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ll me by your name
상당히 70-80년대 프랑스 영화스러운(특히 에릭 로메르) 분위기가 나는 이 독특한 영화의 무대는 83년인데, 원래 원작 소설은 87년이었다고 한다(참조 1). 감독의 말에 따르면 83년은 이탈리아가 공식적으로 1970년대를 죽인 해였다. 다만 다들 이 영화에 주로 등장하는 성장기의 사랑, 혹은 동성애 얘기만 하니 나는 좀 다른 측면을 얘기하겠다.
과연 철저하게 외부 사건이 등장하지 않는 이 영화 안 곳곳에 이탈리아 현대사에 대한 은유가 녹아있어서다. 가령 읍내에 있는 선거 포스터에 등장하는 삼색 횃불을 보셨을 것이다. 궁금해 하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보자마자 알겠더라.
녹색과 하얀색, 빨간색 횃불은 바로 Movimento Sociale Italiano, 그러니까 무솔리니의 잔당이 만든 정당이다. 화면에 잘 나오지 않지만 주인공들에게 물 떠주는 할머니 댁에는 무솔리니의 사진/그림/포스터가 걸려 있던 것으로 추정되고 말이다. 게다가 이때 이탈리아는 중대한 격변기를 보냈다.
바로 베티노 크락시(Bettino Craxi)가 총리에 올랐기 때문이다(1983-1987). 베티노 크락시는 전후 이탈리아 최초로 좌파/사회당 출신 총리였고, 이 영화에 등장하는 손님들이 자꾸만 5당체제를 얘기하면서 크락시를 믿느냐 마느냐 갑론을박을 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게 바로 1981년부터 1991년까지 이탈리아의 마지막(...) 좋은 시절을 보냈던 5당체제(Pentapartito, 참조 2)를 뜻한다. 자, 1983년이면 미국과 영국은 각각 레이건/대처 시절이었고, 프랑스는 공산당이 여당에서 쫓겨났으며, 이탈리아는 공산당에 대항하기 위한 5당체제에서 사회당이 대표로 떠올랐다.
그리고 이 베티노 크락시는... 오늘날의 베를루스코니를 탄생시킨 장본인이었다. 그동안 불법이었던 지방방송의 전국방송화를 허용하는 이른바, “베를루스코니 법(Decreto Berlusconi, 참조 3)”을 적극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여러모로 현대의 문제 투성이 이탈리아를 만들어내기 시작한 시기가 바로 그 당시였다.
즉, (아마 유대인 지식인 가족이기에 더욱 좌파였을) 엘리오(참조 4)는 1983년에 이탈리아에 새로 탄생한 크락시를 의미한다고도 볼 수 있다. 미국인 올리버는 미국을 상징하고 말이다. 애초에 크락시 정부와 레이건 정부는 어울릴 수가 없었다(참조 5). 하지만 아버지의 마지막 대사도 그렇고 엘리오도 그렇고, 그들은 계속 미국을 동경하고 있다.
후속편은 아마 비포어 선라이즈 방식으로 나올 것이며(참조 1), 19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질 때가 거론되고 있는 모양이다. 다만 마음에 걸리는 점은, 80년대 동성연애 커뮤니티를 달궜던(!) 주제인 AIDS가 전혀 거론이 안 됐다는 점이다. 혹시 올리버가 보여줬던 피자국, 혹은 엘리오의 코피가 관련 있을까? 뭔가 예상치 못한 비극이 나올 수도 있겠다.
모르겠다. 한 가지 더 말하자면, 작은 놀라움이랄까? 루이 가렐의 여동생인 Esther Garrel이 나온다. 그리고 정말 티모떼 샬라메(Timothée Chalamet)는 떠오르는 스타가 맞다. 너무 잘했다(참조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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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이 기사에는 스포일러가 있다. Director Luca Guadagnino on Why ‘Call Me by Your Name’ Is Making Everyone Cry(2017년 10월 13일): http://observer.com/2017/10/interview-luca-guadagnino-on-why-call-me-by-your-name-makes-people-cry/
2. 다음과 같다.
• Democrazia Cristiana (DC); 기민당(94년 해산)
• Partito Socialista Italiano (PSI); 사회당(94년 해산)
• Partito Socialista Democratico Italiano (PSDI); 민주사회당(98년 해산)
• Partito Repubblicano Italiano (PRI); 공화당
• Partito Liberale Italiano (PLI); 자유당(94년 해산)
3. 이게 왜 문제가 되냐면 베를루스코니는 원래 비디오 테이프를 여기저기 운반하는 식(1980년대 초임을 감안하시라)으로 전국방송을 (상당히 불법적으로) 해오다가 이 법 덕분에 본격적으로 방송 독점에 들어가기 때문이다. 베티노 크락시는 실제로 베를루스코니의 절친이었고, 사회당 해산 후 사회당의 많은 의원들이 포르차 이탈리아에 들어가기도 했었다.
어차피 베티노 크락시는 마니 풀리테 건과 관련, 일종의 뇌물이 연루된 배신 사건인 탄젠토폴리(Tangentopoli) 스캔들로 인해 명예롭지 못하게 정치계를 퇴장했다. 영화의 등장 손님들도 5당체제가 비극으로 끝날 것임을 계속 떠들었었고, 특히나 “베티노가 ‘법을 만들겠지’”라고 말하는 장면이 나온다. 너무나 상징적이다.
4. 당연히 스펠링은 Elio일 텐데, 영화 안에서 중요한 언급이 나온다. 아랍어 연원인 단어들이 실제로는 그리스어 연원이라는 지적이다. 엘리오를 그리스어로 쓰면 Helio(호머 시대 희랍어는 약간 다르지만 고대 그리스어로는 Ἥλιος), 이는 태양이라는 의미다.
내친 김에 다른 주인공의 이름인 올리버(Oliver)의 그리스어 연원을 추적하면 재미나는 결론에 도달한다. 다름 아닌 엘레우테리오스(Ελευθέριος), 즉, “에로스”다. 태양과 에로스인 셈.
5. 가령 1986년 미국이 리비아를 폭격하려 했을 때 크락시 정부는 미국에게 공군 기지 이용을 허가하지 않았다.
6. 어차피 모국어인 불어와 영어 연기는 그렇다 치고, 이탈리아어도 연기할 만큼 하는 것 같다. 이탈리아어는 이 영화 때문에 배웠다고 한다. TIMOTHÉE CHALAMET(2017년 6월 2일): https://www.interviewmagazine.com/film/timothee-chalamet#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