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apanoll
5,000+ Views

록그룹 '퀸'과 1975년 4월 17일의 일본


1975년 4월 17일 하네다 공항 대소동

환영 인파에 놀라..."다른 행성 온 것 같다"


1975년 4월 17일 오후 무렵. 도쿄 하네다 공항에는 전례 없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려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비행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들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자, 호놀룰루를 경유한 JAL061 편이 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았다. 트랩을 내려오는 주인공은 데뷔 3년차인 영국 출신 그룹 퀸(Queen)의 멤버들이었다. 섬 나라 일본에 첫 발을 디딘 멤버들이나, 이들을 맞은 팬들이 서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더 프레디 머큐리 등 멤버들은 일순간 동양의 작은 소녀들에게 포위당했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맴버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Brian Harold May)는 당시 “다른 행성에 온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브라이언이 행성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그가 실제 천문학자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적외선 천문학자(Infrared astronomer)였다.

잠시, 브라이언 메이 얘기다. 프레디 머큐리는 ‘프레디 머큐리, 낯선 세상에 서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노래하다’라는 책에서 “제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에서라도 브라이언 같은 적외선 천문학자가 기타를 집어들고 로큰롤 가수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썼다.

천문학 잡지 ‘에스트로노미’(Astronomy)는 ‘브라이언 메이, 과학과 음악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러분은 그를 록그룹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로 알고 있지만, 브라이언은 천문학 박사이기도 하다”(You know him best as guitarist, singer, and songwriter from the rock group Queen, but Brian May is also a Ph.D. astronomer”고 전했다.

일본에 도착한 퀸이 공연을 펼친 곳은 선배 그룹 비틀즈가 섰던 부도칸(武道館)이었다. 공항에 이어 공연장 소동도 변함없었다. 통곡하며 실신하는 여성이 속출했고, 팬들은 밀치고 넘어지며 스테이지까지 몰려들었다. 그러자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을 잠시 중단하고 “모두 침착하자”고 호소했다. 비틀즈 이후 최대의 소동이었다. 퀸의 공연은 2주간 전국에서 열렸다.

퀸은 이후 다섯 차례 더 일본을 방문했고, 마지막 공연을 한 곳은 1985년 5월 15일 오사카성 홀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죽기 6년 전이다. 여섯 차례의 일본 공연은 그만큼 퀸이 일본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퀸은 이처럼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였다. J-팝이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팝음악 잡지 ‘MUSIC LIFE’는 당시 인기 투표를 실시했는데, 그룹 퀸은 ᐅ1975~1978년 1위 ᐅ1979년 2위 ᐅ1980~1982년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91년 11월 24일은 퀸의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날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전하고 24시간 후 사망(당시 45세)했기 때문이다. 그룹의 마지막 앨범인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은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지 4년 뒤 발표됐다. 일본의 열성팬들은 2015년, 퀸의 일본 도착 40년을 기념해 4월 17일을 ‘퀸의 날’(The Queen Day)로 정했다.

일본에서 이런 소동을 벌였던 퀸과 프레디 머큐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부활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극장가에서도 히트 행진 중이다. 신드롬, 팬텀이라고 할 만하다.

음악평론가 스지 스즈키(スージー鈴木)씨는 “헤이세이 최후의 겨울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기억될 것"(平成最後の冬は、映画『ボヘミアン・ラプソディ』とともに記憶されるだろう。)이라고 했다. (일본은 내년 헤이세이 연호가 바뀐다)

‘Love Of My Life’, ‘I Want To Break Free’, ‘Spread Your Wing’ 같은 퀸의 노래들과 함께 2018년의 마지막도 저물어간다. '에~오~ 에~오'.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최고의 비틀즈 노래는 무엇?
이제는 정말 지겨울 만큼 이름을 들어온 그룹 비틀즈. 20대의 젊은이들에게는 아니 40대 이하의 사람들에게는 태어나기 전에 해산을 한 전설적인 밴드로, 단 7년의 기간 동안 13장의 앨범을 발표한 지금으로는 상상하기 힘든 엄청난 활동을 보인 신화적인 존재, 비틀즈.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이름을 알지만 그들의 음악은 예스터데이나 렛잇비 정도만 아는 게 현실이다. 좀 좋아한다는 사람이 베스트 앨범 한 장정도 가지고 있는 정도가 보통인데, 그래서 일반적인 사람들이 모르는 비틀즈의 명곡도 많이 있다. 비틀즈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진짜 비틀즈의 음악만으로 순위를 정한다면 어떤 노래가 최고의 노래일까? 비틀즈의 정규 앨범 13장의 음악을 차트화 해서 저명한 음악잡지 롤링 스톤이 발표 했다. 100위까지 발표 했지만 사정상 Top10만 다뤄보겠다. 10. While My Guitar Gently Weeps 존 레넌과 폴 메카트니라는 투 탑만 생각했던 비틀즈라는 그룹에 조지 해리슨이 각성하면서 만든 명곡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은 일대 충격이었다. 비틀즈의 각개전투 앨범 화이트 앨범에 실린 이 곡은 이후 조지 해리슨이라는 인물의 활동에 큰 등불이 되었던 곡이다. 09. Come Together 비틀즈의 실질적인 마지막 앨범인 [Abbey Road]에 실린 곡. 제목이야 Come Together이고 노래 가사도 같이 하자는 내용 같지만 결국 마지막이 되었다. 08. Let It Be [Abbey Road]보다 먼저 녹음되었지만 그 후에 발매 되어서 비틀즈의 디스코그라피의 가장 마지막을 장식하는 앨범 [Let It Be]에 실렸던 대표 곡. 국내에서도 비틀즈의 대표곡 중 하나로 많은 사랑을 받았던 곡이다. 07. Hey Jude 68년 발매한 싱글 “Hey Jude”는 당시 발매 되었던 정규 앨범인 화이트 앨범에는 실리지 않은 곡이다. 7분 넘는 대곡이었지만 마지막 인상적인 후렴구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았고 미국에서 무려 9주나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하면서 빌보드에서 선정한 올타임 베스트 싱글에서 10위를 차지했다. 폴 메카트니가 작곡한 이 곡은 재미있게도 존 레넌의 아들을 위한 곡이다. 06. Something “While My Guitar Gently Weeps”에서 터진 조지 해리슨의 포스는 마지막 앨범 [Abbey Road]에서 유종의 미를 보여주는 곡 “Something”을 만들어냈다. 조지 해리슨 곡 중 최초의 1위 곡이다. 05. In My Life 비틀즈가 아이돌 밴드에서 진정한 음악가로 선언한 앨범 [Rubber Soul]에 실린 곡. 앨범에 실린 곡들 중에 싱글을 발표한 곡이 없지만 한 곡 한 곡 이전 작들에 비해 무게감과 완성도가 높았고 그 중 “In My Life”는 “Norwegian Wood”와 함께 많은 사랑을 받은 트랙이다. 04. Yesterday 설 명 필 요 없 음 03. Strawberry Fields Forever 67년 앨범 [Magical Mystery Tour]에 실렸던 트랙이다. 신은 그들에게 음악을 주고 영화를 빼앗았다 라는 말이 나올 만큼 OST로 제작된 [Magical Mystery Tour]는 성공했고 영화는 실패했다. 후기 앨범치고는 지명도가 낮은 앨범이지만 곡만큼은 역시나 명불허전이다. 02. I Want to Hold Your Hand 63년 발표한 싱글 “ I Want to Hold Your Hand”는 톱10안에 유일하게 들어간 초기 시절의 음악이다. 이건 음악적인 완성도 보다는 비틀즈라는 밴드의 탄생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곡이라서 라는 생각이 든다. 노래가 나쁘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음악적인 무게감면에서는 지금까지 언급된 곡과는 많이 차이를 보인다. 01. A Day in the Life 드디어 나왔다. 비틀즈를 논할 때 그리고 록 역사를 이야기할 때 항상 최고의 앨범으로 뽑는 1967년작 [Sgt. Pepper's Lonely Hearts Club Band]에 실린 마지막 곡 “A Day in the Life”는 최고의 앨범의 마지막 곡으로 실리기에는 완벽한 트랙이다. 매우 실험적인 트랙이라 대중성 면에서는 좀 약하지만 음악적인 무게감면에서 지금도 이에 필적할만한 트랙을 찾아보기 힘들다. 모든 곡이 다 끝난 다음 맨 안쪽 골에 들어간 효과음의 무한 반복은 CD세대나 디지털 음원 세대는 절대 누릴 수 없는 LP의 영원함이다. [출처] 최고의 비틀즈 노래는 무엇?|작성자 헬로준넷 the source of / Hellojunenet web (KOREA) information web youtube - http://www.youtube.com/hellojunenet blog - http://blog.hellojune.net moremusic - http://www.moremusic.co.kr facebook - http://www.facebook.com/moremusic.co.kr2 HelloJune.Net - http://www.hellojune.net twitter - http://www.twitter.com/hellojunenet
15.06.26
어제 먹은 삼겹살 냄새가 아직, 옷에 배었습니다. 돼지 시체의 살점이 기름에 지글지글 타들어간 냄새죠. 군대에 있을 때 살아있는 오리를 직접 잡아야 할 일이 있었습니다. 장교들이 던져준 오리를 그들에게 요리해 바치기 위해서. 경험이 없었던 우리는 목을 비틀기 위해, 목을 칼로 날리기 위해 그야말로 생난리를 쳤죠. 결국, 차마 산 오리의 목을 비틀진 못하고, 대신 목을 줄로 묶은 채 나무에 한동안 걸어두었습니다. 퍼덕거리던 오리는 한참 후 축 늘어져 있게 됩니다. 어지간해서 손에서 푸드득거리는 짐승을 감당할 수 있을까요. 그렇게 요리한 오리고기를 제가 먹었을까요? 네, 몇 점 먹었습니다. 전 도시에서 태어나 도시에서만 살았습니다. 이제 가끔, 저는 제가 먹을 닭을 직접 잡고 싶습니다. 손에 피를 묻히고 싶습니다. 식욕이 떨어지는 일인가요? 네. 당연하죠. 전 현재 우리의 식욕이 끔찍할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해요. 좀 줄여야죠. 그렇게 하면 사회에 팽배한, 또 우리가 갖고 있는 음식에 대한, 조금은 천박하다고 할 수 있을 그런 감각들을 덜어 낼 수 있지 않을까. 우리는 너무 많은 걸 타인에게 위탁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자본주의는 어쩌면 타인에게 죽음을 위탁하는 시스템일지도 모릅니다. 이 시대의 성공이란 자기 손에 묻혀야 했을 피를 남의 손에 떠넘기는 자들의 것이 아닌지. 도축을 하는 이가 따로 있고 고기를 먹는 이가 따로 있습니다. 전쟁에서 피 흘리고 죽어가는 이가 따로 있고 그로 인해 이득을 보는 이가 따로 있습니다. 생명 경시 풍조는 죽음 경시 풍조라는 말로 바꿔도 다를 바 없을 것 같습니다. '죽음'을 제대로 배우면 생명의 존엄에 대해서 배울 수 있겠죠. 혀 끝의 감각을 위해 동물을 학대하는 사람처럼,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위해 전쟁을 게임으로 생각하는 사람처럼, 누군가를 고문하는 일이 국가 안보를 위한 필요악으로 생각하는 사람처럼 되지 않을 수 있겠지요. 야만성을 잃은 인간은 어쩌면 야만인보다 더 무서운 괴물이 되어가고 있는 건 아닌지. john lennon imagine https://youtu.be/XLgYAHHkPFs
퀸은 영화 배우 뺨치게 잘생긴 드러머를 제외하고는 볼 만한 게 없다
퀸이 초기 시절 어느 평론가에게 들은 말  '영화 배우 뺨치게 잘생긴 드러머를 제외하고는 볼 만한 게 없다' 에서 영화 배우 뺨치게 잘생긴 드러머는 로저 테일러! 만화 캐릭터도 이렇게 만들면 사기라고 할 것 같은데... 얼굴만 존잘이 아니라 본업까지 핵존잘 작곡 드럼 기타 베이스 보컬 다 가능한 레알 먼치킨 Radio Ga Ga(레디오 가가)를 만든게 로저♡ 거기에다 치대생 출신이고, 나중에 적성에 안맞아서 식물학으로 전과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성격은 존나쎄 그 자체인 로저 공연 전에 염색을 잘못 해서 머리가 녹색이 됐는데 프레디가 이걸로 내내 놀려먹어서 드럼 집어던짐ㅋㅋㅋㅋ 퀸 음악 악평한 롤링스톤지에 친필 쌍욕 편지도 보냄ㄷㄷㄷ 비행기 구토용 봉투에 편지를 써서 보내는 성질머리;; 기자가 콘서트 제대로 안보고 공연 전 음향체크만 듣고 후기 써서 씅질이 남! 씨익씨익;;; 180.3cm / 60.3kg의 슬랜더 프레디가 라이브때 키 낮춰서 노래해도 본인은 드럼치며 꿋꿋이 원키 고음 지른게 로저 예전에 고향에서 밴드를 했었는데 보컬이 나가고 보컬, 드럼을 동시에 맡은 경험이 있음ㅋㅋㅋㅋ 보컬도 제일 안정적인건 로저였다고 함 고음이 젤 높이 올라가는것도 로저! 로저 테일러에게 겸손함이란?| 전혀 없음ㅇㅇ (난 좀 짱이니까) 로저는 참지않긔. 우리 로저는 안 참고 찢어요 사기캐는 나이들어서도 존잘 관심좀 주세요.. 귀찮으실까봐 댓글 달아달라고 못하는데 클립과 하트 정말 좋아해요...♥
창업자 데릴사위가 키운 스즈키 자동차
스즈키 자동차의 1대 창업주 스즈키 미치로. 마츠다 오사무(松田修)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후현 태생으로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은행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5년 후인 1958년, 은행원이던 그의 인생에 일대 큰 변화가 찾아왔다. 스즈키 자동차 실질적 창업주 스즈키 슌조(鈴木俊三)의 데릴사위가 된 것이다. 마츠다 오사무는 스즈키 슌조의 장녀와 결혼해 양자가 됐고, 그의 이름은 마츠다 오사무(松田修)에서 스즈키 오사무(鈴木修)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큰 변화가 닥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1977년에 창업자인 스즈키 미치오와 2대 회장인 스즈키 슌조, 3대 회장인 스즈키 지츠지로 등의 경영자가 잇따라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데릴사위인 내 어깨에 회사의 운명이 지워진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스즈키 오사무 저 ‘작아서 더 강한기업 스즈키’(김소운 옮김, 리더스북) 전임, 현직 CEO가 동시에 쓰러지면서 스즈키 오사무는 순식간에 사장 자리를 맡았다. 입사 20년이 지난 1978년의 일이다. 닛케이비즈(2009년 3월 2일)는 당시 스즈키 오사무의 심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아, 내가 사장이야”- 스즈키 오사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등골이 오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쉴 때도 사장이라는 무게감이 덮쳤다.> 스즈키 자동차를 이야기 할 때, ... <김재현 기자> (이어지는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 )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CEO 열전/ 닛산의 쿠데타?...곤의 몰락①
20년에 가까운 장기 집권이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위기에 빠진 일본 닛산자동차를 부활시켜 ‘기업회생 예술가’(Turnaround Artist)라는 별명이 붙었던 카를로스 곤(Carlos Ghosn‧63) 회장. 그는 소득 허위 신고 등 금융상품거래법 위반 혐의로 도쿄지검 특수부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닛산 자동차가 조세회피처 회사에 투자 자금을 옮기고, 곤 회장의 자택용 물품을 구매했다"는 말도 흘러 나온다. "닛산 내부에서 특수부의 칼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켰고, 특수부도 이에 가담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1999년 닛산 개혁의 해결사로 일본 땅을 밟았던 그는 현재 닛산, 르노, 미쓰비시(三菱)자동차 3사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이번 체포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며 ‘곤 사마(樣)’로 불렸던 곤 회장은 이제 불명예 퇴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재팬올이 그의 일본 진출기를 되돌아본다. 아래 기사는 국내에 번역 출간된 ᐃ‘카를로스 곤, 변화와 개혁으로 이끄는 성공 경영’(오토미 히로야스 저, 은미경 옮김, 삼호 미디어, 2002년) ᐃ‘기적을 만드는 카를로스 곤의 파워 리더십’(이타가키 에켄 저, 강선중 옮김, 더난출판, 2002년) ᐃ‘카를로스 곤 효과’ (미구엘 리바스 마이카으므 저, 김현모 옮김, 일신서적, 2008년) 등 서적과 일본 언론들 보도를 참고로 작성했다. 1. 왜 체포됐나?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미쓰비시 회장이 500억 원의 소득 신고를 누락한 혐의로 ...<김재현 기자> <기사 더보기 ...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 >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아열대인 오키나와에서 맥주를 만든 이야기...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극동군 총사령부)은 오키나와에 ‘류큐열도미국민정부’(琉球列島米国民政府)를 설치해 그곳을 통치했다. 1957년 어느 날, 미군의 민정관(民政官) 보나 F. 버거 준장은 오키나와의 상공회의소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앞으로 오키나와 산업의 기둥은 ‘시멘트’와 ‘맥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매체 ITmedia 비즈니스) 시멘트는 건물이나 도로 등을 건설하는 ‘하드’ 측면, 맥주는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주는 ‘소프트’ 측면을 의미했다. 당시 이 강연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한 경영인이 있었다. 구시켄 소세이(具志堅宗精:1896~1979)라는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된장, 간장 회사(具志堅味噌醤油)를 경영하고 있었다. 전후(戰後) 복구 차원의 새 사업을 구상중이던 그는 때마침 버거 준장의 말을 듣고 맥주사업을 실현에 옮겼다. 1957년 5월 구시켄을 필두로,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아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는 세웠지만 곧바로 맥주를 생산해 낼 수는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아열대의 오키나와에서 맥주 산업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오키나와의 수질도 문제였다. 오키나와는 산호초가 융기한 섬이어서 토양이 알칼리성으로, 경수(硬水)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이 경수가 맥주 제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구시켄은 오키나와 각지를 현지 조사한 끝에, 산이 있는 나고(名護) 지역에서 맑은 연수(軟水)를 찾아냈다. 그는 그곳에 공장을 세웠다. 2년에 걸친 수질 조사와 공장 건설을 통해 마침내 회사가 설립됐다. 회사 설립 발기 당시, 사명은 ‘오키나와 기린 맥주 주식회사’였다. 본토 맥주 대기업 기린과 기술 제휴를 도모했던 것. 하지만 협상이 무산되면서 기린이라는 이름을 떼고 ‘오키나와 맥주 주식회사’가 됐다. 기업 브랜드 네이밍의 경우, 창업자의 의지가 반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맥주 브랜드에는 뭔가 특별한 게 필요했다. 회사는 1957년 11월, 신문에 파격적으로 현상 공모 광고를 냈다. 1등 당선 상금은 83달러 40센트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액이었다. (이 돈의 가치를 알고 싶은가. 1958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였다.) 공모 결과, 현민들로부터 2500여 건이 접수됐고 그 중에서 별자리(별 3개) ‘오리온’이라는 이름이 선택됐다. 오리온 맥주 홈페이지에는 당시 선정 이유가 올라와 있다.  “첫째, 오리온은 남쪽 별이라는 점에서 (열도의 남쪽인) 오키나와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둘째, 별은 사람들의 희망과 동경을 상징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3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당시 오키나와를 통치하고 있던 미군...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67 ) <이재우 기자‧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9
Comment
Sh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