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ongJer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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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끝을 기리며, 영화 '말콤x' 후기/리뷰/해설 [5분고전겉핥기]

후우 요즘 시험기간과 과제 덕분에 숨막혀 죽겠네요ㅋㅋ
빨리 방학해서 하고 싶은 거 몽땅하구
보고 싶은 영화 몽땅 보고 싶네요오오오오
조금만 더 힘내잣
오늘의 영화는 '스파이크 리'의 또 다른 랜드마크작 '말콤x'입니다.
말콤x는 마틴 루터 킹 주니어와 동시대를 살았던 인권운동가로
흑인의 권리와 보호를 위해 삶을 바친 위인이죠.
사실 그는 태어나고 청년이될 때까지는 격동의 삶을 살았습니다.
마약과 불법사업, 매춘에도 손을 댈 정도로 방탕한 삶을 이어갔죠.
그런데 어느날 절도죄로 감옥에 들어가 종교에 관련된 흑인 동료의 말에 감명을 받게되고
밤낮으로 공부에 매진해 그는 완전히 달라지게 됩니다.
나와서는 이슬람 운동단체에 들어가 명성을 쌓고 사회로부터 큰 관심을 받게 됩니다.
그는 그 이후 진정으로 흑인의 인권을 위해 투쟁했고 주위에 위협해도 절대 굴복하지 않았습니다.
마틴 루터킹 주니어와 달리 그는, 자기방어를 위한 폭력은 필수적으로 행해져야 한다며
긴 시간동안 억압받고 당하기만 했던 흑인들이 당당하게 일어나기를 바랬습니다.
하지만 오히려 흑인 사회 내에서 그를 안 좋게 본 세력에 의해 그는 이른 나이에 살해를 당하죠.
그의 성이 x인 이유는 노예습성이 계속되온 흑인의 과오를 벗기위해
진정한 흑인으로서의 자신을 표현하기 위해 미지수를 뜻하는 x를 사용했다고 하네요.
그는 진심으로 인류를 사랑했고 흑인을 위해 싸웠지만
오히려 그 흑인들의 손에 의해 최후를 맞이한 비운의 영웅이라고 봅니다.
"어떤 수단이라도 필요하다면 이루어져야 한다!"는 그의 다짐은
흑인이 동등한 인격체로 완전히 대우받는 그 날이 오려면
얼마나 더 큰 갈등과 비극이 있어야할지 알 수 없다는 느낌을 줍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인종 간의 대립은 과연 언제까지 지속될까요,
그가 더 오랫동안 살아남아 인권을 위해 싸웠다면
지금의 상황은 달라졌을까요?
죽는 그 순간까지 가슴을 폈던 그를 기리며 적어봅니다.
영화 '말콤X'였습니다.
2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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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로만 들어본 영화였는데 잊고 있다가 이걸 보니 또 생각이 났네요. 정말 꼭 챙겨 봐야 겠어요.
@CosmicLatte 러닝타임이 3시간이 넘는 긴 영화예요ㅎㅎ긴 일대기니 참고하세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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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제목은 아는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 그만큼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소설이며 개츠비적(Gatsbyesque)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소설. 처음 이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서였다. 노르웨이의 숲 안에서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시간이 꽤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고, 현대인이 읽기에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고전임에도 필자는 꽤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대단한 소설로 불리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의 시선에서 쓰였다. 닉은 소설의 등장인물이자 관찰자의 역할을 고루 수행하며 때로는 이야기의 밖에서, 때로는 안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닉을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은 개츠비, 데이지, 톰이다. 개츠비는 닉의 옆집인 엄청난 대저택에 사는 인물이다. 매일 본인의 저택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그 누구도 개츠비의 정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고 왜 이런 파티를 매일 여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톰과 데이지는 웨스트 에그(닉과 개츠비가 사는 곳) 맞은 편의 이스트 에그에 살고 있는 부부이다. 데이지는 닉의 친척이며 어릴 적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살아온 여성이고 톰은 대학생 시절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에 마찬가지로 부잣집 출신이다. 이렇게 세 인물에 닉까지 네 인물이 벌이는 이야기가 위대한 개츠비의 주 내용이다.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개츠비는 5년 전 데이지와 서로 사랑했으나 가난했던 그는 결국 데이지와 이어지지 못하고 데이지는 부잣집 도련님에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였던 톰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데이지를 잊지 못했던 개츠비는 자신의 가난함이 데이지와의 사이에 걸림돌이었다고 생각해 5년간 온갖 불법적인 일들에 손을 대 엄청난 부를 쌓는다. 부자가 된 개츠비는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 에그와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웨스트 에그에 대저택을 지은 후 매일매일 호화로운 파티를 벌인다. 언젠가 데이지가 이 파티에 와서 자신을 보게 되기를 바라며. 그러던 차 옆집에 살던 닉이 데이지와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닉을 통해 데이지를 만나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결국 톰과 개츠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톰을 선택한다. 그리고 개츠비는 데이지의 죄를 뒤집어쓴 채 죽음을 맞이하고 데이지와 톰은 죽은 개츠비를 뒤로 하고 도망친다. 가장 먼저 느낀 건 개츠비의 순수함이었다. 5년 전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으로 부를 쌓았지만 데이지의 앞에 직접 나타나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해서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개츠비. 한 번이나마 데이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뿜어지는 화려한 불빛들을 봐주기를 바라며 파티를 열던 개츠비에게 5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는 점점 커져갔다. 닿을 수 없는 꽃처럼. 그러나 다시 만난 그녀는 상류층의 지위와 위치를 버릴 수 없는 여성이었고 하류층인 데다 불법으로 돈을 쌓아 올린 개츠비를 결국에는 저버린다. 그런 그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된 개츠비. 너무나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래서 언제든지 쌓아 올린 부를 데이지를 위해 던져 버릴 수 있는 그이기에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을 개츠비의 앞에 붙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감당할 수 없는 경제 호황과 그로 인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이어지는 나날들. 물질주의가 넘쳐흐르고 그에 다른 모든 것들이 잠겨버린 사회. 그 당시의 미국 사회를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이 톰과 데이지이고 작가가 제시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 인물이 개츠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톰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데이지를 두고 다른 여인과 외도를 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결국 개츠비가 죽도록 만든다. 부잣집 도련님에 상류층의 인물이지만 부도덕하고 추잡한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다. 데이지 또한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고 그를 경멸하지만 결국 상류층의 지위를 버릴 수 없기에 개츠비를 저버리고 톰을 선택한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까지 개츠비에게 떠넘겨 버린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들과 달랐다. 톰과 데이지가 추구하던 돈, 물질, 육체적인 쾌락, 상류층의 지위와 권력보다 중요한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5년 전에 자신이 느꼈던 데이지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개츠비는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그 당시의 미국 사회는 전체가 물질주의에 찌들어 있었기에 오히려 톰과 데이지가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과 쾌락이 모든 것에 앞서는 시대이니 말이다. 한 개인이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흐름을 거슬러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한 개츠비이기에 위대한 개츠비인 것이다. 이 소설 속의 개츠비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금 미국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지금 사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만드는 경종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점이 바로 이 소설을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연애소설로 볼 수도 있기에 접근하기도 좋고 현대인에게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고전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소설이다. 다 읽어갈 때쯤 어느새 개츠비에게 이입해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개츠비는 여전히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억지로 아주 편안한 척하며, 심지어는 좀 따분하다는 듯 벽난로 장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리뷰를 원하시는 책을 댓글에 적어주시면 직접 읽고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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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담> / 밀란 쿤데라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농담>은 말 그대로 한 농담으로 시작된다. 이 소설은 하나의 농담이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을 때, 누군가의 별 뜻 없던 말 한 마디에 프레임과 이념의 시각이 씌일 때, 한 인간의 삶 전체가 어떻게 역사의 잔인한 농담 속으로 끌려들어가는지 보여준다. 1948년 2월(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가 일어난 시기다.) 이후의 첫 해, 체코의 청년인 루드비크 얀은 모범적인 사회주의자였다. 자신도, 주위의 사람들도 모두 그렇게 생각했다.(개인주의자 같다거나 지식인 냄새가 난다거나 하는 모두의 평가에 한 줄 쯤은 들어가는 비판은 있었지만 말이다.) 루드비크는 젊었고 당연히 아름답고 순진했던 마르케타라는 여학생과 사랑에 빠진다. 루드비크는 방학 기간 중 마르케타와의 연애 사업을 진전시켜보려는 야심찬 계획을 세웠지만 마르케타는 그 기간 동안 당 교육 연수에 참가해버린다. 마르케타로부터 당 교육 연수가 너무나 기대되고 신난다는 편지를 받은 루드비크는 연수 때문에 훼방받은 연애사업과 자신의 마음도 모르고 마냥 신나 있는 마르케타로 인해 삐지다 못해 질투심에 활활 타오른다. 결국 마르케타에게 다음과 같은 편지를 보낸 루드비크. [낙관주의는 인류의 아편이다! 건전한 정신은 어리석음의 악취를 풍긴다. 트로츠키 만세!] 질투심으로 별 생각 없이 보낸 이 농담 한 줄은 이후 15년이 넘는 세월 동안 루드비크의 인생을 삼켜버린다. 루드비크의 농담은 정말 그저 농담이었다. 질투심에 눈이 먼 젊은 청년의 치기 어린 농담. 그러나 그 농담은 시대의 이념 하에서 단순한 농담으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불순한 의도가 겹겹이 덧씌워져 마침내는 농담을 한 루드비크마저도 자신의 무의식 속에 정말 사회주의에 대한 부정적인 마음이 있었던 것인지 헷갈리게 만든다. 어떤 의도도 없이 단순한 질투심에서 쓰인 농담 한 줄은 루드비크가 자신의 친구들에게, 지인에게, 연인에게 버림받게 만들고, 집단 전체에서 배척받게 만들었으며, 루드비크의 인생을 송두리째 나락으로 떨어뜨린다. 단순히 보면 사회주의와 전체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볼 수도 있겠지만 넓게 보면 개인의 가치를 훼손하는 모든 집단과 이념에 대한 비판이기도 하다. 집단이 있고 집단의 의지 혹은 이념이 있으면 그 속에서 집단을 이루는 개인은 사라져 버리는 경우가 빈번하다. 이런 일은 국가에서도, 종교 집단에서도, 회사 내에서도, 심지어는 조그만 한 사무실 안에서도 일어날 수 있다. 쿤데라는 개인이 어떠한 불순한 의도도 없이 던진 농담 한 줄이 집단과 이념의 시각 하에서 어떻게 매도되고 잘못 해석되어, 그 속에 존재하지도 않던 새로운 의미들이 만들어지는지 보여주며 집단 속에서 무시되는 개인이 가지는 중요성을 일깨운다. 한 인간의 삶은 집단의 의지 하에 마음대로 유린당하고 파멸당해도 좋은 물건 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이 소설의 이야기를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느끼게 된다. 농담 이후로 루드비크의 삶은 그 시기에 묶여버린다. 자신을 당에서 축출하기 위해 손을 쳐들던 친구들의 모습, 하루 아침에 석탄 광산으로 내던져진 자신,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합리한 자신의 운명. 과거의 감정과 시간에 갇혀 있던 루드비크는 15년 후, 자신의 고향 모라비아로 돌아온다. 자신을 보호해줄 것이라 믿었지만 그 기대를 철저히 배신하고 당에서 루드비크를 축출하는 데 앞장 섰던 제마네크에게 복수하기 위해서. 제마네크의 부인인 헬레나와 성관계를 맺어 그에게 복수하려던 루드비크였지만 이미 제마네크는 다른 젊은 여학생과 연애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고 루드비크의 복수는 실패한다. 여기서 루드비크는 깨닫는다. 자신이 복수를 해야 하는 때는 15년 후가 아니라 제마네크가 자신을 당에서 축출하던 오로지 그 때 뿐이었음을. 여기서 쿤데라는 집단 속 개인의 비극을 보여줌과 동시에 개인이 그 비극을 대하는 실존적 태도에 대해서도 고찰한다. 루드비크가 복수하려는 15년 후의 제마네크는 15년 전의 제마네크와는 다른 인간이다. 예전의 제마네크는 15년이란 시간 동안 사라져버렸다. 그것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은 제마네크의 어린 연인, 브로조바 양이다. 그녀는 15년의 시간이 지나 이전 세대가 중요하게 여겼던 것들을 더 이상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 새로운 세대다. 제마네크도 그런 그녀와 연인이 될 만큼 15년 전과는 아예 다른 사람이 되었다. 루드비크가 과거에 묶여 살아가는 동안 제마네크는 현재를 대표하는 브로조바 양의 옆에 서서 자신이 과거의 제마네크와는 다른 인물임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갈 수 밖에 없고 과거는 이미 지나가 버렸다는 것, 루드비크는 그것을 깨닫는 순간 자신의 복수가 처절히 실패했음을, 아니 사실 그 복수 자체가 성립될 수 없는 것이었음을 깨닫는다. 대상이 없는 복수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인간은 현재를 살아가는 존재다. 과거의 일들이 인간의 발목을 잡기도 하지만 인간은 지금 살아가고 있고 그 족쇄를 떨쳐버려야만 한다. 15년 전 과거에 대한 복수, 제마네크에 대한 것인지 자신을 축출한 당에 대한 것인지 당시의 사회 이념에 대한 것인지도 명확히 알 수 없는 복수를 하러 고향에 왔던 루드비크는 소설의 끝에서 과거의 흔적이라는 이유로 외면하고 피해 왔던 자신의 진정한 친구 야로슬라프가 쓰러지자 그를 두 팔에 안으며 전율한다. 과거에 묶여 끌려왔던 고향으로의 여정이 심근경색으로 쓰러진 진정한 벗을 두 팔에 안은 채 현재의 그를 위해 눈물 흘리며 끝났기 때문이다. 제마네크가 외면했던 모든 가치들은 결백했다. 고향 모리비아의 노래들, 침발롬이 있는 악단, 고향 도시 모리비아, 그에게 협박처럼 들리던 동무라는 말까지 그 어떤 것도 죄가 없다. 단지 그 결백한 가치들이 과거와 집단과 이념과 사회와 역사의 잔인한 농담에 의해서 유린당했을 뿐이다. 우리는 농담을 농담으로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는가. 소설 속 한 문장 그 순간 나는, 나 자신이, 그리고 내 인생 전체가 훨씬 더 광대하고 전적으로 철회 불가능한 농담(나를 넘어서는) 속에 포함되어 있는 이상, 나 자신의 농담을 아예 없던 것으로 만들 수는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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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 조르바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저녁을 먹으며 늘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조르바의 인생 이야기에는 책에만 파묻혀 있던 '나'는 알지 못하는 생동감이 넘쳐났고 '나'는 갈탄 광산이 아니라 조르바와의 대화, 저녁 식사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거침없는 말과 행동, 책 속에서 해답을 얻지 못했던 인간과 신, 여러 인생의 문제들의 핵심을 꿰뚫는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력, 평범한 것도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 등 '나'는 조르바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책 속의 글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난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조르바는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갈탄 광산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날리게 되었지만 '나'는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잃은 돈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 하지만 결국 갈탄 광산의 일이 실패하며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가끔씩 조르바를 회상하던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조르바의 부고가 날아온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알고 있는 조르바에 대한 모든 것을 글로 쓰기로 결심한다. 그 글이 바로 이 '그리스인 조르바'인 것이다. 이 소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실제로 작가의 행보가 소설 속 화자와 많은 부분에서 겹치고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소설 속 조르바의 실존 모델이 존재한다는 점도 그렇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실제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조르바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는 조르바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큰 충격을 받는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던 '나'의 물음들을 조르바는 단숨에 해결해버린다.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대로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며 그 순간의 감정들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조르바는 늘 행동보다 고민과 생각이 앞서는 나를 질책한다. 그놈의 책을 다 불태워버리면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똑똑한 두뇌란 이것저것 재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영원한 식료품 상인'이라 말한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르바는 '나'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이성적 고민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의 감정과 내면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직관을 통해 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듯이 단칼에 잘라내 버린다. 복잡하게 엉켜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고심하느라 생각이 앞서 매듭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매듭을 칼로 잘라버리는 조르바의 대답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메시지는 삶의 순간들에 대한 충실함이다. '나'가 철학적 물음과 고민에 빠져 어떤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삶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 조르바는 매 순간 떠오르는 해의 찬란한 빛, 바람에 흔들리는 꽃의 모습, 검푸른 바다의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마치 처음 경험하듯 환희에 가득 차 바라보며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끽하고, 식사 시간이면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음식의 맛과 향과 포만감에 집중해 육체를 활동할 수 있도록 가득 채우는 데 전념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 여자에게 사랑을 말하고 기쁨을 줌으로써 자신과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행복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런 조르바를 바라보며 언젠가 죽음으로 끝나게 될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법을 배우며 현실과 동떨어진 물음들에 매몰되어 책 속에만 파묻혀 있던 지식인의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다. 조르바의 모습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가깝다. 신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함을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려고만 하는, 스스로를 신의 노예로 만드는 자. 신을 부정하며 허무주의와 맞닥뜨려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는,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지 않고 삶을 긍정하지 않는 자. 조르바는 그러한 단계를 뛰어넘은 인간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고, 인간이 초월자에 의해 어떤 사명을 띠고 지구 상에 나타나 인간의 존재가 태어나는 그 순간 살아가야만 하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르바는 인간이란 무의미하고 그저 태어나 죽을 뿐인 어떤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식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내고 태어난 이래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 태양과 바다와 공기와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충실하며 그곳에서 오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충만감을 만끽하는 자가 바로 조르바다. 스스로 삶의 가치를 만들고 긍정하는, 초월한 자(초인)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과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조르바와 '나', 그리고 군중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군중은 과부가 남자들을 홀린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죽이려 든다. '나'는 과부를 죽이려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지는 하고 있으나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말리지는 못하고 관망할 뿐이다. 조르바는 군중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귀를 뜯기면서도 과부를 죽이려는 사람들들을 막아선다. 군중은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갈 곳 잃은 분노의 희생양으로 결정한다. 그 군중 속에는 과연 이 일이 맞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하며 옳고 그름을 규명하려는 자가 없다. 그저 잘못 해석되고 비틀린 기독교적 윤리관을 맹목적으로 믿는 자들, 주변의 열기와 광기와 휩쓸려 스스로 판단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과부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자들 뿐이다. '나'는 군중보다는 낫지만 적극적으로 사태에 끼어들어 과부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나'이다. 옳다고 느끼는 자신에게 즉시 충실하지 못하고 일의 합리성과 옳음에 대한 판단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의 결정을 늘 의심한다. 그런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 있는 양치기에게 그녀에 대한 자비를 베풀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군중과도, '나'와도 다르다. 조르바는 과부를 죽이려는 자들을 보자마자 뛰어들어 그들을 막아선다. 귀가 뜯기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과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결국 과부가 죽고 난 뒤 조르바는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기쁠 때는 고운 형이상학의 체로 걸러 내느라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는 그런 사내의 고통'을 겪는다. 조르바는 군중들이 과부를 죽이는 일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자마자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군중의 광기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나'처럼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고 그 일이 좌절되어 과부가 죽은 후에는 온전히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주변의 행동이나 시선, 종교적 윤리적 제도와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자, 순간순간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자,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고뇌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외면하지 않는 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살아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자, 그런 사람, 초인이 바로 조르바인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니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이 소설은 책과 먹물 속에 파묻혀 삶과 동떨어져 있던 '나'가 초인 조르바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과 정신의 세계에서 꿈꾸듯 이상만을 그리며 살아가던 '나'가 자신의 '실존' 즉, 자신이 관념의 세계가 아닌 이 시간, 이 장소, 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조르바를 통해 온 몸과 정신으로 체감하며 순간의 삶을 사는 인간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은 마치 '나'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했다. 특히 소설 후반부, '나'가 생각과 합리와 이성을 거쳐 나온 언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조르바에게 그의 언어, 춤을 가르쳐달라고 하며 둘이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드디어 '나'가 먹물과 책으로 둘러 싸인 한 세계를 깨고 나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조르바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각하고 느끼는 자다. 그에게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지금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 지금 풍겨오는 레몬과 오렌지 나무의 향기를 맡는 것, 지금 느껴지는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번뿐인 삶은 한 번 뿐이기에 소중하고 한 번 뿐이기에 온전히 경험해야만 한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조르바의 인생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는 오롯이 그 자신만으로 삶을 긍정하고 인간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는 자다. 조르바에게 "제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저 푸른 바다를 보게. 어찌 저렇게도 일렁이는지.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지 않은가?" 소설 속 한 문장 "보스 양반, 돌멩이들과 꽃과 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영화 '리버티 하이츠' 인종과 종교에 대하여 [5분고전겉핥기]
과제로 영화는 보고 있지만 최신영화를 못 보는 게 많아 슬프다ㅠㅠ 그래도 나름 영화가 의미도 있고 재미도 있어서 참는다... 방학 때는 참지 않겠어요!! 오늘의 영화는 유대인과 흑인, 인종에 관한 이야기! 영화 '리버티 하이츠'입니다! 리버티 하이츠는 미국에서 유대인이 주로 거주하는 지역을 뜻하는데요 그 근처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다룬 작품입니당 두 유대인 형제가 주인공인데ㅋㅋㅋ 이름이 Ben과 Ven이라 엄청 헷갈림ㅋㅋㅋ 원어로 들으며 봤으면 아마 거의 다 놓쳤을 듯 싶네요! 그래도 형제가 유쾌하고 풋풋해서 꽤 재밌었다는... 유대인 가족을 중심으로 유대인에 대한 인식의 문제 그리고 흑인과의 관계, 더 나아가 인종에 대한 고찰을 시사하는 작품입니다. 얼핏보면 평범한 가족이지만 사실 그 안에는 예기치 못한 고난과 차별이 숨어있죠. 영화는 종교 얘기도 간간히 들어가 있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복잡하고 구시대적이다!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는데요 문제는 이러한 문제가 현시대에서도 그대로 보여진다는 점이죠ㅠ 영화가 나온지는 엄청 오래됐지만 내용에서 다루는 얘기는 익숙합니다 아직도 미국은 종교에 예민하고 인종에 예민하죠. 그건 우리나라도 마찬가지고 그 영향을 받으며 살고 있습니다. 지금과 다를 바 없는 내용이기에 더욱 생각할 점이 많은 영화였습니다ㅠ 언제 어디서나 갈등은 똑같이 존재하네요... 정도와 차원의 차이만이 있을뿐! 영화 '리버티 하이츠'였습니다.
70년대 일본 아침 7시에 방영한 미친 어린이용 작품
레드맨 70년대에 아침 7시 반에 방영한 특촬 히어로 작품으로 1화당 방영 시간은 약 5분 정도.  단독편성이 아니라 어린이용 프로그램의 내부에서 방영된 물건이라서 그렇다. 총 138화.  그리고 이 작품의 정체는 최악의 괴수 학살물.  방영시간 5분동안 아무런 설명도 없이 괴수와 레드맨이 싸워서 레드맨이 괴수를 죽이고 끝난다 이기는게 아니다.  죽이고 끝난다.  필살기 레드 나이프 칼로 존나 찔러 죽인다. 레드 애로우 애로우라고 하는데 그냥 창이다.  던지거나 찌르거나 해서 죽인다. 레드 폴 무려 오프닝에 이름까지 나오는 필살기.  적을 절벽에서 던져서 죽인다.  그외 격투 장면들 아무런 말도 없이 괴수를 죽이고 의기양양한 듯한 포즈로 끝나는 이 작품은  훗날 인터넷에서 재발견되어 컬트적인 인기를 얻게 되고 레드맨은 '붉은 무차별살인마 (通り魔)' 라는 별명을 얻게 된다.  ㅊㅊ 웃대 모야 미친 이걸 아침에? 괴수들이 불쌍한데? 날것의 냄새가 지독한 폭력 비디오를 아침 7시부터 틀고 지랄을 했네; 졸라 난데없이 괴수가 뭘 잘못했는지 안 알려주고 걍 오지게 패서 죽이는 장면만 짧게 나오면 애들이 아~ 징그럽게 생기거나 나와 다르게 생긴건 다 악당이고 개패듯 패서 죽여도 되는구나~! 이럴거 아냐.... 모방심리는 오지게 자극하고 정서에는 쓰레기같은 프로ㅇㅇ
구글 中 공략 검색엔진 '드래곤플라이' 죽지 않았다?
4-500여 개의 개발 코드 지속적으로 변경된 사실 발견 구글의 중국 전용 검색엔진인 ‘드래곤플라이’ 프로젝트가 여전히 개발되고 있다는 의심이 나왔다.지난 4일(현지시간) 드래곤플라이 프로젝트와 관련된 4-500여 개의 개발 코드가 지속적으로 변경된 사실이 발견됐다고 구글 내부 직원의 증언을 인용해 더버지는 보도했다. ‘드래곤플라이’ 프로젝트는 구글이 중국 정부의 검열 정책에 맞춘 검색 엔진을 제공한다는 계획으로, ‘신강’이나 ‘티베트’ 혹은 ‘천안문 광장 학살’과 같은 특정 단어의 검색을 차단하는 기능을 가진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중국 내에서는 구글 접속이 차단된 상태다. 드래곤플라이 프로젝트는 인권 침해 논란에 따른 내외부 비판과 투명성 논란으로, 구글은 지난해 12월 공개적으로 해당 계획을 중단했다. 또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도 드래곤플라이 프로젝트에 대해 지난해 미국 청문회에서 “지금 당장은 검색엔진을 론칭할 계획이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구글 내부 직원들이 해당 코드를 모니터링한 결과에 따르면, 지난해 12월부터 1월에 걸쳐 4-500여 개의 드래곤플라이 프로젝트 관련 코드가 변경돼 “프로젝트가 계속 진행 중”이라며, “또 프로젝트 관련 예산에 약 100명의 근로자가 여전히 그룹화돼 있다”고 밝혔다. 구글은 프로젝트 지속 논란에 대해 “이 추측은 완전히 부정확하다”며, “구글은 중국에서 검색 사업을 시작할 계획이 없다”고 밝혔다. 또 “팀원들도 새로운 프로젝트로 옮겼다”고 부정했다. 외신은 코드 변경 사실에 대해 프로젝트를 끝내기 위한 마무리 작업일 수 있다고 분석했지만, 더인터셉트와 인터뷰한 한 구글 SW엔지니어는 “구글은 1~2년 내 새로운 코드명으로 시작할 것”이라며, “순다르 피차이 CEO는 프로젝트 관련 여론이 줄어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라고 밝혔다.
곪아터진 #미투 대학가, 단톡방엔 음담패설
[성폭력연대기③]겉은 'PC함', 뒤에선 온데간데 없어 낄낄거렸던 이들은 모를 끙끙 앓았던 누군가들의 성폭력 연대기[편집자주] 글 싣는 순서 ①초등학교는 지금 '아이스께끼' 대신 '앙 기모띠' ②김치찌개 급식에 성희롱…'민망'은 여중생 몫 ③곪아터진 #미투 대학가, 단톡방엔 음담패설 ◇'올바름' 속에 감춰진 그 모습 대학 내 성적 폭력은 은밀하다. 그래서 때론 더욱 충격적이다. 고려대생 김예은(23) 씨는 지난 2016년 6월 남자 동기생들이 자신과 몇몇 여성들을 대상으로 단체 채팅방(단톡방)에서 음담패설을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부자의 고백 없인 아무것도 눈치챌 수 없는 성폭력이었다. '올바른' 겉모습에 감춰졌기 때문이다. 김 씨는 최근 CBS노컷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단톡방에서의 그 사람들과 내가 아는 친구들과 아예 다른 사람이었다"고 했다. 가해자의 일부는 '여성주의 세미나'를 같이 준비했던 친구들이었다. 이른바 '고대 단톡방 사건'이 불거졌지만, 주변에서는 "내가 걸렸으면 무기징역", "내가 걸렸으면 사형"이란 말을 농담처럼 하고 다녔다고 한다. 연세대에서도 지난해 3월 유사한 단톡방 성희롱 사건이 불거졌다. 당시 "터질 게 터졌다고 생각했다"는 게 한 연대생 김모(20)씨의 말이다. 김 씨는 "수업과 같은 공적인 자리에선 다들 'PC(Political correctness, 정치적 올바름)'해야 하다 보니 평소엔 그런 모습을 드러내지 않는다"면서도 "원래 남학우들이 여학우들을 '그런 식'으로 성적 대상화 하는 경우가 많다는 걸 알음알음 알고만 있었는데, 이제야 수면 위로 올라왔구나 싶었다"고 말했다. ◇'오래된 둔감함'은 또다시 폭력으로 이에 대해 전문가들은 대학생이 되기 전, 초‧중‧고등학교 시절 제대로 고쳐지지 못했던 '둔감한 폭력'이 그대로 표출된 것이라고 평가한다. 다만, 그 위치가 좀 더 '올바름'이 강조되는 성인으로 옮겨졌을 뿐이다. 한국성폭력상담소 이미경 소장은 "말 그대로 별 생각 없이 들어가서, 별 죄의식 없이 고등학교 때까지 하던 지난 행동들을 똑같이 반복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며 "이성에 대한 존중이 제대로 교육되지 않는 상태에서 대학에 들어왔다고 갑자기 달라지는 게 아닌데, 잘못된 관계 맺기가 계속 이어지는 셈"이라고 설명했다. 바른미래당 장정숙 의원이 교육부로부터 제출받은 자료에 따르면, 지난 2013년부터 지난해 말까지 국내 106개 대학에서 발생한 성범죄 사건은 적발된 것만 320건에 달했다. '#미투' 폭로에 힘입어 여러 사례가 드러났지만, 교수나 교직원 등 위계질서나 동기간의 관계 등을 고려해 차마 드러내지 못했을 사안들을 고려하면 실제 수치는 이보다 훨씬 더 많을 것으로 추정된다. '어디에 있을까' 싶지만 '어디에나' 있는 폭력. 남는 건 대학 생활에서의 일상적 불신이다. 대학생 송모(23) 씨는 "밖에 다니다 보면 누군가에게 나의 외형을 평가당하는 일이 간혹 있었는데 그런 일이 '학내에서조차' 일어난다는 걸 확인받은 셈"이라며 "겉으론 멀쩡해 보이던 아는 사람, 가까운 사람들이 그런 일을 거리낌 없이 할 수도 있다는 데 분노했고 불신까지 생긴 것 같다"고 말했다. ▶ 노컷뉴스 추천기사
노인과 바다
'노인과 바다' / 어니스트 헤밍웨이 저 (지극히 주관적이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의 대표작이다. 개인적으로 깔끔하고 짧은 단문을 선호하는 편이다. 물론 만연체나 화려체, 우유체 등도 충분히 매력 있지만 간결체로 된 단문은 서사 중심의 소설을 좋아하는 나에게 가장 잘 맞는 문체이자 문장이다. 그래서 국내 작가로는 김훈 작가와 장강명 작가를, 외국 작가로는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좋아한다. 이 노인과 바다에서도 간결하게 서사를 표현해내는 헤밍웨이의 하드보일드 한 문장을 여실히 느낄 수 있다. 사실 노인과 바다는 큰 스토리라고 할 만한 것이 없다. 한 늙은 어부가 커다란 물고기와 삼일 밤낮을 사투를 벌여 결국 물고기를 잡고 그 물고기를 뱃전에 묶은 채 돌아오는 길에 상어 떼가 물고기의 살점을 모두 뜯어먹는 내용이 전부다. 하지만 이 노인과 바다를 명작의 반열에 올려놓는 이유는 헤밍웨이 특유의 간결하고 냉철한 문체로 늙은 어부가 물고기를 잡는 상황과 감정을 날카롭게 그려냈다는 점, 한 늙은 인간과 대자연인 바다, 그리고 그 속의 커다란 물고기가 가지는 상징적인 의미를 가지고 한 명의 인간이 거친 대자연 속에서 어떻게 의지를 잃지 않고 버텨나가며 고난과 싸우는지를 보여줌으로써 인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숭고해지고 위대해질 수 있는지를 깨닫게 한다는 점, 늙은 어부와 물고기의 끊임없는 투쟁 과정과 그동안 어부가 느끼는 생각들을 생생하게 서술해 독자에게 인간의 마음이란 얼마나 연약하고 또 얼마나 강인한지 그 양면성을 보여주었다는 점 등이 있겠다. 한 가지 더 생각해 볼 점은 인간의 노력과 과정, 성과에 대한 것이다. 늙은 어부는 삼일 밤낮을 새워 거대한 물고기를 잡는다. 하지만 뱃전에 물고기를 묶고 돌아오는 길에 어부의 필사적인 저항에도 불구하고 상어 떼에게 그 살점들을 모두 빼앗기고 만다. 결국 어부는 엄청난 노력을 들이고 숭고하기까지 한 과정을 거쳤음에도 어떤 성과나 결과도 남기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 누구도 노인을 무시하거나 비난하지 않고 노인 스스로도 좌절하지 않는다. 소설의 마지막에는 레스토랑에 있는 부인이 살점이 모두 사라진 물고기의 흰 등뼈를 보며 말한다. "상어가 저렇게 멋있고 아름다운 꼬리를 가지고 있는 줄 몰랐네요." 독자의 감상과 상관없이 소설의 여러 부분에서 헤밍웨이는 늙은 어부, 산티아고가 한 일이 성과가 없기 때문에 헛되다고 생각하지는 않은 듯하다. 요즘 우리 시대에는 결과나 성과가 없는 일은 미련한 일로 취급받는다. 어차피 너 하나 그렇게 한다고 세상 안 바뀌어, 너 그거 헛고생이야 라는 말은 심심치 않게 주변에서 들려오곤 한다. 미련하게 노력하는 건 무식한 짓이고 요리조리 잘 살피면서 자신이 성과를 낼 수 있는 길로 치고 빠지는 것이 현명한 것이며, 어차피 안 바뀔 일이면 그냥 포기하고 다른 길을 찾아서 실익을 따지는 것이 옳고, 아무리 아이가 열심히 공부를 했고 그것을 두 눈으로 봤더라도 시험 점수가 40점이 나오면 그 아이는 공부 못하는 아이가 되고 마는 것이다. 결과와 성과가 나오지 않는 일은 미련하고 무식한 짓이라는 말로 요약할 수 있을 것이다. 노인과 바다는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말인지 보여준다. 성과가 전혀 남지 않는 일이라도 그것이 어떤 과정을 거쳤느냐에 따라서 의미가 있고 심지어 숭고하기까지 할 수 있다.(노인과 바다를 읽으면서 산티아고의 여정을 따라간 독자라면 어차피 내다 팔 물고기 살점 하나 안 남았는데 쓸데없는 짓 했네 라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이다.) 인간의 의지와 노력 그 자체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찾을 수 있는 소설이다. 고전임에도 지금 시대의 기형적인 부분을 예리하게 꼬집고 있다. 점점 노력이 의미를 잃어가는, 힘들이지 않고 지름길로 가는 것이 미덕이 된 우리 사회에 대해 생각해 보고 싶다면 '노인과 바다'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 배는 아직 괜찮구나, 노인은 생각했다. 배는 온전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