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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력서

연봉을 더 높게 적었어야 했다고, 진영은 생각했다. 전화는 화요일에 걸려왔다. 3년 전의 진영이었다면, 연락이 온 당일이라도 당장 가능하다고 했을 것이었다. 진영은 이번 주 내내 별다른 일정이 없을 예정이었지만, 금요일쯤에나 가능할 것 같다고 대답했다. 출판사는 진영의 집에서 지하철로 30분이 채 걸리지 않는 곳에 있었다. 한 달 전 그만둔 회사가 출근 시간만 넉넉히 한 시간 반을 넘게 잡아야 했던 것과 비교하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한 장점이었다. 출판사는 지하철역 입구에서도 거의 바로 보일 만큼 가까웠고, 4층짜리 건물을 단독으로 쓸 만큼 규모가 큰 편이었다. 면접 장소는 3층이었는데, 벽면에는 계단을 따라 이곳에서 펴낸 무수한 책들이 훈장처럼 전시돼있었다. 3층 입구에 들어서, 진영은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직원에게 물어 인사담당자를 찾았고, 회의실인 듯한 공간으로 안내되었다.
안녕하세요. 진영이 인사를 건네자, 담당자는 진영의 옷차림을 위아래로 훑어보고는, 이쪽에 앉으시라며 의자 하나를 가리켰다. 진영의 복장은 불량할 정도는 아니었지만, 딱히 격식을 차렸다고 하기도 어려운 것이었다. 맨투맨 티셔츠에 면바지, 그리고 캐주얼한 점퍼 하나를 걸쳤는데, 진영은 전혀 아랑곳하지 않았다. 물론 전 같으면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담당자는 이전 경력에 대한 전반적인 것들을 물었고, 혹시 술을 마시는지를 물었다. 진영은 잠시 생각했다. 영업부서가 아닌 편집부서에서의 음주 여부에 대한 질문이라면, 두 가지 맥락에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었다. 성실성과 친화력. 술을 아예 마시지 않는다면 출근에 지장이 있을 가능성 하나는 없는 셈이므로 나쁘지는 않지만, 담당자의 성향이 어떤가의 가능성을 다시 따져볼 때, 모범 답안은 ‘술을 마시기는 하지만, 크게 즐기지는 않고, 절제하며 마시는 수준입니다.’ 정도일 것이었다. 그러나 진영은 어떤 여과도 없이 대답했다. 네, 마십니다. 좋아합니다. 담당자는 음, 그렇군요, 하며 안경을 고쳐 썼다. 담당자는 ‘아시겠지만’ 하고 운을 떼고는, 자주는 아니지만 출판사의 특성상 간혹 야근을 해야 한다며, 가능하겠냐고 물었다. 물론 야근 수당은 지급된다는 말도 덧붙이며. 진영은 야근 수당을 준다는데 마다할 이유가 있겠나, 싶었다. 이전 회사는 야근 수당은커녕, 정상적인 회사보다 근무시간이 30분이나 길었고, 그것도 부족해 야근은 일상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부당함에 입도 뻥긋 못하던 게 현실이었다. 진영은 망설이는 척하며, 너무 자주만 아니라면 생각해보겠다고 대답했다. 담당자는 서둘러 면접을 끝내려는 표정이었고, 예의상 궁금한 것이 있느냐고 물었다. 복지체계가 궁금합니다. 이전 회사는 복지라고는 없었거든요. 담당자는 회사가 제공하는 모든 복지를 말해주었다. 당장이라도 마음을 돌려 입사할까 하는 마음이 잠시나마 생길 정도로 그 모든 것들이 마음에 들었지만, 사실 담당자가 설명하는 복지 목록은 당연하고, 기본적인 것들에 불과했다. 마지막 인사를 나눈 뒤, 담당자는 혹시나 연락이 안가도 양해를 바란다며, 불합격 시에는 따로 연락이 가지 않는다고 했다. 진영은 부디 연락이 오지 않기를 바랐다.
진영은 성취감이라고는 없는 이전 회사에서 겨우 3년을 버텼고, 더는 못 견디겠다는 생각이 들 무렵 퇴사를 결심했다. 퇴직금으로 여행이라도 다녀올 요량이었다. 엄밀히 말해 퇴직금은 회사가 그동안의 진영의 월급을 조금씩 모아서 만든 꼼수에 불과했다. 연봉을 13분의 1로 나눠 월급을 지불하고, 나머지는 퇴직금으로 모아서 생색을 내는 엉터리 회사들이 생각보다 비일비재한데, 그곳이 바로 그런 곳 중의 하나였던 것이다. 그러나 진영에게 그곳은 첫 직장이었고, 노동법에 무지했던 자신을 탓할 수밖에 없었다. 약속한 퇴사 일까지 한 달여가 남았을 때, 진영은 환멸에 가까운 매너리즘에 빠졌지만, 야근이며 궂은일을 자처하며 상사들의 비위를 맞췄다. 물론 ‘권고사직’을 얻어내기 위함이었다. 믿었던 인사과 선배는 자발적으로 퇴사했으니 권고사직 처리는 힘들다며 잘라 말했고, 진영은 편집부장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정사정하며, 권고사직을 부탁했다. 으응, 그래. 실업급여 받아야지. 간신히 얻어낸 ‘권고사직’이었다. 진영은 자발적으로 회사를 그만뒀지만, 공식적으로는 회사의 경영 부진으로 인해 사실상 회사에서 ‘잘리는’ 특권을 얻어낸 것이다.
실업 인정 담당자는 퇴사 사유를 물었다. 진영은 회사 사정이 어려워졌다고 능숙하게 대답했지만, 혹시라도 문제 될 만한 질문을 받을까 봐 내내 조마조마하였다. 실업급여 신청 후 2주 뒤에 고용센터를 다시 찾았을 때 강당은 이미 만원이었다. 예정 시각보다 늦었나 싶었지만, 정해진 실업급여 설명회 시간은 10분이 넘게 남아있었다. 3년 이상 근무, 30세 이상, 150일. 진영은 정확히 조건에 맞는 사람이었고, 소정급여 일수 150일을 진단받았다. 최대치의 수급 일수였다. 그러니까, 5개월 동안 달마다 130여만 원을 받을 수 있는 것이었다. 다만, 정해진 기간마다 구직활동 증명서를 제출해야 했다. 진영은 수급을 받는 동안 당연히 취직할 의사가 없었고, 허위 이력서를 제출하기 시작했다. 아니, 이력서는 진짜였지만, 성의가 없었으며, 무엇보다 입사 의지를 담고 있지 않은 이력서였다. 혹시라도 연락이 오면 곤란하므로, 이력서에는 납득범위의 희망 연봉보다 조금 높은 연봉을 기재해놓았다. 엄밀히 이것은 부정수급이었지만, 어차피 본인이 낸 세금이라며 진영은 자신을 설득했다.

진영은 면접에서 돌아와 이력서부터 수정했다. 마침 3차 구직증명서 제출 기간이기도 했다. 희망 연봉 란에 기재한 연봉을 조금 더 올렸다. 그러나 귀찮게도, 저녁 즈음에 또 한 통의 전화가 걸려왔다. 교정 교열 관련 일을 맡아줄 수 있느냐는 전화였다. 이렇게 높은 연봉을 불러도 연락이 오다니. 진영은 첫 직장을 어떻게든 구하려고, 가급적 소기업들에 비위를 맞추기 위해, 연봉은 회사 내규에 무조건 따르겠다던 지난날의 자신이 생각나 헛웃음이 터졌다. 그런데 교정 교열 일에 이렇게 많은 연봉을 주는 회사가 있나요? 담당자의 질문이었다. 아, 그게……. 전에 다니던 회사가 업무량이 좀 많긴 했습니다. 진영이 대답하자, 담당자는 아, 그런가요, 하더니 저희는 지금 사실 정규직보다는 계약직을 구하고 있어요, 했다. 진영은 잘 됐다 싶어, 저는 지금 정규직을 구하고 있어서요. 계약직이라면 좀 곤란하네요. 죄송합니다,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진영은 다시 이력서를 열었고, 희망 연봉 란에 시선을 두었다. 이번에는 터무니없을 정도로 높은 금액을 적어 넣었고, 그제야 진영은 만족했다. 4차 구직증명서 제출 기간이 지나도록, 면접을 봤던 출판사를 포함해 연락을 해오는 회사는 다행히 없었고, 실업급여는 제날짜에 무사히 진영의 계좌에 입금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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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크맨
'초크맨' / C.J. 튜더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번에 읽었던 스티븐 킹의 미스터 메르세데스 이후로 인터넷을 찾아보다 스티븐 킹이 강력 추천한다는 평가가 있는 소설을 발견했다. C.J. 튜더 라는 작가의 데뷔작인 초크맨이라는 소설이었는데 저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매우 재밌게 읽었던 차에 주저없이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감상부터 말하자면 재미도 있고 나쁘지 않은 소설이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 소설은 에디라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학교 교사가 된 성인 시절이 교차되어가며 진행된다. 어린 시절 늘 네명의 친구, 개브, 미키, 호포 그리고 니키와 함께 다니던 에디는 마을 여기저기서 의문스러운 일들을 마주한다. 그 사건들의 마지막을 장식한 살인 사건은 당시에는 약간의 미심쩍은 점을 남긴 채로 종결되고 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에디는 학교 교사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와중에 어릴 적 친구 미키가 찾아와 과거 일어났던 살인사건의 진범을 알아냈다고 하며 그걸 토대로 글을 쓰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미키와 저녁을 먹고 헤어진 다음 날 미키는 강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된다. 어린 시절 죽은 미키의 형과 똑같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에디는 미키의 흔적을 찾다가 점점 어린 시절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된다. 일단 이 소설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자면 초반부 스토리가 흥미진진하다는 점이다. 미스터리 소설이자 스릴러 소설인만큼 의뭉스러운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10대 소녀 일라이저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며 그 정점을 찍는다. 게다가 그 사건들의 주위를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초크맨 그림은 계속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호포의 개를 죽인 사람은 누구지? 미키의 형은 정말로 발을 헛디뎌 강에 빠진걸까, 타살은 아닐까? 갑자기 나타난 하얀 분필의 초크맨 그림은 도대체 누가 그린 걸까?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은 누구고 왜 토막을 냈을까? 일라이저의 사라진 머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사건을 수십년이 지난뒤 성인이 된 주인공이 해결해나간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전혀 다른 시간대의 같은 인물을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두 시간대의 에디가 서로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단점이 너무 명확하다. 앞에 수없이 뿌려놓은 사건들의 진상이 드러나는데 그 진상들이 그다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초크맨의 특징은 앞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범인이 각각 모두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호포의 개는 그때부터 이미 치매 증상이 조금씩 보였던 호포의 어머니의 실수에 의해 죽었고 미키의 형이 강에 빠져 죽게 된 것은 그의 자전거를 강에 빠뜨린 개브 때문이었다. 하얀 분필의 초크맨 그림은 에디가 그린 것이었고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은 자신이 임신시킨 여학생과 일라이저를 착각한 니키의 아빠, 마틴 목사의 짓이었으며 일라이저의 사라진 머리는 에디가 몰래 가져왔다. 이렇듯 마치 누군가 한 명의 일관된 범행으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 각각 다른 사람들의 소행이었다는 것은 한 명의 범인을 상상하고 있던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각각의 사건들에 대한 모든 논리를 납득할만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독자들이 결론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모든 사건들의 진상이 정교하게 맞아들어가며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아, 뭐야. 그냥 다 각자 다른 이야기고 결국 살인 사건은 목사가 착각해서 죽인 걸로 끝이잖아?"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야할까. 살인 사건에 얽힌 진상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그 속의 복잡한 관계를 해체해가며 얻게 되는 카타르시스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부분에는 소설에서 주요 용의자로 몰고 가던 헬로런 이라는 인물의 너무 이른 죽음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스릴러 소설에서 너무 범인처럼 묘사하는 인물은 당연히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 혹시나 진짜 저 사람이 범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그 인물이 너무 이른 타이밍에 죽어버리면서 당연히 다른 누군가가 범인이겠지 하는 생각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이는 소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조금 더 살려두었으면 지금보다 흥미진진한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초반부의 흥미로움에 비해 후반부에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오는 놀라움과 스릴러 소설 특유의 그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느낌은 부족하다. 다른 스릴러 소설과 다른 이야기 진행과 사건의 진상이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인 듯 하다. 전형적인 스릴러 소설에 지쳐있다면 한번쯤 읽어볼만 하지 않을까. 소설 속 한 문장 :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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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 김연수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드라마에서 나와 유명해진 이 문장을 보고 달달한 연애소설이겠거니 생각하고 책을 읽기 시작했다. 하지만 저 문장에는 달콤한 사랑을 속삭이는 연인이 아니라 몇십년간 헤어진 딸을 기다려온 어머니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태어나자마자 한국에서 미국으로 입양된 카밀라는 양모가 죽고 양부는 다른 여자와 만나게 되면서 홀로서기를 시작한다. 그 과정에서 유이치라는 연인의 영향으로 자신의 모든 물건들에 대해 정리한 글을 써보게 되는데 그 글을 보고 한 출판사에서 자신의 뿌리, 한국의 친모를 찾아보지 않겠느냐는 연락이 오고 카밀라는 한국의 진남으로 떠난다. 그 곳에서 자신의 어머니 정지은의 흔적을 찾아가던 그녀는 정지은이 이미 이 세상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 죽음과 얽힌 진실을 찾아가는 카밀라의 여정과 카밀라, 정희재를 낳기 전 정지은의 예전 이야기가 교차되며 책 속에서 펼쳐진다. "파도가 바다의 일이라면 너를 생각하는 것은 나의 일이었다." 라는 문장에는 생각보다 더욱 묵직한 의미가 담겨 있었다. 아버지는 노동 파업에 참여했다가 현실에 좌절해 자살해버리고 학교 교사와 연인 관계라는 소문이 돌고, 미성년의 나이에 한 임신과 아이의 아버지가 자신의 오빠라는 이야기가 쑥덕거리며 퍼지는 상황에 진남의 여고생, 정지은은 놓여 있었다. 그렇지만 정지은은 삶에 대한 의지를 버리지 않았고 그것은 자신의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생명에 대한 무한한 애정과 사랑 때문이었다. 자신의 날개가 되어 줄 그 아이. 희재라고 이름 지은 그 아이. 그러나 그 아이마저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모른다는 이유로, 미혼모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팔려가듯 입양되고 정지은은 진남 바다로 몸을 던진다. 그 검고 차가운 진남 바다 속에서 몇 십년을 기다려 찾아온 그녀의 딸, 카밀라이자 정희재에게 건넨 말인 것이다. 끊임없이 파도가 치는 바닷속에서 나는 바다에 파도가 치듯 너를 생각하였다고 말이다. 이 소설은 친모를 찾는 카밀라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자연스럽게 그녀의 어머니, 정지은의 이야기로 넘어간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오해와 악의가 쌓여 어떤 일이 일어났는가, 정지은을 죽음으로 몰고 간 것은 과연 누구였는가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정희재에게 진남여고의 교장, 신혜숙은 이렇게 말한다. "자신이 꽤 용감하다고 생각하는군요. 카밀라 양은." 그만큼 정지은의 죽음과 얽힌 진실은 추악한 비겁함 속에 잠들어 있었다. 과연 그 진실이 정희재에게 어떤 것들을 가져다 주었을까. 진실을 알기 전과 알고 난 후의 정희재는 어떻게 달라졌을까. 소설 속에서도 진실을 알아가며 조금씩 달라지는 정희재의 모습이 나오긴 하지만 후반부의 이야기는 정지은에 얽힌 진실이 중점이라 정희재의 이후 이야기를 알 방법이 없는 것이 조금은 아쉬웠다. 이 소설에서 작가는 정희재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를 명확하게 밝히지 않는다. 작가의 말의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이라는 마지막 문장처럼 독자가 숨겨진 이야기를 스스로 읽기를 작가는 원했던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유력한 두 명의 인물인 최성식과 이희재 중 결론을 내렸지만 추후에 이 소설을 읽을 독자들을 위해 그 결론을 밝히지는 않겠다. 물론 그 결론이 틀렸을 수도 있고 말이다. 작가는 곳곳에서 힌트를 주고 있는데 이 소설이 워낙 화자도 자주 바뀌고 이야기도 시간 순이 아니라 뒤죽박죽으로 진행되기에 그것들을 알아차리기가 쉽지 않다. 천천히 이야기가 펼쳐지는 시간대를 생각해보며 읽으면 스스로 결론을 내리기가 조금 더 수월하지 않을까 생각한다. 마지막 마무리가 참 마음에 들었다. 2012년의 카밀라와 1984년의 정지은의 모습을 한 번에 담아내는 끝맺음이었다. 2012년의 정희재는 이희재와 만나 어떤 이야기를 나누고 어떤 생각을 했을까. 작가는 더 이상 말해주지 않기에 우리가 그 뒤를 써 나가야만 한다. "부디 내가 이 소설에서 쓰지 않은 이야기를 당신이 읽을 수 있기를." 작가의 마지막 말이 머릿속을 맴돈다. 소설 속 한 문장 : 이로써 다시 나는 이 세상 누구와도 연결되지 않는 완전한 자유의 몸으로 돌아왔다. 21년 전에 그랬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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