 사무실을 열었다. 삼중 스님은 한국뿐 아니라 재일교포 재소자들의 교화 활동에도 노력을 기울였는데, 일본으로 교화를 가는 도중에 가키누마 센신 스님의 사무실을 들르게 됐다고 한다. 삼중 스님은 책에서 이렇게 쓰고 있다. <두 번째 만난 자리에서 가케루마(가키누마를 당시에 삼중 스님은 이렇게 적었다)는 일본에서 꼭 하고 싶은 일이 무엇인지를 물었다. 그래서 나는 교토의 귀무덤을 한국으로 모셔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런데 가케루마는 뜻밖에도 그 일이라면 자신이 도울 수 있을 것이라고 말하지 않는가?>(239쪽 인용) 자비사에서 봉안식이 열린 11월 17일은 가키누마 센신 스님이 열반한지 10년 되는 기일이었다. 두 스님이 수십 년간 이어온 ‘인연의 층(層)’은 자비사의 9층탑으로 그렇게 다시 태어났다. 삼중 스님은 법문과 사형수 이야기에도 적잖은 부분을 할애했다. 특히 강원도 산골 분교의 아이들과 편지를 주고받은 한 사형수의 사연을 소중하게 생각했다. 스님은 여신도에게 염주 2개를 갖고 오게 했다. 스님이 늘 지니고 다니는 것이라고 한다. 하나는 1989년 사형이 집행된 사형수(당시 26세)의 것으로, 금강경 법문이 적혀 있다. 또 다른 하나는 스님의 구명운동으로 풀려난 이의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 염주 2개가 내 삶의 가보와도 같다”고 했다. <사진= 삼중 스님의 서재 탁자에 놓인 책들.> ... 가끼누마 센신 스님의 자서전 삼중 스님에겐 남 모르는 세속의 개인적인 사연도 있다. 서대문 교도소 담장 근처에서 태어난 스님은 책에서 “내 어머니는 서대문 구치소 교도관이었고, 내 여동생도 교도관이었다”고 했다. 책엔 이런 구절이 나온다. <훗날 내가 교도소 재소자 교화를 다니기 시작한 것은 어쩌면 그때부터 정해진 운명이었을지도 모른다. 그저 묘한 인연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인연의 끈이 너무 질기고 단단했다.> 거동이 불편한 삼중 스님의 두 손을 마주잡으면서 2시간 가량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굳이 묻지 않고 듣기만 한 자리, 그래서 더 귀를 열어 놓을 수 있었다. 삼중 스님에게 한일 관계의 다리를 놓았던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영원한 도반(道伴: 불법을 닦으면서 사귄 친구)일 터. 가키누마 센신 스님은 자서전에서 “참회를 통해, 한일 간 진정한 상호 이해를 이루고, 친선을 통해 과거의 어둠을 걷어내야 한다”고 썼다고 한다. 한국과 일본은 앞으로 ‘경제적 도반’이 될 수 있을까. <경주=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602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