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osemoy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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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en Liu: Planetas invisibl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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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로버트 A. 하인라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 / 로버트 A. 하인라인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이제 한국에서도 SF 소설을 찾는 사람이 많아졌다. 요즘 주목받고 있는 한국 SF 소설들의 힘 덕분일 수도 있고 자연스러운 유행의 변화일 수도 있지만, 어쨌든 과학계에 종사하는 사람으로서 기쁠 따름이다.(어린아이들에게 SF 소설은 과학자의 꿈을 길러주기 마련이니까.) 점점 발전해가는 한국 SF 소설계의 흐름에 발맞춰 오랜만에 SF 소설을 한 번 읽어볼까 하고 집어 든 책이 바로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이었다. 이 소설의 저자인 로버트 A. 하인라인은 아이작 아시모프, 아서 C. 클라크와 함께 SF 문학의 3대 거장으로 불린다. 이 소설의 가장 뒷부분에 나오는 작품 해설 및 역자 후기 부분을 보면 아시모프는 SF를 통해 박학다식과 위트를, 클라크는 SF에 과학적 엄밀성과 철학적 깊이를 더했고 하인라인은 뛰어난 스토리텔링으로 SF의 재미가 무엇인지 보여줬다고 한다.(아이작 아시모프의 <아자젤>이란 작품을 읽어본 적이 있는데 박학다식은 몰라도 위트 하나는 확실했다.) 그러나 개인적으로 하인라인의 대표작인 <우주복 있음, 출장 가능>을 읽고 가장 먼저 남은 감상은 아쉬움이었다. 그것도 과학적 깊이나 오류에 대한 아쉬움이 아니라 SF의 '재미' 부분에서 다가오는 아쉬움이라 안타까웠다. 소설의 주인공은 킵이라는 남학생이다. 이제 곧 대학을 가야 할 나이의 킵은 달에 가겠다는 꿈을 가지고 달 여행을 상품으로 건 비누 회사의 표어 선발 이벤트에 5,000 여장의 표어를 보내지만 중복 당첨이 발생할 경우 가장 먼저 표어가 도착한 사람에게 달 여행 기회를 준다는 규칙에 의해 달 여행의 기회가 아니라 중고 우주복(실제로 우주인이 우주에서 입었던)을 받게 된다. 언젠가 달에 가겠다는 의지로 우주복을 고치고 닦아 새것처럼 만든 킵은 대학에 갈 돈을 벌기 위해 우주복을 팔기 전 마지막으로 한 번만 입어보자는 생각으로 동네 들판에서 우주복을 입고 교신 장치를 건드리며 논다. 그때 갑자기 잡힌 신호에 반신반의하는 심정으로 응답을 보낸 킵. (이런 소설에서는 으레) 당연하게도 우주선이 착륙하고 킵은 납치당한다. 지구를 지배하려는 외계인 벌레 머리에게. 끔찍하게 생긴 벌레 머리는 엄마 생물이라는 외계인(킵에게 우호적이며 엄마 생물이라는 명칭처럼 가까이 가기만 해도 마음이 포근해지는 생명체다.)과 피위라는 여자 아이도 함께 납치한 상태였다. 킵과 피위 그리고 엄마 생물이 힘을 합쳐 벌레 머리에게서 탈출하는 우주 활극이 소설의 주 내용이다. 벌레 머리에게서 킵과 피위, 엄마 생물이 힘을 합쳐 탈출하는 내용이 소설의 중후반까지 쭉 이어진다. 탈출과 좌절의 반복이 계속되는데 솔직히 말하면 이 부분에서 그리 큰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보통 재밌다고 느끼는 장르 소설들의 경우 서사에 이끌려 쉴 새 없이 페이지를 넘기게 되곤 하는데 이 소설은 그런 느낌이 들지 않았다. "자야 되는데 너무 재미있어서 못 덮겠어!"가 아니라 "자야 되니까 덮고 내일 보지 뭐." 하는 느낌이랄까. SF 3대 거장이라 불리는 작가의 대표작이라 너무 기대를 한 탓인가 하는 생각도 든다. 소설의 설정과 묘사는 흥미로웠다. 엄마 생물이라는 생명체와 그들의 특이한 의사소통 방식, 오스카(킵이 자신의 우주복에 붙인 이름이다.)에 대한 세세한 묘사, 달과 명왕성 등 미지의 행성에 대한 실감 나는 설명 등은 관심을 끌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그것에서 끝이었다. 그 흥미가 서사의 재미로까지 이어지지 않았다. 이 소설의 이야기는 너무나 당연히, 예상 가능하게 흘러간다. 필사의 탈출, 좌절, 또 한 번의 탈출, 좌절, 다시 또 탈출, 좌절......  끝없이 탈출과 좌절의 반복이 이어질 뿐, 무언가 예상하지 못했던 사건이나 긴장되는 순간이 없었다. 그건 아마 이 소설이 60년도 더 된 1958년에 처음 출간된 소설이라 그런 듯하다. 긴 시간 동안 이미 너무나 많은 SF 소설, 영화, 드라마가 만들어졌고 과거에는 너무나 흥미로웠을 서사가 지금은 당연히 예상 가능한 이야기가 되어버린 것이다. 물론 60년도 더 지난 소설에 지금의 시각으로 재미를 찾는 것이 조금은 매정할 수도 있지만 거짓을 말할 수는 없으니 어쩔 수 없이 앞부분은 재미없었다 라고 말하는 수밖에 없을 것 같다. 그러나 중후반을 넘어서서 지루한 탈출 과정을 지나면 상당히 흥미로운 이야기가 펼쳐진다.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기에 자세히 말할 수는 없지만 외계 종족과 인류, 행성과 별의 존망, 생명의 존재 의의와 가치에 대한 이야기들이 갑자기 엮여 나가기 시작하는데 그 상상력과 이야기 진행, 질문을 던지고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주제 의식은 하인라인이 SF 3대 거장이라고 불리는 이유를 납득시켰다. 후반부가 앞의 탈출 과정에 비해 짧은 것이 엄청나게 아쉬울 정도였다. "뭐야, 이게 끝이야? 킵이랑 피위 지구로 돌려보내지 말고 더 장황하게 써 달라고!" 하고 외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후반부만큼은 바로 어제 이 소설이 출간되었다 하더라도 충분히 뛰어난 SF 소설의 반열에 오를 수 있을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중반부까지의 지루함에 대해 길게 이야기하긴 했지만 솔직히 말하면 60년이 넘은 소설이 이 정도의 감탄을 유발할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소설이 지닌 가치와 생명력의 대단함을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탈출 과정도 재미없어서 덮어버리고 싶은 정도는 아니고 충분히 읽을 만하다. 하인라인의 명성과 내 기대에 비해 아쉬운 정도라고 말하면 되려나.)  좋은 SF 소설이고 60년의 세월을 감안하면 아주 뛰어난 SF 소설이다. 로버트 A. 하인라인의 다른 책도 읽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소설 속 한 문장 "... 당신은 우리에게 예술이 없다고 했습니다. 파르테논을 본 적이 있나요?" "당신들이 전쟁 중에 폭파했지."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장강명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 / 장강명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지극히 사적인 초능력>은 이전에 리뷰했던 <산 자들>과 거의 비슷한 시기에 출판된 책이다. <산 자들>과는 전혀 다른 결의 소설집인데 주로 SF 혹은 판타지로 분류될 법한 중단편 소설 10편이 실려있다. 분량은 몇 페이지짜리 아주 짧은 엽편부터 100 페이지가 넘는 중편도 실려 있는데 각 소설들의 다양한 주제, 서사, 소재 등을 보는 맛이 있는 소설집이었다. 가장 인상 깊게 읽은 건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이었다. 유대인들이 통치하는 알래스카에서 나치 전범인 아이히만이 재판을 받는 과정을 그리고 있는데 그 과정에서 '체험공유장치'라는 기계가 등장한다. 이 기계는 사람의 체험을 다른 사람과 연동시켜 직접 타인의 경험을 겪어볼 수 있게 해 주는 기계다. 그 당시 자신의 위치에 있던 사람은 그 누구라도 자신과 같이 행동했을 것이라고 말하는 아이히만의 주장을 확인하기 위해 아우슈비츠 생존자인 에밀 벤야민과 아이히만이 각자의 체험을 '체험공유장치'를 통해 2차 세계대전 당시부터 끝난 이후의 몇 년 동안까지 서로 공유하기로 한다. 유대인들은 체험을 공유한 이후, 벤야민이 당당히 일어서 아이히만의 경험을 나도 모두 겪어보았으나 달라진 것은 없었다, 그는 그저 비열한 악인일 뿐이다 라고 말하리라 믿지만 과연 결과는 어땠을까? 사람 간의 완전한 소통과 이해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인가에 대해 요즘 들어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우리가 하는 말의 의미를 상대방이 인지하고 이해하리라고 믿지만 과연 그것이 정말로 가능한 일일까.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생각을 옮긴 문장을 읽는 사람이 내가 하고 있는 생각을 그대로 재현한다는 것이 과연 일어날 수 있을까. 나는 인간의 소통은 불완전하다고 믿는다. 인간은 어디까지나 자신의 입장에서 상대방의 말과 글과 행동을 받아들이기 마련이며 상대방이 하고 있는 생각이 무엇인지 완벽히 이해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이다.(인간은 자신의 육체에 갇혀 있고 상대의 머릿속으로 들어가 볼 수는 없을 테니까.) 그러나 인간은 다른 인간과 소통하며 살아가는 수밖에 없고 우리는 그 불완전한 소통을 조금 더 완전하고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상대방에 대한 완전한 공감에 가까워질수록 우리는 조금씩 더 나은 인간이 되리라고 믿었기 때문이다.(공감성이 높은 사회라면 뉴스에 나오는 온갖 사건들이 일어나지 않을 수 있지 않았을까.) 그런데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정반대의 질문을 내놓았고 나는 이 문제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게 되었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은 인간이 인간을 완전히 이해하는 일이 일어날 때 그것이 온전히 좋은 일인가 라는 질문을 던진다. 내 가족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교통사고를 낸 가해자가 느끼고 있는 감당하기 힘들 만큼 커다란 죄책감과 절망을 내가 온전히 체험할 수 있다면, 그래서 도저히 그 가해자를 비난할 수 없게 되고 만다면 내 슬픔과 적의와 분노는 어디로 향해야만 하는 것일까. 향할 곳을 찾지 못한 그 어두운 감정들이 결국 내 안에 쌓이고 쌓여 나를 절벽 밑으로 떠밀어 버리게 되는 것은 아닐까. 심지어 가해자에게 가해질 법적 처벌조차 그가 겪는 죄책감과 절망을 겪은 내가 보기에 너무나 크고 부당한 처사라고 생각되어 버린다면, 법이 어떻게 적용되어야 하는지조차 알 수 없어진다. 절대적인 선악과 법이 사라지고 모든 일들에 대해 서로의 감정과 경험의 비율을 통해 상대적으로 적용되는 새로운 규칙이 생겨나야 하는 걸까?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읽고, 나는 인간이란 존재가 불완전한 소통과 완전한 소통 사이의 어느 부분에서 균형을 잡아야 할 것인지 고민하게 되고 말았다.(머리가 더 복잡해졌다.) <알래스카의 아이히만>을 워낙 인상 깊게 읽어서 진지한 이야기가 좀 길어지고 말았지만 사실 재미에 집중해 읽기 최적화된 책이라고 생각한다. 스페이스 배틀 로얄물(?)이라고 불러야 될 것 같은 <아스타틴>이나 우주에서 태어난 초능력자의 이야기를 다룬 <알골>은 장강명 식 우주 SF 소설의 재미를 보여주고 <정시에 복용하십시오>나 <센서스 코무니스>, <데이터 시대의 사랑> 같은 현대 사회에 SF 요소를 접목한 소설들은 곧 이런 일들이 진짜 일어나는 건 아닐까, 지구 어딘가에서는 실제로 일어나고 있는 것 아닐까 하는 실감 나는 이야기를 들려준다. <표백>이나 <산 자들>의 장강명과 다른 장강명을 보고 싶다면 추천하고픈 책이다. 소설 속 한 문장 '타인은 타인인 채로 남아 있는 게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