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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애주기生涯週記 19
마침 신호가 바뀌어 횡단보도를 건너가던 중이었다. 신호등에서는 청각장애인을 위한 음성이 흘러나오고 있었는데, 김노인은 순간 귀를 의심했다. 음성의 그 어디쯤에서 ‘건강에 좋습니다’라는 말이 흘러나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길을 건너며 김노인은 생각했다. 건강에 좋다니, 이게 무슨. 이런 말이 왜 신호등에서 흘러나오는 게지? 요즘은 신호등에도 광고가 들어가는 건가. 건강즙이랄지 뭐 그런 것들 말이지. 하지만 김노인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하다고 생각했다. 거의 매일 지나다니는 횡단보도이지만 광고가 흘러나오는 것을 들어본 적은 없고, 이뿐만 아니라 그 어디에 설치된 신호등에서도 광고가 흘러나오는 것은 듣도 보도 못했기 때문이었다. 이 나라가 아주 자본주의에 잠식을 당했군, 쯧쯧. 김노인이 혀를 차며 횡단보도를 거의 다 건넜을 무렵 자연스레 깨달아지는 생각이 있었다. ‘건강에 좋습니다’가 아니라 ‘건너가도 좋습니다’였군. 허허, 이것 참. 김노인은 앞에 한 모든 말들을 입 밖으로 꺼낸 것도 아닌데, 괜스레 무안해져 주변을 살피며 눈치를 보게 되는 것이었다. 지나가는 사람은 딱히 보이지 않았다. 김노인은 생각했다. 뭐 눈에는 뭐만 보인다더니 내가 요즘 건강을 유독 생각해서, 그런 식으로 뭐 귀에는 뭐만 들리게 된 것인가. 하긴 건강을 생각할 나이도 되었지. 나도 이제 환갑을 지나 일흔에 가까워진 나이이니 말이야. 이제 내가 노인이 다 된 건가. 김노인은 새삼스럽게 현실을 자각했다. 김노인은 만 65세를 넘기면서 얻게 된 지하철 무임승차 혜택 덕에 여러 곳을 돌아다녔지만 오늘은 집 앞 공원에서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철도노조 파업이 하루 만에 철회되긴 했지만, 아무래도 철도의 적자와 관련된 고질적인 문제에 노인의 무임승차 비판이 많이 섞여 있는 것을 알고 있었고, 김노인도 어느 정도는 그것에 동의하기도 하는 입장이었다. 그 이유로 오늘 지하철을 타지 않겠다고 딱히 생각한 것은 아니지만, 자주 타는 지하철을 타지 않으니 자연스레 밀려오는 생각이었다. 이 나라는 참 문제가 많군. 노인 문제가 예삿일이 아니야. 출생률은 심각한 수준이고. 이 나라가 어찌 되려는지. 하지만 그렇게 비판 비슷한 것을 하려니 결혼을 하지 않은 자신과 자식 역시 낳아보지 않은 자신이 동시에 떠올랐다. 하지만 일말의 반발심에 다른 생각도 떠오르는 것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내가 국가에 기여하지 않았다고 한다면 그건 어폐가 있지 않은가? 출생률이란 말이지. 국가가 소위 ‘정상 가족’으로 인정하는, 가령 아버지, 어머니, 자식으로 구성된, 그러한 가족의 한 일종일 뿐인 형태만 가족으로 인정할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족 형태를 수용해야 하고, 어떠한 형태의 가족이라도 모두 법적으로 허용하며, 혜택도 동일하게 적용하여 국민들의 인식을 바꿔야 해결될 문제가 아닌가 이 말이야. 김노인은 자신이 너무 진지해진 것은 아닌지 한숨을 몰아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지만 이내 비판 정신이 되살아났다. 나는 국가에 기여하지 않았다기보다는 소위 ‘정상 가족’으로 분류되는, 이제는 허울에 가까운 제도 아닌 제도에 기여하지 않았을 뿐, 세금을 미납한 적도 없고, 젊은 시절 국방의 의무도 다했을 뿐만 아니라, 뭐 굳이 흠을 잡자면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제때 반납하지 않은 정도의 일탈이 있었을 뿐이지 않은가 하고 말이야, 하고 김노인은 생각했다. 물론 김노인이 평생 내온 세금은 미미한 소득에 걸맞게 아주 미미한 수준이었지만 미미한 기여도 기여라면 기여였고, 조금 더 자신을 변호하자면 내가 굳이 국가에 기여해야 할 이유는 무엇인가, 하고 이어서 생각했다. 국가에 별다른 기여를 한 적은 없지만 별다른 피해도 주지 않았지, 하고 생각하며 김노인은 잠시 자신의 삶이 새삼 대견해지기도 했지만, 이내 그 생각을 철회했다. 사실 김노인 역시 혼인을 통한 ‘정상 가족’을 꿈꿔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내 평생 사람들이 나를 독신, 혹은 비혼주의자? 그래 요즘은 그런 말을 쓰더군. 어쨌든 그 정도로 알고 있지만, 나는 한 번도 독신이니 비혼이니 하는 것을 주장한 적이 없는걸. 오늘따라 입맛이 쓰디쓰군. 그 생각 끝에는 김노인의 눈가에 눈물이 맺혔다. 하품을 크게 한 뒤였기 때문이다. 공원에 다다르니 벤치 두 개 중 하나가 비어있었다. 벤치 하나에는 얼핏 봐도 이십 대 중후반 정도로밖에 보이지 않는 남자가 자신이 마신 소주병 여럿을 자신의 발치에, 그리고 벤치 위에도 몇 올려놓은 채 꾸벅꾸벅 졸고 있었다. 비어있는 벤치 등받이에는 전에 없던 ‘노인석’이라는 글자가 적혀 있었는데, 공원의 벤치에 웬 노인석인가 싶었지만 사실 그것은 누군가가 낙서해놓은 것에 불과한 것이었다. 누군가가 낙서해놓은 것에 불과하기는 하지만 그 낙서의 내용이라는 것이 고작 ‘노인석’이다 보니 그렇게 고약한 낙서 같지는 않았고, 누군가가 자신을 위해 일부러 자리를 준비해둔 것 같은 기분마저 들었다. 심지어 ‘노약자석’도 아닌 오로지 ‘노인석’이라니. 그렇다면 ‘노인석’이라고 적어놓은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또 노인으로서 노인석에 앉아보아야겠군, 하고 김노인은 생각했다. 벤치에 앉아 옆 벤치의 졸고 있는 남자를 보니 저렇게 술에 만취되어 인사불성이 되었지만 ‘노인석’을 피해 앉을 정도의 사리 분별은 있고, ‘준법정신’이랄 것까지는 없겠지만 일종의 윤리 의식 정도는 있는 자이군, 하고 다소 흡족해하는 김노인이었다. 딱히 할 일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전적으로 시선을 강탈하는 자이기도 했기 때문에 김노인은 옆 벤치의 남자를 계속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남자의 머리는 어깨까지 내려올 정도로 꽤 길었는데, 얼핏 보면 드레드락을 한 것 같기도 한 모습이었다. 레게파마인지 뭔지 그 요란한 머리를 한 모양이군, 하고 자세히 보니 한껏 멋을 낸 머리가 아니라 오랫동안 감지 않아 머리카락들이 제멋대로 뭉쳐 굳은 모습의 머리 모양이었다. 또한 입고 있는 점퍼 역시 멀리서 보면 흡사 에나멜 점퍼인가 싶기도 했지만 때가 낀 채 오래 방치되어 광이 나고 있는 것이었다. 제법 자유로운 사람이군. 젊었을 때의 나를 보는 것 같기도 하고 말이야. 김노인은 일어나 남자에게 다가갔다. 흔들어 깨워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할까 싶었지만 그의 뭉친 머릿결 사이에 끼어죽은 날벌레의 사체를 보고 흠칫 놀란 김노인은 자리로 돌아왔다. 그는 제법 자유로운 백수인가, 아니면 실연당한 사람인가. 뭐 그런 생각도 잠시 했지만 김노인과는 하등 상관없는 일이었다. 늦가을 이른 오후였지만 그가 동사할 위험 같은 것은 없을 날씨이니 잠이 깨면 집으로 돌아가겠지, 하고 생각했다. 노인석에 앉은 김노인은 그러나 스스로를 노인이라고 칭하는 것이 그리 달갑지는 않았다. 노인이라는 호칭을 생각하니, 자연스레 ‘人’자가 붙는 호칭들을 떠올려보게 되는 것이었는데, 당장 떠오르는 것은 군인과 시인이었다. 김노인으로서는 항상 의문이었던 것이 소설가에게는 집 가(家) 자를 붙이면서 시인에게는 왜 사람 인(人) 자를 붙이는지였다. 단지 소설을 쓰고 시를 쓰는 사람일 뿐인데 어째서 그런 차별화가 생긴 것인지 말이다. 소설가는 일종의 직업적 호칭 같았지만, 시인은 뭔가 자연인을 부르는 그런 느낌도 드는 것이었는데, 자연인 하면 떠오르는 것은 마치 자연과 혼연일체 된 인간 정도로까지 느껴지는 것이었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시인 역시 시와 하나가 돼버린 사람 정도로까지 느껴지는 것이었다. 그 느낌에 일리가 있는 것이 군인 역시 젊은 시절 군대에서 병사로서 받던 취급이나 군인에 대한 사회적 인식을 떠올리면 군인 역시 직업군인을 제외하고는 군에 소속된, 더 나아가 군에 잠식된 인간상이 떠오르는 것이었다. 그렇다면 노인 역시 ‘늙음’과 하나가 돼버린 늙음 그 자체의 인간이라는 소리인가. 나는 늙음 그 자체인가, 하고 김노인은 다소 정색하며 생각했다. 그때 옆 벤치의 남자가 “하……, 시발.”하고 낮게 읊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고작 자리에서 일어났을 뿐인데 그 행위가 어찌나 요란했던지 벤치 위와 발치에 놓인 소주병이 죄다 우르르 쓰러졌다. 그리고는 늘어지게 하품을 하더니 김노인 따위는 안중에도 없다는 듯 본인의 행색과 너무나도 어울리는 꾀죄죄한 슬리퍼를 고쳐 신고 공원 밖으로 걸어 나가기 시작했다. 김노인은 남자의 뒷모습을 보며 혀를 끌끌 차다가 몸을 일으켜 남자가 앉아 있던 벤치 앞으로 갔다. 남자가 벤치에서 사라지고 나자 남자가 앉아서 졸고 있을 때는 그의 육중한 몸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던 ‘노인석’ 글자가 드러났다. 그러니까 이 공원의 두 개의 벤치에는 모두 ‘노인석’이라는 낙서가 되어 있는 것이었고, 한마디로 이 공원의 모든 벤치는 ‘노인석’인 셈이었다. 이 공원에 노인이 아닌 자는 앉을 자리가 없다는 듯이. 하지만 그 사실을 바로 배신하듯이 두 개의 노인석 중 하나에는 고작 이십 대 중후반의 남자가 방금 전까지 아무 부담 없이 앉아 졸고 있었던 것이다. 김노인은 생각을 고쳐먹기로 했다. 그래, 젊은 청춘이 많이 고단했을 테지. 그러고는 소주병을 집에서 메고 나온 낡은 백팩에 주워 담기 시작했다. 벤치 위에 두 병, 벤치 앞에 네 병. 그러면 육백 원이군. 김노인의 얼굴에 천천히 미소가 퍼지는 것이었다. 백팩의 주머니를 닫고 김노인은 끙, 하고 일어섰다. 김노인마저 공원을 떠나고 나자 빈 노인석만 낡고 빈 그네며 시소와 휑하니 공원을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오랜 시간 동안 그곳에는 아무도 없었다.
사유글자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잘'만큼 지극히 주관적인 부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잘 지내고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물음이었습니다. 오늘 날씨, 2019 첫눈, 체감온도 뚝! ⠀ 눈 내려요. 단톡방에서 네 글자를 보자마자 타자기에서 손을 떼고 문 앞으로 달려나갔다. 눈이 내리는구나. 눈을 처음 본 아이처럼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너에게 연락을 했다. ⠀ 밖에 눈이 내려. ⠀ 30분쯤 지났을 때 너에게 답이 왔다. ⠀ 여기는 눈이 안 와. ⠀ 손 위의 눈이 녹는지도 모른 채 온난하던 때가 있었다. 전화기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만 들어도 웃음이 나고 밤잠을 줄여가며 이야기를 나누던. 모든 것은 과거형이 되어버렸고 현재 남은 건 말라버린 입술과 초점 없는 눈빛 정도. 하얀 빛이 투영된 눈 속에 네가 담기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빈 기둥 형태의 결정이 바닥에 떨어져 내려 깨진다. 독감기로 인해 며칠째 누워있는 방 여기저기에 젖어있는 것들이 널려있다. 가습기를 켜 놓지만, 엄마는 불만족스러우신지 젖은 수건과 그날 손빨래한 것들을 문 뒤와 옷장 여기저기에 널어두신다. ⠀ ''방 안이 건조하면 안 돼.'' ⠀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옷장 문고리에 걸려있는 회색 맨투맨으로 눈길이 향한다. 밀물과 썰물의 형태를 하고 있는 옷의 물기는 위에서부터 말라가고 있다. 이곳은 서해안도 동해안도 아니니 큰 차이 없이 방 안의 건조도에 따라 짙은 회색에서 옅은 회색으로 변해갈 것이다. 바다가 보고 싶었던 자는 말라가는 옷에서도 바다를 본다. “여기 사서예요?” 널브러져 있는 짐을 치우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발을 내려달라고 말한 나에게 그가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째려볼지언정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나의 말에 따랐기에 이 물음은 날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벌게진 얼굴로 “네”라고 대답한 채 몸을 틀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 CCTV 화면으로 그를 바라본다. 짐을 치우고 테이블 위의 발은 내려져 있으나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사서가 아니면 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가 요즘 매일 오는 노숙자인 것이 짜증 나는 탓이다. 정해진 주거 없이 주로 공원, 거리, 역, 버려진 건물 등을 거처로 삼아 생활하는 사람. 노숙자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며 그의 큰 배낭과 양손에 쥐고 있는 4개의 비닐 꾸러미를 떠올리다가 코를 쥐어 잡는다. 처음부터 그가 싫었다. 숨쉬기 싫을 정도의 냄새에 어지러움을 느꼈을 때부터 일 거다. 닦지 않아 뿌옇게 변한 안경을 쓴 채 서가 사이를 오가는 도서관에 오는 노숙자. 주민등록증상의 주소가 서울이면서 왜 인천까지, 그것도 수많은 장소 중에서 왜 도서관에 오는 것일까. 왜 쉴 새 없이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일까. 왜. 도대체 왜. 타인에게 수많은 물음을 가지기는 오랜만이었다. 그 또한 많은 의문을 가졌을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갈 곳이 없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신은 나를 버린 걸까. 언제까지 혼자여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할까. 왜. 도대체 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쥐고 있던 주먹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들이 현재라는 모습을 하고 있고 이는 미래로 연결된다. 그의 과거에 현재에 대한 답이 있을 거고, 그가 해야 하는 일은...’까지 생각하다가 주먹을 쥐었다. 나 같은 사람이 곁에 없었을 리 만무하다. 모든 것은 그가 자초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의 난 냉정했고, 그랬기에 네 경찰에게 둘러싸여 내가 왜 도서관을 떠나야 하냐며 항변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무서운 사람 떠났어요?” “경찰에 신고해서 떠났어요. 이제 안 올 거예요.” 덩치 크고 쉴 새 없이 혼잣말을 하다가 이따금 말을 걸어오던 그는 어느샌가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부재가 모두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준다는 현실이 손바닥의 손톱자국을 더 깊고 선명하게 만든다. 의문이 의문에서 그쳤을 때 비롯된 것들이란 이런 법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5가지 감각을 오감이라고 하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이에 해당한다. 공책에 '커피 같은 경우 5가지의 맛 중 평균적으로 3가지의 맛을 느낀다고 함' 이라고 적고 그 아래로 세 개의 선을 긋는다. 신맛, 쓴맛, 그리고 공란. 한 가지 맛이 생각나지 않는다. 책을 펼쳐보니 단맛이란다. 내 인생에서 빠진 요소라서 생각나지 않은 것일까. 모든 것이 충족된 채 태어나더라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겪다 보면 추가되는 것도 빠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단맛에 노란색 형광펜을 진하게 긋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향미의 호불호는 개인의 감각적 예민함과 선호에 달려 있기 때문에 답은 언제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커피를 삶과 연결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답은 언제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에게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주체적인 말과 결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커피 관련 서적은 오랜만이기에 흥미를 느끼며 다음 장으로 그다음 장으로 책장을 계속해서 넘긴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온도가 이론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90~96°C. 물은 100°C에서 끓으나 커피는 90~96°C에서 맛있다는 점이 위로가 된다. 결여된 것이 많은 자에게 6°C의 차이란 그런것이다. 부족한 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안정감. 이 역설속에서 오늘도 오감으로 커피를 마신다.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동백꽃의 꽃말같은 사랑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꿈인걸 안 뒤로는 그거 다 진부한거라고 치부해버렸지만. '동백꽃 필 무렵.'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게 만든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주변인들에게 추천만 하다가 이렇게 글로 남기는 이유는 울었기 때문이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던 내가 소리까지 내가며 눈물을 뚝 뚝 흘렸다. 사는게 형벌이라던 극 중 어머니는 너와 함께한 몇 년이 적금을 타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평생을 사랑했다한다. 이 드라마를 보며 꽤 자주 울컥 거렸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사랑이 고팠던걸까 싶을정도로. 남녀와 부모 자식간의 사랑의 결은 다른듯해도 비슷한 구석이 꽤 많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교차점이 우리를 살게 한다. 얼마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있다. 생경함에 얼굴이 붉어지다 온 몸이 물들어버렸다. 사랑이 아닌 내가 진부했구나 생각하며 한번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해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