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896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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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대 마약을 하면 안되는 이유

결국 사람이 아니게 된다.

대마만 해도 '합법화해도 괜찮다.'라는 주장이 꽤 있음에도 정부가 고려조차 않는 이유...
안그래도 요 근래 마약때문에 시끄러운데
마약 말고 걍 술이나 잡숫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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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료' 용 마약을 합법화 하자는 것이지 쾌락을 위한 법이 아닙니다. 하루하루 공통속에 사는 분들고 계실수도 있는데 무조건 안된다고만 생각하면 너무이기적이지 않을까요?
대마랑 필로폰을 비교하기는 쫌....담배가 오히려 더 안좋다는 주장도 많은거보면 담배도 안파는걸 고려해야됨
.... 아니 전 술과 담배도 그닥..
대마는 치료제로도 쓰이는데...간질 발작 몸을 못가누는 사람들 뇌성마비 등등 비교하는것 자체가,......
대마는 다운텐션을 유도하고 필로폰은 업텐션을 유도하는 걸로 알아요. 대마는 한번 하면 기분이 무척 다운되서 온갖 우울함을 겪는다고 해요. 그런 우울감을 느끼기 싫어서 대마는 중독에 있어서 담배 때문에 떨어진다고 하더라고요. 예술종사자들의 깊은 우울감을 통해 창작을 한다기도 하네요. 필로폰은 업텐션 효과가 나타나서 환각증세가 심하게 일어나고 공룡이보이거나 그런 얘기가 필로폰인 경우가 대부분이더라고요. 환각이 심해지면 주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줄 수 있고 중독이 심해서 금지하는게 맞는 듯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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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마리아 개화 지식인이자 독립운동가였던 아버지와 삼촌, 고모들 사이에서 자라며 자연스럽게 조국과 민족을 사랑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 1906년 서울로 이주해 정신여학교에 입학하게 된 선생은 을사조약 이후 나라의 위태로운 상황 속에서 맹렬하게 전개되던 구국계몽운동을 목격하였고, 또 삼촌인 김필순 선생의 집에 드나들던 독립운동가들을 보면서 민족의식을 더욱 키워가게 되었다. 1910년 정신여학교를 졸업한 김마리아 선생은 광주의 수피아여학교의 교사로 부임하여 교육 계몽운동에 동참하였고, 1913년에는 모교인 정신여학교 교사로 전임하여 수학을 가르치다가 루이스 교장의 추천과 지원으로 일본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다. 1919년 동경에서 2.8독립선언에 참여하면서부터 본격적으로 항일투쟁에 뛰어들었다. 1차 세계대전이 끝나갈 무렵, 윌슨의 민족자결주의 원칙이 발표되고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된다는 소식이 알려지자 일본 유학생들은 이를 독립의 절호의 기회라 생각하고 독립선언을 준비하였다. 김마리아 선생은 황애덕 선생 등 여자 유학생들이 거둔 성금을 2.8독립선언 준비 자금에 보탰고 조선기독교청년회관에서 열린 독립선언대회에도 참여하였다. 선생은 독립운동을 국내에도 전파하여 전국으로 확대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2.8독립선언문 10여 장을 미농지에 복사해 국내로 몰래 들여왔고 여성계, 교육계, 기독교계, 천도교계 등 다방면의 지도자들을 만나 국내에서 거족적인 독립운동을 벌일 것을 촉구했다. 선생은 3.1운동이 일어난 당일에도 독립운동 참여를 촉구하는 등의 활동을 하다가 3.1운동 배후 지도자로 지목되어 체포되었다. 약 6개월간 갖은 고문을 받고 출감한 선생은 후유증에 시달리면서도 다시 독립운동에 뛰어들었다. 대한민국애국부인회의 조직을 확대하였고 국권회복을 위해 비밀리에 독립운동 자금을 모아 6,000원의 군자금을 임시정부에 전달하는 등 활발한 활동을 이어갔다. 이후 일본 경찰에 체포되어 3년형을 받은 선생은 병보석으로 출감한 뒤 1921년 8월 중국 상해로 망명하게 된다. 김마리아 선생은 중국 남경대학에서 못 다한 공부를 계속하면서 상해의 대한애국부인회에서 활동하였고, 또한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황해도 대의원으로 선출되어 활약하였다. 1923년 미국 유학을 위해 중국 상해를 떠난 김마리아 선생은 미국에서의 고학 생활 중에도 한 시도 조국 독립의 염원을 버리지 않았다. 그리하여 1928년, 미국에 유학 중인 여학생들을 중심으로 여성 독립운동 단체인 근화회를 조직하여 회장으로 활동하였다. 1932년 7월 귀국한 선생은 종교 모임과 강론을 통해 민족의식을 고취하고, 신사참배를 거부하는 등 지속적으로 항일투쟁을 전개하였지만 고문 후유증이 재발해 1944년 3월 13일 순국하게 되었다. 정부는 선생의 공훈을 기리어 1962년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출처-더쿠 스퀘어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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