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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초격차 기업’들은 이렇게 성공했다

#1.
“많은 이들이 자신이 꼭 해야 할 것들을 대충하고 끝낸다. 심지어는 꼭 해야 하는 일인데 아예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대부분의 실패는 ‘당연히 해야 하는 것을 하지 않기 때문에’ 벌어진다.”(일본 산업용 로봇제작사 화낙 이나바 요시하루 회장)
#2.
“부서마다 실패 사례 연구회가 정기적으로 열리는데, 어떤 문제 때문에 실패했는지, 거기서 무엇을 배울 것인지를 공유하는 모임이다. 적어도 같은 실수를 반복하지 않는다는 것 만으로도 매우 큰 의미가 있다”(전자회사 무라타제작소 무라타 쓰네오 사장)
#3.
“(다시 20대로 돌아간다면) 가장 후회하는 것은 젊었을 때 충분히 스마트하지 못했고, 충분히 용감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20대로 돌아가도 같은 일을 할 것으로 생각한다. 다만 더 스마트하게, 더 용감하게, 더 빠르게 할 것이다.” (통신기업 소프트뱅크 손정의 회장)
일본의 ‘초격차 기업’ 성공 사례를 분석한 제대로 된 책이 나왔다. ‘일본 초격차 기업의 3가지 원칙’(최원석 지음, 더퀘스트)이다. 저자(경제경영 주간지 ‘이코노미조선’ 편집장)는 오랜 일본 취재 경험과 식견을 바탕으로 일본 기업 현장을 생생하게 전한다. 특히 일본 초격차 기업 경영자들과의 인터뷰는 한국 기업 관계자나 경영자들이 눈여겨 봐야 할 대목이다.
저자는 초격차 기업의 세 가지 원칙을 ᐅ‘당연한 것 하기’ ᐅ‘멈추지 않기’ ᐅ‘제대로 하기’로 나누었다. 이를 풀면 다음과 같다...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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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브랜드 네이밍’이야기/ 자동차(도요타)
도요타(TOYOTA)자동차도 혼다차와 마찬가지로 창업주의 이름을 회사명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도요타차는 사정이 좀 다르다. 창업 초기, 브랜드명이 도요타(TOYOTA:トヨタ)가 아닌 도요다(TOYODA:トヨダ)였다는 걸 알고 있는가? 창업 가문의 성(豊田)은 도요다(トヨダ, とよだ)라고 읽는다. 창업의 토대를 마련한 도요다 사키치(豊田佐吉:とよだ さきち)와 실질적 창업주인 그의 아들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とよだ きいちろう)가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는 창업 가문의 성을 따서 도요다(トヨダ)라고 했다. 영문명도 TOYODA가 됐다. 창업 당시인 1935년 7월 TOYODA로 상표등록을 했다. 1년 뒤인 1936년 도요타 최초의 양산형 승용차 AA형엔 알파벳 TOYODA 엠블럼이 장착됐다. 하지만 미국 수출을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TOYODA 발음이 문제였다. 창업자 도요다 기이치로는 외국인이 영어 회사명을 발음하기 어렵다고 해서 TOYOTA(トヨタ)로 바꾸도록 지시했다.(아사히신문 특별 취재반 저 ‘도요타시 1번지’) 도요타 사사(社史)에 따르면, TOYODA(トヨダ)에서 TOYOTA(トヨタ)로 바꾼 다른 이유 3가지가 더 있다. ①‘상업,미술적으로 봐서 촉음을 붙이지 않는 것이 상쾌하고, 말의 음색(소리의 울림)도 좋다(商業美術的に見て、濁点を付けないほうが、さわやかであり、言葉の調子(音の響き)も良い)는 것이다...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8 )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도요타 베스트셀링카 렉서스도 안 팔린다
일본 자동차 8월 한국 판매 전년 대비 57% 하락 도요타 렉서스도 7월과 비교하면 39% 떨어져 수입차 판매량과 더불어 신규등록대수도 감소세 맥주, 의류, 자동차 등 일본 제품에 대한 한국 소비자들의 보이콧이 전방위로 이뤄지고 있다. 일본 영자 매체 재팬투데이(japantoday)는 4일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이 8월 한 달 한국에서 급격한 매출 감소를 기록했다”(Japanese automakers posted sharper sales falls in South Korea in Augus)고 보도했다. 이 매체는 “외교 관계가 악화된 가운데 일본 차량에 대한 소비자 불매 운동으로 타격을 받았다”고 했다. 재팬투데이에 따르면, 도요타 등 일본 자동차제조업체들은 지난 8월 한국에서의 판매량이 전년 대비 무려 57% 하락했다. 판매대수는 1398대로, 7월 감소세(17%)보다 더 가파르게 떨어졌다. 구체적으로 도요타의 8월 판매대수는 전년 동월 대비 59% 감소한 542대, 혼다는 81% 급감한 238대를 기록했다. 도요타의 베스트셀링카 렉서스도 8월엔 크게 줄어든 것으로 나타났다. 재팬투데이는 “렉서스는 한국에서 가장 많이 팔린 일본 브랜드로, 8월 판매는 전년 동월 대비 7.7% 증가했지만, 한 달 전인 7월과 비교하면 39% 감소한 603대에 그쳤다”고 했다. 수입차 판매와 더불어 신규등록대수도 감소세에 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KAIDA)는 4일 보도자료를 내고 “8월 수입승용차 신규등록대수가 7월(1만9453대) 보다 6.8% 감소했으며, 2018년 8월의 1만9206대 보다 5.6% 감소한 1만8122대로 집계됐다”고 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 윤대성 부회장은 “8월 수입 승용차 신규등록은 일부 브랜드의 물량부족 및 감소세로 전월보다 감소했다”라고 말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69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록그룹 '퀸'과 1975년 4월 17일의 일본
1975년 4월 17일 하네다 공항 대소동 환영 인파에 놀라..."다른 행성 온 것 같다" 1975년 4월 17일 오후 무렵. 도쿄 하네다 공항에는 전례 없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려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비행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들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자, 호놀룰루를 경유한 JAL061 편이 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았다. 트랩을 내려오는 주인공은 데뷔 3년차인 영국 출신 그룹 퀸(Queen)의 멤버들이었다. 섬 나라 일본에 첫 발을 디딘 멤버들이나, 이들을 맞은 팬들이 서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더 프레디 머큐리 등 멤버들은 일순간 동양의 작은 소녀들에게 포위당했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맴버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Brian Harold May)는 당시 “다른 행성에 온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브라이언이 행성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그가 실제 천문학자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적외선 천문학자(Infrared astronomer)였다. 잠시, 브라이언 메이 얘기다. 프레디 머큐리는 ‘프레디 머큐리, 낯선 세상에 서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노래하다’라는 책에서 “제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에서라도 브라이언 같은 적외선 천문학자가 기타를 집어들고 로큰롤 가수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썼다. 천문학 잡지 ‘에스트로노미’(Astronomy)는 ‘브라이언 메이, 과학과 음악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러분은 그를 록그룹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로 알고 있지만, 브라이언은 천문학 박사이기도 하다”(You know him best as guitarist, singer, and songwriter from the rock group Queen, but Brian May is also a Ph.D. astronomer”고 전했다. 일본에 도착한 퀸이 공연을 펼친 곳은 선배 그룹 비틀즈가 섰던 부도칸(武道館)이었다. 공항에 이어 공연장 소동도 변함없었다. 통곡하며 실신하는 여성이 속출했고, 팬들은 밀치고 넘어지며 스테이지까지 몰려들었다. 그러자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을 잠시 중단하고 “모두 침착하자”고 호소했다. 비틀즈 이후 최대의 소동이었다. 퀸의 공연은 2주간 전국에서 열렸다. 퀸은 이후 다섯 차례 더 일본을 방문했고, 마지막 공연을 한 곳은 1985년 5월 15일 오사카성 홀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죽기 6년 전이다. 여섯 차례의 일본 공연은 그만큼 퀸이 일본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퀸은 이처럼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였다. J-팝이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팝음악 잡지 ‘MUSIC LIFE’는 당시 인기 투표를 실시했는데, 그룹 퀸은 ᐅ1975~1978년 1위 ᐅ1979년 2위 ᐅ1980~1982년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91년 11월 24일은 퀸의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날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전하고 24시간 후 사망(당시 45세)했기 때문이다. 그룹의 마지막 앨범인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은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지 4년 뒤 발표됐다. 일본의 열성팬들은 2015년, 퀸의 일본 도착 40년을 기념해 4월 17일을 ‘퀸의 날’(The Queen Day)로 정했다. 일본에서 이런 소동을 벌였던 퀸과 프레디 머큐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부활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극장가에서도 히트 행진 중이다. 신드롬, 팬텀이라고 할 만하다. 음악평론가 스지 스즈키(スージー鈴木)씨는 “헤이세이 최후의 겨울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기억될 것"(平成最後の冬は、映画『ボヘミアン・ラプソディ』とともに記憶されるだろう。)이라고 했다. (일본은 내년 헤이세이 연호가 바뀐다) ‘Love Of My Life’, ‘I Want To Break Free’, ‘Spread Your Wing’ 같은 퀸의 노래들과 함께 2018년의 마지막도 저물어간다. '에~오~ 에~오'.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맥주가 치매 예방 돕는다?
아무리 적은 양의 술이라도 장기간 복용하면 뇌의 구조에 악영향을 준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통설이었다. 하지만 술의 종류에 따라 새로운 성분들이 규명되면서, 이런 이론을 획일적으로 적용하기가 어려워지고 있다. 위스키처럼 독한 술에게는 맞는 논리지만, 맥주의 경우는 오히려 뇌에 좋은 영향을 주는 성분을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 최근 밝혀졌기 때문이다. 맥주 속의 잔토휴몰 성분이 뇌세포의 손상을 막아주는 것으로 나타났다 ⓒ Morgue-freephoto 과학기술 전문 매체인 아이플사이언스(iflscience)는 맥주 속에 뇌세포 손상을 막는 성분인 잔토휴몰(Xanthohumol)이 함유되어 있다고 보도하면서, 이 성분은 치매나 파킨슨씨병과 같은 뇌신경퇴행성 질환과 연관된 뇌세포 손상을 막는데 효과가 있다고 밝혔다. (관련 링크) 맥주 속의 잔토휴몰이 뇌세포 손상을 막아줘 맥주 애호가들이 들으면 기뻐할 소식이 발표되어 화제가 되고 있다. 맥주 안에 뇌세포 손상을 막아주는 잔토휴몰이란 성분이 함유되어 있다는 연구결과가 바로 그것. 중국의 과학자들이 연구 중인 이 성분은 각종 뇌질환 치료에 좋은 것으로 알려져 주목을 끌고 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하루 맥주 한 잔으로 알츠하이머나 파킨슨병 등을 없앨 수 있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뇌신경퇴행성 질환을 막거나 늦출 수 있는 잠재력을 갖춘 후보 물질로서, 이 성분을 더 연구할 가치가 있다는 뜻이다. 플라보노이드족의 하나인 잔토휴몰은 호프(Hop)나 맥주에서 발견되는 활성 성분이다. 플라보노이드는 블루베리, 다크 초콜릿, 레드와인에 많이 들어있고 항산화 및 항염증 작용을 한다고 알려져 있는 성분이다. 잔토휴몰이 많은 관심을 끄는 이유 중 하나는, 강력한 항산화 성분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달리기나 자전거 타기 등 다양한 유산소 운동을 하다보면 우리 몸의 세포는 활성산소종(ROS)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 물질을 생성한다. 이 물질들은 과산화수소와 같이 산소를 함유하고 있어 반응성이 매우 높다. 세포 내에서의 활성산소종은 신경 신호 통로를 돕는 것과 같은 여러 가지 중요한 역할을 맡지만, 과도하게 되면 오히려 몸에 해롭다. 과도한 양의 활성산소종이 발생하게 되는 이유는, 물질 자체가 과도하게 생성되거나 혹은 체내 항산화 시스템의 고장 등에 기인할 수 있다. 잔토휴몰과 활성산소종의 기전 개요 ⓒ pubs.acs.org 활성산소종이 과도해지면 세포내의 단백질이나 DNA 등 여러 가지 중요한 분자에 산화로 인한 손상을 가져오게 된다. 이처럼 산화로 인한 손상이 나타나는 현상을 산화 스트레스(oxidative stress)라고 일컫는다. 산화 현상으로 인한 뇌세포의 손상은 알츠하이머나 파킨슨씨병과 같은 특정 뇌신경퇴행성 질환들을 발생시키는 원인으로 알려져 왔지만 실험적으로 정확하게 밝혀지지는 않았었다. 따라서 이번 연구의 책임자인 중국 란저우대의 쟝구오 팡(Jianguo Fang) 박사와 연구진은 잔토휴몰이 항산화 기능을 통해 뇌신경보호 역할을 할 수 있을지를 알아보고자 하였다. 연구진은 우선 쥐의 신경을 잔토휴몰이 들어있는 접시에 담그고, 산화스트레스에 의한 손상을 입혔다. 그러자 해로운 반응 분자를 찾아내는 것은 물론, 암이나 신경퇴행성 같은 스트레스 관련 질환으로부터 세포를 보호하는 특정 세포보호유전자의 상향조절(upregulation) 결과가 나왔다. 이 같은 결과에 대해 팡 박사는 “항산화 기능이 있는 잔토휴몰이 산화스트레스를 방지하여 퇴행성 뇌질환을 방지하는 데 도움을 준 것으로 보인다”고 밝히며 “더 많은 연구가 필요하지만 잔토휴몰이 알츠하이머 등과 같은 뇌신경퇴행성 질환에 대응할 잠재력 있는 후보라는 것만은 분명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잔토휴몰이 많이 함유되어 있는 호프의 경우, 중국에서는 오래 전부터 여러 질병을 치료하는 약재로 사용되어 왔다”고 전하며 “맥주가 다른 술에 비해 건강 기능성 효과가 있다고 알려져 있는 것은, 잔토휴몰이 들어 있는 점과 무관치 않다”라고 덧붙였다. 생체가 어릴수록 잔토휴몰의 효과가 상승 란저우대 연구진의 경우보다 앞서 미 오리건대의 연구진은 잔토휴몰 성분을 쥐에게 적용하여 뇌 인지기능 일부가 개선된다는 점을 발표하여 관심을 끈 바 있다. 이들은 잔토휴몰 성분이 뇌 인지기능 개선 외에 비만 및 고혈압 등에도 효과가 있다는 것을 파악했다. 연구진의 발표에 따르면 특히 나이가 어린 쥐에서 잔토휴몰의 효과가 탁월한 것으로 드러났다. 매우 복잡하게 설계된 미로라도 쉽게 통과했고, 체내 지방산이 줄어들었으며, 신진대사 속도 역시 향상된 것으로 나타났다. 하지만 이 같은 현상은 나이가 어릴수록 효과가 강했고, 나이가 많은 쥐의 경우는 별 다른 긍정적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이에 대해 연구진의 관계자는 “잔토휴몰의 뇌 인지기능 개선 및 신진대사 활동 촉진과 같은 효과가 왜 젊은 단계에만 적용되고, 노화단계에서는 별 다른 효과가 없는지에 대해 구체적 원인을 찾아볼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번 연구의 주요 책임자인 다니엘 잼조(Daniel Zamzow) 박사는 “이번 연구를 통해 잔토휴몰도 다른 플라보노이드 성분처럼 건강에 좋다는 사실을 밝혀낼 수 있었다”고 언급하며 “잔토휴몰 성분이 젊은 사람과 나이 든 사람의 건강에 어떤 기전으로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추가 연구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오리건대 연구진이 잔토휴몰 채취를 위해 호프의 성장 상태를 살펴보고 있다 ⓒ Oregon Univ 잼조 박사와 함께 이번 프로젝트에 참여했던 캐시 마그누슨(Kathy Magnusson) 박사도 “잔토휴몰 외에 플라보노이드 성분도 사람의 기억을 형성하는데 도움을 주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플라보노이드 성분을 섭취하면 건강에 이득이 될 것이다”라고 전했다. 한편 오리건대 연구진은 이런 정도의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잔토휴몰의 양을 섭취하려면 매일 하루에 맥주 2천 리터(L)를 마셔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면서 오로지 잔토휴몰의 효과를 보기 위해 맥주를 섭취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고 설명한다. 이처럼 맥주에 들어있는 잔토휴몰의 함량이 너무 경미해 기능성 효과를 낼 수 없다는 지적은 오래 전부터 존재했다. 이런 이유 때문에 실제로 독일에서는 잔토휴몰의 함량을 대폭 높여 항암 작용을 발휘하도록 만든 맥주가 개발된 적이 있다. 독일의 국립 암연구소와 뮌헨공대가 공동으로 개발한 이 맥주는, 인위적으로 잔토휴몰 함량을 높이는 기술의 일환으로 만들어졌다. 이 맥주의 잔토휴몰 함량은 일반 맥주에 비해 10배 정도이고, 나머지 칼로리와 알코올 함량은 일반 맥주와 아주 유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항암 맥주 연구에 참여했던 뮌헨공대의 아킴 주커(Achim Zuercher) 연구원은 “시판 맥주의 잔토휴몰 함량은 0.01에서 0.20피피엠(ppm) 정도지만, 항암 맥주의 잔토휴몰 함량은 1.0에서 2.5피피엠으로 거의 10배 정도의 차이가 났다”고 말했다. 출처 : https://bit.ly/2QzeWEK사이언스타임즈 연계 · 협력을 통해 제공되는 서비스입니다. 맥주가 치매 예방 돕는다?의 자세한 이야기는 아이디어마루에서 확인하세요!! 맥주가 치매 예방 돕는다? ▶ 더 다양한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아이디어마루에서 확인하세요~! 나의 상상이 실현되다! 아이디어마루! ▶︎
위로의 IT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직장인 유수민(가명) 씨가 집에 들어온 시간은 밤 8시 30분. 서울에 살며 서울에서 직장을 다니지만 출퇴근은 항상 고됐다. 국가교통조사 자료에 따르면, 2016년 기준 서울시민의 출퇴근 소요 시간은 평균 96.4분이다. 평균이 중간값처럼 느껴지지 않는다. 오자마자 침대로 쓰러진 그녀는 그래도 일찍 도착했다며 만족했다. 요즘 유수민 씨는 다시 만화를 시작했다. 어릴 적부터 만화를 즐겨보던 그녀는 직장 생활에 치여 한동안 멀리했다. 하지만 이렇게 일만 해선 안 되겠다 싶어 만화를 위한 아이패드를 샀다. 비싼 가격 탓에 고민 끝에 구입한 아이패드였기에 더욱 애착했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려웠다. 녹초가 된 몸으로 취미를 즐긴다는 건 한계가 있었다. 출퇴근 시간 만큼도 쓰지 못했다. 그러다 발견한 앱이 ‘플로렌스’였다. 플로렌스는 호주의 크래프트 게임 스튜디오 마운틴스에서 제작한 인터렉티브(대화형) 게임이다. 플로렌스는 퍼즐 맞추기 등 플레이어의 단순한 조작으로 진행된다. (사진=마운틴스) 플로렌스는 소설 같은 스토리텔링 앱이라 할 수 있다. 이야기는 주인공 ‘플로렌스 여(Florence Yeoh)’를 중심으로 진행된다. 오직 일과 잠, SNS뿐인 생활을 하던 25살 플로렌스가 크리시(Krish)라는 첼로 연주자를 만나 사랑하는 구성이다. 특이한 점은 플로렌스는 미션을 요구하지 않는다. 따라가기만 하면 된다. 매일 피로한 유수민 씨가 그나마 할 수 있었던 이유이기도 하다. 플로렌스는 플레이어를 힘들게 하지 않는다. 그저 플레이어는 화살표를 눌러 진행하거나, 단계마다 손가락만 조금 움직이면 된다. 말풍선 조각 퍼즐을 맞추고 가려진 부분을 긁어 없애는 식이다. 역설적이지만 플로렌스는 그 귀찮음을 통해 과거의 어떤 경험을 환기한다. 플로렌스는 작은 경험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위로를 준다. 플로렌스 안에 설계된 경험은 그녀에게 ‘아름답게 살며 사랑했던 어느 순간’을 전달한다. 행복한 기억으로 마음을 위로하는 것이다. 현대인은 내일을 버티기 위해 쉬는 것조차 온 힘을 다해야한다. 그들에게 위로야말로 가장 필요한 가치다. 따뜻한 색감을 가진 플로렌스의 일러스트도 유수민 씨의 마음을 흔들었다. 거기에 배경음악으로 깔리는 연주곡들은 주인공과 유수민 씨의 목소리를 대신한다. 마운틴스는 플로렌스의 배경음악을 위해 음악감독과 플룻, 바이올린, 첼로 연주자 섭외했다. 말 없는 소통이 주는 위로 사랑에도 끝이 있듯 플로렌스도 끝난다. 유수민 씨 역시 플로렌스의 결말을 알고 있다. 그런데도 왜 그녀는 계속할까? “플로렌스를 하면 할수록 말 없이 전해지는 말을 듣는다. 마치 ‘너는 어떻게 기억하니?’라고 내가 내게 말하는 것 같다. 그 말 없는 소통이 정말 좋다.” 최근 유수민 씨는 만성 장염 때문에 고생이 심했다. 그녀는 술담배도 즐기지 않는다. 최근에는 상담센터도 다니며 생활에 지친 마음도 달래고 있다. 여느 직장인의 삶이었다. 그런 그녀에게 플로렌스의 시간은 위안이자 위로였다. “적어도 작은 액정화면에서만큼 안전하니까요” 유수민 씨는 ‘저니(Journey)’라는 게임에서도 비슷한 편안함을 얻은 적이 있다고 말했다. ‘저니’는 힐링 게임으로도 알려져 있다. ‘저니’는 댓게임컴퍼니에서 제작한 어드벤처 인디 게임으로, PSN(플레이스테이션 네트워크)을 통해 출시되었다. ‘멀리 보이는 사막의 빛기둥을 따라간다’가 저니의 전부다. 친구와도 동행할 수 있지만, 대화는 할 수 없다. 말 그대로 무언의 동행일 뿐이다. 하지만 유수민 씨는 말 없는 동행이 실제처럼 편안했다고 말했다. 저니는 수려한 그래픽으로도 플레이어에게 힐링을 선사한다. (사진=소니) 사실 두 게임은 구성상 못하려야 못할 수 없다. 그래서 플레이어는 조용하고도, 편안하게, 안심하며 플레이할 수 있는 것이다. 이는 반대로 게임 밖의 세상은 시끄럽고, 불편하며, 불안한 곳이라는 뜻이었다. 길을 걷다가도 어디서, 무엇이 튀어나올지 모르는 세상이다. 유수민 씨는 작은 액정 화면 안에서만이라도 안전하고 싶었다고 토로한다. 그게 ‘플로렌스’와 ‘저니’에 찾는 이유다. 위로의 IT가 필요하다 아직 유수민 씨는 ‘플로렌스’와 ‘저니’의 엔딩을 만나지 못했다. 물론 어떤 결말이 기다리고 있는지는 안다. 하지만 그녀는 급하게 갈 필요는 없다고 생각한다며, 오히려 그러고 싶지 않다고 말한다. 이미 현대인은 너무 많은 상처를 가지고 있다. 지금보다 더 나은 세상은 이 상처의 치유로부터 시작될 것이다. 지금은 위로의 IT를 더욱 고민할 때다. 출처 : http://www.kinews.net/news/articleView.html?idxno=119892 위로의 IT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의 자세한 이야기는 아이디어마루에서 확인하세요!! 위로의 IT를 실현하는 방법에 대하여 ▶ 더 다양한 콘텐츠가 궁금하다면! 아이디어마루에서 확인하세요~! 나의 상상이 실현되다! 아이디어마루! ▶︎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4) 대만영화
1895년. 그러니까 뤼미에르 형제가 영화발명을 한 해에 일본은 청일전쟁에서 승리하면서 대만(타이완)을 획득하게 된다. 정확히는 1895년 4월 17일, 청나라가 청일전쟁에서 패하면서 체결된 시모노세키 조약으로 타이완 섬과 펑후 제도는 일본에 양도 되었고 타이완에 총독부를 설치하고 51년간 근대화와 식민지화를 병행하여 진행했는데 이때 영화의 보급도 함께 병행하였다. 워낙 대만의 역사가 기구하고 고산족 등 원주민들이 다양했기 때문에 일본어 보급과 대만인들에 대한 선무공작 차원에서 인류의 신발명품인 ‘영화’는 가장 효과적인 문화적 장치였던 셈이다. 하여 대만이 일본영화사와 함께 진행되게 되는데 1901년 타이베이에서 일본인 다카마쓰 도요지로(高松豊次郞)가 최초로 영화를 상영하는 한편 총독부로부터 허가를 받아 대만 전체를 순회하게 된다. 1896년 상하이에서 중국 최초로 영화가 상영되었고, 그로부터 9년 후인 1905년 베이징에서 경극 공연을 담은 중국 최초의 영화 ‘정군산’(定軍山)이 만들어졌음을 감안 할 때 대만에서 영화를 알게 된 것은 매우 이른 일이었다. 그러나 정작 영화가 촬영된 것은 1921년 일본인 하기야(萩屋)가 방문하여 ‘곽란(癨亂, 토사광란)예방법’이라는 식품 위생 교육 계몽 영화를 만든 것이 대만 최초의 촬영기록으로 남아 있다. 다만 1907년 타이베이에 최초의 상설영화관이 들어섰지만 일본 영화가 상영되었고 대만의 대중오락과는 거리가 멀었던 탓에 영화제작은 쉽게 이뤄지지 않았다. 대만의 공식 역사 기록으로는 ‘1922년 대만 총독부 내무부에서 사회 사업을 위해 일본 영화를 구입하고 대만을 여행하기 시작했다’고 밝히고 있으며, 1925년 5월 23일 일련의 영화청년들에 의해 ‘대만영화연구협회’(台灣映畫研究會)가 조직 되었다. 이들 멤버는 이송봉(李松峰), 정초인(鄭超人), 이연조(李延祖), 강정원(姜鼎元) 등이고 대만에 거주 하는 일본인들도 포함되었다. 이들 중 대만 최초의 사진작가로 평가 받는 이송봉이 제작자겸 스틸기사로 나서고 유희양(劉喜陽)이 감독을 정초인 등이 배우로 나서서 ‘누구의 허물’(誰之過, Who’s over)가 만들어져 대만 영화의 효시로 꼽히게 된다. 다만 대만의 공식 역사기록을 보면 그해 9월 대만영화연구협회가 개봉한 이 영화는 흥행에는 실패한 것으로 기록에 남아 있을 뿐만 아니라 이후 대만인 자체의 영화제작이 많이 위축 된 것으로 전해진다. 그러나 영화는 어쩔 수 없이(이들이 본 영화는 일본영화가 전부였을 가능성이 높기에) 일본의 신파와 활극의 영향에서 벗어 날 수 없어서 서로 연인사이인 기생과 은행원이 건달 때문에 위험에 빠지지만 결국 은행원이 기생을 구출하게 된다는 스토리다. 다만 아시아 각국의 영화들이 흥행에 실패하면 사라지게 되는 운명이었듯이 ‘누구의 허물’ 역시 필름은 사라지고 기록만 남은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대만영화연구협회는 대만에 영화의 새싹을 틔우고 이국적 정서를 촬영하기 위해 찾아오는 일본영화인들과 교류를 한 측면이 있다. 1921년 총독부에도 일본 문화를 홍보하는 필름의 사용을 위해 영화 연구소와 부서가 활동하고 있었으며 1924년에는 일본영화 ‘부처의 제자들(佛陀の瞳, 大佛的瞳孔)’이 촬영됐는데 몇몇 일본배우를 제외 하고는 대만에서 현지 배우를 위한 오디션도 진행하였다. 이들 중 상당수는 결국 대만영화연구협회의 설립에 관여하게 된다. 물론 그 이전에도 대만을 소재로 한 일본영화는 있었다. 1919년 에다마사 요시오(枝正義郞)가 덴카쓰에서 제작한 ‘슬픈 노래’가 바로 그것으로, 도쿄에 사는 어린 소녀가 유괴 되어 서커스단에 팔려가 세월이 흐른 후에 대만의 원주민 고사족(高砂族) 추장의 딸로 성장한다는 내용의 멜로 드라마다. 에다마사 요시오가 실제로 로케이션을 했는지에 관한 논쟁은 있지만 당시 가장 근대적 수법과 영화적 기술을 배합한 영화라는 점과 순영화극운동의 일환이었다는 점, 그리고 대만이라는 주변 국가에도 눈길을 돌렸다는 사실만큼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기록에 의하면 1924년의 영화가 흥행에서 참패한 이후 1938년 ‘망춘풍(望春風, 봄바람)’을 내놓기 이전까지는 대만영화는 주로 일본과의 합작에 의존하였고 이 역시 ‘국경 없는 협력’이라는 기본사상이 깔려 있었고 1920년대에는 일본을 통해 일본영화는 물론 할리우드 영화가 수입 되고 본토의 샤먼(廈門)이나 타이난(臺南)을 통해 비록 검열을 엄격하게는 했지만 상하이 영화가 수입되기도 하여 대만에서도 영화제작에 관한 싹은 틔웠다고 볼 수 있다. 또한 1927년에는 닛카쓰의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가 ‘아리산의 귀여운 아이’를 촬영하면서 실제로 대만 현지 올로케이션을 했다. 이 영화는 고산족 청년에 대해서 매우 긍지 높은 인물로 묘사되었다. 이에 힘입어 대만 영화인들도 대만영화사 ‘백달영편(百達影片)’의 장운학(張雲鶴)감독이 ‘혈흔(血痕)’에서 산악지대인 ‘반카이(潘界)’의 교역소를 무대로 남장한 소녀가 죽은 아버지의 원수를 멋지게 갚는 이야기를 통해 대만인들에게 이국적 정서의 영화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와 같은 교류는 계몽사상과 이국적 정서의 융합이라는 일본의 식민지 정책에 아주 적합한 영화들이었다. 이러한 융합은 1932년 대만의 안도 다로(安藤太郞)가 제작한 ‘의인오봉(義人吳鳳)’에서 절정에 달한다. 고사족이 목을 베는 관습을 폐지하게 하기 위해 스스로 희생물이 되기를 자청하는 양심적인 대만인의 이야기를 그려 미개에 대한 문명의 우월성을 드러내지만 주인공이 유교의 이상적 인격을 구현해 냄으로써 일본의 정서와는 선을 긋기도 한다. 하지만 시미즈 히로시(淸水宏)의 ‘사욘의 종(鐘)’에서는 대만은 이미 야만인이 존재하는 곳이 아니다. 이향란(만에이의 아이돌)이 연기한 고사족 소녀는 철저히 ‘황국신민화’되어서 마을에서 출정 병사를 위해 헌신적인 행동을 보여주고 자기를 희생하는 죽음을 맞이하기도 한다. 앞서 기술하였듯이 대만은 홋카이도(北海道)에 이은 일본의 두 번째 식민지이지만 식민정책의 성공적 안착에도 불구하고 1941년 총독부가 대만영화협회를 다시 설립하여 관리·통제 하면서 활발한 제작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게다가 대만 영화들이 흥행 참패한 탓도 있었고 무엇보다도 다양한 출신들(대륙, 토착 한족, 일본, 고산족 등 대만 원주민, 혼혈)이 모인 까닭에 독자적인 문화를 창출하기 보다는 일본 영화인들에게 고용되거나 합작 등을 통해 명맥만 유지해 나갔다. 다만 1945년 일본의 패전 이후 국민당이 본토에서 패하여 대만에 중화민국 정부를 이전할 당시 즉시 일본영화의 상영을 금지하려고 했으나 즉각 대중들의 반대에 부딪힌다. 국민당 정권이 영화업을 관리하게 되었지만 대만의 전후 경제가 빈곤한 상황에서 제대로 된 영화가 나오기 힘든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언어적 통일이 제대로 되지 않아 곤란을 겪었다. 대만의 경우 일본의 변사에서 유래하여 대만의 젊은 세대들이 일본영화를 상영할 경우 대만어 설명자의 도움을 받아 영화를 즐기고는 했는데 이 때문에 국민당 정부의 주선으로 북경어로 된 영화를 제작하기 시작했지만 대만어를 사용하고 객가어(客家語, 중국 남부 광둥(廣東), 광시(廣西), 푸젠(福建), 장시(江西) 등의 지역에서 사용하는 방언)를 사용하는 일반 대만인들에게는 좀처럼 친숙해지지 못했다. 1946년 중미우호조약 체결 이후 미국영화가 대부분 유통되었기 때문에 1950년대 중반에 들어서서야 대만어로 된 민간영화가 나와 인기를 끌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영화의 경우 1970년대 (중공수교에 의해) 국교단교가 일어나기 전까지 대중적 지지로 합작영화가 많이 제작되었다. 오념진(吳念眞)감독의 자전적 영화 ‘아버지(多桑)의 한 장면에서는 소년 시절의 감독이 아버지의 손에 이끌려 탄광 마을의 영화관에서 쇼치쿠의 영화 ’당신의 이름은‘(君の名は, 1953)을 통역자의 해설과 더불어 감상하는 장면이 나온다. 사다 케이지, 키시 케이코, 아와시마 치카게가 주연한 이 영화는 젊은 커플이 2차 세계대전의 공습 하에 도쿄의 수키야바시대교에서 만나게 되는데 둘은 반년 후 다시 만날 것을 약속하나 결국 약속을 지키지 못하게 되고 결국 그녀는 다른 남자와 결혼하게 된다는 통속적 신파극이었다. 이처럼 일본영화의 영향력이 절대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만에이 출신과 상하이 출신들이 유입되면서 대만영화는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일본의 문화와 영화에 대한 거부감은 찾아 볼 수 없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6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CEO 열전/ 닛산의 쿠데타?...곤의 몰락①
20년에 가까운 장기 집권이 종착역을 향하고 있다. 위기에 빠진 일본 닛산자동차를 부활시켜 ‘기업회생 예술가’(Turnaround Artist)라는 별명이 붙었던 카를로스 곤(Carlos Ghosn‧63) 회장. 그는 소득 허위 신고 등 금융상품거래법 위반 혐의로 도쿄지검 특수부에 의해 긴급 체포됐다. "닛산 자동차가 조세회피처 회사에 투자 자금을 옮기고, 곤 회장의 자택용 물품을 구매했다"는 말도 흘러 나온다. "닛산 내부에서 특수부의 칼을 빌려 쿠데타를 일으켰고, 특수부도 이에 가담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1999년 닛산 개혁의 해결사로 일본 땅을 밟았던 그는 현재 닛산, 르노, 미쓰비시(三菱)자동차 3사의 회장을 맡고 있다. 이번 체포로 연예인 못지 않은 인기를 누리며 ‘곤 사마(樣)’로 불렸던 곤 회장은 이제 불명예 퇴진이라는 오명을 쓰게 됐다. 재팬올이 그의 일본 진출기를 되돌아본다. 아래 기사는 국내에 번역 출간된 ᐃ‘카를로스 곤, 변화와 개혁으로 이끄는 성공 경영’(오토미 히로야스 저, 은미경 옮김, 삼호 미디어, 2002년) ᐃ‘기적을 만드는 카를로스 곤의 파워 리더십’(이타가키 에켄 저, 강선중 옮김, 더난출판, 2002년) ᐃ‘카를로스 곤 효과’ (미구엘 리바스 마이카으므 저, 김현모 옮김, 일신서적, 2008년) 등 서적과 일본 언론들 보도를 참고로 작성했다. 1. 왜 체포됐나? 카를로스 곤 르노·닛산·미쓰비시 회장이 500억 원의 소득 신고를 누락한 혐의로 ...<김재현 기자> <기사 더보기 ...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192 >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고교야구 고시엔과 오키나와 반환 운동
열도의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100년 역사의 ‘여름 고시엔 대회’가 막을 내렸다. 효고(兵庫)현 고시엔(甲子園)구장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경기장의 이름을 따 고시엔 대회라고 불린다. 3~4월 열리는 ‘봄 고시엔’(선발고교야구대회)와 8월에 개최되는 ‘여름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이 있지만, 대개 고시엔하면 여름 대회를 말한다. 고시엔 대회는 효고현 나루오 구장에서 열렸다. 대회 인기가 높아지면서 관객 수용이 문제였다. 그래서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시엔 구장이 1924년 들어섰다. 10회 대회부터 고시엔 구장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고시엔 구장은 프로구단인 한신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고시엔 대회가 열리는 동안은 한신 은 구장을 옮겨 경기를 치른다. 그만큼 고시엔의 인기는 프로 못지않다. 그런 고시엔이 일본 고교 야구선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출전 선수들은 시합에 지면 눈물을 머금으며 고시엔 구장 그라운드의 흙을 담아간다. 그해 여름의 뜨거웠던 고교 청춘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선수들에겐 평생 ‘가보’와도 같은 상징물이다. 그럼, 선수들이 매번 가져가는 흙은 어떻게 보충할까. 또 이 흙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본 스포츠매체들에 따르면, 선수들이 1년 동안 가지고 가는 양은 약 2톤에 달한다고 한다. 가지고 간 양만큼 다시 보충이 된다. 고시엔의 흙은 흑토와 모래를 혼합한 흙이다. 오카야마, 미에, 가고시마, 오이타, 돗토리현 등 전국 각지에서 엄선된 흙만 가져온다. 모래의 경우는 중국 복건성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봄과 여름 대회를 치를 때, 흑토와 모래의 비율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비가 많은 봄에는 배수를 좋게 하기 위해 모래가 많이 사용된다. 빛 반사가 심한 여름에는 공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흑토를 많이 넣는다. 그런데 이 고시엔의 흙과 관련, 일본의 쓰라린 역사가 있다. 바로 오키나와다. 오키나와의 고등학교들은 한때 고시엔에 출전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 출전은 했지만, ‘상징물’인 흙을 갖고 갈 수 없었다. 여기엔 이런 사연이 있다. 고시엔 구장의 흙 과 오키나와 슈리고교생들의 눈물.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지 않고 미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미국령이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고등학교들은 고시엔 대회에 나갈 수 없었다. 마침내 첫 출전이 이뤄졌다. 1958년 8월 40회 대회였다. 첫 출전 영광의 학교는 오키나와의 슈리(首里)고교. 하지만 슈리고는 1회전에서 후쿠이현의 강호 쓰루가(敦賀) 고교에 1대3으로 패하고 말았다. 슈리고 역시 고시엔의 전통대로 흙을 가져가기로 했다. 선수 몇 명이 비닐 봉지에 흙을 담아 갔지만,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본토의 흙을 반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오키나와는 미국법을 적용받는 땅이었다. 그런 미국법에 따라 ‘식물 검역법’에서 제동이 걸린 것이다. 선수들은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소중히 가져온 고시엔의 흙을 고스란히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보도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사연을 접한 항공사의 한 여성 승무원이 고시엔 구장의 작은 돌 40개를 오키나와에 전달한 것이다. 당시 검역법에 따르면, 흙은 반입이 금지되지만 돌은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슈리고의 고시엔 출전 기념비에는 지금도 이 ‘고시엔 돌’이 박혀 있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슈리고 사건이 계기가 되면서 오키나와 반환 운동이 한층 달아 올랐다. 1960년 오키나와 조국복귀협의회(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결성됐고, 본격적인 대중운동이 힘을 받았다. 운동은 오래 걸렸다. 드디어 12년 뒤인 1972년, 오키나와 반환이 이뤄졌다. 드라마틱한 일은 2010년 봄과 여름에 연이어 일어났다. 2010년 오키나와의 코난(興南)고교가 봄 고시엔과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다. 오키나와로서는 ‘고시엔 흙 반입 거부 사건’(1958년)에 이어 50년 만에 거둔 최고의 경사였다. <일본 도요(東洋)대 유학생 이모씨>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FT “닛산, 한국 철수 검토”...닛산은 “억측 보도”
8월 닛산차 한국 신규 등록 전년 대비 87% 감소 영업이익 4분기연속 감소에 1만 2500명 감축 예상 닛산 담당자 “억측 기사에는 코멘트 하지 않겠다” 영국 파이낸셜타임스(FT)가 보도한 ‘닛산 한국시장 철수 검토’(Nissan weighs pulling out of South Korea) 기사에 일본 언론들이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FT는 6일 “한국의 일본 제품 불매운동으로 닛산의 현지 판매가 큰 타격을 받고 있다”며 “철수를 위한 논의를 가속시키고 있다”고 보도했다. 한국수입자동차협회에 따르면, 8월 신규등록 된 닛산 브랜드 자동차는 전년 동월 대비 87% 감소한 58대에 그쳤다. 산케이신문은 7일 오후 관련 기사를 온라인 톱으로 처리하면서 “불매운동으로 판매가 90% 감소했다(不買運動で販売9割減)”고 보도했다. 산케이는 “닛산은 2020년 3월기까지 연결영업이익이 4분기 연속 감소할 것으로 전망되는 등 심각한 실적 부진에 빠져있다”며 “7월에는 세계에서 약 1만2500 명의 인원 감축 방침을 발표했다”고 전했다. 산케이는 “이런 닛산이 효율성을 위해 한국 사업을 재검토할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그동안 닛산이 한국시장에 공을 들인 건 사실이다. 배임 혐의로 기소된 카를로스 곤 전 닛산르노회장은 르노삼성자동차 부산 공장에 닛산의 스포츠 유틸리티 차량 ‘로그’ 생산을 위탁하는 등 한국 사업을 강화해 왔다. 하지만 그의 몰락과 한일 관계 악화는 닛산의 한국 사업 철수로까지 이어지고 있다. 하지만 닛산은 FT의 보도를 전면 부인했다. 산케이는 7일 닛산 홍보담당자를 인용 “억측 기사에는 코멘트를 하지 않겠다”고 전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7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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