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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련의 마지막 흔적, .su

역사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이번 주말 특집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국가, 소련의 최상위 인터넷 도메인 .su의 이야기이다.

나라 이름에 따른 인터넷 주소는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 ICANN) 산하 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 (IANA)에서 지정한다. 이 IANA는 1988년에 설립됐으며, 곧바로 여러 나라들에게 이 주소 저 주소를 할당하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소련도 1990년 9월 19일, .su 주소를 받는다. 당연히 소비예트 유니온의 준말이다.

소비예트 유니온의 준말이라니, 차라리 .ussr이 낫잖을까 싶기도 한데, 애초에 .su 도메인을 제안했던 인물은 소련인도 아니고 19살 먹은 한 핀란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참조 1).

그런데… 그로부터 15개월 후, 소련이 분리되어버린다. 정말 막바지까지 그 강대한 제국이 무너질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 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 su 주소는 끈질기게 지금도 살아남아 있으며 실제로 작동은 물론 새로운 주소 등록도 받고 있다(참조 2). 잠깐, 그때 무너진 국가는 소련만이 아닐 텐데요?

좋은 지적이다. 유고슬라비아는 .yu, 동독은 .dd(독일민주공화국의 약자다, 서독은 참고로 독일연방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는 .cs였다. 이들 모두 사라졌으며, 신규 등록을 받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su 도메인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러시아의 음모일까?

의외로 살아남은 이유는 행정지체(…) 및 저항(!)이었다. 러시아의 도메인인 .ru가 1994년이나 되어야 등장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 붕괴 이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려는 구-소련계 주민/법인들은 어쩔 수 없이(?) .su 도메인을 이용해서 등록해야 했으며, 이왕 살아 있으니 계속 살려야 한다는 IANA 내 러시아계 직원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게다가 러시아 내 인터넷 주소 할당을 위해 2001년부터 활동한 러시아공공네트워크연구소(Российски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развития общественных сетей (РосНИИРОС))는 .ru는 물론 .su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su를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 주소는 119,423개소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라도 없는데 누가 이 .su를 사용하고 있느냐, 쏘오련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인가(참조 1의 .su 도메인), 아니면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시아 단체의 웹사이트인가(참조 3), 그것도 아니면 푸틴을 옹호하는 외곽 청년조직, “우리들(Наши, 참조 4)”인가? 수많은 사이버 범죄단체들이 이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참조 5). 스팸과 DDoS 공격, 인터넷 사기범들이 사용한다는 얘기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 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선거 개입도 한 모양(참조 5). 가령 Exposed.su는 트럼프와 밋 롬니, 미셸 오바마 등의 신용 내역을 누출했다고 한다. (사이트는 현재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su 주소가 사라지는 일은 러시아가 있는 한, 없을 것 같다.

생각해 봅시다. 발해 부흥운동은 거의 200년을 갔었다. 영국인들의 .eu 도메인 요구 또한 20년은 더 갈 수 있으며(참조 6), 소련에 대한 향수는 분명 대를 넘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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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Юбилей Рунета: 10 лет назад финн Петри Ойала зарегистрировал домен .su(2000년 9월 19일): https://web.archive.org/web/20140102191207/http://netoscope.narod.ru/news/2000/09/19/312.html

애초 소련의 유닉스/데모스(ДЕМОС) 망은 중립국(!) 핀란드를 통해서 서방과 연결됐었고, UUCP(전송프로토콜)을 이용해서 소련과 세상을 이어준 것이 바로 핀란드 대학생, Petri Oyala였다. 참고로 실제 관여자들의 증언은 다음의 사이트에 자세히 나온다. (.su 도메인!) 

http://news.demos.su/private/demos.html

2. 새로운 su 주소 등록, 1년에 PayPal로 $29.95 밖에 안 한다!: https://www.register.su

3. 새로운 로씨야! https://novorossia.su

4. 원래는 http://www.nashi.su 이지만 사이트는 현재 사라졌다. 열람을 원하시면 아카이브를 통해서 보셔야 한다. https://web.archive.org/web/20120313181921/http://nashi.su/

5. USSR's old domain name attracts cybercriminals(2013년 5월 31일): https://phys.org/news/2013-05-ussr-domain-cybercriminals.html

6. UK citizens might lose .EU domains after Brexit(2018월 3월 30일): https://www.engadget.com/2018/03/30/europe-brexit-eu-domai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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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루엣
사진은 에스토니아의 디자인 박물관에서 촬영한 에스토니아 SSR, 그러니까 구소련에 속했던 시절의 패션 잡지인 Siluett을 촬영한 것이다. 에스토니아가 알면 알수록 매력적인 부분이 이런 곳에서 나온다. 여러번 이야기하지만 여기가 바로 “Soviet West”에 속했기 때문이다. 당연히 공산진영의 패션 중심지는 소련/러시아였고, 그중에서도 레닌그라드(참조 1)였다고 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넓은 소련 땅에서 딱 레닌그라드만? 하는 의문도 들 수 있을 테고, 소련은 애초에 연맹패션하우스(Общесоюзный дом моделей одежды)라는 조직체를 세우고, 각 SSR 혹은 대단위 지역별(가령 레닌그라드)로 하부 패션하우스들을 설립해서 소비재 진흥을 추진했으니 당연히 “튄” 사례가 있었으리라 기대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에스토니아 탈린패션하우스(Tallinna Moemaja)가 딱 그 사례였다. 여러가지 우연이 겹친 사례인데, 한 번 봅시다. “소비에트 웨스트”가 지리적으로도 그렇고, 주관적으로도 소련 내 나머지 사람들이 그런 인상을 가졌다는 면부터 지적하겠다. 에스토니아의 주류를 구성하는 에스토니아인들은 장신의 금발이 많다. 뭔가 북유럽스러운 이미지라는 얘기로서 에스토니아 모델들이 소련 내 곳곳에 가서 러시아어를 말할 때 놀라는 사람들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이제는 우리 모두 알고 있다. 소련은 서구 문화를 동경했다는 사실을. 두 번째, 에스토니아 지역 자체가, 당시 핀란드의 텔레비전과 라디오 방송을 수신할 수 있었으며, 특히 더(이 부사를 쓰는 이유를 여기서는 생략하겠다) 특별한 중립국 관계인 핀란드로부터 관광객을 자유로이 받았었다. 최신 트렌드를 관찰하기 쉬웠다는 얘기다. 심지어 잡지 실루엣은 핀란드인 패션 사진사를 고용하여 사진촬영을 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또 다른 이유가 있다. 세 번째, 러시아계도 러시아계이지만 에스토니아계의 유럽 내 디아스포라가 만만치 않았다. 이게 다 세계대전의 업보이기는 한데, 이들이 보내는 잡지나 물품들이 많았다. 그런데 소련 치하 당시라면 검열을 하지 않았을까요? 물론 했습니다. 여기서 탈린패션하우스의 영리한 선택이 하나 나온다. 에스토니아 관세당국과 결탁한 것이다. 뭔가 사상적 불손함이 있는 잡지나 물품이 있으면 패션하우스 직원이 출동해서 압수하는 것으로 말이다. 게다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의 에스토니아 역시 관리자급까지 가면 거의 씨족사회에 가깝다(현재 인구는 약 140만명). 서로서로 다 안다는 이야기이며, 부탁을 거절하기 힘들다. 요행히 반출이 된 잡지나 물품들은? 때가 되면 다들 버리지 않고 중고품점에 갖다 팔던 때가 바로 소련 시절의 에스토니아였다. 워낙 물자가 귀하기도 했거니와, 서구에서 가져왔다 하면 높은 값을 받을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탈린패션하우스는 정기적으로 중고품점에 직원들을 돌려서 모조리 다 관련 잡지나 물품을 사들였다. 이런식으로 행동을 하니, 검열을 거친 이후에나 서구 잡지의 열람을 허용하는 모스크바 중앙 패션하우스의 통보를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는 얘기입니다. 그리고 이 사실은 소련 내에 이미 좀 알려져 있었기 때문에, 에스토니아처럼 할 여력이 없는 이들은 자기네 SSR에 있는 패션하우스 직원들을 탈린으로 출장보내기 일쑤였다. 레닌그라드나 모스크바가 아니고 말이다. 그래서 탈린패션하우스가 내놓은 대표적인 히트상품이 바로 이 잡지 되시겠습니다. 공산권의 패션하우스들이 아주 소수 엘리트들의 오트쿠튀르 역할을 한 것 외에, 아무리 노력해봤자 성과급이 나오지 않은 체제인지라 각자 다른 것으로 수입을 좀 올려야 했었고, 탈린패션하우스 입장에서 잡지는 가장 잘 선택한 수단이라 할 수 있었다. 위에 말한 이유들 외에, 사진에서 보시면 아시듯, 실제 착용 사진과 함께 아주 자세하게 나와 있다. 이는 DIY가 필수적인 소련 내 소비자들을 위해서라 할 수 있었다. 잠깐, 소련 소비자라고요? 동 잡지 실루엣은 에스토니아어 판과 함께 러시아어판도 동시에 제작됐었고, 한창 시기에는 에스토니아어판 5만 부에, 러시아어판 30만 부까지 이르렀었다고 한다. 물론 소련 당국의 “어른의 사정”에 따라 러시아어판 제작 부수에 제한(러시아 패션지인 МОДЫ보다 전체 부수가 적어야 했다)이 있었지만 말이다. 그러니 “소비에트 웨스트” 아니겠습니까? 머나먼 극동에서도 문의 서한이 오고, 불가리아에서는 동시에 발간이 됐으며, 동독이나 체코슬로바키아, 심지어 쿠바에도 수출됐었다. 그렇다면 수익이 많았겠네? 탈린패션하우스 수익의 60% 이상을 실루엣이 벌어들였다고는 하지만, 그 수익이 실루엣의 진짜 매출에 따른 수익은 아니었다. 정부 부처인 경공업부에서 모든 수입을 정리한다음 나눠주는 수익에 의존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 구조는 에스토니아 독립 이후, 실루엣을 지속이 불가능하게 몰아갔다. 모든 수입이 완전히 끊겼기 때문이었으며, 실루엣은 그때 이후로 등장하지 못한다(참조 3). 문 닫을 때까지 거의 수작업에 의존했다고 하는 실루엣에 경의를 표한다. 마지막으로 소련이 탈린패션하우스의 잡지 제작을 좀 관대하게 봐줬던 이유 중에 하나가 유머에 가깝다. 잡지 발간(1958년)부터 오래 편집장을 지낸 사람 이름이 Anita Burlaka였기 때문이다(참조 4). 믿거나 말거나죠. 주말 특집이었습니다. ---------- 참조 1. 패션 레닌그라드(2021년 1월 15일): https://www.vingle.net/posts/3538253 2. 탈린패션하우스 이야기는 다음의 책에서 많은 내용을 인용했다. Fashion Meets Socialism: Fashion Industry in the Soviet Union after the Second World War. By Jukka Gronow and Sergey Zhuravlev (Helsinki: Finnish Literature Society, 2015. 303 pp. $28.00) -> 지금은 $45에 팔고 있다… 3. Siluett aitas Nõukogude Eestis naiseks jääda (1)(2003년 12월 6일): https://elu.ohtuleht.ee/149963/siluett-aitas-noukogude-eestis-naiseks-jaada 4. 부를라카(Бурлака)가 러시아 혹은 우크라이나 계열 성씨이기 때문이다. 아니타 부를라카는 러시아인이 아니고 남편이 우크라이나인이어서 성을 부를라카로 바꿨을 뿐이었다. 소련 당국에서는 “러시아인”이 수장으로 있으니 알아서 잘 하겠거니… 했을 것이라는 의미다.
위성을 훔쳐라
주말은 역시 소련이죠. 주말 특집, 저 위성을 훔쳐라이다. 이게 무슨 비유법처럼 뭔가 다른 의미가 있는 문장이 아니다. 말그대로 인공위성을 훔친다는 이야기인데, 때는 1950년대 냉전 시기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미국은 소련의 인공위성을 훔쳤다. 말그대로. 도대체 이게 무슨 이야기인가, 폰 브라운 등등이 미국에 건너가서 우주개발을 해 준 것 아니었느냐라 할 수 있을 텐데 2019년까지는 다들 그렇게 알고 있었다. 드디어 기밀 해제가 되어(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불명확한 부분이 많이 있다) 세상에 알려졌고, 그 내용을 MIT Technology Review에서 보도했었다. 한 마디로, 인공위성을 훔친 덕분에 미국은 우주 개발에서 중대한 진전을 거둘 수 있었다. 기사 링크(구독자 전용이다) , Lunik: Inside the CIA’s audacious plot to steal a Soviet satellite(2021년 1월 28일): https://www.technologyreview.com/2021/01/28/1016867/lunik-cia-heist-steal-russian-satellite-space-us-ussr/ 1957년 스푸트니크 1호(Спутник-1)가 성공한 이래 미국은 우주개발에 있어서 계속 죽을 쑤고 있었다. 사건이 있었던 1959년 그 해에도 달 탐사선, 루나-3호(Луна 3)가 달로 가서 달 뒷면 촬영 사진 17장을 보내오는 것까지 성공시켰었다. 이제 막 대기권에 위성 띄우는 것 정도만 성공했던 미국은 계속 패배감으로 지켜볼 수밖에 없었고 말이다.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 공포에 사로잡혔다고 한다. 50년대 말 미국 시각으로 볼 때, 소련이 저렇게 자유자재(?)로 위성을 쏘고 한다면 결국 자유자재로 하늘에서 미국 본토를 폭격할 수 있지 않겠냐는 두려움이었다. 경보음이 울리면 책상 밑으로 몸을 숨기는 훈련을 하던 시절임을 기억하시라. 그런데 루나의 결과가 자랑스러웠던 소련은 위성을 갖고, 전세계 순회 전시회를 개최하기로 결정한다. 당연히 미국도 들리는 일정이었으며, 미국에서 전시했을 때, 이들이 전시한 “루나” 위성이 진짜임을 CIA가 확인했었다고 한다. 그러나 차마 미국 땅에서 위성을 훔칠 생각은 CIA도 못 했었다. 그러나 다음 행선지가? 멕시코였다. -------------- 멕시코라면 작전을 벌일만 하지. 당시 멕시코는 미소 양국 사이에서 줄타기를 하던 중이었으며, 따라서 미소 둘 다 스파이를 잔뜩 보내는 국가였다. 소련은 또한, 사회주의 소련의 위대함을 전시하기 위해 망치와 낫(…)은 물론 가죽코트, 현미경, 핵발전소와 가속기 모형(!) 등 온갖 물건을 다 갖고 왔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소련에게 발각되지 않은 채 인공위성을 훔치느냐… 당시 필름 카메라 플래시 기술에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다. 어두운 곳에서의 촬영을 위해 강력한 플래시를 사용해야 하는데, 당시 플래시는 한 번 촬영을 하고 나면 30초 정도는 기다려야 다음 촬영을 할 수 있었다. 즉, 발각되지 않은 채 돌려주려면 밤-새벽 동안 확보해서 촬영을 여유있게 한 다음에 돌려주는 편이 최선이었다. 소련측은 전시회가 끝나는 마지막 날 밤에 호텔에서 성공 파티를 할 계획이었다. 그래서 CIA는 여기에 일단 미녀들을 단체로 투입, 칵테일에 집어넣을 LSD도 조달했다. 그러고나서 인공위성을 나르는 트럭을 납치해야 했었다. 다른 화물 트럭과 떨어뜨리기 위해? 일부러 교통체증을 유발시켜서 트럭을 납치했다. 소련 병사들은? 미녀들이 있는 호텔 파티장에 있었다. 성공리에 납치한 루나 우주비행체를 이제 대기하고 있던 CIA 엔지니어팀이 분해하기 시작했다. 유압기나 전자 시스템, 밸브, 유류 등등 그들이 연구해야 할 분야가 한 둘이 아니었다. 발자국을 남기지 않기 위해 그들은 신발을 벗고, 올라섰다. 촬영을 마친 필름은 대기하고 있던 자동차로 옮겨져서, 대사관으로 바로 향했다. -------------- 문제는 엔진실이었다. 플라스틱 실에 소련 도장이 박혀 있었던 것, 이건 현장의 CIA가 그 시간에 급조해낸다. 그들은 그날 사진 280장을 현상했고, 밸브 60개 정도를 훔쳐낸다. 유류 샘플도 남아있던 것을 확보했다. 서서히 아침이 밝아온다. 재조립에 확인까지 마친 그들은 트럭을 돌려보낸다. 아침 7시, 창고를 지키고 있던 소련 병사들은 운전사에게 왜 이제서야 가져오느냐 물었고, 운전사는 지시받은대로 병사들이 호텔로 놀러가버리는 바람에 창고가 문닫혀서 기다렸을 뿐이라 답했다. 그런데? 추가 질문 없이 그냥 트럭이 들어갔다! 대성공이었다. 대사관에서는 곧바로 자료를 챙겨서, 주멕시코 미국 대사가 직접 개인용 제트기를 타고 텍사스로 갔다. 이 작전?은 “루닉 납치(Kidnapping of the Lunik)”로 알려졌으며, CIA는 이를 납치라 부르지 않고 대여(borrowing)이라 부른다. 미국이 이 작전으로 얻은 것은 상당했다. 로켓 최상단부와 위성의 내부를 속속들이 알게 됐기 때문이다. 즉, 이 비행체를 분해하고 조사하면서 소련 ICBM에 대한 대략적이지만 구체적인 추정을 할 수 있었다는 의미다. 이 조사 이후에서야 CIA의 CORONA 정찰위성 계획은 첫 성공을 거둔다. 그리고 예상치 못하게, 국방부(공군)의 대대적인 예산 증액 요구(소련에 대적할 미사일 수만 기가 필요하다!)를 깎아버리는 근거로도 사용됐다. CIA가 “내가 뜯어봐서 아는데…”를 말하니 공군의 증액 요청이 힘을 잃은 것. -------------- 참조 1. 제목의 Lunik은 당시 미국 언론이, 소련의 루나 프로젝트의 성공이 가짜뉴스라면서 “루나”를 거짓말의 뉘앙스를 가진 “루닉”이라는 멸칭으로 불렀던 유래를 갖고 있다. 소련은 미국 언론의 보도가 나오자 기다렸다는 듯이 달 뒷면 사진을 타스 통신을 통해 뿌렸다. 2. 이 작전에 참여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망했으며, 가족들은 뉴스에 공개된 정보가 나오기 전까지 그때 그양반이 멕시코에 갔는지도 모르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한 핵심인사의 아들은, 미국 최초(1961년)의 우주비행사였던 앨런 셰퍼드가 자기 아버지에게 어째서 서명된 사진을 줬는지 몰랐었다고 한다. 3. 소련도 어느 시점에서는 깨달았던 모양이다. 미국인지, 멕시코인지, 다음 목적지인 쿠바인지 소련도 처음에 헷갈렸을 수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당시 주멕시코 소련의 서기관이 당시 멕시코 측 스파이를 1963년 한 공항에서 우연히 만나 말한 것이 있다. 결국은 뭐 다 알았으리라. “모스크바 광장에서 네 목을 매달 날을 기다릴 거다.” 4. 짤방은 1959년 당시 성공을 기념해서 나온 소련의 우표 출처 : https://ru.wikipedia.org/wiki/%D0%9B%D1%83%D0%BD%D0%B0-3
최초로 미국을 방문한 일본인 존 만지로 이야기
1827년, 만지로는 일본 도사시미즈 시에서 (당시 도사 번 카카하마무라) 가난한 농민 집안의 둘째로 태어난다 만지로의 형이자 장남인 토키초는 병약해 별 보탬이 되지못하고 찢어지게 가난한 생활을 하게 된다 돈이 없어 데라코야(서당)에도 다니지 못하고 9살 때 아버지가 죽어 10살 때부터 가족의 생계를 위해 허드렛일부터 시작해 어업을 하러 바다에 나가게 된다 14살이던 정월 5일 새벽, 고등어와 전갱이를 잡으러 다른 형제들과 같이 7.5미터의 배를 타고 나왔다가 폭풍우를 만나 10일 간 망망대해에 표류하게 된다 배에 실려있던 건 쌀 두 말과 약간의 물과 장작 뿐. 급작스런 북서풍을 만나 흘러서 도착하게 된 곳은 일본에서 남쪽으로 760km 떨어진 둘레 8km의 작은 무인도 도리시마 섬 만지로와 동료들은 해초와 물고기, 알바트로스, 오줌물을 먹으며 이 섬에서 143일을 연명했다 그러다 1841년 6월 27일, 만지로 일행은 동남쪽 근방을 지나던 미국의 포경선 존 하울랜드(John Howland) 호에 의해 구출된다 "다섯 명의 초라한 피곤한 인간을 발견. 데려오지만 그들이 배고프다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 항해 일지 만지로 일행은 처음 보는 범선에서 흑인 선원도 처음 보고 각종 항해 도구, 세계 지도, 서양 가구도 처음 보고 놀라게 된다 만지로는 구조되었지만 엄한 쇄국 체제인 일본으로 돌아가면 중죄 처벌을 받을 것이었기에 존 하울랜드호의 다음 기항지인 하와이로 따라가게 된다 /당시 일본은 귀찮게 굴던 포경선 때문에 1825년 발효된 이국선 타격령(異国船打払令)때문에 접근도 쉽지 않았다/ 다행히 배의 선장 윌리엄 윗필드와 선원들은 낯선 동양인 무리에 우호적이어서 소년 만지로는 갑판 청소, 가축 돌보기 등을 하고 고래잡이 일도 배우며 영어도 조금씩 배운다 반년 만에 하와이 호눌룰루 항에 도착해 만지로의 동료들은 하와이의 선교사에게 맡겨졌는데 지식욕이 높은 만지로는 세계지도의 작은 일본을 보고 놀란 후 포경선의 선원이 되고싶다고해 모험을 계속하게 된다 선장 왓필드는 배의 이름을 따 그에게 John이란 이름을 지어준다 그때부터 만지로는 알파벳을 배우기 시작하는데 일본어도 못 쓰던 그가 일본어-영어 학습자가 전무하던 시절 글을 익히는 것은 최초인 만큼 어려운 일이었다 만지로의 머리가 좋은 걸 눈치 챈 선장은 미국에 가서 교육을 받는게 어떠냐 권유했고 만지로는 꼭 데려가 달라고 말한다 존 하울랜드호는 괌 섬, 대만 근해에서 포경을 마치고 남미의 드레이크 해협을 거쳐 미국(13개 주 시절) 메사추세츠 주 뉴 베드포드 항에 도착한다 1843년 5월, 당시 이곳은 세계 최대의 고래잡이 기지였고 윗필드 선장은 만지로를 모두에게 소개했다 만지로는 윗필드 선장의 고향 페어헤븐에서 양자처럼 같이 살며 영어, 수학, 측량, 항해술을 배운다 최초의 일>영 학습 교재가 된 '영미대화첩경'을 저술하기도 하고 고등 학교에서 수석을 차지할 만큼 낯선 땅에서 만지로의 학습욕은 불타올랐다 포경업 및 귀국 편에서 계속... 일본여행-관동이외갤러리 비기뇽님 펌
냉전기 핀란드의 조선산업
월요일은 역시 핀란드 아닐까요? 그래도 좀 심각하게 현대 한국과 핀란드의 관계를 말하자면 빠뜨릴 수 없는 주제가 바로 빌푸… 아 아닙니다. 조선업이다. 현대이든 대우중공업이든 간에 핀란드로부터 수입하는 필수 기자재(가령 엔진/발전기 세트나 전력시스템, 추진기와 기어 등등)가 없다면 한국 조선업이 스톱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겠습니다. 1970년대 이래 일본을 시작으로 한국은 유럽 주요 국가들의 조선업을 붕괴시켜온 주범이었는데, 유독 핀란드가 상업 조선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왜일까요? 무엇이 핀란드의 조선 산업을 유지 발전시켰을까요? 궁금하지 않을 수 없다 이겁니다. 그래서 나온 맞춤형 논문이 하나 있습니다(참조 1). 바로 스웨덴 예테보리에 소재한 샬메스 대학교 경제사 박사 Saara Matala(참조 2)가 쓴 책(…)이기는 한데 많은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자, 가 봅시다. 핵심 질문은 사실 아래 한 가지이다. 핀란드는 어째서 오일쇼크+동북아시아의 공세를 버텼을까? 여기에 대해 한 마디로 답을 하자면, 소련 덕분입니다… 당연히 상식 선에서 맞다 생각하실 텐데, 몇 가지 이유가 있다. 첫 번째, 소련은 핀란드의 공산화를 결코 원하지 않았다. 소련이 아무리 우주 기술과 핵을 갖고 있다 한들, 일반적인 제조업 기술이 워낙 뒤쳐졌기 때문이었다(도대체 수출규제를 뚫고 소련에 디지털 선반을 수출한 일본은…). 안정적으로 서구 기술/제품이 들어오는 민주주의 핀란드(참조 3)가 소련에게도 절실했다. 두 번째, 그래서 소련의 주문량은 많았고, 핀란드는 고용 유지와 함께 소련으로부터 나오는 자원/자본이 중요했고, 보드카는 양국 모두 풍부했다. 이게 무슨 의미냐, 정치적으로 결정되는 주문이 많았다는 의미다. 세 번째, 덕분에 핀란드는 거대한 소련 및 동구권 시장에서, 자본주의 국가로서 거의 독점에 가까운 지위를 누린다. 특히 쇄빙선과 화물선, 여객선 부문에 있어서 말이다. 북극해 혹은 북극에 바로 접한 영토/영해가 없는 핀란드인데도 불구하고, 소련은 극지 항해를 위한 선박을 핀란드가 만들어주기 바랐다. 네 번째, 미국은 이를 묵인한다. 핀란드 경제가 튼실해야 핀란드가 소련 블럭에 넘어갈 위험에 처하지 않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세 번째와 관련, 소련은 극지 개발에 대한 노하우와 정보 및 기술도 아낌 없이 핀란드에게 제공하거나 같이 개발한다. 핀란드 조선업이 더 발달할 수밖에 없는 배경이다. 여섯 번째, 따라서 핀란드 조선소들은 은행 보증이 없이도 소련의 네 차례에 걸치는 확실한 지불 절차(계약 서명, 설계, 건조, 완성에 각각 25%씩) 대금 수납의 장점을 누렸고, 정부도 핀란드-소련 지불 시스템을 양자 조약에 기초(참조 4)해서 만드는 등 편의를 많이 제공했다. 일곱 번째, 핀란드 정부는 각 조선사들이 수출과 관련하여 카르텔이 형성되는 것을 오히려 권장했다. 그러니까 핀란드는 선박 수출에 있어서 일종의 국가 자본주의, 하나의 단일체처럼 움직였다는 의미이다. 물론 소련이 이념적 이유로 ‘카르텔’과 거래하는 걸 마뜩잖아 했기 때문에, 좀 간접적으로 움직이기는 했다. 그래서 핀란드 조선업이 쇄빙선과 같은 특정 부문 혹은 첨단 기술 엔지니어링 면에 있어서 계속 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겁니다. 물론 소련이 붕괴됐을 때, 안정적으로 작동하던 동방무역 메커니즘도 같이 무너진다. 핀란드 조선업의 유지 및 부활을 위해서 핀란드는 서방으로 눈을 돌릴 수밖에 없었고, 특히나 조선업에 있어 온갖 정부 보조금을 뿌리는 유럽 국가들에 맞서기 위해 핀란드 스스로 EC/EU에 결국 가입하게 되는 이야기입니다. 사실 이 책/논문을 읽으면서 들었던 생각은, 소련이 이빨을 드러낼 때마다 주변 국가 좋은 일을 많이 해줬다는 사실이다. 전쟁 보상 및 소련의 기술부족이 핀란드 경제 체제를 바꾸고 오히려 키워줬다는 결론이 나오기 때문인데, 소련과 러시아는 유럽의 다크나이트 역할일까? 월요일에 어울리는 핀란드 조선업에 대해 궁금한 분들에게 이 책/논문을 강력하게 권합니다. ---------- 참조 1. A history of cold war industrialisation: Finnish shipbuilding between east and west : https://www.perlego.com/book/2567146/a-history-of-cold-war-industrialisation-finnish-shipbuilding-between-east-and-west-pdf 2. 이름으로 보면 핀란드인인 듯 하다. https://research.chalmers.se/en/person/matala 3. 전쟁 직후 전쟁보상을 소련은 공작기계, 선박 이런 걸로 원했기 때문에 그 이유로라도 핀란드는 공업국가로 탈바꿈할 수밖에 없었다. 보상을 다 한 이후에도? 소련은 핀란드를 통한 안정적인 자본주의 기술 도입을 원했다. 4. 기본적으로는 물물교환 시스템에 양국의 중앙은행을 갖다 붙인 꼴이었다. 현재 러시아와 인도가 하는 무역 거래보다 좀 더 세련된 형태이다. 5. 짤방은 논문에서 인용된 신문 만평(1989년 10월 25일)이다. 핀란드를 방문한 고르바초프 서기장은 고기나 생선 등 소비재를 쳐다보고 있는데, 코이비스토 핀란드 대통령은 바르질라 조선소의 노동자들을 쳐다보고 있다. 소련이 주문을 계속해줘야 고용이 유지된다는 의미다. 만평작가, Kari Suomalaisen(1920-1999)의 작품이다.
비트코인이 인터넷 파괴할 수도
BIS, 3가지 경고 배경은? 스마트폰-서버 규모 초과 트래픽· 분산합의 거래 취약성 등 아킬레스건 “비트코인에 드는 인터넷트래픽 용량은 스마트폰-서버간 용량을 넘어설 수 있어 인터넷을 파괴할 수도 있다.” "글로벌경제에서 선의의 교환수단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조작과 사기의 대상이 된다." “탈중앙화된 합의에 따른 거래의 취약성 때문에 언제든 신뢰성이 증발할 수 있어 개인 지불의 최종성에 의문이 제기되며 이는 암호화 화폐가 기능을 멈춘다는 것을 의미한다...” 블룸버그는 18일(현지시각) 스위스 바젤 소재 국제결제은행(BIS)보고서를 인용, 최소 3가지 이상의 이유를 들어 비트코인등 암호화화폐가 가져올 위험성을 경고했다고 보도했다. BIS는 금제금융 안정을 목적으로 전세계 각 중앙은행 간 관계를 조율하기 위해 설립된 국제협력기구다. 올해로 설립 88년째다. BIS는 17일(현지시각) 연례 경제보고서의 일부로 발표된 24쪽 짜리 보고서에서 관심과 투자 폭발을 촉진할 높은 기대감 속의 암호화화폐가 이를 저해시킬 다양한 결함으로부터 고통받고 있다고 지적했다. 보고서는 "암호화화폐가 너무나도 불안정해 너무나도 많은 전력을 잡아먹으며 글로벌경제에서 선의의 교환수단 역할을 하기에는 너무나도 많은 조작과 사기의 대상이 된다"고 말했다. 또한 탈중앙화의 속성을 가진 암호화화폐의 속성에 대해 “비트코인과 그 모방자들은 분산네트워크 컴퓨터에 의존해 만들어지고 거래되고 설명되는데 이는 핵심 강점이라기보다 근본적인 결함”이라고 말했다.
체르노빌/Chernobyl(2019)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그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아직까지 없었다는 점이 좀 의아하기는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워낙에 인류 전체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괴물이 나오는 게임이나 영화로 하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을까. 물론 나도 체르노빌의 상황은 콜오브듀티 모던 워페어의 잠입 미션으로 배웠… 이, 이게 아니고 HBO가 이 드라마를 매우 잘 만들었다. 고증 오류가 물론 없지는 않은데(참조 1, 2), 이 복잡한 사건을 그나마 알아볼 수 있게 해 준 공이 크다. 뭣보다 우리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 영웅들이다. 이를테면 그냥 불 끄는 게 일이니까 달려갔다가 화를 당한 소방수와 그를 끝까지 쫓아가 임종을 지켜봤던 그의 아내, 펌프를 작동시키겠다면서 자살 행동임을 알고 발전소 하부에 진입하기를 지원한 세 명의 엔지니어들, 자기가 직접 보고 태도를 바꿔서 모든 걸 지원했던 고위 간부, 묵묵히 옥상에 나아가 폐기물들을 40초 동안만 해치웠던 “바이오 로봇”들. 그리고 뭣보다 과학자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물론 주연급의 울랴나 코뮤크(Ulana Khomyuk/Ульяна Хомюк)는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당시 레가소프(Валерий Алексеевич Легасов)를 도왔던 수 많은 과학자들을 상징하며, 또 여성이기도 하다(참조 3). 학자들의 양심이 레가소프의 마음을 더 움직인 것은 분명할 수 있겠다(참조 4). 의외의 인물로, 마지막화에서 검찰 역할을 했던 배우(Michael McElhatton)가 반가웠다. 왕좌의 게임에서 볼튼 가문의 수장을 맡았던 그 배우다. -------------- 참조 1. 가령 광부들 장면에 대한 오류는 아래와 같다. Chernobyl: The real-life heroes of nuclear disaster watch TV hit(2019년 6월 4일): https://news.sky.com/story/chernobyl-the-real-life-heroes-of-nuclear-disaster-watch-tv-hit-11734773 광부들의 보드카 음용 -> 보드카는 언제나 업무 후에 마심 광부들의 나체 -> 몇몇 사례는 있지만 전체는 아님 총을 겨누고 광부를 모집 -> NO. 2. 그 외에도 꽤 많은 오류가 있기는 하다. 당사자의 직접 증언을 들어 보자. 이를테면 집 안의 동물들을 쏘는 장면은 극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What HBO got wrong: Chernobyl general gives hit TV show a reality check(2019년 6월 8일): https://www.rt.com/news/461348-chernobyl-disaster-tarakanov-hbo/ 3. Ulana Khomyuk From 'Chernobyl' Is Not Based On A Real Person, But Emily Watson's Character Is Important All The Same: https://www.bustle.com/p/ulana-khomyuk-from-chernobyl-is-not-based-on-a-real-person-but-emily-watsons-character-is-important-all-the-same-17304139 당시 화학 쪽 Ph.D.의 여성 비율이 소련은 40%에 육박했다고 한다. 마지막 화에 나온, 소련 과학 아카데미 학자들이 모인 재판장에서도 보면 대략 4:6 정도의 비율이다. 4. 다만 레가소프의 자살 원인은 좀 불명확스러운 부분이 있다(참조 2). 드라마에 나온대로 왕따가 된 것은 맞는데, (BBC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의 주장/제안에 따라 소련식 원자로의 흠결을 당국이 인정하고 수정에 나서기는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은 아들의 문제(사람을 죽였다)도 겹쳤고 해서 상당히 불안한 심리 상태였던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실제로는 오디오테이프를 숨기지 않았고 그냥 남겼으며, 자살한 장소에 대해서는 (정확한 경찰 기록이 없어서인지) 논란이 좀 있다. 5. 사진은 아래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옥상의 핵폐기물을 치우는 liquidator(ликвида́тор)들의 모습이다. 70만 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Chernobyl, remembering brave Firemen and forgotten heroes(2019년 4월 18일): https://www.emergency-live.com/news/chernobyl-remembering-firemen/
타르투 컴퓨터
사진은 내가 에스토니아 점령 및 자유 박물관(Vabamu)에서 촬영한 것이다. 이것이 무엇이냐, 정답부터 말씀드리자면 1980년대 에스토니아에서 제작했던 개인용 컴퓨터, 타르투(Tartu, 사진은 소련에서 양산된 버전의 이름으로 쓰여 있다)의 모습이다. 그 이름처럼 타르투 대학교에서 개발했고, 원래 대학교 내에서 프로그래밍 교습을 위한 목적으로 만들었었다. 그러나 엄한 곳에 자본주의를 도입하는 소련의 성격상(참조 1), 에스토니아 SSR은 교육기관용 컴퓨터에 경쟁을 붙였고 여기에 컴퓨터 세 가지 종이 등장한다. Entel과 Juku 그리고 이 Tartu이다. 엔텔은 에스토니아와 인텔의 합성어인데 당연히 냉전 시기 인텔 칩을 그대로 들여올 수는 없었고, 인텔 칩(8080A) 클론을 사용했었다. 하드웨어 자체는 당시 노키아가 만들던 개인용 컴퓨터, Mikko 1을 본땄고 말이다. 그런데 이 컴퓨터의 최대 특징은 핀란드의 문자다중방송(텔레텍스트) 수신이었다. 그래서 이 컴퓨터를 이용해 서방 문자방송을 보는 사람들이 좀 있었다고 한다 유쿠 또한 8080A 클론이다. 교육기관 조달 경쟁에서 승리한 컴퓨터가 바로 유쿠이기는 했는데, 생산량이 조달을 충분히 할만큼 나오지 않았다고 한다. 신뢰성 있는 부품 생산이 워낙 부족해서였다. 그래서 타르투 대학측이 타르투의 생산을 강행했던 것. 이 타르투는 엔텔이나 유쿠와는 좀 달랐다. 애플 II가 사용하는 자일로그 CPU 클론을 사용했기 때문이다. 다만 결국 소련 전체에서 승리한 것이 바로 이 타르투가 됐다 이 말씀입니다. 소련 전체에서 이 “타르투”를 “이스크라 1080 타르투/Искра 1080 Тарту”라는 개인용 컴퓨터로 채택하여 쿠르스크에서 생산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좀 이상하게 생각하셔야 할 사항이 하나 있겠다. 도대체 왜? 소련과 같은 사회에서 에스토니아는 어째서 개인용 컴퓨터를 만들었을까? 그걸 풀어주는 국제정보처리연합의 에세이(참조 2)가 하나 있기는 하다. 이 에세이에 따르면, 소련은 당시 컴퓨터를 A 및 B의 두 범주로 나눠 개발했었고, A가 바로 국방과 우주개발에 필요한, 그러니까 “안보용” 고성능 컴퓨터가 그 목표였으며 여기에 자원과 인력이 무한대로 제공됐었다. B는 안보용이 아닌 모든 것이었고, 그에 따라 지원이 좀 적었다. 에스토니아와 같은 변방 SSR이 바로 이 B를 맡았던 것. 그런데 이게 오히려 개인용 컴퓨터 발전에 더 도움이 됐었다. 안보용이 아니니 서방, 특히 중립국 핀란드와의 인물/기술 교류가 활발히 이뤄졌기 때문이다. 발트3국이 이른바 “Soviet West”를 구성했기(참조 3) 때문이다. 그래서 이는 에스토니아 외에 라트비아 및 리투아니아의 냉전시기 IT 산업을 들여다볼 필요를 주는 셈인데, 그 이야기는 다음에 풀어보도록 하자. ---------- 참조 1. 소비에트 인테르니옛(2018년 7월 8일): https://www.vingle.net/posts/2439487 2. Computing and Computer Science in the Soviet Baltic Region : https://dl.ifip.org/db/conf/hinc/hinc2007/Tyugu07.pdf 3. 탈린의 미크로라욘(2022년 6월 21일): https://www.vingle.net/posts/4539785 4. 에스토니아의 세 컴퓨터 이야기 유쿠 : https://et.wikipedia.org/wiki/Juku_%28arvuti%29 타르투 : https://et.wikipedia.org/wiki/Tartu_(arvuti) 엔텔 : https://et.wikipedia.org/wiki/Entel
자식농사 하나는 기가 막히게 한 선조.jpg
선조 아들들 중에서 그나마 정상이라고 쳐줄만한 아들은 둘이 있음. 신성군 - 워낙 어려서 요절해서 병크 터트리고 말고도 없음 선조가 물고 빨고 예뻐죽던 아들이라 전쟁 안터지고 명줄 길었으면 얘가 세자 했을지도 모름 광해군 -군왕자 시절에도 클린했고 세자로 빛나는 업적을 남겼지만 애비의 땡조급 갈굼으로 인해 흑화 빼고는 하나같이 가관이었음 그 중 3대장이 1. 임해군 이진 공빈 김씨 소생, 선조 서장자. 광해군 형임에도 인성이 가관이라 그 누구도 세자 후보로 생각 안함, 얘라면 물고 빨고 했던 선조도 세자는 쫌하면서 신성군과 광해군 사이에서 저울질;;; 확인되는 범죄 행위들만 따져도 구타, 강도, 권력을 이용한 재산 강탈은 기본에 공물 약탈, 기록에 의하면 임해군은 궁노를 풀어 토지를 멋대로 차지하고 궁노의 입을 막기위해 남의 지아비를 죽이고 그의 처를 궁노에게 짝지어줬다함. 심지어는 첩실을 빼앗기 위해 강도로 위장해 도승지 유희서를 살해하기 까지 함. 이때 선조는 크게 질책했다고 하지만 지 아들새끼라고 싸고 돌아서 처벌은 안 받음 사람을 죽였는데 참고로 세종대왕때는 공주의 남편인 부마가 종을 때려죽였다가 귀양까지 갔음 임진왜란때도 동생 광해군이 피땀흘려 의병들 독려하고 전투할때, 기생끼고 놀고 갑질해대다가 참다참다 백성들이 얘랑 얘 이복 동생 세트로다가 왜한테 넘겨버림. 광해군은 이런 형을 극도로 증오했다고 함, 기록상 신하들이, 서인,동인 할것 없이 당파를 조월해서 쟤 죽이라고 상소를 올려댔는데 광해군이 상당히 미온적으고 동정적인 태도로 나왔음, 그러나 이런 광해군의 행동이 그냥 동복형제를 죽이기에는 쫌 그러니까 못이기는 척 하려고 했다는게 학계의 정설 (태종이 잘했던 짓 분위기 만들어 놓고 빼는 척 하다가 킬) 심지어 반정이후에도 영창대군 죽인 것만 문제삼고 얘 죽인건 아무도 문제 안 삼음. 2.정원군 인조 애비, 얘도 임해군이랑 하는 행동거지가 똑같았음. 후술할 순화군의 졸기에 정원군이나 임해군보다는 행동거지가 나았다고 서술했을 정도로 개 막장. 자신의 영향력을 이용하여 과거 시험에 처남을 합격시켜 사헌부에 탄핵당하거나 군적 회피자를 돈 받고 자기 집에 숨겨주거나 하는 정도는 아무것도 아닌 정도고.. 선조 35년 9월 13일조를 보면 정원군의 가노들이 선조의 형수이자 덕흥대원군 봉사손이었던 하원군의 부인을 납치하는 강력 범죄도 저질렀다고 함. 노복들과 창기(娼妓) 대여섯명이 하원군 집 앞을 지나다가 하원군의 노비와 싸우게 되었는데 하원군 부인이 나와서 말리려다가 도리어 집이 습격당하고 노비들한테 끌려가 감금된거임 하원군의 부인은 참고로 큰어머니뻘인데ㅋㅋ 유교의 나라에서 참ㅋㅋㅋ가지 가지 이새끼 아들이 인조임 인조가 왕위에 오른 후 원종으로 추존됨...... 콩콩 팥팥ㅋㅋㅋㅋ 3. 순화군 역대 최고의 사이코패스 사이코들이 늘상 그렇듯 동물을 잔혹히 죽이는 걸 꼬꼬마 시절부터 즐겼다는 기록이 있음. 포로 생활 1년만에 안그래도 개 막장이었던 인성이 완전 찌그러져버려서는 ㅋㅋㅋ 인성자체가 소멸되서 사람들 막 죽이고 댕김. 저 임해군이 야..나도 나지만 너 쫌 심하다..했을 정도. 어러서부터 쌩트집을 잡아서 자기한테 인사할때 허리를 너무 조금 굽혔다거나 덜 굽혔다거나 등 말도 안되는 진짜 말그래도 쌩트집 잡아서 잔혹하게 형장을 치는걸 즐겨했다고 함ㅋㅋㅋ 참고로 이때 대략 14~15살ㅋㅋㅋ중2병 개 지랄 맞게 왔음ㅋㅋ 참다 못한 신하들이 처벌을 주청해서 삭탈관직 몇년 받고 끝ㅋㅋ 그러다 10대 후반에는 이미 얘 손에 죽은 피해자만 양손에는 꼽지도 못할만큼ㅋㅋ 쌓이고 완벽한 사이코패스겸 연쇄살인마가 됨. 1년에 10명씩은 죽이고 다닌다는 소리가 돌았고. 백성들은 호환마마보다 순화군을 더 무서워했음. 그러거나 말거나 선조새끼는 어화둥둥 내 새끼 ^^ 처벌도 조또 안하고 사람만 계속 죽어감ㅋ 그러다가 법모이자 선조의 정비인 의인왕후를 모시던 궁녀를 강간하는 일이 생김, 심지어 왕후의 관이 모셔진 곳 앞에서 벌어진 범죄임. 이는 아부지인 선조도 절대 쉴드 못쳐주는 극대죄였음. 효를 버린 폐륜적 행동이었기 때문임. 드디어 귀양길에 오르는데 귀양지 가서도 지 왕자라고 고개 쳐 들고 갑질하고 사람 죽이고 다님ㅋㅋㅋㅋ 그래서 다시 서울로 잡혀 올라오는데 다시 그지랄하고 다님 그래도 꿋꿋하게 자가 아들 부둥부둥하는 선조.. 그러다가 더는 지도 안되겠다 했던지 가택연금시켰는데 그러다 풍 맞아 뒤짐ㅋㅋㅋ 선조-정원군-인조는 조선왕조에서 다른 의미로 역대급 3대임 출처
시모노세키의 복어 이야기
북규슈와 혼슈를 잇는 지리 상의 거점이자 메이지 유신 때 사쓰마 번(가고시마)와 연합해 260년의 에도 막부를 끝내는 데에 중요한 역할을 했던 조슈 번(長州藩)의 도시기도 했던 '시모노세키' 간몬 해협을 사이에 두고 가마쿠라 막부를 연 단노우라 전쟁(1185)이 일어나기도 했고 왜란 후의 조선통신사들이 일본 본토에 처음 기항하는 곳이기도 했다 이 곳 시모노세키 바다에는 예로부터 복어가 많이 잡혀 이 지역의 향토음식이었다 관짝 짜놓고 먹는다고 '관 요리'라고 불렀다고 1592년 히데요시가 각 지방의 다이묘들을 들들 볶아 마련한 노인과 아이를 제외한 15만 8천 7백명의 조선 침략군이 이 곳, 시모노세키 항구에 집결했다 일본 각 지역에서 모인 다양한 장정들이었으니 바다를 처음 보는 산골 출신들도 많았는데 복어에 맹독이 있다는 걸 모르는 병사들이 독이 든 알과 내장까지 먹으며 하나둘 죽어나가자 히데요시는 ㅈㄴ 빡쳐서 그렇게 죽고싶으면 조선에 가서 싸우다 죽으라며 복어금식령읕 내리기에 이른다 그 후, 복어를 먹고 죽는 이는 없어졌지만 전쟁이 끝나도 복어 금식령은 300년 동안 남아있었다 근대화 중이던 1882년에도 지방 영주에 의해 복어를 먹으면 구류 or 벌금형에 처한다는 법령이 있었다 이 복어금식령이 해금된 것은 1892년, 당시 내각총리대신 이토 히로부미에 의해서다 총리가 되고 시모노세키를 방문한 이토는 춘범루(春帆樓)라는 여관에 머물게 된다 춘범루는 원래 안과의사 후지노 겐요가 1877년에 '츠키야마 의원'을 개원한 곳인데 그가 죽자 그의 아내 미치가 여관으로 운영하던 곳이다 여튼 이토가 여관에 있을 때 태풍이 불어 조업이 어렵게 되자 대접할 게 없어서 주방장은 금지된 생선인 복어를 이토에게 주었고 이토가 그 맛에 감탄해 이 집 한정으로 복어 판매를 허용했는데 이를 계기로 금식령이 풀리게 된다 그 이듬해인 1895년, 이토 히로부미와 외무대신 무쓰 무네미쓰는 조선에서 벌어진 청일전쟁을 이기고 춘범루에서 청나라 북양함대 대신 이홍장과 정전협정을 맺게 된다 왼쪽 세번째 수염 풍성한 놈이 무쓰 무네미쓰 그 옆이 이토 무쓰는 청일전쟁과 동학농민운동(갑오농민봉기)에 대한 외교 문제를 일본 입장에서 저술한 '건건록'을 남겼다 춘범루 앞에는 회담이 이뤄진 곳을 전시해놓은 '일청교류기념관'이 생겼다 이 조약으로 청은 조선에서 완전 발 빼고 막대한 전쟁 보상금, 요동 반도와 대만을 할양받고 서구 열강과 같은 최혜국 대우를 받게 된다 이홍장은 숨이 턱턱 막히는 요구에 하얗게 질려 "가혹! 가혹!"을 외쳤다고... 쨌든 그 후 복어 요리는 발전했고 점점 다양화해졌다 도쿄의 츠키지 어시장처럼 시모노세키엔 가라토 어시장이 유명한데 이 곳에서 여러 복어요리를 찾아볼 수 있다 끝 일본여행-관동이외갤러리 비기뇽님 펌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 알렉산드르 솔제니친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한 편의 블랙코미디를 보는 것 같다. 이 소설은 이반 데니소비치(슈호프)라는 한 인물이 수용소에서 하루를 보내는 모습을 아무런 치장 없이 그대로 그려 내고 있다. 마치 식탐 많은 어린아이처럼 멀건 귀리죽 한 그릇을 놓고 다투는 죄수들의 모습은 웃긴 동시에 슬픔과 분노를 불러온다. 서로 상반된 감정을 한 문장으로 동시에 일으킬 수 있다는 사실이 이 책의 존재 이유를 설명한다.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실제 경험에서 우러나온 소설이다. 전쟁에 참여해 훈장을 받기도 했던 그였지만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 쓰인 스탈린에 대한 조롱이 문제가 되어 소련의 정치범 수용소 굴라크로 보내져 8년간 수용소 생활을 겪었고 그 기간 동안 보고 듣고 겪은 것을 바탕으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 <제1원에서>, <수용소 군도> 등의 작품을 써냈다. 이렇듯 파란만장한 알렉산드르 솔제니친의 인생에 비추어봤을 때 이 소설의 흠잡을 데 없는 현실감과 사실성은 당연한 결과라고 볼 수 있다. 그리 길지 않은 이 소설의 내용은 별다를 것이 없다. 수용소 죄수인 이반 데니소비치가 아침에 일어나 밤에 잠들 때까지 겪은 일들을 시간의 흐름에 따라 보여주고 있을 뿐이다. 하지만 이 하루 동안의 이야기가 솔제니친의 인생과 결부되면 그 무게가 달라진다. 허구의 인물,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에 대한 이야기지만 작가가 8년 동안 수용소 생활을 직접 겪은 인물이라는 것을 알게 되는 순간, 이 소설 속 이야기가 허구를 이용해 현실을 묘사하려는 목적으로 쓰인 작품임을 깨닫게 된다. 그 지점에서 <이반 데니소비치, 수용소의 하루>는 그 무엇에도 비할 데 없는 블랙코미디가 된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행동을 보면 웃음이 피식 새어 나온다. 추운 날씨에 일하기 싫어 어떻게든 핑계를 만들어 의무실에서 쉬고 싶어 하는 모습이나(물론 그 추운 날씨가 영하 40도를 넘나들긴 한다.) 담배 한 개비에 행복에 겨워하는 모습, 어떻게든 멀건 죽 한 그릇을 더 차지해보고자 다투고 아부하고 거짓말하는 장면, 몰래 시트에 숨겨 놓은 빵껍질이 사라질까 불안해하는 모습까지. 특히 그중에서도 멀건 귀리죽 한 그릇을 더 먹게 되자 행복감에 물들어 경건하기까지 한 자세로 죽을 말끔히 해치우는 모습은 마치 사탕 하나를 더 받고 너무나 기뻐하는 어린아이를 연상케 한다. 그러나 이야기가 점점 진행될수록 담배 하나를 얻어 피우고자, 혹은 건더기는 보이지도 않는 죽 한 그릇을 더 먹고자 이반 데니소비치가 기울이는 필사의 노력들을 마냥 유머로 받아들일 수만은 없게 된다. 의문이 들고 마는 것이다. 왜 이들은 이 열악한 수용소에서, 바깥에서는 먹지도 않을 멀건 죽 한 그릇을 먹기 위해서 이토록 필사의 노력을 기울여야만 하는 것인가 하는 의문이. '형식적으로 말한다면, 슈호프가 수용소에 들어온 죄목은 반역죄이다. 그는 그것이 사실이라고, 또 일부러 조국을 배반하기 위해 포로가 되었고, 포로가 된 다음 풀려난 것은 독일 첩보대의 앞잡이 노릇을 하기 위해서였다는 사실도 인정했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수행할 계획이었는지는 슈호프 자신도, 취조관도 꾸며낼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목적이 있었다는 것만으로 결정을 내렸다.' (p.83) 이반 데니소비치는 자신도 이유와 목적을 모르는 반역죄를 뒤집어쓰고 이 수용소에 수감되어 온갖 열악한 환경과 불합리한 대우와 고된 노동을 감수하며 10년의 형량이 끝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살아남기 위해, 10년의 형량이 끝나고 수용소 밖으로 나갈 날만을 손꼽아 기다리며, 온 힘을 다해 수용소 생활을 견뎌내고 있던 이반 데니소비치. 죽 한 그릇에 거의 목숨을 거는 이반 데니소비치의 모습은 분명 기묘하고 웃기지만 그 행동의 밑바탕과 근원에 깔린 당시 러시아의 상황을 생각해보면 웃을 수도 울 수도 없는 상황이 되고 만다. 독자는 스탈린의 독재 체재 아래 얼마나 많은 이들이 누명을 쓰고 수용소로 보내졌는지, 열악한 수용소에서 죄 없는 이들이 몇이나 죽어 나갔는지,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이고 말도 안 되는 일들이 현실 속에서 어떻게 자행되어 왔는지를 이반 데니소비치와 수용소 안 인물들의 하루를 통해 들여다보게 되는 것이다. 이 소설이 고전이자 명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독자들이 당시의 러시아 상황을 들여다보게 만드는 방식에 있다. 솔제니친은 자신이 8년간 수용소 생활을 겪었음에도 당시의 분노와 좌절, 복수심을 접어두고 철저히 객관적인 거리에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그린다. 만약 글 속에 스탈린의 독재에 대한 통렬한 비판, 불합리하고 비정상적인 공산주의 독재 체제에 대한 분노, 억울한 수용소 생활에 대한 복수심이 직접적으로 거론되었다면 이 소설은 지금까지도 사랑받는 고전으로 남아 있지 못했을 것이다. 솔제니친은 담담하게 한 수용소 죄수의 하루를 그림으로써 독자들이 스스로 당시의 소련 상황에 대해 생각하고 의문을 제기하고 판단하도록 만든다. 말하자면, 잘못을 저지른 누군가에게 당신이 한 일은 잘못됐다고 날 선 비판의 말을 쏟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가 저지른 일로 인해 벌어진 결과를 그대로, 가감 없이 눈 앞에 보여준 것이다. 전자와 후자 중 어떤 방법이 당사자가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도록 만드는 데 더욱 효과적인지는 누구나 알 수 있듯이 후자이며, 솔제니친은 그보다 더 치명적일 수는 없는 비판을 후자의 품위 있는 방식을 통해 당시 소련의 권력자들, 정치인들, 그리고 스탈린에게 가한 것과 다름없다.(소련 정부와 소련 작가 연맹은 자신들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노벨상 수상자로 선정된 솔제니친에게 노벨상을 포기하던가, 아님 전향이나 추방 중 하나를 선택하라고 경고하는 찌질함을 보여준다. 솔제니친은 결국 소련을 떠나 노벨상을 수상한다.) 작가로서 당시 소련 사회에 세련된 방식으로 통렬한 비판을 가한 그의 인생에 박수를 보낸다. 위에 인용한 소설 속 문장을 보면 이보다 더한 블랙코미디가 있을까 싶다. 아무도 반역의 목적을 모르는 반역죄라니. 심지어 죄를 지은 당사자조차도 모른다. 더 웃픈 건 이러한 일들이 고작 100년도 안 된 과거에 수없이 벌어졌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늘 눈을 뜨고 귀를 열고 주변을 살펴야 한다. 언제 내가, 혹은 당신이 이반 데니소비치가 될지 모른다. 소설 속 한 문장 봐라, 지금 슈호프는 사백 그램의 빵과 이백 그램의 빵을 차지한 것이다. 게다가 침대 시트에 이백 그램짜리 빵이 하나 더 있다. 더 이상, 뭘 더 바랄 것인가? (p.184)
시즈오카현의 흥미로운 이야기 (feat.녹차)
전근대 일본의 고속도로, 도카이도는 1601년 마련된 에도와 간사이 지방을 잇는 약 500km의 길 이 길을 따라 53개의 역참(휴게소)가 세워졌고 수도를 향한 행렬이 통하며 역참 근처로 상업이 크게 발달하게 되는데 현재의 도카이도 신칸센과 1번 국도도 거의 이 길과 비슷한 경로를 따라간다 참근교대(参勤交代)를 위해 가는 다이묘 행렬이 도카이도를 따라가다보면 여러 고개들도 난관이지만 가장 큰 장애물이 가로막는데.. (참근교대 : 각 번의 다이묘를 정기적으로 에도에 볼모로 잡아두고 다이묘가 없을 때는 아내나 자식 등 친족을 에도에 보내 견제하는 제도, 에도까지 가는데도 돈이 많이 들어서 재정적 부담도 듦) 바로 시즈오카현 시마다시의 오오이 강이다 이 강을 기준으로 당시 지명 상 도토미국과 스루가국이 나뉘었다 미나미알프스에서 발원해 스루가 만으로 빠지는 이 강을 건너기 위해선 인부들을 이용해 도하해야했다 이 강을 사이에 두고 에도 방향으로는 시마다(島田)쥬쿠 쿄토 방향으로는 카나야(金谷)쥬쿠라는 역참이 있었다 이 강을 건너고 23개의 역참을 지나면 에도 니혼바시에 도착할 수 있었다 유동 인구가 많았지만 오오이 강에 다리가 생기진 않았고 천 명이 넘는 인부가 강을 건너는 일에 종사하고 있었고 이 산업이 막부에 바치는 세금도 쏠쏠했다 에도 시대 중기 이후에는 일반 여행객들의 수요도 늘어 서민들은 가마가 아닌 인부에게 목마를 타고 가기도 했다 오오이 강은 수심이 깊진 않지만 물살이 빨라 강을 잘 알지 못하는 사람이 가면 위험했다 강의 수심에 따라 도하 비용은 달라졌는데 (위험 수당) 강의 수심이 136cm가 넘으면 '가와도메'라는 도하 금지령이 떨어졌다 1년 중 50일 정도는 도하가 금지되었고 최장 28일 간 도하가 금지된 기록이 있다 오오이강을 건너는 사람들은 카와카이쇼라는 티켓 오피스에서 티켓을 사야했다 1인 가마는 네명, 2인 가마는 여섯 명, 다이묘들이 쓰는 렌다이 가마는 스물네명의 인부가 필요했다 시마다의 인부들은 1번부터 10번까지의 쉼터에 모여 대기하며 얘기를 하곤 했다 인부들은 수요가 많아지자 힘들어져서 인부 개인이 하루 최대 3번 도하하게 제한을 두었다 오오이 강의 도하 제도는 메이지 정부 출범 후 3년 뒤인 1870년에 강에 배를 띄울 수 있게하며 인부들은 졸지에 다 실업자가 되었다 배로 강을 건너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1879년엔 강에 목조 다리가 건설되는데, 이 다리가 바로 897m 길이의 '호라이바시' 기네스북에 등재된 가장 긴 목재 다리이다 한편 근대 일본에 처음 해군을 만든 카츠 카이슈는 1860년 서양을 돌아보고 일본의 차가 상품 가치를 갖겠구나 생각해 1869년 시즈오카 마키노하라 일대에 1,425ha의 녹차밭을 개간하게 명령한다 도하 산업을 잃은 시마다의 인부들도 1873년부터 이 녹차 산업에 뛰어들어 30ha의 녹차밭을 개간하며 지금의 시즈오카 일대는 녹차로 유명한 지역이 되었다. 일본여행-관동이외갤러리 비기뇽님 펌
탈린의 미크로라욘
사진을 보자. 에스토니아 탈린에 있는 건축박물관에서 촬영한 것으로서, 탈린 도시건축에 있어서 큰 의미가 있는 사진이다. 이게 무엇이냐, 바로 미크로라욘/Микрорайон이 에스토니아에서 처음 등장한 구역의 조감이기 때문이다. 사진을 좀 더 설명하자면(실제 조감에는 러시아어만 쓰여 있다), 1959년에 디자인하고 1962년에 만들었으며, 탈린의 Mustamäe 지구의 건축 계획이라 쓰여 있다. 바로 여기가 에스토니아 미크로라욘의 첫 번째 대상으로서, 이상적인 소비에트 모더니즘 건축의 출발지점이라 할 수 있었다. 이 지구는 9개의 미크로라욘으로 나뉘어 있었으며, 중앙에 거대한 학교와 운동장을 놓고, 중앙을 중심으로 거주지역과 4-6개의 유치원, 우체국과 상점, 공중 사우나 등을 포함한 상업지구와 놀이터를 포함한 녹지가 뻗어 있다. 이 소련의 미크로라욘에는 원칙이 하나 있었다. 모두 걸어갈 수 있는 범위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 그리고 미리 제조된 콘트리트(Soviet -1-464 표준 콘크리트)를 사용해야 하는 것이었다. 그래야 비교적 적은 비용으로 건축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미크로라욘이 처음 등장했을 때는 1920년대였으며, 전쟁 이후인 1950년대에 들어서 본격적으로 확장하는데, 이때가 마침 소련 경제 부흥기였고, 아파트 공급 부족을 해결하기 위해 소련 당국은 여기저기 SSR에 미크로라욘을 건설하기 시작한다. 그래서 바로 에스토니아 무스타마에 지구가 등장한 것. 탈린 시 중앙은 지은지 천 년이 넘는 중세 타운이 존재하기 때문에 미크로라욘 대상지구는 중심지로부터 좀 남쪽으로 떨어져 있다. 소련이 얼마나 이 미크로라욘에 열정적이었냐 하면, 당시 건축가들이 (중립국가들인) 핀란드나 스웨덴에 가서 배워오도록 출장을 허용하기도 했었다. 그래서 에스토니아 건축연맹 회원 절반이 핀란드를 다녀왔다고 한다. 핀란드 건축가들도 에스토니아를 갔었고, 결국은 영국에서 태어난 전원도시운동(Garden City movement)이 발트 국가들에도 전달됐었다. 그러나… 이 미크로라욘은 사회주의 개념이다. 그래서 인당 거주면적이 정해져 있었고(9.5 제곱미터) 대부분은 5층짜리 건물로 구성되어 있었다. 그리고 위에서 언급했지만 모든 사회서비스 및 상업지구가 걸어서 500m 안에 있어야 했다. 현재의 탈린시를 생각하면 미크로라욘 개념이 더 나았다는 생각마저 들 정도인데, 올드타운 및 지금 당장 우후죽순 개발이 이뤄지고 있는 중인 해안가 아파트단지 사이가 너무 넓기 때문이다. 참, 한 가지 특징은 지금도 남아 있다. 상업지구 건물들이 모두 보도블럭 안에 모여있다는 점인데, 주된 도로와 좀 떨어져 있는 형태다. 이건 서울 성수동과 매우 유사한 분위기의 탈린 핫 플레이스인 Creative City(중앙기차역 부근이다)도 마찬가지더라. 다만 내가 아직 에스토니아 가정을 방문해본 적은 없어서… 아파트가 실제로 어떤지는 잘 모르겠다. 소비에트 개념이 남아 있다면 공공 구역은 극대화되고, 개인 구역은 최소화시키는 방식일 텐데 아마도 독립 이후에는 달라졌을 듯 싶다. 결론은, 에스토니아를 비롯하여 발트 지역 국가들이 주택단지 조성에서부터 서방의 영향을 꽤 많이 받았다는 점이다. 비록 구역 구분 자체는 소련의 개념인 미크로라욘을 바탕으로 하고 있지만 말이다. 즉, 발트 3국이 소련 입장에서 일종의 “Soviet West”를 구성하고 있고, 그 때문에 소련 붕괴 이후 급속도로 서구화될 수 있다는 점에서 연결 고리를 찾을 수 있겠다. ---------- 참조 1. 사진 촬영 장소는 에스토니아 건축박물관 : https://www.arhitektuurimuuseum.ee/en/ 2. 논문은 두 가지를 참고했다. Housing Estates in the Baltic Countries 안에 있는 “Collectivist Ideals and Soviet Consumer Spaces: Mikrorayon Commercial Centres in Vilnius, Lithuania and Tallinn, Estonia” : https://link.springer.com/chapter/10.1007/978-3-030-23392-1_14 A Soviet West: nationhood, regionalism, and empire in the annexed western borderlands : https://www.tandfonline.com/doi/abs/10.1080/00905992.2014.956072?journalCode=cnap20 3. 위키피디어 및 기사 무스타메 지구 도시 개발 : https://et.wikipedia.org/wiki/Mustamäe_linnaosa_linnaehituslik_kujunemine 현대 무스타메 지구의 개발 : Mustamäe uus tulemine ja jätkuvalt kõrged ehitusmahud(2021년 3월 4일): https://favorte.ee/uudised/mustamae-uus-tulemine-ja-jatkuvalt-korged-ehitusmahud 마이크로라욘 : https://en.wikipedia.org/wiki/Microdistrict
식별되지않은 이더넷 및 네트워크 오류 해결 방안 정리
인터넷 오류중 컴퓨터에 와이파이도 아닌 인터넷이 유선으로 연결 되어있음에도 불구하고 식별되지않은 네트워크 문제로 인해 인터넷 연결이 안되는 경우를 만나보셨을 겁니다. 이 부분에 관해서 제가 직접 경험해보고 고친 해결 방안을 전달드리고자 합니다. 출처 : https://ccf1007overmen.tistory.com/1823 1. 네트워크 드라이버 최신화 첫번째 방법은 매우 간단한 방법으로 장치 관리자에 들어가서 네트워크 드라이버를 재설치 하는 방법입니다. 윈도우+X 키를 누르시면 왼쪽 하단에 여러가지 옵션이 나오시는 것을 확인하실 수 있을 겁니다. 여러 옵션 중 보이시는 " 장치 관리자 "를 들어가주세요. 장치 관리자를 들어가주시면 상단에 " 네트워크 어댑터 " 라는 옵션이 보이실 겁니다. 네트워크 어댑터 옵션을 열어주시면 Bluetooth 옵션 밑에 Intel / 또는 Realtech Ethernet 이라는 문구가 있으실 겁니다. 그걸  " 드라이버 업데이트 " 를  진행해주시면 되는데요. 하지만 Wifi가 들어가 있는 문구는 무선 인터넷인 Wifi이니 Intel / 또는 Realtech Ethernet 으로 된 문구로 마우스 오른쪽 클릭하셔서 업데이트 해주셔야 합니다. 드라이버 업데이트에서 위에 있는 " 업데이트된 드라이버 소프트웨어 자동 검색 " 이라는 문구를 클릭해주셔서 진행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보통 윈도우 업데이트 후 충돌로 인해 인터넷 드라이버가 윈도우 업데이트시 동시에 진행이 되지 않아 식별되지 않은 네트워크 오류가 발생되는 오류 입니다. 만약 이 방법에서 업데이트 된 드라이버가 최신화 이미 되었다는 문구가 나오신다면 다른 방법을 접근을 해보셔야 합니다. 추가적으로 노트북 사용시 와이파이가 갑자기 안되었을 때 해주시면 해결되는 방법 중 하나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때는 네트워크 이름이 Ethernet 이 아닌 " Dual Band " 또는 " Wifi " 로 되어있으니 그걸로 업데이트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2. 인터넷 속성 옵션 변경 제어판에 네트워크 및 공유 센터로 들어가시면 엑세스 형식 인터넷 밑에 " 연결 : 이더넷 " 이라는 아이콘이 있을 겁니다. 저 아이콘은 반드시 컴퓨터에 유선연결이 되어 있어야만 뜨는 아이콘이며 와이파이가 연결되어셨으면 와이파이 아이콘으로 나오시니 이 점 혼동 없으시길 바라겠습니다. " 이더넷(파란색) " 으로 들어가주시면 되겠습니다.  " 이더넷 " 에 들어가시면 새로운 창으로  " 이더넷 상태 " 가 나오실텐데 사진 왼쪽부터 오른쪽처럼 진행해주시면 되겠습니다. 먼저 밑에 속성으로 들어가셔서 이더넷 속성 창에서 " 구성 " 을 눌러주시고 구성을 들어가시면 오른쪽 처럼  위 바에서 일반 옆에 있는 고급 탭으로 이동해주시면 됩니다. 고급 창에 들어오셨다면 이제 2가지만 " 비활성화(Disabled) " 로 변경을 해주시면 됩니다. 1. Large Send Offload v2 (IPv6) / 대형 전송 오프로드 v2 (IPv6) 2. TCP Checksum Offload (IPv6) / TCP 체크섬 오프로드 v2 (IPv6) 이 2개를 활성화에서 비활성화 (Disabled)로 변경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그 다음 확인을 눌러주시고  컴퓨터 다시시작을 해주시면 식별되지 않은 네트워크 오류는 해결이 되실 겁니다. 이 방법이 안되신다면 마지막으로 인터넷 드라이브를 삭제하고 새롭게 설치하는 방법도 있습니다. 3. 인터넷 드라이버 삭제 후 제조사에 맞는 드라이버 재설치 마지막 방법으로 인터넷 드라이브 삭제 후 재설치를 하는 방법입니다. 이 방법을 사용하실려면 1GB 이상의 USB 메모리와 인터넷 드라이버를 다운로드 받을 수 있는 피시방 또는 본인이 Wifi을 연결할 수 있는 노트북이 있어야만 가능한 방법입니다. 인터넷 드라이버 설치하기전에 컴퓨터의 메인보드 모델를 확인하셔야 되는데, 탐색창에 시스템 정보를 입력하시면 위 사진 처럼 시스템 정보라는 프로그램을 눌러주세요. 시스템 정보에 들어가시면 밑에 메인보드 제조업체 및 제품 이름이 나오게 되는데요. 위 정보를 토대로 LAN 드라이버를 다운로드 받아주시면 됩니다. 위 사진처럼 찾은 메인보드 제조사 사이트에 들어가셔서 맞는 칩셋 및 모델을 선택하시고 드라이버 지원창에 들어가 " LAN " 드라이버를 다운로드 해주시고 그걸 USB 메모리에 넣어주시면 됩니다. 윈도우11도 이런 방법으로 해결하시면 되겠습니다. 만약 이 방법대로도 안된다면,  LAN 케이블도 바꿔보시는 것을 추천드립니다. 만약 케이블도 바꿨는데도 동일한 현상이 나온다면 모뎀쪽이나 아니면 공유기쪽에서 인터넷을 받지 못하는 경우도 있으니, 위 3가지 방법이 다 안되신다면 자기가 사용하고 있는 통신사쪽에 연락하셔서 기사님을 부르시고 모뎀기를 검사해보셔야 됩니다. 여기까지 식별되지 않은 네트워크 오류 해결 방안을 정리해보았습니다. * 모든 사진은 Unsplash같은 무료사진 및 출처를 밝히고 사용하고 있습니다. * 제 티스토리 블로그에 방문해주셔서 구독을 눌러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