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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대 최고 화가의 모델이자 인기남들에게 둘러싸인 여성화가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은 끌로드 모네, 앙리 마티스,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등이 있으며 이 화가 모두는 남자입니다. 그러나 뛰어난 인상주의 화가들은 모두 남자였을까요? 정답은 "No" 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남자 화가들 사이에 '마네의 뮤즈'로만 알려진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가 있습니다. 여덟번의 인상주의 전시회 중 무려 일곱번을 참가한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홍일점인 그녀의 삶과 작품을 소개합니다.

1. 재능 금수저

모리조는 로코코 시대의 화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증손녀였습니다. 그리고 모리조의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인 사법보좌관이었는데 아버지도 예술에 관심이 많아 예술가들의 후원자였으며 자기 자신도 아마추어 화가였습니다. 모리조는 어렸을 때부터 친자매인 에드마(Edma Morisot)와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서 명화를 따라 그리며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2. 코로의 제자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on-Baptiste-Camille Corot)는 1850년대의 대표적인 풍경 화가였으며 '아버지 코로'라고 불리며 귀스타브 쿠르베,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조 등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리조는 코로의 지도를 받고 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당선되었을 때 코로의 허락 아래 '코로의 제자'라고 서명했다고 합니다.

3. 마네와의 만남

베르트 모리조의 예술 세계를 담은 영화인 '마네의 제비꽃 여인 : 베르트 모리조'에서 유부남인 마네와 만난 모리조는 서로 이끌리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관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둘의 미묘한 감정에 대한 사실 관계는 알 수 없지만 모리조는 마네의 작품에 모델로 서기도 하고, 마네의 예술관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과 결혼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문을 참고하세요. # 원문 출처 : https://redfriday.co.kr/2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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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목요일은 역시 독서지. 그동안 너무 한국 현대미술을 등한시했었는데, 종합적으로 살펴보려면 아무래도 이 책이 좋지 싶다. 두껍지만 타이트하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어지간한 전공은 대체로 서울대학교가 최상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데 미술은 왜 홍익대학교인지 의문을 가지셨다면 좋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화대학교 교수다.) 한국 현대미술도 다른 나라의 현대미술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됐다고 봐야 할 텐데, 현대의 한국 거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베끼기부터가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후 유럽과 미국은 추상화가 점령했다. 이들은 각각 앵포르멜(informel)과 추상표현주의로 나뉘었는데, 전쟁 중 미술계의 폰 브라운들(가령 뒤샹이나 이브 땅기) 미국도 드디어 미술에 한 몫 끼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누가 구해주고, 누가 한국에 문명을 가져왔다? 일단 미국이다. “일단”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우리가 식민지를 겪었기 때문인데, 그때문에 일본 유학파 출신도 많았다. 즉,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들은 미국에서 유행한 추상표현주의를 따라 그리면서도, 일본을 통해 접목한 유럽식(특히 프랑스) 전통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자기들을 “앵포르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미국+일본(프랑스)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이라는 얘기다. 둘은 한국에서 꼭 구분되지 않았고 합쳐지기도 했었다. 물론 이 “앵포르멜”이라 불리우는 한국식 추상표현주의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다른 식으로의 탈출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화가가 둘 등장한다. 박서보와 이우환이다. 분위기가 베끼기에서 좀더 “한국화”가 되면서 단색화가 나타난 것이다. 단색이라고 해서 그냥 로스코 류를 연상하실 수 있을 텐데 이게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비정치적이랄 수 있을 단색으로 작품을 그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위에 거론한 중요 인물 두 명 때문이다. 박서보는 한국에서 활동했고 이우환은 일본에서 활동했다(참조 1). 둘이 협력관계로 지내다가 나중에 라이벌 비슷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한국 현대미술의 회화 쪽 전개양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참조 2). 박서보가 한국적 모더니즘에 천착한 반면 이우환은 모더니즘을 해체하고 한국적인 것을 비껴갔었다. 물론 한국 현대미술은 베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신 조류인 팝아트는 물론 하이퍼리얼리즘도 그대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조상현이나 변종곤과 같은 작가를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뒤샹을 따라한 김구림도 생각할 수 있다. 이른바 K-모더니즘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조류가 비단 회화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예술에도 적용됐다. 그런데 위에 사례로 나온 작가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미술계는 여자 작가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을 일. 예전부터 나혜석과 천경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작가들이 누가 있었는지 알려주고 있으니 확실히 종합적으로 훑어보기에 제격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미국과 유럽(일본)을 베끼면서/들여오면서 끊임 없이 우리식으로 바꿔버린 이야기이다. 즉, “문화번역은 근본적으로 오역이다. 그러나 오역이야말로 번역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p. 197)”. -------------- 참조 1. 박서보가 홍익대를 나왔었고, 그가 이끄는 화가군이 우리나라 미술의 주류를 장악했었다. 이우환은 서울대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평론가 활동을 하고, 그 다음에 화가로 나서면서 박서보를 활용(?)했다. 물론 둘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2. 물론 이건 절반의 진실에 해당된다. 여성화가들의 존재와 함께 민중미술이라는 독특한 영역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르네상스 그림 속의 잃어버린 과일들
링크를 열어 보시면 맨 처음에 그림이 커다랗게 하나 나온다. 알브레히트 뒤러(Albrecht Dürer)가 1526년에 그린 “성처녀와 배(Vergine della Pera)”라는 그림으로서 메디치 가문을 거쳐 현재는 이탈리아 피렌체에 있는 우피치 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https://www.atlasobscura.com/articles/fruit-in-renaissance-art 당연히 성처녀는 마리아를 의미하고, 아이는 예수를 가리킨다(그래서 못생겼다, 참조 1). 그런데 예수의 눈길이 배에 가 있다. 여기서 배는 원죄를 상징한다고 한다. 즉, 예수는 원죄를 먹어서(?) 세상을 구원하려 하고 있다… 이런 식의 설명이 그동안의 해석이었다. 그런데 말이다. 저 과일이 우리가 흔히들 알고 있던 서양 배가 아니라면? 그걸 연구한 학자가 이탈리아에 계시다. 농부 아버지를 둔 농학사학자인 Isabella Dalla Ragione는 초기 르네상스의 거장인 della Francesca의 고향, San Sepolcro 태생이다. 이 지역은 예로부터 소작농 지역으로서 지주와 50:50으로 수확물을 나누면서 농사를 짓던 곳이었으나, 산업혁명 이후 상황이 완전히 바뀐다. 농부들이 1950년대 이후 도시로 대거 이주한 것이다. 농토는 거의 버려지다시피 했다. 그래서 그녀의 아버지는 버려진 논밭을 찾아 가꾸기 시작한다. 지역 문화를 유지하기 위해서였다. 그녀 자신은 유전자학과 과일역사학을 세부전공으로 삼아 지역 농민의 지식을 모으기 시작했다. 그 결과 12세기 때부터 심어왔던 작물이 뭔지 상당수 밝혀내기는 했었다. 20여년 전 일이었다. 한 번은 16세기 궁전인 Palazzo Bufalini의 요리법, 관련 서류 등을 조사하다가 잠시 문헌에서 눈을 돌려 천장을 쳐다봤다. 그 때 그녀는 깨닫는다. 이탈리아에 숱하게 많은, 궁과 미술관 안에 있는 그림에 혹시 나머지 단서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말이다. 저 프레스코화에 뭔가 있다고 말이다. 마침 그 궁의 프레스코 화를 그린 화가 Cristofano Gherardi는 “진짜 과일”을 그리라는 교육을 받았던 인물이다. 근처의 채소와 과일을 그대로 그렸다는 의미다. 그의 그림에 표현된 하얀 오이와 수수는 현대의 움브리아 지방에 극히 드문 작물이었지만 16세기 때에는 흔했다. 이제 그녀의 작업은 바뀐다. 그림에 나온 물증과 문헌, 구전되어온 이야기 등을 모두 교차 검증하여 옛날 과일과 채소를 규명한 것이다. 다시 알브레히트 뒤러의 그림으로 돌아가 보면, 앞서 마리아가 들고 있던 배는 연구 결과, 배가 아니라 사과의 한 종류(mouth of ox)였다. 몇 년 전 페루지아의 버려진 농토에서 그녀가 발견, 현재는 그녀의 농장에서 같은 품종을 키우고 있다. 같은 사건이 하나 더 있었다. 베를린 주립미술관(Staatliche Museen zu Berlin)에 걸려 있는 이탈리아 화가 Francesco Squarcione의 템페라 그림(1455년, 기사에는 1460년이라 나와있다), “마리아와 아이(Maria mit dem Kinde)”의 오른쪽 하단부에 있는 과일은 다들 납작한 사과인 것으로 간주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녀의 연구 결과, 이 과일은 오히려 사과가 아니라 녹색 배(Pera Verdacchia, 참조 2)였다. 이 과일 역시 그녀가 추적한 결과, 토스카나 지방에서 발견, 자기 농장에도 심어 놓았다. 이렇게 그녀는 직접 발견한 품종 600여 그루를 농장에서 더 키우고 있는데, 여기에 대한 수요도 있는 모양이다. 미국이나 호주에서까지 “분양(참조 3)”을 의뢰하는 연락을 받았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녀의 새로운 발견으로 미술사학자들이 견해를 바꾸기는 할까? 그렇지는 않다고 한다. 그녀의 발견을 무시하는 학계가 좀 있다고 한다. 그러나 뜻을 같이 하는 사학자들도 있으며, 한데 팀을 모아 내년을 목표로 책을 새로 출판할 예정이다. 예술에는 숨겨진 것이 원래 많은 법이다. 더 늦기 전에 그녀의 결과가 빛을 발휘하기를 바란다. -------------- 참조 1. 르네상스의 못생긴 아가들(2015년 2월 28일): https://www.vingle.net/posts/741403 2. Pera Verdacchia: http://www.archeologiaarborea.org/en/the-orchard-collection/pears/238-pera-verdacchia 3. 분양은 자신의 웹사이트에서 진행중이다. http://www.archeologiaarborea.org/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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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글 입사 제의 받은 디시인의 포트폴리오.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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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MCA 이건희 컬렉션 특별전 이중섭
1월 말에 총 100여 점으로 구성한 전시를 보고 왔습니다. 4월 23일까지 전시한다고 하니, 안 다녀오신 분들은 그전에 다녀오시면 될 것 같습니다. 작품 설명은 전시리플렛을 참고 하였습니다. MMCA서울: 서울시 종로구 삼청로30(소격동 165) 전시장으로 향하는 길, 아내에게 보낸 편지가 눈에 띕니다. 다감함이 느껴지는 말씨에 고운 미소가 지어집니다. 입장했을 때, 사람들이 많았는데 금방 인파가 줄어들었습니다. 전시 규모가 크지 않아서 사람들이 금방 빠지는것 같습니다. 위 사진에서 봤을 때, 중앙에 자리한 기둥 안에 있는 작품입니다. 손바닥보다 작은 그림을 차분히 들여다봅니다. 1940년대부터 연도별로 전시가 되어 있습니다. 40년대에 그려진 그림은 처음 봤는데, 선이 간결하고, 유쾌함이 느껴졌습니다. 그중 3년간 아내에게 보낸 엽서화가 제일 좋았는데, 한 사람만을 생각하며 그리고 글을 쓴 마음이 예쁩니다. 황소와 아이들에 익숙한 저에게 40년대 작품은 화풍이 색다르게 느껴집니다. <소와 여인> 그리고 <여인> 작품입니다. 아, 전시해설 로봇이 돌아다니며 작품에 관해 설명을 해주기도 하니까 한 번씩 들어보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1950년대로 들어서니, 눈에 익은 작품이 눈에 띕니다. 비슷한 듯 다르게 표현된 작품을 번갈아보며 보는 재미가 있습니다. 1955년 미도파백화점 화랑에서 작품전을 앞두고는 매일 작품을 그려낼 만큼 열성적이었다고 합니다. 새와 닭, 소, 아이들, 가족을 그린 주요 회화 작품이 있습니다. 그림에서 순수함을 느낍니다. 잊고 지내던 유년 시절의 밝음과 웃음소리, 어울려 놀던 벗과 무궁무진했던 놀이터가 떠오릅니다. 그리웠던 빛이 곁을 부유합니다. 이중섭이 제작한 표지화를 한 눈에 볼 수 있습니다. 초록색 표지에서 앙리 마티스를 떠올리고, 달이 뜬 표지를 보며 '탐나는 문학지네'하며 눈을 빛냅니다. 회화 작품 중에서 제일 오래 서 있었던 작품입니다. 여작...같게 짓는다..길가에 난 호박과 크고 작게 놓인 글자들...어떤 뜻일까, 뭘 말하고자 하는 걸까..골몰했는데, 밑의 작품 설명을 보고 나서야 이해가 됩니다. <호박>(1954)은 조카 이영진의 회고대로 당시 이중섭이 정신 이상과 거식증으로 고생하기 전에 온통 노란색이었던 그의 방에 호박에 매달린 듯하다. 호박을 관찰하고 그 특징을 체득하기 위해 속필로 즉흥적으로 표현한 호박은 그의 특유의 활달한 필치와 역동적인 힘의 분출을 느끼게 해준다. 자연스런 화면 구성과 대담하게 호박을 화면의 전면에 내세운 점등이 매우 특이하다. 그리고 이를 에워싸는 넝쿨, 줄기 등의 선은 작가의 특징인 주제를 에워싸고 모든 대상들을 이어주는 연결 고리로서 선을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이채롭다. 또한 호박과 넝쿨의 연초록과 꽃의 샛노란 색채의 조화도 매우 신선한데, 호박에는 페인팅 나이프로 채색을 시도하면서 새로운 회화적인 맛을 구현하고 있다. 이 작품은 또한 이중섭의 말년을 연구할 수 있는 중요한 미술사적인 가치가 있는 작품이다. (참조: 네이버지식백과) 이 특별전에서 제일 좋았던 코너입니다. 피란 생활을 하던 중 생활고로 1952년 가족을 일본으로 떠나보낸 후 제작한 것으로 추정되는 은지화를 볼 수 있습니다. 앞에 마련된 의자에 앉아 고요히 바뀌는 화면을 응시합니다. 잘 곳과 먹을 것이 없어도 그렸고, 외로워도 슬퍼도 그렸고 은지화는 담배를 포장하는 알루미늄 속지에 철필이나 못 등으로 윤곽선을 눌러 그린 다음, 검정 또는 흑갈색 물감이나 먹물을 솜, 헝겊 따위로 문질러 선이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했다고 합니다. 은지화를 볼수록 가족을 그리워하는 이중섭의 마음이 느껴져서 먹먹해집니다. 춥고 배고파도 몸을 둥글게 만 채, 같이 있고 싶고, 같이 있었던 모습을 그린 게 아닐까 유추하는 몸이 작품 쪽으로 기울어집니다. '부처님의 모습인가' 갸우뚱하며 손가락을 따라 해보다가 발걸음을 옮깁니다. 편지화 입니다. 이중섭은 1952년 가족과 헤어진 이후 1955년 말까지 아내와 두 아들에게 많은 편지를 보냈다고 합니다. 편지에서 가족에 대한 애정이 진하게 느껴집니다. 편지에는 가족에 대한 그리움, 두 아들의 학교생활, 1955년 개인전을 준비하는 과정, 일본으로 건너가기 위한 노력 등이 기술되어 있다고 합니다. 두 아들과 놀고 있는 아빠의 모습을 보며 당연한 일상은 없음을 느낍니다. 태평양전쟁과 한국전쟁으로 인해 가족과 떨어지게 되고, 삶이 피폐해진 그의 작품에서 쓸쓸함이 느껴집니다. 그가 그린 사계에는 날개를 닮은 구름이 있습니다. 사계절을 날아 하나로 이어주는 날갯짓에서 네 가족의 냄새가 납니다. 그리워하는 가족을 만나지 못한 채 영양실조와 간경화 등 병고에 시달리다 1956년, 39세라는 젊은 나이에 무연고자로 생을 마감한 이중섭. 전시의 처음부터 끝까지 젖은 마음이 마르지 않습니다. 삶은 외롭고 서글프고 그리운 것 전쟁이 나지 않았다면 그의 생은, 작품은 어땠을까요? 다음 생이 있다면 그땐, 사랑하는 이들과 오래 함께하다 가셨으면 좋겠습니다. 가족에 대한 이중섭의 사랑과 그리움을 느낄 수 있는 전시였습니다.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꿈의 세계를 그리는 순간의 수집가 크빈트 부흐홀츠
크빈트 부흐홀츠(Quint Buchholz) 독일의 화가이자 삽화가 독일의 화가이자 삽화가인 크빈트 부흐홀츠는 1957년 슈톨베르크에서 태어났다. 독일에서 180만부 이상 팔렸던 <요슈탕니 가더/jostein Gaader>,<소피의 세계/sofies Welt)>책의 표지를 그렸고, 이로인해 크빈트 부흐홀츠라는 이름을 전 세계속에 알리는데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처음 접했을 때 ‘마법 같다’는 생각이 저절로 떠오르는 그의 그림은 문득문득 어떤 것들을 연상시킨다. 초현실적인 풍경에서는 마그리트의 그림이, 캔버스 위에 콕콕 찍혀 그 풍경을 자아낸 수많은 점들에서는 쇠라의 그림이. 때로는 판타지 영화의 한 장면이나 특정한 시간대가 떠오를 때도 있다. 이를테면 서서히 어둠이 걷히기 시작하는 새벽이나 희뿌연 안개가 피어오르는 아침, 그러니까 어딘가 몽롱한 느낌을 풍기는 것들. 그곳에서는 늘 기이한 일들이 벌어진다. 환상적이라면 환상적이고 기괴하다면 기괴한 일들은 지난밤 꿈처럼 아스라한 풍경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일어난다. 보고 있자면 그 속으로 스르륵 빨려 들어가는 기분도 든다.   스스로 ‘순간을 수집하는 사람’이라고 소개하는 화가와 그의 믿기 어려운 여행담을 담은 그림책 <그림 속으로 떠난 여행>은 글과 그림 모두 혼자서 탄생시켰다. 수줍음이 너무 많아서 눈이 펑펑 내릴 때만 숲 밖으로 나온다는 눈코끼리, 프랑스의 어느 작은 도시를 날아다니는 서커스단 자동차 등 얼핏 팀 버튼의 영화 <빅 피쉬>를 연상시키는 이 작품으로 그는 스토리텔러로서의 면모를 입증해 보인다.  ‘어떤 그림이든 비밀이 있어야 한다’는 의미심장한 대사를 통해 화가로서의 가치관을 슬쩍 보여주기도 한다. 재미있는 사실은 크빈트 부흐홀츠 역시 본인을 ‘순간 수집가’라고 불렀다는 것.  어쩌면 이 이야기는 그가 세상 모든 화가와 그림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바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든다. 출처 뭔가 오묘한 감정이 드는 기분이네ㅋㅋ
레오나르도, 무슨 약을 빠셨습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보면 물을 만한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어쌔신 크리드 얘기가 아니다). “무슨 약을 하셨길래…?” 최근에 발굴되어 아부다비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세계의 구세주(Salvator Mundi, 참조 1)를 보자. 예수의 눈이 붉은 색이고 표정이 매우 미묘하다. 한 마디로 약에 취한(stoned 혹은 high) 모습이다. 혹시 레오나르도도 마리화나 물고 그림을 그렸던 것 아닐까? 아니, 마리화나가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 있기는 있었나? 짧은 주말 특집 답변: 예,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1484년 교황 자리에 오르자마자,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라는 칙서(참조 2)를 발표한다. 여러가지 악마적 행위(즉, 마녀 행위다, 참조 3) 등등을 금지하는 칙서인데, 이 중에 마리화나(허브로 표현되어 있다)가 있다. 성체 대신 약을 빠는 행위가 미사 중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때는 레오나르도가 한창 일하던 시기임에 주목. 물론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눈빛은 물론 표정도 상당히 high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다. 게다가 레오나르도는 말그대로 만물박사였기 때문에 “허브”에도 분명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참조 4). 하지만 하필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기가 시작이기 때문에, 다 빈치의 양성애적인 성향과 함께 마리화나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타부”였다. 결론은, 재즈의 도시 뉴올리언즈(혹은 뉴욕), 현대 예술의 도시 파리처럼, 약 빤 르네상스의 도시(참조 5) 피렌체...라 할 수 있을지도. 증거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모나 리자도 약 빨아서 나온 그림일 수 있겠다. ---------- 참조 1. 4,500억 달러에 매각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그림의 실구매자가 우리 모두 주목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라 보도했는데(크리스티는 보도를 부인했다), 아무래도 사우디아라비아보다는 UAE의 루브르에 내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으리라. 2.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 https://sourcebooks.fordham.edu/source/witches1.asp 3. 씐나는 마녀 생활(2017년 5월 13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5205402364831 4. 거 왜, 다 빈치의 블로그 출판물(...)인 Codex Atlanticus에는 분명 식물학 챕터도 있다. 5. 기사는 소설의 도시 런던을 거론하고 있는데, 소설의 도시는 필자에게는 애석하겠지만 파리가 아닐까. 19세기 중후반을 따진다면(그 이전에도?) 당시 미디어 제국은 프랑스였지 영국은 아니었다.
기발한 아이디어 디자인 모음.jpg
1. 콘돔 광고 2. 도서관 벤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 도서관) 3. 멸종 위기 동물 보호 포스터 픽셀 수가 해당 동물의 남아 있는 개체수 ex: 판다 개체수 약 1600마리. 1600개의 픽셀로는 판다 이미지를 충분히 구현할 수 없죠. "1600은 충분한 숫자가 아닙니다." 4. 성폭력 근절 광고 서로 붙어 있는 종이 두 장을 떼면 위와 같은 사진이 나타납니다. "힘을 써야 한다면 그건 성폭행입니다." 5. 형광펜 광고 : Hightlight the Remarkable 주목받지 못 했던 역사 속 여성 주인공들을 발견하는 프로젝트 광고 시리즈 중 한 장. 하이라이트된 여성은 나사의 흑인 여성 수학자로, 아폴로 11호를 달에 착륙시키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인물이지만 주목받지 못했죠. 하지만 형광펜으로 주목도를 높입니다. 6. 쓰레기 무단투기 금지 광고 "쓰레기는 당신을 말합니다." 쓰레기 두 개를 같이 배치해서 단어를 조합해 냈죠. LOWLIFE(시궁창 인생), PIG(돼지), DUMB(바보), DIPSTICK(멍청이) 7. 전기를 현명하게 사용하세요. 8. 그래픽 디자이너 구함 이건 많이들 보셨을 듯 9. 현명한 공간 활용 10. 현명한 공간 활용 2 11. 백조와 오리 식당 아이디어도 좋은데 귀엽기까지! 12. 상어 도살 금지 청원 조스 포스터가 떠오르시죠. 하지만 더 무서운 건 상어가 아닌 사람이라는 것. 상어잡이 배를 상어보다 더 무서운 괴물로 표현했습니다. "사람은 한 시간에 11400마리의 상어를 죽이지만 상어는 1년에 12명의 사람을 죽인다." 13. 유적지 안내판 유적의 옛 모습을 보여주는 간편하고 창의적인 아이디어 14. 발로 누를 수 있는 엘리베이터 버튼 15. 멕시코의 동전 디자인 동전의 가장자리 문양을 합치면 아즈텍 달력이 나타난다! 16. 내셔널 지오그래픽 표지 빙산의 일각을 비닐 봉지 쓰레기로 표현했죠. PLANET OR PLASTIC? 17. 안전벨트 착용 광고 안전벨트 착용으로 사망 년도를 가렸습니다. 착용하지 않는다면...?
[책추천] 데이비드 호크니 전시를 보고 읽으면 좋은 책 5
안녕하세요,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입니다.  올봄, 현존 작가 중 최고 작품가를 기록하고 있는  현대미술의 거장 데이비드 호크니의 아시아 최대 규모 전시가 열리며 미술을 사랑하는 이들의 큰 관심을 모으고 있습니다. :) 전시를 관람하기 전후 작가의 예술관을 이해하면 작품에 대한 공감이 깊어지고 여운도 더 오래 남는데요. 여기, 데이비드 호크니의 작품 세계를 더 깊이 살펴볼 수 있는  세 권의 책을 플라이북이 추천합니다. 01. 다시, 그림이다 마틴 게이퍼드 | 디자인하우스 저명한 미술 평론가 마틴 게이퍼드가  10여 년에 걸쳐 데이비드 호크니와 나눈 대화 내용을 기록한 것으로 회화에 대한 철학관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02. 그림의 역사 데이비드 호크니, 마틴 게이퍼드 | 미진사 드로잉부터 회화, 사진, 영화까지 수천 년간 그림이 어떻게 그리고 왜 만들어졌는지 고찰하는 데이비드 호크니와 마틴 게이퍼드의 예술적 탐구를 담은 책입니다. 03. 데이비드 호크니 마르코 리빙스턴 | 시공아트 유화, 수채화, 판화, 무대 디자인, 사진 콜라주까지 1960년대부터 시작된 데이비드 호크니의 방대한 40여년 작품 세계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책입니다. 플라이북 앱 바로가기 > http://me2.do/xOFTiT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