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ater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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풀타임뛰고 지칠대로 지친상태에서 찍힌 축구선수 외모

대구의 아이돌 정승원
대구FC 미드필더
1997 년생
173cm 68kg
설렁설렁 안하고 빡세게 뛰어다녀서 더 예쁜 선수
관심좀 주세요..
귀찮으실까봐 댓글 달아달라고 못하는데
클립과 하트 정말 좋아해요...♥
11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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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정환 레벨은 아니라서ᆢ싫어하진 않을듯 합니다ᆢ😜😜😜
이 분을 많은 남성연예인들이 싫어합니다.ㅎㅎ
아이돌이 연예인축구대회 나간건줄;;;
잘 생깃네
제2의 안정환 각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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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역사속 9대 미스테리
1. 고대 왕국 가야와 아유타국의 미스테리 삼국유사에서는 아유타국을 인도의 고대왕국이라고 밝히고 있고 아유타는 인도 이름으로는 아요디아(Ayodhya)이다. 아유타국은 주위가 5천여 리, 나라의 왕도는 20여 리의 성으로 둘러 싸여 있으며 곡식과 과일이 풍성하고 풀과 꽃들이 우거져 무성하였다. 그리고 기후가 화창하고 사람들의 풍습이 착하고 온순해 학예에 부지런했다고 한다. 이 나라의 영향력이 한 때는 인도 전역뿐 아니라 동남아시아 일대까지 미쳤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먼 곳에서 가락국까지 올 수 있었을까? 서기 1세기 무렵에 바다는 그렇게 두렵기만 한 존재는 아니었던 것 같다. 대륙의 연안을 따라 바닷길로 이용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허황옥이 인도를 출발하던 음력 5월에는 인도와 한반도를 잇는 해로는 바람과 해류가 북으로 올라가는 기간이다. 즉 그 바람은 계절풍이고 해류는 리만해류이다. 그래서 어떤 큰 이상기류를 가진 태풍만 만나지 않는다면 배가 무사해 항해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허왕후가 인도의 아요디아에서 무작정 가락국에 와서 곧바로 왕후가 될 수 있었느냐는 의문이 생긴다. 아무런 사전교섭없이 바로 왕후가 됐다는 것은 이해하기 어렵다는 지적이다. 뭔가 그 전부터 이 두 나라간에 수많은 교섭이나 왕래가 있었기에 두 왕실의 합의에 의해 결혼이 성사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 한가지 주목되는 것은 김수로왕이 죽고 난 후 가락국과 아유타국과의 교류가 갑자기 끊기게 된 점이다. 가락태조왕릉 중수비에 있는 이수는 우리나라 그 어느 비각에서도 찾아볼 수 없는 독특한 문양을 수놓고 있는데 태양빛 같기도 한 것이 중앙에 있고 그 주위에는 이상한 형체의 동물같은 것들이 새겨져 있다. 이것은 인도 아요디아의 태양왕조를 상징하는 붉은 바탕에 흰색의 깃발에 그려진 문양과 똑같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 수로왕릉 납릉 정문에 있는 신어상인데 이 상은 인도 아요디아의 관공서와 성문 그리고 저택 등에 조각된 것과 똑같은 모양이다. 이러한 일련의 흔적들은 황하문명권의 일부로만 인식되어 오던 우리의 역사가 실제로는 인도의 문명까지 흡수하면서 발전해 왔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2. 첨성대 경주시 인왕동에 자리잡은 국보 제 31호 첨성대(瞻星臺). 동양에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천문대로 알려져 있다. 삼국유사에 의하면 신라 선덕여왕(632-647, 신라 27대 왕) 때 건립된 것이라 한다. 높이 9.17m에 밑지름 4.93m, 윗지름 2.85m이다. 첨성대의 용도에 대한 여러 학설이 제기되었지만 현재는 천문대라는 설이 유력하다. 하지만 첨성대에서 어떤 방법으로 별을 관측하였는지는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첨성대가 해 그림자 길이를 재기 위한 규표(圭表)로서의 용도였다는 주장도 있었고, 정교한 기하학적 구조로부터 수학적인 비례 등을 나타내기 위한 수학적 상징물로 봐야 한다는 의견도 등장했다. 선덕여왕이 은밀하게 신하들을 만나던 장소라는 주장과 외계인이 남겨놓은 기념비라는 주장도 있었다. 이러한 첨성대에 대한 다양한 해석은 열띤 논쟁을 불러 일으켰으나 아직 어떠한 합의점에 도달하지는 못했다. 다만 원래 제단이 있었던 자리에 첨성대가 있었다는 점이나 신라의 천문관측 기록 등으로 미루어 보아 첨성대는 천문관측 외에도 종교적인 의식을 치르던 곳이었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고 있다. 현대적인 의미의 천문대와는 다른 성격의 건축물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오랜 세월 모진 비바람을 견디고 그 자리를 지켜온 첨성대는 역학적 안정성, 미학적 곡선미 등을 두루 갖춘 온 세계의 소중한 문화 유산으로써 그 속에 담긴 의미를 풀어 나가는 것이 우리의 할 일이 아닌가 싶다. 첨성대를 보존하기 위한 정밀조사와 첨성대의 건립배경을 규명하기 위한 적극적인 연구가 필요하다. 3. 운주사 와불과 천불천탑 운주사하면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는 곳으로 알려져 있는데 석탑과 석불을 합쳐 100여개 남짓밖에 안 될까 하는 의문이 생긴다. 아마도 11세기 초반 운주사 창건 이후 수많은 전란과 재난에 의해 사라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80년대만 해도 이 운주사 돌탑과 돌부처 바로 앞까지 논밭이 있어서 이곳이 훼손될 수밖에 없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 인근의 노인들에 의하면 인근 마을 사람들 중에 자기 집을 고치거나 새로 지을 때 이곳 돌부처와 돌탑을 가져다 쓰지 않은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이니 옛기록이 그저 허황된 것만은 아닌 듯 싶다. 석불좌상의 높이는 12.73m이고 석불입상의 높이는 10.30m인데 이 두 석불은 대체로 북쪽 다리 부분이 남쪽 머리 부분보다 약 5도 높고 입상쪽이 좌상쪽보다 약 5도 높게 경사져 있다. 이 와불은 다른 곳에서 만들어 이곳에 옮긴 것이 아니라 산 정상에 있는 암반에 그대로 조각한 것이다. 문제는 고려 초기 당시에 어떻게 이 무거운 불상을 일으킬 생각을 했었느냐는 것이다. 아니면 이곳의 다른 불상들처럼 파격적인 모습을 구상하여 처음부터 하늘을 보고 누워 있는 불상을 조각했는지도 모른다. 일반적으로 석가모니가 열반할 당시의 모습을 보여주는 측와불은 인도나 스리랑카 쪽에서 많이 볼 수 있다. 그러나 그 형태는 운주사의 와불과 현격한 차이가 있다. 인도나 스리랑카의 측와불은 석가모니가 누워서 손으로 턱을 괴거나 받친 상태인데 운주사의 와불은 그저 정면으로 하늘을 바라보고 있다. 또 좌상과 입상의 다리 부분에는 떼어 내려고 했던 흔적으로 보이는 틈이 있다. 암반에 불상을 조각하고 떼어 내는 공정을 마치지 못한 미완성 불상으로 일부에서는 추측하기도 하지만 처음 불상을 조각한 후 생긴 흔적인지, 아니면 후대에 사람들이 나름대로 의미를 두면서 세워 보려고 만든 흔적인지는 단정지을 수 없다. 운주사에는 천개의 불상과 천개의 탑이 있었다고 전해지는데 현재 석탑은 모양을 제대로 갖춘 것이 18기 가량밖에 남아 있지 않다. 운주사 입구에 보이는 구층석탑, 칠층석탑, 특이하게 생긴 원형다층석탑(연화탑), 원형석탑(실패탑), 오층석탑(거지탑), 원구형석탑(항아리탑) 등이 있다. 이 석탑들은 몇가지 형식을 취하고 있는데 먼저 전형적인 우리나라 석탑형식으로 탑신과 옥개석이 네모 반듯한 모양을 이룬 것과 탑신이나 옥개석이 원형을 이룬 것, 벽돌로 쌓아서 만들어진 전탑 형식, 지대석 위에 기둥 형태의 거친 석재를 얹어 놓은 형식 등이 있다. 운주사의 이 탑들이 이렇게 모양이 제각각인 이유는 무엇일까? 운주사는 창건에서 폐사까지 3~4차례의 중수가 있었는데 이 시기마다 새로운 석탑들이 세워지면서 모습이 서로 달라진 것이 아닌가 추측된다. 운주사에 또 하나의 수수께끼는 칠성석(七星石)이다. 운주사 입구에서 바라보면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놓여져 있는 칠성석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일곱 개의 자연석을 원형으로 다듬어 배치했는데 그 모양은 북두칠성의 형태와 똑같다. 그래서 운주사는 일반 불교사찰이 아니라 칠성신앙과 관련된 도교사찰이 아닌가 하는 막연한 주장이 제기되어 왔었다. 이 칠성석의 직경, 원반끼리의 중심각, 각 원반 중심간의 거리, 돌의 위치와 두께 등이 현재 북두칠성의 밝기나 위치와 똑같은 비례를 지니고 있다고 한다. 칠성석의 이러한 천문학적 가치를 인정하더라도 누가, 왜, 하필 운주사 서편 산 중턱에 만들었는지, 또 천불천탑과의 관계 등 궁극적인 의문에 대한 대답은 할 수 없는 실정이다.  4. 팔만대장경 16년의 제작 기간 중에 판각기간은 약 12년 정도이다. 연도에 따라 판각량은 달랐지만 이 12년 동안에 81,340여판, 글자는 5200만 자 가량을 어떻게 판각하였는지 의문이다. 아주 숙달된 각수로 하여금 옛날 방식으로 대장경판을 판각시켜 보았더니 하루에 20여자를 넘지 못했다고 한다. 이러한 사실을 바탕으로 당시 판각에 참여한 각수를 추정해 보면 약 593명이 된다. 그러니까 593명의 각수가 하루도 거르지 않고 12년동안 판각만 했다는 이야기다. 593명의 아주 능숙한 각수가 존재했었는지에 대해선 상상이 가지 않는다. 그리고 매년 고르게 판각한 것이 아니어서 어떤 해에는 약 1,500명 이상의 각수가 참여했었다는 결론이 나오기도 한다. 흔히 강화도에서 제작되어 그 곳의 선원사 보관되어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는데 그것이 어째서 현재의 해인사로 오게 되었는가? 거기에 대한 자료가 많지 못해서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여기에는 여러 가지 학설이 있는데 그것들을 살펴보자. 강화도가 아닌 남해나 거제도 등에서 새겨서 해인사로 가져왔다는 주장도 있으나 조금은 신빙성이 떨어진다. 대장경판이 원래 두 벌이었다는 주장도 있다. 이 주장은 한 벌은 남해나 거제도에서 나무를 가져와 해안사에서 새겼고 또 하나는 서해안과 남해안에서 나무를 실어다가 강화도에서 새긴 것으로 보고 있다. 이것은 판각 위치나 옮겨온 경로에 대한 문헌의 기록과도 맞아 떨어지고 있다. 그러나 한 벌을 새기는데도 많은 국력이 동원되었는데 두 벌이나 만들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이 있다.  5. 거북선 거북선이 과연 철갑선이었는지는 아직까지 논란의 대상이다. 거북선이 철갑선이라는 말은 일본 기록에 많다. 임진왜란 이후 일본의 수군장이 된 구끼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의 전함은 거북선 이외에도 모두 철로 감싼 전함이 많이 있다고 했다. 이외에 많은 일본 기록에서 거북선이 철갑선이라고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 기록에 거북선이 철로 장갑되어 있다는 기록은 없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도 칼 송곳을 꽂았다고는 되어 있으나 철로 덮었다는 기록은 없으며 조카 이분의 '충무공행록'에도 나무로 뚜껑을 씌우고 칼을 꽂아 적이 뛰어들 수 없게 했다고만 되어 있다. 이 때문에 학계에서는 거북선이 철갑선은 아닐 것으로 추측하고 있다. 현재 각종 모형에 제시된 바와 같이 거북선의 용머리가 길게 위로 솟아 올라 있었는지도 의문이다. 용머리에서 대포를 쏘았다는 기록이 있는데 정조 때 발간된 "이충무공전서"에 나오는 용머리의 크기(길이 133cm, 폭 93cm)로는 포를 설치하기에는 좀 작아 보인다. 이순신의 장계나 난중일기에는 용의 입으로 현자포를 치켜 쏜다고 되어 있으며 왜장을 사살한 전공도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임진란 당시 거북선의 용머리는 현재 모형보다 크고 거북선 선수부에 밀착되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이충무공전서에는 거북머리에서 유황연기를 뿜어 적을 혼미케 한다는 기록이 있는데 용머리의 기능이 포탑에서 연기 방출용 굴뚝으로 바뀐 것이 언제인지도 알 수 없다. 게다가 내부의 밀폐된 공간에서 수십개의 포를 발사하여 발생한 엄청난 양의 연기를 어떻게 처리하였는지도 의문이다.  6. 조화의 극치, 석굴암 깊이 14.8m, 높이 9.3m의 석굴 안에 본존불이 모셔져 있다. 이 석불은 1.58m의 좌대 위에 3.26m의 거대한 불상으로 굽타 양식으로 만들어 졌다. 석굴암의 제작에 사용된 화강암은 무려 3000여톤에 이른다고 한다. 놀라운 것은 지금으로부터 1300년 전에 세워진 이 석굴이 기하학적으로 완벽한 설계에 의해 만들어 졌다는 점이다. 석굴의 평면은 반지름 12척(3.3m)으로 정확한 원을 이루고 있으며, 입구의 너비나 본존 석불의 높이 역시 반지름이 12척으로 되어 있다.  옛날엔 하루의 길이를 12시간으로 보았는데 이것은 하루의 길이와 일치한다. 그리고 원은 1년 365일을 상징하는 것으로 본다. 석굴암이 뛰어난 것은 천연 동굴이 아닌 인공굴 안에 만들어 졌으며, 구형, 삼각형, 사각형, 팔각형 등의 기하학적 구성에 의해 완벽한 조화와 통일을 이루고 있기 때문이다.  본존불의 좌대 방향은 방위각 117도(동으로부터 남으로 27도 방향)라고 하고 본존불은 좌대를 기준으로 동에서 남으로 4도가 틀어져 있다고 한다. 즉, 현재 본존불은 방위각 121도로 되어 있다. 이것은 일제가 수리공사를 할 때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잘못해서 그 방향이 틀어진 것으로 추측된다.  그 이유는 본존불과 좌대를 만들 때 애시당초 그 방향이 틀렸을 리 없고 본존불을 들어올리다가 뒷부분에 금이 간 모습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경주의 일출 방위각을 보면 동지 때는 119도, 춘·추분 때는 약 90도, 하지 때는 약 60도로 나타나는데 석굴암의 본존불에는 사시사철 햇빛이 들어왔다는 이야기가 된다.  석굴암 아래에는 토함산 골짜기에서 내려오는 물을 받아서 마시는 감로수대가 설치되어 있다. 이 물은 석굴암 내의 본존불상 바로 밑부분을 타고 내려오는 물줄기라고 한다. 그 물줄기는 인조 석굴을 떠받치는 암반 사이를 흘러 석굴암 내의 습도를 조절하는 역할을 하기도 했는데 일제시대에 일본인들이 석굴암을 완전히 해체하여 보수공사를 하면서 석굴암의 외벽과 밑을 시멘트로 짓이겨 놓고 물줄기도 석굴암의 바깥쪽으로 돌려 놓았다고 한다. 일제시대와 광복 후 후손들의 손에 의해 석굴암은 그 원형을 상실하고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버렸다. 우리는 아직도 예전 석굴암의 건축 원리를 알지 못한다. 1000여 년이나 원형대로 보존될 수 있었던 옛 선조들의 석굴암 건축 비법이 신기하기만 하다.  7. 마이산 탑사 마이산 탑사(馬耳山 塔寺)에는 가공하지 않는 천연석으로 쌓여진 탑들이 모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높이 15m, 둘레 20m의 거대한 탑들도 즐비하다. 접착제를 쓴 것도 아니고 시멘트를 사용한 것도 아니다. 그런데 100여년동안 태풍과 회오리 바람에도 끄떡없이 버티고 서 있다. 탑들이 위치한 곳은 암마이봉과 수마이봉 사이의 계곡인데 이곳은 유난히 세찬 바람이 부는 곳이다. 지형적으로 앞쪽이 넓고 뒤쪽이 좁은 계곡이어서 바람이 세차게 휘몰아쳐 오는 것이다. 특히 여름철 태풍이 불어오면 언덕의 나뭇가지가 부러지고 웬만한 나무는 뿌리채 뽑히지만 이 곳의 돌탑은 조금씩 흔들리기만 할 뿐 쓰러지지 않는다. 이는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에서도 보기 드문 불가사의로 손꼽힌다. 마이산 탑사에서만 볼 수 있는 또 하나의 신비는 바로 역고드름이다. 겨울에 정한수를 떠 놓고 기도를 드리면 그릇에서 고드름이 거꾸로 뻗쳐 오른다. 기도의 정성이 깊으면 그릇 속에는 이처사가 쓴 신서가 박힌다. 이 역고드름 현상은 요즘도 매년 한겨울에 몇 차례씩 일어나고 있다. 이는 자연적인 현상으로 탑사 오른쪽에서 천지탑을 지나 암마이봉 절벽으로 돌아 올라가는 바람에 의해 역고드름이 생긴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주장이다. 그러나 탑의 단 위에서만 고드름이 생기고 그 바로 아래의 바닥에서는 고드름이 생기지 않는 현상은 설명이 불가능하다.  8.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 공룡의 낙원? 지난 10여년 동안 국내에서 발견된 공룡 발자국화석 수는 실로 엄청나다.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50여개 지역에서 6천5백여개의 발자국이 발견됐다. 세계적으로 매우 드문 경우다. 이곳에 공룡 발자국이 밀집된 이유는 무엇일까. 반면 완전한 골격화석은 왜 발견되지 않는 것일까. 공룡 화석에 담긴 1억년 전 한반도의 비밀은….  82년 이후 한반도 특히 영남지역에서는 매년 새로운 공룡 발자국 산지가 보고되고 있다. 이제는 발자국 산지의 발견은 더이상 뉴스 가치가 없을 정도로 이 지역에서는 흔한 일이 돼버렸다. 특히 고성 덕명리에서는 공룡의 종류가 적어도 사족보행(四足步行)의 용각류(龍脚類)가 3종, 이족보행(二足步行)의 조각류(鳥脚類)가 10여종, 이족보행의 수각류(獸脚類)가 2종이나 확인됐다.  경북 의성군 일대에서도 광범하게 공룡 화석들이 발견됐다. 86년에는 금성면 청로리 야산에서 공룡의 골격 부분화석이 발견된 이래 90년에는 금성면 제오리에서 공룡 발자국(천연기념물 지정)이 무더기로 발견되기도 했다. 또, 지난해 11월에는 봉양면 구미리에서 공룡 어깨뼈와 대퇴뼈가 발견됐다는 언론보도가 나오기도 했다.  영남지역 이외에서는 전남 해남군 황산면 우항리 일대에서 공룡 발자국화석이 다수 발견됐다. 이곳 9개 층준에서는 2백여개의 공룡 발자국이 발견됐는데 특히 익룡 발자국화석과 물갈퀴발 새 화석이 한꺼번에 발견돼 주목을 끌었다.  이밖에도 국내에서 발자국화석이 1백개 이상 집단발견된 곳은 20여곳에 달할 정도다. 지역별로는 경상도 지역이 50여군데, 전남지역이 1군데, 북한 황해도 평산군 용궁리가 1군데 등 발자국화석은 6천개를 넘을 정도다. 그러면 한반도에서 이토록 많은 공룡 발자국이 발견되고 있는 이유는 과연 무엇인가.과연 한반도는 중생대 백악기에 공룡들의 천국이었는가. 사실 발견된 발자국화석만을 고려한다면 한반도가 공룡의 천국이라는 말은 크게 틀린 것이 아니다. 출처 : http://bbs2.ruliweb.daum.net/gaia/do/ruliweb/default/etc/327/read?articleId=18733071&bbsId=G005&itemId=145&pageIndex=1 모야 0.0 이런거 넘 잼뜸 공룡 천국이면 뭐해 ㅠ 석유 한 방울 나오지 않는데...따흑 고인돌에 대한 얘기가 없어서 아쉽네영 ㅇㅇ 우리나라에 전세계 고인돌의 70%가 있다는데 🤔
토트넘의 자신감, 그 원동력은 어디에서 나오는가?
이번 EPL의 여름 이적 시장은 그야말로 ‘Hot’ 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는 (로멜루 루카쿠, 빅토르 린델로프, 네마냐 마티치 등 영입) 약 2200억 원에 가까운 돈을 썼고, 맨체스터 시티는 (벤자민 멘디, 다닐루, 카일 워커 등 영입) 2400억 원에 가까운 금액을 투자했다. 첼시 (뤼디거, 바카요코, 모라타 등 영입), 라카제트를 영입한 아스널, 살라를 영입한 리버풀 또한 전력 보강에 성공했다. 이처럼 EPL TOP 6에 해당하는 팀들은 선수영입에 엄청난 돈을 투자했다. 그런데, 지난 시즌 리그 준우승을 차지한 토트넘은 조용하다. 협상 테이블에서 까다롭기로 유명한 다니엘 레비 회장이 있다고는 하지만 주전 풀백 카일 워커가 맨체스터 시티로 이적한 것을 포함하여 은지에, 파지오, 벤탈렙, 오노마 등이 팀을 모두 떠난 상황에서 토트넘은 로스 바클리 영입 시도 외에는 이렇다 할 행보를 보이지 않고 있다. 어떻게 보면 성적에 비해 열악한 재정 상황이 토트넘으로 하여금 이번 여름 이적 시장에서 소극적인 모습을 보일 수밖에 없도록 했을지도 모른다. 기존 구장이었던 화이트하트레인을 떠나 당분간 웸블리로 홈구장을 옮긴 토트넘은 현재 신축 구장 건설에 1조 1200억 원에 가까운 천문학적인 비용을 투자한 상태다. 애초, 약 5600억 원을 책정했지만, 브렉시트에 따른 환율 변동으로 건설비와 인건비가 증가한 것이 그 이유로 전해지고 있다. 또한, 지난 시즌 오랫동안 고수해 왔던 주급 10만 파운드(약 1억 4500만 원) 체계를 무너뜨렸다. 이 때문에 다른 쪽으로 소비가 심한 토트넘은 다른 EPL 팀들과 달리 네임벨류 있는 선수들을 영입할 수 없었다. 별다른 영입 없이 시즌을 시작한 토트넘. 하지만 그들은 걱정하지 않는다. 그들만이 내세울 수 있는 ‘자신감’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 자신감은 어디서 나오는 것일까? # 완성된 조직력 ▶ 토트넘의 Best11 (출처 : 베스트일레븐) 지난 시즌 EPL 최다 득점과 최소 실점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며 준우승이라는 결과를 가져온 토트넘. 라이벌 아스널을 넘어서며 명실공히 북런던 최강자로 등극한 그들의 강점은 끈끈한 조직력이었다. 지난 시즌과 같은 선수들로 새로운 시즌을 시작한 토트넘은 밑바닥부터 조직력을 다질 필요가 없다. 주 포메이션인 4-2-3-1과 스리백 체제인 3-4-2-1에서 어려움 없이 적응한 선수들은 부임 4시즌 째를 맞고 있는 마우리시오 포체티노 감독의 지휘 아래에서 전술에 한 층 더 녹아 들어갔다. 맨유를 이끌고 있는 무리뉴 감독이 영입을 하지 않고 지킬 수 있는 선수들을 모두 지킨 토트넘(카일 워커 제외)을 두고 “이번 시즌 토트넘은 더욱 물오른 조직력과 힘을 보일 것.”이라고 경계를 할 정도였다. 케인, 알리, 손흥민, 에릭센을 앞세운 공격과 알더웨이럴트, 베르통언이 버티고 있는 수비 양면에서 밸런스 있는 모습을 변함없이 보여주는 토트넘의 ‘꾸준함’은 그들이 자랑하는 ‘자신감’의 첫 번째 원동력이다. # 튼튼한 유망주 아카데미 유소년 시스템은 강팀으로 발돋움함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요소 중 하나에 해당한다. 유소년 체계가 제대로 확립되게 되면 불필요한 소비가 줄어들게 되면서 재정적인 안정감을 추구할 수 있고 빠른 시간 내에 조직력을 갖출 수 있다. 어린 선수들을 육성하는 데에 뛰어난 능력을 갖춘 포체티노 감독을 영입한 것도 그 이유에 해당한다. 즉, 거금을 들여 선수들을 영입하는 것 대신, 클럽 아카데미 내 유소년들을 믿고, 이들을 육성시키는 것이 토트넘의 ‘장기적인 플랜’이자 ‘철학’이라고 할 수 있다. EPL 내에서도 손꼽히는 유소년 시스템과 훈련 시설을 보유하고 있는 토트넘의 이러한 투자는 실제로도 큰 빛을 보았다. 가장 대표적인 예가 해리 케인이다. 해리 케인은 2년 연속 EPL 득점왕에 오르는 기염을 토하며 ‘오리지널’ 잉글랜드 출신 특급 공격수에 등극했다. 케인 이전까지 두 시즌 연속 25골 이상 터뜨린 선수는 단 4명(파울러, 앙리, 반 페르시, 시어러)에 불과하다. ▶ (왼쪽부터) 해리 윙크스, 카일 워커-피터스 (출처 : 잉글랜드 축구협회, 토트넘 홈페이지) 케인 외에도 해리 윙크스, 조시 오노마(아스톤 빌라 임대), 카일 워커-피터스 등이 있다. 윙크스는 지난 시즌 1군에서 종종 모습을 드러내며 백업 멤버로서 나쁘지 않은 활약을 보여주었고, 오노마와 카일 워커-피터스는 잉글랜드 U-20 대표팀에 발탁되어 지난 한국에서 열린 U-20 월드컵에서 우승컵을 들어 올렸다. 특히 부상으로 자리를 비운 트리피어를 대신해 17/18 EPL 1라운드 뉴캐슬 전에 출전한 워커-피터스는 뛰어난 활약을 선보이며 ‘스카이스포츠’ MOM에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이들은 소위 말하는 ‘닥주전’은 아니지만, 자국 연령별 대표팀을 비롯해 토트넘의 후보 멤버로서 큰 손색이 없는 기량을 지닌 선수들이다. 토트넘을 10년 안에 EPL 최고의 팀으로 만들겠다는 루이스 구단주와 레비 회장의 공언 아래 진행 중인 유소년 시스템 프로젝트는 이들의 2번째 강점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 토트넘에게 작용할 변수 축구는 단 11명 만이 뛰는 스포츠가 아니다. 주전 선수들을 받쳐줄 후보가 두터워야 우승 경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유독 조용한 여름 이적 시장을 보내고 있는 토트넘 앞에 위기가 닥쳐올 수 있다는 것이다. ■ 주전과 비주전의 차이 EPL에서 손꼽히는 기량을 보유한 선수들인 케인, 에릭센, 손흥민, 알리, 요리스 등의 Best 11로만 따져 본다면 토트넘은 EPL에서 가장 강력한 팀에 가깝다. 하지만 그들을 대체할 선수들의 기량은 그들에 비해 부족한 상태다. 구단 역대 최고 이적료를 기록한 무사 시소코(436억 원)를 비롯해 네덜란드 리그 득점왕 출신 빈센트 얀센 등은 지난 시즌 내내 부진을 면치 못하면서 주전 선수들의 공백을 완벽하게 메우지 못했다. 케빈 빔머 또한 시즌이 반환점을 돌면서 전력 외 취급을 받았다. 토트넘은 이에 대한 대책으로 유소년 시스템을 거친 유망주들을 1군으로 종종 진입시키고 있지만 아직 그 격차가 큰 편이다. 최근 화제가 된 대니 로즈의 불평이 그 문제를 대변해주고 있다. (※ 대니 로즈는 맨시티와 맨유의 예를 들며 토트넘도 최상급의 선수들을 영입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레비 회장의 ‘철학’ 아래 불필요한 소비를 줄이는 토트넘이 클럽 역대 이적료 레코드를 경신하는 선수를 영입하게 될지는 미지수다. ▶ 더 선과 인터뷰 중인 대니 로즈 (출처 : 더 선) ■ 많은 경기 수로 인한 피로 이는 주전과 비주전 선수들의 차이 문제와 연관이 있다. 토트넘은 EPL의 중하위권과 같은 팀이 아니다. 다시 말해서, 리그, FA컵, 리그컵, 챔피언스리그까지 병행해야 하는 만큼 많은 경기 수를 치러야 한다. 지난 시즌 준우승을 차지한 토트넘의 올 시즌 목표가 우승인 만큼, 많은 경기수로 인해 발생하게 되는 선수들의 피로 누적이 토트넘에게 변수로 작용할 수 있다. 이미 좌우 풀백인 트리피어와 로즈가 부상으로 인해 결장하게 되면서 시즌 초반 경기에 나설 수 없게 되었다. 1라운드 뉴캐슬전처럼 워커-피터스와 같은 유망주 선수들로 그 자리를 메우고 있지만 언젠가는 그 한계가 닥쳐오게 될 것이다. (※ 2라운드 상대는 첼시) # 올 시즌 토트넘의 Point는 유망주다. 토트넘이 이번 여름 이적 시장을 영입 투자 ‘0’으로 마감하게 된다면 기존의 있는 선수들로 시즌을 치러야 한다. 완벽한 조직력에 가까운 주전 선수들이지만 토트넘이 믿고 있는 유망주들이 부진을 면치 못한다면 그들의 목표인 ‘우승’은 갈수록 멀어져 갈 것이다. 포체티노 감독이 “이번 시즌은 우리에게 큰 도전이 될 것.”이라고 말했듯이 토트넘은 지금 EPL을 대표하는 빅클럽이 될지를 가르는 중요한 기점에 서 있다. 한번 삐끗하면 돌이킬 수 없다. 토트넘이 네임벨류 있는 선수들을 영입한 다른 빅클럽 들과의 경쟁에서 밀리지 않으려면 자신감의 ‘원동력’인 유망주들이 눈에 띄는 활약을 해줘야 할 것이다.
우리는 손흥민의 시대에 살고 있다.
토트넘이 화끈한 공격력을 과시하며 시즌 최다 득점을 기록했다. 해리 케인의 4골, 손흥민의 2골을 묶어 6대1로 지난 시즌 챔피언 레스터 시티를 대파했다. 준우승을 확정한 상태였지만 토트넘의 상승세는 멈출 줄 몰랐다. 하지만, 한국 축구팬들은 토트넘의 대승보다는 손흥민의 대기록에 관심을 모았다. 레스터 시티와의 경기 전까지 EPL 12골, FA컵 6골, UEFA 챔피언스리그 1골을 기록하며 총 19골로 ‘한국 축구의 레전드’ 차범근의 기록과 동률을 이루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날 경기에서 손흥민은 멀티골을 터뜨리며 깨지지 않을 것만 같았던 차범근의 기록을 경신함으로써 한국 축구의 새로운 역사를 쓰게 됐다. 대기록을 달성한 손흥민 출처 : 토트넘 페이스북 # 차범근과 손흥민 차범근은 한국이 축구 변방국에 불과했던 1978년, 홀로 독일로 건너가 분데스리가에 데뷔했다. 1979/80시즌부터 1985/86시즌까지 7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 성공한 차범근은 곧 독일 전역에 ‘차붐’ 신드롬을 일으켰다. 차범근이 바이엘 04 레버쿠젠 소속으로 뛰던 1985/86시즌에 기록한 한 시즌 ‘19골’은 아시아 선수의 유럽 4대 빅리그 최다골이었고 30년이 넘는 세월 동안 ‘아시아 최고’의 자리를 유지했다. 차범근의 자리는 그 누구도 넘을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하지만 2017년, 그의 기록이 ‘토트넘의 7번’ 손흥민에 의해 드디어 깨졌다. 2010/11시즌 함부르크SV 소속으로 분데스리가에 데뷔한 이후 7시즌 만이다. 차범근의 한 시즌 최다골을 뛰어넘은 손흥민은 이제 대선배가 가지고 있는 2개의 또 다른 대기록에 도전한다. 유럽 무대 리그 통산골, 리그와 컵 대회를 모두 포함한 기록이다. 차범근은 1988/89시즌을 끝으로 은퇴할 때까지 리그에서 98골을 기록했고, 컵 대회를 포함해 121골을 기록했다. 손흥민은 분데스리가와 EPL을 포함해 정규리그에서만 59골(함부르크 20골, 레버쿠젠 21골, 토트넘 18골), 컵 대회 포함 78골을 기록하며 차범근의 기록까지 각각 39골, 43골을 남겨놓고 있다. 지금과 같은 페이스라면 손흥민은 몇 시즌 이내에 충분히 차범근의 기록을 뛰어넘을 수 있을 것으로 보인다. # 고난을 극복한 손흥민 레버쿠젠에서 활약했던 손흥민은 많은 축구팬들의 기대를 안고 역대 아시아 선수 중 최고의 이적료(약 320억 원)로 토트넘에 입단했다. 첫 시즌은 실패에 가까웠다. 토트넘의 전술과 EPL 환경에 쉽게 적응하지 못한 손흥민은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족저근막염 부상까지 당하면서 부진을 면치 못했다. 시즌 8골만을 기록하며 4시즌 연속 두 자릿수 득점에 실패했다. 하지만 손흥민은 EPL 첫 시즌의 부진을 잘 극복해냈다. 지난 해 9월 한 달 동안 5골을 터뜨리며 아시아 선수 최초로 프리미어리그 사무국 선정 ‘9월 이달의 선수’에 뽑혔다. 이후, 손흥민은 포체티노 감독이 포백에서 스리백으로 전술적 변화를 주면서 출전 시간이 감소하는 등 다시 위기가 닥치는 듯 했지만, 기회가 찾아올 때마다 놓치지 않고 강렬한 인상을 심어주었다. 특히, 지난 4월에 프로 데뷔 후 처음으로 4경기 연속골을 터뜨리는 등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손흥민은 차범근의 기록과 동률을 이루는 동시에 ‘4월 이달의 선수’로 선정되는 기쁨을 누렸다. 1994/95 시즌 이 상이 만들어진 뒤 한 시즌에 두 번 수상한 선수는 손흥민을 포함해 총 16명에 불과하다. #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꾸다. 손흥민은 이제 EPL에서 주목받는 스타 플레이어로 성장했다. 그 원동력은 기량 발전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동안 단점으로 꼽혀왔던 ‘오프 더 볼’ 상황에서의 움직임은 더욱 민첩해졌고 공간을 창출하는 능력이 더 좋아졌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또한, 동료의 패스를 받을 수 있는 위치로 적극적으로 이동하면서 동료들과의 연계 플레이가 이전보다 나아졌다. 이번 레스터 시티 전에서 손흥민이 보여줬던 침투 플레이와 ‘라인 브레이킹’을 보면 알 수 있었다. 자신의 단점을 장점으로 바꾼 손흥민은 플레이 스타일이 더욱 다양해지면서 포체티노 감독의 전술에서 빠질 수 없는 선수로 자리 잡게 되었다. 손흥민이 보여주었던 '라인 브레이킹'은 매우 절묘했다. (SPOTV 영상 캡쳐) 손흥민의 '오프 더 볼' 상황 시 움직임은 이전과 다르게 매우 향상되었다. (SPOTV 영상 캡쳐) # 손흥민, 토트넘 역사의 한 부분이 되다. 한국 팬들의 관점에서 본다면 손흥민은 차범근이 1985/86 시즌에 세웠던 대기록을 넘은 선수다. 토트넘 팬들의 입장에서 본다면 어떨까. 그들의 입장에서 손흥민은 새로운 토트넘 역사의 한 부분이다. 이번 시즌 21골을 터뜨린 손흥민의 맹활약 덕에 토트넘은 134년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20골 이상 기록한 선수를 세 명이나 가지게 되었다. (손흥민 21골, 델레 알리 21골, 해리 케인 29골) 이는 이번 시즌 EPL 우승팀 첼시도 달성하지 못한 것이다. 손흥민은 이제 명실공히 아시아를 대표하는 선수다. 주전 자리를 위협받으며 이적설까지 불러일으켰던 손흥민은 불과 2년 만에 ‘우려’를 ‘기대’로 바꿨다. 오로지 자신의 능력으로 위기를 극복하며 만들어낸 진정한 반전이 아닐 수 없다. 한국을 대표했던 선수 1세대인 차범근, 2세대 박지성을 통해서 우리는 그 동안 한국 선수들의 활약에 열광해 왔다. 그리고 그 열광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 혹자는 말했다. “우리는 카타르의 소리아 같은 공격수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인정할 수 없다. 한때 세계 축구계를 주름잡다시피 했던 차범근을 뛰어넘은 손흥민이 있지 않은가. '손세이셔널', 우리는 지금 손흥민의 시대에 살고 있다. ■ 추가적인 기록 유럽 빅리그 통합 윙포워드 득점 랭킹 1위 메시 51골 2위 호날두 39골 3위 손흥민 21골 4위 네이마르, 루카스 모우라, 월콧 19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