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 장. 채희의 그림자, 무사 휘영(輝影)
“그런데 아깐 어찌 그리 늦게 나타난 것이야?”
다시 장옷을 여민 채, 좌상 집으로 향하던 채희는 걷던 걸음의 속도를 늦추곤 자신의 뒤를 따르는 휘영을 향해 물었다. 그러자 휘형은 채희의 물음에 가만 채희의 뒷모습을 바라보더니 입술을 달싹였다.
“예? 아, 분명 아가씨를 호위하고 있다 생각하였는데 돌아보니…아가씨가 사라지셔서. 지체해 송구하옵니다.”
휘영은 채희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채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곤 장옷을 거두어, 휘영을 돌아보았다. 휘영은 자신을 빤히 바라보는 채희와 눈이 마주치자 화들짝 놀라며 다시금 고개를 숙였다.
“내가 사라져? 내가 잠시 너에게 다녀온다 이르고 사라지지 않았느냐?”
“무언갈 아가씨가 착각을 하신 듯합니다. 돌아보니 아가씨는 흔적도 없이 사라진지 오래라, 아가씨를 찾느라 한참 애 먹었습니다.”
휘영의 말에 채희는 가만히 장옷을 쥔 채, 이상하다…, 내 분명 너의 옷깃을 쥐곤 다녀온다 일렀는데, 중얼거렸다. 그런 채희를 가만, 휘영은 바라보았다. 늘 곁에서 채희를 호위하는 휘영이었지만 이리 가까이서 채희의 낯을 바라본 것은 처음이었다. 휘영은 채희의 봉긋 솟은 이마와 콧날, 도톰한 입술, 하얗고 발그스레한 볼을 뚫어져라 쳐다보았다.
“그럼…너가 아니었단 말이야? 어머! 그럼 내가 누구를…”
채희는 화들짝 놀라며 휘영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휘영은 채희와 눈이 마주치자 채희보다 더 놀라며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려버렸다.
“내가 착각하여 다른 이를 붙잡고 끌었나보다. 어쩜 좋지. 혹여 내 얼굴을 보기라도 한 것은 아니겠지.”
채희는 울상을 지으며 땅바닥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워낙 도성에 알려진 ‘채랑’, 자신의 언니 얼굴이라 그런 채랑과 꼭 닮은 자신의 얼굴이 사람들 사이에 알려지지 않기 위해 애쓴 채희였다. 휘영은 그런 채희를 가만히 바라보았다. 평소와 달리, 뾰로통하게 입술을 내민 채 귀여운 표정을 지어보이는 채희. 휘영은 자신도 모르게 그런 채희를 바라보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어.”
채희는 그리고 그런 휘영을 바라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가…웃을 줄도 아는 구나.”
“…….”
“이제야 사람과 다니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
그것은 휘영 역시 마찬가지였다. 단 한 번도, 웃는 얼굴도, 우는 얼굴도 보인 적 없는 채희였다. 늘 무표정한 얼굴의 그녀였기에 휘영 역시, 그녀를 곁에서 호위하고 있었지만 꼭 보통 사람에게서나 느낄 수 있는 온기를 느끼지는 못했다. 하지만 휘영은 알았다.
채희가 부로 무표정을 한 채 지낸다는 것을. 일부러 차가워 보이고, 감정을 보이지 않으려 슬픔도 기쁨도 얼굴에 드러내지 않았다는 것을. 하지만 그 누구보다 따스하고 다정한 사람이라는 것을, 휘영은 알고 있었다.
그때, 채희 뒤로 우상의 부인인 ‘유정’이 가마에 올라선 채, 이쪽으로 향해 오고 있었다. 좌상과 상극인 우상의 부인에게 ‘채희’의 얼굴을 들켜서는 안 될 일이었다. 그것도 모른 채 채희는 장옷을 거둔 채, 휘영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곧, 유정이 좌상의 호위무사인 ‘휘영’의 얼굴을 알아보곤 채희 곁까지 성큼, 다가왔다.
“……!”
“송구합니다, 아가씨.”
곧, 휘영은 채희에게 송구한다하며 채희를 자신 쪽으로 바짝 잡아 당겼다. 그러곤 놀란 눈으로 자신을 빤히 올려다보고 있는 채희의 장옷을 씌워 재빨리 채희의 얼굴을 가렸다. 동시에 유정이 탄 가마가 채희의 곁을 스쳤다.
“…앗.”
그제야 자신의 옆으로 우의정의 부인인 유정이 지나갔음을 깨닫곤 황급히 고개를 반대편으로 돌리는 채희였다.
“저 무사는 좌상 댁 호위무사인 듯한데.”
유정은 휘영과 채희를 지나치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유정을 따르던 몸종이 힐끔, 휘영을 돌아보곤 황홀한 듯 미소를 지어보였다.
“참…잘생긴 사내지 않습니까?”
“잘생기긴 뭣. 우리 아드님이 훨-씬 더 잘생기셨지.”
“에이, 민혁 도련님은 두 말하면 입 아프지요. 그래두 저 무사는 사내인데도 어찌 얼굴에서 색기가 철철 흘러넘치는 지…, 묘-하게 여인을 끌어드리는 멋이 있지 않습니까? 저 탄탄한 가슴에 폭, 안겨보기라도 했으면…”
“나이든 여편네가 못하는 소리가 없어.”
“뭐, 젊고 잘생긴 사내 품에 꼭 젊은 여인네들만 안기고 싶답니까? 이 늙은 여인네들두 젊고, 잘-생기고 사내 품에 안겨보고 싶습니다, 마님?”
입에 침이 마르도록 무사를 칭찬하는 몸종의 말에 유정은 다시금 고갤 돌려 무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뭐, 무사하긴 아까운 인물이긴 하네.”
“그렇지요? 어쩜 좌상댁엔 호위 무사까지 인물이 훤하니…앗, 흠. 흠.”
몸종의 말 실수에, 유정은 심기가 불편한 듯, 흠! 하고 헛기침을 내뱉더니 이내 흥, 하고 무사에게서 눈길을 거두었다.
“그래봤자 딱, 기방 기생들 기둥서방하기 좋을 외모다. 어디 우리 아드님에 비할까? 우리 아드님은 딱, 위장부시지!”
채희는 멀어져가는 유정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큰일이 날 뻔 하였구나. 하마터면 우상의 부인께 얼굴을 보일 뻔 하였어.”
“…….”
“가자. 어머님, 아버님이 기다리고 계시겠다.”
그리고 채희는 다시금 발걸음을 돌렸다. 휘영은 그런 채희의 뒷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이내 채희 뒤를 성큼성큼 따랐다.
“너는. 무술도 뛰어나고, 검도 잘 다루는데 어찌 한낱 양반댁 여식이나 지키는 호위 무사가 되었느냐? 네 정도의 검술이면 궁에 들어가 군주를 뫼시어도 될 법한데.”
“…….”
“뭐…내가 무술이니 검술이니…보는 눈이 있는 것은 아니나, 그저 이리 나만 지키며 세월을 보내는 것이 안타까워 그런다.”
“…….”
“지금이라도 내가 아버님께 일러 너를 다른 곳으로…”
“되었습니다.”
휘영은 자신을 생각해주어 말하는 채희에게 되었다, 단칼에 거절을 했다.
“궁이 싫으면 어디 무사들을 길러내는 곳의 스승으로 들어가 제자들을 키워도…”
“…….”
“그것도 싫겠지?”
채희는 아무 말 없이 자신을 따르는 휘영을 돌아보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는 휘영이었다. 그런 휘영을 가만 바라보던 채희는 다시금 앞장서서 걸으며 입술을 떼었다.
“언제든 말 하거라. 네가 하고 싶은 일이 생겨 떠나야 하거든.”
“…….”
“주저 말고 말하도록 해. 언제든 널 보내줄 것이니.”
휘영은 채희의 말에 가만히 미소 지으며 부지런히도 걸어가는 채희의 뒷모습을 빤히 바라보았다.
‘네 이름은 빛날 휘에 그림자 영.’
‘…….’
‘휘영이다. 네가 그림자처럼 아가씨를 호위하여야 할 것이다.’
‘…예, 형님.’
‘그 때가, 네가 가장 빛이 나는 때일 것이다. 알겠느냐.’
어린 시절, 자신에게 무술을 가르치며 늘 아가씨를 잘 보필하여야 한다 일렀던 주한이었다. 주한과 휘영의 집은 꽤 한양에서 잘나가던 무사의 집안이었지만 몇 해 전, 역모라는 누명으로 패가망신 하여, 길바닥을 떠도는 꼴이 되었다. 친척, 형제들은 뿔뿔이 흩어져 제 목숨 부지하기 급급해 생사조차 알 길 없던 그때, 주한의 손을 잡아 이끈 것은 다름 아닌 지금의 좌의정, ‘이한열’이었다.
때문에 어린 주한과 주한의 어머니, 그리고 부모를 모두 잃었던 갓난 아이었던 사촌 아우,
휘영은 지금껏 좌상 집에서 역모 죄로 패가망신 했단 가문을 숨긴 채, 무사히 지낼 수 있었던 것이었다.
“아가씨를 모시는 것이, 제가 하여야 할 일이고”
“…….”
“제가…하고 싶은 일입니다.”
휘영은 멀어져가는 채희를 우두커니 바라보다 이내 휘적휘적, 긴 걸음으로 채희의 뒤를 따랐다.
* * *
“어머님, 아버님, 그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좌상댁의 노비들의 눈을 피해 조용히 안채로 들어온 채희는 좌상과 부인, 채화를 마주하자마자 절부터 올렸다. 좌상 ‘이한열’은 언제 채희가 이리 예쁘게 자랐나, 흐뭇한 얼굴로 채희를 바라보았다. 옆에 함께 앉아있던 정경부인은 그만 울음을 참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버렸다.
“어머님, 어찌 그리 눈물바람이어요. 오랜만에 보는 채희가 어리둥절하겠어요!”
곁에 서 있던 채랑이 눈물을 보이는 정경을 향해 입술을 씰룩이더니, 이내 절을 마치고 덩그러니 서 있는 채희를 와락 껴안았다.
“언…니.”
“채희야, 어째 안색이 더 좋지 않아.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거야?”
살뜰히 채희를 살피는 채랑이었다. 둘이 이렇게 나란히 서니, 꼭 똑같은 사람이 둘이 서 있는 듯하였다. 채랑은 자신을 닮은 채희의 손을 맞잡은 채 가만히 채희를 바라보았다.
“아프기는, 없어. 그저 이틀을 꼬박 예까지 오느라 진이 빠져 그렇게 보이나 봐.”
“나 너에게 줄 것이 있어! 내 방으로 가자.”
하며 채랑은 채희의 손을 잡아끌었다. 채희는 아이처럼 들뜬 언니를 보곤 피식, 웃으며 좌상과 부인에게 고개를 숙여 보이곤 채랑을 따라 나섰다.
“아, 잠시 내 장옷.”
안채를 나서자마자 마당에서 비질을 하고 있는 몇몇의 노비를 발견하곤, 채희는 황급히 몸을 돌렸다. 채랑은 자신의 얼굴을 숨기는 채희를 보곤 마음이 미어지는 듯했다. 곧, 무사 휘영이 채희에게 들고 있던 장옷을 건넸고, 채희는 황급히 장옷을 뒤집어썼다.
“이제, 되었어. 가자 언니.”
“미안…해, 채희야. 나 때문에.”
“무슨 말이 그래. 나 때문에 언니가 곤욕만 치루지.”
“왜 너 때문에 내가 곤욕을 치루어?”
“언니는 장차 세자빈이 될 사람인데…내가 있어 걸림돌만 되잖아.”
“얘, 세자빈은 무슨! 나는…궁에서 살기 싫어.”
“…언니.”
“세자빈은 가당치도 않어. 그리구, 나는 그래도 여기서 어머님과 아버님과 함께 지내잖아. 너는 그 험한 산 속에서…나 때문에…”
“자꾸 그런 말 하면. 나 다음부턴 집에 오지 않을 거야, 언니 시집갈 때까지.”
채희의 말에 채랑은 울상을 짓다, 이내 피식 웃으며 채희의 손을 꼭 잡았다.
“나 시집가면. 너랑 꼭 한 집에서 살 거야.”
* * *
“이걸…나 준다고?”
“응. 너무 예쁘지?”
화려하게 수놓은 비단 옷과 꽃신이었다. 연분홍의 연꽃이 수놓인 샛노란 개나리색 저고리에 고운 보라색의 풍성한 비단 치마. 그리고 파란색의 어여쁜 노리개까지. 무명치마저고리를 입고 있는 채희는 채랑이 건넨 옷을 가만히 만지작였다.
“너무 예쁘지! 내가 아버님을 졸라, 청국에서 사와 달라고 했어.”
“…언니 입어. 나는 이런 것은…”
“너 주려고 내가 아버님께 직접 청을 드린 것이야. 나는 이런 쨍한 색깔은 안 어울려.”
“…….”
“너와 내가 외모가 꼭, 닮았다고 하지만.”
“…….”
“내 눈엔 나보다 너가 몇 곱절 더 고와. 그래서 이런 쨍하구 고운 색깔은 나보다 너가 더 잘 어울려.”
채랑의 말에 채희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곤 화려한 비단 옷을 손바닥으로 쓸어보였다. 채랑은 곧 채희에게 저고리를 대어보곤 너무 잘 어울린다며, 환히 웃었다.
“입고 나와 봐! 너가 이걸 입구 저잣거리에 나가면 나라고 생각하지, 널 다른 이로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야. 물론 좌상 댁 여식 ‘채랑’이가 무얼 먹고 저리 더 고와졌나?, 수군대겠지? 호호호.”
“언니…하지만.”
“너도 한양 구경하고 싶어 했잖어. 꽃놀이도 가고 싶어 했구, 연등회에도 가보고 싶다며.”
“그건…”
망설였다. 이리도 화려한 옷은 입어본 적이 없었기에. 매번 집에서 비단 옷이며 장신구들을 보내왔지만 채희는 한 번도 입어 본 적이 없었다. 그저 펼쳐 쓸어보기만 하고 다시 보따리에 싸, 서랍에 곱게 넣어 두기만 했었다. 꼭, 자신과는 맞지 않은 옷이라 여겨졌기 때문에.
“여기 연 하늘빛 저고리와 분홍색 치마는 연등회 때 입구. 우선 이 옷부터 입고 나와 봐! 너랑 손 꼭 붙들구 저잣거리를 돌아다니며 이것저것 구경시켜 주고 싶지만.”
“…….”
“그것은 아버님이 추호도 허락지 않으실 것이니.”
“…….”
“매번 다 낡은 장옷 뒤집어 쓰구, 누구에게 들킬까 연연하면서 그리 좋아하는 책방에도 쉬이 못 들려보았잖아. 이 옷으로 갈아 입구 내일 해 뜨면 휘영이랑 저잣거리나 다녀와. 언니 소원이야. 너, 내 소원 하나 못 들어줘?”
채랑의 말에 채희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참으로 고운 옷이었다. 채랑이 채희가 며칠 예서 머무는 동안 외출복으로 입을 옷들과 장신구들을 손수 챙겨 놓았다. 채희는 자신의 손을 붙잡고 응? 응? 하며 어린 아이처럼 칭얼대는 채랑을 바라보더니 이내 피식,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언니 때문에…못살아, 정말.”
“정말 입을 것이지? 그치?”
“들켜서 곤혹을 치루어도 나는 몰라. 다-, 언니가 책임져. 알았지?”
“그럼! 이 언니만 믿어! 호호호.”
“하하하하.”
모처럼 채 자매는 얼굴을 마주보고 앉아 호호호, 하하하, 소리 내어 웃었다.
*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