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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도쿠가와 이에야스에 맞선 조선 여인

일본 열도를 통일하고 에도 막부를 열었던 도쿠가와 이에야스 천하를 손에 거머쥐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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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에 남아있는 양심
남자들은 학창시절 대부분 한번쯤은 본 영화 배틀로얄에 나오는 '카와다 쇼고' 본명 : 야마모토 타로 작중 으리남에 상남자기믹을 가지고 있으며 마지막에 죽어갈때 슬픔을 자아낸 캐릭터 이 사람은 이 배틀로얄 말고도 한국영화 ' 마이웨이' 에서도 등장 여기서는 악질적인 일본군의 이미지로 연기하였다 그는 현재 연예계를 떠나 정치인이 돼었다  그리고  자민당 입장에선 답정너를 해야하는데 자꾸 팩트로 뚜들기니까 브레이크 거는거에 개빡친 타로의원 국회에서 이렇게 자민당의 막장행보에 극대노를 하며 항의 하고있다. 그리고 아베 앞에 걸어가 염주를 들고 묵념까지 했다 (사실상 너네(자민당)의 미래는 정해져있다 인정하라는 의미) 대부분의 사람들이 집단 최면에 걸린거마냥 방사능에 대해 너무 무지해서 이렇게 전국을 돌면서 방사능의 심각성과 일본 아베정부의 진실을 말하고 있다. 올바른 소리를 했다고. 탈원전 발언을 했다고, 자민당을 비판했다는 이유로 연예계에서 강제 퇴출당했지만 그는, 자신의 행동에 전혀 부끄럽지 않다며 누군가는 진실을 말해야 한다고 했다 자신은 나이들어서도 좋은 인생을 살고싶고 좋은 배우로써 살고싶은데 방사능이, 일본의 거짓된 역사인식과 현 정권이 자신의 꿈을 방해한다고 말했다. 이런 심한말까지 듣는게 일상이다.. 살해협박까지 받고있다.. 진실을 말해도 먹혀들지 않자 레이와 신센구미라는 정당을 아예 만들어버렸다. 오늘날 그대들(국민)이 이렇게 힘든건 그동안 정치에 너무 무관심했던 너희와 나의 잘못이며 이제부터라도 정치에 관심을 가지고 일본의 미래를 정상적으로 돌려내자고 연설한다. 그리고 지금도 현재 진행형이다.
‘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자동차(혼다)
각 기업의 브랜드에는 저마다의 특별함이 숨어 있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기업 트레이너 겸 컨설턴트인 스캇 데밍(Scott Deming)은 이렇게 말한다. “가치와 필요를 만들어내는 것이 브랜드의 역할이다. ‘특별함’이 모든 일을 가능하게 하는 단어다. 특별함은 브랜드를 고객에게 각인시켜 잊을 수 없게 만든다.” (스캇 데밍 저 ‘긍정적 알파 컨슈머를 만드는 유니크 브랜딩’ 인용) 일본 제조업의 최선봉에는 자동차 메이커들이 포진해 있다. 이들 기업들의 브랜드는 어떤 ‘특별함’을 담고 있을까. ‘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 4회는 자동차다. (1회 카레, 2회 커피, 3회 스포츠용품) 자동차 기업으로 가장 먼저 혼다를 살펴보겠다. 혼다자동차는 글자 그대로 창업자의 이름에서 브랜드명을 땄다. 혼다차를 설립한 혼다 소이치로(本田宗一郎:1906~1991)는 대장장이의 아들이다. 초등학교만 나온 그는 자동차 수리 전문점에 이어 동해정기(東海精機)라는 회사를 만들어 피스톤링 제조를 시작했다. 도요타에 물품을 납품하고 자본도 제공 받았다. 소이치로는 전쟁 후 회사를 도요타에 매각하고 45만 엔을 손에 거머쥐었다. 그 밑천으로 1948년 자신의 이름이 들어간 혼다기연공업(本田技研工業)을 설립했다.(혼다 소이치로 저 ‘혼다, 꿈의 이력서 좋아하는 일에 미쳐라’인용, 이수진 옮김, 부표 출판) 자동차 제조로 보면, ...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5 )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재우 기자다른기사 보기
중세 한국사에 엄청난 나비효과가 된 일본사 사건.jpg
12세기부터 일본은 일왕을 바지사장으로 세워두고 쇼군을 중심으로 뭉친 막부란 권력집단이 실제로 통치하는 구조가 만들어졌는데 이때를 가마쿠라 막부 시대라 부름. 그런데 13세기 말 원나라/고려의 일본 원정으로 일본 내부가 혼란스러워 졌고 이 때를 틈타 당시 고다이고 일왕은 막부를 뒤엎고 일왕이 친정하는 구조로 돌아가기 위해 막부에 반기를 들었음 그러나 고다이고 일왕의 군세는 내분으로 인해 분열돼 패배한 뒤 남쪽으로 도망치게 되었고 막부에서는 자기들만의 일왕을 새로 옹립해서 일본 전체가 두명의 왕을 중심으로 남쪽과 북쪽으로 나뉘게 됨. 이때를 일본의 남북조시대라고 함. 이게 한반도에 어떤 영향을 끼쳤냐면 중앙집권능력이 약해서 봉건제를 실시했던 일본의 막부 체제가 아예 둘로 나눠져 통제력이 완전히 상실되었고 한반도와 가까운 큐슈가 남조에 붙었었는데, 북조에게 점점 밀리게 되면서 자기 세력이 사라질 위기에 처한 남조 영주들은 가까운 한반도를 침략해서 살길을 만들겠다는 마인드로 고려에 대한 침략을 실시함 오합지졸 해적수준의 왜구는 자주 겪어 익숙한 고려였지만 사실상 군대와 다를것 없는 왜구들이 배를타고 국토 전체를 동시에 타격하고 점령하는 예상못한 사태에 고려는 개경 10km 근처까지 왜구가 들어오는등 점점 국가 존폐 위기에 빠지게 되었는데 그때 뜬끔없이 나타난 동북면의 어느 호족이 말도 안 되는 웹소설 수준의 무패전설을 몰고다니며 순식간에 모든 백성의 지지를 받는 고려의 호국영웅으로 등극하게 되었고 그 이후 역사를 바꾸게 됨 만약 이 때 일본에 내전이 안 일어나서 왜구 침략 사건이 없었다면 이성계가 왕까지 되는건 불가능했음 출처
아식스의 어원은 라틴어라는데?
<미래의 브랜드가 성공하는 길은 어떤 특별한 의미를 나타내야 하고, 철학뿐만 아니라 태도에서도 차별화 되는 데 있다. 그러한 브랜드는 록스타의 팬처럼 열광적인 팬들을 양산화 낼 것이고, 팬들은 순수한 마음으로 당신의 브랜드를 지키고, 기꺼이 다른 사람들에게 소개시켜 줄 것이다.> 스웨덴 출신의 브랜드 전략가 토마스 가드(Thomas Gad)는 ‘4D 브랜딩’(정연욱 옮김, 커뮤니케이션북스)이라는 책에서 브랜드의 차별화를 강조했다. 그 차별화가 열광적인 ‘충성 팬들’을 만들어 낸다는 것이다. 열광적인 팬들을 이야기 한다면, 그 대표적인 브랜드는 아마 스포츠용품일 것이다. ‘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 3편(1편 카레, 2편 커피)은 스포츠용품 회사다. 일본 3대 스포츠용품 메이커는 아식스, 미즈노, 데상트다. 이들 메이커는 글로벌 시장에서 최강자인 나이키, 아디다스 등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나이키는 미국 오리건대 육상선수였던 필 나이트(Phil Knight)가 육상부 감독이던 빌 바워만(Bill Bowerman)과 함께 만들었다. 이들이 1964년 설립한 회사가 ‘블루 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다. 이후 1971년 나이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회사 이름으로 사용한 것. 1971년 캐롤린 데이비슨(Carolyn Davidson)이라는 그래픽디자인과 학생이 빠른 것을 상징하면서 하키 스틱처럼 날렵하게 뻗은 마크를 만들어냈는데, 그게 바로 나이키의 상징인 ‘스우쉬’(Swoosh)다. 나이키는 35달러에 이것을 구입했고, 스포츠화를 대표하는 로고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됐다. 아디다스(Adidas)는 1920년대 독일 제화업자 아디 대슬러(Adi Dassler)가 만든 브랜드다. 이 상표가 공식등록된 건 1949년. 아디 대슬러의 이름 ‘Adi’와 Dassler의 세 글자 ‘Das’를 붙여 Adidas라고 이름을 지었다. <비영리매체 팩트올 이재우 기자> 1) 아식스: 라틴어 구절... (기사 더보기 아래 URL)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0
서울 성수동 블루보틀과 도쿄 롯본기 블루보틀
<사진= 서울 성수동의 블루보틀 커피 전문점> #서울 성수동의 블루보틀 ‘그 호들갑스런 대열’에 합류해 보기로 했다. ‘그 비싼 커피를 굳이’ 마시러 갔다. 몇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릴 인내심은 노(NO). 주말과 휴일은 피해 평일로 택했다. 애플 신상품을 ‘득템’하기 위해 밤을 새거나 장시간 기다리는 장면은 종종 들었다. 하지만 기껏 커피 한 잔인데.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아니었다. 오픈(3일)이후 그런 광경은 내내 벌어졌다. ‘커피계의 애플’. 스페셜커피 블루보틀 매장으로 찾아간 건, 8일 오전 8시. 오픈 시간에 맞춰 지하철 뚝섬역에 내렸다. 역에서 불과 50미터. 큰 붉은 벽돌 건물보다 무리지은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기구나.’ 입구에 들어서자 50여 명이 4겹 줄을 서서 대기 중. 건물 내부는 특별할 게 없다. 성수동 특유의 거친 콘크리트 벽과 천장. 1층에서 대기하고 계단을 통해 지하1층 매장으로 내려갔다. 커피 데스크에 핸드드립기가 6개. 바리스타가 순서대로 즉석에서 ‘핸드드립’ 중. 아메리카노 기본(블렌드)을 주문했다. 5000원. 스타벅스의 숏사이즈(3600원) 톨사이즈(4100원)와 비교하면 꽤 비싼 편. ‘5’자가 주는 부담감도 크다. 평일임에도 꼬박 한 시간을 기다려 정확히 9시에 커피 한잔을 손에 들었다. ‘득템’. 커피 양은 스타벅스 숏사이즈의 절반. 한 눈에 봐도 끈적할 정도로 진하다.(재팬올의 정희선 객원기자는 ‘한약’같다고 했다.) 맛을 잠시 음미하는 사이, 누가 불쑥 말을 걸었다. 커피 취재를 온 잡지매체의 기자란다. 연배 어린 후배기자에게 인터뷰 당하는 영광을 누렸다. 블루보틀 맛에 대한 평가는 짧은 인터뷰 내용으로 대신한다. “(‘커피 맛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에) 매일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스벅마니아’는 아니지만 습관처럼 한 잔씩. 스타벅스와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맛이다. 쌉싸름한 맛이 나쁘지 않다. 와인으로 치자면, 샤르도네(화이트 와인용 포도 품종) 같은 적절한 산미가 느껴진다. 가격이 부담스럽지만 줄 서는 일만 없다면 다시 찾을 것 같다.” “(‘블루보틀 커피가 유명한 건 왜일까요’라는 질문에) 성수동에 1호점을 낼 것이라는 입소문을 낸 게 오래됐다. 금방 매장을 열 수도 있었겠지만 상당히 뜸을 들였다. 그러면서 커피팬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유발시켰다. 파란 병 로고에는 굳이 블루보틀이라는 이름을 적지 않았다. ‘파란 병=블루보틀’이라는 인식이 커피 팬들을 줄 세웠다고 본다.” 30분 동안 매장을 지켜본 후 나왔다. 밖엔 여전히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놀랍다. 더 놀라운 건 한 시간 뒤. 블루보틀 잔향이 혀에 그때까지 머물렀다. 오전 11시, 혀를 헹구러 스타벅스로 향했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편집인> (아래는 도쿄에 거주하는 정희선 객원기자의 롯본기 블루보틀 ‘맛 평가기’입니다. ) <사진= 도쿄 롯본기의 블루보틀 커피 전문점.> #도쿄 롯본기의 블루보틀 <정희선 객원기자=일본기업 분석 애널리스트>커피 맛은 호불호가 강하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선호가 갈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내 생각에 블루보틀은 더하다. 내 경우, 유학 때문에 몇 년 미국에서 지냈지만 커피를 델리키트하게 느낄 정도의 ‘혀’는 갖고 있지 않다. 다시 ‘커피 대국’ 일본에 와서 몇 년 째 살고 있지만, 여전히 ‘커피 혀’는 그대로다. 내 혀보다는 커피 맛을 잘 아는 친구의 말을 빌려 블루보틀을 평가하는 게 나을 듯하다. 그 친구는 쓴맛과 신맛이 강한 커피를 좋아한다. 하지만 신맛이 너무 강한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다만 내 ‘혀’는 이렇게 내게 속삭인다. “블루보틀은 확실히 스타벅스 커피보다 신맛이 강해~” 나만큼 커피 취향이 ‘고급지지 못한’ 내 막내동생은 한 술 더 뜬다. 블루보틀을 마시고 나선 심지어 “한약 먹는 것 같다”는 궤변을 늘어 놓았다. 이런 ‘한약 같은 커피’를 마시러 일부러 일본으로 찾아오는 한국 커피 마니아들이 많다. 여기서 또 취향이 갈린다. 한국 사람들은 오리지널 블루보틀이 아닌 우유가 들어간 달달한 라떼를 많이 주문한다고 한다. 당분간은 한국인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블루보틀은 현재 미국(57점)과 일본(11점)에 68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일본에선 도쿄에 9곳, 교토에 1곳, 고베에 1곳이 있다. 해외진출에 나선 블루보틀이 (한국 제외)오직 일본에만 매장을 낸 이유는 뭘까. 또 유독 도쿄에 몰려있는 건 왜 일까. 일단 ᐅ일본이 ‘커피 대국’이라는 점 ᐅ도쿄 사람들의 취향이 고급화 되어 있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창업자의 개인적 취향도 반영됐다.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창업자 제임스 프리맨(James Freeman)은 한 인터뷰에서 “일본의 오래된 커피 가게들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며 “특히 도쿄는 더 그러하다”(I'm very deeply inspired by the old-fashioned coffee shops of Japan, and in Tokyo particularly)고 말한 바 있다. 도쿄의 번화가 긴자 뒷 골목에는 아직도 레트로(retro: 복고풍) 느낌이 나는 오래된 커피숍들이 많다. 이들 가게 대부분은 한 잔 한 잔 정성스럽게 핸드드립 방식으로 고객 앞에서 커피를 내려준다. 제임스 프리맨이 이런 분위기에 반했다는 것이다. 그럼, 제임스 프리맨은 처음에 어떻게 블루보틀 커피를 만들게 됐을까. 왜 굳이 블루보틀이란 이름일까. 여기서 커피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683년 유럽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의 터키군이 빈(비엔나)에 도착했다. 적군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포위망을 뚫고 인근 폴란드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터키어와 아랍어를 할 수 있는 ‘프란츠 게오르그 코루시츠키’라는 사람이 나섰다. 그는 위기를 극복하고 폴란드 원군을 요청하는데 성공했다. 터키군이 물자를 남겨두고 퇴각을 했는데, 그 더미에서 콩 봉지들이 발견됐다. 처음에는 낙타의 먹이인줄 알았지만, 아랍에 살던 경험이 있던 프란츠 게오르그 코루시츠키는 그게 커피 콩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는 원군 요청 포상금으로 그 커피 콩을 매입, 중부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 ‘블루보틀’(The Blue Bottle)을 개업했다. 비엔나 커피 문화의 출발이었다. 그 319년 후인 2002년, 클라리넷 연주가 제임스 프리맨이 샌프란시스코 인근 오클랜드에 커피 가게를 열었다. 그는 비엔나를 구한 프란츠 게오르그 코루시츠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차원에서 가게 이름을 ‘블루보틀’이라고 지었다. 제임스 프리맨은 평소 직접 원두를 구입, 매일매일 로스팅해 커피를 즐길 정도로 커피광이었다. 블루보틀이 유명하게 된 건, 그가 볶은지 24시간 이내의 신선한 커피원두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면서다. 입소문이 나면서 블루보틀 커피는 유명세를 타게 됐다. 비교적 최근인 2017년, 네슬레가 4억2500만달러(약 4500억원)에 블루보틀의 지분 68%를 인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블루보틀 커피를 흔히 ‘제 3의 물결 커피’ (Third wave coffee)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제 1의 물결 커피’(First wave Coffee)는 1990년대 이전의 베이커리에서 빵과 함께 파는 커피, 혹은 개인이 공간을 임대하여 파는 형태를 지칭한다. 커피의 퀄리티에 주목하기 보다는 1~2달러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커피를 제공하였다. 1990년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스타벅스가 등장하면서 ‘제2의 물결 커피’(Second wave coffee) 시장이 열렸다. 집, 직장이 아닌 제3의 공간에서 퀄리티 높은 커피를 제공했다. 요즘의 가장 흔한 커피 전문점 형태다. 그러다 2010년 이후,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드디어 ‘제 3의 물결 커피’(Third wave Coffee)가 시작 되었다. 대표적인 가게가 블루보틀(Blue bottle), 필즈 커피(Philz coffee), 스텀프타운(Stumptown) 등 이다. ‘제 3의 물결 커피’의 특징은 스타벅스 보다 훨씬 좋은 원두를 사용하며, 차별화된 로스팅 기법을 도입하여 기존의 커피와 차별화된 맛을 제공하다는 것. 대부분의 ‘제 3의 물결 커피’ 전문점들은 1~2분 이내에 커피를 내리기 보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니즈에 맞춰 커피를 만들어 준다. 핸드드립으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객이 보는 앞에서 맛깔나게 커피를 내려주는 것이다. 획일화된 커피 맛에 지친 미국 소비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제공되는 커피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제 3의 물결 커피’는 서부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제 3의 물결 커피’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지 않고, 성장보다 퀄리티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제 3의 물결 커피’ 중에 해외진출을 한 브랜드는 블루보틀이 유일하다. 이상이 ‘한약 같은 커피’ 블루보틀의 유래와 성장기에 대한 내용이다.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78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조선인이 본 일본의 여장남자 게이 남색’ 풍습 문화
1. 들어가기에 앞서 조선과 일본은 상당히 오랜 기간동안 서로 교류하며 문화를 교환해왔다. 이미 조선 초기때에 일본과의 교류를 위해 왜관을 지었으며 신숙주나 강희맹 등 여러 실력있는 문신들도 일본에 사신으로 드나들었다. 이에는 여러가지 정치적인 바탕이 깔려있었는데, 특히 조선 조정이 왜구의 창궐을 막기 위해서 대마도주와 관계를 맺으려 하였던 것이 주된 이유였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조선을 침략하여 장장 7년간의 긴 전란을 불러왔던 임진왜란 이후로는 일본인들에 대한 조선인들의 적개감과 불신감이 극심해져 잠시 교류가 중단되었으나, 히데요시 가문이 몰락하면서 새롭게 일본의 정권을 잡은 이에야스 가문의 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조선과 일본 간에는 다시 교류가 이어졌다. 이후로 1607년부터 1811년까지 장장 200년에 가까운 세월동안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를 파견해 문물을 교환하였다. 그러나 이토록 오랫동안 교류하는 와중에도 조선인과 일본인 간에는 분명히 넘을 수 없는 벽, 다시말해 ‘문화의 차이’가 있었고, 결국 서로 끝까지 이해를 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었다.  그 중에서도 재미있는 것은 일본에서 유행하던 남색(男色), 즉 남성간의 동성연애의 풍조에 대한 것. 이에 대해 조선사람들도 여러 기록을 남겼는데, 이는 대개 흥미롭고 재미있는 것이라 할 수 있어 소개한다. 이 남색풍조라는 것은  현대적인 동성애와는 그 개념이 다른 것으로, 성인 남성간의 성행위가 아닌 성인 남성과 소년 간의 성행위였다. 1. <일본행록>의 기록 이 나라의 풍속은 여자가 남자보다 배나 많기 때문에 별점(別店)에서 음란한 풍속이 크게 유행하여,노니는 여인이 태반은 사람을 보면 나와서 길을 막고 자고 가라고 청하는데, 옷을 잡아끌기까지 한다. 점내(店內)에 들어가 그 돈만 받으면, 비록 대낮이라도 원하는 대로 따른다. 대체로 그 고을과 마을들이 모두 강과 바다에 접하고 있어서 맑은 기운을 안고 있기 때문에 딸을 낳으면 자못 얼굴이 예쁘다. 또 남자 나이가 20세 이하로서 절에서 학습하는 자는 승도가 그의 눈썹을 깎고 먹으로 눈썹을 그리며, 입술에 붉은 칠을 하고 낯에 분을 바르며 채색 옷을 덮어쓰게 하여, 여인의 모양을 만들어서 거느리고 있다. 왕이 또한 미소년을 궁중에 뽑아 들여 궁첩(宮妾)이 비록 많더라도 이 소년을 가장 사랑하므로 나라 사람들이 다 그것을 본받는다. 맑은 강이 곳곳마다 수향(水鄕)을 이뤘는데 노는 계집 단장하고 길가에 가득하네 묻노니 왕궁에서 누가 제일인가 연지 찍고 분 바른 소년이라네 – 강희맹의 <일본행록> 5월 17일 中 이는 1420년에 세종의 명을 받들어 일본에 사신으로 갔다 온 강희맹이 남긴 기록이다. 그 말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대체로 여성이 남성보다 숫자가 많으며 몸을 파는 여자와 음란한 풍속이 판을 친다고 하였다. 그러나 무엇보다 강희맹의 이목을 끈 것은 역시 일본의 남색하는 풍속이었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일본에서는 아름다운 소년들을 화장시켜 여자처럼 치장하도록 하니 나라의 귀인들이 이를 아꼈다고 하였는데, 이러한 풍속은 일본의 궁실은 물론이고 민간에도 널리 퍼져있었다고 한다. 2.<일본왕환일기>의 기록 부녀자들은 경쾌하고 영리하며, 얼굴이 대부분 훤칠하나, 다만 성품이 자못 음탕하여 비록 양가(良家)의 여자라도 거개가 딴 마음이 있고, 장사치의 계집도 역시 남몰래 사사로이 지내는 자가 있으며, 승려[僧人] 역시 부녀자를 끼고 사찰에서 사는 자가 있었다. 연도(沿道) 지방에는 으레 양한(養漢 매춘부)의 점사(店舍)가 있어, 저자에 나서서 맞아다가 값[雇價]을 받는데 조금도 부끄러운 마음이 없어 중국의 양한들보다도 심하다. 풍속이 목욕하기를 숭상하여 비록 깊은 겨울이라도 폐하지 않으며, 저잣거리마다 목욕하는 집을 만들어 놓고 그 값을 받는다. 남녀가 같은 곳에서 알몸을 내놓고 서로 희롱하되 부끄러워하지 않으며, 손님과 희롱하기를 못할 짓이 없이 한다. 더러는 남창을 꾸며 손님을 즐기게 하며 평소에도 역시 남색(男色)으로서 모시게 하는데 사랑하기를 계집들에게보다도 더하였다. 혼인[嫁娶]에 있어서도 오라비와 누이를 피하지 않고, 아비와 아들이 한 창녀를 같이 간음하여도 또한 그르게 여기는 사람이 없으니, 참으로 금수들이다. – 황신의 <일본왕환일기> 12월 9일 中 이는 임진왜란 중이었던 1596년(선조 29년), 일본 조정과의 강화를 위해 명나라 책봉사로 파견되었던 심유경/양방형 등을 따라 일본에 가서 남긴 사행일기인 <일본왕환일기>에 실린 기록입니다. 위에서 강희맹이 남긴 기록에서도 비슷한 식으로 일본의 성(性) 문화에 대하여 기술한 바 있는데, 대략 100년이 흐른 후의 기록도 비슷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이 기록에서는 일본인들이 남창을 두고 이를 아끼는데, 그 정도가 여인을 아끼기보다 더 한다고 하였으니 당시 일본 사회에서 남창이 상당히 귀한 취급을 받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처럼 ‘왜인은 여인보다 남창을 더 사랑하고 아낀다’라 한 기록은 보다 나중의 기록에도 볼 수 있으니, 조선 사람들의 눈에는 이러한 풍속이 얼마나 충격적으로 느껴졌는지 날 보여주고 있다. 3.<해사록>의 기록 맑음. 강어귀에 머물러 순풍을 기다렸다. 대판 수관(大坂守官)이 날마다 하정(下程)을 보내왔다. 대판을 바라보니, 여염이 매우 번성하여 30리 안에 가득 찼다. 아침저녁으로 밀물을 타고 오가는 돛단배가 몇천 척인지 알 수 없었다. 대판에서 여기까지 이른바 경성점(傾城店 유곽(遊廓))으로 창녀[䢟女]의 소굴이다. 수십 명씩 떼를 지어 끊임없이 오가는데, 모두 채색 옷을 입고 곱게 분단장하였으며 혹 머리를 풀어헤친 자도 있었다. 이 나라 풍속이 남색(男色)을 아주 중히 여기므로, 길에서 보이는 어린 사내아이 7, 8세 이상 20여 세까지의 사내들이 누구나 다 고운 옷에 단장한 얼굴인데, 와가(瓦家)라 한다. 이는 곧 귀염받는 사내를 일컫는 것인데, 상하(上下)가 풍습을 이루어, 원망하는 계집이 많기까지 하다고 한다. 한(漢) 나라의 《오행지(五行志)》에는 색요(色妖)라 하여 한 나라 말년에 이런 풍습이 지극히 성하니, 곧 어지러워져 망할 형상이었는데, 일본의 풍습이 바로 이와 비슷하다. 이 날은 배에서 잤다. – 김세렴의 <해사록> 1월 27일 中 풍속이 목욕을 좋아하여 한겨울이라도 그만두지 않으므로, 거리마다 목욕하는 집을 지어 놓고 값을 받는데, 남녀가 섞여서 목욕하며 알몸으로 서로 가까이 하면서도 거의 부끄러움이 없다. 손님과 술을 마실 때 첩을 불러내어 술을 권하게 하는데, 함께 같은 잔으로 마시기까지 하며, 손님과 희롱하여 못하는 짓이 없다. 더러는 남창(男倡)을 꾸며서 손님을 즐겁게 하며, 평소에도 남색(男色)으로 자기를 모시게 하여, 첩보다 더 귀여워한다. 혼인에 같은 성을 꺼리지 않아 사촌 남매가 부부가 되며, 부자가 함께 한 창녀를 상관하여도 또한 그르게 여기는 자가 없으니, 참으로 짐승이다. – 김세렴의 <해사록> 문견잡록 中 이는 1636년(인조 14년)에 임광과 함께 통신부사로써 일본에 파견되었던 김세렴이 남긴 기록이다. 사실 <해사록>이라는 일본기행문은 같은 제목으로도 몇 권의 책이 더 있는데, 1590년(선조 23년)에 통신부사로 일본에 다녀왔던 김성일이 남긴 기록과 1607년(선조 40년)에 일본 에도 막부의 요청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로는 처음으로 파견되었던 통신사로 파견되었던 경섬이 남긴 기록이 있다. 김세렴의 것은 이들과 제목은 같지만 다른 시기와 내용을 다루고 있다. 김세렴 역시 일본의 남창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비판하였음을 기록을 통해 알 수 있는데, 그 표현이며 묘사는 대체로 황신이 <일본왕환일기>에 남긴 것과 흡사하다. 특히 문견잡록의 표현은 황신의 것과 거의 일치하는데, 아마 김세렴이 일본으로 떠나기 전에 황신의 기록을 참고 자료로 삼아 읽어보고 길을 떠난 듯 하다. 4. <일동기유>의 기록 창루(娼樓)와 기관(妓館)은 곳곳에 있었다. 신교(新橋) 땅만 하더라도 구란(句欄)이 3백여 소나 된다 하니, 이것으로 미루어 보아 다른 것도하 알수가 있을 것 같다. 그 풍속이 옛날에는 남색(男色)을 숭상하였지마는 지금은 이것을 폐지했으니, 그 까닭은 사람의 정액(精液)을 소모여 인종(人種)을 단절시킨 때문이었다. 그러나 소년(少年)들은 정사(情思)가 충족(充足)하고, 먼 곳에서 온 손님은 몽사(夢事)가 어지러우므로 정액을 배설하지 않을 수 없게 되니, 이것이 창기(娼妓)가 많은 까닭이었다. – 김기수의 <일동기유> 中 이는 1876년(고종 13년)에 메이지 유신 이후 급변한 일본의 정세와 문물을 살펴보기 위해 수신사로 파견되었던 김기수가 남긴 기록이다. 이에 따르면 본래 일본에는 남색을 숭상하였으나 그 당시에는 폐지되었다고 한다. 이 기록으로 미루어보아 메이지 유신 이후로 일본에 대대적인 문물개혁이 일어나면서 이전처럼 남색을 숭상하는 풍습은 사회적 지탄을 받으며 소멸되어 간 듯 한다. 다만 말미의 뉘앙스로 볼 때 비록 남창이 법적으로는 폐지되었으나 이러한 풍습이 어느정도는 유지되었음을 짐작케 한다. 위의 기록들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일본의 남색 풍조에 대한 조선 사람들의 반응은 이런 정도였다. 그도 그럴듯이, 조선 사람들의 성리학적 사고로는 일본의 남색 풍조를 도무지 이해할 수 없는것이었다. 그들의 눈에 일본의 풍습은 대개가 기이하게 느껴졌으나 특히 남색 행위가 가장 기이하게 느껴졌을 것임을 가히 짐작할 수 있다. 출처 – https://blog.naver.com/superman2208/50186693359
6차 산업의 선두 주자 '모쿠모쿠 농장'
정희선의 재팬토크/ 6차 산업 현장③ 모쿠모쿠 농장 <일본에서 산업, 기업 애널리스트 일하고 있는 재팬올의 정희선 객원기자가 일본의 6차 산업 현장을 찾았습니다. 한국 전문가들과 함께 원정대(12월 17~19일 간사이 지역)를 꾸려 지역 경제 활성화에 성공한 3곳을 취재하고 그 사례를 소개합니다. 원정대가 찾아간 곳은 ᐅ와카아먀현의 아키츠노 가르텐(秋津野ガルテン), ᐅ미에현의 모쿠모쿠 농장(モクモク手づくりファーム), ᐅ오사카부의 스기고헤이(杉・五兵衛) 농원입니다. 아래와 같은 순서로 4편에 나누어 글을 싣습니다.> 1편: 6차 산업의 개념과 정의 2편: 귤로 지역 활성화 '아키츠노 가르텐' 3편: 6차 산업의 선두 주자 '모쿠모쿠 농장' 4편: 6차 산업의 효시 '스기고헤이 농원' (2편에서 계속) #벤치마킹 우리가 두 번째로 방문한 곳은 재미있는 이름이 붙은 농장이다. 닌자로 유명한 이가노사토(伊賀の里)에 위치한 ‘모쿠모쿠 농장’(모쿠모쿠데즈쿠리팜:モクモク手づくりファーム)이다. 일본의 6차 산업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장소가 이곳일 정도로, 한국 사람들에게도 이미 유명하다. 전북 고창에 매일유업이 문을 연 ‘상하농원’이 이 농장을 벤치마킹했다는 것이 알려지면서 그 유명세가 더해졌다. #이름 농장 이름에 모쿠모쿠(モクモク)라는 말이 붙은 건 3가지 이유가 있다고 한다. 목재로 통나무 하우스를 지었다고 해서 한자 나무목 두 글자(木々)를 붙여 모쿠모쿠라고 했다는 말이 있다. 또 햄이나 소시지를 훈제할 때 연기가 뭉게 뭉게(모쿠모쿠) 피어오르는 데서 따왔다는 이야기도 있다. 닌자의 고장과 관련됐다는 말도 있다. 닌자들은 위기 상황에서 연막탄을 터뜨려 적들의 시야를 흩뜨리는데, 그때 연기가 퍼지는 모양에서 비롯됐다는 것이다. 3가지 중 어느 것을 갖다 붙이더라도 재밌는 스토리임에 틀림없다. <정희선 객원기자>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26 )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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록그룹 '퀸'과 1975년 4월 17일의 일본
1975년 4월 17일 하네다 공항 대소동 환영 인파에 놀라..."다른 행성 온 것 같다" 1975년 4월 17일 오후 무렵. 도쿄 하네다 공항에는 전례 없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려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비행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들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자, 호놀룰루를 경유한 JAL061 편이 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았다. 트랩을 내려오는 주인공은 데뷔 3년차인 영국 출신 그룹 퀸(Queen)의 멤버들이었다. 섬 나라 일본에 첫 발을 디딘 멤버들이나, 이들을 맞은 팬들이 서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더 프레디 머큐리 등 멤버들은 일순간 동양의 작은 소녀들에게 포위당했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맴버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Brian Harold May)는 당시 “다른 행성에 온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브라이언이 행성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그가 실제 천문학자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적외선 천문학자(Infrared astronomer)였다. 잠시, 브라이언 메이 얘기다. 프레디 머큐리는 ‘프레디 머큐리, 낯선 세상에 서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노래하다’라는 책에서 “제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에서라도 브라이언 같은 적외선 천문학자가 기타를 집어들고 로큰롤 가수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썼다. 천문학 잡지 ‘에스트로노미’(Astronomy)는 ‘브라이언 메이, 과학과 음악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러분은 그를 록그룹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로 알고 있지만, 브라이언은 천문학 박사이기도 하다”(You know him best as guitarist, singer, and songwriter from the rock group Queen, but Brian May is also a Ph.D. astronomer”고 전했다. 일본에 도착한 퀸이 공연을 펼친 곳은 선배 그룹 비틀즈가 섰던 부도칸(武道館)이었다. 공항에 이어 공연장 소동도 변함없었다. 통곡하며 실신하는 여성이 속출했고, 팬들은 밀치고 넘어지며 스테이지까지 몰려들었다. 그러자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을 잠시 중단하고 “모두 침착하자”고 호소했다. 비틀즈 이후 최대의 소동이었다. 퀸의 공연은 2주간 전국에서 열렸다. 퀸은 이후 다섯 차례 더 일본을 방문했고, 마지막 공연을 한 곳은 1985년 5월 15일 오사카성 홀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죽기 6년 전이다. 여섯 차례의 일본 공연은 그만큼 퀸이 일본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퀸은 이처럼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였다. J-팝이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팝음악 잡지 ‘MUSIC LIFE’는 당시 인기 투표를 실시했는데, 그룹 퀸은 ᐅ1975~1978년 1위 ᐅ1979년 2위 ᐅ1980~1982년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91년 11월 24일은 퀸의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날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전하고 24시간 후 사망(당시 45세)했기 때문이다. 그룹의 마지막 앨범인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은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지 4년 뒤 발표됐다. 일본의 열성팬들은 2015년, 퀸의 일본 도착 40년을 기념해 4월 17일을 ‘퀸의 날’(The Queen Day)로 정했다. 일본에서 이런 소동을 벌였던 퀸과 프레디 머큐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부활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극장가에서도 히트 행진 중이다. 신드롬, 팬텀이라고 할 만하다. 음악평론가 스지 스즈키(スージー鈴木)씨는 “헤이세이 최후의 겨울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기억될 것"(平成最後の冬は、映画『ボヘミアン・ラプソディ』とともに記憶されるだろう。)이라고 했다. (일본은 내년 헤이세이 연호가 바뀐다) ‘Love Of My Life’, ‘I Want To Break Free’, ‘Spread Your Wing’ 같은 퀸의 노래들과 함께 2018년의 마지막도 저물어간다. '에~오~ 에~오'.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