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hdc
1,000+ Views

3.1절 100주년 대한독립만세 함성이 넘친 논산

3.1독립투쟁 100주년 논산벌에 울려 퍼진 대한독립만세!
3.1독립투쟁 100주년을 맞아 논산벌에서 5천여 시민이 모여 외친 대한독립만세 소리가 크게 울려 퍼졌습니다.


Comment
Suggested
Recent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강원도 가볼만한곳 영월 여행 1박2일 코스
<<강원도 가볼만한곳 영월 여행 1박2일 코스 첫날 >> #젊은달와이파크 #강원도가볼만한곳 #영월가볼만한곳 안녕하세요. 네이버 인플루언서 호미숙 여행작가입니다. 어김없이 새날은 밝아오고 지금 이순간도 과거로 흐르며 세월을 쌓고 있습니다. 봄이 무르익는 대지는 봄꽃들이 술렁입니다. 봄에 아기새들이 태어나는지 집 주변에서 짹짹이는 새들의 아침 하모니는 경쾌함과 상큼함을 불어 넣어줍니다. 날씨도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투명하게 시작합니다. 새것이란 의미는 선물 같습니다. 오늘도 새로운 한주의 월요일 시작입니다. 활기찬 하루 출발하세요~ 오늘 소개하는 국내여행지추천은 강원도 영월입니다. 영월에서 하룻밤 카라반 캠핑까지지 하게 된 1박2일 중 첫날 코스입니다. 강원도 가볼 만한 곳 영월 여행 코스 첫날 1. 영월 젊은 달 와이 파크(강릉 하슬라아트월드 분점) 2. 영월 주천 맛집 (다하누촌 주천점 원조 소머리국밥) 3. 요선암 돌개구멍. 요선정 4. 영월 법흥사(5대 적멸보궁) 5. 주천 다하누촌 법흥점 한우전문(바비큐용 한우 구매) 6. 영월 캠핑장 온수풀 운영(카라반, 글램핑, 단체펜션) 숙박 *댓글의 링크를 누르면 상세한 정보와 생생한 영상을 볼 수 있습니다* #국내여행지추천 #강원도가볼만한곳 #영월가볼만한곳 #강원도영월가볼만한곳 #강원도여행 #영월여행 #영월여행코스 #강원여행코스 #강원도1박2일 #1박2일여행 #젊은달와이파크 #영월법흥사 #법흥사 #적멸보궁 #요선암돌개구멍 #요선정 #영월별마로캠핑장 #영월캠핑장 #강원도미술관
문복산 드라잉 캠핑
하, 2주만에 또 왔어요 문복산... https://vin.gl/p/3645786?isrc=copylink 지난번에 우중캠핑 후 제대로 못말렸던 텐트 이번엔 바싹 말려서 가야죠 ㅎ 문복산 파쇄석은 첨이네요. 사이트가 엄청 넓은데요. 텐트치고 맥주 한잔... 저녁 메뉴는 훈제오리... 지난번에 날씨 때문에 제대로 불멍 못했었는데 이번엔 장작 세박스 가져왔답니다 ㅋ. 보복 불멍... 닭꼬치도 맛있네요. 오뎅탕까지... 역시 불멍은 좋네요... 둘쨋날 아침은 면식수햏... 모닝커피가 빠질수 없죠... 산책... 햐, 꽉꽉 찼네요... 언양에서 일하는 후배한테 소개받은 고기집에 왔는데 와우 웨이팅이 장난 아니네요... 가는날이 장날 ㅡ..ㅡ 자, 낮맥 시작합니다... 특정 부위를 이야기 하지않고 사람 수를 이야기하고 구워 먹을거라고 하니 알아서 썰어 주시더라구요. 역시 술술 넘어가서 술인건가 ㅋㅋㅋ 700g 정도 샀던것 같은데 낮맥하며 다 먹었어요 ㅋ 아, 이러면 안되는데 ㅋ... 저 저녁 9시 47분에 취침했지 말입니다 ㅡ..ㅡ 오늘 다 태워버리겠어~~~ 이 나무 너무 멋있더라구요... 와인과 짱구 ㅎ 하, 이번엔 세박스 다 태우고 가네요 ㅎ https://vin.gl/p/3675440?isrc=copylink 마지막날도 아침 면식수햏 하고 돌아가는 길에 커피 한잔하고 갑니다. 뒷풀이는 모듬회로다가...
"역사인물 성전환(TS)도 역사 왜곡일까?" 中 게임 이순신 TS 논란
덕수 이씨 대종회의 입장은? 얼마 전 한국에서 사전예약을 시작한 <초차원여친: 여신의 환상낙원>. "아름다운 여신들과 세계를 수호하고 명예와 부를 얻는 모험"을 그린 이 게임이 한 차례 도마 위에 올랐다. 한국에서 최고의 위인으로 손꼽히는 충무공 이순신을 여성으로 묘사했기 때문이다. TS된 <초차원여친>의 이순신. 현재 홈페이지에서 이 이미지는 내려간 상황이다. 게임물관리위원회 등급 분류 과정에서 일본 국적으로 기록된 이 게임은 중국의 텐룽 컬쳐 테크놀로지(Tianlong Culture Technology)가 서비스한다. 중국산 콘텐츠의 '문화 공정'으로 민감한 지금, 해외 게임이 한국 역사 인물을 여신으로 만든 것에 대해 불쾌하다는 입장과, TS는 서브컬쳐의 재미 요소 중 하나라는 입장으로 의견이 엇갈린다. 실제로 서브컬쳐에서 성전환(Trans-Sexual)을 의미하는 TS는 향유자들의 재미 요소가 된 지는 오래다. 역사인물의 TS 역시 상당히 자주 쓰이는 기법인데 <Fate 시리즈>에서는 아서 왕을 알트리아로 TS했고, <삼국지> 등장인물을 여성으로 바꾼 시도도 적지 않다. 2년 전에도 역사적 위인/신화속 영웅의 DNA를 복원한 미소녀 캐릭터들이 적들과 사투를 벌인다는 설정의 <진화소녀>가 나온 적 있다. 한국은 종친회의 존재로 실제 역사 인물의 부정적 묘사가 제한되는 편이다. 최근 전주 이씨 종친회는 최근 조선 왕조를 부정적으로 표현했다며 <조선구마사>의 방영 중단을 요구했다. 게임에서도 한국 역사 인물의 부정적 등장은 조심하는 편인데, 실제로 한국의 어느 게임은 임진왜란에서 중차대한 패전을 한 모 장수를 등장시키려 했다가 종친회의 반발을 예상해 삭제하기로 했다.  <초차원여친: 여신의 환상낙원>의 이순신에 대해 덕수 이씨 대종회는 어떤 입장일까? 대종회 관계자는 디스이즈게임과의 통화에서 "그쪽이 묘사한 게 조선 시대 충무공 이순신이라고 한다면 당연히 항의해야 하는 일"이라며 "덕수 이씨뿐 아니라 전 국민이 잘못 해석된 충무공에 대해선 따지고 바로 잡아야 한다"고 이야기했다. 한편, 2014년 서비스를 시작한 일본 게임 <시로 크로니클 조커>에도 과거 여러 역사 인물에 대한 TS가 이루어졌지만, 이순신은 TS를 하지 않았다. 대신 거북선과 함께 "도요토미 군을 상대로 엄청난 전과를 올린 조선의 영웅. 무용이 탁월했으나 정적의 모함을 받았다. 최후에는 흉탄에 맞아 쓰러진 비운의 영웅"으로 표현했다. 타국에서도 존경 받는 인물은 TS를 하는 대신, 역사에 가깝게 재구성한 것. <시로 크로니클 조커>의 이순신 [Update 21-04-14 12:40] 11시 44분, <초차원여친> 운영팀은 이순신 캐릭터를 게임에 업데이트하지 않기로 했다. 이들은 "역사에 대해 민감한 시기를 고려하지 못한 점에 대해서 죄송하다"고 사과했다. # 창작 자체는 자유로워야 하지만 주의 필요... 논란 이어지자 법 개정안 발의도 창작물에서 역사 인물을 실제와 다르게 표현하는 것 자체로 역사 왜곡이라고 부르기는 어렵다는 주장도 있다. 이미 무수히 많은 콘텐츠는 역사의 재현이 아닌 창작을 전제하고 새로운 이야기를 보여준다. 아픈 광해군 대신 그와 똑같이 생긴 사람이 국사를 봤다던가(광해, 왕이 된 남자), 노량에서 살아남은 이순신이 미츠나리와 고니시를 도와 도쿠가와 척결을 위해 일본에 원군을 보낸다(임진록 2+ 조선의 반격)는 유의 콘텐츠는 실제 역사가 아닌 창작물이라는 전제하에 소비되고 있다. <임진록 2+ 조선의 반격> 팩션, 대체역사물 등은 미디어 리터러시 측면에서 잘못된 역사를 학습할 수 있기 때문에 제공자와 소비자 모두 주의가 필요하다. 또 인물에 대한 표현은 <샤이닝니키>나 <스카이>에서 빚어졌던 "복식이 어느 나라 것이냐"라는 문제보다 역사와 관련이 깊기 때문에 주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한편 현행 게임법에서는 "반국가적인 행동을 묘사하거나 역사적 사실을 왜곡함으로써 국가의 정체성을 현저히 손상시킬 우려가 있는 것", "존비속에 대한 폭행·살인 등 가족윤리의 훼손 등으로 미풍양속을 해칠 우려가 있는 것" 등을 불법게임물로 규정하고 있다. 2007년 제정 당시에 포함됐던 내용인데, 그 시행 기준이 확실하지 않고, 사전 검열의 우려가 있어 사실상 사문화된 조항으로 이해되고 있다. 최근 여러 논란이 불거지자 더불어민주당 황운하 의원은 이 법 조항을 근거로 게임물관리위원회가 역사 왜곡, 미풍양속 저해, 반국가적 행동에 대해서도 사전심의할 수 있게 하는 게임법 개정안을 발의했다. 하지만 이 법을 해외 개발사에게 적용할 길이 없으며, 생태계에 또다른 규제를 얹는다는 지적이 나온다.
정희선의 재팬토크/ 조선통신사 행렬은 계속됐다
<사진= 24일 야마구치현 시모노세키에서 열린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 사진=아사히신문 영상 캡쳐.> > 조선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 시모노세키서 열려 > 한일관계 악재 속에서도 부산시민 100여명 참가 <일본 도쿄=정희선 객원 특파원(기업 분석 애널리스트)> 한일간의 역사 전쟁(강제징용, 위안부), 경제 전쟁(화이트국가 배제), 안보 전쟁(지소미아 종료), 영토 전쟁(한국의 독도훈련)이라는 악재 속에서도 두 나라의 민간교류는 이어지고 있다. 부산시와 자매결연 관계인 야마구치현의 시모노세키(下関)시에서 24일 조선통신사(에도시대 조선에서 파견한 사절단) 행렬을 재현하는 연례행사가 열렸다. 야마구치현은 아베 신조 총리의 정치적 고향으로, 역대 일본 총리 57명 중 9명이 이곳에서 나왔다. 아사히신문은 25일 “두 나라 관계의 악화로 개최가 어려웠지만, 부산 시민 100여 명과 일본 측에서 60여 명이 참가했다”고 보도했다. 아사히에 따르면 도시 중심부에서 3킬로미터 정도 행렬 퍼레이드가 펼쳐졌다. 일본의 관문인 시모노세키는 일제강점기부터 부산과 연결되었고, 부관(釜關) 페리가 지금도 오가고 있다. 그런 시모노세키는 조선통신사들이 혼슈에 들를 때 첫 번째 방문하던 곳이었다. 시모노세키시의 통신사 행렬 재현 행사는 이번이 16회째로, 시민축제인 ‘바칸 마츠리’(馬関まつり)의 핵심 행사 중 하나다. 바칸은 시모노세키의 옛 별칭으로, 과거에는 시모노세키가 바칸세키(馬關)로 불리기도 했다. 아사히신문은 “금년은 일한관계 악화의 영향으로 부산측이 이번 달 상순까지 정식 참가에 대한 답을 주지 않는 등 이례적인 사태였다”며 “매년 부산시장과 부시장이 통신사의 정사(正使)역을 맡았지만, 이번엔 참가하지 않았다”고 했다. 대신 정사역은 부경대의 손재학 석좌교수가 맡았다. 아사히는 손 교수의 말을 인용 “양국간의 바다에 파도가 있다고 해서 헤어지는 것이 아니라, 서로 교류할 수 있다는 것을 마음 속 깊히 느꼈다”고 전했다. 정희선 객원 특파원 -인디애나대 켈리 비즈니스 스쿨(Kelly School of Business) MBA -한국 대기업 전략기획팀 근무 -글로벌 경영컨설팅사 L.E.K 도쿄 지사 근무 -현재 도쿄 거주. 일본 산업, 기업 분석 애널리스트 -'불황의 시대, 일본 기업에 취업하라' 저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당신은 라이엇의 '선한 영향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인터뷰] 라이엇 게임즈 구기향 총괄 여러분께서는 라이엇 게임즈가 '문화재 환수'라는 좋은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어느 정도는 알고 계실 겁니다. 실제로 라이엇 게임즈는 그간 총 5건의 문화재 환수에 기여하며 꾸준히 선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데요. 지난해에는 한복과 아리를 활용한 '아리따운 한복전'을 진행해 우리 한복의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기도 했습니다. 게임의 부정적인 이미지를 벗겨내는데도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죠. 자, 다시 한 번 여쭈어보죠. 당신은 라이엇 게임즈의 '선한 영향력'에 대해 얼마나 알고 계십니까? 그들이 얼마나 오랜 시간과 노력을 들여 문화재를 환수하고, 사회에 기여하고 있는지 알고 있으신가요? 라이엇 게임즈 구기향 총괄을 만나 그들이 펼치는 '선한 영향력'에 대한 솔직한 감상과 뒷이야기를 들어봤습니다. / 디스이즈게임 이형철 기자 # "아리따운 우리 한복전, 파트너 없이는 불가능한 프로젝트" 디스이즈게임: '한복 사랑 감사장'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감회가 남다르실 것 같은데, 어떠셨는지요. 라이엇 구기향 총괄: 죄송한 말이지만, 사실 저는 해당 상에 대해 자세히 알지 못했어요. 2019년에 BTS와 블리자드가 상을 받았다는 기사를 본 것 정도가 전부였죠. 반성하면서 조금 더 찾아보니, 한복의 가치와 아름다움을 알린 단체에 주는 상이더라고요. 의미 있는 상인 만큼, 정말  감사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난해 진행했던 '아리따운 한복전'은 결코 저 혼자 이뤄낸 프로젝트가 아니에요.  2012년 라이엇 게임즈 코리아에 합류하자마자 대표님과 1:1로 회의를 한 주제가 '사회 환원'이었습니다. 보여주기식이 아니라 다소 시간과 비용이 들어도 라이어터(직원)와 유저들이 함께할 수 있는, 의미 있는 걸 찾고자 했죠. 라이엇이니까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더 좋겠다 싶어서... 처음에는 조금 어려웠던 것 같아요. 그런 과정을 통해 탄생한 것 중 하나가 '아리따운 한복전'이었어요. 관련 기사: 아리 한복 재해석 전시회 연 라이엇 게임즈, "한복의 날 기념하겠다" <리그 오브 레전드>의 '아리'는 글로벌 콘텐츠에 해당하잖아요. 게다가 챔피언 설계 과정에서 라이어터들이 한복에 관한 조언도 많이 했다고 들었어요. 그러다 보니 '우리 문화가 이렇게 세계적으로도 뛰어난데 활용해보면 어떨까' 싶었죠. 보통 젊은 분들은 역사는 어려워하시지만, 게임에서 나오는 이야기나 콘텐츠는 굉장히 친숙하게 느끼시잖아요. 우리가 화자가 될 수 있겠다 싶더라고요. 다만 저희는 전문가가 아니니까... 파트너분들과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해서 의미를 잘 전달할 수 있다면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고, 함께 프로젝트를 진행하고 됐습니다. 단순히 상을 받았다는 의미보다 정말 저희가 전하고자 했던 이야기가 잘 전달된 듯해서 무척 기분 좋습니다. 아리따운 우리 한복전은 많은 이의 호평을 받았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어찌 보면 좋은 일을 한 걸 '인정'받았다는 느낌도 드셨을 것 같아요. 의미가 잘 전달된 진행된 것 같아서 좋죠. 유저분들 외에 다른 분들께서도 해당 프로젝트에 많은 관심을 보이셨으니까요. 아리따운 우리 한복전 다큐멘터리 조회수가 90만을 넘었더라고요. 게다가 게임을 하지 않는 분들도 소중한 코멘트를 많이 남겨주셨어요. '공예하는 사람인데 이런 가치를 이야기해줘서 고맙다'라거나, '한복의 날이 언제인지도 몰랐는데 이제 알았다' 등 감사한 이야기가 많았습니다. 온라인 전시였음에도 저희의 메시지를 잘 들어주셨구나 싶었죠. '아리따운 우리 한복전'은 꽤 스케일이 큰 프로젝트였잖아요. 기획단계에서 어떻게 준비하게 됐는지 궁금합니다. 2018년 후원 약정을 진행하던 중에 '문화유산 인적 자원'에 지원하겠다는 계획을 세운 적이 있어요. 무형문화재 장인분들 중에 취약종목, 그러니까 상업화가 조금 덜 된 케이스에 해당하는 부분을 지원하고자 했죠. 기술을 지키고 이어가는데 집중하시는 만큼, 지원이 필요한 부분이니까요. 그렇게 무형문화재 분들과의 인연이 시작됐습니다. 단순히 금액을 지원하는 걸 넘어서, 국가대표급 금손이신 만큼 함께 가치 있는 걸 만들어보고 싶었죠. 그런데 저희 게임에 '한복 아리'가 있고 이걸 가장 전통적인 금손분들께서 재현하면 어떤 느낌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후 침선장 구혜자, 금박장 김기호, 화혜장 황해봉, 매듭장 정봉섭 장인께서는 장인께서 프로젝트팀을 꾸리고 저희와 함께하게 됐죠. 한복의 아름다움을 전하기 위한 대형 프로젝트는 그렇게 시작됐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뭔가 일이 점점 커지는 느낌이네요. (웃음) 진행 과정에서도 그런 생각이 많이 들었습니다. (웃음) 다시 프로젝트로 돌아가자면, 침선장께서 리더이신지라 프로젝트를 지휘하셨는데요. 한복을 디자인하고 나면 어울리는 매듭을 찾고 신발도 맞춘 뒤에 특정 위치에 금박을 넣는 식으로 작업을 진행하셨습니다. 여기까지가 코로나 이전에 진행된 단계입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잘 만들어서 롤파크에 전시하면 너무 좋겠다 싶었죠. 무형문화재께서 만들면 한복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어필할 수 있겠다고 생각했거든요. 그러다 보니 전문가분들께서 작업하시는 과정도 전부 찍어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어요. 그간 진행해온 프로젝트 중 가장 많은 시간이 들었죠. 그런데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면서 아름다움을 전달하는 방법에 대한 고민도 늘었어요. 결국 오프라인의 위험성을 안고 가느니 나중에 보여드려도 되니까 온라인으로 가보자고 해서 홈페이지를 준비하게 됐습니다. 이에 더해 한복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프로젝트인 만큼, 패션 화보와도 작업하면 좋겠다고 생각했죠. 그래서 물색하다 보니 보그가 할머님들과 함께 한복 화보를 촬영한 적이 있더라고요. 너무 인상 깊었어요. 한복에 대한 이해가 깊구나 싶어서 연락을 드렸죠. 홈페이지와 화보, 그리고 영상을 통해 일련의 과정을 보여드리는 3단계가 준비된 과정입니다. (웃음) 사실, 게임과 해당 분야 장인분들 간의 만남은 쉽게 볼 수 있는 그림은 아니잖아요. 모시는 과정이 어렵지는 않았나요?  정말 감사하게도 전문가분들께서는 낯설지만 좋은 일 한다고 봐주시더라고요. 사실 문화재 분야에서는 라이엇 게임즈에 대한 인지도가 많이 쌓여있는 상황입니다. 심지어 장인께서는 다른 사람에게 '라이엇 알아?!'라고 홍보도 해주시더라고요. (웃음) 외국계 기업이 문화재 환수를 하는 상황이 독특하셨던 거죠. 낯설지만 들어본 적은 있는 좋은 회사로 봐주신 듯합니다. 보그 같은 경우엔 에디터 중 저희 게임과 회사를 잘 아는 분이 계셨어요. 그래서 문화재 환수를 해온 기업이라는 게 어필됐고, 함께 일을 할 수 있었죠. 열심히 심어놓은 씨앗이 큰일을 한 셈이군요. 맞아요. 파트너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던 큰 프로젝트였습니다. 지금은 모두 든든한 우군이세요. 홍보대사 역할도 해주고 계십니다. 사실 2012년 이 일을 시작할 때가 제일 어려웠어요. 사회 환원을 해보자는 결정은 했지만, 비전문가라 마음대로 할 수 없으니 여기저기 연락을 돌렸죠. 문화재 지킴이부터 한국 유네스코, 서울시까지 다 전화를 드렸습니다. 당시만 해도 저희 인지도가 높지 않았던 시절이라... 공기관에서는 회사 이름도 못 알아들으셨어요. 라이'옷'이냐고 하는 분도 많으셨습니다. (웃음) 그래서 되게 구구절절 설명해 드렸던 기억이 나요. 저희는 외국 회사지만, 각 지역의 문화와 사회에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 크고 좋은 일을 하려고 한다고요. 게임도 문화니까, 그 뿌리인 유산에도 도움을 주고 싶다고 말이죠. 하지만 몇 주간 전화를 드려도 저희 의도를 이해 못 하시는 분이 태반이었습니다.  진심을 전달하기 위해 많은 시간이 필요한 적도 있었다 의아하네요. 좋은 일을 하고 싶다고 연락한 건데... 문의만 하고 구체화 안 되는 경우가 워낙 많다 보니 그렇게 반응하셨던 것 같아요. 저도 처음엔 에이전시 통해서 연락했었지만, 중반부터는 담당자분께 직접 전화를 드리고 오랫동안 뜻을 전달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담당자께서 저희 사무실로 찾아오겠다고 하셨어요. 그분께서는 회사 분위기도 보고, 무슨 생각인지도 파악하려고 하신 거죠. 그날 제가 두 시간 동안 담당자님을 붙잡고 떠들었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젊은 분들께 화자 될 수 있다고 엄청 어필했어요. 결국 담당자께서도 젊은 사람들에게는 이러한 접근법이 맞겠다고 공감해주시더라고요.  직책을 떠나 한 명의 한국인, 게이머로써 지켜본 '아리따운 우리 한복'은 어땠다고 생각하십니까. 개인적으로 한복이 손이 많이 가기도 하고... 입고 싶어도 '내가 너무 과한가' 싶은 생각이 들 때가 많았어요. 가까운 느낌은 아니었던 거죠. 하지만 이번 과정을 통해 무형문화재 장인 분들의 과정을 보니 존경심이 들었습니다. 내가 너무 무지했구나 싶은 생각도 들었어요. 유저 입장에서는 자부심이 느껴졌어요. 저희가 '아리따운 우리 한복' 다큐멘터리 자막을 반나절 뒤에 붙였거든요. 그런데 해외 유저분들께서 '너무 궁금하다, 빨리 설명해달라'는 댓글을 막 다시더라고요. 내심 외국인한테도 한복으로 어필했다 싶어서 기분 좋았습니다. '내가 스킨 사서 이런 행사도 진행한 거야!'라고 자랑하시는 분도 많고... 한 명의 게이머로써도 무척 뿌듯했습니다. # "언젠가는 게임에 대한 긍정적인 첫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는다" 처음 문화재 환수를 시도했을 때 직원들의 반응은 어땠습니까. 만약 제가 사원이었다면, 다소 의아하다는 생각도 들었을 것 같습니다. 보통 직원들이랑 봉사 활동 나간다고 하면 억지로 끌려가는 경우도 많아요. 하지만 저희는 주말이 아니라 워킹데이에 활동을 진행했어요. 물론 해야 할 일이 있거나 관심이 없다면 안 와도 되지만, 좋은 뜻인 만큼 되도록 같이하자고 제안을 했었죠. 그래서인지 참가해주신 라이어터들은 현장 관리소장님이 놀랄 정도로 정말 열심히 봉사했어요. 한 번은 비가 온 뒤 낙엽을 쓸러 간 적도 있는데, 너무 많이 모아서 자루에 시체가 들었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죠. 모두가 즐거운 마음이었을 거로 생각합니다. 첫해 봉사활동에서는 라이엇 게임즈 대표 브랜든 백도 왔었는데... 다들 얼굴이 달아오를 정도로 열심히 했던 게 생각나네요. 저희는 사회와 유저분들을 위한 역할을 하자는 마인드가 명확히 세팅되어있어요. 문화를 보호한다는 부분에서도 내부적으로도 설명을 많이 하는 편입니다. 특히 '게임도 문화인데, 그 뿌리를 보호한다는 것만큼 의미 있는 게 어디 있냐'라는 말에 공감을 많이 해주시더라고요.  사실 오래된 <리그 오브 레전드> 유저 입장에서는 라이엇 게임즈가 좋은 일을 한다'더라' 정도만 인지할 뿐 이 정도로 큰 규모와 금액, 시간을 들이는지 모르는 경우가 많아요. 조금 더 자랑해도 좋지 않을까 싶은데 말이죠. 유저 분들뿐만 아니라 대중께도 알려야겠다는 고민이 있어서 방법을 논의 중 이긴 해요. 다만, 홍보·마케팅을 위해서가 아니라, 사회적 역할을 하기 위해 시작한 일이라... 물론 외부에 발표도 하고 기사도 많이 나갔지만, 대대적으로 래핑 버스를 대절하거나 전광판을 활용하진 않았습니다. (웃음) 그럼에도 유저분들께서는 내용을 많이 알아봐 주시고 응원도 해주세요. 다만, 시간이 흐름에 따라 저희가 더 많은 '선한 영향력'을 펼치기 위해서는 조금 더 알릴 필요가 있겠다 싶은 생각은 듭니다.  비단 유저뿐만 아니라, 게임을 하지 않는 분께도 전해지면 좋은 나비효과가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유저분들께서는 대체로 저희가 하는 일을 잘 알고 계세요. 긍정적으로 봐주시는 편이죠. 다만, 주변에서는 아예 이 프로젝트를 모르거나 라이엇 게임즈를 낯설어하는 분도 많아요. 따라서 아예 저희를 모르는 분께도 '외국 기업이 문화유산을 보호하고 있다'라는 걸 알리고 싶은 욕심이 큽니다. 2012년 국외소재문화재재단이 설립된 뒤, 지금껏 환수에 성공한 문화재가 총 40건인데요. 그중 저희가 다섯 번의 환수에 참여했습니다. 10%가 훨씬 넘는 숫자죠. 사실 이게 기약이 없어요. 경매에 참여해도 떨어질 수도 있고 개인이 팔고 싶다고 해도 협상 중 이탈하는 경우도 잦죠. 따라서 저희의 사례를 잘 알려야만 기업과 민간단체의 움직임이 나온다는 이야기도 많이 듣고 있습니다. 더 노력해야겠다고 생각해요. 라이엇 게임즈는 꾸준히 '선햔 영향력'을 전파하고 있다 (출처: 라이엇 게임즈) 한편으로는 인게임 콘텐츠로 홍보해도 재미있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다양한 방향을 고려해보셨을 것 같은데, 현실화 되지 않은 것 중에 흥미로운 기획이 있었다면 알려주세요. 아리는 한국형 챔피언이고, 신바람 탈 샤코 역시 한국의 색깔이 많이 담긴 콘텐츠잖아요. 다만, 지금은 <리그 오브 레전드>가 글로벌 서비스에 해당하고 모든 유저가 함께하는 게임이다 보니 특정 지역에 헌정하는 식의 콘텐츠는 지향하는 분위기예요. 사회적 역할을 수행하는 건데, 이걸 콘텐츠로 넣으면 누군가에겐 강요가 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선보일 또 다른 '선한 영향력'을 살짝 스포해주신다면 어떨까요? 그간 저희가 여러 프로젝트를 진행했어요. 경복궁, 덕수궁, 성균관 안내판 등 개별 프로젝트로 나열하면 정말 많죠. 그런 것들을 매해 알리고, 진행 과정과 완수되는 시점도 항상 전달 드렸지만 아카이빙해서 볼 수 있는 플랫폼이나 공간은 전무한 상황입니다. 이를 잘 제공할 방법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물론 확정은 아니지만요. 한 가지 흥미로운 건, 라이엇 코리아가 꽤 오랜 시간동안 ‘꾸준히’ 이 기조를 이어오고 있다는 점입니다. 심지어 회사의 대표가 몇 차례 바뀌었음에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는 게 참 흥미롭게 느껴졌습니다. 돌아보면 결코 쉽지 않았을 것 같은데, 어떤 점이 가장 어려웠는지 궁금합니다. 탑 매니지먼트의 판단이나 성향에 따라 역할에 대한 고민은 달라질 수 있다고 봐요. 다만, 저희는 시작부터 강한 의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이를 실제로 구현하면서 저희가 생각해온 부분들을 유저분들도 공감해주시고, 스스로가 주체가 됐다고 생각해주시니 더욱 보람이 느껴졌죠. 문화재를 보호하고 지원하는 건 '이 정도면 됐다' 하고 만족할 수 있는 포인트가 있는 게 아니잖아요. 더군다나 이러한 활동을 이어갈수록 저희가 수행할 수 있는 역할도 다양해지는 거고... 대표님들도 그런 부분에서 공감을 많이 해주십니다. 사회 환원 활동을 위한 라이엇 게임즈의 기조는 단 한 번도 변한 적이 없다 앞서 말씀드렸던 아리따운 우리 한복전은 물론이고 코로나 방호복을 지원하는가 하면, 문화재 환수까지 하고 계시잖아요. 선한 영향력의 범위를 조금씩 넓혀가는 느낌이 큽니다. 만약 한이 없다면 어느 영역까지 도전해보고 싶으신지 궁금합니다. 문화유산분야는 민간이 하기에 규모가 큰 경우가 많습니다. 수십, 수백억이 필요한 것들이 있어요. 제약이 없다면 돈이 없어서 못 하는 부분에 발 벗고 나서는 게 제일 좋겠죠. 현실적으로 생각해보자면, 문화재환수 같은 영역에 저희 말고 다른 민간 기업이 뛰어드는 사례가 하나만 더 나왔으면 좋겠어요. 좋은 나비효과가 될 수 있지 않을까 싶습니다. 게이머로써 안타까운 부분이지만, 여전히 몇몇 사람들은 게임의 부정적인 부분만을 바라보기도 합니다. 라이엇 코리아의 이러한 노력이 언젠가는 게임에 좋은 프레임을 만들 수 있다고 믿으시나요?  정말 드라마틱한 영향이 아니라도, 쌓이고 쌓이다 보면 좋은 인식을 만드는 데 영향을 줄 수 있다고 생각해요. 보통 낯선 분야에 대해서는 기존 고정관념을 따라가기 쉽죠. 예를 들어 '게임하면 비행 청소년이다. 공부도 못하는 프로게이머가 어떻게 먹고사냐. 시커멓고 껌껌한 PC방' 등이 그런 생각에 해당할 겁니다. 물론 지금은 많은 분이 아니라고 말씀해주세요. 조금씩 바뀌고 있는 거죠. 또한, '게임회사가 왜 저렇게까지 사회적인 역할을 할까'라는 궁금증을 유발하는 것 자체가 변화를 만들 수 있는 포인트가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분들께 라이엇 게임즈가 '게임도 문화고 저희는 문화의 뿌리를 함께하려 합니다'라고 답변을 드리면, 또 너그럽게 봐주세요. 이런 게 쌓이다 보면 게임회사, 그리고 젊은 사람들이 꾸려가는 회사에 대한 긍정적인 레이어가 씌워질 거라고 믿습니다. 좋은 첫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어요. 구기향 총괄은 긍정적인 첫인상을 만들어갈 수 있다고 강조했다 첫인상이라는 단어가 참 좋네요. 저희가 처음에는 회사 이름이 굉장히 조그맣게 표기된 명함을 사용했어요. 그러다 보니 연세가 많으신 기관 분들을 만나면 '리오뜨?'라고 읽는 분도 계셨죠. 이처럼 전혀 게임회사에 관심이 없으신 분들과도 활동을 통해 인연을 이어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한국에 김소월 시인의 시집이 딱 세 권 있는데요. 두 권은 개인이, 한 권은 배재학당에서 갖고 있어요. 그래서 2, 3년 전에는 전시회도 했었죠. 당연히 배재학당에서는 라이엇 게임즈를 아실 리가 없으니 해당 행사를 통해 저희를 인지하셨고, 다음에도 보자고 말씀해주시더라고요. 라이엇 게임즈를 굉장히 긍정적으로 인지하게 되신 거잖아요. 어떤 면에서는 회사가 이런 것도 할 수 있구나라고 느끼시는 거고. '선한 영향력'에 대한 자랑이 담긴 마지막 한 마디를 부탁드립니다. 처음엔 단순히 보탬이 됐으면 하는 추상적인 마음으로 시작한 일이었어요. 한해 한해 경험이 쌓이다 보니, 다른 게임이나 단체가 참고할 수 있는 선례를 많이 만들었다고 생각합니다. 앞으로 더 노력해서 유저분들께는 자부심을, 다른 누군가에겐 저희를 모방해서 활동하실 수 있게 노력할 예정입니다. 유저분들의 마음을 느꼈던 일화가 있는데요. 저희가 문화재 환수를 하면 공개회를 진행합니다. 사실 일반적인 시각에서는 문화재가 들어온 게 큰 토픽이니까, 보통 헤드라인은 '몇 년간 어딜 떠돌던 뭐가 들어왔다'라고 표기됩니다. 저희 입장에서는 라이엇이 함께했다고 들어가면 좋겠지만, 대부분은 한 외국계 회사라고 하시더라고요. 아쉽긴 하지만, 일단 문화재가 들어왔다는 게 더 중요하고 영상을 보면 언뜻 스쳐 지나가니 만족해야겠다고 생각했죠. 그런데 유저분들께서 해당 기사 댓글에 '라이엇 게임즈가 했다고 왜 안 적냐'라고 댓글을 엄청 달아주시더라고요. 너무 감사했습니다. 앞으론 저희 목소리도 더 많이 내 볼 생각입니다. 자랑 아닌 자랑을 조금 더 해야겠어요. (웃음) 앞으론 조금 더 다양한 곳에서 '자랑'하는 라이엇 게임즈를 볼 수 있기를 (출처: 라이엇 게임즈)
콜럼버스의 이름
주말 특집, 크리스토퍼 콜럼버스의 이름이다. 어떻게 보면 이건 당연히 무슨 얘기가 나올지 짐작이 가능하다. 콜럼버스라는 이름 자체는 영어식 표기이므로, 실제 이름은 좀 달랐으리라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콜럼버스는 생전에 잉글랜드 혹은 영어권 사람들과 교류가 없었으므로, 그런 이름을 본인은 들어본 적 없었을 테고 말이다. 그의 고향은 이탈리아 북서부의 제노바이므로 제노바식 사투리로 말하자면 크리스토파 코롬보(Cristoffa Corombo)이다. 하지만 당시 쓰이던 이탈리아어 표기 방식(참조 1)으로 쓰자면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그런데 당시 이탈리아는 여전히 분열된 상태였고, 떠오르는 강대국이 하나 있었으니, 오늘날 카탈루니아를 이루고 있는 아라곤 왕국이다. 당연히 카탈루니아어를 사용하니, 여기서 콜럼버스의 이름은 크리스토포르 콜롬(Cristòfor Colom)으로 바뀐다. 여기서 선원으로 일하던 콜럼버스는 동방 무역을 한창 시작하고 있던 포르투갈에 관심을 갖는다. 급진적인 아이디어(서쪽으로 간다!)를 받아들일 만한, 아무래도 당시 유럽에서 원양 항로 전문 국가는 포르투갈이었다. 포르투갈로 향한 콜럼버스의 이름이 이제는 크리스토바웅 콜롱부(Cristóvão Colombo)로 바뀐다. 그러나 이게 웬 걸, 포르투갈은 콜롬버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미 희망봉을 통한 항로를 개척해 놓았기 때문에 또 다른 항로를 개척할 인센티브가 별로 없었다. 그리고 원양 항로 전문 국가답게 포르투갈은 서쪽으로 인도에 갈 수 있다는 콜롬버스의 계산이 틀렸음을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면 포르투갈과 경쟁하던 다른 나라로 가는 편이 합리적이다. 콜럼버스는 카스티야 왕국으로 간다. 오늘날 스페인의 본캐가 바로 여기 카스티야이고, 우리가 흔히 아는 스페인어가 바로 카스테야노(카스티야의 언어)이다. 당시 막 국왕이 된 이사벨라는 대서양을 알카소카스(Alcáçocas) 조약(1479)을 통해 포르투갈과 양분하고 레콘키스타를 마쳤으며 아라곤 왕국과 결혼을 통해 합병까지 했었다. 자, 지금부터는 카스테야노, 그러니까 우리가 아는 스페인어로 불러야 한다. 콜럼버스의 이름은 이제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으로 바뀐다. 이미 여러 곳을 선점한 포르투갈과 경쟁을 위해 이사벨라 여왕은 콜럼버스의 아이디어를 받아들인다. 그런데? 신대륙을 발견해버렸네? 지금 기준으로 봐도 인물이라 할 수 있는 이사벨라 여왕은 당시 국제법 해석의 기준이었던 바티칸도 장악해 놓은 상태였다. 이게 무슨 말이냐? 드라마로 더 유명한(…) 보르자 가문이다. 교황 알렉산데르 6세가 아라곤 왕국 출신인지라, 이사벨라의 편이었다. 여기서 탄생한 조약이 바로 토르데시야스(Tordesillas) 조약(1494), 전세계를 포르투갈과 스페인으로 양분한 바로 그 조약이다. 알카소카스가 포르투갈어이고 토르데시야스가 스페인어로 바뀐 걸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정리해 봅시다. ㅇ 고향(이탈리아) : 크리스토파 코롬보(Cristoffa Corombo) 및 크리스토포로 콜롬보(Cristoforo Colombo)이다 ㅇ 아라곤(카탈루니아) : 크리스토포르 콜롬(Cristòfor Colom) ㅇ 포르투갈 : 크리스토바웅 콜롱부(Cristóvão Colombo) ㅇ 카스티아(스페인) : 크리스토발 콜론(Cristóbal Colón) 크리스토퍼에 들어가 있는 f 발음이 v로, 결국은 b로 변화했다. f와 v, b가 상호 호환되는(?) 발음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성 끝의 b가 붙거나 떨어지거나 했음이 보인다. 콜럼버스를 프랑스어로 표기할 때 크리스토프 콜롱(Christophe Colomb)인데, 끝의 b가 묵음처리된 이유가 바로 이런 변화에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콜럼버스”는 어디서 나온 것인가? 영어식으로 읽기는 했지만, 사실 그의 라틴어 이름이 크리스토포루스 콜롬부스(Christophorus Columbus)이다. 그리스도를 품은 비둘기(콜롬부스)가 이렇게 다양하게 변주될지는 콜럼버스 자신도 몰랐을 것이다. -------------- 참조 1. 이탈리아 중부의 토스카나 지방의 언어라 르네상스 이후로 거의 표준 이탈리아어처럼 됐기 때문에, 토스카나어(dialetto toscano)로 쓴 표기이다. 단테와 보카치오, 마키아벨리 등의 저작물이 바로 이 토스카나어로 작성됐다. 2. 짤방은 위키피디어에서 가져왔는데, 이탈리아의 판화가 Aliprando Caprioli의 작품을 복제한 것이다. 미국 의회도서관에 있는 콜럼버스… 라틴어 이름으로 표기되어 있다. https://es.wikipedia.org/wiki/Crist%C3%B3bal_Col%C3%B3n
대구 여행 가볼만한곳 여행코스
1. 수성못 대구 여행을 그렇게 많이 가봤는데 수성못은 처음이에요. 수성못에 가면 드넓은 호수가 자리하고 있고, 그 곁에 2km 산책로가 잘 정비되어 있어요. 못 한가운데는 어릴 적 추억이 샘솟는 오리배도 동동 떠있더라고요. 물론 이 오리배는 현재까지도 운영되는 오리배라고 해요. 참 귀엽죠? 벚꽃 폈을 때 갔으면 딱 좋았을 텐데, 벚꽃이 다 졌을 때 방문했어요. 그래도 깊은 그늘을 마련해주는 왕버들나무와 우연히 만난 분홍꽃나무(나무 이름은 모르겠네요.) 덕분에 서운함은 없었답니다. 2. 대구스타디움에서 피크닉 두 번째 여행지는 대구에서 피크닉 즐길 수 있는 대구스타디움입니다. 너른 잔디밭에 빨간 체크 돗자리를 깔고, 바구니와 테이블엔 먹을거리 한가득. 상상만으로도 행복하죠? 그 곁에는 나무들이 바람에 따라 한들한들 춤을 추고요, 산뜻한 봄내음이 솔솔. 여긴 대구스타디움인데요. 5천원이면 '수성구관광정보체험센터'에서 원하는 피크닉 세트를 대여할 수 있다는 점! 참고하세요. 3. 수성구관광정보체험센터에서 체험 수성구관광정보체험센터에서는 다양한 체험이 가능한데 저희가 해본 체험은 조각장 만들기와 머그컵 만들기. 시간 가는 줄 모르고 했어요! 피크닉도 즐기고 각종 체험도 즐기고! 하루 코스로 딱이죠. 4. 모명재 마지막 여행지는, 조선에 원군으로 와 공을 세운 명나라 장수 두사충이 조선에 귀화한 후 고향인 명나라를 사모한다는 뜻을 지닌 모명재입니다. 왜 두사충은 조선에 귀화를 했을까요? 그리고 대구에 터를 잡은 이유는 뭘까요? 그 자세한 이야기를 해설사분이 차근차근 설명해주더라고요. 가끔은 이런 역사 공부도 재밌어요. 참고로 모명재에서는 전통활쏘기 체험도 있고요. 모명재 안에는 무료로 다례한복체험을 할 수 있는 한국전통문화체험관이 자리하고 있답니다. 이 코스는 뚜벅이도 가능한 코스랍니다. 모두 수성구에 자리하고 있어서 접근성도 좋아요. 대구, 생각보다 할거리가 참 많죠? https://www.youtube.com/watch?v=9YM-LcLlovk
인간미가 느껴지는 조선왕들의 일화 (꿀잼 시간순삭)
왕이라는게 진짜 준니 하드코어하구나.. 를 느낀 일화들 잼나는 것도 있고 안타깝고 씅나는 내용도 있고 재밌어서 퍼옴 ㅇㅇ 어진을 찾을 수 없는 왕들은 걍 뭐 대충,, 상상의 나래를 펼쳐보자 태종 1. 직업정신 투철한 사관이 따라다니며 일 거수 일 투족을 다 기록해서 태종이 걷다 헛발질한 것도 적었다. 태종이 그건 제발 지워달라, 창피하다 애원까지 했는데도 사관은 끝까지 '왕이 길을 걷다 헛발질하다. 헛발질한 것을 적지 말라고 말한 것은 적지 말라 명하셨다' 라고 적었다. 2. 하도 사관이 쫓아다녀서 못 쫓아오게 멀리까지 사냥을 나갔는데 사관이 거기까지 말 타고 쫓아와 사냥기록을 적었다고 한다. 3. 태종은 아들 양녕대군이 너무 사고를 치고 돌아다니자 속이 상해 밤새 울어 목이 쉰 적도 있다고 한다. 그런데 더 재미있는 점은 양녕대군의 아들인 이혜는 아버지인 양녕대군보다 더 많은 사고를 쳐 양녕대군의 속을 썩혔고 결국 왕자의 아들의 직위인 '군'의 작위를 깎여 서산군에서 서산윤으로 강등당했다. 결국 이혜는 스스로 목숨을 끊기 위해 자살시도를 하였고 이틀 뒤 후유증으로 사망하였다. (이혜는 사람을 때려 죽이라고 시키기도 하였고 직접 사람을 죽이기도 하였으며 남의 첩을 빼앗기도 하고 시전에서 종친들과 패싸움을 하였고 과격한 놀이판을 벌이다 놀이 중 사람이 죽어나가게 하기도 하였다. 실록에서는 이혜가 망가진 원인을 사랑했던 첩을 아버지에게 빼앗기고 난 후에 울화병이 생겨 이리 되었다고 한다.) 4.태종은 운명론자가 아닌 현실론자였는데 태종이 세종에게 양위한 어느날은 우연히 하급관리 두명의 토론을 듣게 되었다. 한명은 부귀영화는 모두 임금에게서 나오는것이라고 하였고 도 한명은 하늘이 정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현실론자였던 태종은 부귀영화가 임금에게 나온다고 주장하는 사람에게 한품계를 올려주려 하려고 그 관리에게 '지금 가는 아무개에게 한 품계를 올려주도록 하시오'라는 종이를 세종에게 전해주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관리는 갑작스러운 복통으로 운명론자인 관리에게 대신 종이를 전해주라 하였고 결국은 그 관리가 진급을 하였다. 5. 조선왕들중 가장 많은 자식을 가진 왕으로 12남 17녀, 29명의 자식을 가졌다. 세종 1. 세종대왕은 좋아하던 후궁에게 신하들 몰래 따로 불러서 말없이 귤 하나를 쑥- 내밀어 준 얘기도 있다. (그 당시 귤이 귀한 것이었다.) 2. 친경한다고, 소 끌고 밭 갈다가 갑자기 비가 내리자 배고픔을 못 견뎌, 밭 갈던 소를 때려잡아서 국 끓여 먹은 적도... 3. 명재상 황희는 청백리가 되고 싶어서 된 게 아니었다. 임금이 사람을 붙여 철저하게 감시하고 너무도 기분 나쁘게 점검하는 바람에 ‘내참 더러워서 뇌물 먹지 않으리라’ 결심한 케이스다. 4. 훈민정음 반포식을 축하하는 잔치 행사에는 집현전 학사 절반이 참석하지 못했다. 대부분이 살인적인 과중한 업무와 임금의 요구사항에 시달리다 못 견뎌 병석에 누운 탓이었다. 성군의 캐치프레이즈는 “신하가 고달파야 백성이 편안하다”였다. 5. 세종은 부하들을 휘몰아치는데 도가 튼 인물이었다. 아침 조회 격인 새벽 4시 상참에서부터 과업 달성이 부진한 부하들을 닦달하였다. 밤낮으로 시달리다 못한 김종서의 경우 임금 곁에 있다가는 제명에 못살 것 같아, 스스로 궁궐을 떠나 삭풍이 몰아치는 북방을 개척하겠다고 손을 들고 나섰다. 정인지는 임금이 너무 독촉하고 소위 ‘갈궈 대는’ 바람에 모친 3년 상을 핑계로 상소를 올리고 낙향하려 했으나, 임금은 법령까지 바꿔서 그를 다시 붙잡아다 오히려 일을 더 시켰다. 6. 양녕대군이 평안도를 유람하게 되어 세종은 형인 양녕대군에게 ‘제발 여색을 조심하라’고 당부한다. 몰래 평안도 관찰사에게 명하기를 “만일 양녕대군이 기생을 가까이하거든 즉시 그 기생을 역마에 태워 서울로 올려 보내라” 라고 하였다. 양녕은 세종과의 약속도 있고 하여 가는곳마다 기생의 수청을 물리치고 근신하였으나, 그가 평안북도 정주에 이르렀을 때 그만 양녕의 마음을 사로잡는 절세의 미인이 나타났다. 양녕은 그날로 동침하고 귀신도 모르리라 자신했다. 그래서 시를 지어 하룻밤 풋사랑을 읊기를 “아무리 달이 밝다하나 우리 두사람의 베게를 들여다 보진 못할것이다. 그런데 바람은 어이해서 신방을 가린 엷은 휘장을 걷어 올리는가” 라 하였다. 그러나 이튿날 정주수령은 이 기생을 역마에 태워서 서울로 보냈다. 세종이 기생에게 명하기를 “너는 양녕대군이 읊은 시를 노래로 불러 익혀두라” 하였다. 양녕은 이런 사실도 모르고 유유히 서울로 돌아와 세종을 알현하였다. 세종: 잘 다녀오셨습니까. 제가 신신 당부한 말씀을 잘 지켜주셨는지요? 양녕: 물론입니다. 어찌 어명을 어기겠습니까? 한 번도 여색을 가까이 한 일 없습니다. 세종: 얼마나 수고가 많으셨습니까. 제가 형님의 노고를 덜어 드리고자 가무를 준비하였습니다. 양녕은 기생이 나와 노래하는 것을 보고 처음에는 누군지 몰랐다. 그런데 가사를 들어보니 자신이 지은 시구가 아닌가. 깜짝 놀란 양녕은 그 자리에서 땅에 엎드려 용서를 빌었다. 세종을 웃으며 뜰에 내려와 형님의 손을 잡고 위로하면서 그날 밤 그 기생을 양녕댁에 보냈다. 7.양녕대군과 세종은 원래 우애가 깊지 않았다. 태종은 양녕과 효령과는 별로 친하게 지내지 않았지만 유독 충녕, 즉 세종을 편애 하였다. 게다가 세종은 알려진것과 같이 머리가 아주 좋았고 공부를 좋아했다. 태종이 충녕에게 나중에 '너는 할일이 없으니 놀아라'라고 하며 글씨,그림, 비파등을 마련해준 때가 있었다. 그 때 양녕은 충녕에게 비파를 배우며 서로 친해졌고 다른 면에서 보면 자신의 경쟁자였던 충녕이 공부를 포기 했기 때문에 위기의식을 느끼지 않았기 때문일것이다. 그 후로는 양녕대군도 공부에 열심이었다. 그러나 세종은 비파, 글씨 등에 관심이 있지 않았고 언젠가부터 다시 학문에 관심을 가지고 양녕에게 많은 충고를 하였다. 양녕은 열등감으로 인해 방황하였고 다시 비행에 빠져들게 되어, 결국 세자 자리에서 쫓겨나게 되었고 그 자리는 세종이 차지하게 됬다. 8. 나라에 큰 일이 있어, 모두 고기를 먹지 않는 기간이었다. 태종은 특별히 세종에게는 삼시 세끼 고기를 챙겨먹도록 하였는데… 그것은 충녕(세종)이 고기가 없으면 밥을 먹지 않았기 때문이다. 문종 1. 수염이 매우 풍성하여 관운장과 같은 풍모를 냈었고, 얼굴 또한 매우 잘생겼다고 전해진다. 임진왜란 이후 폐허가 된 궁을 정리하는데 타다 남은 왕의 어진이 한 장 나왔다. 수염이 길고, 풍채도 당당하여 신하들은 인종의 어진이라고 생각했지만, 한 사람만은 수염이 길다는 말만 듣고 문종의 어진이라고 주장했다. 나중에 어진을 조사하다가 보니 어진 구석에 문종대왕의 어진이라는 기록이 나왔다고 한다. 2. 학식, 외모 모든 것이 완벽했다. 그에게 부족한 것은 단 하나.. 건강 세조 1. 술 먹고 신하 팔 꼬집고 신하한테 '너도 나 꼬집어라' 라고 시키자 신하는 세조를 꼬집었다. 그 뒤 자기 혼자 열 받아서 혼내주려다 그냥 넘어갔다. +세조의 팔을 꼬집은 것은 신숙주다. 정확히 말하면 꼬집은 게 아니라 팔씨름하다가 세조의 팔을 두 손으로 넘겼다. 그래서 세조가 신숙주 죽이려고 했다가, 술 취한 것을 감안하여 넘어갔다. 2. 세조는 후궁이 단 한 명뿐이고 평생 중전인 정희왕후와 금슬이 좋았는데, 국사를 논할 때도, 국가의 모든 행사에도 꼭 정희왕후를 대동했으며 사냥을 할 때도 둘이 나란히 말을 타고 사냥에 나갔다. 3. 신숙주가 영의정었을 때 구치관이라는 사람이 좌의정이 됐다. 이때 세조가 신숙주하고 구치관을 불러서 "내 오늘 경들에게 질문을 할 테니 대답을 잘 못하면 벌을 줄 것이요"라고 하였다. 그리고 세조가 "신 정승!"하고 부르니까 신숙주가 대답했는데 세조가 "나는 새로 된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벌주를 먹였다. 그리고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니 그리고는 "나는 옛 정승을 불렀는데 경은 대답을 잘못했소"하면서 구치관한테도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 다시 "구 정승!"하고 부르니까 이번에는 신숙주가 대답했다. 근데 이번에는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이 대답을 잘 못하는구료" 하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 그러고서 또 "신 정승!"하니까 구치관이 대답하는데 구치관한테도 "나는 성을 불렀는데 경은 잘못 대답하였소" 하고 벌주를 먹였다. 그러다가 이번에는 "신 정승! 구 정승!" 하고 부르니까 둘다 대답을 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임금이 부르는데 신하가 대답을 안하는건 예의가 아니라면서 또 벌주를 먹였다고 한다. 성종 성종은 후추 중개무역으로 돈을 벌기 위해 후추 씨앗을 구하려고 백방으로 알아보았지만 결국 후추는 구하지 못 하고 주변국에 성종이 후추를 좋아한다는 소문이 나 계속해서 조공으로 후추가 들어오는 바람에 창고에 후추가 가득히 쌓여, 예쁜 비단 주머니에 담아 조정 관리들에게 다 하사하였다. 연산군 1. 성종과 연산군이 오랜만에 밖에 바람 쐬러 나와서 성종이 ‘융아, 좋지 않으냐?’ 하니 연산군이 소떼를 보며 ‘아바마마 저 송아지도 어미 소가 있는데 저는 왜 어미가 없습니까’ 라고 말했다. 2. 또 다른 야사에서는 연산이 동궁이었을 때 어느 날 성종에게 거리에서 나가 놀고 싶다고 하여 성종이 허락하였다. 저녁에 동궁이 궁궐로 돌아오자 성종이 “오늘은 밖에서 무엇을 보았느냐?” 하고 묻자 연산은 “구경할만한 것을 없었습니다. 다만 송아지 한 마리가 어미 소를 따라가는데 그 어미 소가 울면 송아지도 따라 우니 그것이 가장 부러운 일이었습니다.” 하여 성종이 가여워 눈물을 흘렸다는 일화가 전해짐. 3. 공부하는 걸 엄청 싫어하여, 왕자를 훈육하는 학자들이 엄청 고생을 했다고 한다. 매일 꾸중 듣고 야단맞아, 폐비 윤씨 사건이 일어났을 때 모두 죽여버렸다. 4. 춤을 잘 췄다고 한다. 5. 모후인 폐비 윤씨와 고려 공민왕의 비인 노국대장공주의 얼굴이 비슷하게 생겼다는 이유로 관공서에 노국대장공주의 초상화를 수집하게 한 일도 있었다. 6. 엄청난 꽃미남이었다고 한다. ++ 보너스 연산군에 대한 잘못된 사실들 연산군이 정치를 잘 하지 못하고 폭군의 모습을 다소 보인점은 사실이지만, 몇가지 왜곡된 사실들이 있다. 1.연산군은 궁궐 담장 아래 백척 내에 있는 민가들을 철거하여 쫓아냈다. - 하지만 이것은 원래 불법주택들이였다. 선왕, 후궁들의 모습이 민간에 노출되어서는 안된다는 법도에 의한 것들이였다. 그러나 연산군은 오히려 봄까지 기다려주고 주택의 등급을 나눠 무명을 보상으로 주고 대토 와 거주지까지 마련해 주었다 2.궁을 짓기 위해 열한 고을의 백성들을 내쫓았다 - 백성들을 내쫓은것은 사실이지만 그 수는 500여호에 불과했고 열한고을은 사관이 의도적으로 과장해서 쓴것이다. 또 지나가는 자는 죽여서 시신을 구경시키는 형을 내린다고 했으나 무덤이 있는 자들에게 명절 출입을 허가했으며 불법주택에도 보상을 해준 연산군이 보상을 안해줬을 가능성은 적다. 게다가 궁은 큰집 50칸으로 몇몇 사대부들의 99칸 집들보다도 작은 크기였다. 3.연산군은 음란했다. -연산군이 비구니를 간음했다는 일화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은 기생의 출입도 소문이 두려워 꺼렸던 인물인데 늙은 비구니를 몽둥이로 쫓고 젊은 비구니들을 간음했다는것은 말이 맞이 않는다. -연산군이 여성 음악인들을 혼음했다는 이야기가 있다. 그러나 연산군에게 그들을 예술가들였을뿐이며 오히려 여성 음악인들은 사대부들에겐 첩을 들이는 통로였다. 사대부들은 연산군에게 연산군이 남성음악인들만 잔치때 내려주자 불만을 갖고 여성음악인들 을 내려달라는 주장을 하기도 했다. - 좋은 왕으로 묘사되는 성종은 16남 21녀를 가졌으나 그의 아들 연산군은 4남3녀만을 두었다. - 연산군이 백모인 월산대군 부인 박씨를 강간했다는 주장이 있다. 그리고 그녀가 죽자 임신을하고 약을 먹고 죽었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녀의 나이를 추측해보면 그 때는 이미 쉰세살에서 쉰다섯으로 당시에 그나이엔 잉태가 불가능했다. 4.정치는 하지않고 사냥을 즐겼다 -연산군은 군사력 강화를 원했던 왕이다. 연산군 5년 여진족이 백성들을 사로잡자 연산군은 정벌에 나서려 했으나 그때마다 신하들은 반대했다. 그 이유는 그들의 노비들이 부역에 나가는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냥은 군사력 강화를 위했던것이고 이것이 신하들의 반대로 무산된 결과가 임진왜란이다. 5.폐비 윤씨사건으로 폭군이 되었다 - 완전히 틀린말은 아니지만 연관인들의 처형은 신하들을 무력화 시키려는 의도였기도 하다. 그러나 훈구파를 무너트렸으면 사림을 불러들였어야 하는데 사림들조차 적으로 만들었으니 그를 보호할 사람은 없었다. 결국 연산군은 백성들에게는 폭군은 아니였지만 모든 사대부들에게는 적이였다. 그 결과 사관들에 의해 폭군으로 기록되었으며 그 기록이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에게 믿어지고 있다. 명종 1. 다른 사람들은 다 물러가 있거라 하고 노래 잘 부르는 내관이랑 둘이서 내관은 노래 부르게 하고 명종은 그에 맞게 춤추며 2인조 가수 못지 않게 퍼포먼스를 선보였다. 2. 꾀병 부려서 총애하는 내관의 극진한 간호를 받았다. 3. 위의 내관은 동일인물로 남자이다. 4. 내시와 있는 시간이 너무 좋았던 명종은 몸이 아프다고 꾀병을 부려 경연을 취소하고 내관들과 놀러 다니기 일쑤였다. 5.조울증을 가지고 있었다. 명종에게는 손빈이라는 총애하는 환관이 있었는데, 그에게 집과 많은 값비싼것을 하사했으면 원하는것들은 모든지 들어줬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는 장령을 만났을때 말에서 내리지 않았다는 사소한 이유로 명종으로부터 모든 재산을 몰수당하고 벼슬길도 막혔다. 명종의 조울증에 관환 일화는 이밖에도 많으며 아침에 파면했다가 저녁에 회복시켜주는 일들도 많았다. 중종 1. 자식 사랑이 남달라서 공주, 옹주랑 왕자들이 오랜만에 문안 오면 눈물을 흘리며 버선발로 뛰어나갔다. 2. 또 중종은 동궁 전에서 불이 나자 맨발로 달려 나와 훗날의 인종을 애타게 부르며 울었다. 3. 또한 효정옹주의 남편(부마)가 바람을 피우고 다니자 철거지악이었던 질투를 하지 않는다고 딸을 꾸짖은 적도 있었다. 결국 효정옹주가 남편의 구박을 견디지 못 하고 죽자 직접 부마를 잡아와 친국을 하기도 했다. 4.연산군을 폐위할 때, 중종을 보호하려 군사들이 오자 중종은 자기를 잡으러 온줄 알고 놀라서 자결 하려고 했다. 다행히도 그의 부인 신씨가 말려서 중종은 살아서 왕이 되었다. 5. 중종이 연산군 폐위후 왕위에 즉위했을때, 위에서 말한 신씨는 당연히 왕비책봉이 될 줄 알았다. 그러나 반정때 그녀의 아버지 신수근을 죽였는데 보복이 올줄도 모른다는 이유로 조강지처였던 신씨를 중종은 '조강지처'라는 말 한마디의 저항을 딱 한번 하고는 출궁시켰다. 중종 11년 3월 28일,ㅡ 그는 고려사를 공부하게 되었다. 그가 배운 부분은 최충헌 최충수가 명종을 폐위하고 신종을 옹립하는 부분이였다. 최충수는 배필이 있던 태자에게 자신의 딸을 태자비로 들이려고 신종을 협박했다. 신종은 완강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눈물을 흘리며 태자비를 폐출시켰다. 이 부분을 읽으며 중종은 울먹거리며 책을 제대로 읽지도 못했다고 한다. 인종 인종은 모후인 장경왕후가 자신을 낳고 7일만에 죽자 중종의 계비인 문정왕후의 손에 자란다. 하지만 문정왕후는 어린 인종을 끈임 없이 못살게 굴었다. 하루는 밤에 쥐의 꼬리에 불을 붙이고 인종이 잠을 자고 있는 궁 안에 들여 보냈다. 인종이 창문을 보니 문정왕후가 웃으며 빨리 불이 타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하지만 빈궁만 내보내고 자신은 문정왕후에게 효를 행하기 위해 불 속에서 죽으려 했다. 빈궁과 인종이 어쩔 수 없이 불을 바라보며 울고 있는 그때, 밖에서 중종의 목소리가 들렸다. 인종은 죽는 것이 문정왕후에게는 효가 되지만 중종에게는 불효가 되므로 곧바로 나왔다. 그 후 인종은 불을 지른 장본인을 알고 있으면서도 중종에게 고하지 않았다. 선조 1.임진왜란 이후 선조는 의주까지 도망을 하는데, 의주에서 어느 백성에게 생선이 올려진 상을 접대 받았다. 그 생선이 너무 맛있어서 인조가 생선의 이름을 묻자, 백성은 '묵'이라 대답하였다. 선조는 생선의 이름이 그 맛에 비해 별볼일 없다 생각하여 '은어'라 명했다. 나중에 궁에 돌아와 그 생선을 먹었으나.. 맛이 전 같이 않아 '도로 묵'이라 하게 하였는데, 바로 여기서 '말짱 도루묵'이라는 말이 생겨났다. 2. 임진왜란 당시 일본군이 파죽지세로 평양까지 밀어오는 바람에 의주로 도망하였으나 그에 만족하지 않고 명에 혼자 도망가기 위해 망명을 요청하였다. 명은 일국의 왕이 백성들을 버리고 어찌 그럴 수 있냐며 거절하지만 그에 굴하지 않고 계속적으로 명에 끊임없이 압록강을 건너겠다고 시위를 했다. 결국 명은 그렇게 오고싶으면 개처럼 네발로 기어서 북경까지 건너오라고 무안을 줬고 선조는 그제서야 망명을 포기했다. 이후 이여송이 이끄는 명 지원군이 선조앞에 도착했고 이여송은 선조가 보는 앞에서 조선의 대신들의 싸대기를 후려치면서 어찌 나라를 이지경까지 만들었냐며 타박을 주었으나 선조는 아무말도 못하였다. 광해군 선조가 세자를 가리기 위해 여러 왕자를 시험하였는데 “반찬을 만드는 것 중 무엇이 제일이냐?”라는 질문에 광해군이 “소금이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임금이 그 이유를 묻자 “여러 가지 맛을 조화시키려면 소금이 아니면 안 됩니다.” 라고 답하여 그 현명함을 인정받았다. 이에 선조가 “너희에게 부족한 것이 있느냐?” 라고 묻자, 광해군은 “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신 것이 가장 애통하옵니다” 라고 답하였다. 효종 1.나르시즘에 빠져, 항상 거울을 볼 땐 스스로 만족에 차 웃음이 끊이질 않았다고 한다. 2.효종의 얼굴에 난 종기의 치료를 놓고 침으로 피를 빼내어 독기를 제거하자는 신가귀와 그에 반대하는 유후성이 싸웠다. 이에 왕이 가귀의 의견을 취하여 침을 놓았는데, 침구멍에서 피가 쏟아져 왕이 "이제 정신이 좀 든다. 가귀가 아니면 큰일날 뻔했다"라고 말했는데 침이 혈락(血絡)을 범하여 과다출혈로 사망. 어의 가귀는 조사결과 수전증 있는걸로 밝혀졌다. 현종 유일하게 후궁을 두지 않은 왕이다. 숙종 1.신하들이 따뜻한 온돌방에서 꾸벅꾸벅 졸자 온돌을 빼버리고 얼음장에서 일하게 하였다. 2.관우의 팬이였다고 한다. 인조 1.소현세자는 손톱밑이 시커멓게 변하고 얼굴은 검게 변하며 죽었다. 전혀 확인되지 않은 병이었다. 독살이라는 소문은 퍼져나갔지만 인조는 이것에 대한 조사를 피하려 했으며 어의를 처벌하지도 않았다. 2.자신의 몸과 봉림대군의 몸이 아프자, 소현세자의 아내가 저주를 내려서 아프다고 하여 사약을 내리고 가족들을 모두 죽였다. 소현세자를 죽일 때 11살과 6살이던 아들들도 다 죽이고 임신했던 세자빈까지 죽였다. 영조 1.연애소설을 좋아하여 가끔 자신의 글에서도 소설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성품이 근검하여 백성들에게 사치를 금하라는 뜻으로 금주령을 내리기도 하였다. 2. 영조의 어진에 나와있는 쌍꺼풀지고 길쭉한 눈과 오뚝한 코에 조그마한 입술은 조선의 남성들이 추구하는 최고의 미인상이었다. 왕실에서는 이런 외모를 천하다 하여 기피하였으나, 영조의 어머니 숙빈 최씨가 양반 사대부가 출신이 아닌 무수리 출신에서 정1품 빈까지 신분상승 한 것을 감안할 때, 숙빈 최씨는 굉장한 미인이지 않았을까. 3. 영조가 왕위에 등극하기 전, 연잉군이었던 시절, 달성 서씨 집안의 규수(정성왕후)를 아내로 맞이하여 첫날밤을 치를 때의 일이다. 영조가 아내의 손을 잡고 ‘손이 참으로 곱다.’ 면 서 칭찬을 하자, 연잉군부인이 무심코 ‘궂은 일을 해본 적이 없어 그렇다’고 했더니 영조가 그날로 부인을 소박하며 그 다음부터는 멀리하였다. 아마, 무수리로 고생했던 어머니의 거친 손과 발을 생각한 게 아닌가 싶다. 4. 영조의 계비인 정순왕후가 간택에서 아버지의 이름이 쓰인 방석에 앉지 않자, 그 이유를 물으니 “자식이 어찌 아버지의 존함이 쓰인 방석을 깔고 앉겠습니까." 라고 답하였다고 한다. 또 ‘고개 중에는 어떤 고개가 제일 넘기 힘드냐’ 묻자, 강원도에서 온 규수가 대관령고개라 답하고 경상도에서 온 규수가 추풍령고개라 답하였다. 헌데 김규수는 보릿고개라 대답하였다. 보릿고개라! 겨울 양식이 봄이 되자 다 떨어지고 그렇다고 햇보리는 아직 나오지 아니한 때 세끼, 아니 두 끼, 심지어 한끼를 채우기가 그 얼마나 난감한가. 이것이 보릿고개인데 김규수가 넘기 힘든 고개가 바로 보릿고개라 하니 얼마나 명답인가! 다음으로 꽃 중에 제일인 꽃을 묻자, 김규수는 목화 꽃이 제일이라 답하였다. 이유를 물으니, “목화 꽃이 다른 꽃들보다 화려하지도 예쁘지도 않지만, 핀 연후 사람에게 혜택을 주는 면에서는 다른 꽃이 따라올 수 없을 정도로 유익한 꽃이니, 바로 목화가 백성의 옷감이 되어서 예절도 지키고 품격도 살리고 추울 때 보호하여 주기 때문입니다.” 라고 답하였다. 정조 1. 정조가 말하길, “매양 취침하기 전에 두 발바닥의 가운데를 마주 문질러 비비면 기운이 절로 퍼진다. 내가 밤마다 시험해 보았는데, 처음에는 힘이 드는 듯 했으나 오래도록 계속 했더니 신통한 효험이 있다.” 2. 연애소설을 비롯한 소설을 무척 싫어하여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서고에 있던 모든 소설을 불태웠다. 또한 숙직을 하던 규장각 학자들이 몰래 연애소설을 읽고 있다 들켜서 정조에게 혼이 났고 벼슬을 삭탈했다. 그들은 정조에게 다시는 소설을 안 보겠다는 반성문을 쓰고 나서야 벼슬길을 다시 열어주었다. 3. 영조는 근검하여 백성이 먹을 쌀이 없어진다는 이유로 금주령을 내렸지만 정조는 개인적으로 술을 너무 좋아해서 영조가 죽고 왕이 되자마자 금주령을 없앴다. 4. 공부 못하는 신하한테 공부하라고 끈임 없이 시키며, 숙제를 내고 제대로 하지 못하면 망신을 주고 술을 마시지 못하는 신하에게 술을 강요하여 기절할 때까지 마시게 하고, 활을 못 쏘는 신하에게 끊임 없이 연습을 시켰다고 한다. 5. 술을 무진장 좋아하여, 정약용에게 필통에 술 한가 득 부어 원샷! 하기를 강요하여 정약용은 술을 싫어했다고 한다. 그때 당시 필통에 술 붓기라면, 요즘 사발에 소주를 들이붓는 거와 맞먹는다고 한다. 6. 정조 20년, 이정용이라는 유생이 술에취해 늦은밤 궁궐 담장 아래에서 잠에 들었다 잡혀간적이 있었다. 그러나 술을 좋아했던 정조는 요즘 유생들은 술을 잘 마시지 않는데 술을 좋아한다고 칭찬을하였다. 그리고 많은 유생들이 숙박하던 잡촌과 집춘영은 벽을 맞대고 있으니 이정용은 잡촌에서 잤던거라는 궤변을 펼쳐서 오히려 상까지 주어서 보냈다. 헌종 1. 이 헌종이 그렇게 미남이었다고 한다. 기록을 보면 여색을 즐기는 왕 때문에 궁궐 내 용모가 예쁘다고 하는 궁녀들은 거의 승은을 입었다고 한다. (덕분에 후궁첩지도 아무나 내리지 못했음. 딸을 낳은 궁인 김씨도 첩지를 받지 못했다.) 왕 자체가 너무 미남이라 젊은 궁인들이 참 많이 유혹을 했다고 한다. 하지만 너무 어린 나이부터 가진 잦은 성관계 때문에 건강이 악화되어 죽기 직전에는 피가래까지 토하며 고생하다가 23살이라는 어린 나이에 요절한다. 궁녀들이 유혹을 할 정도였으니 엄청난 미남이 아니었나 한다. 2. 헌종은 어린 나이에 아버지를 잃었으므로 늘 아버지의 얼굴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에 마음 아프게 여겨 한 신하에게 늘 물었는데, “진전에 모신 수용이 오히려 매우 닮으신 전하의 용안에 미치지 못합니다.” 하니 헌종이 거울을 보고 눈물을 줄줄 흘렸다고 한다. 고종 1. 고종 황제가 행차하다가 땀을 뻘뻘 흘리며 테니스 라켓을 휘두르는 미국인들의 모습을 보고 “어찌 저런 일을 하인들에게 시키지 않고 귀빈들이 하느냐”고 안타까워 했다. 2. 명성황후가 죽고 나서 끝까지 재혼을 하지 않았지만 아끼던 후궁이 있었는데 명성황후가 부리던 상궁이었다고 한다. 명성황후는 그녀를 곁에 둔 이유가 못생겨서 고종이 쳐다도 안 볼 것이라고 생각하고 곁에 두었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말하기를 그녀는 명성황후와 똑같이 생겼다고 말했다. 3.당시 1887년대, 전신(전보총국)의 등장과 함께 최초 궁궐에 가설된 전화를 경험한 고종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성음을 들을 수 있군" 이 생각에 고종은 상당한 고액의 전화를 경기도 남양주시 금곡동 141-1번지 홍릉에 설치한다. 그 곳은 고종의 부인 명성황후(민씨)의 무덤. 전화의 설치가 끝난 직후 고종은 아침마다 그 곳으로 통화를 걸어 말을했다. "여보, 어제는 춥지 않았소?"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를 걸어 죽은 민씨에게 안부를 전했고 매일아침 울었다고 한다. "아무리 멀리떨어진 사람의 목소리를 들을 순 있어도 저승까지는 못 하는구나." 그럼에도 고종은 매일아침 홍릉으로 전화하는 걸 잊지 않았고 일제에 의해 강제퇴위를 당하는 그 날에도 전화를 걸었다고 한다.
서울 여행 북촌한옥마을 데이트 코스
<<서울 가볼만한곳 북촌한옥마을 >> #서울가볼만한곳 #북촌한옥마을 안녕하세요. 네이버 인플루언서 호미숙 여행작가입니다. 한 주의 중간 목요일입니다. 날씨가 화창하니 참 좋네요. 금요일과 주말이 이어지는 설렘의 하루입니다. 오늘도 급히 지방으로 일이 있어 가는데요. 천안을 들렀다가 시간이 되면 대천보령 쪽을 다녀오고 싶네요. 오늘 소개할 여행지는 서울 북촌한옥마을입니다. 서울에 서촌과 북촌에 한옥마을이 있는데 외국인들이 필수코스로 다녀올 정도로 전통과 현대가 어우러진 곳이기도 합니다. 북촌한옥마을은 인사동에서 가까워 여행코스로 가곤합니다. 서촌은 덜 가는 것 같아요. 요즘 서촌이 훨씬 뜨고 있는데요. 타지에서 서울로 여행오면 인사동과 인사동, 북촌, 서촌, 홍대, 남산타워, 명동, 남대문시장 등 많습니다. 서울 명소 북촌한옥마을코스 1. 북촌 한옥마을 2. 한옥마을8경 가회동11번가 3. 서울중앙고등학교 4. 석정 우물터(석정 보름 우물) 5. 계동 샐러드 맛집-실리가든 6. 대구참기름집-계동 두번째로 오래된 가게 7. 믿음미용실- 계동 다섯번째 오래된 가게 1988년부터 지금까지 운영 *댓글의 링크를 누르면 상세정보와 영상으로 백인제가옥. 한옥호텔 락고재 등도 소개했습니다. -북촌한옥마을 안내지도도 첨부했어요. 서울 북촌한옥마을 북촌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양반층 주거지로서 1920년대까지 그다지 큰 변화가 없었는데, 1930년대에 서울의 행정구역이 확장되고, 도시구조도 근대적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주택 경영회사들이 북촌의 대형 필지와 임야를 매입하여, 그 자리에 중소 규모의 한옥들을 집단적으로 건설하게 됩니다. 현재 한옥들이 밀집되어 있는 가회동 11번지와 31번지, 삼청동 35번지, 계동 135번지의 한옥 주거 시들이 모두 이 시기에 형성되었습니다. #서울여행 #서울여행코스 #북촌한옥마을 #서울명소 #여행지도 #서울여행지도 #서울북촌한옥마을 #북촌한옥마을코스 #서울북촌여행 #서울계동 #북촌8경 #북촌11번가 #서울갈만한곳 #서울중앙고등학교 #대구참기름집 #믿음미용실 #실리가든 #석정보름우물 #서울북촌계동 #골목여행
유머로 배우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
유머로 배우는 조선왕조 500년 역사 염라대왕이 하루는 조선조 500년의 임금 27명이 저승에 모두 와 있다는 보고를 받고 만찬에 초대했습 니다. 염라대왕은 건배 제의를 한 후, 분위기가 무르익자 곧 질문하기 시작 했습 니다. 통역은 세종대왕이 맡았습니다. "제일 단명한 임금은 뉘시오?" "예, 단종(17세)입니다." "그럼, 제일 장수하신 분과 재임기간은?" "영조(21대) 83세에 승하하셨는데, 51년간 재위하셨습니다." "장남이 왕위를 계승한 임금은?" "7명뿐입니다. (문종.단종.연산군.인종.현종.숙종.순종 / 26%) "자녀를 가장 많이 둔 임금은?" "태종(3대)으로 부인 12명에서 29명(12남 17녀)의 자녀를 생산했습니다." "후손을 못 둔 임금은?" * 단종 (6대) * 인종 (12대) * 경종 (20대) * 순종 (27대) 입니다. "안방 출입이 제일 잦았던 임금은?" * 부인 12명인 3대 태종 * 부인 12명인 9대 성종 입니다. "폭정을 한 왕은?" "단연, 연산군(10대)입니다" "제일 선정을 베푼 임금은?" "예, 통역을 맡고 있는 '짐' 이라고 생각합니다,, "염라대왕: 세종은 백성도 잘 보살 폈지만, 밤 정치도 잘 해 부인 6명에 22명의 자녀를 둬, 생산공장도 KS 마크라고 들었소이다~!! "세종대왕 : 네, 황송합니다.,,!!" " 조선조 임금 중에서 가장 됐다 한 임금은?" "예,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대왕인데 태평성대를 구가 했습니다." "조선조 임금들의 평균 수명은? " 47세입니다" "그렇게 단명한 이유는? 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것들을 먹고 마시고 즐기면서 오랫동안 살려고 애썼지만, 생명은 대단히 짧았 습니다. "이유인즉,,,, 첫째. ☞ 10대 전반부터 수많은 후궁들 속에서 과도하게 성생활을 했고, 정력제에 해당하는 보약을 자주 복용하여 독이 몸에 쌓였고, 둘째. ☞ 일거수 일투족을 다른 사람이 모두 대신해 줘 자신이 움직일 필요가 없어 운동이 부족했으며, 셋째. ☞ 임금들의 생활은 일반인들이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고달팠습니다. 기상시간은 오전 6시 하루 일과를 마치고 잠자리엔 밤 11시, 결국은 체력이 달렸기 때문입니다 조선 500년 역사공부 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