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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이 20대 청년들에게 해외여행을 공짜로 보내주는 이유는?

최근 일본 정부관광국(JNTO)에서 발표한 2018년 일본을 방문한 외국인 방문자 수는 3,119만 명으로 최근 3년 동안 연평균 450만 명 정도 증가하고 있습니다. 외국인 관광객들은 바가지요금이 극성을 부리는 한국과 달리, 언제든 친절하게 손님을 맞이하는 일본에 대해 긍정적인 인상을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일본의 젊은 층은 좀처럼 해외여행을 안 가는 것으로 유명한데요. 이런 분위기가 확산되자 일본에서는 20대 청년에게 심지어 해외여행을 공짜로 보내주기도 합니다. 오늘 RedFriday에서는 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겠습니다.

1. 해외로 출국하는 일본인 수

일본의 인구는 약 1억 2,686만 명으로 세계 11위에 해당됩니다. 이 중 해외로 출국하는 일본인의 수는 1,500만 명에서 1,800만 명 수준에 머무르고 있습니다. 우리나라 2018년 출국자 수는 2,869만 명으로 인구 수 대비 일본인의 해외 출국자 수는 적은 편에 속합니다.

2. 해외여행을 좀처럼 가지 않는 일본 젊은 층

20대 젊은 층의 해외 출국자 수는 1997년 452만 명에서 2017년 305만 명으로 크게 줄었습니다. 이에 대해 지나치게 절약하거나 새로운 환경을 접하기를 꺼려 한다는 분석이 있습니다. 이로 인해 '넓은 세계'를 보지 못해 젊은이들의 세계관이 좁은 일본 내에 머물러 있다는 비판도 있습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문을 참고하세요.
# 원문 출처 : https://redfriday.co.kr/2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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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재연구가 조성관 “도쿄는 '하루키'다”
천재연구가 조성관 작가가 인터뷰를 마치고 포즈를 취했다. photo=김재현 기자 조성관 작가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 펴내 무라카미 하루키 등 일본천재 5명 이야기 15년 동안 전 세계 49명 천재 취재, 연구 #하루키가 즐겨 찾은 재즈바 “더그는 유명세에 비해 몹시 비좁았다. 듣던 대로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계단을 내려오자 담배 냄새가 코를 찌른다(…) 나는 주저하지 않고 진토닉을 시켰다. 하루키가 더그에 오면 즐겨 마신 칵테일이다.”(‘도쿄가 사랑한 천재들’ p116~117) 무라카미 하루키의 단골 재즈 바인 더그(DUG)에 들른 저자는 현장을 이렇게 묘사했다. 더그는 도쿄의 대표적인 유흥가인 가부키초에 있다. 저자는 “대로변에는 양판점 ‘돈키호테’가 있는데 돈키호테를 등지고 10시 방향, 야쿠스니 대로가 시작하는 지점에 더그가 있다”고 썼다. 하루키 팬들이라면 저자의 이런 세심한 배려에 공감할 만하다. 하루키가 좋아했던 진토닉을 함께 마시고, 하루키가 좋아했던 프로야구 구단(야쿠르트 스왈로스)을 함께 응원하고, 하루키가 좋아했던 달리기(마라톤)를 함께 하는 기분. 이 책이 주는 디테일한 묘미다. #5가지 재미...‘도쿄가 사랑한 천재들’ 하루키 단행본? 아니다.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열대림)이라는 책 내용의 일부다. 책은 나쓰메 소세키(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작가), 구로사와 아키라(감독), 미야자키 하야오(애니메이션 거장), 토요다 기이치로(자동차왕) 등 일본의 다섯 천재들의 삶을 다뤘다.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저자의 방식이 이럴진대, 독자들은 마치 다섯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저자는 천재들의 생가~활동 무대~묘지까지 찾아다니며 때론 길 안내자, 때론 맛칼럼니스트, 때론 인문학 여행가 등 각기 다른 잔재미를 전해준다. 조성관. 일간지에서 30년 기자로 일했던 저자는 이제 전업작가의 길을 걷고 있다. ‘도시가 사랑한 천재 시리즈’ 책들을 15년 째 쓰고 있는 그는 빈, 프라하, 런던, 뉴욕, 페테르부르크, 파리(문인, 예술인편), 독일 편에 이어 최근 도쿄 편인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을 내놓았다. 도쿄 신주쿠 '소세키산방 기념관' 앞에 선 조성관 작가. photo=작가 제공. #‘천재연구가’라는 직업 그런 조성관 작가를 20일 오후, 서울 종로구 안국동 근처의 한 커피전문점(코피발리)에서 만났다. 무릎이 트인 청바지와 청자켓 차림의 작가는 아담한 규모의 커피가게를 둘러보며 “이런 곳이 있었느냐”며 반가워했다. 시원한 아이스커피 한 잔을 시킨 저자에게 ‘천재연구가’라는 자신의 직업에 대해 먼저 물었다. “(웃음) 직업이라고 하니까 좀 그러네요. 자랑 같아서, 좀 그렇습니다만.(조금 머뭇거리다) 이렇게 천재를 연구해 책을 쓴 사람은 우리나라엔 없습니다. 영국의 앤드루 로빈슨이라는 작가가 천재 연구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앤드루 로빈슨의 천재 연구와 조성관의 천재 연구는 결이 다릅니다. 나는 생애사의 관점에서 천재를 연구했습니다.” 조성관 작가가 천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는 뭘까. 2005년 겨울, ‘모차르트 탄생 250년’ 특집기사를 쓰기 위해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한 적이 있는데, 당시 ‘뭔가’를 느꼈다고 했다. “그때 모차르트 전문 가이드와 함께 교향곡(39~41번)을 작곡한 집을 찾아가는데 교향곡 40번이 귀에 들렸습니다. 일부러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 집 앞에 가니 교향곡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모차르트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분명 모차르트를 느꼈습니다. 그때 천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가면 천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 천재들과의 지적 교감 저자는 지금까지 책에서 49명의 천재를 다뤘다. 그는 “한 평생의 성취로 인류사회를 윤택하게 만든 사람을 천재라고 정의한다”며 “범위를 좁히면, 어떤 국가에서 국민의 삶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롭게 만든 사람을 말한다”고 했다. 작가의 말대로라면, 천재가 많은 사회는 분명 뭔가가 다를 것이다. 작가에게 “천재가 많은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어떤 차이점을 보이느냐”고 물었다. “좋은 질문입니다.(웃음) 간단한 척도가 있습니다. 평화상을 제외한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천재입니다. 그러니까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는 천재를 많이 배출한 사회라고 보면 됩니다. 미국이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가장 많죠. 일본도 24명이나 됩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왜 미국 뉴욕이나 실리콘밸리로 갑니까? 미국 사회가 어느 나라보다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뉴욕이나 실리콘밸리에는 자극을 주고 배울만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재는 그런 환경에서 꽃을 피웁니다.” 조성관 작가는 천재들의 삶을 찾아 15년 동안 외국 현지를 취재하고 연구했다. 그런 노력은 1~2년마다 책으로 묶여져 나왔다. 쉽지 않은 일이다. 조 작가만의 힘은 어디에 있을까. 그는 “천재와 나눈 교감을 잊지 못해서”라며 이렇게 말했다. “성적 쾌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지적 쾌락, 지적 희열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적 쾌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천재와의 교감은 지적 쾌락의 엑스터시입니다. 이것을 한번 맛보면 다른 건 시시해집니다.” # ‘조성관 작가 스타일’ 이번에 나온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은 작가에겐 의미가 남다르다. 저널리스트 30년을 마치고 나와 전업작가로 쓴 책이기 때문이다. 과거 현직에 있을 때 쓴 책들과는 느낌이 다를 수밖에 없다. “오로지 연구하고 취재하고 쓰는 데만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니 독자 입장에서 좀 더 읽기가 편하고 재미있지 않을까요.(웃음) 유럽과 미주를 돌아 처음 아시아권 도시로 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책 내용을 다시 들여다보자. 작가는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묘지가 있는 가마쿠라에 가서 멸치덮밥을 먹으며 ‘아리가토 구로사와’라고 외친다. 무척 인상적인 대목이다. 작가는 천재들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며 설명하는 부분이 ‘꽤나’ 친절하다. 저자는 “현장성을 가장 중요시한다”고 했다. 그에게 “이것이 ‘조성관 작가 스타일’이냐”고 물었다. 조 작가는 웃으면서 “그렇게 보셨다면 성공이다. 그게 ‘조성관 스타일’”이라고 했다. “여행을 하면서, 식도락을 즐기면서 그 길 위에서 천재를 보고 느끼게 하자는 게 집필 동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세계를 여행하고 있지만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문화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천재들이라면 금상첨화구요. 성이나 궁전 같은 건물만 보는 여행은 조금 시간이 흐르면 남는 게 없어요. 아마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 일본의 천재들과 풍토 이웃나라 일본에는 수많은 천재들이 나고 죽었다. 저자는 이이토코토리(좋은 것을 가져다 배우기), 모노즈쿠리(장인 정신), 잇쇼겐메이(목숨을 다해 일하는 것), 오타쿠(마니아 기질) 등 일본을 정의할 수 있는 여러 표현들을 예로 들며 천재에 대해 설명했다. 기자가 가장 궁금했던 질문은 바로 이거다. “일본의 경우, 천재들이 지금의 일본을 만든 걸까요? 아니면 일본의 이런 풍토가 천재를 만든 걸까요?” 조성관 작가의 얘기를 들어보자. “일본의 풍토가 천재를 키웠고, 그 천재들이 일본을 만들었다고 봐요. 며칠 전 조선 도공(陶工)의 후예 14대 심수관이 별세했습니다. 여러 신문에 그의 부음기사가 실린 걸 보셨을 겁니다. 1980년대 중반, 14대 심수관이 주일한국대사관이 마련한 기자간담회에 나왔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 앞에는 (1598년 14대조를 조선에서 강제로 끌고 온)이 빠져있었지요. 그때 14대 심수관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일본이란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가문이 400년 가까이 이런 자부심을 갖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말은 현장에 있던 외교관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말에 모든 게 들어있다고 봅니다.” # 일본을 배워야 하는 이유 일본에 대한 고민과 생각도 많아 보였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선진국입니다. 국가의 역량은 결국 개개인 역량의 총합이라고 봅니다. 일본인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는지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인에게 배울 게 많습니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커피가게의 대표가 특별한 커피 한 잔을 내왔다. 맛을 본 조성관 작가는 잠시 말을 하지 않았다. “별로인가요?”(대표) “아닙니다. 단맛이 나는데, 깊은 단맛이 있군요.”(작가) 조 작가의 이런 품평 덕에 기자도 새로운 커피 맛을 보게 되는 ‘작은 즐거움’을 누렸다. 작가는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에 저자 사인을 해주면서 ‘도쿄는 하루키다’라고 적었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다음은 인터뷰 전문이다) ①천재에 관심을 갖고 연구를 하게 된 계기를 말씀해 주세요. “2005년 겨울, ‘모차르트 탄생 250년’ 특집기사를 쓰려 오스트리아 빈을 여행한 적이 있습니다. 그때 모차르트 전문 가이드와 함께 교향곡(39~41번)을 작곡한 집을 찾아가는데 교향곡 40번이 귀에 들렸습니다. 일부러 생각한 게 아닙니다. 그 집 앞에 가니 교향곡이 더 크게 들렸습니다. 모차르트는 보이지 않았지만 나는 그때 분명 모차르트를 느꼈습니다. 그때 천재의 흔적이 남아 있는 곳에 가면 천재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②지금까지 49명의 천재를 다뤘는데, 천재를 어떻게 정의하십니까. “한 평생의 성취로 인류사회를 윤택하게 만든 사람을 천재라고 정의합니다. 범위를 좁히면, 어떤 국가에서 국민의 삶을 물질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풍요롭게 만든 사람을 말합니다.” ③천재가 많은 사회와 그렇지 않은 사회는 어떤 차이점을 보일까요. 그런 케이스가 있다면 좀 설명해주세요. “좋은 질문입니다.(웃음) 간단한 척도가 있습니다. 평화상을 제외한 노벨상 수상자는 모두 천재입니다. 그러니까 노벨상 수상자를 많이 배출한 나라는 천재를 많이 배출한 사회라고 보면 됩니다. 미국이 노벨 과학상 수상자가 가장 많죠. 일본도 24명이나 됩니다. 재능 있는 사람들이 왜 미국 뉴욕이나 실리콘밸리로 갑니까? 미국 사회가 어느 나라보다 자유롭기 때문입니다. 뉴욕이나 실리콘밸리에는 자극을 주고 배울만한 사람이 많기 때문입니다. 천재는 그런 환경에서 꽃을 피웁니다.” ④‘천재연구가’ 타이틀로 살고 계신데, 천재연구가라는 직업에 대해 좀 설명 부탁드립니다. “(웃음) 직업이라고 하니까 좀 그러네요. 자랑 같아서, 좀 그렇습니다만.(조금 머뭇거리다) 이렇게 천재를 연구해 책을 쓴 사람은 우리나라엔 없습니다. 영국의 앤드루 로빈슨이라는 작가가 천재 연구로 유명합니다. 하지만 앤드루 로빈슨의 천재 연구와 조성관의 천재 연구는 결이 다릅니다. 나는 생애사의 관점에서 천재를 연구했습니다.” ⑤천재연구가로서 강연에서는 무엇을 강조하고 계십니까. “강연에서는 관심 분야에서 크게 성공한 사람을 잡아 그들의 습관과 노력을 따라하라고 강조합니다. 백종원의 ‘골목식당’을 자주 보는데, 거기 보면 식당해서 돈 벌겠다는 사람들이 기본적으로 잘 하는 사람으로부터 배우겠다는 자세가 없어요.” ⑥천재들의 삶을 찾아 15년 동안 외국 현지를 취재하는 과정이 쉽지 않았을거라 봅니다. 1~2년마다 책을 낼 수 있는 작가만의 힘은 어디에 있습니까. “천재와 나눈 교감을 잊지 못해서입니다. 인간은 쾌락을 추구하는 동물입니다. 성적 쾌락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이 지적 쾌락, 지적 희열입니다. 이것은 일종의 미적 쾌감이라고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천재와의 교감은 지적 쾌락의 엑스터시입니다. 이것을 한번 맛보면 다른 건 시시해집니다.” ⑦가장 인상적이었던 방문지는 어디입니까. “오스트리아 빈입니다. 손바닥만한 작은 도시에 천재들이 우글거렸으니까요. 조금 과장하면, 한 집 건너씩 천재의 흔적이 있었으니까요. 도시가 작으니까 다니기도 편하구요.” ⑧그렇다면 가장 다루기 힘들었던 천재는 누구입니까. “(웃음) 지금까지 강연과 인터뷰에서 많은 질문을 받아봤지만 이 질문은 처음입니다. (조금생각하다가) 니체였습니다. 니체는 정신질환 발작을 일으킬 때마다 스위스 알프스 산중으로 들어가 자연에 안겨 치유를 받았습니다. 여러 가지 사정상 알프스의 니체 흔적을 좇지 못한 채 책을 써야 했습니다.” ⑨<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은 의미가 남다를 것 같습니다. 과거 현직에 있을 때 쓴 책들과는 느낌이 어떻게 다릅니까. “이번 ‘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은 저널리스트 30년을 마치고 나와 전업작가로 쓴 책입니다. 오로지 연구하고 취재하고 쓰는 데만 시간과 노력을 쏟아 부었습니다. 그러니 독자 입장에서 좀 더 읽기가 편하고 재미있지 않을까요.(웃음) 유럽과 미주를 돌아 처음 아시아권 도시로 왔다는 의미도 있습니다.” ⑩기자를 그만두고 1년 넘게 전업작가를 하고 있습니다. 전업작가의 삶은 어떤 겁니까. “전업작가는 연예인과 같습니다. 가수는 음반이 팔리고 공연을 계속 해야 살아남습니다. 전업작가 역시 꾸준히 글과 작품을 발표해야 합니다. 그래야 미디어가 주목하고 책도 팔립니다. 정해진 건 하나도 없습니다.” ⑪내년에 제10권 ‘서울편’을 펴내는 것으로 천재 시리즈 대장정을 마무리하실 것 같은데. 어떤 작가로 남고 싶습니까. “참 어려운 질문입니다. 우리와 전혀 다른 인간으로 여겨졌던 천재들도 우리와 똑같은 흠결 많은 사람이었다, 다만 그들은 한 가지 목표를 위해 어마어마한 노력과 집중을 한 사람이다, 그 사실을 대중독자에게 알려준 사람으로 기억되었으면 합니다.” ⑫70세쯤에는 어떤 글을 쓰고 있을까요. “(웃음) 글쎄요. 나는 15년간 세계를 떠돌며 요람에서 무덤까지 천재를 연구했습니다. 앤드루 로빈슨도 나처럼 천재를 연구하지 못했습니다. 49명의 천재는 내 인생의 스승입니다. 아마도 또다른 각도에서 천재 이야기를 쓰고 있지 않을까요?” ⑬구로사와 아키라 감독의 묘지가 있는 가마쿠라에 가서 멸치덮밥을 먹으며 ‘아리가토 구로사와’라고 한 부분이 무척 인상적이었습니다. 천재들과 관련된 장소를 찾아가며 설명하는 부분이 꽤나 친절합니다. ‘조성관 작가 스타일’이라고 봐야 할까요? “(웃음) 그렇게 보셨다면 성공입니다. 그게 ‘조성관 스타일’입니다. 여행을 하면서, 식도락을 즐기면서 그 길 위에서 천재를 보고 느끼게 하자는 게 집필 동기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수많은 한국인들이 세계를 여행하고 있지만 사람을 만나는 여행이 가장 오래 남습니다. 그 사람이 나의 문화생활에 깊숙이 들어와 있는 천재들이라면 금상첨화구요. 성이나 궁전 같은 건물만 보는 여행은 조금 시간이 흐르면 남는 게 없어요. 아마 이 말에 공감하는 사람이 많을 겁니다.” ⑭<도쿄가 사랑한 천재들>에서 “천재들의 공통점은 자기 일에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충실함과 집중력을 보인다는 점입니다.”라고 했습니다. 책에서는 미야자키 하야오를 ‘가장 특별한 천재’라고 표현했던데요. “책에도 썼지만 초등학교 때부터 만화를 좋아해 만화를 그렸고, 처음에는 데즈카 오사무와 같은 만화가가 되겠다고 했습니다. 그러다 고등학교 때 애니메이터의 꿈을 키웠고 대학에 가서도 그쪽으로 동아리 활동을 했습니다. 그러다 토에이 애니메이션에서 들어가 뛰어난 선배들을 만나 조금씩 성장해갑니다. 그들은 나이 어리다고 하야오를 무시하지 않았고, 그의 재능을 이끌어내려 선배들이 기회를 주었습니다. 선배들이 하야오를 시기질투하지 않았습니다.” ⑮이이토코토리(좋은 것을 가져다 배우기), 모노즈쿠리(장인 정신), 잇쇼겐메이(목숨을 다해 일하기), 오타쿠(마니아 기질) 등 일본을 정의할 수 있는 여러 표현들을 예로 드셨습니다. 일본의 경우, 천재들이 지금의 일본을 만든 걸까요? 아니면 일본의 이런 풍토가 천재를 만든 걸까요. “일본의 풍토가 천재를 키웠고, 그 천재들이 일본을 만들었다고 봐요. 며칠 전 조선 도공(陶工)의 후예 14대 심수관이 별세했습니다. 여러 신문에 그의 부음기사가 실린 걸 보셨을 겁니다. 1980년대 중반, 14대 심수관이 주일한국대사관이 마련한 기자간담회에 나왔습니다. 그때 한 기자가 이런 질문을 던졌습니다. <일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 이 질문 앞에는 (1598년 14대조를 조선에서 강제로 끌고 온)이 빠져있었지요. 그때 14대 심수관이 이렇게 답했다고 합니다. <나는 일본이란 나라를 사랑할 수밖에 없다. 우리 가문이 400년 가까이 이런 자부심을 갖고 이 일을 계속할 수 있었던 것은 일본이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이 말은 현장에 있던 외교관에게서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이 말에 모든 게 들어있다고 봅니다.” ⑯대중적인 예술가(나쓰메 소세끼, 무라카미 하루키, 구로사와 아키라, 미야자키 하야오) 네 명과 대중적이지 않는 기업천재(토요다 기이치로) 한 명을 다뤘습니다. 너무 ‘인문계 예술가’에만 집중한 느낌도 듭니다만. “좋은 지적을 해주셨습니다. 서문에 썼지만 마지막 한 자리 때문에 고민이 많았습니다. 너무 문(文)으로 치우친다는 느낌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토요다 기이치로를 추천받았습니다. 그를 연구하면서 우리말로 번역된 자료가 없어 애를 먹었습니다. 현지 취재를 통해 힘들게 완성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기이치로를 선택한 건 ‘신의 한 수’ 였다고 생각합니다. 토요다 정신을 배워야 합니다. 토요타자동차가 세계 초일류가 된 이유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경영의 신’으로 불리는 마쓰시다 고노스케는 생전에 자신의 롤 모델을 토요다 사키치라고 했습니다. 왜 그랬겠습니까?” ⑰<도쿄가 사랑하는 천재들>이 한국 독자들에게 어떻게 다가갔으면 하는지요. “일본은 아시아에서 유일한 선진국입니다. 국가의 역량은 결국 개개인 역량의 총합이라고 봅니다. 일본인이 각자의 분야에서 최고가 되기 위해 어떤 노력을 얼마나 하는지 알았으면 합니다. 우리는 여전히 일본인에게 배울 게 많습니다.” ⑱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여전히 일본을 이중잣대로 바라보고 판단합니다. 이런 점을 어떻게 극복해야 한다고 보시는지요. “14대 심수관이 1974년 서울대 강연에서 한 말은 지금도 되새겨 볼 필요가 있습니다.” 14대 심수관은, “일제 식민지배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답했습니다. “(일본이 저지른 죄가 큰 것이기는 하나) 거기에만 얽매일 경우 한국은 어디로 갈 것인가. 여러분이 36년을 말한다면 나는 370년을 말해야 하지 않겠나.”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10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5장. 야생. 그곳의 이름은 아프리카 -33
오랜만에 학교친구들 만날생각하니 기분이좋군요! ㅎㅎ 오늘은 오후에 시간이 없을듯하여 좀 일찍올리게 되었네요. 그럼 시작해볼까요! 늦잠을 자버렸다! 같이자던 친구도 알람을 못들었나보다. 옷만 후다닥 입고 빠르게 내려온다. 다들 잠을 못잔건 마찬가진가보다. 이른 새벽부터 출발하다보니 벌어진 일이다. 오늘은 Antelope park로 갈 예정이다. 이곳에 대해 간단히 소개를 하자면 야생동물 보호구역이며 야생에서 다친 사자나 코끼리등 다양한 동물들을 치료하고 보호하는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동물들이 사람들을 무서워하지않고(대부분) 서로 교감할수있는 특이한 곳이다. 가장 먼저간곳은 사자 보호구역이다. 보호구역인건 좋은데 철망에 있는 모습은 뭔가 안타까웠다. 보호구역이라 기대하고갔는데 동물원에 온기분이라 기분이 좀 그렇다. 다음은 차를 타고 초원를 달린다. 야생에 있는 동물들을 볼수있다. 워킹사파리때는 멀리서만 봐야했고 보면 도망만가서 아쉬웠지만 근처까지 다가가서 볼수있는점은 매우 큰 장점이었다. 누도 매우 민감한 동물이지만 너무 가까이가지만 않으면 가까이서 볼수있었다. 저 뒤에 저런 차를 타고 돌아다니며 동물을 봤다. 얼룩말이 생각보다 다리가 매우 짧다. 코끼리 가족들. 이곳에서는 심심치않게 보인다. 다들 사람을 경계하지 않는 모습이다. 아기 사자들과 산책할수있는 코스도 있다. 사람들과 친숙해서인지 큰 고양이를 보는 느낌이다. 그래도 야생성이 남아있어 조련사와 같이 다닌다. 막대기는 사자를 때리는게아니라 관심을 끄는 용도다. 말그대로 사자 장난감. 서로 장난도친다. 아직 새끼라 갈기털이 나지않았다. 이곳에서 먹은 점심은 학교메뉴와 완전 같았다. 이쯤되면 이게 주식인가 싶은 생각이든다. 하지만 맛은 그야말로 천지차이. 매우맛있다. 대만족. 학교에서는 한그릇 다 못먹었는데 여기서는 3그릇은 먹은듯하다. 만약 오게된다면 꼭 식사를 해보자.
'야쿠시마 사진전'에서 만난 현지 호텔리어
야쿠시마 산카라(SANKARA) 호텔의 전경. \ 우치무라 총지배인의 삼나무 명함. 6월 5일, 재팬올의 야쿠시마 사진전에 뜻밖의 손님이 찾아왔다. 야쿠시마 산카라(SANKARA:sankara hotel & spa 야쿠시마) 호텔의 우치무라 토모야(38, 內村 友也) 총지배인(General manager)이다. # 오사카 출신의 30대 호텔리어 건장한 체격에 오사카 출신인 우치무라 총지배인은 30대임에도 야쿠시마(가고시마현) 현지의 특1급 호텔을 책임지는 자리를 맡고 있다. 오사카에 이어 야쿠시마에서의 호텔리어 경력은 10년 째다. 총지배인이 된 지는 4년이 넘었다. 그는 야쿠시마관광협회(屋久島観光協会)의 이사도 겸하고 있다. # 지난해 야쿠시마 현지에서 만나 비즈니스 일정으로 서울을 방문했던 우치무라 총지배인은 스토리투어의 조현제 대표에게 “서울에서 야쿠시마 사진전을 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전시장을 방문했다. 우치무라 총지배인과는 구면이다. 지난해 6월 야쿠시마 현지를 취재했을 때, 그를 만나 야쿠시마 현지 정보를 다양하게 들을 수 있었다. # “야쿠시마를 사랑하는 남자” 그는 당시 기자에게 “세계자연유산인 야쿠시마의 멋진 자연, 공기, 물의 상쾌함에 매료돼, 마음 깊숙이 야쿠시마를 사랑하고 있다”(世界自然遺産『屋久島』の自然と空気と水の 素晴らしさに魅了され、心から屋久島を愛する男。)고 말했었다. 또 “세계 각국에 야쿠시마의 매력을 전하는 영업을 누비고 있다”(世界各国に屋久島の魅力を伝えに営業に飛び回っている。)고 했다. 우치무라씨가 총지배인을 맡고 있는 산카라호텔(3만㎡ 부지)은 야쿠시마의 럭셔리 리조트호텔로 유명하다. 이름이 좀 특이하다고 느낄 것이다. ‘산카라’라는 이름은 ‘하늘의 은혜’를 의미하는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야쿠시마 남동부에 위치한 산카라호텔은 울창한 숲으로 우거진 언덕에 자리 잡고 있다. 호텔 로비와 풀장에서 바라보는 동지나해의 풍광이 장관이다. #호텔 이름은 산스크리트어에서 유래 호텔 객실(29동)은 빌라 형식의 독채로 구성되어 있어서 젊은 연인들이나 신혼부부들이 많이 찾는다. 로비와 객실 간 이동은 직원이 카트를 운전하며 서비스하는데, 일본 특유의 오모테나시(접대)를 받는 기분이 든다. 호텔 레스토랑(ayana와 okas)의 맛과 수준도 꽤 높다. # 삼나무 명함으로 지역 홍보 우치무라 총지배인은 두 가지 명함을 갖고 다닌다. 일반 명함과 삼나무로 된 명함이다. ‘원령공주의 섬’의 야쿠시마는 삼나무('야쿠스기'라고 부름)가 유명한데, 이런 삼나무 명함을 갖고 다니면서 지역을 홍보하는 것이다. 지난해 산카라호텔에서도 많은 사진을 찍었지만, 이번 전시회에 내걸지는 못했다. 우치무라 총지배인은 전시회 방문 자리에서 “현지의 사진을 서울에서 감상할 수 있어서 기쁘다”고 방명록에 적었다. 전시회를 마치고 그날 밤 늦게 우치무라 일행과 다시 만남의 자리를 가졌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04 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 군국주의 시대
재팬올에 ‘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을 연재 중인 이훈구 시나리오 작가의 거주지는 미국입니다. 그동안 한국에서 활동 중이었던 작가는 최근 미국(LA)으로 돌아갔습니다. 이훈구 작가는 “미국에서도 연재는 계속할 것”이라고 했습니다. ‘군국주의 시대’ 이야기는 그가 미국에서 보내온 첫 글입니다. <편집자주> 일본이 1931년 중국 동북부를 침략(만주사변)하면서 1932년 만주국이 세워지고 1937년부터 중국과 전면전에 들어가게 된다. ‘민족주의’와 ‘군국주의’의 경계에서 일본의 지식인들은 협소해져 간다. 영화인들에게는 더욱 그 입지가 좁아지는 계기가 되는데 군국주의적 성격을 지닌 정부는 문부성을 통해 ‘새 민족적 천황정치’를 확립하라는 지시를 내린다. 이윽고 1939년 10월, 영화산업은 직접적인 정부 통제를 받게 되고 정부 입장에서는 원활한 통제를 위해 영화사의 수를 축소하자는 의견이 대두 되었다. 그런데 오히려 이러한 통제가 어떤 영화인들에게는 기회가 되는 역설을 낳는다. 쇼치쿠의 전성기도 1930년대부터 50년대까지이기 때문이다. 쇼치쿠의 전성기를 이끈 인물 가운데 기도 시로(城戶四郞)라는 제작자가 있는데, 그는 이 암흑기에도 수많은 영화인들을 발굴해 냈다.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의 재능을 알아보고 파격적으로 감독 데뷔를 시켜놓는가 하면 나루세 미키오를 “쇼치쿠에 2명의 오즈는 필요 없다”며 방출한 이도 그다. 역설적으로 그는 20∼30년대 쇼치쿠를 지휘하면서 감독 중심의 스튜디오를 확립하는가 하면 정부의 통제에 유연하게 대처한다. 신파극과 가부키의 묵은 유산을 털고 내용과 스타일 양면에서 ‘모던한’ 영화들을 제작하고자 했으며 쇼치쿠의 감독들과 조감독들은 기도 앞에서 토론할 기회를 가졌고 외국영화들을 보면서 콘티를 그려가며 연구를 했다. 1941년부터 1945년 사이, 4년간의 상황을 제외하고는 쇼치쿠는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에서 영화제작을 했다. 그러나 1939년 10월, 일본의 영화산업은 직접적인 정부 통제를 받게 되는 시대로 접어들게 되는데 ‘대형 영화사’의 수를 2개로 축소하기로 하는가 하면 영화검열을 강화해 나갔다. 1934년에 제정된 영화법은 영화제작을 완전히 국가의 관리와 통제 아래 두기로 하는데 예전의 검열보다 더 혹독했으며 감독과 배우는 모두 면허 등록제가 되고 시나리오 단계에서부터 검열을 받았다. 물론 독창적 발상은 아니었다. 나치독일의 영화통제정책을 역시 ‘일본화’하였다. 이와사키 아키라(岩崎昶)같은 예외를 제외하고는 대다수 영화인들이 자신들의 기득권 확보와 새로운 경쟁자 제거를 위해 오히려 찬성하는 경향을 보였다. 심지어 1936년에는 나치 독일의 산악영화 감독인 아놀드 팽크(Arnold Fank)가 방일, 일본의 산악 풍경을 중심으로 한 ‘사무라이의 딸’을 제작하여 독일에서 큰 인기를 끌기도 했는데 이 때도 일본은 ‘일본화’가 무엇인지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공동감독으로 선발된 이타미 만사쿠(伊丹万作)의 경우, 아놀드 팽크가 설명하는 낭만파적 숭고미학을 이해하기 보다는 자신의 특기인 풍자적 유머의 영화를 만들고야 말았다. 바로 ‘새로운 땅’이 그것인데 이 스토리는 문화 내셔널리즘 성격이 매우 강한 영화였다. 고스기 이사무(小杉勇)가 연기하는 주인공 야마토 테루오는 6년간의 유학을 마치고 독일인 약혼자 게르다 슈톰을 데려오는데 이미 일본인 약혼자가 있음을 알게 된다. 물론 독일인 여성과 결혼하겠다는 말에 야마토의 가정은 뒤집어지지만 게르다 슈톰은 오히려 “일본인의 전통과 가치를 지켜야 한다”며 “가족의 말을 들으라”고 야마토를 설득한다. 게르다 슈톰 역시 일본 여성의 아름다움과 총명함에 이끌려 약혼자 미치코와 화해하고 결혼을 하게 되는데 만주국에 정착하여 일본 병사의 보호를 받으며 ‘새로운 땅’을 개척하는데 정열을 불태운다는 이야기이다. 다분히 군국주의를 찬양하는 영화이지만 독일과 일본 양국에서는 정치적 목적을 달성하였다. 독일 관객에게는 일본인의 문화적 순수성, 인종적 순수성을 본받으라고 선전하고, 일본 관객들에게는 ‘신천지’만주로 떠나라는 선동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 아놀드 팽크가 선택한 하라 세쓰코(原節子)는 서양인의 체구와 용모의 여배우이자 동양인으로서 그의 의도에 맞게 ‘전형적인 일본 여성’을 연기한다. 그녀는 전쟁 기간 내내 활약을 했으며 이후에도 일본의 대표적인 여배우가 되는 모순을 낳기도 하였다. 그녀는 오즈 야스지로(小津 安二郎) 감독이 연출한 영화 ‘만춘’, ‘동경 이야기’ 등에 출연했는데 그녀의 경력이 오즈 감독을 만나기 이전과 이후로 나눌 만큼 큰 영향을 줬다. 그는 오즈 감독 영화에서 착한 딸과 며느리 같은 이미지 덕분에 ‘영원한 처녀’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하라는 구로사와 아키라(黒澤明) 감독과 나루세 미키오(成瀬巳喜男) 감독 영화에도 출연해 ‘일본 영화의 황금시대’를 이끈 배우로 평가받았지만 한편에서는 국민여배우 이전에 ‘파시스트 미소녀’로 불리기도 했음을 상기시킨다. 형부인 구마가이 히사토라(熊谷久虎) 감독의 권유로 배우가 되었고 그의 영향에 의해 흥행 여배우가 될 수 있었다. 반면 이타미 만사쿠는 일생동안 ‘새로운 땅’의 실패와 좌절에 대한 언급을 회피했고 반전영화를 통해 참회하였고 아들 이타미 주조(伊丹 十三)를 통해 블랙코미디의 새로운 지평을 개척해 나가게 된다. 영화계는 국가의 에누리 없는 통제에 질식하기 시작하고 쇼치쿠, 도호, 닛카쓰 등 대형영화사의 수를 2개로 축소하기로 결정하지만 당시 신코(新興)키네마의 사장이었던 나가타 마사이치(永田雅一)는 오히려 정부를 설득하여 ‘민족(民族)’이라는 제3의 영화사를 설립하는데 성공한다. 이 영화사는 훗날 전후 구로사와 아키라의 ‘라쇼몽’(일본 최초 베니스 영화제 그랑프리),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지고쿠몬’(아카데미 외국어영화상) 등을 제작해 나가타 마사이치를 ‘영화계의 아버지’로 불리게 만들었다. 뿐만 아니라 전후 연합군 최고사령부로부터 공직 추방 조치를 받기까지 하는데 막강한 정계 인맥 덕분에 일명 ‘픽서(fixer·해결사)’로 불리며 심지어 일본 프로야구단 ‘도쿄 오리온스(현 지바 롯데 마린스)’의 구단주가 되기도 한다. 이 영화사는 다시 ‘다이니혼에이가(大日本映畵)’로 개명하게 되었고 오늘날 ‘다이에이(大映)’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불행하게도 전시영화가 제작되던 시절 재정난에 시달리던 닛카쓰는 다이에이에 흡수되게 된다. 1937년 중국과의 전쟁이 시작되면서 사사키 야스씨(佐々木康), 구마가이 히사토라(熊谷久虎), 야마모토 가지로(山本嘉次郞), 아베 유타카(阿部豊), 다자카 도모타카(田坂具隆)등의 감독들이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는데 그렇다고 다른 영화인들이 저항을 한 것은 아니었다. 아베 유타카는 남방으로, 우치다 도무(內田吐夢)는 협조 대신에 만주로 떠났다. 오즈 야스지로는 군복무를 두 번이나 했으며 미조구치 겐지는 외지로 파견 되었는데 장교 대우를 해주지 않자 국가주의에 호응하는 영화를 제작하려고 했다. 이마이 다다시(今井正)와 도요타 시로(豊田四郞)는 조선으로 건너와 영화제작을 이어갔으며 그 제작 기반은 조선영화인과 일본영화인의 협업으로 영화를 만들던 경성촬영소였다. 당시 경성촬영소에는 일본 쇼치쿠 출신의 야마자키 후지에가 감독으로 입사해 조선 이름 김소봉(金蘇峰)으로 활동하고 있었다. 이중 가장 주목 받는 이는 다자카 도모타카로 ‘5인의 척후병’(1938)에서 호전적 영웅주의를 부정하고 전장에서의 고생과 신뢰 그리고 전우애를 그려내 베니스 영화제에 입상한데 이어 1939년에는 ‘땅과 병사’를 연출하는데 이 작품은 낙오자가 속출함에도 아무런 이유 없이 행군하는 병사들을 그려낸다. 이 두 작품은 모두 적군이 등장하지 않는다. 고통을 참고 자기 희생을 피할 수 없는 무영의 일본인들을 담담하게 그려낸다. 다만 이 작품적 경향은 크리스토퍼 놀런 감독의 ‘덩케르크 (Dunkirk, 2017)’에서도 재현되는데 역시 적은 등장하지 않고 고통을 참으며 자기 희생을 피할 수 없지만 묵묵히 자신들의 역할을 수행하는 무명의 영웅들을 그려낸다. 도덕주의를 강조한 일본의 전시 하의 영화들은 따라서 전투의 비참함과 병사들의 고통을 강조하게 되면서 오히려 반전영화로 받아들여지는 역설을 낳게 된다. <미국 LA=이훈구 시나리오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08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하고싶은건 하고 살자 - 여행편 3. 유심 사는척 하면서 파리 맛보기
‘혹시 나 자는동안 후두려 팼어..?’ 고등시절 및 대학 일부 시절(?)을 살다시피 했던 북미권과는 사뭇 다른, 아니 어쩌면 정반대와도 같았던 유럽인지라 생소함에 알게모르게 긴장을 한 모양이다. 한 것이라곤 40키로 짐 들고 왔다갔다 하기, 전철 갈아타기, 왕복 40분 거리 장보러 갔다오기 밖에 없는데 (응~ 철인3종경기야~) 긔이냥 기절했다 일어나니 팔은 제대로 붙어 있는지, 다리가 혹시 잘렸는지 아주 구석구석 쑤시지 않은 곳이 없었다. 이렇게 된 이상 장봐온 거로 맛있는 거나 해먹고 잠이나 푸지게 자자 싶었지만 이미 하루 스케줄을 빠듯하게 짜놓은 남자친구의 눈이 반짝반짝 빛나는 것을 나는 외면할 수 없었타 타 타타타! !!!!가즈아!!!! 그래 가자! 일단 나가고 보자! 쉬어도 나가서 쉬자! 누리러 왔으니 누리러 가야지! 관광도 좋지만 그 보다는 거주에 가까웠던 마음가짐 이었기에 혼자 뽈뽈 거리며 돌아다니려면 지도가 필수였고 우리나라처럼 길거리에서도 와이파이가 잡힐 일은 만무하기 때문에 (핸드폰이 잘 터지기만 해도 다행) 유심 만큼은 아침밥보다 먼저 챙겨야했다. 귀차니즘과 잘 싸워준 내안의 세번째 자아 덕분에 트레이닝복 줏어 입고 모자 눌러쓰고 (??? ????) 어느새 ‘일단 가고 생각 하즈아~!!’가 모토가 되어버린 우리는 첫 파리 방문을 위해 문밖을 나섰다. 역시 1+1의 시너지란,,💪💪 하지만 역시 세번째 자아보다 강했던 것은 나의 두번째 돼자아🐷였고 그새를 못참고 첫날 도착때부터 돌린 먹레이더에 덜커덩우당탕탕 걸려주신 동네 빵집에 홀린듯 들어갔다. 프랑스는 그냥 동네 빵집이 곧 맛집이라는 소리를 들었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형형색색의 디저트들 뿐 아니라 꼬숩게 자욱한 빵향기 때문에 취할뻔 했다..🤤 원체 밥순이라 신토불이란 말을 달고 살았는데 어느새 빵코홀릭이 되어 이집에서 1주 5빵 했다는 것은 안비밀..⭐️ 이것은 사실 성지순례 글이었던 것이엇타..! (지금도 빵의 늪에서 벗어나지 못하는중.. 내팔자야😭) 진짜 뭐라 할까.. ‘빵이 다 거기서 거기지’라 생각한 내 뚝배기를 벽돌로 들어다가 냅다 후려친 후 30일간 건조시킨 묵직한 바게뜨로 후두려 맞아도 성치 않은 맛이라 해야 하나.. 아니 에끌레어 이맛을 내가 왜 이제서야,,!? 띠.. 띠용?!!?? 차가운데 딱딱하지 않은 빵과 그 안을 가득 채우고 있는 낭낭한 초코필링..🍫 도른빵이다,, 아니 이건 빵이 아니라 그냥 에끌레어라고 불려야 해..!!! 빵사숙고의 결과는 쇼콜라 에끌레어. 아침이라 당떨어져서 그런거 아님. 눈 뜨자마자 초코부터 찾는 쪼꼬돼지라 그런거 아님. 무튼, 가면서 배나 채우자 했던 그런 에끌레어를 한입 베어 물고 나서 두 쪼꼬덕후들은 발걸음을 멈춰야 했다.. 정말 말없이 성은이 망극하옵니다를 외치며 저 빵집 파티셰 분과 사장님 및 직원분들 모두가 적게 일하시고 많이 버시길, 포춘쿠키에서 로또번호 득하시길 빌며 눈물저즌 에끌레어를 묵으며 역으로 향했다. 우와 근데 진짜 빨라! 프랑스 메트로는 정말 신기했다. 뭣이 신기했냐면, 1. 탈 때와 내릴 때, 문을 수동으로 직접 열어야 하고(손잡이가 있거나 버튼이 있음) 2. 창문을 열 수 있으며 (기관사님의 삘존에서 격한 스피드로 귀에 피날 수 있는 점 주의) 3. 문 바로 옆에는 접었다 폈다 할 수 있는 자리가 있고 (사람이 많이 탈 때에는 일어나는 것이 예으의!라고 한다) 4. 좌석이 우리나라처럼 일자로 되어 있는 것이 아닌 버스 형태에 가깝고 5. 거의 1분 단위로 멈춰서기 때문에 역이 굉장히 많더라도 시간은 비교적 짧다는 점. (역마다 도착시간이 짧아서 빠르다는 것을 설명하려 했는데 생각해보니 파리 지하철에 특이점이 많아서 당황중) 그렇게 처음 타는 메트로에 우와를 연발하며 물음표 살인마가 되었을 즈음 목적지에 도착했다! (가는 경로가 기억나지 않아서 눈빛 외면중)🙄 ⭐️소매치기가 판을 친다는 파리 메트로에서 다행히 두달간 한번도 소매치기를 당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 굉쟁이 현지인 같은 추레한 차림 - 출입문 근처 자리 앉을 때는 아예 핸드폰 손에 쥐고 있지 않고 심연에 위치한 주머니에 넣어놓음(내릴때 확 낚아채어 가는 경우가 많다고 합니다) - 에코백은 즈으으얼대 들고 다니지 않았으며 결계걸린 봉인된 가방만 들고다녔음 와.. 이거시 파리인가..! 사실 프랑스에 오기 전 크게 기대했던 것 들 중 하나가 빠히지엥들의 착장이었는데, 우리의 거주지는 외곽에 가까웠기 때문에 소위 말해 ‘멋쟁이’들을 많이 접할 수는 없었다. (울희 동네는 라이더 자켓만 입어도 주목 받는 그런 동네,, 난 그런 동네가 좋~ 드라~) 그런데 넋놓고 있는 와중에도 아 우리가 파리에 다다르고 있구나를 느낀건 시내로 진입할수록 증가하는 지하철 내 힙스터 비율 ㅋㅋㅋ 생각해 보니 한국에서도 서울 시내에 살지 않는 수도권 주민으로서 옷쇼핑을 감행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떠올렸던 질문은 ‘이걸 내가 서울에서나 입지 동네에서 입고다니다 친구들 마주치면 난리난리 놀림난리에 멘탈 바사삭 아니려나..?’였다. 이생각이 들고 나니 역시 사람 사는거 다 거기서 거기구나 싶어 묘한 친근감과 안도감을 느끼며 한껏 힘이 실린 발걸음으로 오디소나 당당하게 걸어보았다. 사진에 다 담겼을 지는 모르겠으나, 왜 진짜 무서우면 외려 비명 안나오고 지인짜 힘든 사람은 힘들다는 말이 안나온다라는 것처럼, 진짜 너무 예쁘고 너무 좋으니 이 황홀감을 표현할 말이 없어서 도착과 동시 말없이 발걸음 마다마다 카메라를 들이미느라 바빴다. (혹시 나도 모르게 너무 이뻐! 너무 멋있어!! 짜릿해!!!를 남자친구 귀에다가 연발하여 그의 귀는 피범벅이 되었을 수도 있음) 오기 전부터 익히 들어온 파리의 길빵러들😂 간접 흡연 하느니 김치 싸대기를 맞는다!!(연관성 무엇)하시는 분들은 정말 쥐약인 곳이 유럽일터. 나도 차라리 직접 흡연이 낫지(예?) 간접흡연만큼은.. 했지만 왠지 저 두 남녀의 손에 담배가 들려있지 않았다면 조금 덜 파리스러웠(?)지 않을까 싶다. 싫고 좋고를 떠나 파리를 그냥 파리로 받아들이니 좀 더 수월했다. 그리고 정말 아름다웠다. 들고있는 담배마저도! 그 뒤로 서있는 건물은 또 얼마나 멋지던지. 두 남녀와 건물이 하나의 세트 같다. 볼 때마다 기분 좋은 사진. 눼.. 맞습니다.. 그 후로도 저는 파리 뽕에 취해 홀린듯이 셔터를 눌러씁네다.. 미술시간 하나 소용 없어! 라는 말은 거짓말 입니다,, 열심히 들어서 배워 놓으십씨오.. 건물 양식이며 뭣이며 보이는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From. 열심히 안들어서 못배운 쌀암,, 오페라 역 갈 때 마다 머얼리서 보이는 이 기념비?를 보며 아 저거 뭐지 분명 뭐다. 분명 뭐야. (그니까 뭐) 저거 진짜 뭔지 내가 꼭 알아낸다! 는 꿈에서 외쳤던 것이었던 것입니다,, 아시는 분 꼭 알려주새오..🙏 옛날에 비정상 회담 프로그램에서 각국 대표들끼리 스쿠터가 우리의 전유물이네 너네의 전유물이네 하며 싸우는데 프랑스 대표가 스쿠터는 명백히 우리나라의 전유물이다!!! 라는 주장의 증거 사진 되시겠읍니다. 파리 어딜 가나 세워진 스쿠터들이 굉장히 많았다. 내 사진의 주목적은 그 뒤로 넘어서 노천카페에서 햇살을 즐기며 도란도란 인생을 즐기고 계신 분들이었는데 시선 강탈 무엇.. 내가 좋아하는 사진. ‘그래, 나 진짜 파리에 있다!!’를 되새겨 주는 듯이 휘날리는 휘.풍.당.당. 삼색기(욕아님) 증말 미의 나라야 미의 나라,,🇫🇷❤️ 낭만의 도시 파리. 미국 유학 시절 유독 파리에 죽고 못사는 현지 친구들 및 홈스테이 가족들을 보며 ‘저렇게까지 칭송할 일인가?’ 했던 내가 죄스러워 꿀밤을 세대 먹였다.(심지어 초딩 시절 프랑스 맛을 보았음에도 불구 - 오늘의 교훈: 자아가 형성되기 전에는 국내 여행부터 열씸히 댕기자) 아름답다, 낭만적이다, 예쁘다, 멋지다, 굉장하다 등의 형용사 밖에 모르는 내가 원망스럽다. 무엇을 상상하던 그 이상인 도시. 맛보기 여행에 느낀점이 이정도. 본격적으로 파리를 느끼면 이 미친 아름다움에 내가 파멸할 거 같은 그런 비극 소설적 기분에 막 두려웠다 (헠헠 파리를 선물해 준다면 영혼까지 팔궤쒀!!!) 팔랑팔랑 도착한 프히 모비~!!에서 개통 성공!!! 이 영수증에 본인 폰번호 및 갱신시 필요한 아이디, 비밀번호, 핸드폰 껐다 킬때마다 입력해 주어야 하는 sim비번이 있기에 버리시면 안됩니당!!! (아님 저처럼 찍어두세효) 이때는 몰랐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그저 빛 킹갓제너럴 통신사 free mobile께서는 각지의 구멍가게에 - 2편에 소개했던 곳 같은- 키오스크를 설치해 두시어 손쉽게 유심 발급 및 재발급이 가능했었떤 것^^!!!!!!!!!!! 여윽시!!!!! 역시!!!!!!!! 배워야 산다!!!!!!!!!!!!!!!!!!!흑흑 Free mobile 홈페이지에 가면 지역별로 키오스크가 설치된 위치를 확인할 수 있으니 참고해보시면 좋겠습니다👍 원래 오기 전에 유심을 사서 올 예정이었으나(현지에서 비싸다는-보통 5,60유로?- 말을 들었기에) 쓰리 모바일, 오랑주 등등 내게 적합한 조건의 유심들은 다 팔렸을 뿐 아니라 가격이 크게 저렴하지 않았다. (포켓 와이파이 대여도 생각해 보았으나 주님이 주신 용돈, 콩팥을 팔지 않는 이상 두달간의 비용을 감당하기에 무리!) 그래서, 목마른 사슴의 매음으로 폭풍 검색한 결과! 으아아아주 착한 혜자통신사 free mobile을 찾아낼 수 있었다! http://mobile.free.fr 요금제 정보 참고! ⭐️내가 프리모바일을 선택한 EU⭐️ 1. 유심칩 가격 10유로(싸진 않지만 갱신 할 때는 안내도 되니까!!) 2. 8.99유로에 한달 데이터 50기가(지도 맨날 쓰고 음악 맨날 듣고 다니는데 10기가만 해도 충분했습니다), 다른 EU국 여행시 국가별로 3기가씩 사용 가능(근데 이게 여행 총기간동안 그런건가 싶어 심리적 불안감에 시달렸음.. -3기가를 초과하면 데이터가 끊긴다던지 체크카드에 추가로 부과된 적은 없어서 아직까지도 미스테리다) 3. 자동 연장 결제/한달만 결제를 고를 수 있어서 중장기 여행자 같은 경우 해지때문에 골머리 쓱을 필요 없을 무 (그러나 한달 이상 있고자 하신 분들은 해지날이 되기 이전에 홈페이지 통해 미리 갱신해 주셔야 8.99유로로 다음달도 누릴 수 있으십니다.. 저가튼 몽총이는 멍때리고 있다가 10유로를 땅바닥에 버렸어요~) 4. 계좌 개설 없이도 마스터/비자 카드로 결제 가능 (타 통신사같은 경우 계좌 개설이 필요한 통신사들이 있더라구요 -예를들면 나의 남자친구의 텅신사- 그래서 은행에서 통신업무까지 맡는 경우가 있는 것 같습네닷!) 하!지!만! 싼게 비지떡이라는 것은 부침계의 정설이었던 것이었던 것^^ 안터져요^^ - 핸드폰 있어요? - 아니 안터져요 - 네? 카톡 잘 돼요? - 아니 안터져요 그냥 - 무슨 소리예요? 문자는요?? - 아니 안돼요 그냥!!!!! 그랬다. 안되는 것이었다. 하늘이 도우사 소매치기를 면하게 해주시려고 나의 폰을 시계 및 계산기로 만들어 주시었도다. 전부 다 그런건 아니지만 지하철을 타고 다닐 때 50%의 확률로 (아니 60%인가?) 먹통이 되어 열심히 카톡 잘 하다가 갑자기 죽어버리는 현상을 자주 겪어 상대방의 심장 건강에 악영향을 주는 그런 통신사. 아주 써프라이즈 로맨티스트 사랑쟁이!!!!으이구!!!!!!! (아니 근데 도대체 지하철 타기 전에 역 근처서부터 안터지는 이유는 모에여? 개복쮜에여???ㅇㅅㅇ??!!) 하여간 맛만 보려 한 파리 여행기에 한그릇을 싹싹 다 비우고 주모를 외치는 바람에 오늘도 녹초가 되어 돌아온 아직 청춘이라며!!의 20대 후반 뇌피샬 청춘들은 밥은 무슨 밥 오늘은 내가 술파게티 요리사!!!를 외치며 프랑스 국민 안주 쏘시송(기본 맛, 초리조 맛-견과류 맛까지 먹어보앗으나 개인적으로 역시 심플이즈더 베스트!기본이 최고입니당) 과 치즈(이 가격이면 씹다 뱉은것도 옴뇸뇸 밥도듁 할 수 있는 까망베르와 생모짜렐라🤑🤤😍)를 안주삼아 퐤튀퐤튀를 벌였도다..! 술은 와인 위주로 마시자!한 프랑스 음주다짐의 첫빠따 샤도네! 조고 맛있었어용 가격도 4유로 대였던 것으로 기억! 그리고 유튜브에서 추천하여 냅다 집은 난쟁이 할아버지 맥주(네 저 작명소 지을 겁니다)는 blonde였기에 내입맛에는 그냥 그랬다! 알차게 마무리 한 하루라 그저 기쁘고 걱정했던 바와 달리 생각보다 빨리 섞여서 한시름 덜은 유쾌한 하루. 마무으리는 파리에서 마주친 데카트론에서 재롱부리는 중인 잔망둥이로😍 (걸리기 전에 도망가야함) 다음에 또 만나요!👋👋👋 A biento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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