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울에 코끼리 끌고 알프스 넘음
기원전 217년, 한니발은 트레비아 전투에서 로마의 대군을 박살내 이탈리아 북부의 패권을 쥐었다. 그의 원정군 중 전투에서 잃은 병력은 대부분 켈트족이었고, 한니발이 그들에게도 증오스러운 원수였던 로마를 꺾었다는 낭보가 퍼지자 일대의 켈트 부족들이 앞다투어 합류하면서 병력은 순식간에 다시 보충되었다. 끔찍한 패배 소식이 로마 시내에 전해지자, 시민들은 한니발이 봄이면 로마 성벽 앞에 나타날 거라는 두려움에 떨었고 그해의 새 집정관, 세르빌리우스 게미누스와 가이우스 플라미니우스는 로마 시민과 이탈리아 동맹시들을 가리지 않고 신병을 모집하여 훈련, 새로운 군단들을 만들어내느라 분주했다. 원로원은 여러 신들을 로마의 편으로 돌리기 위한 9일간의 탄원 기간을 선포했고, 심지어 한니발의 수호신이라 여겨지던 헤라클레스를 '매수' 하고자, 봉헌 제물을 잔뜩 바치는 촌극이 벌어지기도 헀다. 마침내 이탈리아에 봄이 돌아오자 한니발은 다시 남하를 개시했다. 로마 연합의 붕괴라는 원정의 전략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그에게 주어진 눈앞의 첫 과제는 이탈리아의 척추이자 로마 북부 에트루리아의 풍요로운 중심지로 내려가는 아펜니노 산맥을 돌파, 그 일대를 타격하는 것이었다. 늦봄의 아펜니노 산맥에 듬성듬성 남은 눈발쯤이야 겨울 알프스를 넘은 카르타고의 용사들에게는 아무 것도 아니었지만 그가 과연 이 산맥의 어느 곳을 원정군과 함께 넘을지가 한니발 본인에게도, 로마 집정관들에게도 깊은 고민거리였다. 해안에서 가까운 쉬운 길을 따라 편하게 남하하는 루트는 당연히 세르빌리우스의 로마군이 이미 철통같이 지키고 있었으므로, 결국 한니발은 에트루리아의 아르노 강 계곡으로 이어지는 길을 택했다. 이쪽 루트 근처에도 플라미니우스의 로마군이 진을 치고 있었지만, 플라미니우스는 물론 그 어떤 로마인도 한니발이 설마 아르노 계곡을 통과하려 할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도 그럴 것이, 봄이면 아르노 계곡은 겨울에 내린 눈이 녹은 물과 봄비로 인해 완전히 범람하는 데다 주변은 도저히 통과할 수 없는 늪지대로 둘러싸여 있어서, 상식적으로 이런 곳에 대군을 몰고 들어간다는 건 알프스를 겨울에 넘는 것보다도 더한 미친 짓거리라고밖에 볼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한니발은 안내인들을 통해, 이 지역의 지면이 "생각보다는" 덜 물렁하다는 정보를 입수한 상태였다. 늪지대를 건너면 철통같이 준비된 로마군의 방어선을 피하는 엄청난 군사적 이점이 있을 뿐더러, 더불어 로마 집정관들의 뒤통수를 완전히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내리칠 수 있을 터였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늪지대를 건너는 데 성공했을 때의 이야기였다. 5월 초, 그런 끔찍한 진창을 뚫고 행군할 것이라는 썰이 카르타고군 진지에 돌자, 존경하는 사령관을 믿고 한겨울 알프스 산맥을 넘었던 용사들조차도 아예 출발 자체를 꺼렸다. 그러나 한니발은 그가 현지 조사를 세심히 마쳤으며, 헤치고 걸어나가야 할 물은 소문보다 얕고 그 바닥은 단단하다는 말로 병사들을 설득했다. 한니발이 앞장서 범람하는 아르노 계곡으로 향하자, 마침내 망설이던 장병들도 그의 뒤를 따라 습지로 들어갔다. 한니발은 싸움터에서는 분명 용맹하지만, 의외로 궁핍이나 고난 앞에서는 멘탈이 순 유리인 켈트족 전사들이 진창에 들어가는 순간 모랄빵이 나서 전원 역돌격하는 사태를 막기 위해 미리 단단히 조치를 취해 두었다. 행군 대열의 선두에는 한니발의 아버지 하밀카르 때부터 충성해온 노련한 북아프리카인과 스페인 인 부대를 배치했고, 짐을 나르는 동물들은 평소와 달리 행군 대열 곳곳에 고르게 배치해, 장병들이 보급품에 쉽게 접근할 수 있게 했다. 한니발의 동생 마고가 지휘하는 용맹한 누미디아 기병대는 후위에 배치되어, 대열 중앙에서 행군하는 켈트족들을 매의 눈으로 감시했다. 켈트족들은 진창을 힘겹게 뚫고 허우적허우적 앞으로 나아가며, 멋모르고 한니발 원정군에 합류한 걸 뼈저리게 후회했겠지만 이미 습지에 들어선 이상, 한니발의 철저한 사전조치 앞에서 달아날 길은 없었다. 밤에 몰래 탈영해본들 진흙의 망망대해나 다름없는 습지에서 길을 잃고 늪귀신 신세가 될 것이고, 한니발에게 굳건히 충성하는 부대들에 앞뒤로 끼인 상태에선, 힘으로라도 뚫고 도망치려는 시도 따윈 부질없을 터였다. 4년보다도 길게 느껴지는 4일 밤낮 동안, 수만 명의 원정군 장병들이 낮아도 무릎, 심할 때는 목까지 차오르는 차갑고 썩은내 진동하는 물 속을 헤치며 허우적허우적 앞으로 나아갔다. 카르타고군 대열에 듬성듬성 고르게 배치했던 동물들은 번번히 짐과 함께 진창에 빠져서, 결국 대다수가 그대로 버려져 죽었다. 병사들이 입은 옷은 진흙 범벅이 되었고, 그들 주위로는 자신들의 배설물이 둥둥 떠다녔다. 따뜻한 모닥불은커녕 밤에 텐트를 칠 마른 땅조차도 지금은 꿈나라 이야기여서 밤이 되면 운 좋은 장병들은 물 속에서 죽은 동물들의 시체 무더기 위에 뻗었고, 운 나쁜 장병들은 선 채로 졸아 보려고 애썼다. 깨끗한 물조차 모자라다 보니, 너무 목말라서 습지의 물을 마시고 만 병사들은 예외없이 지독한 고열에 시달렸고 처음에는 전우들이 그들을 어떻게든 부축하며 함께 걸었지만 결국 이대로라면 비교적 건강한 이들마저도 함께 전멸하고 말 거라는 현실 앞에, 그들은 버려져 진창 속에서 죽어갔다. 한니발은 원래 원정에 끌고 온 코끼리 중 알프스와 북이탈리아의 겨울을 유일하게 버티고 살아남은 "수로스"라는 이름의 코끼리를 총사령관 전용 탈것으로 타고 다녔지만, 아르노 늪지대를 돌파할 때 그가 수로스의 등짝에 편히 앉아 발에 진흙 한 점 묻히지 않았을 가능성은 없다고 단언할 수 있다. 그가 언제나 휘하 장병들과 고락을 함께하는 지휘관이었다는 사실은 심지어 철천지원수인 로마 측의 기록으로도 교차검증될 뿐더러 아르노 계곡에서 한니발에게도 늪지의 썩은 물이 튀기는 바람에, 한쪽 눈이 고통스러운 염증에 시달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서둘러 깨끗한 물로 눈을 씻고 찜질을 했더라면 시력 상실만은 면했겠지만, 둘 다 그 상황에선 불가능한 치료였다. 결국 한니발은 후세의 역덕들에게 익숙한 애꾸눈의 모습이 되고 말았다. 그는 자신의 불행에 좌절하지 않고, 알렉산드로스 대왕의 아버지 필리포스 같은 전설적인 외눈 장군들을 이야기하며 자신의 애꾸눈이 빛나는 무공 훈장이나 마찬가지라고 말했다고 전한다. 늪지옥에서의 3박 4일이 지난 후, 마침내 한니발의 병사들은 현대의 피렌체 근처 어딘가의 마른 땅에 뻗을 수 있었다. 당시는 물론, 무려 2천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무수한 이들이 한니발의 아르노 늪지대 돌파에 대해 한니발도 사람인데, 이건 그냥 잠시 제정신이 나가서 저지른 미친짓이었다고 봐야 하는 거 아님?;;;이란 의문을 제기해왔다. 아닌 게 아니라, 만약 한니발이 습지에서 빠져나온 바로 그 순간에 소수의 로마군이라도 만났었다간 원정군은 무조건 전멸 확정이었고, 2차 포에니 전쟁은 그날로 시마이였을 테니 말이다. 그러나 현대 역사학자들의 정설은, 물론 아르노 늪지 돌파가 알프스 산맥 돌파보다도 더 위험했으면 위험했지 덜할 게 없었던 엄청난 도박성 작전이긴 했지만 한니발이 단순한 오판으로 저지른 짓은 결코 아니었다는 것이다. 이제 한니발은 그 어떤 로마인이 예측할 수 있었던 곳보다도 한참 먼, 완전히 무방비인 로마 영토 내부에 수만 명 규모의 핵폭탄드랍을 성공시킨 것이다. 한니발이 휘하 장병들에게 준 며칠간의 휴식 시간 동안, 가장 뛰어난 로마 정찰병들조차도 그들을 전혀 발견하지 못했을 뿐더라 이제 한니발은 앞으로 치러질 여러 전투에서, 로마의 홈그라운드임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가 주도권을 쥐고 카르타고군을 유리한 위치에 배치할 수 있는 엄청난 전술적 이점을 얻었다. 늪에서 끔찍하게 고통받으며 사기가 땅에 떨어졌던 켙트족들도, 이제 부유한 로마 땅에서 인근 농장과 마을들을 마음껏 약탈하며 오랜 세월 자신들을 괴롭혀온 로마인들에게 복수할 기회를 얻었다는 것에 더없이 기뻐했고 습지에서 짐을 실은 동물과 군량 대부분을 잃었던 것도, 한니발이 미리 계산한 대로 현지조달을 통해 순식간에 보충할 수 있었다. 위대한 전술의 천재는 (비록 후세에는 훨씬 덜 알려졌지만) 알프스 돌파에 이어 또다시 위대한 도박을 성공시켰고 그해 6월의 트라시메노 호수에서, 칸나이 전투 다음가는 위대한 승리를 또다시 거두게 된다. - 필립 프리먼 저 "한니발 : 로마의 가장 위대한 적수", 마크 힐리 저 "칸나이 bc216"에서 "진짜 광기" ㄷㄷㄷㄷㄷ 군사갤러리 김치랜드에영광을님 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