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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우하우스 100년

„Da siehst Du es, das Bauhaus; ist es nicht schön?“
"거기 바우하우스 보이시죠, 멋지지 않나요?"
항상 "사랑하는 어머니(„liebe ,Alte Dame'„)"로 시작하는 엽서, 1931년부터 1933년까지 Hans Keßler는 어머니에게 보낸 엽서들로서 총 100여 통이었다. 이 엽서를 통해 바우하우스가 실제로 어떻게 돌아갔는지 알 수 있는데, 여러분들 바우하우스라는 명칭을 많이 들어봤어도 자세히는 몰랐을 터, 바우하우스가 뭔지 좀 파악할 수 있는 좋은 기회다.

기사에 나오는대로 바우하우스는 일단 유명한 건축가들 이름부터 내세울 수밖에 없겠다. 바우하우스를 창시한 발터 그로피우스(Walter Gropius)와 더불어 루트비히 미스 판 데어 로에(Ludwig Mies van der Rohe)의 이름은 들어보셨음직 하다. 이들은 정치적이지 않으면서 기능과 형태가 동일한 건축 양식을 추구했다. 그럼 펀딩은 누가 했는가... 튀링겐 정부였다. 주정부가 바우하우스 디자인 사조와 충돌하면서 바우하우스는 데사우로 옮겼고, 나치당이 지역에서 집권하면서 아예 베를린으로 옮긴다.

하지만 기사에 나오듯, 1933년 나치가 총선 승리를 통해 집권하면서 바우하우스의 운명이 끊긴다. 나치들이 모더니즘을 워낙 혐오했기 때문인데, 그 때문에 나치는 처음에 이들이 공산주의자들이니 폐쇄시켜야 한다고 주장했었다(참조 1). 비-정치적이었던 바우하우스가 공산주의자임을 나치는 입증할 수 없었지만, 나치의 목적은 오로지 바우하우스의 폐교였기 때문에 결국은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다. 자금줄을 다 잘라냈기 때문이다.

엽서에 있는 내용에 따르면 바우하우스의 학생 수는 적었지만(140명) 유학생도 꽤 있었고(16명, 대부분은 미국인들이었다) 8시에서 12시, 2시에서 6시까지 꽤 오랜 시간동안 공부/작업을 했던 모양이다. 한 반에 스무 명 정도가 교수와 끊임 없이 교류하면서 배웠고, 당시 대학의 대규모 클래스와는 질적으로 달랐다. 위에 언급한 판 데어 로에(참조 2)와는 직접 집을 만들어보기도 하고 말이다.

나치가 폐교시키다시피 했던(기술적으로는 자진 폐교였다) 바우하우스가 그렇다면 어째서 지금까지 회자될까? 바우하우스를 세운 이들은 건축가 집단이었지만 이들은 건축에만 머무르기를 거부하고 온갖 학문의 "융합"을 내세웠었다. 교수진 중에는 파울 클레와 바실리 칸딘스키와 같은 화가들도 있었으며, 결국 이들은 현대 디자인에까지 큰 영향을 끼쳤다. 교수진들이 집단으로 미국으로 망명하다시피하여 건너갔기 때문만은 아니다.

위에서 언급한 "기능과 형태의 구분"을 없앤다는 내용 보시라. 형태와 기능이 같다면 형태는 기능을 따라간다. (그 반대도 생각할 수 있겠다.) 즉, 장식적인 면을 없애려 했던 바우하우스 스타일은 결국 미니멀리즘으로, 브라운의 디자이너 디터 람스의 가전제품 디자인으로, 조너선 아이브의 아이폰 디자인으로 계속 이어지기 때문이다.

따라서 모더니즘, 그러니까 현대와 근대를 구분시키는 예술사조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바우하우스를 결국 거쳐가게 되어있다. 바우하우스의 세세한 면을 보기에 이러한 엽서가 아직까지 남아있다는 점도 참 소중하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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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바우하우스의 제2대 총장이었던 하네스 마이어(Hannes Meyer)는 실제로 소련과 가까웠기 때문에 그로피우스는 마이어를 쫓아내다시피 해서 판 데어 로에를 3대 총장으로 앉힌다. 나치로부터의 오해를 풀기 위해서였지만...

2. 판 데어 로에가 했던 유명한 말이 "less is more"이고 "God is in the details"이다. 물론 여기에 반발하는 사조도 무시할 수는 없겠다. 포스트모더니즘 건축가 중 하나인 로버트 벤투리의 "less is bore"도 생각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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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적으로 로버트벤츄리보다는 미스반데로에의 건축을 더 좋아하지만 사상은 로버트 벤츄리의 편인 사람입니다. 좀 다른 이야기긴 하지만 그렇게 많은 사상들이 충돌하며 다퉈왔던 그 때를 지나 이리도 잔잔한 건축(뿐만 아니라 예술계 모두)계를 보니 괜히 슬프기도 하네요....ㅠㅠ
좋은글이네요. 운영된건 짧은 기간이었지만 지금까지도 회자되는걸 보면 그만큼 가치있던 곳인듯 합니다. 좋은글 잘봤습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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