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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 영화 경제학④/ 재난과 메이와쿠


메이와쿠 문화는 일본 가정교육의 근간이기도 하다. 유치원과 학교에서도 이런 교육은 이어진다. 일본에서는 유치원에서부터 대중교통 이용 매너 등 공공장소 예절부터 가르친다. 버스나 지하철을 탈 때 탑승객이 내린 뒤 타기, 버스·지하철 등에서 큰 소리로 떠들지 않기 등 매우 구체적이다.

초등학교에서도 ‘도덕’ ‘생활’ 등의 과목을 통해 공공장소 예의나 대중교통 이용 예절 교육을 이어간다. 한마디로 남에게 폐를 끼쳐서는 안 된다는 기조가 강하다.

심지어 일본 부모는 아이에게 몇 달 동안 자기물건 정리하기만 가르치기도 한다. 자기 물건 정리도 안 된다면 남에게 폐를 끼치게 된다는 생각이다. “수준 높은 질서의식을 갖추려면 꾸준한 반복 교육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는게 일본의 가정교육이다.

뿐만 아니라 거리가 정돈이 되고 늘 깨끗하게 청소 되어 있는 것도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인식이기 때문에 철저하게 자기 집, 혹은 건물 앞을 스스로 치우기도 한다. 이러한 가정교육이 큰 힘을 발휘하기도 한다.

지난 2011년 대지진 참사에서 일본 공영방송 NHK는 절제된 보도를 했다. 강진 발생 직후 자막으로 속보를 내보냈고 즉시 특보체제로 전환했다. 그리고 한 시간여 뒤에는 센다이(仙臺) 상공에 헬리콥터를 띄워 쓰나미가 도로·주택·비닐하우스 등을 삼키는 모습을 생중계했다. 그렇게 화재 정보, 정부 발표 등을 신속 생중계하면서도 과도한 공포감을 막기 위해 절제된 톤을 유지했다.

이는 비탄에 빠진 시민들을 자극하지 않으려는 의식에서였다. 또한 일본인들은 복구 과정에서도 경이적이고 절제되며, 성숙된 국민성을 보여주었다. 재해로 인해 차가 한 대도 지나가지 않는 도로에서 신호등 파란불이 바뀌어야 길을 건넜다. 자연재해 앞에서도 줄을 서서 마트를 이용하고 일체의 약탈행위가 없었다.

규슈지역에도 대지진이 났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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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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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일기_그리고 어제 오후 3시쯤 B2 합격증을 받았다
https://youtu.be/wZkjl7Mwi_U 파리에 온 지 1년 하고 40일이 지났다. 지난 10월에는 거의 매일처럼 비가 내렸고 해가 온전히 든 날은 손으로 다 꼽을 수 있을 정도뿐이었다. 빨래가 좀처럼 마르지 않았다. 그래서 우리 작년에는 어떻게 했었지 생각을 해보다가 일 년이라는 시간이 어떤 기념도 없이 홀연히 지나갔음을, 계절이 침 발라 넘기는 미용실 잡지의 페이지들처럼 몇 가지 색깔만 보여주고서 왼 허벅지 위에서 툭하고 뒤집혀 버렸음을 알게 되었다. 비에 젖어 떨어진 낙엽들은 바스락 소리도 없다. 비로 쓸어도 쉽게 쓸리지가 않아 미화원들은 강풍기을 들고 다니며 여름의 흔적을 길가로 밀어낸다. 한 번의 빗질에 양말마다 머리카락이 또 가득이다. 방을 빙빙 돌며 테이프를 찍찍이는 엄마는 매일같이 덧창 너머에서 부지런하다. 어느 정도는 죄책감이 무거운 아침을 들어 열고 겨울이면 방향을 잡아 앵글 안으로 잘도 들어오는 붉은 해에 감탄을 한다. 아 오늘은 어김없이 수업을 가야겠구나. 어느새 우리의 창을 가려주던 나무는 내밀한 제 덩치를 들어내고서 옷걸이처럼 우리의 눈을 긁어댄다. 사랑하는 이들만 아는 베기는 어깨, 힘을 놓기 미안한 갈비뼈, 그 앙상한 스케치. 몇 차례나 갱신한 신분증에도 롤로 말아 부풀린 풍성함들 사이로 팔을 넣어 만지면 놀라 조금은 슬프던 작은 내 사람. 겨울은 더 작게 견뎌야 한다. 바꾸지도 않는 침대는 자꾸 커져만 간다. 경계가, 우리와 남이 고무장갑에 자꾸 구멍을 내는 식칼처럼 느껴지던 우주 같은 어젯밤.  서머타임이 끝나지 않았을 때는 8시가 되어도 해가 다 뜨지 않아 새벽 같은 거리를 삐죽 나온 입을 마스크 안에다 넣고서 한 발쯤 앞서 걷는 그를 따라 학교에 가곤 했었다. 지하철 출구를 빠져나오면 그제야 아침다운 빛이 아이들의 곱슬머리 속으로 숨고, 아이들은 날개같이 등을 가로지르는 사각 가방을 메고서 아빠나 엄마의 손을 잡고 학교로 총총이며 걸어간다. 나처럼 칭얼대는 애는 없네.  2시간의 수업에 12번도 넘게 핸드폰을 두드려 남은 시간을 확인했다. 오흐부아, 제일 경쾌한 프랑스어, 계단을 내려왔을 때 누군가가 길에 잠시 세워둔 샤리오가 길게 그림자를 드리고 있을 때면 짧지만 그래서 유난히 하얀 이곳의 낮 빛이 연출하는 지독한 콘트라스트에 배고픔에도 빠른 추위에도 몇 호흡은 서서 뭔가를 바라보곤 해야 했다. 같은 하늘을 다른 내가 보는 것, 다른 하늘을 같은 내가 보는 것, 아니 같은 하늘을 같은 내가 달리 보는 것. 투덜대며 끌려가던 수업이 1달 반도 못 견디고 다시 중단되었다. 일일 확진자가 수가 천 단위라니 하며 놀랐는데 1만, 2만을 금세 넘어서더니 10만을 넘기기도 했다. 그렇게 긴 여름밤만큼 쌓인 설거지 거리가 우리를 다시 서로의 좁은 방으로 갈라 넣었다.  이동제한이 다시 실시되기 직전에는 이슬람을 풍자한 만화를 두고 프랑스가 무척 시끄러웠다. 몇 번의 테러가 있었고 죄 없는 사람들이 죽었다. 뉴스에서만 보던  마우스로 색을 뒤집으며 읽어 보던 텍스트가 가까이 비명을 만들고 총소리를 내고 울음과 외침을 만들며 내 신경 주위에서 움직거렸다. 쉬웠던 판단들도 이제는 무엇 하나 쉽지가 않다. 인종차별과 종교 갈등, 파업, 빈부격차, 이민자, 난민, 전염병 많은 것들이 놀라도록 내 어깨를 툭툭 치는데 나는 아무런 말도 못 정하고서 내일이면 까맣게 잊을 단어들만 외우고 외웠다. 지난해 겨울, 어학원의 껌껌한 계단을 올라 벽처럼 은신한 문을 밀고 들어갔을 때, 상형 문자 같던 레벨 테스트 시험지를 빈 페이지처럼 써내고 선생님과 어색한 웃음만 주고받았었지. 봉쥬흐는 알고 쎄 비자는 모르던 우리는 ABC 바로 뒷페이지에 앉아 축축한 겨울과, 기나긴 파업, 그리고 전염병, 이동제한, 시위, 테러 등 프랑스어가 아니래도 새로웠을 단어들을 반복으로 배우며 학교를 갔다가 학교를 못 갔다가 하며 1년을 보냈다.  말 하나 좀 하는 걸로 지금껏, 노래방에서처럼 가끔 스스로 취하고 가끔 주위에게 박수도 좀 받으며 살고 있었는데 사계절을 옹알이만 하며 발가벗겨진 채로 살아야 했다. 말이 없는 나는, 말 하나 제대로 못 하는 내가 얼마나 보잘것없는지 말재주에 가려진 나의 초라한 밑천들에 밤마다 이를 깨물었다. 그러다 보니 신경이 다 상해 파리에서 치과도 가봐야 했다.  무엇도 아닌 내 맘도 아닌 문장들을 말하고 쓰기 위해서 1년을 평생 한 것만큼 공부를 해야 하다니, 답답했고 억울했고 무엇보다 체력이 부쳤다. 간단한 문장이 목에 막혀 아이 같은 말만 뱉고 나면 붉어진 얼굴을 잠시 고개 숙여 감추고 있어야 했다. 그럼에도 혼자가 아니라서, 할 수 있다며 또 11월에는 대학 지원 필수 조건인 B2를 꼭 따야 한다며 늘어진 내 손을 잡아 끄는 장군님 덕에 그럭저럭 몇 권의 책들을 폐지로 내려 보냈고 드디어 지난주에는 속으로는 무리인데 자꾸 되뇌면서도 엠마의 옆에 앉아 B2 시험을 치러 잔다르크가 화형을 당한 루앙으로 갔다. Attestation을 들고 이동제한 직전에 기적처럼 발급받은 머그샷이 박힌 체류증도 손에 꼭 쥐고서 취소된 끝에 학생들의 요구에 재개된 시험을 치러 취소되어 더 비싸게 끊은 TER 기차를 타고 해 질 녘의 센 강 옆을 빨갛게 미끄러져 내려갔다. 위치만 보고 고른 방은 중앙등이 나가 캄캄했다. 두 번을 내려가서 부른 주인아저씨는 쿠스쿠스를 만들고 있었다며 급한 기색 하나 없이 여유롭게 걸어 올라오더니 또 내려가서 콩알만 한 전구만을 가지고 올라왔다. 키가 무척 큰 북아프리카 출신으로 보이는 아저씨가 팔을 빙빙 돌려 어깨를 풀더니 내가 잡아주는 의자 위에 올라 아슬하게 닿았다가 멀어지는 램프를 검지와 중지로 간신히 달래 갈아 끼웠다. 그러게 별 볼품없는 방이 천장은 왜 이렇게 높은 거지? 비현실적으로 물러나 있는 천장 아래에서 우리는 도무지 잠을 못 이뤘다. 알람도 필요 없이 일어나 앉은 아침, 찬물에 탄 커피를 페이퍼처럼 마시고 시험을 치러 갔다. 우산도 없는데 비까지 내렸고 코로나 때문에 대기실까지 닫아 놓아 우리는 건물 밖에서 추위에 떨어야 했다. 약 1시간의 말하기 시험을 문법을 만들어 가면서 겨우 뭐라도 뱉어 내고 와선 이동제한으로 닫힌 거리에서 갈 곳이 없어 루앙 역 벤치에 앉아 오후 시험을 기다렸다. 오후 시험은 읽기, 쓰기, 듣기 총 2시간 30분 간의 시험이었다. 편하게 보자 아직은 실력이 부족하니 내년에 또 보면 되지 했던 마음들이 시험을 보면서 이번에 꼭 붙어야 한다는 간절함으로 바뀌었다. 시험이 내용도 그렇지만 체력적으로도 너무 힘들어서 이거 두 번은 못 보겠다 싶었다. 마침내 볼펜을 내려놓고 엠마와 서로가 써낸 답이 잊어혀지지 전에 맞춰보자며 서둘러 시험장을 나와 골목을 한 바퀴 돌았다. 걸음마다 지난 1년이 채여 신기해하면서 축축한 바닥에 비치는 서로의 얼굴을 향해 걸었다. 멀리 루앙 대성당의 첨탑이 보였지만 이동제한 중이라 가 보지는 않았다. 합격하면 감사한 마음으로 루앙으로 다시 여행을 오자 하곤 백 년이 넘었다는 빵집에서 산 샌드위치를 공원에서 대충 씹어먹고 채한 속을 붙잡고 파리 행 기차에 올랐다. 그리고 어제 오후 3시쯤 메일로 B2 합격증을 받았다. 합격점수를 넉넉히 넘긴 엠마와 달리 나는 딱 0.5점 차로 간신히 합격에 턱걸이를 했다. 한두 시간 실감이 안 나서 이게 정말 합격 점수가 맞는지 합격증은 정말 이렇게 생긴 것이 맞는지 괜히 인터넷을 어슬렁거렸다. 한 문제를 더 틀렸다면 후 하며 아찔함도 굳이 몇 번씩 불러와 공연을 했다. 0.5점이 아니었다면 나는 내년에 무엇을 해야 했을까. 여전히 파리에 남아 어학원에서 진땀을 흘리고 있었을까... 아니면... 내년의 내가 무엇을 시작하게 될지 아직 잘 모르겠지만 희극의 장치 같은 이 0.5점을 몇 번이고 꺼내 얘기 하겐 되겠지. 그래도 시간은 밑 빠진 독에도 뭔가를 담아낸다. 단어가 모이면 문장을 꿈꾸고 문장이 모이면 꿈꾸는 사람을 불러낸다.  파리에 온 지 벌써 1년 하고 40일이 흘렀다. 마무리가 있는 한 해는 정말 오랜만이라고 슬며시 혼자 웃어도 본다. 글, 이미지 레오 2020.11.27
왕세자 저격 미수 사건과 방탄차
1990년 11월 12일, 도쿄의 궁성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즉위 퍼레이드식이 펼쳐졌다. 검정색 오픈카를 탄 일왕 부부는 길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퍼레이드에 사용됐던 오픈카는 그해 영국에서 4000만 엔에 구입한 롤스로이스 코니쉬 차종이었다. 3년 뒤인 1993년 6월 9일,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의 결혼 축하 퍼레이드에도 이 오픈카가 사용됐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내년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다. 가을에 역시 즉위 퍼레이드가 예정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롤스로이스 오픈카가 동원되지 않는다고 한다. 구입한지 28년 동안 단 2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이 차는 연식이 오래돼 현재 주행이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부는 국산차를 사용할 것이라는 방침을 굳혔다. 현재 외국 국빈 접대 등에 사용되는 왕실의 공식 의전차는 도요타 센추리 로얄이다. 즉위 퍼레이드에 사용되는 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갖는다. 일본 전국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일본 왕실이 퍼레이드용 오픈카로 도요타에 특별 주문을 할지, 아니면 다른 회사의 차종이 선택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의 수주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 1대: ‘영일 동맹’ 맺은 영국의 다임러 차종 선택 과거 일본 왕실에서 사용했던 차종들은 국제정세에 따라 변해왔다. 왕실의 전용 의전차를 ‘어료차’(御料車: 일본어로는 고료샤)라고 한다. 왕실 전용차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다이쇼(大正) 일왕 때부터다. 당시 국가 원수의 차를 구입하기 위해 유럽에 조사단이 파견됐다. 다임러, 벤츠, 피아트 등 회사를 방문했는데,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영국의 다임러(독일 다임러와는 별개)였다. 다임러가 선정된 것은 당시 일본과 영국의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은 1902년 영국과 ‘영일동맹’(동아시아 이권을 나눠 갖기 위해 체결한 조약)을 맺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1912년 다이쇼 일왕 즉위식엔 다임러 란도레(Landaulet)라는 차가 사용됐다. 당시 영국 왕실도 다임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같은 모델을 도입했다고 한다. 이 차가 일본 왕실의 ‘1대 의전차’다. █ 2대: 왕세자 암살 미수에서 롤스로이스 유리창 뚫려 ‘2대 의전차’가 도입된 건 1921년(다이쇼 10년)이다. 고급차의 대명사인 영국 롤스 로이스의 실버 고스트 차종 2대를 들여왔다. 그런데 이 롤스 로이스를 수입한 2년 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도라노몬’(虎ノ門) 사건이다. ... (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 ) <이재우 기자(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아열대인 오키나와에서 맥주를 만든 이야기...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극동군 총사령부)은 오키나와에 ‘류큐열도미국민정부’(琉球列島米国民政府)를 설치해 그곳을 통치했다. 1957년 어느 날, 미군의 민정관(民政官) 보나 F. 버거 준장은 오키나와의 상공회의소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앞으로 오키나와 산업의 기둥은 ‘시멘트’와 ‘맥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매체 ITmedia 비즈니스) 시멘트는 건물이나 도로 등을 건설하는 ‘하드’ 측면, 맥주는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주는 ‘소프트’ 측면을 의미했다. 당시 이 강연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한 경영인이 있었다. 구시켄 소세이(具志堅宗精:1896~1979)라는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된장, 간장 회사(具志堅味噌醤油)를 경영하고 있었다. 전후(戰後) 복구 차원의 새 사업을 구상중이던 그는 때마침 버거 준장의 말을 듣고 맥주사업을 실현에 옮겼다. 1957년 5월 구시켄을 필두로,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아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는 세웠지만 곧바로 맥주를 생산해 낼 수는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아열대의 오키나와에서 맥주 산업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오키나와의 수질도 문제였다. 오키나와는 산호초가 융기한 섬이어서 토양이 알칼리성으로, 경수(硬水)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이 경수가 맥주 제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구시켄은 오키나와 각지를 현지 조사한 끝에, 산이 있는 나고(名護) 지역에서 맑은 연수(軟水)를 찾아냈다. 그는 그곳에 공장을 세웠다. 2년에 걸친 수질 조사와 공장 건설을 통해 마침내 회사가 설립됐다. 회사 설립 발기 당시, 사명은 ‘오키나와 기린 맥주 주식회사’였다. 본토 맥주 대기업 기린과 기술 제휴를 도모했던 것. 하지만 협상이 무산되면서 기린이라는 이름을 떼고 ‘오키나와 맥주 주식회사’가 됐다. 기업 브랜드 네이밍의 경우, 창업자의 의지가 반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맥주 브랜드에는 뭔가 특별한 게 필요했다. 회사는 1957년 11월, 신문에 파격적으로 현상 공모 광고를 냈다. 1등 당선 상금은 83달러 40센트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액이었다. (이 돈의 가치를 알고 싶은가. 1958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였다.) 공모 결과, 현민들로부터 2500여 건이 접수됐고 그 중에서 별자리(별 3개) ‘오리온’이라는 이름이 선택됐다. 오리온 맥주 홈페이지에는 당시 선정 이유가 올라와 있다.  “첫째, 오리온은 남쪽 별이라는 점에서 (열도의 남쪽인) 오키나와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둘째, 별은 사람들의 희망과 동경을 상징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3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당시 오키나와를 통치하고 있던 미군...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67 ) <이재우 기자‧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칸 그랑프리 일본 여배우와 한국의 봉준호
<사진= 봉준호 감독의 '마더' 시나리오 콘티. 봉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만화같은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시나리오보드집 '마더이야기'(마음산책) 캡쳐> 1954년 칸 그랑프리 ‘지옥문’의 여배우 사망 #. 2주 전인 5월 12일, 일본에서 한 원로 여배우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쿄 마치코(京マチ子), 95세였다. 그녀는 1954년 5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 7회 칸국제영화제의 ‘히로인’이었다. 당시 58세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 감독이 ‘지옥문’(地獄門)이라는 작품으로 그랑프리(지금의 황금종려상)를 거머쥐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이가 바로 쿄 마치코다. 1950년대 초, 일본영화는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성과를 올리던 시기였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보다 앞선 1951년 ‘일본 영화의 천황’으로 불리던 구로사와 아키라(黒沢明:1910~1998) 감독이 ‘라쇼몽’(羅生門)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의 히로인 역시 쿄 마치코였다. 출연한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잇달아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그녀는 ‘그랑프리 여배우’(グランプリ女優)라고 별칭을 얻었다. 오사카쇼치쿠(松竹)소녀가극단의 댄서를 거쳐 영화사 다이에(大映)에 들어간 쿄 마치코는 당대에 ‘다이에 간판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큰 주목을 받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그녀는 장수 축복도 누렸다. 1924년생인 그녀는 일본왕의 치세기간으로 보면, 네 시대(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를 살다 갔다. 일본 언론들은 “쇼와, 헤이세이 시대에 대활약했던 배우가 레이와(令和) 원년에 천국으로 떠났다”며 그녀를 추모했다. <사진= 1954년 아시아 최초로 칸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 '지옥문'. 여배우는 5월 12일 사망한 쿄 마치코.> 여장 역 맡던 배우가 칸에선 감독으로 그랑프리 #. 쿄 마치코를 배우로 기용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1896~1982)는 ‘아시아 최초 칸영화제 그랑프리 감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감독이 닛카쓰 무코지마 스튜디오에서 여자 역을 연기하는 온나가타(女形: ‘오야마’라고도 부른다)로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온나가타 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프리랜서 감독으로 변신했다. 이후 독립프로덕션(衣笠映画聯盟)을 세운 그는 소설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도움을 받아 ‘미친 듯이 써 내려간 글’(狂つた一頁, 1926년)을 연출했다. 그런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이 있었다. 1928년 만든 ‘십자로’(十字路)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는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2년 동안 독일에 머물렀는데, 영화는 유럽 극장가에서 공개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명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賞)으로 이어졌다. 1953년 연출한 ‘지옥문’이 이듬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쥔 것이다. 아시아 감독 최초였다. 일본은 칸 황금종려상 다섯 차례 수상 #. 일본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작품 ‘지옥문’을 필두로 4차례 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하지만 두 번 째 수상까지는 기간이 길었다. 26년이 지난 1980년에야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카케무샤’로 영예를 안았다. 이어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1926~2006) 감독이 1983년(‘나라아먀 부시코’)과 1997년(‘우나기’) 2번이나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21년이 지난 2018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이라는 작품으로 재차 명성을 이었다. 베니스, 베를린과 달리 칸은 ‘비즈니스 시장’ #. 칸영화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1회가 개최됐다. 영화제로는 1932년부터 시작된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역사가 더 길다. 하지만 베니스영화제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하에서 운영되면서 초기에는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1951년 출발한 베를린영화제는 3대 영화제 중 역사가 가장 짧다 칸영화제가 베니스, 베를린영화제와 크게 다른 점은 ‘비즈니스 시장’이라는 데 있다. 영화제이면서 ‘영화 시장(박람회)’인 것. 세계 각국의 감독과 배우들은 물론, 바이어와 배급사들이 매년 5월 칸으로 몰려든다. 칸에서 수상을 하면 현지에서 곧바로 판매가 이뤄지는데, 좋은 상을 받을수록 그만큼 판매가가 더 높아진다. 이번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예외는 아니다. 평단의 최고 평점에 최고상까지 거머쥐면서 전세계 192개국에 선판매 됐다. 종전의 기록(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176개국)을 넘어선 역대 한국영화 최다판매다. <사진= 봉준호 감독의 콘티> 영화 시작 26년 만에 칸을 사로잡았다 #. 1969년생인 봉준호 감독은 나이 쉰 살에 마침내 칸을 접수했다. 대학시절 단편영화 ‘백색인’을 만든 게 1993년의 일이다.(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 영화를 만든 지 26년 만에 칸에서 인생 최고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장편영화로는 데뷔작 ‘플란더스의개’(2000년)를 필두로 이번 ‘기생충’이 7번 째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에서 꾸준하게 수상을 했지만 봉준호 감독에게 칸의 문턱은 높았다. 그가 칸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건 2006년. ‘괴물’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처음으로 초청을 받았다. 3년 뒤인 2009년엔 ‘마더’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다시 초청을 받았다. 봉 감독은 ‘마더’ 이후 10년 만에 칸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제치고 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봉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놉시스의 모든 신을 머리에 먼저 그려놓고, 마치 만화영화 그리듯 콘티를 만든다. 영화 ‘마더’의 스토리보드와 시나리오 집 ‘마더이야기’(마음산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독자들도 봉 감독의 콘티 두 장면을 감상해 보기 바란다.(사진) 봉 감독은 영화 만드는 의미에 대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도와 결과, 통제와 반항, 우연과 필연, 계산과 즉흥. 그 모든 대립항들이 오묘히 뒤섞여버린 수많은 순간들. 그것이 영화 만들기의 은밀한 흥분과 즐거움이 아닐까.> 한국영화 탄생 100년을 맞는 해다. 봉준호 감독의 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 또 축하한다. 아울러 2주 전 세상을 떠난 일본 여배우 쿄 마치코를 추모한다. 쿄 마치쿄와 봉준호, 칸이 두고 두고 기억할 재인(才人)들이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