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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의 최적화, 인체의 물리학

신체의 최적화, 인체의 물리학 고래로 스승들이 정형화된 틀이나 형태를 거부한 이유는 그것이 제자들의 성장가능성을 가로막을 수 있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수되는 과정에서 정형화된 틀이나 형을 만들어 가르친 이유는 기초적인 자세와 동작을 혼자 연습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결과적으로 이것은 내제자와 외제자를 구분하게 만들고 그 기법의 이해를 어렵게 만들었다. 사람마다 자신이 생각하는 틀이 다르고 이해가 다르기 때문에 정형화된 틀을 만들어도 서로 다른 해석을 할 수가 있다. 무엇보다 정형화의 문제는 각개의 신체마다 다른 역학을 적용할 수 없다는데 있다. 그러니까 완전초보자, 어린 아이들이 아니고서는 형을 가르칠 필요가 없다. 형은 기본 자세와 동작을 익히는데만 사용하고 그 다음부터는 오직 원리만 가르쳐야 한다. 예를 들어 손을 뻗어 타격을 한다치자. 사람마다 팔의 길이는 다르고 상대에 따라 그 유효사거리도 달라진다. 문제는 상대 역시 같은 생각을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결국 타격의 문제는 서로의 거리와 반응으로 좁혀진다. 그러면 이것을 어떻게 적용하고 연습할 것이냐의 문제로 귀결된다. 중요한 것은 결국 손과 발의 반응이며 손의 교차와 발의 간격이다. 따라서 이것은 두 가지 문제를 낳는다. 손과 발의 순서, 손과 발의 방향이 그것이다. 반응의 문제를 제외한다쳐도 거리를 좁히고 벌리는 보법은 순서와 방향까지 함께 내포한다. 손도 마찬가지다. 피하고 칠 것이냐 피하면서 칠 것이냐의 선택이 발생한다. 이렇게 순서와 방향, 반응과 시차까지 고려하면 정형화된 순서와 형태, 동작과 자세가 무의미해짐을 쉽게 알 수 있다. 그래서 가장 좋은 접근방법은 상대에게 나를 맞추는 것이다. 그럴 때 순서나 방향의 고민없이 신체의 최적화를 이룰 수 있다. 상대가 뻗는 주먹에 반응하고 그걸 기준으로 순서와 방향이 정해지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연습하면 반복숙달이 쉽고 신체의 역학을 최적화할 수 있다. 문제는 선방어 후공격이 되면서 또다시 정형화된 순서로 회귀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반사신경과 반응속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공격이 아니라 방어만 연습하는게 맞다. 굳이 훈련과정을 언급하면 한쪽은 주구장창 공격만 하고 한쪽은 계속 그것을 방어만 하는게 여러모로 효과적이고 효율적이다. 그걸 번갈아서 하면 즉각적으로 문제점을 깨닫고 개선해나갈 수 있다. 무예수련이나 격투수련에서 특히 문제점은 반사신경을 키울 수 있는 훈련 자체를 하지않는 것이다. 누구나 예민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훈련을 통해 자신의 반사신경과 반응속도를 키울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을 하지않고 공방대련만 지속하는 것은 서로의 발전에도 의미가 없고 방법과 기술에만 치중하는 결과를 낳는다. 이게 왜 문제냐면, 첫째 익숙한 패턴으로 습관이 남고 둘째, 반응속도가 빠른 사람에게 대응할 수가 없다는 결정적 약점이 발생한다. 이렇게 되면 차라리 막싸움만 못한 반응속도를 얻고 무엇보다 투지나 기세에 밀려 이길 수가 없다. 이런 결과로 중국의 권사가 격투기 선수에게 일방적으로 공격당하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실제로 중요한 것은 자신이 낼 수 있는 최대속도를 적절히 활용할 수 있는 거리와 간격을 만들어내는 보법이다. 메이웨더와 맥그리거가 싸우면 누가 이길까? 서로 비슷한 반사신경과 반응속도를 가진 상태에서의 승패는 그 거리와 시차가 결정한다. 복싱룰로 하면 메이웨더가 이기고 격투기룰로 하면 맥그리거가 이긴다. 발차기를 쓰냐 안쓰냐는 거리를 결정하는 결정적인 요인이 된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실제 룰없이 싸우면 일방적으로 맥그리거가 이기는게 아니다. 이 때는 더 잔인하고 폭력적인 사람이 이긴다. 무술가와 싸움꾼이 싸우면 누가 이기냐는 말들을 한다. 이 때도 승패는 물론 반사신경과 반응속도가 결정하지만 장기전으로 가거나 여러차례 반복된 싸움을 한다면 무술가가 이길 수밖에 없다. 타격과 보법이 제대로 갖춰진 무술가는 속도나 살기에도 대응할 수 있다. 그건 그렇고, 이게 신체의 최적화나 인체의 물리학에 왜 중요한 의미를 가지냐면 인체가 낼 수 있는 반응속도나 공격방식에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약점이 발생하고 상황을 뒤집을 수가 있는 것이다. 압도적인 체격차라 하더라도 인간의 신체는 시차를 만들고 그 빈틈을 노리면 상황이 역전된다. 그런 기술들의 체계가 지금까지 살아남은 무술들이고 기법들이다. 무조건 체격이 크고 힘이 쎄고 빠른 사람이 이긴다. 그런 답은 존재할 수 없다. 솔직히 말하면 더 독한 놈이 이기고 더 잔인한 놈이 이기고 더 사악한 놈이 이기고 더 교활한 놈이 이긴다. 실전에서는 결국 투지와 살기가 생사를 가른다. 이것은 승패와도 상관이 없다. 바꿔말해, 이길 순 없어도 죽일 순 있고, 이길 순 없어도 비길 순 있으며, 이길 순 없어도 치명상을 남길 수 있다. 그게 시합과 실전의 차이다. 그러면 다시 이것이 최적화나 물리학과 무슨 상관이냐? 가장 빠르고 정확하게 잡고 때리고 치고 피하고 넘어뜨리는 방식이 최적화의 물리학과 직결되기 때문이다. 여러 기술을 잘 쓰는 사람보다 한 가지 기술만 연습한 사람이 더 무섭다는 말을 한다. 이게 무슨 말이냐면 손이든 발이든 한 가지 공격만 연습하고 단련한 사람이 여러가지 기술을 연습한 사람보다 최적화가 더 잘 되어있음을 뜻한다. 상대의 공격을 흘려서 방어하고 제압할 수 없는 사람이면 한 가지 공격만 계속하는 사람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엽문이나 그 제자가 실전에서 한번도 지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다. 계속 연타로 앞손을 날리는데 그걸 무슨 수로 방어하고 되받아치겠는가. 극단적으로 방어를 등한시한 공격적인 수법이지만 오히려 그래서 방어할 필요가 없어지는 것이다. 그냥 그 위에 공격을 더할 뿐. 이걸 대응하려면 애초에 공격하지 못하게 거리를 주거나 앞발로 계속 견제를 해야한다. 그도 아니면 남은 방법은 한 가지. 똑같은 방식으로 공격에 주먹을 더해야한다. 겁먹지만 않는다면 그게 제일 좋은 대응방법이다. 물론 엽문보다 빠르고 정확해야겠지만. 마이크 타이슨이 전성기 시절의 스피드로 상체를 움직이며 펀치를 날리면 그걸 누가 피하겠나 타이슨보다 느린대. 그러니 애초에 가까이 오지 못하게 하거나 먼저 때려야 한다. 아니면 끌어안고 넘어뜨리거나. 물론 쉽지 않겠지만. 중요한 것은 신체의 최적화가 되서 인체의 물리학을 극대화한 사람이 상대보다 조금이라도 우위면 절대적으로 유리해진다는 것이다. 힘과 기술의 차이는 다른 방법으로 어찌어찌 해볼 수 있지만, 반사신경이나 반응속도의 차이는 아예 차원이 다른 수준을 낳는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다는 뜻이다. 그러면 어떠한 연습이든 그 신체의 반응과 속도를 끌어올리는 연습을 해야지 적당히 느린 속도로 반복된 동작과 기술을 연습할게 아니다. 이것은 티코로 드래프트를 연습하고 경기장에 나가서 전문 경주차와 시합을 하겠다는 것과 다를 바 없다. 구체적인 내용은 후에 다루자. 대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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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체의 균형, 근력과 부상
신체의 균형, 근력과 부상 심폐와 장기를 제외한 신체의 모든 부상은 골격에 집중된다. 여기서 말하는 골격은 관절을 말하는 것이다. 수많은 운동과 치료법이 있다. 재활도 의학의 한 분야로 스포츠의학의 한 축을 차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소메트릭이 재활치료법의 주류가 되지 않는 것은 이상한 일이다. 등척성 운동, 그러니까 근육의 길이가 고정된 운동, 쉽게 말해 버티기는 신체의 근력과 관절, 협응력을 동시에 강화할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특히 초보자나 부상자, 노약자에게 이보다 효율적이고 효과적인 운동, 치료, 방법은 없다. 아마도 이것이 강조되지 않은 이유는 그 효과에 비례해 재미가 없기 때문일 것이다. 똑같은 자세로 가만히 버티기를 하라는게 얼마나 재미없고 지루하겠는가. 그런 다른 모든 일들이 그럴듯이 기본에 충실하고 기본을 튼튼하게 하는 것들은 지루하고 재미가 없다. 불교적 수양에서는 대근기 중근기 소근기를 나눈다. 이것은 현대말로 인내심과 참을성이 얼마나 강하냐를 의미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자존심과 똥고집이 쓰일 수 있다. 잘 보면 자존심이 센 사람이 인내심도 강하고 참을성도 높고 똥고집도 있다. 그것을 긍정과 부정으로 나누기란 어렵다. 그 사람의 목적과 행위가 그것을 결정할 뿐이다. 아무튼 중요한 것은 신체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필요한 것이 끝없는 향상심이나 도전정신, 불굴의 의지같은 것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인내심도 방향이 잘못되었을 때는 악화와 불균형으로 치닫는다. 이것은 인정과 부정의 심리와 깊게 관계되는데, 내가 할 수 없는 일이나 목표에 집착한다 치자. 꾸준히 인내심을 갖고 노력한다는 것은 어디까지나 본인의 기본 실력이나 한계를 아주 조금씩 천천히 꾸준히 늘려나감을 의미한다. 인간은 기계가 아니다. 인간은 계단식이 아니라 선형으로 그것도 나선형으로 성장한다. 이차방정식의 기하급수적 증가를 말하는게 아니다. 3차원 도면의 나선형 회전을 말하는 것이다. 굳이 정신과 신체의 성장을 그래프에 비유하자면 그렇다. 2차원으로 보면 상승과 하강의 사이클이 그려 지겠지만, 실제의 3차원에서는 상승과 하강이 나선형으로 이어지는 하나의 선을 그린다. 이런 관점의 확장이 없으면 신체가 균형을 이루고 성장한다는 것도 이해할 수가 없다. 나는 굳이 근장력과 지구력과 유연성의 삼요소로 성장의 변수를 구분했지만, 이것들은 결국 신체가 실제에 반응하기 위한 대응을 요약한 것일 뿐이다. 중요한 것은 그것을 이해하는 지성이며 그것을 실천하는 심리다. 가뜩이나 신체는 두뇌라는 중추신경계의 지배를 받는다. 두뇌라는 것 자체가 신경의 집합이며, 인간은 신경의 지배를 받는다. 그것을 정신이라 부르든 영혼이라 부르든 중요한 것은 인간의 신체 전반이 지성이나 이성과 마찬가지로 통합적인 하나의 실체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러한 것들이 신체의 기능적 움직임에 중요한 이유는, 인간의 지능,그러니까 사고와 편견,과 본능, 감각과 감정,이 그러한 통찰과 이해를 후천적으로 수용하기 때문이다. 이것이 동물과 인간이 다른 점이다. 초원의 사자는 태어나기를 강하게 태어났다. 그냥 잘 먹고 성장하면 따로 노력을 안해도 강한 이빨과 다리로 다른 동물을 사냥하고 다닌다. 인간도 물론 타고난게 있다. 달리기와 던지기의 능력이다. 인간만큼 오래달릴 수 있는 동물은 말밖에 없고, 인간만큼 정교하게 던질 수 있는 동물은 없다. 진화론적 관점에서 인간의 신체능력은 전 지구에 진출할 수 있는 가능성을 주었고, 그래서 지금에 이르렀다고 볼 수도 있다. 나는 새로운 개념이나 이해를 적용한 적이 없다. 다 자르고 고대의 원시인과 비교하면, 현대인은 심각하게 게으르고 쓸데없이 집착한다. 오직 건강의 관점에서만 본다면 달리기만 하고 하루종일 물건을 만들고 놀면 그게 최상이다. 그게 원시인의 일상이다. 그러면 그게 제일 건강한거다. 물론 현대인은 필요이상으로 경쟁하고 필요이상으로 복잡하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그만큼 일해야 되고 신체도 더 건강해야한다. 정신적 영역에서 현대인은 스트레스가 대단히 높다. 따라서 신체도 그것을 견딜 수 있는 정신을 포함한 수련을 해야한다. 정신수양과 단련을 할 수 없는 운동은 스트레스 관리에 도움이 안된다. 적당한 스트레스가 도움이 된다는 말은 인간사회의 과열경쟁을 견딜 수 있는 정신력이 받쳐준다는 전제가 있을 때의 얘기다. 운동을 통한 경쟁이 스트레스 해소나 관리에 도움이 된다는 것은 일종의 중독으로 본질을 감추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러니까 운동을 해서 자동으로 정신력이 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별도의 노력으로 정신력을 강화하고 다시 운동능력이 향상되는 것이다. 금메달에 집착하고 순위와 성과, 경쟁에 몰두하는 것은 그 자체로 생존의 의미는 있지만, 정신이 발달하고 신체가 균형을 이루는 것과 상관이 없다. 내가 수영, 육상, 등산을 최고로 치는 이유는 그것이 인간이 자연과 조응하는, 그러니까 자신이 자연이라는 사실을 깨닫는 가장 적합한 활동이기 때문이다. 이럴 때는 지능과 본능, 이성과 정신을 따로 구분할 필요가 없다. 그 자체로 충분하니까. 스트레스를 감당할 수 없는 사람은 반드시 정신에 문제가 생기고 그것은 두뇌와 심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정신질환을 겪고 신체질병으로 이어지는 것이다. 정신과 신체는 분리해서 생각할 수 없다. 두뇌로 통합되고 심리로 연결되기 때문이다. 아직까지 마음의 병을 명확히 진단하는 방법은 개발되지 않았지만, 적어도 확실한 것은 신체의 균형을 통해 정신의 문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무예나 종교, 예술의 영역이 여전히 중요하고 정신, 영혼, 심리와 직결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신체가 부상을 입는 것도 정신과 신체의 불균형, 근력의 불균형에서 비롯된다. 감정조절이 안되면 무리한 동작을 하고 무리한 동작과 자세는 관절의 부하를 극대화한다. 그것이 정적일 경우는 근력으로 어느정도 부담을 줄일 수 있지만, 격렬한 동작에서는 꼼짝없이 근력이 약한 부위의 관절에 부담이 집중된다. 인간이 부상을 입는 결정적인 이유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하기 때문이다. 신체능력의 한계치는 가장 강한 부위기 아니라 가장 약한 부위, 가장 강한 근력이 아니라 가장 약한 근력을 기준으로 해야한다. 컨디션의 문제가 아니다. 자신의 능력을 착각하는게 문제다. 예를 들어 상체의 근력이 아니라 손가락의 근력, 팔꿈치의 근력, 어깨의 근력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 옳으며 하체의 근력이 아니라 발가락의 근력, 무릎의 근력, 골반의 근력이 옳다. 허리의 근력이 아니라 장요근의 근력, 복직근의 근력, 기립근의 근력이 기준이다. 그 중에 가장 약한 근력이 자신이 낼 수 있는 근력의 최대치이며 부상을 입지 않는 한계치인 것이다. 가장 약한 부위보다 높은 근력을 사용하는 것은 부상을 입는 지름길이며 신체를 망가뜨리는 가장 쉬운 방법이다. 이렇게 신체의 기본 원리를 이해하면 건강해지는 것도 부상을 입지 않는 것도 더 강해지는 것도 간단하다. 가장 약한 부위의 근력을 강화하면 된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신체의 균형을 맞추며 전체가 강해진다. 지극히 당연한 원리다. 인간이 욕심을 버리면 본질이 뭔지를 깨달을 수 있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지극히 자연스러운 원리. 대한
근육량 증가에 대한 착각
근육량 증가에 대한 착각 현재로서 우리가 아는 근육과 근력의 성장과 발달은 많은 착각에 빠져있다. 사실상 약투로서 그 착각의 폐해가 드러나고 있지만, 그럼에도 여전히 근육량의 증가에 대한 착각은 깊숙히 자리잡고 있다. 일단 단순히 말하면 스트렝스 이외의 근육량 증가는 불가능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니까 전통적인 보디빌더나 내추럴빌더, 파워리프터 또는 역도선수 이상의 근육량을 만들어내는게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나는 이 부분에 동의한다. 스테로이드 사용에 의한 보디빌더들은 이미 인체의 임계치를 넘어섰으며 그만한 근육량을 유지하기 위한 심장비대를 감당할 수 없다. 스포츠 심장이라고 마라토너들은 일반인보다 큰 심장을 가져서 맥박이 현저히 낮은 상태를 유지하는데, 그들은 오랜기간 서서히 발달했고 체적이 매우 작다. 근육량만 놓고보면 일반인보다 더 적은게 마라토너다. 내가 관심을 가지는 것은 심장을 키우거나 심장이 감당할 수 없는 근육량의 증량이 아니다. 근육량이 증가할 수 있는 근성장 속도의 한계치가 어디까지인가 하는 것이다. 일시적 펌핑이나 벌크업 같은 혈액, 지방을 배제하고 근육량 자체가 얼마나 증가할 수 있는지가 궁금하다. 그것을 알려면 신체가 낼 수 있는 한계치가 어디까지인가를 알아야 한다. 그것을 알기 위해서는 최대산소섭취량이나 관절이 견딜 수 있는 한계치를 시험하고 신체가 회복하는 속도를 확인해야한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근성장의 최대치는 그 사람의 근력수준, 산소공급과 이산화탄소배출의 정도, 혈액순환에 따른 회복속도로 결정된다. 이것을 기본으로 운동시의 근육사용방법, 관절사용방법, 운동사이의 회복시간을 대입해볼 수 있다. 결과적으로 신체의 근육량 증가는 근력증가의 수준 아래로 수렴되지만, 운동방식에 따라 근력증가와 근육량 증가의 효율을 끌어올릴 수 있다. 물론 이때 운동의 타겟, 목표와 방식은 우리가 아는 보디빌딩이나 스트렝스와 관점을 달리한다. 해부학적으로 세분화하고 근육을 쪼개서 분류하는 운동방식에서 신체를 골격과 구조에 따라 뼈와 관절, 힘줄의 집합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그러면 신체는 근육이 아니라 관절의 집합체로 재해석되고 근육은 그것을 연결하는 구성물이자 관절을 통해 통합되는 힘의 매개체로 바뀐다. 이러한 관점의 차이가 운동의 방식을 어떻게 바꾸냐면, 손과 발을 통해 전해지는 운동의 충격량을 어떤 식으로 흡수하는지를 중심으로 생각하게 만든다. 사람의 몸이 낼 수 있는 힘의 한계치는 그 사람의 척추와 척추다열근, 척추기립근의 장력 또는 인력에 한정되며 그것을 기반으로 골반과 어깨의 당기는 힘 또는 버티는 힘을 요구한다. 나는 그래서 신체를 상중하로 나누고 팔다리도 상중하로 나눠서 관절을 기준으로 운동하는 관점을 정리했다. 어깨 팔꿈치 손, 골반 무릎 발 같이 신체의 구조를 단순화한 것이다. 몸통을 상중하로 구분하지 않는 이유는 몸통의 뼈대가 네발짐승과 동일한 구조로 척추 하나로 설명되기 때문이다. 결국 척추를 자극할 수 없는 운동은 근성장의 최대치로 접근할 수 없으며 척추의 점진적인 성장을 유도할 수 있을 때만 어깨와 골반의 발달도 유의미해진다고 결론내릴 수 있다. 물론 척추를 자극하지않는 운동은 없으며 등근육 자체는 척추의 지지를 기반으로한다. 허나 그렇다고 해서, 팔운동이나 등운동, 전신운동이 척추의 강화와 점진적인 발달을 보장할 수 있을지는 회의적이다. 이미 많은 이들이 허리통증과 부상을 겪고 있고 상하불균형의 문제를 인식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일반인의 근성장속도는 숙련자보다 빠를 수 있다. 그러나 상하를 분리하고 척추의 강화를 선행하지않으면, 근력의 최대치에도 다가갈 수 없고 점점 불균형을 가중시킬 수 있다. 자연히 허리와 팔다리의 약화를 불러오는 것이다. 허리가 상대적으로 약해지면 등과 목에도 무리가 가고 이는 팔이 강화될수록 심화된다. 다리도 마찬가지로 허리의 약화에 가담한다. 이는 장요근의 불균형에서 비롯한다. 그래서 데드리프트보다는 스쿼트가 좋고, 벤치프레스보다는 데드리프트가 좋은 것이다. 물론 맨몸운동으로도 충분히 근력증가와 근육량 증가를 유도할 수 있다. 대신 이것은 부위별로 좀 더 느린 근육량 증가로 나타나고 전신근력강화를 위한 꾸준한 노력을 요구한다. 효율의 극대화를 위한 우선순위를 꼽자면 먼저 척추기립근을 집중적으로 강화하고 엉덩이와 하단전의 강화를 이어간다. 항상 척추기립근의 발달을 우선하고 엉덩이와 하단전을 동시에 강화해야한다. 그에 맞춰서 허벅지와 무릎을 단련하고 발목과 종아리의 발달을 유도한다. 척추다열근의 발달을 위해 매달리기와 당기기를 우선하고 점진적으로 광배근과 승모근의 수축을 유도한다. 겉근육보다 속근육이 우선해야한다는게 이런 의미다. 장요근을 비롯해서 척추와 갈비에 붙은 근육들은 결국 달리기같은 좌우교차에 의해서 발달한다. 육상선수와 같은 발전을 추구하는 것이다. 여기에 악력과 전완근, 팔꿈치의 강화를 우선하면서 어깨의 자극을 간접적으로 유도한다. 어깨의 발달은 항상 손과 등의 연계사이에서 작은 저항과 느린 속도로 추구해야한다. 애초에 팔이 무언가를 드는 것보다 던지기에 적합하게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다만 당기기와 매달리기는 원숭이의 친척답게 가장 적합한 방식이다. 우리가 근력과 근육량 증가나 회복의 속도를 분리하고 집착하는 이유는 그것이 가능하고 그것을 통해 성장을 극대화한 사람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근력과 근성장 모두 최대치에 이르는 방법은 파워리프터와 역도선수에게 있고, 그것을 달성하는 보편적인 방법은 스트렝스와 피지컬 트레이닝에 있다. 대신 그 효율성은 여기서 관절의 부상을 얼마나 방지하고 운동을 지속할 수 있는가에 달렸다. 문제는 그 종류와 방법이 너무 다양해져서 운동과 회복의 효율이 떨어진단 사실이다. 결국 관절과 힘줄의 발달은 단순한 운동의 반복에 있다. 가능한 단순화하고 인체의 구조에 집중해야 성장속도를 극대화할 수 있다. 복잡하게 변수를 늘리지만 않는다면, 근성장의 최대치를 위한 운동의 횟수는 일주일에 두번이다. 옛날의 장사들이 하던 운동횟수다. 얼마나 단순하고 정확하게 운동에 집중할 수 있는지가 근성장의 관건이다. 홍보, 마케팅, 이론을 다 걷어내고 남는 것은 인간이 얼마나 자신을 한계치로 몰아붙이고 그것을 회복하느냐. 그리고 욕심을 버리고 자신을 학대하지 않느냐다. 대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