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jun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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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이야기 40

보후밀 흐라발의 [너무 시끄러운 고독]

"삼십오 년째 책과 폐지를 압축하느라 활자에 찌든 나는 그동안 내 손으로 압축한 책들과 흡사한 모습이 되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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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작의 탄생, '조커'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비도 오는 김에 친구랑 감자탕을 먹었어요. 영화관이 앞이길래 영화도 보러 갔어요.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갔던 하루였네요. 근데, 결과는 대만족이었어요. 10월달 화제의 영화, '조커'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사실 우리는 히스레저의 조커가 더 익숙합니다. 자세한 스토리는 모르지만 범접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크나이트의 배트맨과 비슷한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죠. 처음에 조커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과연 이전의 그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죠. 그런데 직접 보고 온 지금, 저는 2명의 조커를 섬기게 됐습니다. 그도 사람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커는 무자비하고 냉소적이고 살인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과거는 어떠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이 작품은 조커의 탄생비화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탄생의 배경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던지는 야유, 인간에게 던지는 물음과 같은 어둡고 깊은 내면의 주제를 다루기도 합니다. 결국 조커라는 캐릭터도 원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괴물이 된 조커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영화는 설득합니다. 보통은 설득이 안 되고 허무맹랑하나 이번엔 2시간 내내 그의 힘에 매료됐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라 쓰고 고담으로 읽는다 배트맨과 조커의 화려한 싸움을 혹시라도 생각한다면 그런 기대는 접으시길 바랍니다. 액션은 얼마 나오지 않고 폭력보다 조커의 내면에 집중합니다. 허나 애드 아스트라보다 더 깊고 우울하며 관객이 관찰자가 아닌 당사자가 되는 작품입니다. 조커의 배경은 평범한 인간이었을지 모르고 순수한 꿈을 지닌 청년이었을지 모르며 자본주의 사회 속 짓밟힌 아웃사이더일지 모릅니다. 즉, 시작은 자본주의 속 우리들 중 누군가입니다. 고담 시티는 철저하게 잇속으로 더럽혀진 현대사회를 압축적으로 축소한 세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폭동을, 누군가는 선동을 시작합니다. 첫 장면부터 중요하다 조커는 장면 하나하나, 사건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관객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세세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첫 장면부터 자신의 얼굴을 칠하는 '해피'는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희한한 장면을 표현합니다. 이는 조커가 아닌 슬프지만 웃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해피'에 가깝습니다. 그러다 점점 사건이 심각해지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해피가 '조커'로 각성하게 되죠. 처음은 순수하고 겁쟁이었습니다. 다음은 충동적이고 분노에 차 있었죠. 또 다음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심판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동적이고 무시받던 외톨이가 결정을 내리는 능동적인 처형자가 되는 그림을 2시간에 걸쳐 감상하면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한 때는 인간이었던 '해피'가 어떻게 '조커'로 변화하게 되는지, 어느 순간 '조커'로 됐는지 구분지으면 더 흥미롭습니다. 모든 걸 잃어버렸음에도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있었다면 해피는 조커가 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한 구석도 믿지 못하게 됐을 때, 잃을 게 없어졌을 때 마침내 괴물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한 인정을 바랬고 평범한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개인밖에 모르는 인간들 틈에서 순수한 인간은 괴물의 탈을 쓰고 변화하게 됩니다. 호아킨의 연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명품입니다. 조커 그 자체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름과 전율의 연속이었습니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로 긴박한 장면이 많지 않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빠르게 시간을 녹여냈습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조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깊이 있는 조커입니다. 히스레저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원했던 조커의 모습, 기다렸던 괴물의 탄생, 진정한 안티 히어로의 출현이 이 작품에서 나타났습니다. 스토리도 좋고 연출도 좋고 설득력도 있고 모든 게 좋지만 단순히 호아킨 피닉스 연기 하나만으로 영화를 보는 이유가 충분할 정도입니다. 명대사 천국 조커하면 공감가는 명대사로 유명한데요. 이번 작품에서도 인상적인 명대사를 많이 남겼습니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 같은 코미디였어 당신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처럼, 웃기고 안 웃기고도 판단할 수 있는 거야? 코미디는 주관적이야 방금 웃긴 조크가 하나 생각났거든. 이해 못할 거야 조커의 탄생 코미디와 비극, 웃음과 슬픔, 부자와 빈민, 모든 건 반대되지만 동시에 주관적인 것. 하지만 부자와 빈민의 역전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조커는 모든 인간이 같은 상태를 경험하길 원합니다. 돈을 뺏어서 빈민에게 나눠주는 의적이 아니라 돈을 태워서 없애버리는 공정한 심판자입니다. 그리고 부자나 빈민할 거 없이 잘못하거나 예의가 없으면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커가 생각한 예의는 상대를 멋대로 판단거나 무시하는 행동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고 룰이 있는 빌런입니다. 무섭지만 싫지 않고, 난폭하나 설득력이 있는 조커를 우리가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우리도 조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호아킨의 조커, 꼭 영화관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쿠키영상은 따로 없습니다. 청불이라 대박까지는 힘들 수 있습니다만 300만~400만 정도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상 영화 '조커'의 솔직한 리뷰였습니다.
장 폴 사르트르 <구토>
<구토> / 장 폴 사르트르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번 리뷰에서는 한 번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다. 이 리뷰는 주관적인 내 해석에 기반한 것이다. 나는 사르트르의 문학이나 철학적 사상에 대해 체계적으로 배우거나 교육받은 적이 없으며 지금 쓰는 글도 내가 <구토>를 읽고 깨달은 점, 스스로(즉 주관적으로) 해석한 내용들을 기반으로 작성되었다. 물론 몇몇 해설이나 평론을 찾아 읽으며 전문가의 글을 참고하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구토>의 텍스트와 관련 해설, 평론들을 내 관점에서 받아들이고 해석해 2차 가공을 거쳐 글로 써내는 만큼 절대적인 정답이 아닐뿐더러 어느 정도 공인되고 인정된 해석이 아닐 수도 있음을 미리 밝혀두는 바이다. 그럼에도 내가 이 글을 쓰는 이유는 <구토>가 사르트르의 철학을 담고 있다고 하더라도 어디까지나 독자의 주관적 해석을 허용하는 장르인 소설이라는 점, 내가 받아들이고 이해한 내용을 토대로 <구토>의 내용을 조금 더 알기 쉽게(찾아 읽은 해설과 평론들이 도대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소개하고픈 욕구 때문이라고 할 수 있겠다. 지금도 많은 부분들에 대한 이해가 불명확하긴 하지만 적어도 이해한 범위 내에서 최대한 알기 쉽게 <구토>를 풀어내는 것이 이번 리뷰의 목표이다. 1. <구토>의 줄거리 <구토>는 주인공, 앙트완 로캉탱의 일기이다. 그는 프랑스 부빌시에 머물며 역사 속 인물인 로르봉 후작의 전기를 쓰고 있다. 로캉탱이 일기를 쓰게 된 이유는 바로 자신에게 일어난 어떤 사건, 어떤 변화를 파악하고 규명하기 위해서이다. '변화의 범위와 성질을 정확하게 결정지을 필요가 있다'(p.11)라고 로캉탱은 일기 작성 직전에 쓰인 날짜 없는 쪽지에서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그 변화는 무엇일까? 그것이 바로 소설의 제목이기도 한 '구토'이다. 로캉탱은 어느 날 바닷가에서 물수제비를 뜨고 있던 아이들을 보고 자신도 물수제비를 뜨기 위해 매끈한 조약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가 어떤 불쾌한 감정을 느끼고 돌을 바닥에 떨어뜨린 채 그 자리를 떠난다. 그러한 불쾌한 느낌은 이후 계속 반복된다. 카페에서,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줍다가, 자신의 손을 보면서,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면서, 독서광과 마주 앉아 저녁을 먹으며 대화를 하면서. 로캉탱은 수없이 반복되는 그 불쾌한 느낌을 '구토'라고 말하면서 왜 '구토'가 나타나는지, '구토'는 어떤 변화에 의해서 촉발되는지, 이 갑작스럽게 나타나기 시작한 '구토'의 정체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일기를 작성하기 시작한 것이다.('구토'에 대해서는 뒤에서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자.) 로캉탱이 지속적인 '구토'에 대한 사유와 관찰을 통해 '구토'가 무엇인지 깨닫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로르봉 후작의 전기 작성을 그만두고 철저히 자신의 통제로 만들어진 필연성의 산물,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면서 이야기가 끝난다. 2. '구토'란 무엇이며 왜 나타나는가? 로캉탱은 '구토'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고 주변을 관찰하며 분석하지만 '구토'가 무엇인지 파악하기는 쉽지 않다. 얼핏 보면 '구토'는 무작위 하고 일관성 없이 나타나는 듯하다. 거울 속 자신의 얼굴을 보다가 나타나기도 하고, 카페에서 아무런 사건도 없이 갑자기 나타나기도 하며, 아돌프의 자줏빛 멜빵을 보며 걷잡을 수 없이 커지기도 하고, 땅에 떨어진 종이쪽지를 주우려다 나타나기도 한다. 그렇다면 이 '구토'라는 반응을 일으키는 원인은 무엇일까? 일기를 쓴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로캉탱은 ''구토'는 나의 내부에 있지 않다. 나는 '거기에서', 벽 위나 멜빵에서, 그리고 온갖 내 주위에서 그 '구토'를 느낀다.'(p.44)고 이야기하지만 사실 '구토'는 로캉탱의 주위,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 로캉탱 내부의 변화에서 야기된 것이다. 로캉탱이 주위를 인식하는 감각의 변화, 주변의 온갖 것들이 '우연히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순간적으로 확연히 느끼게 되면서 '구토'가 나타난다. 즉, 로캉탱 자신이 외부를 인식하는 과정의 변화가 '구토'라는 반응으로 귀결된 것이다. 여기서 의문이 생긴다. 주변의 사물, 혹은 생명체들이 존재하고 있으며 그것이 우연하다는 사실이 왜 '구토'라는 불쾌하고 직접적인 반응으로 나타나는 것일까?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자. 일반적으로 인간은 주변의 모든 것들을 '언어를 통해 규정'하고 '속성과 본질을 파악해 범주를 나누며' 그것들에 주관적인 '필연성과 의미'를 부여한다. 예를 들어 '의자'라는 단어를 보자. '의자'는 '사람이 걸터앉는 데 쓰는 기구. 보통 뒤에 등받이가 있고 종류가 다양하다.'라고 정의된 어떤 사물이다. 즉, 인간은 인간이 앉기 위해 만들어진 어떤 물건을 '의자'라는 단어이자 기호로 지칭하고 서로 그에 대한 범주와 의미를 약속한다. 인간에게 '의자'라는 사물은 '의자'라는 언어로 규정되고, 인간이 앉을 수 있는 사물이라는 속성과 본질을 지니고 있으며 이를 통해 특정한 사물을 '의자'로 분류한다. 또한 '의자'는 애초에 만들어질 때부터 인간이 앉기 위한 목적으로 제작되므로 사람이 앉기 위한 사물이라는 의도, 필연성, 본질을 지니고 있다. 하지만 로캉탱은 그러한 일반적인 인식과 전혀 다른 방식으로 주변에 대해 인식함으로써 '구토'를 겪게 된다. 로캉탱의 주위에 대한 인식, 즉 '구토'를 일으키는 원인을 파악해보자. 앞에서 예로 들었던 '의자'를 가지고 설명해보자면 지금 이 문장 안에 나는 '의자'라는 단어를 썼고 이 문장을 읽는 사람들은 각각 머릿속으로 '의자'를 떠올릴 것이다. 그 수많은 '의자'들이 전부 정확히 같고 동일한 '의자'일까? 그렇지 않다고 확신할 수 있다. 누군가는 나무로 된 의자를, 누군가는 등받이가 없는 의자를, 누군가는 지금 앉아 있는 푹신한 소파를 떠올릴 것이다. 즉, '의자'라는 단어는 사실 정확한 단어가 아니다. '의자'라는 단어를 통해 정확히 자신이 생각하는 어떤 특정한 사물을 표현하거나 전달할 수 없기 때문이다. 여기서 한 발 더 나아가면 '의자'라는 단어가 지칭하는 사물의 경계는 정확히 무엇인지, 어디까지가 '의자'라고 불릴 수 있는지 의문점이 생긴다. 어디까지가 '의자'일까? 다리가 네 개고 사람이 앉을 수 있는 물체? 사람이 뒤집어진 박스 위에 앉아있다면 그것을 '의자'라고 부를 수 있을까? 등받이의 유무와 '의자'라고 지칭되는 사물의 범주는 관계가 있는가? 만약 다리가 네 개가 아니고 세 개라면? 열 개나 혹은 한 개뿐이라면? 이렇게 질문을 던질수록 우리는 '의자'라는 단어가 정확한 경계와 범주를 가지고 어떤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라 그저 인간이 앉을 수 있는 사물이라는 두루뭉술한 정의를 가진 단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게다가 그 정의마저도 언제든지 깨질 수 있다. 여태까지 아무도 앉지 않아서 '의자'라고 불리지 않았던 어떤 것에 누군가 앉기만 한다면 그 사물은 이전부터 '의자'였음에도 아무도 그 사실을 알지 못했을뿐더러, 그때부터 '의자'라고 인식되기 때문이다. 즉, '의자'라는 단어는 절대적이고 정확하게 특정한 사물을 지칭하는 단어가 아니며 인간의 생각, 관념 속에서만 의미를 가지는, 현실에는 전혀 적용할 수 없는 의미 없는 기호일 뿐이다. 심지어 지금 상태에서 '의자'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인간들이 전부 증발해버린다고 해도 여전히 '의자'라고 불렸던 사물은 그 자리에 그대로 남아있을 것이다. 인간들이 '의자'라고 부르는 것과 상관없이, '의자'라는 기호의 존재 유무와 상관없이 '의자'라고 불리는 사물은 존재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로캉탱은 '내가 그 위에 앉아 있는 물건, 내가 그 위에 손을 얹은 물건의 이름은 의자이다. 사람들은 우리가 거기에 앉을 수 있도록 서둘러서 그것을 만들었다. 그들은 가죽이나 용수철, 천을 가져다가 의자를 만든다는 관념을 품고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일이 완성되었을 때, 그들이 만든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 그것은 의자가 아니다.'(p.234) 라거나 '사물들은 명명된 그들의 이름으로부터 해방되었다. ...... 나는 이름붙일 수 없는 '사물들'의 한복판에 있다.'(p.235)라고 말한다. 게다가 우리는 '의자'라고 불리는 사물을 정확히, 완벽히 이해하는 것이 불가능하다. 지금 당신의 앞에 있는(없다면 당신이 매일 앉는 어떤 '의자'를 상상해보라.) '의자'를 한 번 완벽히 이해해보자. 다리가 몇 개인지, 등받이가 있는지, 재질은 무엇인지, 바퀴는 있는지 없는지. 완전히 이해했다고 생각한다면 '의자'라는 사물에 대해 정말로 더 파악할 것이 없는지 질문해보라. 분명 놓친 것이 있다. 언제 만들어졌는지, 누가 만들었는지, 어느 정도의 무게까지 견딜 수 있는지, 단면은 어떻게 생겼는지 등등. 사실 '의자'라는 사물을 완전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언제나 우리가 알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의자'를 만들어 낸 사람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의자'가 인간의 앉음이라는 목적을 가지고 만들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왜 '인간의 앉음'이라는 목적을 수행하는 사물로써 정확히 저러한 모양과 재질, 무게, 길이의 사물이 만들어졌는지 알 수 없다. 의자를 만든 사람조차도 왜 등받이 길이를 50cm로 했는지, 51cm나 49cm면 왜 안 되는 건지 설명할 수 없다. 인간이 명확한 목적과 의도를 가지고 만든 '의자'조차도 완전한 필연성 속에 놓이기에는 그 외의 설명되지 않는 '여분'이 너무나 많다. '의자'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필연성을 지닐 뿐, 현실에 사물로서 만들어지는 순간 필연성은 사라져 버린다. 즉, '의자'를 포함한 주위의 모든 것들은 사실 어떤 속성이나 본질, 필연성을 지니고 있지 않은 여분의 존재, 완전한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들이다. 그것들은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들을 지칭하는 언어며 기호, 또는 인간이 생각하는 그 존재들의 의의, 사용법, 특징 등은 우리가, 그리고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현실 안에서 절대적인 어떤 의미를 전혀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러한 관점에서 우리가 어떤 사물을 '의자'라고 부르는 것은 제대로 이해하지조차 못하는 어떤 존재를 기만적으로, 오만한 방식으로 대하고 있는 것이다. 로캉탱은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앞에서 말한 사실들을, 자신이 '구토'를 일으키는 이유를 인식한다. '3,4일 전만 해도 나는 '존재한다'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를 결코 예감하지 못했다.'(p.237)라고 말한 그는 '나는 '속성'이라는 것을 생각하고 있었다. 나는 바다가 초록색 물건의 계급에 속해 있다고, 또는 초록색이 바다의 성질의 일부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p.238)라고 생각하던 사람이었다. '초록색'이라는 단어가 가지는 어떤 속성이 존재하고 그 속성으로 '바다'의 일부를 설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던 로캉탱이었지만 공원에서 마로니에 뿌리의 특징들을 파악하고 설명해보려고 하다 실패한다. '껍질이 그래도 검은 것을 나는 보았다. 검다니? 나는 이 말이 부풀어올라서, 엄청난 속도로 그 의미가 공허해지는 것을 느꼈다. 검다니? 뿌리는 검지 '않았다'. 그 나무조각 위에 있었던 것은 조금도 검지 않았다. 그것은...... 다른 것이었다. 원과 마찬가지로 검은 빛깔도 존재하지 않았다.'(p.243)라는 말에서 보듯이 마로니에 뿌리껍질이 검다고 말하려던 로캉탱은 사실 진정한 '검은 빛깔'이라는 것은 인간의 관념 속에서만 존재할 뿐 현실에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는다. 마치 완전히 관념적인 단어, 존재의 세계가 아닌 설명이나 이치의 세계에 존재하는 '원'과 같은 단어처럼 말이다. '원은 부조리하지 않다. 왜냐하면 원은 직선의 일부분이 그 끝에서 회전한 것이라는 정의에 의해서 충분히 설명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원은 또한 존재하지도 않는다.'(p242)라는 로캉탱의 말처럼 모든 언어와 단어는 인간의 관념 속에서 필연성을 지니며 이치에 맞게 설명되지만, 우리가 존재하는 현실 세계로 옮겨오는 순간 그냥 존재하고 있는, 이해와 표현이 불가능한 부조리한 사물들이 된다. '역부 회관의, 그날 밤의 아돌프의 멜빵. 그것은 바이올렛빛이 '아니었다''(p.243)나 '맥주잔의 그 애매한 투명.'(p.244)처럼 로캉탱은 주위에 존재하는 어떤 것도 자신이 언어로 혹은 다른 무언가로 정확하게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로캉탱은 그러한 주위의 사물들의 부조리와 우연성을 앞에서 말했듯 '여분'이라는 말로 표현한다. '우리는 너 나 할 것 없이 누구나 거기에 있을 이유가 조금도 없다. 당황하고 어딘지 불안한 각 존재는 다른 존재와의 관계에서 여분이라는 것을 느끼는 것이었다. '여분', 이것이야말로 저 나무, 저 철책, 저 조약돌들 사이에서 내가 설정할 수 있는 유일한 관계였다.'(p.240)라는 로캉탱의 말을 보자. 여기서 '여분'은 필연적이지 않은 어떤 부분을 말한다. '의자'는 인간이 앉기 위해 만들어졌지만 꼭 다리가 4개에 등받이가 있을 필요는 없다. 우리가 상상도 못 한 모양의 사물이더라도 앉을 수만 있다면 그것은 '의자'다. '의자'를 만든 사람이 전혀 누군가 앉을 것을 고려하지 않았더라도, 혹은 앉는다는 행위와 전혀 관련 없는 어떤 부분이 존재하더라도 그것은 '의자'가 될 수 있다. 심지어 우리가 '의자'라고 부르는 모든 사물에는 앉는다는 행위와 관련 없는 여분이 반드시 존재한다. 앞에서 예를 들었듯이 등받이의 길이가 50cm라고 해보자. 등받이의 길이가 49cm이더라도, 40cm이더라도 앉는 데는 전혀 문제가 없다. '의자'를 만든 사람의 목적과 의도에 포함되지 않은 어떤 '여분'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등받이의 길이가 될 수도, 의자의 색이 될 수도, 의자 다리의 개수가 될 수도, 그 외의 어떤 것도 될 수 있다. 인간이 확실한 목적을 가지고 만든 사물조차도 수많은 여분이 존재하는데 나무는, 돌은, 잔디는 어떻겠는가? 그것들은 완전한 '여분'의 존재, 완전한 우연 속에서 태어나 그 자리에 존재할 뿐인 존재인 것이다. '약간 왼편 쪽으로 나의 정면에 서 있는 마로니에, 그것은 '여분의 것'이었다. 라 벨레다도 '여분의 것'......'(p.240)처럼 모든 것은 '여분'의 존재다. 로캉탱의 인식은 주위의 사물에서 자신, 혹은 인간의 존재로까지 확장된다. '그리고 '나'도-힘 없고, 피곤하고, 추잡하고, 음식을 삭이며, 우울한 생각을 되씹고 있는- '나 역시 여분의 존재였다.''(p240)나 '그 여분의 존재를 최소한 하나라도 말소시키기 위해서 자살이나 할까 막연히 생각해보았다. 그러나 나의 죽음 자체가 여분이었을 것이다. 나의 시체도, 그 미소하는 정원 깊숙이, 이 조약돌 위, 풀 사이에 흐를 피도 여분이다. 그리고 썩은 육체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땅속에서도 여분의 것이며, 또 깨끗이 씻기고, 껍질이 벗겨지고, 이빨처럼 깨끗하고 청결한 나의 뼈도 여분의 것이었으리라. 나는 영원히 여분의 존재였다.'(p.240)처럼 로캉탱은 자신이나 인간조차도 어떤 본질이나 의미, 속성이 없는 '여분'의 존재이며 우연히 태어났고 우연히 살아가고 있는 우연성 속의 존재임을 깨닫는다. ''부조리'라는 말이 지금 나의 펜 아래에서 태어난다.'(p.241)라는 문장에서 '부조리'는 '의미를 전혀 찾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한 관점에서 로캉탱에게 이 세상의 모든 것, 나무, 건물, 돌, 바다, 동물, 인간, 심지어 자신이나 자신의 삶에 이르기까지 모든 것은 우연히 의미 없이 생겨났고 '부조리'하다. 그러므로 인간의 삶, 로캉탱의 삶에는 어떤 의미도 없고 앞에는 무한한 자유가 놓여 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치즈 나이프를 독서광의 눈에 꽂는 일.'(p.230)과 같은 로캉탱의 말처럼 말이다.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이야기한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이 어떤 의미도 없는 '부조리'한 것이므로 인간은 무슨 행동이든 할 수 있는 자유를 가지고 있으나 그것은 엄청난 형벌이나 다름없다. 어떤 이유도, 의미도 없이 무한히 자유로운 선택지가 주어진 상황에서 인간은 어떤 선택을 반드시 내려야만 하고 그 선택에 대한 책임은 오롯이 인간의 몫이다. 앞으로의 선택에 대한 어떤 근거도 존재하지 않는 상황에서 주어진 자유는 당연하게도 선택의 결과와 책임에 대한 엄청난 불안감을 야기한다. 끝없이 펼쳐진 흰 무(無)의 공간에 나침반도 지도도 아무것도 없이 뚝 떨어져 있다는 사실을 갑자기 깨달은 것과 다름없다. 그렇기에 사르트르는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라고 말한 것이다. 지금까지 쓴 내용을 정리해보자. 로캉탱이 구토를 일으키는 이유를 정리해보자면 첫째로 로캉탱의 주변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들 수 있다. '그것들이 쫓기는 토끼처럼 우리의 코밑을 빨리 지나갔을 때, 그리고 거기에 너무 주의를 하지 않았을 때, 우리는 그것을 아주 간단하고 안심할 수 있는 것이라고 믿을 수 있었고 세상에는 진짜 청색, 진짜 분홍색, 진짜 편도나 오랑캐꽃 냄새가 있다고 믿을 수가 있었다.'(p.244)는 로캉탱의 말처럼 우리가 주변의 사물들을 슥 지나가듯 보았을 때는 그 사물의 '여분', 우연성, 적나라한 이해 불가의 존재성을 인식할 수 없다. 하지만 로캉탱은 어느 순간(마로니에 뿌리를 보며) 자신이 이해하고 있고 말로써 표현하고 있다고 생각했던 모든 존재들이 사실 그렇지 않음을 깨닫는다. '그러나 이런 것들을 잠시나마 붙잡아 놓으면, 이 평안과 안전의 느낌은 심각한 불안에 자리를 양보한다. 빛깔, 맛, 냄새 들은 절대로 진짜가 아니었다.'(p.244)를 느끼는 순간이 로캉탱에게 도달한 것이다. 언어는 그저 인간이 만든 텅 빈 기호일 뿐 어떤 실제적 의미도 가지지 않으며 그러므로 당연하게도 모든 존재는 언어로 표현되어 왔던 속성과 본질이 없다는 것, 그리고 인간이 인식하는 존재에는 늘 '여분'이 존재하며 그것은 모든 존재가 우연성 속에 놓여 있음을 의미한다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이는 로캉탱이 당연히 이해하고 알고 있다고 여겨왔던 모든 것들이 사실 전혀 그렇지 않음을, 의미나 본질, 속성 따위는 전혀 가지지 않은 채 존재할 뿐인 도무지 이해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들에 자신이 둘러싸여 있음을 알게 되는 순간이다. 인간은 언제나 자신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 인식의 범주를 넘어선 것에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기 마련이다. 그렇게 만들어진 공포와 불안감, 두려움이 '구토'라는 증상으로 나타난 것이다. 둘째는 인간, 그리고 로캉탱 자신의 존재가 가진 우연성과 자유에 대한 깨달음이다. 로캉탱은 모든 사물이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에 어떠한 이유나 근거도 없음을 즉, 모든 사물이 우연히 존재하고 있음을 알게 된다. 곧 로캉탱은 인간도 사물과 마찬가지임을 깨닫는다. 인간도 그저 존재할 뿐이며 그 존재에 어떠한 이유도 의미도 근거도 없다. 로캉탱 자신이 왜 이렇게 생겼고, 왜 머리가 붉은색이며, 왜 로르봉 후작의 전기를 써야 되는지 그에 대한 어떠한 합리적인 설명도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그 순간 로캉탱은 형벌과도 같은 무한한 자유 속에 놓인다. 우연히 존재할 뿐인 로캉탱은 완전히 우연한 존재이기에 무엇이든 할 수 있다.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 치즈 나이프를 독서광의 눈에 꽂는 일.'(p.230)과 같은 짓도 할 수 있는 것이다. 사회 질서상으로 안된다고 생각했던, 도덕적으로 하지 말아야 한다고 스스로 규제했던 일들은 사실 언제든지 실행할 수 있는 일이었다. 못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다. 그러한 규제는 스스로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음을 외면하는 것이며, 자유에 대한 책임을 스스로가 지는 것이 두려워 사회 질서와 그것을 만든 타인들에게 떠넘기는 것과 다를 바 없음을 로캉탱은 알게 된다. 즉, 로캉탱 자신의 삶과 존재에 어떠한 이유도 없음을, 그러므로 어떠한 근거도 이유도 없이 무한한 선택지에서 영원히 형벌과도 같은 자유를 누리며 선택을 해나가야 함을 깨달은 로캉탱이 자신에게 주어진 한없이 자유로운 자유에 대해 느끼는 불안감이 '구토'로 나타나게 된다. 3. '구토'를 극복하는 방법은? '구토'는 로캉탱에게만 나타나며 다른 이들에게는 나타나지 않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다른 이들은 모두 깨달음을 얻어 '구토'를 극복한 것일까? 이번에는 다른 이들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그리고 로캉탱이 '구토'의 극복 방안으로 제시한 내용을 알아보자. 3.1. 부빌 시의 시민들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구토>에 보면 부빌 시의 시민들이 일요일에 교회를 방문하며 거리에 온통 모자의 행렬이 이어지는 장면이 나온다. 그 광경은 '머리만이 그 두 줄에서 완전히 튀어나와 있기 때문에 모자들, 모자의 바다가 보인다.'(p.87), '행렬의 진행은 멈추지 않는다. 겨우 약간 사이가 벌어졌을 뿐이다. 서로 악수를 하고 있는 여섯 사람들 앞을 우리는 걸어간다.'(p.87), '열 명쯤 되는 사람들이 서로 부딪치고는 소용돌이를 이루면서 인사를 한다. 모자 춤은 내가 자세히 설명할 수 없을 만큼 재빨리 시작했다.'(p.89)와 같이 묘사된다. 부빌 시의 시민들은 일요일 미사를 보기 위해 붐비는 대로를 휩쓸려 다니듯 걷고, 아는 이를 만나면 일제히 모자를 벗어 손에 들고 모자 춤을 추며, 모두가 비슷비슷한 인사를 나누고 비슷비슷한 복장으로 대로를 걷는다. 즉, 자신의 행동을 스스로 고민해 선택하지 않고 다른 이들이나 사회가 정한 규칙을 맹목적으로 따르는 것이다. 이들은 다른 이들 혹은 사회의 규칙이나 질서에 자신의 자유에 대한 선택과 그 책임을 내맡겨 버렸다고 볼 수 있다. 자신들에게 무한한 자유가 있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이나 임무가 있는 듯이 행동하는 부빌 시의 시민들은 주위의 모든 것, 심지어 자기 자신조차도 우연성 속에 놓인 무한한 자유가 주어진 존재임을 깨닫지 못한다. 그렇기에 그들은 다른 모든 이들과 같이 행동하며 사회 질서를 철저히 지키고 그것이 자신의 존재 이유인 것처럼, 자신의 직업이, 위치가, 성별이, 지위가 자기 자신의 본질인 것처럼 행동한다. 사르트르는 이를 일컬어 '자기기만'이라고 명명했다. '이미 지나간 일요일은 씁쓸한 맛을 그들의 입 안에 남겼고, 그들의 생각은 이미 월요일에 가 있다. 그러나 나에게는 월요일도 없고 일요일도 없다. 있다는 것이라곤 무질서하게 밀려오는 나날과 그리고 번갯불같이 돌연 생겨나는 마음속의 움직임이다.'(p.106)라는 문장이 로캉탱과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의 차이를 확연히 보여준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일요일과 월요일이라는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가상의 요일과 그것이 가지는 사회적 질서에 자신을 맡기고 아무런 의심도 없이 평소와 같은 일요일을 보내고 월요일을 준비한다. 그러나 로캉탱에게는 오늘도 내일도 그저 밀려오는 새로운 나날일 뿐 일요일이나 월요일이라는 가상의 관념으로 정의되는 날이 아니며 7일 전의 일요일이나 월요일과 같은 날이 전혀 아니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이 추구하는 안정된 삶, 일주일 단위로 같은 나날들이 이어지는 삶, 늘 새로운 날임을 외면하며 사회에서 만든 가상의 가치에 안주해버린 삶이 로캉탱이 깨달은 무한한 자유 속 인간의 삶, 존재함을 깨달은 인간의 삶과 얼마나 동떨어져 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심지어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자유를 책임질 노력도 하지 않고, 스스로의 생각으로 판단을 하는 일조차 없이 사회에서 준 직책, 지위, 역할에 몰두한 자들을 초상화로 남겨 기념하기까지 한다. 자신의 자유를 방임한 자, 그에 대한 책임을 지지 않고 외면해 버린 자, 끊임없이 자신을 기만하며 자신의 본질이, 의무가, 사명이 존재한다고 여기던 자들의 그림을 보고 로캉탱은 말한다.'작은 그림의 성당 속에 한없이 고운 백합이여 안녕, 우리의 자존심이여, 우리의 존재 이유여 안녕, '더러운 자식들'이여 안녕.'(p.178) 인간은 자유를 선고받았다. 그 무한한 자유 속에서 스스로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뇌하며 올바른 선택을 찾아내고, 그 올바른 선택에서 자신만의 가치를 찾아내는 것이 올바른 인간의 자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 앞에 놓인 무한한 자유를 외면한다.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사실이 주는 역설적인 두려움과 불안감 그리고 자신의 선택이 가져올 막중한 책임이 너무나 버겁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들은 자신에게 자유가 없는 듯이 행동한다. 사회 질서로 정해진 월요일이기 때문에 출근하며, 일요일이기 때문에 교회 미사에 참석하고, 사회가 정한 방식대로, 다른 사람들이 행동하는 대로 자신의 자유를 외면한 채 거짓 근거를 만들어 행동한다. 그러한 행동들이 자신의 임무나 사명, 의무인 것처럼. 그러나 그 속을 끈질기게 파고들어본다면 그 행동들에 스스로 납득할만한 근거는 없다. 사회가 정한 규칙이 무조건 맞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빌 시의 부르주아들은 자신의 규칙적이고 정해진, 평안한 삶에 안주할 뿐 그 삶의 방식이 올바른 선택인지,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자신의 자유 속에서 따를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인지 진지하게 생각하고 판단하지 않는다. 맹목적으로 따를 뿐이다. 자신에게 선고된 무한한 자유에서 눈을 돌린 부빌 시의 시민들은 당연히 '구토'를 겪지 않는다. '구토'는 존재의 '여분'에서 깨닫는 세상 모든 것들의 우연성, 그리고 우연히 만들어져 존재하는 존재들이 가지는 무한한 자유를 직시하고 그것의 두려움을 체감할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 때문이다. 3.2. 독서광이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독서광은 도서관에서 알파벳 순으로 모든 책을 읽어나간다. 그는 책 속에 진리가 있다고 여기며 그것을 통해 자신의 삶의 의미를 만드려 노력한다. 하지만 책은 과거의 것이다. 이미 지나간 사실에 대한 기록이며 그것은 지금, 여기에서 일어나고 있는 현실에 대해 어떠한 답도 줄 수 없다. 과거는 이미 지나갔으며 현재와 다르기 때문이다. 이 사실은 로캉탱이 로르봉 후작의 전기 집필이 자신의 '구토'를 해결해 줄 수 없음을 깨닫는 것과도 연관이 있다. '나는 내 주위를 불안한 눈초리로 둘러보았다. 현재뿐이다. 그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없었다.'(p.180), '현재의 진실한 본성이 드러나 있었다. 그것은 현존하는 그것이었다. 그리고 그 현재가 아닌 모든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과거는 존재하지 않았다. 사물 속에도, 나의 생각 속에도 없었다. 확실히 오래전부터 나의 과거가 나에게서 도주해버렸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p.180)처럼 과거는 이미 사라졌으며 존재하는 것은 현재뿐이다. 그러한 상황에서 과거의 기록으로 점철된 책들이나, 이미 사라진 과거의 존재인 로르봉 후작의 전기 집필이 현재의 로캉탱이나 독서광에게 어떤 도움을 줄 수 있을까? 현재의 존재, 현재 일어나고 있는 일들을 과거의 시각으로 해석하는 것은 영어 문제를 수식을 이용해서 풀겠다는 것과 마찬가지다. 로캉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로르봉은 이미 존재하지 않았다.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 만약 그의 뼈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그 뼈 자체로서 독자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그것들은 염분과 수분을 포함한 인산염과 탄산석회에 불과하다.'(p.182). 이처럼 현재를 과거로 재단하려 하는 것은 '염분과 수분을 포함한 인산염과 탄산석회'를 보고 "로르봉 후작님, 잘 지내셨나요?"라고 말하는 것과 다름없다. 독서광은 로캉탱과의 식사 자리에서 자신이 사회주의 단체 S.F.I.O. 에 입당했음을 밝힌다. 그때 '그의 얼굴은 자부심으로 빛난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눈을 지그시 감고 입을 살짝 벌린 채로 그는 나를 바라본다. 그는 순교자처럼 보였다.'(p.216)고 로캉탱은 묘사한다. 그는 과거 전쟁에서의 경험을 통해 사회주의 단체에 입당하고 그런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기며 휴머니스트적 면모를 보인다. 로캉탱은 "여기 있는 사람들,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사랑해야 합니다."(p.222)라고 말하는 독서광에게 일침을 가한다. 로캉탱은 독서광에게 "당신이 저 둘을 사랑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 분명해졌습니다. 아마도 당신은 길거리에서 그들을 알아볼 수 없을 것입니다. 당신에게 그들은 상징에 불과하니까요. 당신이 흐뭇해하고 있는 그것은 전혀 그들에 대해서가 아니라 '인간의 청춘' 특히 '남녀의 사랑' '인간의 목소리'지요."(p.224)라고 말한다. 독서광은 과거의 경험을 토대로 사회주의 단체에 입당하고 모든 인간을 사랑해야 한다고 말하지만 그들을 왜 사랑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과거의 경험에서 얻은 것을 현재에 그대로 적용하고 있으며 현재 자신의 행동, 지금 자신이 모든 사람을 사랑해야 하는 이유, 입당으로부터 긴 시간이 지난 지금 사회주의가 현재의 상황에 적합한지에 대한 고민 없이 맹목적으로 과거의 깨달음과 과거의 경험을 따른다. 심지어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사람 그 자체인지, 로캉탱이 말한 것처럼 '인간의 청춘'이나 '남녀의 사랑' 혹은 '인간의 목소리'인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만큼. 그런 독서광이 현재 존재하고 있는 모든 것들의 우연성, 존재의 '여분', 지금 이 곳에 주어진 무한한 자유를 깨달으며 생기는 불안감이 형상화된 '구토'를 느끼지 못하는 것은 당연하다. 존재란 현재에 있는 것이지만 독서광은 과거에 묻힌 자이기 때문이다. 3.3. 안니가 '구토'를 겪지 않는 이유 사실 안니는 로캉탱과 같은 '구토'라는 현상을 겪지 않을 뿐, 어렴풋이 로캉탱과 비슷한 불안감, 공포를 느끼고 있다. 그 과정은 안니가 자신이 추구해오던 '완전한 순간'이 허상임을 깨달으면서 나타난다. 안니는 로캉탱과 만나던 시절에도 늘 '완전한 순간'을 추구했다. 일상을 벗어난 특권적인 상태에 이른 어떤 한순간에 그 공간, 그곳에 속한 인물, 그들의 행동 등을 통제해 마치 스틸컷을 찍듯 완벽한 질서를 부여한 '완전한 순간'을 만드는 것이다. 그러나 안니는 어느 순간 그 '완전한 순간'이란 것이 없음을 알게 된다. '"그 완전한 순간이 없단 말이야?" "없어요."'(p.267)가 보여주는 로캉탱과 안니의 대화에서 확인할 수 있다. 안니가 '완전한 순간'을 만들려고 하는 이유는 로캉탱이 '구토'를 겪으며 깨달은 사실, 세상 모든 존재가 어떠한 존재 이유나 근거가 없는 우연성 안에 놓인 존재라는 사실에서 오는 불안감에 저항하기 위함이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만듦으로써 그 공간과 시간을 완벽하게 통제하고 질서를 부여해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들에 필연성, 그렇게 되어야만 하는 이유, 근거를 만들려 했던 것이다. 물론 안니 자신이 명확하게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은 아닐 테지만 머리로는 이해하지 못해도 피상적으로 느끼던 불안감이 '완전한 순간'을 만듦으로써 해소되는 것을 깨닫고 그것을 추구하기 시작하지 않았을까. 그러나 위에서 안니가 말한 것처럼 '완전한 순간'이란 사실 존재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순간이 가지는 시간적 한계 때문이다. 3.2. 에서 이야기한 것처럼 과거는 현재 존재하는 것들에 어떤 영향도 끼치지 못한다. 과거는 이미 지나간 시간이고 모든 인간, 모든 생명체는 과거가 아니라 현재를 살아가고 있다. 현재와 과거는 완전히 단절되어 있다. 만약 안니가 추구하던 '완전한 순간'이 정말 완전하다면 그 순간은 현재에도 '완전'해야만 한다. 그러나 과거의 '완전한 순간'이 현재에 완벽히 재현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 공간, 인물, 위치, 기억 등등 온갖 요인들이 달라졌고 '완전한 순간'에 포함되어 있던 것들은 현재의 것들과 완전히 다른 존재다. 그러므로 '완전한 순간'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안니는 '완전한 순간'을 만들고 그 순간에 대한 기억을 통해 현재의 불안감과 두려움을 잊고 또한 미래에도 과거의 '완전한 순간'이 그러한 역할을 해주기를 바란다. 그러나 과거의 '완전한 순간'은 그 순간이 지나는 그때 이미 사라지고 완전함은 남아있지 않게 된다. 예를 들어 안니가 과거의 '완전한 순간'을 떠올리고 그것에서 현재의 고뇌와 불안을 잊으려 해도 안니의 기억에 남아 있는 '완전한 순간'은 그 당시의 한 부분이자 현재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는 것들일 뿐이다. 게다가 과거의 '완전한 순간'을 기억하고 추억한다고 해도 현재 처해있는 상황과 현재 존재하는 세계는 전혀 달라지지 않으며 어떠한 실재적 변화도 일어나지 않는다. 안니는 결국 그 사실을 깨닫고 말한다. "나는 일종의 물리학적...... 확신이 있어요. 완전한 순간이란 없는 것 같아요."(p.268)라고. 안니는 '완전한 순간'의 허상을 깨달았으며 만물이 가지고 있는 우연성과 혼돈의 세계를 직면했다. 그녀는 과연 어떤 해답을 찾게 될까. 3.4. 로캉탱이 '구토'를 극복하는 방법 로캉탱은 부빌의 카페에서 격렬한 '구토'를 느끼다 카페에서 흘러나오는 재즈곡을 들으며 '구토'가 사라지는 걸 느낀다. 재즈곡이 시작된 순간 모든 것은 정해져 있다. 음악이 시작되고 정확히 몇 초 후 흑인 여자가 노래를 시작하고 정해진 가사와 음과 시간이 소비되면 노래가 멈추고 음악이 끝난다.'몇 초 후면 흑인 여자가 노래를 부를 것이다. 그것은 불가피한 일 같다. 그만큼 이 음악의 필연성은 강하다. 이 세상이 주저앉아버린 그 시간, 그 시간으로부터 오는 그 어떤 것도 이 필연성을 방해하지는 못한다. 그 필연성은 질서에 따라 스스로 멈출 것이다.'(p.48)라는 로캉탱의 말처럼 이 재즈곡은 철저히 작곡자의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완전한 질서와 필연성 속에 놓여 있다. '일어난 일, 그것은 '구토'가 사라졌다는 사실이다. 침묵 속에서 소리가 튀어나왔을 때, 나는 내 몸이 굳어지고 '구토'가 사라진 것을 느꼈다.'(p.49)에서 보듯 재즈곡은 로캉탱의 '구토'를 그 즉시 잠재웠다. 이처럼 작곡자의 철저한 의도에 의해 만들어진 '여분'이 없는 완벽한 필연성의 산물인 재즈곡은 존재 이유가 없는 존재들의 우연성이 가져다주는 불안감과 '구토' 증상을 완전히 사라지게 만든다. 그리고 로캉탱은 부빌을 떠나기 전 같은 카페에서 같은 재즈곡을 들으며 다시 한번 재즈곡의 완전한 질서, 필연성을 체감하고 곡을 부른 가수와 작곡가를 생각한다. 그들이 음악 속에 남긴 생각, 관념, 필연성, 질서는 그들이 이미 사라진, 현존하지 않는 존재임에도 로캉탱이 그들을 기억하고 생각하도록 만든다. '나는 7월의 어떤 날, 어두운 자기 방의 더위 속에서 그것을 작곡한, 저쪽의 그 사나이를 생각하고 있다. 멜로디를 '통해서', 색소폰의 희고 시큼한 소리를 통해서 그에 대한 생각을 하려고 애쓰고 있다.'(p.327)처럼 말이다. 또한 로캉탱은 '그런데 내가 그들을 다정하게 생각하는 만큼 나를 생각해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무도.'(p.328)라고 말한다. 작곡가와 가수, 그들은 무의미와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임에도 자신들의 선택과 행동을 통해 완전한 필연성, 존재 이유를 가진 산물인 재즈곡을 만들어냈고 그 음악은 인간이 존재하는 한 영원히 우연성과 무의미에 속한 것들 사이에서 필연성과 존재의 의미를 가진 음악으로 남을 것이다. 즉, 그들은 우연성 속에 놓인 존재로 태어났지만 필연성과 질서를 가진 산물을 창조해냈고 그로 인해 우연성에서 태어난 그들의 존재가 필연성을 가지도록(존재 이유가 존재하도록) 만든 것이다. 로캉탱은 그 과정에서 '구토'의 극복 방법을 찾아낸다. 로캉탱은 자신의 글 쓰는 능력을 이용해 한 권의 책을 쓰기로 한다. 단 지금까지 쓰던 로르봉 후작의 전기나 역사책이 아닌 소설을 쓰기로 한다. '역사책이 아니다. 왜냐하면 역사는 존재했던 것에 관해서 이야기하기 때문이다-한 존재는 결코 다른 존재의 존재를 정당화할 수 없다.'(p.329)는 이유 때문이다. 로캉탱은 철저히 자신의 의도와 목적으로 만들어진, 완전한 질서와 필연성 속에 놓인 소설을 쓰기로 결심한다. '한 권의 책. 한 권의 소설. 그 소설을 읽고 다음과 같이 말하는 사람이 있으리라. "그것을 쓴 사람은 앙투안 로캉탱이다. 그는 카페에 빈들빈들 드나들던 머리칼이 붉은 놈이었다"라고.'(p.330)라는 문장에서 알 수 있듯이 로캉탱의 손에서 쓰인 한 권의 소설, 즉 로캉탱이 의도한 질서와 필연성 안에 놓인 소설은 영원히 그 존재가 남을 것이고 로캉탱은 영원히 그 존재 이유를 지닌 소설의 창작자로서 의미 없이 우연히 태어난 존재에서 자신의 의미, 존재의 이유를 스스로 만들어 낸 존재가 된다. '구토'는 모든 것들이 존재의 이유가 없는 우연성 아래 놓여 있다는 사실에서 나타나므로 그 우연성을 벗어나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존재의 이유와 의미를 만들어 내는 순간 극복된다. 그런 의미에서 로캉탱은 소설 쓰기를 통해 '구토'를 극복하려 한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것은 '구토'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재즈곡이 녹음된 CD나 로캉탱이 쓴 소설책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구토'를 극복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CD나 책 같은 사물이 아니라 그 속에 담긴 창작자의 관념, 사상 그리고 창작자가 의도한 질서와 창작 이유, 의미이다. 음악은 음표로 표시된 악보, 혹은 녹음된 CD나 음악 파일로써 현실에 존재하지만 사실 그 속에 담긴 음악은 현실 세계가 아니라 창작자의 머릿속, 그리고 그 음악을 들은 청중들의 기억 속에 남는다. 소설도 마찬가지다. 소설이 쓰인 책이 곧 그 소설인 것이 아니다. 소설의 이야기는 창작자의 머릿속과 독자들의 머릿속에 존재하는 것이지 글자, 혹은 책 그 자체가 소설이 아니다. 악보나 CD, 책이나 글자는 창작자의 관념 속에 존재하는 음악과 이야기, 즉 생각의 산물을 현실의 세계, 존재의 세계에 현존하도록 만들어주는 매개이다. 위에서 말했듯이 원이나 검은 빛깔은 관념의 세계 속에서는 충분히 이치에 맞게, 필연성을 지니며 설명된다. 그러므로 모든 존재하는 것이 우연성 속에 놓인 현실 세계에서, 창작자는 관념 속 필연성을 지닌 어떤 것들(음악, 소설)을 현실 세계에 존재하도록 만듦으로써 필연성을 지닌 존재를 현실 세계, 존재의 세계에 만들어낼 수 있게 된다.  4. <구토> 리뷰를 마치며. 며칠에 걸려서 문헌들과 책을 몇 번씩 들여다보며 썼지만 지금도 제대로 쓴 것인지 걱정이 든다. 사실 <구토>에 대해 얼마나 이해했는지도 의문이다. 절반이나마 제대로 이해하고 썼다면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구토>에 드러난 사상은 현재를 살아가는 많은 이들이 자신의 삶에 적용해볼 만하다고 생각한다. 인간에게 절대적 존재의 이유를 부여하던 신이 과학에 의해 부정당하고 사라진 세상에서 인간은 존재 의미를 찾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 왔다. 사르트르는 말한다. 인간이 존재하는 이유 따위는 없다고. 인간이 사는 이유는 우연히 태어났기 때문이며 우연히 존재하기 때문이라고. 그렇지만 존재하는 이유가 없으니 살 가치가 없다는 말 따위는 하지 않는다. 로캉탱이 소설을 쓰기로 결심하는 <구토>의 결말은 인간은 우연성 아래서 태어났지만 스스로의 선택을 통해 필연성, 존재의 이유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시사한다. 자신이 자유롭다는 사실을 외면하고 있지는 않는지, 주변에 자신의 선택에 대한 책임을 떠넘겨버리고 '자기기만'에 빠져 있지는 않는지, 내 삶의 이유, 내 존재의 이유는 무엇인지 <구토>를 통해 깊게 고민해 볼 기회를 갖기를 바란다. 소설 속 한 문장 나는 내가 무슨 짓이든 할 수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이게 인생영화, '그린북' 솔직후기/리뷰/해설 (약스포주의)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입니다. 최근 화제인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찬사는 물론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고 있는데요. 왜 이걸 이제서야 봤나 싶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인물들의 환상적인 케미를 자랑하는 영화 '그린북'입니다. 정말 이 조합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왜 그렇게 모든 이들이 작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지 드디어 직접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 둘의 조합으로 말할 거 같으면 자유로운 유대인과 섬세한 흑인의 만남입니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셜리는 흑인이지만 힙합이 아닌 클래식을 연주하는 천재 음악가입니다. 토니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이지만 찬송가가 아닌 주먹을 날리는 백인입니다. 보통의 편견에서는, 흔한 작품에서 보이는 흑인과 유대인의 이미지와 사뭇 다릅니다. 이렇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어색한 조합이지만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공감할 거예요. 돌직구의 유대인과 생각이 많은 흑인이라는 이 두명의 조합은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백인 둘의 조합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사실을요. '을'과 '을'의 만남 처음부터 이 둘이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토니는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짙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돈을 준다기에 흑인의 운전기사를 자처하게 되죠. 애초에 맞지 않는 퍼즐을 끼워놓은 모양새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계속보다 보면 이 둘이 서로를 비슷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둘은 모두 백인사회에서 '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셜리는 돈 많고 유명한 피아니스트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홀대 받습니다. 토니는 백인이지만 이탈리아계 유대인이면서 클럽 문지기나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자격지심을 키워왔습니다. 무엇보다 이 둘은 자신을 차별하는 백인을 위해 일하는 역설적인 위치에 놓여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듯 같은 모습을 느껴가며, 둘은 어느새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진심 티격태격하던 이 둘도 시간이 지나며 서로에게 진심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인물들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하는 모습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죠. 예를들어 토니가 자신의 아내 돌로레스에게 안부차 편지를 쓰는 장면이 있습니다. 교양 있는 셀리는 내용을 더 로맨틱하게 바꿔주는데요. 처음에는 투박한 내용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풍부해지는 덕에 돌로레스는 감동까지 받습니다.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던 토니의 수다력에 셜리는 어느새 적응을 하고 있었고, 주먹으로 화를 삭이던 토니가 셜리의 침착함에 폭력을 멈추기도 합니다. 겉만 보면 분명 인정하기 힘들었던 이 둘의 조합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진심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인종차별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인종차별만을 비판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결핍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제가 눈물을 흘린 장면이 있는데요. 그 장면에서 영화가 제시하고 싶은 문제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만한 편견이었고 또 다른 차별일 수 있죠. 차별 받는 누군가는 스스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진영에도 확실히 소속될 수 없었던 '애매한' 입장을 얻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의심해 버리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죠.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 의심이 든 적 있나요? 누군가는 매일 하는 고민일지 모릅니다. 타인의 배려도 공격으로 느껴지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죠. 이는 서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이해에 부족때문입니다. 영화는 상대를 아는 척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돈 셜리로 대표되는 인물을 통해 전달되는데요. 그는 차별을 각오하고도 백인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해서 공연을 합니다. 굳이 차별을 마주하는 이유는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바로 그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용기 하지만 토니도 용기가 없는 인물은 아닙니다. 토니는 토니만의 가치관이 있고 '을'로서 살며 강인하게 박힌 철학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셜리와 토니가 가진 용기가 서로 다른 유형의 용기였기에 둘의 만남은 운명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토니는 차별에 대항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오로지 주먹이 먼저 나가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기 바빴죠. 대신 그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줄 아는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차별에 저항할 줄 알지만 외로움을 자처하는 셜리를 만나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로 거듭나게 됐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 둘의 조합은 완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져야 승리한다? 작중에서 셜리는 인내심을 가져야만이 차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본인이 여지껏 참고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전통적인 백인 식당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자 둘은 흑인들이 주로 식사하는 식당으로 향하는데요. 융통성 없이 배척만 하는 백인사회와 달리 경계하지만 이내 받아들이는 흑인사회가 대비되기도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흑인사회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화합'이 정답이라고 봤습니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진정한 승리로 가는 길이 아닐까요? 사람의 진심은 숨기려해도 드러남을 알려주는 작품이었으니까요. 'Get Out' 'Liberty Heights' without 'GreenBook' 왜 차별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도 이런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걸까요? 왜냐면 차별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조차도 '아는 척'에 불과하니까요. 직접 차별을 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린북이 없이도 리버티헤이츠를 나가 화합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나갈 수 있는, 모두가 조화롭게 어울러 살 수 있는 세상은 언제쯤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분명한 건 60년전이나 지금이나 더 편견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겠죠. 그 긴 여정에 큰 한 발자국을 남긴, 영화 '그린북'이었습니다.
흥행가도, '엑시트'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에요~ 오늘도 1일 1영화 하고 왔습니다. 드디어 최근 영화 중 가장 보고 싶었던 작품을 보고 왔어요. 괜히 입소문을 타고 흥행가도를 달리는 게 아니더군요. 자세한 리뷰는 지금 바로 써보도록 하겠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재난이든 오락이든 모두 합격, 영화 '엑시트'입니다. 홍보영상이나 예고편을 봤을 때는 그닥 흥미가 생기지 않았는데요. 개봉 후 첫 날부터 반응이 뜨겁더니 이제는 순위가 부동으로 1위입니다. 과연 마케팅인지 사실인지 확인을 위해 제가 또 직접 영화관을 다녀왔죠. 700만 이상 이미 흥행에 성공했다고 봐도 무방하지만 더 욕심을 내고 싶습니다. (제가 뭐라고) 700만 이상은 넘기지 않을까 예상해봅니다. 저도 어지간한 확신이 없다면 예상하진 않는데요. 사실 천만영화 후보라고 말하고 싶지만 영화관 사정에 따라 달라질 거 같기에 낮춘 수치입니다. 근간은 오락영화이고 코미디기 때문에 온가족이 보기에 적절합니다. 그런데 재난이라는 장르가 겹치면서 시너지가 폭발했습니다. 자칫 짬뽕이 될 위기였는데 정말 잘 어울리는 결과물이 나왔습니다. 심플하고 명료하다 작품은 기발한 연출과 영리한 기획의 승리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일단 정말 긴장감이 계속되고 손에 땀이 날 정도인데 중간중간 유머는 놓치지 않습니다. 부자연스럽게 섞인 불순물이 아닌 어느 하나 빠뜨리기 아쉬운 재료로 제 역할을 다 해냅니다. 배우들의 연기력 또한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윤아라는 배우가 스크린에서는 아직 생소하고 낯섭니다. 그런데 이번 작품에서는 잘 녹아들었고 부담 없이 감상하실 수 있습니다. 조정석의 연기는 말할 필요 없이 대단했습니다. 게다가 그렇게 예민한 신파적인 부분도 없고 억지 감동도 뺏으며 스피드웨건도 없죠. 한 마디로 심플하고 명료한데 모든 게 이해됩니다. 쉽고 재밌는 작품이죠. 진정한 런닝맨 영화 중후반부터는 쉴틈 없이 달립니다. 하지만 달리는 것도 이어지면 지루하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 작품은 선을 잘 지켰습니다. 계속 달리는데 루즈하지 않습니다. 중간중간 하이킹도 하고 문제도 생기고 유머도 섞으면서 반복되는 패턴이 질리지 않게 요리했으니까요. 감독은 관객이 어느 부분에서 긴장하는지 어떻게 몰입되는지 어떤 부분을 원하는지 잘 알고 있는 모습입니다. 초반에는 소소하게 웃기다가 중반으로 넘어가며 급격한 변주를 주고 후반부에 깔끔한 마무리까지 오랜만에 짜임새 있는 구성의 한국영화입니다. 최근 흥행가도를 달리는 데는 정말 이유가 있습니다. 1시간 40분의 위기탈출넘버원 어느 교육영상도 이토록 재밌고 몰입감있게 재난메뉴얼을 보여주진 못했을 겁니다. 부분마다 실제를 바탕으로 한 구조방법들이 나타나고 그걸 유머로 섞어 관객도 인식하지 못하게 만들었습니다. 너무 웃다가 지나보면 머리에 남는 힌트들이 나중에 정말 위급상황에 사용될지 모릅니다. 현재사회의 이슈, 한국의 정서, 재난메뉴얼까지 알차게 즐길 수 있는 시간입니다. 만두도 속을 많이 넣다보면 터지기 마련인데 적절하게 푸짐한 만두가 빚어진 느낌이네요. 한 번 더 보고 싶은 마음이 들 정도로 재밌게 봤습니다. 여러분도 여름방학에 가족들과 같이 영화 '엑시트' 한 편 어떠신가요? *쿠키영상은 없습니다~
<자기만의 방> 버지니아 울프 - 민음 북클럽 에디션
<자기만의 방> / 버지니아 울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과거, 여성이 남성과 동등한 입장이 되기 위해서는 남성에 비해 엄청난 노력과 의지와 운과 재능이 필요했다.(예전에 비해 나아지긴 했지만 현재도 어느 정도 남아있다는 사실을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게 피나는 노력과 불굴의 의지로 주변의 억압과 통제와 비난을 견뎌 온 여성들이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남성이 그냥 걸어가 움켜쥐기만 하면 되었던 투표권이나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 글을 쓰고 공부를 하고 직업을 가질 권리였다. <자기만의 방>은 뉴넘 대학과 거턴 대학에서 버지니아 울프가 발표한 강연문에 기초해 만들어진 책이다. 이 책은 버지니아 울프가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을 하는 형식으로 쓰여 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로 강연 제의를 받은 어떤 가상의 인물이(아마 본인인 듯하다.)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대해 생각한 내용과 단상들을 이야기하는 방식으로 강연을 진행하는데 '여성과 픽션'이라는 주제에 걸맞게 강연 자체를 한 여성 화자가 겪은 이야기, 하나의 픽션으로 구성한 것이 매력적이었다. 때로는 허구와 픽션, 혹은 한 인물의 개인적 생각과 체험들이 거대한 역사나 냉철한 사실, 논리에 의거한 비판보다 더 큰 영향을 미치기도 한다. 버지니아 울프가 남성의 존재 방식을 고찰하는 과정이 꽤 흥미로웠다. 그녀는 남성이 남성으로서 존재하기 위해 택한 방식으로 여성에 대한 무시와 상대적 우월감을 제시한다. 남성은 여성을 무시하고 열등한 존재라 여김으로써 자신의 우월감을 획득해 비로소 남성으로서 존재한다. 그 과정에 의해 가부장제가 탄생하고 여성의 신체적, 도덕적, 정신적 열등함에 대한 연구서적이 만들어지고 수많은 문학 작품 속 남성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는 여성인물들이 등장한다. 하지만 이러한 남성의 존재 방식은 애초에 모순을 품고 있다. 남성이 스스로 남성으로 존재할 수 없는 것이다. 남성성은 여성성에 대한 우월감에 의해 획득되므로 여성이 존재하지 않으면 남성도 존재하지 못한다. 만약 남성이 여성에 관계없이 남성으로서 존재할 수 있다면 여성을 억압하고 여성의 열등성에 대해 연구할 필요성도 사라진다. 여성이 어떤 존재던 간에 남성은 남성으로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남성이 남성성의 획득 방식으로 선택한 불완전한 방식에 의해 여성의 열등성은 필요 불가결한 요소가 되었고 그 열등성에 대한 근거로 가부장제와 수많은 연구 서적, 지금껏 존재하지 않았던 훌륭한 여성 문인, 연구자, 학자 등의 예시가 제시되는 것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을 자세히 살펴보면 뭔가 이상하다. 여성이 열등하기 때문에 지금껏 위대한 여성 문인이나 학자가 없었고 가부장제가 생겨났으며 여성의 열등성에 대한 연구서적들이 쓰였다면 그것들을 여성의 열등성에 대한 근거로 제시할 수 있는가? 이 말은 A라는 가설에 의해 만들어진 B가 다시 A가 진실임을 증명하는 근거가 된다는 소리이다. 즉, 어떤 가설에 의해 만들어진 결과가 가설의 근거로 제시된다는 것인데 이것은 당연히 틀린 말이다. 예를 들어 보자. 다음 설명이 맞는 말일까? 이 세상에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지금까지 외계인은 발견되지 않았고, 외계인이 지금까지 나타난 적이 없으므로 세상에 외계인은 존재하지 않는다.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의 근거로 제시한 지금까지 외계인이 발견되지 않았다는 사실이 다시 외계인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가설을 입증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애초에 가설이 진실이라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다. 즉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이 열등하다는 가설이 진실이라고 증명할 수 있는 근거가 없음을 말하며 여성을 억압하는 온갖 제도와 관습들이 여성이 열등하다는 환상 위에 겹겹이 쌓인 환상의 결과임을 말하고 있다. 남성은 그 잘못된 환상에 매달려 자신의 존재 가치를 증명하고 있으므로 남성들이 주장하는 남성 그 자체가 존재하지 않는 허상임을 우리는 알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환상이 문명의 시작부터 현재까지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 동안 우리의 머릿속을 장악해 온 이상, 실제로 존재하지 않는 우월한 남성성과 열등한 여성성은 인간의 사고와 심리 안에서 현실이 된다. 그 결과 여성은 존재하지도 않는 환상에 의해 수많은 권리들을 빼앗기고 행동의 자유를 억압당해 왔다. 버지니아 울프가 강연하던 당시는 여성의 열등함이라는 환상 아래 빼앗겼던 권리들을 조금씩이나마 되찾고 있던 시기였다. 여성에게 투표권이 생기고 재산을 소유할 수 있는 권리가 생겼으며 위대한 여성 작가와 연구자와 학자들의 선례가 조금씩 생겨나고 있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더욱 고귀하고 정신적인 여러분의 임무를 기억하라고 간청해야 할 것입니다. 또 여러분에 의존하고 있는 것이 얼마나 많은지, 여러분이 미래에 어떤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지 상기시켜야겠지요.' (p.184~185) '젊은 여성들이여, 결론이 나오고 있으니 집중해 주십시오 하고 말하겠습니다. 내 생각으로는, 여러분은 수치스러울 정도로 무지합니다. 여러분은 어떤 종류이건 중요한 것을 발견한 적이 한 번도 없습니다. 여러분은 제국을 뒤흔들거나 군대를 전투로 이끈 적도 없습니다. 셰익스피어의 희곡은 여러분이 쓴 것이 아니며, 여러분은 야만인들에게 문명의 축복을 전달하지도 않았습니다...... 여러분의 말에는 진실이 담겨 있습니다. 나는 그것을 부정하려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동시에 나는 여러분에게 상기시켜 드릴 것입니다. 1866년 이래 영국에는 여성을 위한 대학이 적어도 두 곳 존재해 왔으며, 1880년 이후에는 기혼 여성이 자신의 재산을 소유하도록 법적으로 허용되었고, 1919년 - 꼭 구 년 전의 일인데 - 에 여성은 투표권을 얻게 되었다는 것을 말입니다. 또한 대부분의 전문직이 여러분에게 개방된 지 대략 십 년 정도 되었다는 사실을 상기시켜 드릴까요? 여러분이 이 막대한 특권들과 그것들을 누릴 수 있었던 기간을 곰곰이 생각해 보고, 이 순간에도 이러저러한 방법으로 연간 500파운드 이상을 벌 수 있는 여성이 약 이만여 명 있다는 사실을 숙고해 본다면, 기회가 부족하고 훈련이나 격려를 받지 못했으며 여유와 돈이 없다는 변명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는 사실에 동의할 겁니다.' (p.187~188) 버지니아 울프는 여성들에게 말한다. 모든 인간들의 머릿속에 들어앉은 환상으로 인해 빼앗겼다고 생각했던, 하지만 사실 그 누구도 빼앗을 수 없는 그 권리들을 위해, 남성의 비교대상으로서가 아닌 그저 한 개인이자 자기 자신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라고 말이다. 또 한 가지, 버지니아 울프가 강조하는 것은 자기만의 방과 연간 500 파운드의 수입이다. 그 두 가지가 있어야만 여성이 자기 주체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고 말한다. 얼핏 보면 세속적으로 생각되기도 하는 그 두 가지는 사실 단순한 단어의 의미보다 더 큰 의미를 가지고 있다. 여기서 버지니아 울프가 말하는 자기만의 방은 한 개인이 자기 자신으로써 누구에게도 영향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는 공간을 말한다. 당시 사회에서 여성은 남성에게 종속적인 관점으로 존재했다. 여성 자체가 남성보다 열등한 존재로 일컬어진 시대인 것이다. 그런 시대에 여성에게 누군가와 함께 있는 공간은 자기 자신이 아니라 여성으로서의 자신, 남성에 대비되는 열등한 존재로써의 자신을 끊임없이 인식시키는 공간이다. 울프는 남성에 의해 규정되는 여성에서 벗어나기 위해 자기만의 방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보았다. 연간 500파운드의 수입도 마찬가지다. 스스로의 힘으로 연간 500 파운드를 벌 수 있는 능력. 그 능력이 없으면 인간은 결국 누군가에게 종속될 수밖에 없다. 누군가에 의지하지 않고 한 주체로써 홀로 서기 위한 최소한의 경제적 조건을 울프는 연간 500파운드로 보았던 것이다. '지적 자유는 물질적인 것들에 달려 있습니다. 시는 지적 자유에 달려 있지요. 그리고 여성은 그저 이백 년 동안이 아니라 역사가 시작된 이래로 언제나 가난했습니다. 여성은 아테네 노예의 아들보다도 지적 자유가 없었습니다. 그러니 여성에게는 시를 쓸 수 있는 일말의 기회도 없었던 거지요. 이러한 이유로 나는 돈과 자기만의 방을 그토록 강조한 것입니다.' (p.180) 여기서 한 가지 더 이야기하고 싶은 건, 누군가와의 비교 대상이 아닌 자기 자신으로 홀로 서지 못하는 현실이 비단 여성에게만 국한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물론 여성에게는 훨씬 더 가혹하고 무자비한 환상이지만 그 환상은 남성의 발목 또한 붙잡고 있다. 남성이 여성과 비교한 우월성으로 정의된다고 생각하는 남성들은 오히려 그것이 자신의 한계를 만들어버린다는 사실을 알아야 한다. 여성성의 비교 대상으로써의 남성성을 추구하기 위해 자신 속에 존재하는 여성성(으로 일컬어지는 어떤 성질)을 일부러 외면하고 숨겨야만 한다면 그것이 온전한 자신으로써의 삶이라고 할 수 있을까? 여성이 남성의 비교 대상이자 열등한 존재가 아니라 한 명의 인간으로, 하나의 존재로 살아갈 수 있게 될 때 비로소 남성 또한 여성성에 대비되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남성성, 그 단단한 족쇄를 풀고 자유로운 한 명의 인간으로 살아갈 수 있게 될 것이다. '이와 같이 한 성을 다른 성에, 한 가지 자질을 다른 자질에 대립시키고 우월성을 주장하며 열등함을 전가하는 모든 행위들은 인간의 경험을 단계로 나누자면 사립학교 단계에 속하는 것입니다. 그 단계에서는 '양편'이 있으며, 한편이 다른 편을 이겨야 하고, 연단에 올라가서 교장 선생님이 직접 주는 화려한 장식의 상배를 받는 일이 대단히 중요해 보이지요. 사람들은 점차 성장하면서 양편이라든가 교장 선생님 혹은 고도로 장식적인 상배를 믿지 않게 됩니다..... 아니, 가치를 측정하는 것이 아무리 즐거운 소일거리라 하더라도 그것은 더없이 무익한 일이며, 가치를 측정하는 사람들의 규정에 복종하는 것은 가장 굴욕적인 태도입니다.' (p.177) 이 세상의 모든 여성에게, 또 그만큼이나 이 세상의 모든 남성에게 권하고 싶은 책이다. 책 속 한 문장 '이 강연의 중간에서 셰익스피어에게 누이가 있었다고 여러분에게 말했지요. 그러나 시드니 리 경의 시인전에서 그녀를 찾지 마십시오. 그녀는 젊어서 죽었고, 슬프게도 글 한 줄 쓰지 못했습니다. 그녀는 지금 엘리펀트 앤 캐슬 맞은편 버스가 정류하는 곳에 묻혀 있지요. 이제 나의 신념은 글 한 줄 쓰지 못한 채 교차로에 묻힌 이 시인이 아직 살아 있다는 것입니다. 그녀는 여러분 속에 그리고 내 속에, 또 오늘 밤 설거지하고 아이들을 재우느라 이곳에 오지 못한 많은 여성들 속에 살아 있습니다.' (p.189)
시크푸치의 모닝레터_0908. 소설 '상냥한 폭력의 시대'를 읽고
지난해 말 출간돼 올 초에 책방에서 산 정이현의 소설 <상냥한 폭력의 시대>는 한 차례 모닝레터에서 소개한 바 있지만, 이런저런 핑계로 다 읽지 못하다가 최근에 다 읽고 나서 과거에 읽었던 게 기억이 나질 않아 빠른 속도로 두 번을 읽게 됐어요. 이번 소설은 지난 2013년 겨울부터 발표한 소설 가운데 중단편 일곱 편을 묶은 소설집이죠. 작가는 독자들에게 무심한 듯 모멸감을 주는 '상냥한 폭력'이 일상이 되어버린 시대를 성찰케 합니다. 대부분의 소설집과 달리 표제작이 없고 소설 <달콤한 나의 도시><오늘의 거짓말> 등을 통해 쿨한 '도시 기록자'란 애칭을 불리게 된 정 작가의 문체는 회색빛 아스팔트와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싼 도시의 차갑고 건조한 감성을 담아낸 것 같아요. 전작과 달리 인물들로부터 한 걸음 떨어져 우리가 사는 세상을 들여다보면서 미소 없이 상냥하고 서늘하게 예의 바른 위선적인 캐릭터를 통해 '세속성'을 사유하고 있죠. 또 자신의 욕구를 잃어버린 채 무서운 것도, 어색한 것도, 간절함마저 없어 보이는 삶에 엮인 사람들의 고통과 공허를 감각적이고 세련된 언어와 날카로운 시선으로 포착해냅니다. 무라카미 하루키의 <상실의 시대>를 연상시키며 과거 십 년 전 일본의 전철을 밟듯 1인 가구의 증가와 소통의 단절, 전통 가족 체제의 해체가 낳은 일상 속의 폭력은 가족의 생계나 일상의 존속을 위해 다른 이들의 불행을 묵인하는 극단적 개인주의의 파국을 깊이 있게 성찰하는 것 같아요. 소설집 중 '밤의 대관람차'에서는 사회의 부조리를 목격하면서도 '결정의 순간에 결단 없이 선택하고, 자신의 선택을 지키며 사는' 우리들의 무기력한 태도를 바라보기도 합니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모임에서 몇 번 만난 사람을 소문으로 판단하며, 유치원 식중독 사건에서 존재론적 불안에 휩싸여 자신의 속물근성을 드러내는 단편 '안나'에서 경은 기간제 교사가 된 안나와의 재회에서 기성세대의 자기 변명과 같은 상냥하지만 서늘한 폭력을 마주하게 됩니다. 지난해 읽었던 은희경의 소설 <중국식 룰렛>처럼 삶 속에 행운과 불운을 사유하는 이번 소설의 단편 '밤의 대관람차'의 구절이 가장 좋았던 것 같아요. 「좋지 않은 조짐이 있을 때 가장 나쁜 경우를 상상하는 건 사소한 불운을 생애 전체의 불행에 대한 복선으로 확대 해석하는 버릇과 비슷했다.」 - ep.밤의 대관람차 중에서(p.147) 생기 넘치고 활기찬 도시 이야기는 아니지만, 전작 속의 캐릭터들이 시간이 흘러 이럴 것 같다고 가정한다면, 죽음을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에 이른 이번 소설집의 인물들은 관성과 체념의 태도로 자신의 결핍과 공허를 깨닫게 됐는지도 모릅니다. 문학평론가 백지은은 "닫힌 세태의 재현은 그 자체로 상냥한 폭력을 파헤치는 일이고, 역으로 세태의 폭력적인 모럴을 검증하는 일"이라며 "저마다 각자의 속도로 가는 것이 폭력의 시대를 건너는 상냥한 방법이 될 수 없을까"라고 평했어요. 지난 7일 방영한 SBS 수목드라마 <다시 만난 세계>에서 무언가 비밀을 안은 채 은폐하려는 학교 이사장 부인 윤미나(방은희 분)는 상냥한 폭력을 행사하는 대표적인 캐릭터 같았어요. 윤미나는 아들 태훈(김진우 분)이 살인 누명을 쓴 해성의 동생 영인(김가은 분)과 사귄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영인의 출근길을 막아서서 "아가씨 오빠 살인자라며. 그런데 무슨 염치로 우리 태훈이를 만나냐"라고 말하며 눈물을 흘리는 영인의 눈물을 닦아주고 차갑게 뒤돌아섰습니다. 극 중 윤미나의 방식은 서늘하면서도 예의 바른 상냥한 폭력이 아니겠느냐란 생각이 들었어요. 그러면서, 일상 속에서 무의식중에 주변사람에게 상냥하면서도 차가운 태도를 취한 적은 없었는지 되돌아보게 합니다. From Morningman.
부정적 피드백을 편안하게 받아들이려면?
이 방법이 비판에 민감한 당신을 정반대의 사람으로 바꿔놓지는 못한다. 다만 타고난 성향에 맞추어 살면서도 피드백을 지금보다는 덜 피할 수 있도록, 때로는 상처받을 것 같은 느낌이 들지라도 피하지 않고 받아들이는 법을 설명한다. 그럼 불안유형 '부정적인 피드백에 대한 두려움'을 낮추는 전략을 알아보자. 1. 피드백에 관한 준비된 답변을 만들어두라. 준비된 답변을 이용하면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지 않고 피드백에 대한 생각을 처리할 시간을 벌 수 있다. 준비된 답변은 반드시 상대방이 언급한 합당한 지적을 대체적으로 수긍하며 조만간 그 내용을 수용하겠다는 뜻을 내비쳐야 한다. 만약 당신이 자기만의 눈높이가 대단히 높은 사람이라도, 이럴 때만큼은 평소보다 자신의 맹점을 수용하는 태도를 보여주는 편이 좋다. 2. 피드백을 침착하게 받아들이는 척하라.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으면 거부하고 싶을 때가 있다. 화가 나거나 실망할 때도 있다. 하지만 이럴 때도 가급적 침착한 태도를 보이면 좋다. 달리 말하면 시간을 벌기 위해 우선 받아들인 척이라도 하라는 말이다. 일부러라도 침착한 태도로 행동하면 실제로도 빠르게 안정을 찾을 수 있다. 당신의 머리와 가슴은 이런 몸짓이 보내는 비언어적 신호를 즉시 알아챌 것이다. 완벽하게는 아니라도 어느 정도 긴장을 풀어주는 효과가 있다. 3. 샌드위치 기법을 연습하라. 피드백을 받을 때, 가능하면 '샌드위치' 형태로 해달라고 부탁해보라. 샌드위치 기법은 '잘한 점 - 문제점 혹은 위험선 - 그 외에 다른 좋은 점'과 같은 순서로 피드백을 주는 것이다. 이와 같은 형태로 피드백을 주고받을 수 있도록 하라. 샌드위치의 진짜 내용물은 쓴소리를 효율적으로 받아들이기 위해 앞뒤로 먹기 좋은 빵(좋은 소리)를 얹어놓는 기법이다. 비록 가식적이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을 인정해주는 표현을 먼저 들으면 피드백을 훨씬 쉽게 받아들인다. ※ 위 콘텐츠는 《불안을 다스리는 도구상자》에서 발췌 · 편집한 내용입니다.
<한국 소설이 좋아서> 장강명 기획 / 50인 공저
<한국 소설이 좋아서> / 장강명 기획 / 50인 공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한국 소설이 좋아서>라는 제목부터 기쁘다.(이 책의 기획자인 장강명 작가가 <한국이 싫어서>라는 책을 썼다는 건 꽤나 아이러니하긴 하다.) 한국 소설을 좋아하는 독자로써(물론 모든 국가의 소설을 다 좋아하지만 번역된 문장은 담지 못하는, 처음부터 모국어로 쓰인 문장만이 줄 수 있는 자연스러움과 아름다움은 한국 소설로 손을 뻗을 수밖에 없도록 만든다.) 이런 서평집을 기다렸다. 한국 소설, 그중에서도 유명하지 않고 베스트셀러도 아니고 이슈도 되지 않았지만 정말 좋고, 재밌고, 가치 있는 한국 소설들을 소개하는 이 서평집은 한마디로 숨겨진 보물들을 직접 찾아다가 눈 앞에 대령해주는 셈이다. 우리는 가만히 앉아서 서평집을 읽으며 마음에 드는 책 제목을 적기만 하면 된다. 이 얼마나 매력적인 책인가.(심지어 <한국 소설이 좋아서> E-book은 무료로 다운로드할 수 있다!) 이 책을 기획한 장강명 작가는 <댓글부대>로 수상한 오늘의 작가상 상금으로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기획했고 출판했다.(한 번 더 강조하자면 그 덕에 우리는 이 노다지 같은 책을 무료로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기획자의 말을 보면 장강명 작가가 얼마나 한국 소설을 사랑하는지 절절히 느껴진다. '한국 소설이 재미없다'는 불평에 '사실 한국 소설 정말 재미있는 거 많이 나왔어, 근데 잘 홍보가 안된 거야,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됐다고' 하며 한국 소설을 변호하는 모습이나, 문학성이나 메시지가 아닌 재미를 기준으로 서평이 실릴 작품을 정해 달라는 부탁, 최근 10년 새 나온 한국 소설로 제한하고 베스트셀러나 유명한 문학상을 받은 작품은 빼 달라는 사항 등을 보면 지금 현재 소설을 쓰고 있는 한국 작가들과 그들의 소설에 대한 애정, 제대로 빛을 보지 못한 좋은 작품들에 대한 안타까움, 한국 소설을 홍보하고 추천할 플랫폼 혹은 기회의 부족함에 대한 아쉬움을 볼 수 있다. 개인적으로 과거, 특히 학창 시절에는 나도 한국 소설은 재미가 없다고 생각했었다. 너무 순문학에 치중되어 있다고 느꼈던 당시의 한국 소설은 내 관심 밖이었다. 어린 나는 흥미진진하고 스릴 넘치며 서사에 중점을 둔 외국의 장르 소설과 대중 소설들에 마음을 뺏겼었고 한국 소설은 재미없는 소설, 어려운 이야기만 잔뜩 늘어놓는 소설이라고 생각해 멀리 했었다. 하지만 한국 소설계도 점점 변화하고 있다. 이제 한국어로 된 온갖 장르 소설들을 만날 수 있는 시대가 된 것이다. SF, 판타지, 호러, 좀비, 로맨스, 미스터리, 추리 등등 한국어로 쓰인 온갖 장르 소설들이 쏟아지고 있다. 안타까운 건 그 많은 소설 중 대부분은 독자들과 만날 기회가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이다. 한국인이 쓴 너무나 흥미진진한 SF 소설이나 상상도 못 한 트릭을 보여주는 추리 소설, 방대한 세계관과 가슴 떨리는 서사를 지닌 판타지 소설들이 홍보와 마케팅 플랫폼의 부족으로 인해 독자를 만나지도 못한 채 사장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이다. 물론 점점 시간이 갈수록 상황이 나아지고 있긴 하지만 아직 그 변화가 미약한 것은 사실이다. <한국 소설이 좋아서>는 그러한 안타까운 일들을 조금이라도 극복하기 위한 장강명 작가의 노력인 셈이다. <한국 소설이 좋아서>에는 총 50인의 필자들이 각각 자신이 추천하는 책에 대한 애정을 듬뿍 담아 쓴 서평 50개가 실려 있다. 50인의 필자들은 아주 다양한 직군에 종사하고 있다. 출판사 편집자나 독립 서점 주인도 있고 뮤지션, 헌책방 대표, 응급의학과 전문의, 소설가, 시인, 온라인 서점 마케팅 실장 등등. 각계각층의 인사들이 애정하고 추천하는 한국 소설 50편을 책 한 권으로 만나볼 수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글 자체도 읽는 맛이 쏠쏠하다. 어떤 글은 자신이 추천하는 책에 대한 애정이 뚝뚝 흘러넘치고, 어떤 글은 마치 서평 자체가 소설인 양 소개하는 책의 끝이 궁금해 참을 수 없게 만들며, 어떤 글은 추천하는 책에 대한 색다른 시각과 진지한 접근을 통해 이 책의 내용이 도대체 뭔지 알고 싶게 만든다. 결국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다 읽고 난 후 읽어야 할 책만 잔뜩 늘고 말았다.(아직 사놓은 책들도 다 못 읽었는데 또 온라인 서점을 들락거려야 할 참이다.)  유명도나 베스트셀러가 소설의 가치를 정해주지는 않는다. 이 책은 숨겨진 보석들, 알려지지 않은 가치 있는 소설들을 여러분의 눈 앞에 가지런히 정리해 대령한다. 재미있고 흥미진진하고 손에서 놓을 수 없는 한국 소설들을 찾고 싶은가? 그렇다면 <한국 소설이 좋아서>를 읽어보기를 바란다. 당신이 원하는 한국 소설로 가는 길을 알려주는 지도와 나침반이 되어 줄 것이다.(세 번째로 강조하자면, 무료로 다운로드하여 읽을 수 있다!) 책 속 한 문장 '한국 소설은 재미없다'는 불평을 종종 듣습니다. 실은 저는 재미있는 한국 소설들이 지난 몇 년 사이 꽤 나왔는데 이런저런 이유로 독자들에게 제대로 전달이 안 되지 않았나 의심합니다.
위대한 개츠비
'위대한 개츠비' / F. 스콧 피츠제럴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읽어보지는 않았더라도 누구나 제목은 아는 소설이다. 위대한 개츠비. 그만큼 유명하고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친 소설이며 개츠비적(Gatsbyesque)이라는 신조어까지 만들어낸 소설. 처음 이 소설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건 무라카미 하루키의 노르웨이의 숲을 읽고 나서였다. 노르웨이의 숲 안에서 위대한 개츠비라는 책이 여러 번 언급되는데 시간이 꽤 지나서야 읽게 되었다. 대략적인 줄거리를 알고 있었고, 현대인이 읽기에는 조금 지루할 수도 있는 고전임에도 필자는 꽤 재밌게 읽었다. 그리고 왜 그렇게 대단한 소설로 불리는지에 대해서도 약간은 알 수 있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닉 캐러웨이라는 인물의 시선에서 쓰였다. 닉은 소설의 등장인물이자 관찰자의 역할을 고루 수행하며 때로는 이야기의 밖에서, 때로는 안에서 이야기를 서술한다. 닉을 제외한 주요 등장인물은 개츠비, 데이지, 톰이다. 개츠비는 닉의 옆집인 엄청난 대저택에 사는 인물이다. 매일 본인의 저택에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파티를 열어 사람들을 초대하지만 그 누구도 개츠비의 정체에 대해서는 제대로 아는 바가 없고 왜 이런 파티를 매일 여는지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다. 톰과 데이지는 웨스트 에그(닉과 개츠비가 사는 곳) 맞은 편의 이스트 에그에 살고 있는 부부이다. 데이지는 닉의 친척이며 어릴 적부터 부유한 집안에서 살아온 여성이고 톰은 대학생 시절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에 마찬가지로 부잣집 출신이다. 이렇게 세 인물에 닉까지 네 인물이 벌이는 이야기가 위대한 개츠비의 주 내용이다. 소설의 스토리는 간단하다. 개츠비는 5년 전 데이지와 서로 사랑했으나 가난했던 그는 결국 데이지와 이어지지 못하고 데이지는 부잣집 도련님에 유명한 미식축구 선수였던 톰과 결혼하게 된다. 그러나 데이지를 잊지 못했던 개츠비는 자신의 가난함이 데이지와의 사이에 걸림돌이었다고 생각해 5년간 온갖 불법적인 일들에 손을 대 엄청난 부를 쌓는다. 부자가 된 개츠비는 데이지가 살고 있는 이스트 에그와 만 하나를 사이에 두고 있는 웨스트 에그에 대저택을 지은 후 매일매일 호화로운 파티를 벌인다. 언젠가 데이지가 이 파티에 와서 자신을 보게 되기를 바라며. 그러던 차 옆집에 살던 닉이 데이지와 친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닉을 통해 데이지를 만나 다시 한번 사랑을 확인한다. 하지만 데이지는 결국 톰과 개츠비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다가 톰을 선택한다. 그리고 개츠비는 데이지의 죄를 뒤집어쓴 채 죽음을 맞이하고 데이지와 톰은 죽은 개츠비를 뒤로 하고 도망친다. 가장 먼저 느낀 건 개츠비의 순수함이었다. 5년 전의 사랑을 잊지 못하고 그녀와 어울리는 사람이 되기 위해 엄청난 노력으로 부를 쌓았지만 데이지의 앞에 직접 나타나지도 못하고 그저 계속해서 호화로운 파티를 여는 개츠비. 한 번이나마 데이지가 자신의 저택에서 뿜어지는 화려한 불빛들을 봐주기를 바라며 파티를 열던 개츠비에게 5년 동안 모든 것을 바쳐 사랑했던 여자는 점점 커져갔다. 닿을 수 없는 꽃처럼. 그러나 다시 만난 그녀는 상류층의 지위와 위치를 버릴 수 없는 여성이었고 하류층인 데다 불법으로 돈을 쌓아 올린 개츠비를 결국에는 저버린다. 그런 그녀의 죄를 뒤집어쓰고 죽게 된 개츠비. 너무나 순수하고 열정적인, 그래서 언제든지 쌓아 올린 부를 데이지를 위해 던져 버릴 수 있는 그이기에 스콧 피츠제럴드는 위대한을 개츠비의 앞에 붙이지 않았나 생각한다. 이 소설은 1920년대 미국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감당할 수 없는 경제 호황과 그로 인한 호화롭고 사치스러운 생활이 이어지는 나날들. 물질주의가 넘쳐흐르고 그에 다른 모든 것들이 잠겨버린 사회. 그 당시의 미국 사회를 그대로 대변하는 인물이 톰과 데이지이고 작가가 제시한, 우리가 지켜야 할 것들을 보여주는 인물이 개츠비가 아닌가 생각한다. 톰은 극단적인 인종차별주의자이며 데이지를 두고 다른 여인과 외도를 하고 있고 마지막에는 결국 개츠비가 죽도록 만든다. 부잣집 도련님에 상류층의 인물이지만 부도덕하고 추잡한 인간성을 가진 인물이다. 데이지 또한 남편의 외도를 알고 있고 그를 경멸하지만 결국 상류층의 지위를 버릴 수 없기에 개츠비를 저버리고 톰을 선택한다. 심지어 자신의 잘못까지 개츠비에게 떠넘겨 버린다. 그러나 개츠비는 그들과 달랐다. 톰과 데이지가 추구하던 돈, 물질, 육체적인 쾌락, 상류층의 지위와 권력보다 중요한 것이 그에게는 있었다. 5년 전에 자신이 느꼈던 데이지에 대한 사랑, 그것을 위해 개츠비는 모든 것을 바친 것이다.  그 당시의 미국 사회는 전체가 물질주의에 찌들어 있었기에 오히려 톰과 데이지가 일반적인 보통 사람이라고 볼 수 있다. 물질과 쾌락이 모든 것에 앞서는 시대이니 말이다. 한 개인이 사회의 흐름을 거스르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하지만 그 흐름을 거슬러 자신만의 가치를 발견한 개츠비이기에 위대한 개츠비인 것이다. 이 소설 속의 개츠비는 당시 사람들에게 지금 미국 사회가 얼마나 잘못되어 있는지, 지금 사회가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만드는 경종이 되었을 것이고 그 점이 바로 이 소설을 위대한 고전의 반열에 올려놓지 않았나 생각한다. 100년이 지났음에도 재미있는 소설이다. 어떻게 보면 연애소설로 볼 수도 있기에 접근하기도 좋고 현대인에게도 통하는 부분이 있다. 고전을 읽고 싶어 하는 사람들에게 추천할 만한 소설이다. 다 읽어갈 때쯤 어느새 개츠비에게 이입해 있는 자신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개츠비는 여전히 두 손을 호주머니에 찌른 채 억지로 아주 편안한 척하며, 심지어는 좀 따분하다는 듯 벽난로 장식에 몸을 기대고 있었다. (리뷰를 원하시는 책을 댓글에 적어주시면 직접 읽고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그리스인 조르바' / 니코스 카잔차키스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리스인 조르바. 이 소설 속 알렉시스 조르바의 모델은 작가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실제로 만났던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인물이다. 작가는 이 책이 소설이라기보다 조르바스에 대한 추도사에 가깝다고 말한다. 그만큼 조르바스는 작가에게 엄청난 영향을 준 인물이었다. 이 소설이자 추도사 속에는 빛나는 삶을 살아가는 조르바의 모습이 그대로 담겨 있었고 나는 니코스 카잔차키스가 왜 그에 대한 이야기를 이토록 긴 글로 써 내려갈 수밖에 없었는지 깨달았다. 소설 속 화자이자 주인공인 '나'는 늘 책을 읽고 고뇌하며 이상을 추구하는 지식인이지만 어느 순간 자신이 구체적인 삶의 현장 속으로 뛰어들어본 적이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삶의 치열함 속에서 무언가 얻을 것이 있으리라고 생각한 '나'는 고향인 크레타 섬으로 돌아가 갈탄 광산을 운영하기로 결심한다. 피레우스 항구에서 크레타행 배를 기다리던 '나'에게 갑자기 한 늙은 노인, 조르바가 다가와 다짜고짜 자신도 크레타 섬으로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어떤 일이든 잘 해낼 자신이 있으며 수프 하나는 기똥차게 잘 만드니 자신을 요리사로라도 고용하라는 조르바. 그의 거침없는 말과 행동거지에 '나'는 왠지 모를 호감을 느끼고 결국 조르바와 함께 크레타 섬으로 향한다. 조르바와 함께 늙은 마담 오르탕스의 집에 머물게 된 '나'는 갈탄 광산의 현장 책임자로 조르바를 고용한다. '나'와 조르바는 하루 일과를 마치면 저녁을 먹으며 늘 함께 이야기를 나눈다. 조르바의 인생 이야기에는 책에만 파묻혀 있던 '나'는 알지 못하는 생동감이 넘쳐났고 '나'는 갈탄 광산이 아니라 조르바와의 대화, 저녁 식사에 점점 빠져들게 된다. 거침없는 말과 행동, 책 속에서 해답을 얻지 못했던 인간과 신, 여러 인생의 문제들의 핵심을 꿰뚫는 경험에서 우러난 통찰력, 평범한 것도 항상 새롭게 바라보는 시각 등 '나'는 조르바에게서 많은 것을 배운다. 책 속의 글자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인생의 경험에서 우러난 날카로운 이야기들을 조르바는 아낌없이 풀어놓는다. 갈탄 광산의 일이 잘 풀리지 않아 돈을 날리게 되었지만 '나'는 조르바와의 대화를 통해 잃은 돈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얻게 된다. 하지만 결국 갈탄 광산의 일이 실패하며 둘은 각자의 길을 가게 된다. 가끔씩 조르바를 회상하던 '나'에게 몇 년의 시간이 지나 조르바의 부고가 날아온다. '나'는 그때야 비로소 자신이 알고 있는 조르바에 대한 모든 것을 글로 쓰기로 결심한다. 그 글이 바로 이 '그리스인 조르바'인 것이다. 이 소설은 니코스 카잔차키스의 자전적인 소설이다. 실제로 작가의 행보가 소설 속 화자와 많은 부분에서 겹치고 기오르고스 조르바스라는 소설 속 조르바의 실존 모델이 존재한다는 점도 그렇다. 소설 속 이야기처럼 실제로 니코스 카잔차키스도 조르바스에게 커다란 영향을 받은 듯하다. '나'는 조르바와 많은 대화를 나누며 큰 충격을 받는다. 수없이 많은 책을 읽고 철학자들의 사상을 공부하고 인간이라는 존재에 대해 끝없이 고뇌하던 '나'의 물음들을 조르바는 단숨에 해결해버린다. 자신의 내면이 원하는 대로 슬플 때 슬퍼하고, 기쁠 때 기뻐하며 그 순간의 감정들을 아낌없이 표현하는 조르바는 늘 행동보다 고민과 생각이 앞서는 나를 질책한다. 그놈의 책을 다 불태워버리면 삶을 좀 더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말하고 똑똑한 두뇌란 이것저것 재고 이익과 손해를 따지는 '영원한 식료품 상인'이라 말한다. 이것저것 생각하느라 진정한 삶을 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다. 이렇듯 조르바는 '나'가 끊임없이 고민하는 문제들을 이성적 고민이 아니라 그 순간 자신의 감정과 내면에 대한 충실함, 그리고 직관을 통해 마치 알렉산드로스 대왕이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풀듯이 단칼에 잘라내 버린다. 복잡하게 엉켜있는 문제를 하나하나 고심하느라 생각이 앞서 매듭에 손조차 대지 못하고 있던 나에게 매듭을 칼로 잘라버리는 조르바의 대답은 신선한 충격을 안겨준다. 이 소설 속에서 지속적으로 반복되는 메시지는 삶의 순간들에 대한 충실함이다. '나'가 철학적 물음과 고민에 빠져 어떤 것도 행동으로 옮기지 못하고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는 삶을 허비하고 있는 사이, 조르바는 매 순간 떠오르는 해의 찬란한 빛, 바람에 흔들리는 꽃의 모습, 검푸른 바다의 철썩거리는 파도 소리를 마치 처음 경험하듯 환희에 가득 차 바라보며 삶의 아름다움과 기쁨을 만끽하고, 식사 시간이면 자신의 배고픔을 해결해주는 음식의 맛과 향과 포만감에 집중해 육체를 활동할 수 있도록 가득 채우는 데 전념하고, 아름다운 여자를 보면 그 여자에게 사랑을 말하고 기쁨을 줌으로써 자신과 그녀의 육체적, 정신적 행복을 채우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나'는 그런 조르바를 바라보며 언젠가 죽음으로 끝나게 될 삶을 충실히 살아간다는 것, 자신의 내면에서 자신의 삶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아내는 법을 배우며 현실과 동떨어진 물음들에 매몰되어 책 속에만 파묻혀 있던 지식인의 모습에서 점점 변화해 간다. 조르바의 모습은 니체가 말하는 '초인'에 가깝다. 신에 기대어 자신의 나약함을 초월적 존재에 의지하려고만 하는, 스스로를 신의 노예로 만드는 자. 신을 부정하며 허무주의와 맞닥뜨려 인간이란 존재의 의미를 찾을 노력도 하지 않는, 스스로의 삶에 충실하지 않고 삶을 긍정하지 않는 자. 조르바는 그러한 단계를 뛰어넘은 인간이다. 인간은 언젠가 죽는다는 것을 완전히 인지하고 있고, 인간이 초월자에 의해 어떤 사명을 띠고 지구 상에 나타나 인간의 존재가 태어나는 그 순간 살아가야만 하는 의미가 부여되어 있는 것이 아님을 알고 있다. 그럼에도 조르바는 인간이란 무의미하고 그저 태어나 죽을 뿐인 어떤 가치도 없는 존재라는 식의 허무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스스로 자신의 삶에서 아름다움과 기쁨을 찾아내고 태어난 이래로 죽음을 향해 달려가고 있음에도 지금 이 순간 태양과 바다와 공기와 꽃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는 사실에 충실하며 그곳에서 오는 자신의 육체적, 정신적 충만감을 만끽하는 자가 바로 조르바다. 스스로 삶의 가치를 만들고 긍정하는, 초월한 자(초인)인 것이다. 소설 속에서 과부가 살해당하는 장면을 보면 조르바와 '나', 그리고 군중의 차이가 확연히 드러난다. 군중은 과부가 남자들을 홀린다는 이유로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죽이려 든다. '나'는 과부를 죽이려는 군중들을 바라보며 그것이 잘못되었다고 인지는 하고 있으나 적극적으로 끼어들어 말리지는 못하고 관망할 뿐이다. 조르바는 군중의 광기에 휩쓸리지 않고 귀를 뜯기면서도 과부를 죽이려는 사람들들을 막아선다. 군중은 하느님의 이름을 외치며 과부를 갈 곳 잃은 분노의 희생양으로 결정한다. 그 군중 속에는 과연 이 일이 맞는 것인가 스스로 자문하며 옳고 그름을 규명하려는 자가 없다. 그저 잘못 해석되고 비틀린 기독교적 윤리관을 맹목적으로 믿는 자들, 주변의 열기와 광기와 휩쓸려 스스로 판단하려는 노력조차 하지 않고 과부에게 칼날을 들이미는 자들 뿐이다. '나'는 군중보다는 낫지만 적극적으로 사태에 끼어들어 과부를 구해내지는 못한다. 행동하지 못하는 자가 바로 '나'이다. 옳다고 느끼는 자신에게 즉시 충실하지 못하고 일의 합리성과 옳음에 대한 판단에 너무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며 자신의 결정을 늘 의심한다. 그런 '나'가 할 수 있는 일은 옆에 있는 양치기에게 그녀에 대한 자비를 베풀라고 말하는 것뿐이다. 그러나 조르바는 군중과도, '나'와도 다르다. 조르바는 과부를 죽이려는 자들을 보자마자 뛰어들어 그들을 막아선다. 귀가 뜯기는 부상을 당하면서도 과부를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결국 과부가 죽고 난 뒤 조르바는 '슬플 때는 진짜 눈물을 뚝뚝 흘리고, 기쁠 때는 고운 형이상학의 체로 걸러 내느라 기쁨을 잡치는 법이 없는 그런 사내의 고통'을 겪는다. 조르바는 군중들이 과부를 죽이는 일이 옳지 않다고 판단하자마자 몸을 던져 그들을 막기 위해 노력한다. 군중의 광기에 휩쓸려 자신을 잃어버리지도 않고 '나'처럼 방관하지도 않는다. 그 순간 자신이 옳다고 생각하는 일을 행하고 그 일이 좌절되어 과부가 죽은 후에는 온전히 슬퍼하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이다. 주변의 행동이나 시선, 종교적 윤리적 제도와 가치에 휩쓸리지 않고 자신만의 가치를 스스로 만들고 결정하고 판단하는 자, 순간순간에 충실하게 행동하는 자, 고통도 기쁨도 슬픔도 고뇌도 그대로 받아들이고 체험하며 외면하지 않는 자,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죽음으로 달려가고 있다는 것을 알면서도 지금 살아있는 자신의 모든 것을 긍정하는 자, 그런 사람, 초인이 바로 조르바인 것이다. '신은 죽었다'라고 말하는 니체의 무신론적 실존주의의 관점에서 이 소설은 책과 먹물 속에 파묻혀 삶과 동떨어져 있던 '나'가 초인 조르바의 영향을 받아 변화해가는 과정을 그리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이성과 정신의 세계에서 꿈꾸듯 이상만을 그리며 살아가던 '나'가 자신의 '실존' 즉, 자신이 관념의 세계가 아닌 이 시간, 이 장소, 이 현실 세계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조르바를 통해 온 몸과 정신으로 체감하며 순간의 삶을 사는 인간으로 변화해 가는 과정은 마치 '나'가 새로운 인간으로 다시 태어나는 듯했다. 특히 소설 후반부, '나'가 생각과 합리와 이성을 거쳐 나온 언어, 말로는 도저히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을 표현하기 위해 조르바에게 그의 언어, 춤을 가르쳐달라고 하며 둘이 함께 춤을 추는 모습은 드디어 '나'가 먹물과 책으로 둘러 싸인 한 세계를 깨고 나온 듯한 느낌을 주었다. '실존은 본질에 앞선다' 무신론적 실존주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의 말이다. 조르바는 무엇보다도 자신의 존재를 철저히 감각하고 느끼는 자다. 그에게는 지금 내 앞에 있는 여자와 자신이 행복해지는 것, 지금 맛있는 음식과 달콤한 포도주를 마시는 것, 지금 풍겨오는 레몬과 오렌지 나무의 향기를 맡는 것, 지금 느껴지는 슬픔과 기쁨을 온전히 온몸으로 체험하는 것을 통해 자신이 살아있음을 자각하고 자신의 삶을 살아나가는 것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한 번뿐인 삶은 한 번 뿐이기에 소중하고 한 번 뿐이기에 온전히 경험해야만 한다. 삶을 살아가는 이유가 무엇인지 알고 싶다면 조르바의 인생을 보고 그의 이야기를 들어라. 그는 오롯이 그 자신만으로 삶을 긍정하고 인간의 존재 가치와 의미를 찾아내는 자다. 조르바에게 "제가 살아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라고 물으면 아마도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싶다. "저 푸른 바다를 보게. 어찌 저렇게도 일렁이는지. 너무나 아름다워 눈물이 날 것 같지 않은가?" 소설 속 한 문장 "보스 양반, 돌멩이들과 꽃과 비가 하는 말을 알아들을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무튼, 망원동> 김민섭
<아무튼, 망원동> / 김민섭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아무튼, 망원동>을 처음 접한 건 팟캐스트 '책, 이게 뭐라고'에서였다. 게스트로 나온 김민섭 작가와 뮤지션 요조, 그리고 장강명 작가의 대화를 실험을 하며 마치 노동요처럼 꽤나 즐겁게 들었던 기억이 있다. 그러나 당시의 나에게는 읽고 싶은 문학작품들이 쌓여있었고 그래서 굳이 <아무튼, 망원동>을 찾아 읽을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리고 몇 개월이 지나서였을까, YES 24 북클럽(전자책을 정액제로 무제한으로 읽을 수 있다.)에서 읽을 책이 없나 찾아보던 중 아무튼 시리즈가 눈에 띄었다. 마침 그 안에 <아무튼, 망원동>이 있었고 미리 다운로드하여 놓은 전자책을 해외 학회 출장을 가는 국제선 비행기 안에서 가벼운 마음으로 읽었다.(뮤지션 요조가 쓴 <아무튼, 떡볶이>도 읽고 싶었으나 아직 업데이트가 되지 않아 아쉽게도 읽지 못했다. 업데이트가 너무 늦어지면 그냥 종이책을 사버릴 생각이다.) 나는 어렸을 적 은평구 수색동과 불광동에 살았었고 <아무튼, 망원동> 속에 나오는 망원, 합정, 상암 등의 장소는 6호선 지하철을 타고 몇 정거장이면 갈 수 있는 거리였다. 그래서 그 장소들은 김민섭 작가만큼은 아니지만 내 어린 시절 속에도 한 부분으로 남아 있다. 나는 이 책을 마치 내 어린 시절 친구가 쓴 이야기처럼 읽었다. 읽는 동안 매우 즐거웠고, 어렸던 나와 20년이 넘게 지난 지금도 내 속에서는 여전히 어린 친구들이 생각났다. 무얼 하는지 알 길 없는 그 친구들은 훌쩍 커 버린 나와는 다르게 아직도 어린 모습으로 내게 남아 있고 책을 덮을 때, 그들을 현실에서 만나고픈 마음과 만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충돌했다. 결국 나는 그들에게 연락하지 않기로 했다. 지금의 친구들을 만난다면 내 안의 어린 친구들은 사라져 버릴 것이기 때문이다. 그건 꽤 안타까운 일이다. 책을 읽는 내내 김민섭 작가가 자신의 어린 시절과, 어린 시절을 보낸 망원동이라는 지역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느껴졌다. 아니, 사랑이라기보다는 그냥 그곳이 내가 원래 있어야 하는, 떨어져 있어도 속해 있는 곳인 듯한 감각이라고 해야 할까. 누군가가 어떤 것을 애정하고 그 애정이 자신도 모르게 뿜어져 나와 다른 사람에게 전달될 때, 그 애정은 사람을 미소 짓게 만든다. 저 사람은 저렇게나 망원동을, 혹은 다른 무언가를 사랑하는구나 하는 느낌. 그 애정이 고스란히 글에서 전해져 온다. 그래서 웃으며 이 책을 읽었으나, 과연 나는 어떤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다. 나는 내 어린 시절을, 내 어린 시절 살았던 집과 다녔던 학교와 등하교 때 탔던 7730번 버스와 500원짜리 컵떡볶이가 맛있던 집 앞 분식집과 철권 게임기가 있던 학교 앞 문방구를 애정 하고 있을까. 아무래도 그렇지 않은 듯했고 나는 책을 읽으며 미소 짓는 동시에 김민섭 작가가 부러웠다. 어린 시절을 저렇게 애정 어린 글로 표현할 수 있는 그가. 책 속에서 가장 인상 깊었던 부분은 난지도에 관한 내용이었다. 공공연하게 공기 중에 퍼져 있는 난지도에서 온 아이들에 대한 차별과 배제, 혐오에 대한 내용은 내 학창 시절과도 겹쳤다. 내가 학교를 다니던 시절, 책에 나오는 난지도 정도는 아니더라도 흔히 말하는 브랜드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일반 아파트에 사는 아이들, 연립 주택이나 빌라에 사는 아이들 사이에 은밀한 선 같은 것이 있었다. 눈에 선명히 보이지는 않지만 주변 시야에 흐릿하게 늘 보이는 어떤 아지랑이처럼 대화 중간에, 아이들이 쓰는 학용품의 가격에, 겨울이면 걸치고 다니는 외투의 내장재 종류에 그 선은 은밀하고 미묘하게 그어져 있었고 가끔 그 선이 선명해지는 순간이면 꼭 어떤 사건이 나곤 했다. 사소하게는 절교에서부터 심각하게는 왕따나, 폭력 사태까지. 쓰레기산이 있는 난지도에 사는 아이들에게 선명히 그어져 있던 선이 내 학창 시절을 지나 현재로 오면서 조금씩 희미해졌다는 사실에 기뻐해야 할지 아직도 그 선의 소멸이 가까워 보이지는 않는다는 사실에 슬퍼해야 할지 모르겠다. 이 책에 한 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6호선 지하철의 무한루프가 나오지 않았다는 점이다.(김민섭 작가는 망원동에 살았으니 아마 응암 순환선의 무서움을 느낄 일이 별로 없었을 것이다. 아쉽다기보다는 부럽다고 해야 할까?) 불광동에 살던 나는 아직도 기억한다. 분명 증산역에서 눈을 감았는데 눈을 뜨니 다시 증산역에 도착했을 때의 그 무서움을 말이다. 나는 늘 월드컵 경기장 역쯤부터 정신을 바짝 차리고 있어야 했다.(그렇지 않으면 영원히 불광역에 도착하지 못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책의 제목처럼 아무튼, 응암 순환선의 무서움을 자주 겪을 일이 없던 김민섭 작가에게 부러움과 질투를 표하며 글을 마치고자 한다. 이미 10~20년 전의 경험이 되어버린 응암 순환선의 타임워프와 내 어린 시절들을 다시 떠올리게 해 준 <아무튼, 망원동>과 김민섭 작가에게 감사한다. 어린 나를 마주할 용기가 조금 더 생긴 듯하다. 책 속 한 문장 굳이 어디 사느냐고 물어보지 않아도 그들이 동의 경계를 넘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입은 옷이, 싸오는 반찬이, 그들을 대하는 일부 교사의 태도가 조금씩 달랐다. 난지도에 가면 안 된다는 훈화를 들으며 그들이 느꼈을 자괴감을, 나는 잘 상상할 수 없다. 난지도는 '산'이면서 하나의 '섬'이었다. 격리하고 배제해야 할 도시의 무인도 같았다.
기생충과는 다르다, '알라딘'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입니다. 이제 내일이면 종강이네요! 드디어 밀려뒀던 포스팅과 편집을 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이제는 바로바로 영화는 후기쓸게요~ 토이스토리는 바로 개봉날 보고 올 예정입니다. (기대해주세욧) 오늘의 영화는 윌 스미스 하드캐리, 영화 '알라딘'입니다. 우와 정말 너무하긴 하네요, 5월달 영화를 이제서야 포스팅하다니요! 그래도 혹여나 궁금하신 분들을 위해뒤늦게나마 포스팅을 올리겠습니다. 기생충과는 다르다 일단 단연 돋보이는 점은 한국영화 '기생충'과의 차별점입니다. 기생충의 주제는 이전 포스팅에서도 꽤 자세히 말씀드렸지만 자신의 분수를 알아라는 말로 해석됩니다. 계층간 이동은 꿈에서나 가능하고 감히 선을 넘으려 한다면 비극적인 결말을 맞이해야만 하죠. 이는 영화 속 계단 하나 올라가는 것조차 어려운 부분에서 극명하게 보였습니다. 그런데 알라딘은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자신의 분수를 당당히 보여주라고 얘기하죠. 그리고 계급은 중요하지 않고 진흙 속 숨겨진 보석 같은 인성만 있다면 얼마든지 꿈을 이룰 수 있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동화라는 특성상 당연히 긍정적인 견해를 품고 있기 때문입니다. 아마 기생충에서 받은 충격이 크신 분들이라면 알라딘을 통해 희망을 충전하시는 걸 추천드립니다. 너의 가치를 믿어 알라딘의 주제는 이것입니다. '너의 가치를 믿어' 너무나 상투적이고 뻔한 말이지만 그만큼 언제나 강조됐던 교훈이기도 하죠. 자신을 잃어가고 다른 사람의 시선에 신경쓰며 살아가는 현대인들에게는 더욱더 따뜻한 말입니다. 그리고 지니의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참 좋았습니다. 자신을 감추려는 알라딘에게 '거짓된 자신이 얻는 게 많을수록 진실된 자신이 얻는 건 줄어들어'라고 말할 때가 유독 인상 깊네요. 우리가 디즈니를 사랑하고 몇 번이고 읽었던 동화를 실사를 통해 굳이 또 만나고 싶은 이유는 화려해진 볼거리와 거대한 스케일뿐만 아니라 잊고 있었던 가치를 곱씹고 싶어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윌 스미스 하드캐리 다시 이 영화를 보고 싶어진다면 그건 분명 윌 스미스 때문입니다. 정말 캐릭터 싱크로율도 좋고 매력이 철철 넘칩니다. 내가 그동안 왜 윌 스미스라는 배우를 좋아했을까 생각이 들었는데 알라딘을 통해 다시금 확신이 들었습니다. 그는 범접할 수 없는 자신의 연기영역이 있습니다. 공감과 감동을 잘 이끌어내는 배우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특히나 알라딘을 왕자로 만들어 아라비안을 횡진하는 퍼포먼스는 영화 통틀어 가장 좋았습니다. 윌스미스의 존재감, 화려한 퍼포먼스, 귀 호강하는 노래는 알면서도 당하는 디즈니식 매력발산입니다. 쿠키영상마저 퍼포먼스처럼 쿠키영상은 공식적으로 없다고 봅니다. 하지만 영화가 끝나도 즐거운 댄스파티는 계속됩니다. 엔딩크레딧이 시작하기 전 모든 배우들이 총출동해 한바탕 신나는 퍼포먼스를 보여주죠. 기나긴 아라비안 나이트를 모험하신 관객들에게 마지막까지 선물을 톡톡히 챙겨줍니다. 물론 알라딘이라는 원작에 지나치게 충실하다는 면이 강하긴 합니다. 안정적이라는 말도 좋지만 지나치게 변주를 주기보다 오히려 기대만큼 동심을 일깨워준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알라딘을 보고 나오시면 당분간은 OST를 흥얼거릴지도 모릅니다. 노래가 너무 좋거든요! 어 홀~뉴 월드~ 영화 '알라딘'이었습니다.
사랑 인정 칭찬 존경받고 싶은 마음(ft.욕구의 구걸꾼)
사랑 인정 칭찬 존경받고 싶은 마음(ft.욕구의 구걸꾼) 모든 사람에게 사랑받고 싶었다. 오로지 나만 바라봤으면 했다.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고 싶었다. 나를 최고로 봐줬으면 했다. 모든 사람에게 칭찬받고 싶었다. 내가 잘하는 것만 봐주길 바랐다. 모든 사람에게 존경받고 싶었다. 최고로 멋진 인간이 되길 바랐다. 나는 사랑 인정 칭찬 존경을 구걸하며 살아왔다. 여러분도 그런가요? 단어를 듣기만 해도 입안에 군침이 돌듯 흥분되네요. 사랑 인정 칭찬 존경 위의 네가지 음식만 먹으면 너무나도 행복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거침없이 네가지 음식에 욕심을 부립니다. 먹어도 먹어도 배부르지 않겠죠? 배가 터지도록 먹고 싶을 겁니다. 개에게 먹다남은 뼈다귀를 주면 허겁지겁 뼈의 살을 뜯어 먹습니다. 그래도 부족했는지 반짝반짝 광이 날 정도로 뼈다귀를 아직도 핧아 먹고 있습니다. 나중에는 뼈다귀만 봐도 미쳐 날뜁니다. 우리는... 사랑을 받기 위해서 구걸도 합니다. 사랑받기 위해 모든 걸 갖다 바칩니다. 자기 삶을 잃어 버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졸졸졸 쫓아다닙니다. 사랑하는 사람이 떠나면 자신과 사랑했던 대상을 훼손해 버립니다. 그렇게 사랑의 노예가 됩니다. 사랑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타인을 사랑해 줄 생각은 하지 않은채... 우리는... 인정받기 위해서 구걸도 합니다. 잘 보이려고 온갖 애교를 부립니다. 인정받으려고 자기 삶을 훼손해 버립니다. 인정 못 받으면 갑자기 돌변합니다. 무시당했다면서 화를 내고 욕을 합니다. 그렇게 인정의 노예가 됩니다. 인정을 받으려고만 합니다. 타인을 인정해줄 생각은 하지 않은채... 우리는... 칭찬받기 위해서 구걸도 합니다. 칭찬받기 위해서 거짓말도 합니다. 칭찬감옥에 감금된채 살아갑니다. 주인만을 졸졸졸 따라다니는 강아지마냥 마냥 예쁜짓만 합니다. 그러다가 나를 칭찬해주지 않으면 크게 짖거나 나중에는 물어 버립니다. 그렇게 칭찬의 노예가 됩니다. 타인을 칭찬해줄 생각은 하지 않은채... 우리는 존경받기 위해서 구걸도 합니다. 존경받기 위해서 단점을 숨깁니다. 추악함을 포장지로 숨겨 버립니다. 본래 모습이 드러날것이 두려워 매일 밤마다 악몽을 꾸며 살아갑니다. 누군가의 작은 비난에도 멘탈이 무너져서 자신과 타인의 삶을 훼손시켜 버립니다. 그렇게 존경의 노예가 됩니다. 타인을 존경해줄 생각은 하지 않은채... 사랑 인정 칭찬 존경받고 싶은 마음은 인간의 기본적인 욕구이기도 합니다. 그것을 통해서 내 존재를 확인하고 내가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고 소중한 사람이라는 감정을 경험하고 내가 이 사회에서 가치있는 사람이라는 것을 확인할테니까요. 그렇지만 이것은 실체가 없는 가짜입니다. 고통의 무더기일 뿐입니다. 처음에는 살코기가 많은 음식처럼 보이지만 달콤함은 잠시일뿐 결국 뼈다귀만 빨고 있는 자신을 마주하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중독이 되어 갑니다. 자신을 잃어버리고 그것의 노예가 됩니다. 그것이 없으면 죽을 듯 괴로워합니다. 아이에게서 장난감을 떼어내듯.. 개에게 뼈다귀를 떼어내듯.. 슬프게도.. 사랑을 받으려고 할수록 상대방은 당신을 싫어하게 됩니다. 결국 당신을 떠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을 사랑할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이제는 혐오합니다. 인정을 받으려고 할수록 당신은 불신의 대상이 될 겁니다. 인정을 받기는 커녕 누군가의 욕구를 채워주는 먹잇감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을 인정할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이제는 불신합니다. 칭찬을 받으려고 할수록 당신은 비난을 받게 될 것입니다. 결국 자신이 쓸모 없는 사람이라는 생각과 함께 우울해집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을 칭찬할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이제는 비난합니다. 존경을 받으려고 할수록 당신은 무가치한 사람이 될 것입니다. 결국 세상으로부터 버림을 받게 됩니다. 그리고 당신은 자신을 존경할수 없게 됩니다. 자신을 이제는 뼈다귀로 여깁니다. 나를 먼저 사랑해줘야 합니다. 내가 나를 인정해줘야 합니다. 내가 나를 칭찬해줘야 합니다. 내가 나를 존경해줘야 합니다. 나 조차도 나에게 주지 않는 것을 타인에게 갈구한다는 것은 말도 안되며 불가능합니다. 사랑 인정 칭찬 존경이 나쁜 것이니 그것을 멀리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에 집착하지 않아야 합니다. 사랑 인정 칭찬 존경은 노력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레 드러나는 현상인것 같습니다. 우리는 누군가에 의해서 살지 않습니다. 나에 의해서 살아갑니다. You are your master You make your future.
[덕질하면돼지] 책덕후의 책추천
그동안 읽었던 책으로 [덕질하면돼지] 이벤트에 참여합니다!!! 대학온 이후로 책이랑은 정말 담을쌓고 살았었지만 이대로는 스맡폰만 보는 멍청이가 될것 같아서 책을 읽기 시작했습니당. 작년 새해 목표를 책 많이 읽기로 세웠었는데, 혼자서는 흐지부지가 될 것 같아서 sns에 읽은 책 기록을 꾸준히 했어요. 나름대로 도움이 많이 됐어요! 책모임까진 아니지만 같이 책읽은 계정들 팔로우 해서 책추천도 받고 댓글도 다니까 동기부여가 되더라구요. 그래서 작년 한해는 책을 참 많이 읽었던 것 같아요. 무엇보다 작년엔 도서관에서 일을 하면서 계속 책에 둘러쌓인 환경에 있다보니 자연스레 책을 읽게 되더라구요. 역시 환경이 중요해...! 근데 요즘은 도서관일 그만두면서 다시 책이랑 멀어지기 시작했습니다 흑 ㅠㅠㅠ 다시 책이랑 가까워지는 계기로 삼으면서 작년에 읽은 책 중 몇권 소개해드릴게요. 1. [바깥은 여름] / 김애란 / 문학동네 오늘같이 눈오는 날씨에 잘어울리는 책입니다. 김애란 작가의 단편집인데요. 보고 있으면 가슴이 먹먹해지는 소설이에요. 김애란 작가의 담담한 문체 때문에 더 아리게 느껴진달까요? '바깥은 여름' 이라는 제목이 참 잘어울리는 소설인게, 이 책에 실린 단편 중 마지막편에서 이런 이야기가 나오거든요. 바깥은 뜨거운 여름인데, 나만 스노우볼처럼 시린 겨울 속에 있다고요. 전반적으로 '죽음'과 가까운 이야기들을 많이 담고 있어요. 그 누군가가 죽었어도 세상은 너무 정상적으로 평화롭게 돌아가잖아요. 처음엔 왜 이 소설의 제목이 '바깥은 여름'인지 했는데 책장을 덮고 나니 깊이 공감이 됐었어요. 먹먹한 겨울에 조용한 곳에 앉아서 읽기 좋은 소설입니다! 2. [아무래도 싫은 사람] / 마스다 미리 / 이봄 도서관에 마스다 미리 작가 전권이 있어서 자주 봤었는데 정말 쉽고 재밌게 호로록~~~ 읽을 수 있는 만화에요 특별할거 없는 그림체랑 내용인데, 그게 오히려 특별하게 느껴집니다 웃겨서 사진 찍어둔거 하나 올릴게요ㅋㅋㅋㅋㅋ 요런 간단한 그림체로 누구나 공감할만한 소소한 얘기를 담고 있는데 이거 보다보면 '사람 사는거 다 똑같구나~~' 하는 생각이 뙇 ㅋㅋㅋㅋㅋㅋ 같은 작가 시리즈 중에 [수짱의 연애], [내 누나], [느긋한 나의 작가생활] 등 많지만 전 그중에서 이 아무래도 싫은 사람을 젤 좋아해요. 마스다씨가 살아오면서 만난 싫은 사람에 대한 감정이나 대처들을 담았는데, 그게 참 공감이 되거든요. 결국 사람을 싫어하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이고, 그 사람을 열렬히 미워하거나 좋아하려고 노력할 필요 없다는 생각이 들게 해요. 그냥 사람을 싫어할수도 있지~ 하고 받아들이면 되는구나 ㅋㅋㅋㅋ 라고 생각할 수 있어요 물론 그게 어렵지만요 ㅎㅎ 그래도 마음에 작은 힐링을 줄 수 있는 책입니다!! 3. [너의 목소리가 들려] / 김영하 / 문학동네 이걸로 김영하 작가의 책을 처음 읽어봤는데 제가 상상했던 문체랑은 너무 달라서 놀랐던 기억이..!! 예능에서 나온 이미지 때문인지 부드럽고 서정적인 문체를 상상했었거든요!! 근데 템포가 빠르고 직설적인? 좀 과장하면 뼈때리는 문체더라구요 신기....!!! 암튼 이책은 이종석 나온 그 드라마랑 동명이죠 하지만 같은 작품은 아닙니다 저도 그런줄 알고 집었는데 찾아보니 아니더라구요. 읽는 내내 누가 이종석 캐릭터인가 고민했는데 아니었네요 헤헿 (드라마는 안봤어요) 고속터미널의 화장실에서 태어난, 역시 고아였을 십대 소녀로부터 잉태된 제이. 그 누구의 사랑도 받지 못하고 야생의 길에서 생존해야 하는 제이는 고아들의 우두머리가 된다. 줄거리는 이러해요! 서정적인 제목에 비해서 내용은 너무 현실적이고 때론 비참하거든요. 비행청소년에 대해서 다시 한번 생각하게 된 책이었어요. 워낙 흡입력이 강하고 빨라서 후루룩 읽을 수 있는 책입니다!! 추천 + 단편집 [엘리베이터에 낀 그남자는 어떻게 되었나] 라는 책도 재밌어요. 한 남자가 출근길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 낀 남자를 발견하는데요. 구하려고 하지만 예기치못한 불행이 계속되는...!! 그런 희안한 이야기입니다 ㅋㅋㅋㅋㅋㅋ 묘하게 현실적인게 인상깊어요 4. 가볍게 재밌게 볼 수 있는 시리즈 (1) 일단 오늘은 나한테 잘합시다 요 고구마툰을 그린 '도대체' 작가가 쓴 책인데요! 이 책도 같은 맥락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짧은 그림이랑 같이 공감 100% 이야기를 넣어놨는데, 에를 들면 이런거에요. 도서관에서 읽는데 너무 웃겨서 웃음 참았어요 휴 (2) 있으려나 서점 너무 귀여운 그림책이에요. 요약하자면 '책에 관한 책을 소개하는 서점에 관한 그림책' 입니다. 책에대한 애정이 느껴지는 소소한 행복이 담긴 책... (3)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이건 많이 보였을것 같은데 베스트셀러로 한참 올라왔었거든요. 원래 이런 자기계발서 싫어하는데 이건 평소에 자기계발서에서 느꼈던 그런게 없었어요. 가르치려한다거나, 다 잘될거야~ 라는 식으로 근거없이 희망적인 얘기만 한다거나 이런거 없이 소소한 힐링이 되는 책이었습니당. 제 책추천은 여기까지고용!! 꼭 3등 안에 들어서!! 상품을 받고싶네용~~~ @VingleKorean 댓글 많이 달아주세요~ ^*^ 감사합니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