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당신에게 '로마'하면 떠오르는 영화는 무엇인가? 오드리 헵번, 그레고리 팩 주연의 1953년 작 <로마의 휴일(Roman Holiday)>일 것 같다. 그야말로 찬란했던 로마 문명의 상징물들이 도심 곳곳에 잔존한 로마를 배경으로, 인체의 황금 비례를 구현한 고대 문명의 조각상보다 더 아름다운 미녀와 미남이 펼치는 사랑 이야기는 로맨틱 코미디의 모범이 되었다. 로마는 낭만의 대명사로 자리매김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신작 <로마(Roma)>의 공간적 배경은 이탈리아 로마가 아니다. 멕시코의 수도, 멕시코시티의 일부분인 '로마' 구역이다. 전 세계 여행자가 사랑하는 이탈리아 로마와 달리 멕시코시티의 '로마'에는 낭만이 끼어들 미세한 틈조차 보이지 않는다. 이 곳은 1970년대 멕시코의 서릿발 같은 현실이 지배하는 곳이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이 자신의 성장기를 반영해 만든 이 영화는 중산층 백인 가정의 입주 가정부 '클레오(얄리차 아파리시오)'가 주인공이다. 클레오라는 개인과 그녀의 주변 사람들이 겪는 사건들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스레 1970년대 멕시코의 계급, 차별, 폭력, 가정의 붕괴 등 사회상을 직시하게 된다. 당시는 멕시코에서 민주화 운동이 활발했던 시기이기도 하므로 한국 관객은 남다른 감정적 유대를 가질 수 있는 영화이기도 하다.

"<로마>는 개인적으로 언젠가는 꼭 만들고 싶은 작품이었고, 꼭 해야만 하는 작업이었다."라고 밝힌 만큼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각본, 감독, 촬영, 제작, 편집까지 도맡았다. 형식과 내용을 모두 자신이 틀어쥐었다. 지금까지 그가 쌓아온 영화적 자산과 개인적 인생을 이 영화에 쏟아부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그 덕분인지 언뜻 뻔해 보이기도 하는 영화 <로마>는 절묘한 영화적 기교를 실현해 형식과 내용의 하모니를 성취했다.
범박하게 말해 영화는 형식과 내용의 앙상블이 좌우한다. 영화의 형식미를 대표하는 용어로 가장 널리 알려진 단어는 '미장센(mise-en-scène)'일 것이다. '미장센'은 원래 연극 용어로서 "무대 위에서의 등장인물의 배치나 역할, 무대장치, 조명 따위에 관한 총체적인 계획"이다. '미장센'은 연극의 사촌인 영화의 품에도 편안히 안겼다. 연극과 달리 영화의 미장센을 구성할 때에는 반드시 촬영 방식을 심사숙고해야 한다. 카메라의 심도(depth of field), 초점의 이동, 움직임에 따라 특정한 장면이 주는 감흥은 사뭇 달라진다. 카메라뿐만 아니라 화면비, 조명, 인물의 동선 등 촬영 시 고려해야 할 요소는 정말 많다. 똑같은 시나리오라고 할지라도 어떤 촬영감독(DOP, Director of Photograhpy)을 만나느냐에 따라 영화의 운명이 엇갈릴 수 있다. 촬영감독에게 괜히 '감독' 칭호를 붙여주는 게 아니다.

촬영감독을 자임한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치밀하게 조율된 카메라 움직임을 선보인다. 다양한 카메라 움직임 중에서 패닝(카메라가 좌우로 움직이는 것)이 유독 많이 사용된다. 흔히 보기 힘든 360도 패닝까지 등장한다. 이처럼 잦은 패닝은 계급과 출신의 격차에도 불구하고 한 공간에 살면서 서로 지지해주는 클레오와 집주인 소피아(마리나 데 타비라), 아이들, 아이들의 외할머니를 한데 묶어주는 시각적 표현이다. 또한 패닝은 이 영화의 종반부에 등장하는 핵심 메타포인 '파도치는 바다'를 지속적으로 떠오르게 한다. '카메라 트랙(궤도 화면 따위의 장면을 촬영하기 위해 설치하는 레일)'을 활용하여 카메라가 인물과 나란히 이동하면서 인물의 프로필(옆모습)을 찍는 장면들도 파도의 움직임을 닮았다. 파도는 쉴 새 없이 주인공을 때리는 인생 역경을 직관적으로 환기시킨다.
영화 <로마>는 극의 전개상 중요한 순간에 인물의 정면이 아니라 유독 프로필만 보여주는 경우가 많다. 이러한 특징을 피사체의 색상이 제거된 흑백영화라는 사실과 결합해보면, 알폰소 쿠아론 감독은 관객에게 최대한 많은 것을 직접적으로 보여주기보다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상상할 수 있는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한 것 같다.
이 영화의 영상 표현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섬세한 사운드 편집이다. 사방에서 관객의 청각을 자극하는 앰비언스(ambience, 간단히 말해 주변 소음)는 압권이다. 파도, 새, 강아지, 바람, 시위대의 구호, 자동차 경적, 호객에 열 올리는 길거리 잡상 등 모든 소리가 생생하게 재현되어 관객을 1970년대 멕시코시티의 로마로 잡아끈다.
알폰소 쿠아론 감독의 이전 작품 <그래비티>를 떠오르게 하는 장면들도 재밌다. 우주비행사, 무슨 말인지 알 수 없는 소리가 나오는 라디오, 무엇보다 바다.

영화 <로마>는 수미상관이기도 하다. 첫 씬과 마지막 씬에 모두 비행기가 나온다. 첫 씬에서는 드문드문 개똥으로 더러워진 차고를 청소하는 클레오가 흘려보낸 물거품 속에 비행기가 살짝 비친다. 마지막 씬에서는 창공을 가로지르는 비행기들을 오랫동안 직접적으로 보여준다.
예상치 못한 고통이 엄습할 때, 내 곁에서 위로와 응원을 아끼지 않으며 함께 시련을 물청소해줄 사람이 있다면 살만 할 것이다. 그 청소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거품은 덧없음이 아니라 연대(連帶)의 상징이 될 것이다. 엔딩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비행기에 닿을 것처럼 하늘 높이 솟아오르는 거품들을 상상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