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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3대 천연 항생물질

자일리톨, 프로폴리스, 매스틱검 이 세계 3대 천연 항생물질 이라는데 홈쇼핑과 판매상들의 상술에 효과가 뻥튀기된 것은 아닐까요?

* 자일리톨 껌의 충치예방 효과가 과장광고라고 감사원 판정(2017.1월)
2~3개 소량으로는 효과 없음.
* 프로폴리스는 잇몸염증에 일부 효과, 알러지 유발 부작용이 심하고 다양한 플라보노이드는 채소에 더 많다.
* 매스틱검 가루 5~10%를 포함한 제품이 너무 비싸 역류성 위염이 다시 생길 정도.(노니, 모링가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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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오는 공포썰] 사이비 종교 끝장낸 썰
코로나19 때문에 다들 많이 떨고 있을 것 같아 걱정이 크네 그릇된 믿음 때문에, 여러모로 뒤가 구린 사이비 종교 하나 때문에 바이러스가 걷잡을 수 없이 번지고 있구나. 사람들의 불안도 점점 커져서 마스크 값이 폭등하고, 마트에 생필품도 다 떨어졌다면서. 사실은 이 정도로 공포에 떨 것이 아닌데. 조심해서 나쁠 건 하나도 없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까지 공포감을 조성할 필요는 없지 않을까. 더 무서운 건 역시나 불필요한 혐오인 걸. 벌써부터 나뉘어서 싸우고 있는 걸 보니 두통이 다 생기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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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일보’ 1937년 4월13일자 호외) 교도의 사체를 파묻은 백백교의 비밀 아지트는 한두 곳이 아니었다. 전국에 산재한 20여 곳의 비밀 아지트에서 모두 314구의 사체가 발견됐다. 살인은 서울 한복판에서도 버젓이 자행됐다. ‘벽력사’ 문봉조는 신당리 자택에서 교도를 살해한 후 대담하게도 사체를 자전거에 싣고 백주에 종로와 남대문을 가로질러 한강까지 내달렸다. 서울에서 살해당한 교도 수십명이 한강물에 던져지거나 마포, 청량리 일대에 암매장됐다. 양주군의 ‘천원금광사무소’는 교도 살해에 이용된 비밀 아지트 중 대표적인 곳이다. 당시 전 조선은 황금 열풍에 휩싸여 있었다. 삼천리 방방곡곡에 금광이 들어섰다. 그러한 시기, 깊은 산골에 세운 비밀 아지트는 금광으로 위장하는 것이 제격이었다. 부근을 금은광구로 출원하고 인근 유지와 관리들을 초청해 성대한 개소식까지 거행했다. 수시로 빈 화약을 터뜨렸기에 바로 인근 주민들조차 그곳이 금광을 가장한 ‘도인장(屠人場)’임을 까맣게 몰랐다. 천포금광 일대에서만 40여 구의 사체가 발굴되었다. 죽을 때 비명이 새어나갈까 우려돼서 화약을 함께 터뜨렸다고 한다. 백백교는 홍보를 위해 폐광이 된 금광에 금을 숨긴 다음에 전용해의 힘으로 금광이 다시 터졌다는 식으로 사람을 모았다. 전용해는 만일을 대비해 사진 한 장 남기지 않았고, ‘김두선’을 비롯한 16가지 가명을 쓰는 치밀함을 보였다. 전용해의 인상착의는 전적으로 체포된 백백교 핵심 간부들의 진술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오랫동안 동거하던 애첩들조차 그의 얼굴을 함부로 쳐다본 적이 없어 생김새를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의 얼굴을 알고 있는 사람은 2인자 이경득과 교주의 아들 전종기 정도였다. 경찰은 검거에 나선 지 50여 일 만에 양평군 용문산에서 전용해로 추정되는 사체 한 구를 발견했다. 전종기는 코 아랫부분이 산짐승에게 먹혀 없어진 시체를 보자마자 “아이고 아버지!” 하고 대성통곡했다. 양복 주머니에선 전용해가 차고 다니던 시계와 80여 원이 들어 있는 지갑이 나왔다. 부검 결과 전용해의 사망 시각은 2월21일 정오경으로 밝혀졌다. 자신이 ‘신의 아들’이라 주장했고 자신을 믿는 교도들에게 장생불사를 약속했던 전용해는, 유곤용과 다툰 지 닷새 만에 자신의 손으로 목숨을 끊어 신의 아들이 아니라 평범한 인간일 뿐임을 스스로 입증해 보였다. 백백교의 기원은 20세기 초로 거슬러 올라간다. 평북 영변 태생의 동학도, 전용해의 부친 전정운은 금강산에 들어가 도를 닦다가 1900년 천지신령의 도를 체득한 후 세상에 나왔다. 그는 함남 문천군 운림면을 중심으로 인근 사람들에게 도를 전했다. 그를 믿는 사람이 점점 늘어나자 1912년 강원도 금화군 오성산에 본거지를 두고 정식으로 백도교(白道敎)를 개창했다. 강원도를 중심으로 부근 각처에 지부를 두고 포교에 힘써 1915~16년에는 교도가 1만명을 헤아렸다. 1919년, 교주 전정운이 죽자 교세 확장 방법을 둘러싼 간부들의 대립과 부친 유산 분배를 둘러싼 골육간의 싸움으로 교단이 분열된다. 결국 세 아들이 모두 독립해 각자 교단을 하나씩 차렸다. 1923년 5월 전정운의 맏아들 전용수는 간부 이희용을 표면상의 교주로 하여 경성부 도화정에 본부를 둔 인천교(人天敎)를 창립했다. 같은 해 7월 둘째아들 용해는 차병간을 표면상의 교주로 내세워 경기도 가평군 북면에서 백백교를 창립했다. 셋째아들 용석도 형들에 지지 않고 경성부 도화정에 도화교(桃花敎)를 세웠다. 파죽지세로 뻗어가던 백백교의 교세는 1930년 7월, 10여 년 전 백도교 교주 전정운이 금화군 오성산에 그의 애첩 4명을 산 채로 파묻은 구악이 폭로돼 한풀 꺾인다. - “일제는 가고 새 세상이 온다” 전용해와 표면상 교주인 차병간은 가까스로 검거망을 벗어났다. 그들은 지방을 전전하며 비밀리에 교단을 재건했다. 이후 전용해는 서울에 본부를 마련하고, 지방에 있는 심복 교도들을 서울로 불러모았다. 백백교 간부들은 평안도, 황해도, 강원도 등을 순회하며 무지몽매하여 세상 물정에 어둡지만 다소 자산이 있는 사람들을 은밀히 포섭했다. 백백교에서는 성별에 따라 외우는 주문이 달랐는데, 남자가 외우는 주문은 아래와 같다. 백백백의의의적적적감응감감응하시옵숭성(白白白衣衣衣赤赤赤感應感感應하시옵崇誠) 위의 해괴한 주문만 외우면 무병장수한다고 한다 (나무위키) “우리 백백교 교주님은 신비한 힘을 가지고 있는 분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천위(天位)에 등극할 인물이다. 지금 일본의 통치 아래 있지만, 가까운 장래에 반드시 백백교 교주의 통솔 하에 독립이 될 것이다. 그때 각 교도는 헌성금(獻誠金)의 다소와 인물의 능력에 따라 대신, 참의, 도지사, 군수, 경찰서장 등에 임명될 것이다.” “오래지 않아 큰 전쟁이 날 터이니 교도들은 자산을 팔아가지고 상경하라. 교주는 신통력을 가지고 계신 분이므로 반드시 그대들의 생명을 보장할 것이다.” “3년 내 조선에 서른 자 이상의 큰 홍수가 날 것이다. 일반백성은 모두 물에 빠져 죽더라도 헌금한 우리 백백교도는 금강산 피신궁(避身宮)에 들어가 목숨을 구할 수 있다. 홍수 이후 교주 전용해가 등극하여 천위에 오르면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제수할 것이다.” (‘백백교 사건의 정체’, ‘조광’ 1937년 6월호) 백백교 간부들은 정감록의 예언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여 정도령과 소리가 비슷한 교주 ‘전도령’이 후천개벽 세상의 주인이 될 것이라 호언했다. 관존민비의 봉건적 인습에 사로잡힌 사람에게는 관직을 주겠다는 말로, 투기심이 강한 사람에게는 ‘불로장생, 부귀영화’라는 말로 입교를 권유했다. 일단 백백교에 입교하면 교주의 명령에 따라 토지, 가옥, 가재도구 일체를 정리해 서울 본부로 올라왔다. 교주는 신입 교도가 가지고 온 현금을 헌납하게 했다. 데리고 온 가솔 중 미모의 처녀가 있으면 ‘시녀’로 바치게 했다. 교주는 앵정정 본부로 불려온 시녀에게 ‘신의 행사’를 빙자해 욕정을 채웠다. ‘믿음이 약해’ 교주에게 만족을 주지 못하는 여성은 심복 간부에게 넘겨줬다. 간부가 거느린 첩은 모두 이러한 ‘절차’를 거친 여성이었다. 교주는 수십명의 첩을 거느렸다. 7~8명의 첩을 거느린 간부도 있었다. 본부에서 교주와 ‘신의 행사’를 치를 수 있는 여성은 4~5명에 불과했다. 새로운 시녀가 들어오면 기존의 시녀 중 ‘믿음이 약한’ 시녀는 양주, 양평 등지의 심산에 사는 심복 교도들의 집으로 보내졌다. 교주는 한 달에 몇 번씩 교도들의 집을 돌며 시녀들과 ‘신의 행사’를 치렀다. 전 재산과 자녀를 교주에게 바친 교도에겐 “오래지 않아 백백교의 천하가 올 터이니 그때까지 농촌에 가서 농사를 지으면서 기다리고 있으라”는 명령이 하달됐다. 교도들은 연천, 양평, 철원, 평강 등 산간벽지 교통이 불편한 외딴집으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교도들은 화전을 일궈 근근이 연명했다. 교단은 교도들이 근처 부락 사람들과 접촉하지 못하게 막았고, 탈출을 방지하기 위해 교도들을 수시로 이주시켰다. 교도가 수상한 행동을 하면 처자 형제를 각각 다른 지방으로 보내 격리했다. 어디 있는지도 모르는 가족의 신변 걱정에 교도들은 차마 딴 마음을 품지 못했다. 재산과 가족을 빼앗기고 어딘지도 모르는 산간벽지로 보내져 인간 이하의 생활을 하면서도 임박한 백백교의 세상에 대한 꿈을 잃지 않은 교도가 없진 않았다. 그러나 대부분은 자신의 어리석은 선택을 후회하고 교단에 대해 불만을 품었다. 전용해와 측근 간부는 교단에 불만을 품은 교도를 배교분자로 분류했다. 교주는 배교분자를 비밀 아지트로 데리고 가서 ‘기도’를 올려주었다. ‘기도’는 교도를 살해해 암매장하는 것의 다른 이름이었다. 성인들이 타살된 후 딸린 어린 아이들은 산 채로 암매장됐다. 범죄 사상 초유의 대사건이었던 만큼 수사와 예심에만 3년이 소요되었다. 살인기록 보유자 문봉조 외 간부 24명은 보안법 위반, 살인, 사체유기, 상해치사, 살인강도, 외설, 사기 공갈, 횡령, 공사문서 위변조 등 10개 죄목으로 공판에 회부됐다. 피고인 24명 중 살인에 관련된 피고인만 18명이다. 살인 수효를 들으면 한층 더 전율을 느끼게 된다. 문봉조가 공범자와 함께 죽인 사람이 49회에 129명, 이경득이 61회에 166명, 길서진이 48회에 169명, 길군옥이 34회에 121명, 이한종이 11회에 35명 등이다. 그 죽인 방법도 참혹하기 짝이 없어 마치 사람 죽이는 것을 병아리나 죽이듯 쉽게 여겼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공소사실 진술에만 1시간이 소요됐다. 재판장이 검사의 공소사실을 인정하느냐고 묻자 9명의 피고인이 살인 및 사체유기 사실을 부인했다. 재판장은 피고인들을 앉히고 개별심리에 들어갔다. 재판장은 사건을 최초로 고발한 유곤용의 부친 유인호를 일으켜 세우고 신문에 들어갔다. 장로 유인호는 백백교 30년의 역사를 소상히 알고 있는 인물이었다. 재판장: 어째서 백백교를 믿었느냐? 유인호: 대원님을 따르면 불로장생 호의호식 한다기에 믿었습니다. 재: 전용해의 부친 전정운이 창설한 백도교에 관계했느냐? 유: 예, 그때부터 믿었습니다. 재: 무슨 동기로? 유: 어렸을 때, 아버지가 백도교를 믿으면 모든 재액을 피할 수 있다기에 믿었습니다. 재: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이냐? 유: 무식해서 교리는 모릅니다. 재: 헌성금은 얼마나 바쳤느냐? 유: 전재산을 모조리 바쳤습니다. 재: 네 딸을 전용해의 첩으로 준 이유는 무엇이냐? 유: 선생께서 요구하기에 바쳤습니다. (‘동아일보’ 1930년 3월14일자) 이어 벽력사 문봉조에 대한 신문에 들어갔다. 문봉조는 백백교의 행동대장격으로 49회에 걸쳐 129명의 교도를 살해한 혐의를 받고 있었다. 재판장: 백백교의 교리가 무엇인가? 문봉조 : 선생께서 말씀하시기를, 머지않아 서양은 불로, 동양은 물로 심판을 받아 인류가 전멸하는데 그 심판에서 구원을 받으려면 백백교를 믿어야 한다, 심판 때 동해에 영산이 떠오르는데 교도들은 전부 피난해서 거기서 홀로 장생하고 병에도 걸리지 않는다고 하셨습니다. 선생께서는 신이 사람의 모습을 쓰고 내려온 구주라고 하셨습니다. 재: 헌성금이란 어떤 것인가? 문: 입교한 자는 자기 재산을 팔아 교주에게 바치도록 했습니다. 재: 검거 당시까지 얼마나 받았는가? 문: 알 수 없습니다. 재: 전용해가 교도에게 돈을 준 일이 있는가? 문: 생활이 가난하면 얼마간 주신 일이 있었습니다. 재: 생활이 곤란한 교도 중에는 교주에게 불평을 품은 교도도 있었겠지? 문: 믿음이 엷은 교도 중에는 혹 불평을 가진 사람도 있었습니다. 재: 그런 불평분자는 모두 피고인들에게 명령해서 죽이게 했다지. 문: 예, 그랬습니다. 재: 전용해는 교도 중에서 딸이나 누이동생이 있는 사람에게 그 딸과 누이동생을 바치라 해서 첩을 삼았다지? 전부 몇 명이나 되는가? 문: 정확한 명수는 알 수 없습니다만 앵정정에만 34명 있었습니다. 재: 그래 전용해는 매일 술만 먹고 첩과 음탕한 생활을 해왔다지? 문: 밥보다는 술을 좋아하셔서 매일 ‘월계관’이나 ‘백학’ 한 되쯤씩 자셨습니다. 재: 전용해는 자기 재산은 없이 교도에게서 모은 돈을 물 쓰듯 하여 방탕하고 사치한 생활을 했는가? 문: 예. 재: 그런 음탕한 생활을 하는 전용해를 어떻게 신의 아들이라 믿을 수 있었는가? 문: 지금 생각하니 잘못 믿고 있었습니다. 술 먹은 때는 그렇지만 선생께서 가르치는 말은 모두 훌륭해서 믿었던 것입니다. 재: 그래, 아직도 전용해를 신의 아들로 믿는가? 문: 천만에요. 지금 생각하면 모두 어리석어서 속았던 걸 깨달았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문봉조를 비롯한 피고인 전원은 자신의 과오를 뉘우친다고 했지만, 교주를 지칭할 때 꼬박꼬박 경어를 썼다. 오랜 습관 때문인지 뉘우친다고 거짓 진술을 한 것인지 알 수 없었다. 백백교의 2인자 이경득은 전용해의 인격을 숭배해서 믿었는지 반역하면 죽이는 것이 두려워 믿었는지 묻는 질문에 정말로 신의 아들로 믿었다고 진술했다. 불평을 품고 있을 때마다 교주가 “이 놈 네가 불평을 품고 있구나. 다른 데 가고 싶거든 가거라” 하여 독심술을 가졌다고 믿을 수밖에 없었다고 덧붙였다. 나머지 피고인들도 모두 교주가 진짜 ‘신의 아들’인 것으로 믿고 백백교에 귀의했다고 진술했다. 23명의 교도를 살해한 이창문은 백백교만 믿으면 가족의 병도 낫고 또 불로장수하는 줄만 알고 입교했으나 교주가 자칫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을 알고 무서워 도망까지 해보았지만 교주 밑에 남기고 온 처자의 목숨이 염려되어 죽음을 각오하고 되돌아간 적이 있었다고 말해 재판정을 숙연케 했다. - 1940년 3월15일, 수은주가 영하 7℃까지 떨어지고 연 이틀 눈이 내렸다. 말하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억울하게 죽은 314인의 원귀가 내린 저주라 말했다. 때늦은 혹한에도 불구하고 방청석은 여전히 만원이었다. 제2회 공판에서는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진행됐다. 314건의 살인혐의가 차례로 확인되었다. 재판장: 1930년 8월 둘이서 제2세 교주 우광현을 무주군 설천면 야산에서 목매 죽였는가? 이경득, 길서진: 예. 재: 이유는? 이경득, 길서진: 모릅니다. 대원님께서 죽이라고 해서 죽였을 뿐입니다. 재: 1931년 2월 20세가량의 여자와 그 젖먹이 애를 죽였나? 이경득, 길서진: 예. (중략) 재: 1931년 5월 교주의 첩 문봉례를 죽일 때 업고 가던 젖먹이도 죽였는가? 문봉조 : 문봉례를 죽인 것은 사실이지만, 애는 안 죽였습니다. 대원님께서는 애까지 죽이라 하셨지만 이경득이가 “어린애야 무슨 죄가 있느냐?”며 죽이지 말자고 했습니다. 저 역시 젖 먹다가 어미를 잃은 계집애 처지가 하도 가련해서 집에 데려다가 기르고 있습니다. 재: 문봉례를 죽인 이유는? 문: 처음엔 몰랐습니다만 후에 알고 보니 오빠를 죽인 것을 알까봐 죽이란 것이었습니다. 재: 어째 친형인 문봉진과 그 가족을 죽였는가? 문: 자꾸 서울 오겠다는 걸 말렸지만 듣지 않아 할 수 없이 상경시켰습니다. 어느 날 대원님께서 먼저 “봉진은 어떤가?” 하시는 태도가 죽이자는 뜻이었습니다. 만일 형을 안 죽이면 나도 죽겠고 내 가족 친척도 남모르게 죽겠기에 형을 죽였습니다. (‘백백교 사건 공판 방청기’, ‘조광’ 1940년 5월호) 피고인들은 아녀자는 물론 젖먹이 어린애, 친형까지 대원님의 명이라면 서슴없이 도륙했다. 사흘 후 속개된 제3공판에서도 살인죄에 대한 사실 심리가 계속됐다. 심리는 일사천리로 진행됐다. 살인 사실을 한 묶음 두 묶음씩 통틀어 심리했다. 피고인이 부인하면 부인하는 대로 그냥 넘어가는 식이었다. 몇 가지 혐의에 대해 부인해도 판결에는 영향이 없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100건의 살인혐의 중 99건의 혐의를 부인해도 판결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살인사건은 1932년 이후 갑자기 증가했다. 그때부터 불평분자 본인만 아니라 한 가족 전부를 몰살해버린 탓이었다. 불평을 가진 자만이 죽은 것도 아니었다. 먹여 살리기에 귀찮다든가 한 장소에 너무 많은 교도가 있어 경찰에 발각될 우려가 있어 죽인 교도도 적지 않았다. 1년은 족히 걸리리라는 예상과 달리 공판은 일주일, 단 4회만에 종결됐다. 검사는 살인과 관련된 18인의 피고인 전원에게 사형을 구형했다. 먼저 피고 가족석에서 울음이 터져나오고 연이어 나이 어린 피고인 몇 명이 말없이 눈물을 흘렸다. 과오를 뉘우치고 흘리는 눈물인지 목숨이 아까워 흘리는 눈물인지는 알 수 없었다. 재판장은 가담 정도가 경미한 피고인 4명만 징역 7~15년으로 감형하고 나머지 14명에게 검사의 구형대로 사형을 선고했다. [출처] ‘백백교(白白敎) 사건’ 공판기 __________________________ 읽으면서 많이 놀랍지 않아? 지금 '그' 종교의 실태와 그리 다르지 않은 것 같아서 말야. 물론 살인까지는 아니지만... 일제강점기라 사람들의 마음도 많이 약해져 있고, 제대로 된 법 체계도 갖춰져 있지 않았으니 저렇게 안하무인일 수 있었겠지. 약한 마음을 파고들어서 나중의 구원을 약속한 후 재산을 다 헌납하게 하고, 가족까지 끌어들이고 여색을 취하는 게 정말이지 어떤 종교와 같지 않아? 헌금액에 따라 관직을 주고, 처음부터 순박하면서 재산이 있는 사람을 노리는데다 사바사로 그가 혹할 말로 꼬드기고, 게다가 마음 먹고 빠져나오려고 해도 가족들을 볼모로 잡고 있어서 힘든 일인 것 까지. 저들은 거기서 멈추지 않고 (밝혀진 것만) 몇백명을 살인했기 때문에 모두 큰 벌을 받게 되었지만 지금의 종교는 어떨까. 훨씬 더 교묘하게 사회에 파고 들어 있어서 잘 걸러내 질 지도 모르겠네. 부디 그럴 수 있었으면 좋겠다. 혹여 아직도 '그' 종교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그 종교 뿐만 아니라 모든 이단에 빠져 있는 사람들은 한 번 객관적으로 생각해 보는 기회를 가졌으면 해. 그들은 너를 구원해 주는 존재가 아니라 너의 심약한 마음을 부풀려 잡아 먹는 괴물들일 뿐이니까. 참고로 사형을 선고받은 저들에게 실제로 사형이 집행이 됐는지는 몰라. 직후에 태평양 전쟁이 벌어지는 바람에 신경 쓸 여력이 없었으니까. 아. 사건이 일단락된 후에 일제는 범죄형 두개골에 대한 연구 목적으로 교주인 전용해의 머리를 잘라내서 포르말린에 절여 범죄형 두개골 표본으로 만들었다고 해. 정말 일본은 박제하는 걸 좋아하지 참? 해방 후에는 국과수가 (이유도 모른 채) 보관하고 있다가 2011년에야 화장을 했고. 약한 사람들 마음을 좀먹고 살았던 사이비 교주의 마지막은 이 정도로 비참해야지. 암.
가족을 찾아 드립니다 #훈훈
무슨 좀비라도 돌아다니는 줄 알겠어여. 길에 사람이 왤케 없죠?! 그냥 잘 씻고 안씻은 손으론 얼굴 안 만지고 정상적인 생활 하면 - 엄청 가까운 사람이 확진자가 아닌 한은 - 안전하니까 너무 지구 멸망한 것 처럼 그르지마요.. 라고 말해도 다들 무서워하실거니까 훈훈한 이야기 같이 보려고 여요사요가 와ssup맨! 우선 얘부터 보실래여? 아니 인형이 셋이나 있넹? 오딨는지 못 찾겠어 아가야 +_+ 너무 기여운 아가는... 누군가의 개는 아니에여. 입양을 기다리고 있는 아이랍니다. 이 아이도 마찬가지로 주인에게 버려진 아이. 너무 기엽져 +_+ 근데 어떻게 이르케 깨끗하고 예쁘고 사랑받는 표정을 지을 수가 있냐구여? 그건 바로... 미시시피에 있는 한 호텔의 프로그램 덕분이랍니다! 'Fostering Hope'이라고 불리는 이 프로그램은 미시시피 힐튼호텔 지사 중 한 곳의 로비에 입양을 기다리는 개들이 쉴 공간을 마련해 주고, 호텔의 투숙객들에게 이 개들을 위탁하게 하는 거예여. 이 호텔은 한 달 이상의 장기 투숙객이 대부분이라 가능한 일인거져. 원한다면 누구나, 호텔에 머무는 동안 이 개들을 자신이 묵는 방에 들여서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어여! 연간 8000여마리의 개를 수용할 수 있는 이 곳. 그래서 댕댕이들에게 새 가족을 찾아주기에는 안성맞춤이져. 외로운 강아지들 뿐만 아니라 외로운 사람들에게도, 가족이 필요한 줄도 몰랐던 사람들에게도 가족을 찾아 주는 곳 물론 위안에서 끝나는 건 아니구 이르케 사랑스러운 표정을 짓는 아가들을 어떻게 두고 떠나겠어여. 지내는 동안 정이 한참 들어 버렸는데 +_+ 그래서 원하는 사람들에게는 '실제로' 이 개들의 입양 절차를 밟아 준다구 해여! 실제로 벌써 34마리의 댕댕이들이 함께 머물던 사람들의 집으로 입양되어 갔다고... 물론 호텔에서 생각했을 때 적합한 주인이 아니라는 판단이 들면 입양을 거부할 수도 있대여. 너무 사랑스러운 서비스 아닌가여 +_+ 물론 여러모로 제대로 된 관리가 있어야 가능한 일이겠지만 시도해 봄직한 일인 것 같아여. 가족을 찾는 댕댕이들에게 맞는 가족을 찾아주기 위해서는 정말 많은 사람의 도움이 필요하잖아여. 여기가 어딘지 궁금한 분들은 Home2 Suites by Hilton Biloxi North/D'Iberville를 찾아 보시길! 그럼 훈훈한 소식 뿌리고 사요사요는 또 떠납니당 다들 미워하지말고 화내지말고 서로 돕고 사랑합시다..+_+
별빛 밤 아래 위스키, 몽골#2
울란바토르를 벗어나 한시간정도 달려서 테를지 국립공원에 들어섰다. 국립공원이라고는 하지만 국립공원 내 풍경과 오면서 본 풍경이 크게 다르지 않았다. 단지 초원 한가운데 저 멀리서 보이는 징기스칸 동상하나가 주변 풍경과는 다른 모습으로 반겨주고 있다 징기스칸 동상 주위로는 여전히 광활한 초원이 펼쳐져 있어 동상이 더 웅장해 보이긴 하다 이런 주변 풍경 가운데 서 있다. 내부에는 징기스칸 박물관처럼 그당시 몽골 생활 모습과 유목 가옥인 게르도 전시되어 있었다. 징기스칸 동상의 말부분에도 올라가서 전망을 구경할 수 있다. 올라가면 바람이 강하게 분다. 초원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막힘없이 달려와 징기스칸 동상을 감싸돌고 있다. 간단한 구경과 함께 나오면 한화5천원에 독수리를 팔에 올려 사진을 찍을 수 있는 코스도 있다. 팔에 보호대를 차고 독수리를 올려놓으면 끝이 아니라 날개를 펄럭일 수 있도록 팔을 높이 흔들어야 한다. 하지만 바로 내 오른손 위 눈앞에서 보이는독수리의 부리의 반짝임에 자꾸만 팔의 움직임이 작아진다 독수리를 뒤로 하고(?) 둘째날 숙소를 향해 오프로드를 다시 달리고 달렸다. 초원 중간중간 게르들이 있는 것을 보며 문득 궁금해 땅 소유에 대해 물어보니, 원하는 땅에 게르와 울타리를 치고 일정기간 지내면 그 땅의 소유가 된다고 한다. 물론 수도인 울란바토르는 우리나라 서울과 마찬가지로 땅값과 집값을 비싸게 내야한다고 했다. 다시 한시간 가까이 달렸을까. 정면에 보이는 커다란 바위하나가 산처럼 자리잡고 있었다. 묘한 모양을 닮은듯 하여 봤더니 이름 또한 거북이를 닮아 거북바위라 불리고 있었다. 늦겨울에 울란바토르보다 조금 더 북쪽으로 오니 벌써 눈꽃들이 피어나있다. 거북바위 근처에 바로 숙소가 있었다. 첫날과 마지막날을 제외하고는 전부 게르에서 여정을 쉴 예정이라 기대가 됬다. 나름 여행자를 위한 게르라 화장실도 별도로 있다. 외부에.. 푸세식.. 더욱더 신기했던건 여행기간 내내 화장실이 있던 곳에는 남녀 구분도 없을 뿐더러 화장실 문이 없다;;;; 심지어 문이 있어도 안에서 닫을 수 있는 손잡이가 없어서 집중시간 내내 문이 열린다.. 참으로 자연에 활짝 열린 개방적인 집중의 시간을 즐길 수 있다. 숙소 근처에는 사원이 하나 있어서 가이드의 안내로 산책겸 구경갔다 사원에 올라 바라보는 모습이 장관이다. 북쪽에는 이런 산악지대가 많아서 초원과는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다. 다시 게르에 내려와 준비하는 저녁 메뉴는 삼겹살, 양고기등 몽골음식에 적응하기 힘들까봐 가이드분이 특별히 준비해주셨다. 게르안에는 나무때는 난로 하나와 침대가 끝이다. 이땐 몰랐지만 조명불이 들어오고 콘센트가 있으면 A급이다. 전가, 조명이 없어 랜턴으로 생활한 게르가 대부분이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어둠이 내려앉기를 수다를 떨며 기다렸다. 유심을 사도 터지지 않는 인터넷에 스마트폰은 카메라와 mp3로 전락한지 오래됬다. 별도로 저장한 노래는 인터넷이 터지지 않는 7일간 무한 반복되어 팝송 가사도 다 받아적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화장실이 있으나 수도가 없어 씻는건 무조건 도시 마트에서 사온 생수로 해결해야한다. 생수로 아껴가며 씻고 나오는데 추운날씨 때문에 얼굴에 하얀 김들이 모락모락 피어 오른다 드디어 몽골 밤하늘과의 첫대면!! 굳이 카메라없이 눈으로 다 담아내기에도 부족할정도로 빼곡하게 별들이 박혀있다. 출시된지 10년도 더 된 카메라에도 별들이 선명하게 각인되어 나온다 이 화려한 은하수 아래 한병 귀하게 사온 이름 모를 위스키 한잔을 마시며 추위를 몰아냈다. 하염없이 별을 보고 싶은 마음과 추위와의 인내심 대결에 위스키 한 잔은 바닥에 주저 앉아 몇 분이라도 더 하늘을 바라보게 만들어 주었다.
별빛 밤 아래 위스키, 몽골 #4
아직 어둠이 채 가시기전에 침낭속에서 눈을 떴다. 싸늘하게 식은 난로에 추워서가 아니라 아침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보고 싶었다. 게다가 생수로 씻어야되서 바빠지기전에 가볍게 세수라도 해야했다. 지평선 위로 떠오르는 태양 바로 아래 직사각형 모양이 화장실이다. 저곳이 이 게르 숙소의 핫 플레이스다. 아침에 화장실에 일을 해결하고 있으면 지평선 너머로 해가 떠오르는 모습을 정면에서 볼 수 있다. 문이 없는 화장실 특성상 일출의 햇살을 실시간으로 반겨줄 수 있다. 게르 주변에 낡은 차량 한 대가 타이어 하나를 마냥 기다리며 멈춰서 있었다. 그 옆에 병원 침대처럼 보이는것도 방치되어 있는 것을 보니 조만간 차량이 치료 받고 다시 움직이지 않을까 싶다. 참 간단하게도 광활한 초원과 구름 몇 점 떠있는 깊고 푸른 하늘만 끝없이 펼쳐져 있는 곳이지만 카메라를 대는 곳곳 마다 미소짓게 만드는 사진이 나온다. 카메라가 무엇이든간에 상관이 없다. 성능이 낮거나 오래되어 낡은 카메라, 스마트폰도 풍경 한순간 한순간을 나름의 매력으로 담아낸다. 비포장길을 하루 6시간이상 달리다 보니 다리 떠는 버릇이 있는 사람이라면 자연스럽게 버릇이 사라질 것 같다. 다리 뿐만이 아니라 온몸이 쉴새없이 떨리고 떨린다. 바얀작에 도착해서 구경하는데 차강소브라가와 비슷한 모습에 문득 이런 생각도 들었다. 너무 초원이 많다 보니 바람의 섬세함으로 조각된 이런 언덕과 계곡들이 관광지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별볼일 없고 웅장한것도 아닌 하나같이 멋있고 웅장하게 서 있는 모습들이 새삼 진부하게도 자연의 위대함을 깨닫게 해준다. 가이드 해주신 분이 하나하나 포토존을 알려주고 시크하게 앞장서서 지나갔다. 우리야 신기하고 속까지 개운해지는 모습이지만 자주 본다면 우리나라 올레길, 둘레길과 별반 다르지 않은 산책길이 아닐까 싶다. 왜 자꾸 높은 곳에 올라서서 멀리멀리 바라보게 되는지 알 것 같다. 고개를 숙여 바로 아래의 땅부터 서서히 고개를 들어 끝없는 지평선과 맞닿아 있는 하늘까지 한 편의 파노라마 사진처럼 눈에 담긴다. 끝이 보이지 않는 지평선 너머를 1cm라도 더 보고 싶지만 굳이 애써서 강제로 보고 싶은 생각은 없는 스스로의 관용의 마음이 생긴다. 신기한게 관광지라고 입구도, 관리인도 없어 단지 여행가다 잠시 쉴려고 근처 언덕에 들른듯한 느낌이었다. 다 왔다~ 하는 소리가 관광지에 들어가는 입구를 만들어주었다. 여행하는 사람마다 스마트폰, 카메라가 다르고 사진 찍는 스타일이 다르니 총 5가지 방법으로 몽골여행 사진을 즐기고 있다. 넓은 지평선 만큼이나 파노라마의 시원한 사진도, 360카메라를 사용한 기묘한 사진도, 직접 눈으로 봤었던 장면들을 아른거리며 떠오르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다. 어쩌다 아스팔트 위를 달리게 되면 새상 그렇게 행복할 수가 없었다. 몸의 모든 긴장이 풀어지며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길을 가다 휴게소 같은 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밖에 있는 주유소가 그렇게 생뚱맞게 보일수없었다. 진짜 이 주변 모습에서 가장 생뚱맞을게 스마트폰으로 사진찍는 우리 모습일지도 모르겠지만 멀뚱히 있는 주유소가 어쩌다 지나갈 차량의 소중한 쉼터와 보충의 공간이 되어 주고 있었다. 양고기로된 덮밥과 고기 튀김,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수테차로 간단히 요기를 끊내고 다시 푸르공에 짐처럼 몸을 싣고 움직였다. 길 가다 보면 이런 낙타와 말, 소들이 초원을 활보하며 다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다시 시골의 구멍가게 같은 정겹게 생긴곳에 들러 물과 술을 보충하고 푸르공에 기름도 보충했다. 게르에 도착 했을 땐 해가 어느새 뉘엿뉘엿 넘어가려 하고 있었다. 이날의 밤 하늘 별사진 주인공은 360카메라 였다. 같이 여행간 친구가 가져온 360카메라로 보는 별 사진은 화려하게 빛나는 별과 함께 화려한 시선으로 보게 해주는 마성을 지녔다. 역시나 보정은 못해 기계에만 의지하는 곰발곰손이다. 신기하게도 사진을 찍어보니 스마트폰의 화면 색이 다 다르다. 25초로 길게 설정해놓은 카메라 세팅값에 각자 화면이 꺼지지 않도록 부지런히 터치 하느라 엄지 손가락이 바빴다. 두번 째 사진은 360카메라로 찍었다. 달이 완전히 지지않아 지평선 끝에 달도 함께 사진 찍을 수 있었다. 그리고 빼먹을 수 없는 위스키, 보드카 한잔... 공기가 좋아서인지 매일밤 마셔도 숙취가 없어서 참 다행이다
전생몽(前生夢)
전생몽 꿈에서 나는 뭐 하나 잘할것 없는 (셈은 빠른)그저 곱상하고 귀티나게 생긴 여자아이였고 내 소꿉친구는 살집은 좀 있지만 그것마저 내눈엔 측은하고 귀여운 춤과 노래를 타고난 퇴기(전직기생)의 넷째딸이었어. (겨우 두시간 잔거야?억울억울) 우린 성벽옆으로 개천이 흐르는 성근처에서 움막같은 불법가건물을 이어서 옹기종기 살아가는 도성안 하층민들이었는데 나나 친구나 아버지의 존재가 안느껴졌어.특히 내 친구의 아버지는 어딘가 부역을 끌려갔다가 돌아오지 못한것 같았고 실내에 기둥이 너무 많은 우리집의 한쪽벽에는 아버지의 사진이 걸려 있었는데 군관복장에 군모를 옆구리에 끼고 앉아서 찍은것이었어.황군?(구한말?1930년대?) 흑백사진이고 꿈속의 나는 무심하고 익숙한듯 그것이 벽에 걸린지도 모르는지 휙 지나쳤어. (소녀가 보는것,듣는것,겪는것들만 내가 간접경험할수가 있더라,이젠 꾸다꾸다 이런 패널티로 시작을 하네,속좀 탔어) 도성안 인텔리집안의 소년 (이제 겨우 많이 봐도 14-15쯤 된 검은교복차림)이 나(11살-12살쯤)를 찾아와 사진모델 일을 하면 친삼촌이 돈을 많이 챙겨준다고 했다며 잠깐만 기다리라더니 급히 가까운 초대궐같은 가옥엘 들어갔다오며 옷도 하얀스웨터에 진회색바지차림에 자전거를 끌고왔어. 꼬맹이들 난리났네.자전거클락션을 울려보고 패달돌리고 난리북새통인데 어떻게 급히 친구네 세째언니가(권번에 저학급로 출석하는듯한데 다리한쪽이 살짝불편해보였어) 엄마의 경대를 들고나와 급하게 우릴 낮도깨비로 분장시켜줬어.이 언니,우리가 어리다고 너무 막하는거 아닌가 싶었는데 친구도? 친구는 어디 활성영화같은걸 찍는데 목소리녹음을 뜨기로 했대. 박가분같은 허연분칠갑에 눈도 제대로 못뜨고 거울을 찾아 더듬거리는데 흰스웨트오빠(구한말맞나봐,남자이름도 우리이름도 요상한 일본이름,잘못알아듣겠더라)가 후욱 불어주는데 버섯포자처럼 날리는 분가루들이 판자집에 엉성한 벽들틈사이로 들이운 햇살에 깨(플로아트에서반짝이효과)친것처럼 반짝이는데 내 맘이 다 설레더라.(둘이 풋사랑모드인듯한데 모르는것 같았어) 내가 지금생의 12살, 이렇게 눈부시게 해맑게 웃었던가(이번생보다 바탕은 더 이쁘고 몸집이 작더라,못먹고 자랐나봐) 싶게 정말 예쁘게도 서로 눈맞추고 마주보며 웃더라.반달눈이야,둘다!이햐~ 살인미소가 무려 세트네.무슨 민폐야 그렇게 난 카메라앞에서 이런저런 옷(스튜디오뒤 탈의실,겁나 춥더만 어린것이 고분고분 착하게도 수십벌을 갈아입고,갑질을 모르네.착한건지 어린건지 분리되면 한수 가르쳐주고싶대.현생의 ㅊㅇ가 전생의 ㄹㅎㄲ에게...창시개명?한국사머리아포) 그렇게 스튜디오 촬영을 마치고 친구는 녹음을 마치고 돌아와 친구가 얻어온 꽃떡과 과자같은걸 동네친구,동생들이랑 나눠 먹고있는데 우리엄마(어라,진짜 엄마 닮안...근데 드쎄)가 와서는 내친구의 웃도리를 확 벗기더니 그 주머니에서 지전을 가로채고는 웃외투를 확던져버리곤 중얼거리며 가더라. "기생핏줄 아니랄까봐..." ('엄마!부모디스는 반칙이지!'우리엄마,전생에도 좀 못땠었구나!) 성벽을 끼고 인가쪽으로 내려가는 엄마의 뒤통수에다 "엄마,이모(친구엄마)한테 반 줘야돼!" 훽 돌아보며 "시끄럿!(내가) 그동안 못받은돈이 얼만데,내 이년(친구엄마)을 오늘 기름이라도 비틀어짜 받아내고 말지.어디 어린것들 내돌리며 돈은 돈대로 챙기고(우린 처음해본 일인데,그동안 이런일로 자식팔아 뒷구멍으로 챙기고 있었다고 생각한듯,우리는 처음 간거지만 합리적인 의심이긴 해)불쌍한척 행세하고 있었어,불쌍년!" "아니,그래도 ㅁㅇㄲ몫이 거기 반있으니까 엄마가 챙겨줘야돼,알았지?" (우리엄마 전생 걸크러쉬보소,우와!욕이 너무너무 찰져,이 판자촌에서 서열이 되시나보네,지리고!) 엄마가 친구에게 내던지고 간 웃외투를 줏어 걸쳐주며 "좁쌀살돈은 줄꺼야,ㅎㅎ 걱정마!" (시대적 가난인지,업인지... 그래서 우리엄마가 기승전돈돈돈이셨구나.) 빨래터 내려가는 돌계단옆 성벽에 앉아 해지며 제법 쌀쌀한 날씨에 친구랑 어깨동무를 하곤 마주보며 웃다 성밖을 내다보는데 내 눈은 자꾸만 친구의 외투로 곁눈질이 가. '이 촉감,이 재단,이 소재...너무 낯설어.' 이 느낌,아주 어렸을때 내가 어느집에 장식된 유리관안 기모노인형을 만져봤을때의 그 느낌과 흡사한데,얜(친구) 허리에 뭘 이리 둘렀네.그러고보니 좀전에 엄마도 게다를 신었네.우리 엄마는 비녀머리도 아니네.친구언니도 옷차림,언행이... 가재도구들도 많이 낯설어,집구조들도 그냥 판자촌느낌이 아니라 마루형에..여긴 어디야? 왜 움막같은 집안에 화로같은게 중앙에 있었지? 일애니에서 보던 ...설마...?! 놀라 깨버렸어. 생각도 못했어.개화기쯤으로 생각했는데,훌쩍! 놀라깨지말고 현생인연들과 겹치는 얼굴들도 조사해볼껄...아꿉! 엄마는 전생에도 우리 엄마야? 전생패널티 참! 전생엄마도 세상든든했겠어. 보고싶은 엄마♡
(펌) 수상한 청도 대남병원 (깁니다)
2/26 수상한 청도 대남병원  1. 지금까지 청도 대남병원에서 코로나19에 감염된 사람은 113명이다. 사망자는 무려 8명이나 된다.  세간의 관심은 이만희 형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이 누구인지를 가장 궁금해 하지만 그 부분은 이제 대강 추론이 가능하다. 신천지 간부들, 그리고 지역 정치인, 유지들은 참석했을 것이다. 어제 홍콩 사우스모닝포스트에서는 "우한에 신천지 신도가 200명 있고 작년 12월까지 모임을 가졌으며 설 무렵에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하니 그들 중 간부급들이 이만희 형 장례식에 참석했고 코로나19를 옮겨 왔을 것이라고 보는 것은 이제 무리가 없는 추측일 것 같다.  2. 때문에 우한에서 활동을 하다가 (일본 우회 등을 통해 입국한) 신천지 신도들을 찾는 수사를 해야 한다. 현재로서 신천지가 협조를 제대로 할 가능성은 없다.  정치인들과 지역 유지들의 경우 참석 자체 보다 신천지와 어느 수준의 유착관계가 있는지를 밝혀내는 것이 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특히 이런 큰 일이 자신들의 관할 지역에서 터졌는데 코빼기도 비치지 않고 있는 청도 군수 그리고 경상북도 도지사는 우선 코로나19의 감염여부라도 확인이 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철우 도지사는 안기부 출신이라 비밀 작전 수행 중인가? 더 이상 숨지말고 어서 나오길.... 3. 내 관심은 이제 청도 대남병원 자체에 대해 궁금해 지기 시작했다.  궁금한 이유는 두 가지인데 이렇게 짧은 기간 코로나19 확진자와 사망자가 많이 발생했고 그래서 여러가지 의혹이 증폭되는 상황임에도 병원장 등 책임 있는 사람은 극도로 노출을 꺼린 채 아무런 해명이 없다는 점이 첫번째고 검색을 해 봐도 병원에 대해 나오는 정보가 극히 제한적이라는 점이 두번째였다. 심지어 아주 평범한 정보만 있던 병원 홈페이지조차 닫아 버렸다. 그야말로 베일에 쌓여진 병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병원장이 오한영이라는 인물이라는 것만 유일하게 검색이 되었다. 그런데 청도 지역 행사에 노출된 오한영 원장의 모습은 생각보다 젊어 보였다.   그래서 좀 더 근성을 가지고 구글링을 해 보았다. 흥미로운 사실들이 많았고 파악된 내용들은 다음과 같다.  4. 현 청도 대남병원장이자 이사장은 오한영이고 부친의 이름은 오성환이다.  오성환은 대구 경상병원이라는 중견규모 병원의 이사장이었는데 전임 이사장은 오성광으로 둘은 형제관계이다. 두 형제는 방만한 병원 경영으로 '알려진 횡령 금액만 300억에 달한다'는 코리아헬스로그라는 의료전문 언론의 과거 기사를 찾을 수 있었다. 오성광은 건강보험공단에 21억 원의 부당 청구를 하는 등 특가법상의 배임, 횡령 등의 혐의로 검찰 수사를 받게 되자 동생인 오성환에게 이사장직을 넘겼다. 오성광은 노조와도 갈등이 심했는데 용역깡패를 동원해서 노조원들을 폭행 하기도 했다.  갈등의 주요 이유는 병원 수익금을 횡령했지만 임금은 체불했기 때문이다. 경상병원은 오성환이 운영하다가 고의 파산시켰고, 그 결과 200억 원의 채무를 탕감 받았다고 한다. 5. 그런데 경상병원 외에도 이 두 형제가 소유하고 있던 의료법인, 사회복지법인은 상당히 많았다. 그리고 그렇게 많은 의료법인과 사회복지법인을 소유하게 된 출발은 부산 구덕원이었다.  구덕원은 현 청도 대남병원장 오한영의 조부인 오이선이 설립한 사회복지법인이다. 검색을 하면 우수수 나오겠지만 여기야 말로 온갖 비리의 온상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수상하다. (문득 형제복지원이 생각났다) 6. 구덕원을 보면서 살짝 소름이 돋았던 것은 설립년도가 1984년라는 점이다. 신천지도 1984년도에 설립되었다.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구덕원은 횡령, 배임, 리베이트, 뇌물, 비자금 세탁 등 다양한 방식으로 부당하게 부를 축적했고 그렇게 축적한 재산으로 다른 사회복지법인을 설립하고 의료법인도 설립하면서 3대에 걸쳐 현재는 약 10개의 관련한 법인들을 운영 중에 있다. 7. 구체적으로는 최초 구덕원을 시작으로 경북 청도와 대구 경산 지역에 각각 사회복지법인과 의료법인을 설립하고 그 위에 유령재단과 산하 법인들을 컨트롤하는 유령회사를 만들어 운영하는 방식이었다. 정리를 해 보면 ‘영선재단’이라는 유령재단과 ‘미소커뮤니티’라는 유령회사를 가지고 부산지역에는 구덕원, 부산노인건강센터, 구덕병원, 구덕실버센터, (주)한길, 사단법인 영선의료복지선교재단을 운영하고 있고, 대구, 청도 지역에는 청도대남병원, 군립요양병원, 사회복지법인 에덴원, 경상병원(지금은 파산), 도립요양병원 등을 운영하는 중이다.  8.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구덕원, 청도대남병원, 사단법인 에덴원의 이사진이 한동안 동일했다는 점이다. 즉 가족이 오랫동안 족벌 경영을 방만하게 했던 것이다.  경영권 승계 과정은 오이선 창업자의 아들이었던 오성환에게 그리고 오성환 사망 후 딸 오미정에게 구덕원이 아들 오한영에게 청도 대남병원이 넘어갔다.  여기까지 정리해보면 아버지와 큰 아버지가 온갖 비리에 연루되어 있고 그 비리를 통해 축적한 재산으로 만들어진 곳이 청도 대남병원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9. 자, 이제 대남병원으로 가보자. 첨부한 그림처럼 대남병원의 사진을 보면 구조가 정말 특이하다. 노인전문병원-대남병원(폐쇄정신병동 및 일반병원)-보건소-요양원이 나란히 붙어 있는 것이다. 심지어 이 건물들은 통로를 통해 모든 층이 다 연결까지 되어 있으니 사실상 하나의 건물인 것과 다름없다. 특히 공기관인 보건소가 일반병원, 폐쇄정신병동, 요양원, 사회복지원 등과 연결된 것은 이상함을 넘어 수상한 수준이라고 봐도 무방하다. 일반인들은 보건소가 예방접종을 하는 것으로만 알고 있지만 사실 보건소는 관할 의료기관의 인허가, 폐업과 같은 규제 업무와 의료인들에 대한 관리와 감독, 심지어 마약류 같은 관리 약품의 사용허가 까지도 책임지는 기관이다.  관리를 받아야 할 민간 시설과 관리를 해야 할 공공기관이 한 건물에 있다는 것은 내가 알기로 유래가 없는 일이다. (의료 관계자님들, 공공기관 관계자님들 혹시 그런 곳이 있다면 알려 주세요. 제 상식이 틀릴 수도 있으니...) 10. 문제는 또 있다.  건물 지하에 지역 건강증진센터에서 운영하는 헬스장, 수영장이 있다는 점이다. 병원은 감염 위험이 대단히 높은 공간인데 지역주민이 출입하는 일반 생활체육 시설공간이 있는 것은 당연히 불법이다.  심지어 이명박근혜 시절조차 헬스장, 수영장 등을 병원 안에 입점하게 해 달라는 것을 시민사회단체, 전문가의 반대로 불허가 되었는데 98년도에 개원한 대남병원에서는 이미 운영하고 있었던 것이다.  건물에 엘리베이터는 단 하나다. 병원과 보건소 사이에 있는데 결국 병원이건, 보건소건, 요양원이건 실제 사용하는 통로는 하나였던 것이다. 감염되기 정말 쉬운 구조이다.  11. 여기에 폐쇄정신병동까지 붙어 있으니.... 현재 우리나라의 법률에 따르면, 보호자 2명과 정신과 전문의의 동의만 있으면 정신 질환을 앓고 있는 환자를 정신 병원에 강제 입원시킬 수 있다.  나는 이곳에서 장기 입원 중인 환자들 그리고 사망한 환자들의 신원이 궁금하다. 첫번째 사망자가 연고자도 없는 20년 장기 요양 환자라고 하는데 20년간 폐쇄 정신 병동에서 갖혀 있던 환자라....  이런 내용들을 보면서 윤태호 작가의 ‘이끼’라는 웹툰이 생각났다. 공권력과 공동체가 하나인 철저하게 외부로부터 폐쇄된 마을 이야기인데 만약 청도군 전체가 그렇다면 스케일이 너무 후덜덜한 수준 아닌가?  12. 대남병원은 보도자료를 통해 자신들은 신천지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예수교 장로회’ 소속이라고 처음으로 입장을 밝혔다. 자체 조사를 계속 하는 중이지만 병원 경영진, 의료진, 직원뿐 아니라 가족 중에서도 ‘신천지 교인은 확인되지 않고 있다’고 주장하는 중이다. 그런데 추수꾼이 내부 조사에서 쉽게 정체가 밝혀지면 그게 추수꾼일까?  어제 사우스모닝포스트 기사에서는 (신천지 신도와의 인터뷰를 바탕으로) 상하이에도 신천지 신도가 300~400명이 활동한다고 보도했다. 그 중 100명만 한국인이어도 현재 한인교회에서 상당한 숫자의 신천지 신도가 위장 신분으로 추수를 하는 중이라고 추정할 수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한국의 주요 교단에도 신천지가 암약하면서 추수를 시도하고 있다는 추측도 얼마든지 가능하다.   13. 부산에서 확진자가 22명이 나온 ‘온천교회’라는 곳에도 3명의 신천지 신도가 확인 되었다. 대구 대형교회 권사가 확진 판정을 받았는데 알고보니 신천지 신도였다. (남편은 장로였는데 그때까지도 부인이 신천지인지 몰랐다고 함) 확진 판정을 받고 자가격리에 들어간 명성교회 부목사가 참석한 대남병원의 장례식의 상주는 신천지와 관련이 없을까?  영화 무간도가 생각난다. 삼합회에서 경찰학교에 입학시킨 스파이가 경찰 간부가 되는 내용이다. 신천지 신도도 얼마든지 전도사, 목사까지 될 수 있는 거 아닐까? 14. 대구 서구 방역팀장, 대구시 공무원, 청송 교도관 등은 확진 판정을 받기전까지 자신의 신분을 끝까지 숨겼다. 신천지 신도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방역당국을 힘들게 한다. 지난 글에 언급했듯이 그들은 ‘거짓말’이 ‘전도를 위해서 궁극적으로 구원을 위한 교리로 장려’가 되기 때문이다.  15. 정리를 하면 다음과 같다. 대남병원의 태생은 '비리로 얼룩졌다'는 것은 팩트이다. 대남병원이 감염이 되기 쉬운 정상적이지 않은 구조라는 것도 팩트다. 때문에 어떤 과정의 인허가를 통해 지금과 같은 병원 구조로 승인허가를 받았는지, 지역 정치인, 공권력과 어떤 유착관계를 맺고 운영해 왔는지는 반드시 수사가 필요하다.  혹은 언론의 취재가 필요하다. (PD 수첩, 뉴스타파 고고~~) 대남병원에서 열린 이만희 형 장례식장에는 우한에서 12월까지 산교 활동을 했던 신천지 간부들이 방문했을 확률은 매우 높다. 이것도 방역당국 뿐만 아니라 공권력의 수사가 필요하다. CCTV부터 우선 확보해서 제대로 분석을 했으면 한다. 16. 대남병원 자체가 신천지일 확률은 현재로서는 물증은 부족하다. 다만 상기 언급한 내용처럼 심증은 상당하다.  나머지 심층적인 내용은 언론의 취재 혹은 국가 기관의 수사를 통해 밝혀지기를 바란다.  개인이 파악하고 추론할 수 있는 내용은 여기까지가 한계다. 흥미로운 소설은 많이 떠 오르지만 그건 지금과 같은 시국에서는 적절치 않으니 생략한다.  17. 한편 신천지 압수수색 여론에 대한 검찰의 공식적인 입장은 다음과 같다. 이날 대검찰청 관계자는 "검찰은 영장청구권을 갖고 있지만 형사권 행사는 최후의 수단으로 신중히 결정해야 한다"고 말했다. 또 그는 "압수수색 영장은 범죄 혐의가 소명되고 그 필요성이 인정될 때에 한해 청구할 수 있다"고 설명했다.  아.. 그래서 검찰은 최후의 수단으로 신중하게 결정해서 표창장 압수수색에 올인한 것이구나...   ps. 이 글은 자유롭게 퍼 가도 되고 출처만 남겨 주면 됩니다.   상하이에서 김두일님
별빛 밤 아래 위스키, 몽골#1
어느샌가 문득 추워지는 비행기내의 공기가 북쪽으로 꽤나 내달린 것을 인증해주고 있었다. 창문을 통해 바라보는 저 먼 아래의 풍경은 바다와 구름을 벗어나 광활한 대지가 끝없는 지평선을 그리며 펼쳐 있었다. 겨울로 접어드는 늦가을의 광활한 대지는 푸른 초원이 아닌 온통 갈색빛의 따스한 삭막함이 느껴지는 갈색 파도와 같았다. 단지 멍하게 하염없이 별을 볼 수 있고, 사막도 있으며, 제대로 된 초원의 지평선을 볼 수 있는 이 몽골 울란바토르에 도착했다. 8박9일간 최소 5번의 밤하늘을 즐길 수 있을거란 생각에 카메라 충전기 먼저 잘 있는지 자꾸만 확인했다. 이제는 중년이상의 나이가 되어버린 고프로4와 캐논 eos 100d가 잘 버텨주길 기도해본다. 징키스칸의 나라인 몽골답게 공항이름도 징기스칸 국제공항이다. 그 아래에는 영어와 함께 러시아어 문자인 키릴문자도 함께 표기되어 있다. 나중에 가이드분께 물어보니 세계2차대전 일본이 몽골을 침략 했을 때 러시아가 많이 도와줬고 그 김에 문자도 키릴문자를 사용하게 되었다고 한다. 대신 러시아어는 잘 안 통하는것 같다. 숙소에 짐을 풀고 밖으로 이른 저녁을 먹으러 나왔다. 고비사막을 여행할 목적으로 모인 우리 모임은 아직까지 서로의 이름과 나이만 알고 있는 헐거운 유대감의 5인조였다. 마트에서 몽골 초원과 사막을 마주보러갈 생필품과 간식들을 사며 조금씩 살기위한 대화부터 시작했다. 하나뿐인 대형 백화점에서 장을보고 바로 앞에 있는 식당에 들어갔다. 8개 테이블정도의 그리 크지 않은 규모의 식당에 메뉴판에는 온통 키릴문자 뿐이다. 게다가 카운터로가서 주문하는 시스템에 음료는 냉장고에서 꺼내 카운터로 가져가 계산을 해야한다. 마치 매점에 온 듯한 느낌의 식당이다. 채소가 귀하고 고기가 흔하다보니 메뉴들이 고기가 대부분에 채소가 토핑으로 올라가 있다. 처음 파스타처럼 생긴 볶음면은 뚝뚝 끊어지는 면과 말라있는 듯한 식감에 이게 뭔가 싶었는데 먹을수록 그냥 밥 한숟갈 먹듯이 먹게 된다. 고기들은 냄새가 조금 난다. 양고기를 많이 쓰다보니 양고기 냄새가 나는데 신기하게도 우리나라에서 먹을때 나는 양고기 냄새보다 부드럽다(?)고 해야할지 신선한 양냄새라고 할지, 거부감이 없었다. 다만 일행중에 민감한 분이 있었는데 손도 못대긴 했다. 그리고 몽골에서 물처럼 마신다고 하는 수테차!! 이게 매력적이다. 우리말로 하면 우유 차 정도 되겠다. 따뜻한 우유에 소금이 조금 들어가 있어 살짝 짭쪼름함이 올라오는데 식전이나 식후 가릴것 없이 마신다. 우리나라 식당에 들어가면 물부터 내어주듯이 여기선 수테차부터 내어준다. 물이 귀하기에 수테차를 많이 마신다고 한다. 녹차티백처럼 판매도 해서 귀국할때 한봉 60개들이로 사왔는데 2주만에 다 마셨다... 그러고 동대문 중앙아시아 거리를 다 뒤져봤는데 파는 곳이 없다. 몽골식당 한군데서 한잔에 천원에 팔고 있다. 귀국할때 더 많이 사오지 못한게 아쉽다. 숙소에서 사람들과 맥주 한잔씩을 나눈 밤을 지나 아침이 되니 초원을 달려줄 차량이 도착했다. 초원과 사막을 갈 목적이라 여행사의 패키지로 준비했다. 가이드 한 분과 기사 한 분까지 함께 총 7명이 여행을 시작했다 몽골 여행에서 차량은 suv이거나 위 사진의 차량인 푸르공 이렇게 두종류가 있다. 우리의 여행을 함께 할 차량은 '푸르공' , 러시아 군용차량이 변형되어 나온 차량인데 다른말로는 ''사람이 탄다는 것을 깜빡하고 만든 차량'' 이다. 늪지대나 초원은 쭉쭉 달리나, 타고 있으면 내 골반뼈와 척추뼈, 목뼈가 안녕한지 안부인사를 전할 수 있을 정도로 흔들림 완화가 적다. 아니 적다고 해야할지 거의 없다고 해야할지는 모르겠다. 아무튼 힘은 좋아서 잘 달려준다. 모델성도 있어서 사진도 나름 느낌있게 잘 나온다. 이제 푸르공을 타고 울란바토르를 벗어나 대 초원 한가운데로 들어간다. 늦가을이라 푸르른 초원이 아닌 갈색으로 변한 초원이었지만 끝없는 지평선의 모습에 기분이 대신 시원하게 푸르다. 교통체증 없을듯한 초원의 도로에 우두커니 서있는 교통 표지판들이 심심해 보인다.
눈 오는 날, 뭐 하셨어요? ☃️🌨☃️
🌨 ☕️ 아침에야 잠이 들었는데 열두시 쯤 눈이 번쩍 뜨이더라고요. 벌떡 일어나 커튼을 젖히니 엄마야 세상에 그렇게 기다리던 눈이 펑펑! 와 니 내가 얼마나 기다렸는 줄 아나?! 핫쵸코를 타와서 눈으로 토핑을 합니다. 생크림이 없응게 대신! 보송보송 훨씬 맛있겠지요 *_* 창밖만 멍하니 바라보다 습관처럼 켠 빙글에서 눈산에 방문하신 @veronica7 님의 카드를 보고 저도 후다닥 잠옷 위에 그대로 패딩을 걸치고, 세수도 안 한 채로 모자를 눌러쓰고 집 근처 산(?)으로 향했어요. 가는 길도 이래 곱지예 *_* 그러니까 부산에 살던 때에는 겨울비가 내리는 날이면 종종 범어사를 찾곤 했거든요 그러면 눈을 볼 수 있는 날이 있었으니까. 여기도, 아스팔트 바닥에서는 금방 녹아버리는 눈이 산에는 쌓여 있을 테니까! 그리고 역시나! 이미 눈을 맞으러 오신 분들이 많아서 눈 쌓인 바닥은 단단히 다져져 있었지만 어디든 새 눈은 있으니까 발샷 한 번 박아 봅니다 후후 눈사람도 만들어서 사람들 지나는 길가에 살짝 놓아 두고요. (저처럼) 홀로 풍경을 감상하시는 분들도 계시더라고요. 전 잠옷이 젖을까 걱정이 되어 엉덩이를 붙일 수는 없었습니다... 조금 더 오르니 눈이 다시 펑펑 쏟아 지고요. 영상을 찍는데 갑자기 뛰어드는 토끼도 있... 으응? 토..끼...? 보이시나요 화면을 가로지르는 맹렬한 기세의 토끼! 마침 슬로모션으로 찍고 있었던 터라 마치 스펀지 촬영본이라도 보는 기분. 인형 같지 않아요? 눈도 보송 토끼귀도 보송 토끼 꼬리도 보송... 사랑스럽다 정말... 너 춥지는 않냐 흑흑 고개를 돌리면 푸르른 대나무 위로도 이렇게 눈이 펑펑 내리고요 *_* 으아 치한다 눈에 치한다! 내려가다 보니 또 눈이 그쳐서 보이는 하늘빛도 너무 곱다 아입니꺼. 눈 밟는 소리도 들어 보실래예? 그리고 입구 가까이 오면 만들어 둔 내 친구가 서있습니다. 귀여워... 엘사가 아니라 녹지 않게 해줄 순 없어서 미안할 따름이네요. 눈이 오는데 하늘이 이렇게 곱다니. 산(?)에서 내려와 집으로 돌아와 봅니다. 하늘이 이렇게 고와요. 물론 바닥에 눈은 간데 없지만. 아스팔트 너란 녀석 뜨거운 녀석... 참. 집 옥상에도 눈사람 친구를 만들어 줬답니다. 옥상에는 눈코입을 만들어 줄 만한 게 없어서 맨얼굴이지만 대신 친구들을 곁에 두고 사진 한방 박아 주고요. 수미상관의 법칙에 따라 마지막은 다시 핫쵸코로 장식합니다 헤헤. 겨울은 역시 눈이 와야 겨울이죠! 이제 좀 겨울 같은 느낌이 듭니다. 비록 입춘이 지난 지 한참이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