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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족 출신 주일대사와 연변 지도자 주덕해

<사진= 이미지는 연변대 총장을 지낸 주덕해>

역대 최장수인 9년 2개월(2010년 2월 취임)의 임기를 마친 청융화(程永華) 주일 중국대사 후임으로 쿵쉬안유(孔鉉佑,59) 중국 외교부 부부장이 부임한다.


# 9년 2개월 최장수 중국 주일대사
전임 청융화 대사의 9년 재임은 중일 관계가 그만큼 공고하다는 걸 의미한다. 7일 도쿄 뉴오타니 호텔에서 열린 환송연에는 이례적으로 아베 신조 총리, 후쿠다 야스오 전 총리 등 정재계의 인사 1000여 명이 참석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융화 대사는 이날 유창한 일본어로 “의견이 일치하지 않더라도 대화를 통해서 이해하려고 했다”며 중일관계의 중심에 섰던 자신의 노력을 피력했다. ᐅ전혀 풀릴 기미가 보이지 않는 한일 관계 ᐅ정권이 바뀔 때마다 수시로 교체되는 한국대사 자리와는 사뭇 대조적인 장면이다.


#조선족 출신 후임대사 쿵쉬안유
특이한 건, 청융화 후임 대사인 쿵쉬안유 부부장이 중국 흑룡강(黑龍江)성에서 태어난 조선족 출신이라는 것이다. 그는 1976년 고등학교 졸업 후 흑룡강성 삼림조사설계국의 노동자가 되었다. 1979년 상하이국제대학 일본어과에 입학, 1983년에는 외교 아카데미에 들어갔다.

1985년 6년간의 학업을 마친 쿵쉬안유는 오사카 중국총영사관으로 발령. 처음으로 해외 근무에 나섰다. 본격적인 외교관의 길로 접어든 것이다. 이후 ᐅ도쿄 중국대사관 공사(2005~2011) ᐅ베트남 주재 대사(2011~2014) ᐅ외교부 아시아 국장(2014~2015) ᐅ외교부 차관(2017) ᐅ한반도 문제를 담당하는 특별사무대표 겸 외교부 부부장(현재)의 경력을 거쳤다.

일본 아사히신문 중국판은 지난 달 4일 “쿵쉬안유가 15년 간 일본에서 경력을 쌓았다”고 보도했다. ‘일본통’으로 평가받는 이유이기도 하다. 쿵쉬안유는 2018년 1월에는 제13차 중국인민정치협의회 전국위원회위원으로 선출되기도 했다.

중국국제문제연구소의 루안 종 쩌(Ruan zong ze) 부회장은 쿵쉬안유에 대해 “오랫동안 아시아 문제를 다루어 왔기 때문에 관련 문제에 정통하다”고 평가했다.(중국 CCTV)


# 중국 당서기가 존경한 '연변 지도자' 주덕해
중국 조선족 출신 정치인 얘기를 좀 더 해보자면, 주덕해(朱德海: 1911~1972)를 빼 놓을 수 없다. 그는 연변 조선자치주 초대 주석과 연변대학교 총장을 지낸 인물이다. 연변대학교 뒷산에는 그의 기념비가 세워져 있는데, 1984년 호요방(胡耀邦: 후야오방) 당시 중국공산당 총서기가 글을 쓰고 제작을 지시했다는 점에서 주덕해의 위상을 짐작할 수 있다.

본명이 오기섭인 주덕해의 원적(본적)은 함경북도 회령이다. 항일운동, 중국 공산당 가입, 러시아(소련) 유학을 거쳐 일제 패망 후 조선의용군 3지대 정치위원을 맡아 흑룡강성 일대에서 활약했다. 중국공산당 연변 지부 서기로 발령받은 것이 1949년의 일이다. 조선족 인재양성의 중요성을 깨닫고 1949년 3월 20일 ‘동북조선민족인민대학’을 열었다. 현재의 연변대학교다.

연변대 개교년인 1949년은 중국 역사에서 의미가 큰 날이다. 중국은 중화인민공화국 수립 날짜인 1949년 10월 1일을 건국일로 삼고 있다.

중국 정부는 주덕해의 요청에 따라 1952년 연변 조선족 민족자치구 설립을 비준했다. 흑룡강성과 같은 행정단위인 성(省)과 동급인 자치구의 탄생은 주덕해의 공로라는 것이 중국전문가들의 공통된 의견이다.

그런 주덕해는 문화대혁명 당시 ‘지방민족주의 분자’라는 죄명으로 박해를 받다가 1972년 세상을 떠났다.(‘중국의 숨은 보석 연변’, 도서출판 직지, 조현국 추이헝룽 공저 참고)


# 검색으로는 찾을 수 없는 ‘뿌리’
다시 쿵쉬안유 일본대사 이야기. 중국 외교부의 자료에는 쿵쉬안유의 외교 경력이 올라와 있다. 하지만 조선족이라는 것 외에는 ‘뿌리’에 대한 다른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검색 자료도 마찬가지였다.

재팬올은 쿵쉬안유의 조선족 관련 사항을 좀 더 알아보기 위해 한국의 한 대학에서 박사과정을 밟고 있는 중국인(한족)에게 문의했다. 좀 더 전문적인 검색이 가능하지 않을까해서다. 하지만 돌아온 대답은 ‘역시나’였다.

이 중국인은 “인터넷에서 중국 관련 자료를 다 뒤져봤지만 조선족이라는 사실 이외에 나온 게 없다”며 “그의 아버지나 가족 이야기도 전혀 찾을 수 없었다”고 말했다. 조선족 뿌리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중국 공무원의 특성쯤으로 받아 들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뿌리를 찾을 수는 없지만 조선족 출신의 중국 외교관이 주일대사를 맡게 됐다는 것은 한중일 외교관계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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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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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계 자본의 ‘먹잇감(일본 기업) 길들이기’?
> 히타치-도시바-소니 3사가 연합해 만든 재팬디스플레이 > 5년 연속 적자-자기자본비율 제로대-감원까지 결정 > 자본 투입 결정했던 '800억 엔' 중국계 자본은 늦어져 파산 직전이다.(5년 연속 적자) 곳간도 텅텅 비었다.(자기자본비율 0.9%) 직원들도 짐을 싸야 한다.(1000명 감원) 진두지휘하던 장수도 말에서 내렸다.(회장 과로로 퇴임) 온다던 ‘왕서방들’의 돈도 감감 무소식이다.(중국계 자본 투입 연기) 이런 기업이라면 앞으로 얼마나 버틸 수 있을까. 좀 낯선 이름인 ‘재팬디스플레이’(이하 JDI)라는 회사의 현주소다. JDI는 미국 애플사에 중소형 액정 패널을 제공하는 대기업으로, 점유율에서는 세계 최고다. 하지만 JDI는 애플 부진 영향과 수익성 악화가 겹치면서 사실상 링거를 꽂고 있는 상태다. # 히타치-도시바-소니 3사 연합체 일본 언론들이 JDI에 주목하는 이유는 ‘상징성’ 때문이다. JDI는 히타치, 도시바, 소니의 중소형 액정패널 사업을 통합해 2012년 4월 출범한 회사다. 3회사의 연합체라는 의미에서 ‘히노마루액정연합’(日の丸液晶連合)이라는 별칭이 붙었다. 일본 국가대표급 액정회사라는 것이다. 민관(국부) 펀드인 INCJ(구 산업혁신기구)가 2000억 엔의 자금을 출자하면서 국책기업의 성격도 띠고 있다. 그런 JDI가 5월 15일 3월기 결산(연결결산)을 발표했다. 니혼게이자이신문에 따르면, 이 회사의 최종 손익은 ‘1094억 엔 적자’였다. 5년 연속 적자에 자기자본비율은 0.9%(2018년 3월말 13.1%)로, 채무 초과 직전까지 떨어졌다. JDI는 이날 1000명 규모의 감원 계획도 함께 발표했다. 전체 직원의 20%가 조기퇴직을 하게 된 것이다. 또 경영재건을 지휘하다 과로로 입원, 요양 중이던 히가시이리키 노부히로(東入来信博, 70) 회장도 퇴임했다. # 800억 엔의 중국대만 연합 자본 투입 자금난에 허덕이던 JDI는 앞서 4월 긴급 처방책을 내놓았다. “800억 엔에 달하는 중국대만 연합 자본을 지원받아 그 산하로 들어간다”고 발표했던 것. 중국대만연합이 의결권의 49.82 %를 갖고 민관 펀드인 INCJ를 대신해 최대주주에 오르게 됐다. 아사히신문은 이와 관련 “‘일장기액정’으로 불리던 정부 주선의 국책기업이 적자를 벗어나지 못하고 중국자본 산하에서 재건을 하게 됐다”고 보도했다. 경제매체 비즈저널은 “중국대만연합 자본에 사실상 팔리게 되었다”(台中連合に事実上の“身売り”となった)고 보도했다. JDI가 자금을 수혈받기로 한 중국대만의 자본 실체는 어딜까. 3곳이다. 대만 전자부품 제조 업체 TPK 홀딩스(宸鴻光電科技)와 대만 금융대기업 부방(富邦)그룹 그리고 중국 최대의 자금운용사 가실기금관리(嘉実基金管理)그룹이다. JDI에 대한 자본 투입은 종전에 중국계로 넘어간 다음과 같은 일본 전자회사들과는 그 형태가 다르다. ᐅ샤프(대만 홍하이) ᐅ도시바의 백색가전(중국 메이디) ᐅ도시바의 PC부문(대만 홍하이) ᐅ파나소닉 자회사 산요전기 백색가전(중국 하이얼) ᐅ파이오니아(홍콩펀드) 모두 중국계 자본이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위 기업들은 중국, 대만, 홍콩 각각의 단독 자본에 넘어갔다. 반면, JDI엔 중국대만이 연합해 자금을 지원하고 있는 형태다. 지원을 발표하기 했지만, 관련 기관들이 지원 결정을 연기하면서 JDI는 애가 탈 수밖에 없는 실정이다. # 늦어지는 자본 수혈 연기 배경엔? 일각에선 ‘중국계 자본이 일본기업을 길들이는 것이 아니냐’는 해석도 조심스럽게 나오고 있다. 회사의 힘이 완전히 빠지고, 정부도 손을 떼는 순간까지 몰아가면 중국계 자본이 손쉽게 ‘접수’할 수 있다는 것이다. 하지만 중국의 성향과 달리, 대만은 일본에 우호적인 측면이 있다. 다른 성격의 두 중국계 자본이 섞이면서 여러 추측을 낳고 있다는 말도 나온다. 아사히신문은 “JDI의 자산을 평가 한 결과, 경영 상황이 예상보다 더 악화돼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며 “중국대만 연합이 새로운 출자자를 추가로 요구하고 있는 것으로 밝혀졌다”고 전했다 이번 JDI 사태에서 가장 중요한 건 따로 있다. 정부가 주선을 하고 보증까지 선 유력 기업이 파산 직전까지 몰린 이유가 뭐냐는 것이다. 닛케이 기자와 투자펀드운용사 등에서 일했던 경제평론가 카야 케이이치(加谷 珪一)는 포털 익사이트재팬에 이렇게 기고했다. <액정패널 사업은 일본, 한국, 대만 업체들이 점유율 다툼을 하고 있었지만, 한국과 대만 메이커들이 가격 경쟁력을 강화했다. 그런데 일본 메이커들은 각사가 소규모 사업을 소유하는 상황이었으며, 가격 경쟁력 측면에서 한국과 대만에 뒤쳐지고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국부 펀드인 산업혁신기구가 출자하고, 각사의 사업을 통합해 출범한 것이 재팬디스플레이(JDI)다. 그러나 출범 초기부터 회사 사업에 대해 의문의 소리가 높았다. 가장 큰 관심사는 매출 대부분을 미국 애플 한 개사에 의존하는 기형적 사업 구조에 있다. 일본의 국책기업이 미국 기업 애플 한 개에 의존한다는 도식 자체가 상당한 위험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 좀 더 말하면, 액정패널이라는 것은, 이미 범용제품이라 가격 하락이 두드러진 분야였다. 기술력에 큰 차이가 없기 때문에 애플 등 완제품 제조업체들에게 관건은 ‘가격’이었다. 실제로 JDI는 샤프(대만 홍하이 소유)와 끝없는 고객 쟁탈전을 펼쳤고, 스스로 실적을 악화시키는 상황을 초래했다.> 카야 케이이치 평론가의 분석에서 한국기업들은 어떤 교훈을 얻을 수 있을까. 핑계 없는 무덤 없고, 이유 없는 실패 없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89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서울 성수동 블루보틀과 도쿄 롯본기 블루보틀
<사진= 서울 성수동의 블루보틀 커피 전문점> #서울 성수동의 블루보틀 ‘그 호들갑스런 대열’에 합류해 보기로 했다. ‘그 비싼 커피를 굳이’ 마시러 갔다. 몇 시간 줄을 서서 기다릴 인내심은 노(NO). 주말과 휴일은 피해 평일로 택했다. 애플 신상품을 ‘득템’하기 위해 밤을 새거나 장시간 기다리는 장면은 종종 들었다. 하지만 기껏 커피 한 잔인데. 설마 그런 일이 벌어질까 싶었다. 아니었다. 오픈(3일)이후 그런 광경은 내내 벌어졌다. ‘커피계의 애플’. 스페셜커피 블루보틀 매장으로 찾아간 건, 8일 오전 8시. 오픈 시간에 맞춰 지하철 뚝섬역에 내렸다. 역에서 불과 50미터. 큰 붉은 벽돌 건물보다 무리지은 사람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아, 저기구나.’ 입구에 들어서자 50여 명이 4겹 줄을 서서 대기 중. 건물 내부는 특별할 게 없다. 성수동 특유의 거친 콘크리트 벽과 천장. 1층에서 대기하고 계단을 통해 지하1층 매장으로 내려갔다. 커피 데스크에 핸드드립기가 6개. 바리스타가 순서대로 즉석에서 ‘핸드드립’ 중. 아메리카노 기본(블렌드)을 주문했다. 5000원. 스타벅스의 숏사이즈(3600원) 톨사이즈(4100원)와 비교하면 꽤 비싼 편. ‘5’자가 주는 부담감도 크다. 평일임에도 꼬박 한 시간을 기다려 정확히 9시에 커피 한잔을 손에 들었다. ‘득템’. 커피 양은 스타벅스 숏사이즈의 절반. 한 눈에 봐도 끈적할 정도로 진하다.(재팬올의 정희선 객원기자는 ‘한약’같다고 했다.) 맛을 잠시 음미하는 사이, 누가 불쑥 말을 걸었다. 커피 취재를 온 잡지매체의 기자란다. 연배 어린 후배기자에게 인터뷰 당하는 영광을 누렸다. 블루보틀 맛에 대한 평가는 짧은 인터뷰 내용으로 대신한다. “(‘커피 맛이 어떠세요’라는 질문에) 매일 스타벅스 커피 한 잔을 마신다. ‘스벅마니아’는 아니지만 습관처럼 한 잔씩. 스타벅스와는 확실히 차별화되는 맛이다. 쌉싸름한 맛이 나쁘지 않다. 와인으로 치자면, 샤르도네(화이트 와인용 포도 품종) 같은 적절한 산미가 느껴진다. 가격이 부담스럽지만 줄 서는 일만 없다면 다시 찾을 것 같다.” “(‘블루보틀 커피가 유명한 건 왜일까요’라는 질문에) 성수동에 1호점을 낼 것이라는 입소문을 낸 게 오래됐다. 금방 매장을 열 수도 있었겠지만 상당히 뜸을 들였다. 그러면서 커피팬들의 호기심을 ‘충분히’ 유발시켰다. 파란 병 로고에는 굳이 블루보틀이라는 이름을 적지 않았다. ‘파란 병=블루보틀’이라는 인식이 커피 팬들을 줄 세웠다고 본다.” 30분 동안 매장을 지켜본 후 나왔다. 밖엔 여전히 줄이 줄어들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놀랍다. 더 놀라운 건 한 시간 뒤. 블루보틀 잔향이 혀에 그때까지 머물렀다. 오전 11시, 혀를 헹구러 스타벅스로 향했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편집인> (아래는 도쿄에 거주하는 정희선 객원기자의 롯본기 블루보틀 ‘맛 평가기’입니다. ) <사진= 도쿄 롯본기의 블루보틀 커피 전문점.> #도쿄 롯본기의 블루보틀 <정희선 객원기자=일본기업 분석 애널리스트>커피 맛은 호불호가 강하다. 개인적 취향에 따라 선호가 갈리는 게 일반적이지만, 내 생각에 블루보틀은 더하다. 내 경우, 유학 때문에 몇 년 미국에서 지냈지만 커피를 델리키트하게 느낄 정도의 ‘혀’는 갖고 있지 않다. 다시 ‘커피 대국’ 일본에 와서 몇 년 째 살고 있지만, 여전히 ‘커피 혀’는 그대로다. 내 혀보다는 커피 맛을 잘 아는 친구의 말을 빌려 블루보틀을 평가하는 게 나을 듯하다. 그 친구는 쓴맛과 신맛이 강한 커피를 좋아한다. 하지만 신맛이 너무 강한 건 내 취향이 아니다. 다만 내 ‘혀’는 이렇게 내게 속삭인다. “블루보틀은 확실히 스타벅스 커피보다 신맛이 강해~” 나만큼 커피 취향이 ‘고급지지 못한’ 내 막내동생은 한 술 더 뜬다. 블루보틀을 마시고 나선 심지어 “한약 먹는 것 같다”는 궤변을 늘어 놓았다. 이런 ‘한약 같은 커피’를 마시러 일부러 일본으로 찾아오는 한국 커피 마니아들이 많다. 여기서 또 취향이 갈린다. 한국 사람들은 오리지널 블루보틀이 아닌 우유가 들어간 달달한 라떼를 많이 주문한다고 한다. 당분간은 한국인들의 발길이 계속 이어질 것 같다. 블루보틀은 현재 미국(57점)과 일본(11점)에 68개 매장을 운영 중이다. 일본에선 도쿄에 9곳, 교토에 1곳, 고베에 1곳이 있다. 해외진출에 나선 블루보틀이 (한국 제외)오직 일본에만 매장을 낸 이유는 뭘까. 또 유독 도쿄에 몰려있는 건 왜 일까. 일단 ᐅ일본이 ‘커피 대국’이라는 점 ᐅ도쿄 사람들의 취향이 고급화 되어 있는 점이 작용했을 것이다. 창업자의 개인적 취향도 반영됐다. 클라리넷 연주가였던 창업자 제임스 프리맨(James Freeman)은 한 인터뷰에서 “일본의 오래된 커피 가게들로부터 깊은 영감을 받았다”며 “특히 도쿄는 더 그러하다”(I'm very deeply inspired by the old-fashioned coffee shops of Japan, and in Tokyo particularly)고 말한 바 있다. 도쿄의 번화가 긴자 뒷 골목에는 아직도 레트로(retro: 복고풍) 느낌이 나는 오래된 커피숍들이 많다. 이들 가게 대부분은 한 잔 한 잔 정성스럽게 핸드드립 방식으로 고객 앞에서 커피를 내려준다. 제임스 프리맨이 이런 분위기에 반했다는 것이다. 그럼, 제임스 프리맨은 처음에 어떻게 블루보틀 커피를 만들게 됐을까. 왜 굳이 블루보틀이란 이름일까. 여기서 커피 역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1683년 유럽 일대를 점령하고 있던 오스만제국의 터키군이 빈(비엔나)에 도착했다. 적군에 둘러싸인 상황에서 포위망을 뚫고 인근 폴란드에 도움을 요청할 사람이 필요했다. 그때 터키어와 아랍어를 할 수 있는 ‘프란츠 게오르그 코루시츠키’라는 사람이 나섰다. 그는 위기를 극복하고 폴란드 원군을 요청하는데 성공했다. 터키군이 물자를 남겨두고 퇴각을 했는데, 그 더미에서 콩 봉지들이 발견됐다. 처음에는 낙타의 먹이인줄 알았지만, 아랍에 살던 경험이 있던 프란츠 게오르그 코루시츠키는 그게 커피 콩이라는 걸 알아챘다. 그는 원군 요청 포상금으로 그 커피 콩을 매입, 중부 유럽 최초의 커피 하우스 ‘블루보틀’(The Blue Bottle)을 개업했다. 비엔나 커피 문화의 출발이었다. 그 319년 후인 2002년, 클라리넷 연주가 제임스 프리맨이 샌프란시스코 인근 오클랜드에 커피 가게를 열었다. 그는 비엔나를 구한 프란츠 게오르그 코루시츠키에게 경의를 표한다는 차원에서 가게 이름을 ‘블루보틀’이라고 지었다. 제임스 프리맨은 평소 직접 원두를 구입, 매일매일 로스팅해 커피를 즐길 정도로 커피광이었다. 블루보틀이 유명하게 된 건, 그가 볶은지 24시간 이내의 신선한 커피원두를 소비자들에게 제공하면서다. 입소문이 나면서 블루보틀 커피는 유명세를 타게 됐다. 비교적 최근인 2017년, 네슬레가 4억2500만달러(약 4500억원)에 블루보틀의 지분 68%를 인수한 것으로 전해졌다. 블루보틀 커피를 흔히 ‘제 3의 물결 커피’ (Third wave coffee)의 시작이라고 말한다. 이건 또 무슨 말일까. ‘제 1의 물결 커피’(First wave Coffee)는 1990년대 이전의 베이커리에서 빵과 함께 파는 커피, 혹은 개인이 공간을 임대하여 파는 형태를 지칭한다. 커피의 퀄리티에 주목하기 보다는 1~2달러 정도의 저렴한 가격에 커피를 제공하였다. 1990년 이후, 우리가 잘 아는 스타벅스가 등장하면서 ‘제2의 물결 커피’(Second wave coffee) 시장이 열렸다. 집, 직장이 아닌 제3의 공간에서 퀄리티 높은 커피를 제공했다. 요즘의 가장 흔한 커피 전문점 형태다. 그러다 2010년 이후, 미국 서부의 샌프란시스코를 중심으로 드디어 ‘제 3의 물결 커피’(Third wave Coffee)가 시작 되었다. 대표적인 가게가 블루보틀(Blue bottle), 필즈 커피(Philz coffee), 스텀프타운(Stumptown) 등 이다. ‘제 3의 물결 커피’의 특징은 스타벅스 보다 훨씬 좋은 원두를 사용하며, 차별화된 로스팅 기법을 도입하여 기존의 커피와 차별화된 맛을 제공하다는 것. 대부분의 ‘제 3의 물결 커피’ 전문점들은 1~2분 이내에 커피를 내리기 보다, 고객 한 사람 한 사람의 니즈에 맞춰 커피를 만들어 준다. 핸드드립으로 시간과 정성을 들여 고객이 보는 앞에서 맛깔나게 커피를 내려주는 것이다. 획일화된 커피 맛에 지친 미국 소비자들은 새로운 방식으로 제공되는 커피에 열광하기 시작했고, ‘제 3의 물결 커피’는 서부를 시작으로 미국 전역으로 확대되는 중이다. ‘제 3의 물결 커피’는 빠르게 세력을 확장하지 않고, 성장보다 퀄리티에 집중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제 3의 물결 커피’ 중에 해외진출을 한 브랜드는 블루보틀이 유일하다. 이상이 ‘한약 같은 커피’ 블루보틀의 유래와 성장기에 대한 내용이다.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78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공자는 중국사람이 아니다?
왼쪽 할배가 공자 직계후손 공덕성 아기안고있는 아재가 손자임   대대로 중국에서 공자의 직계후손이 태어나는날은 도시의 경사였고 공자탄신일은 정부에서 고위관리를 보내서 행사를 같이할정도로 큰 행사였음 심지어 오랑캐가 집권했던 청나라때도 지켜진 국룰이었음. 근데 알다시피 마오~가 국공내전에서 이기게됨.  장제스가 대만으로 대피하면서 온갖문화재 바리바리 싸들고 가면서 공자의 후손도 지켜야한다고 같이 데려감.   그리고 다들 아는 '문화대혁명'이 터짐. 묘를 파헤치고 모든 서적을 불태웠으며 시체까지 파내서 부관참시함 미처 대피하지 못한 공자의 방계 후손들은 '나는 반동분자입니다' 라는 팻말을 들고 가두행진을 해야했음. 심지어 공자(孔子)의 본명인 공구( 孔丘)의 본명인 구( 丘)를 개 구( 狗)자로 바꿔서 공구( 孔狗) 로 부르게 했음.   뭔말인지 잘 모르겠으면 퇴계 이황의 황 자를 누렁이라고 한거랑 똑같은거임   대만으로 넘어간 공덕성은 그소식을 듣고 큰 충격을 받았고, 다시는 중국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결심함. 이후 중국정부는 지들이 했던 뿅뿅짓으로 잃어버린 정통성을 찾고자 돈이건 뭐건 전부 지원해줄테니 공덕성을 다시 모셔오라고했고, 중국에 남아있던 공자의 방계 후손들이 공부가주(공자의 고향 산둥성에서 생산되는 '공자의 술'이란 별칭을 가진 술)를 들고 찾아왔지만,   '나는 이런 술 모른다' 라고하면서 술병을 던져버림.   중국정부에서 중국에 남아있던 공덕성의 누나를 포섭해서 중국으로 데려오려고 하였지만 끝끝내 중국땅은 안밟고 대만에서 만남. 공자가 중국인이 아니다 라는건 내가 지어낸 말이 아님. 실제 문화대혁명때 홍위병이 공자를 부정함   '미식을 없애려면 요리사를 죽이고 유교를 없애려면 공자를 죽이고 불교를 없애려면 부처님을 죽여라' 마오~의 지시였음.   공덕성과 공자의 직계들은 현재까지도 대만에서 종신공무원으로 공자의 제사를 지내고 있음. 공덕성은 2008년에 사망했는데, 사망하고서도 절대로 중국 공묘에는 묻히지 않겠다고해서 공묘에 묻히지 않은 3인의 공씨 후손이 되었음. 국가가 스스로 부정하고 후손에게서 외면당한 중국은 공자의 나라가 아님. 공자의 나라는 엄연히 '대만' 재밌는건 현재 중국어시험 HSK를 주관하는 기관 이름이 Confucius Institute, 즉 공자학원인데, 세계 국가들로부터 이 공자학원이 빠꾸먹고있음. 왜냐?   중국정부 이 미'친놈들이 공자 이름건 학원으로 스파이짓이랑 중공 선전을 하고있었음 부관참시도 이런 부관참시가 없어요 아주 그래서 정부에서 뜨끔해서 손뗀다고 뉴스에 떴는데 설마 진짜로 손을떼겠어?   결론은 지금 산동에 공자 후손이란 사람들은 죄다 방계 혹은 공부가주 술팔이들임. 진짜 직계는 대만에서 종신공무원중. 공자는 중국, 아니 대만사람이고, 한복은 우리나라꺼죠. https://www.vingle.net/posts/1773647
일본이 백제 계승했다는 썰.jpg
정확히는 지들도 모르게 계승한.. 아니 아예 뿌리를 뒀다는 가설 선요약) 1. 삼국 시대 당시 열도는 지금처럼 한 나라가 아니라 여러 소국이었음. 2. 소국 중 대장은 왜(와)였고 소국 중엔 일본이라는 곳도 있었는데 일본이라는 말은 백제의 별칭이었으며 열도에 있던 일본도 백제에 기원을 둔 곳으로 추정, 아예 같은 나라였을 수도 있고 (본점 백제인 프렌차이즈 느낌,,) 3. 백제 멸망 후 백제인들이 열도의 소국 중 신하?혹은 분점이던 일본으로 건너가서 나라 기틀을 다짐 4. 그 무렵 왜도 나라 이름을 일본으로 바꿨는데 이건 뭔 소리냐 소국 중 하나던 일본, 즉 백제가 왜를 합병한듯. 이후로 점잠 세력이 카져서 지금의 열도 통일한 일본이라는 국가가 됐을거라는 것 - 의자왕을 당나라에 팔아넘긴 예식진 예식진의 형 예군의 묘 에는 이런 묘비 명이있다. 이에 대해 나라현대학의 도노 하루유키(東野治之) 교수는 첫째, '부상'은 '일본'을 가리키는 명칭이고 둘째, 다른 나라는 다 빗대어 말하는데 일본만 국명을 말하는 것은 부자연스럽다는 이유를 들어, '일본이라는 단어'는 '백제'를 가리킨다고 주장했다. 즉, 문구 내용 중 백제는 일본으로, 일본은 부상으로 표기했다는 것. #. 또한 왜국이 부상으로 표현된 것과는 달리 '일본이라는 단어'는 '해좌(海左)', '영동(瀛東)' 등의 단어를 통해 별도로 나타냈다고 주장하였다. 도노 교수는 풍곡을 고구려, 반도를 신라로 비정하면서, 묘지명에 기록된 당시 백제, 고구려, 신라 등 중국의 주변 나라는 국호를 쓰지 않고 '부상·풍곡·반도' 등 자연환경적 특징에 근거한 은유적 명칭을 썼는데, 유독 일본만 공식 국호를 썼을리 없다는 논지다. 묘지명의 ‘일본’은 중국에서 볼 때 ‘해가 뜨는 곳’이라는 뜻으로 곧 백제를 가리킨다는 것이다. 이렇게 예군의 묘지에는 동방을 지칭하는 많은 용어와 함께 ‘일본’이 사용되고 있지만, 정작 동 시기에 사용되던 국호는 하나도 기록돼 있지 않다 의자왕이 항복한건 660 년이지만. 부여풍이 이어받아 3년동안 계속 저항 운동을 하였고 백제가 완전 멸망한거 663년 으로 보기도 한다. 일본국은 왜국의 별종이다. 혹은 일본은 옛날에 작은 나라였는데, 왜국 땅을 합병하였다고 말한다. -구당서 동이열전 중국 기록을 보면 일본과 왜국은 연속성은 있지만 엄연히 별개의 존재로 지칭한다. 그리고 백제가 멸망후 몇년후 왜국 국호를 갑작스레 일본으로 바꾼다. 그리고 재밌는건 백제가 멸망하고 무려 20만명 이상이나 일본으로 이주한다. 당시 인구로 20만명이면 거이 인구의 1/10 가까이 되는 어마한 인구고 즉 이토록 일본으로 이주한건 같은 영토 비슷한 소속감과 그곳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불가능하다 더욱이 그 이민자들은 받아주는 일본도 자신들과 같은 소속감 뭔가가 있으니 받아주는게 말이된다. 과연 이게 다 우연의 일치인가. 출처
한국 찾은 중국 관광객 ‘3007달러’ 쓴다
중국 관광객 소비 아시아 1위‧전세계 4위 '한국', 모바일 결제 가능하면 ‘더 쇼핑할 의향 있다’ http://www.cncnews.co.kr/mobile/article.html?no=3143 [CNC NEWS=차성준 기자] 방한 중국인 관광객이 한국에서 지출하는 경비는 1인당 평균 3007달러로 조사됐다. 알리페이가 리서치 전문기업 닐슨과 공동 발표한 ‘2017 중국인 관광객 해외 소비 및 지불 행태 보고서’의 분석 결과다. 이 보고서는 중국인 해외 여행객 2009명을 대상으로 해외여행 소비성향과 지불행태를 알아봤고 100명의 한국인과 5개국 613명의 해외 여행객을 포함해 국적별 소비성향도 비교했다.  보고서에 따르면 한국은 2017년에 중국인이 5번째로 많이 찾은 여행국이다. 국내 여행지 중에서도 제주도, 서울타워, 동대문, 경복궁을 꼽았다. 한국에서는 면세점 쇼핑을 가장 선호했고 뷰티샵과 약국의 구매도 높은 편이었다. 중국인 해외 관광객은 해외 현지에서 1인 평균 3064달러를 지출했는데 한국에서는 1인당 3007달러를 소비했다. 아시아에서 1위를 차지했고 전체 여행국 중 4위를 기록했다.  중국인 관광객이 가장 많이 소비하는 용도는 762달러를 기록한 쇼핑(25%)이었다. 이어 숙박 19%, 식음료 16% 등의 순이었다. 반면 타 국적 여행객들은 숙박(29%) 경비가 가장 많았고, 식음료 18%, 쇼핑 15%를 사용했다. 중국인 해외 여행객보다 상대적으로 쇼핑 지출이 적었다. 특히, 중국인은 해외에서도 알리페이 결제 방식을 선호하고 있는 결과가 눈에 띈다. 중국 관광객 65%가 해외 현지에서 모바일로 결제했는데 11%에 그친 타 국적 관광객보다 월등히 높다. 중국 내 보편화된 모바일 결제에 익숙하기 때문이었다.  해외 모바일 결제에서도 쇼핑이 62%로 두각을 보였고 해외 쇼핑에서 가격보다는 ‘결제 수단’을 더 고려했다. 이어 식음료(62%), 관광지 입장권(58%) 구매에 모바일 결제를 사용했다.  설문에 참여한 중국인 중 99%가 ‘알리페이를 사용하고 있다’고 응답했고 이 중 63%는 해외에서 알리페이로 결제한 경험이 있었다. 또 ‘해외에서 모바일 결제가 가능하다면 더 많이 쇼핑하겠다’고 91%나 답했다.   정형권 알리페이코리아 대표는 “중국인 관광객 소비를 늘리려면 이들이 한국에서 찾는 상품과 서비스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며 “이번 공동 보고서에서 중국 관광객들이 해외에서도 선호하는 지불방식은 모바일 결제로 드러났다. 국내에 더 많은 관광 및 유통 채널에서 알리페이 도입과 사용이 늘 것으로 기대한다”고 밝혔다.
[펌] 냉혹한 기적의 소나무
옛날에 일본에서 도호쿠 대지진 일어나서 개작살나고 후쿠시마 터진 거 기억나냐 존나 난리도 아니었는데 암튼 인간만 죽은게 아니라 쓰나미 몰려오면서 해안가에 심어놨던 소나무들도 다 개작살이 났거든 근데 우리의 일본인들이 나중에 사고현장 찾아가보니까 굉장한 게 하나 있었음 7만 그루가 넘게 서있었던 소나무가 다 쓸려나갔는데 딱 한 그루만 살아남아서 서있던 거임. 이 소나무는 약 250년을 살아온 높이 30m의 존나 큰 소나무였음. 그걸 본 갓본인들은 꺼이꺼이 눈물을 흘리면서 혼또니 스고이다네를 외치면서 이것은 꺾이지 않는 갓본인을 상징한다면서 기적의 소나무라고 부르기 시작했음 뭐 다 떠내려갔는데 혼자 서있는 걸 보면 좀 감격스러울만도 한데 그 뒤가 참 일본스럽다 일본인들이 이 기적의 소나무를 랜드마크로 만들어야 한다면서 야단법석을 떨기 시작한거임. 지역의 마스코트를 만들어야 한다느니 아이돌로 만들어야 한다느니 심지어는 이 나무새끼를 주인공으로 연극이랑 드라마도 만들어졌음. 근데 그렇게 야단법석을 떠는 와중에 문제가 생겼다. 학자들이 소나무를 다시 찾아가보니 이 새끼 이미 뒤진 상태인거임 꺾이지 않은 갓본인의 정신(이미 뒤짐) 원인이 뭐였냐면 쓰나미에 뿌러지지만 않았을 뿐이지 뿌리에 바닷물이 다 들어가서 전부 썩어버린게 원인이었다 즉 처음부터 서있기만 했지 뒤진 상태였다는 거지 존나 뻘쭘해진 상황이었다 뿌리가 썩어서 고목이 된 상태인만큼 언제 뿌러져 뒤질지 모르는 나무를 가지고 그렇게 야단법석을 떨었다니 이대로라면 관광자원도 뭣도 못하게 생겼고 뭣보다 기적의 소나무라 치켜세워놓고 뒤져버린지라 좀 쪽팔린 상황이니 일본인들은 서로 눈치를 보다가 해결책을 도출하는데 죽었으면 다시 살리면 되는 거 아니냐는 참 어메이징한 방법이었다 과연 바이오하자드를 만든 나라답다 그리하여 기적의 소나무를 부활시키려고 부두술사들이 불려오게 된다 뭐 영양액이라도 듬뿍 먹여주고 그랬을거 같지? 갓본인들은 그렇게 시시한 방법을 쓰지 않았다 주저없이 소나무를 갈기갈기 찢어버렸음 잎 하나 하나 가지 하나하나 하나도 남기지 않고 전부 잘라버린 다음 줄기까지 꺾어  버렸다 그런 다음 가지, 잎을 전부 새로 만들고 개작살낸 줄기 안에는 철근을 심어서 좀비 소나무를 만들어버렸다. 짤 보면 알겠지만 걍 겉만 나무처럼 보이는 거지 속은 그냥 철근이다. 꺾이지 않는 갓본인의 정신(터미네이터) 그게 이 결과물이다 원본은 줄기 빼곤 거의 남아있지도 않음. 그나마도 안에 철근 심어놓고 겉은 방부제에 절여놓은 거고 가지랑 잎은 원래 있던 건 다 짤라버리고 방부제 듬뿍친 가짜로 갈아치운 상태다 이것만 봐도 상당히 병신같긴한데 문제는 여기 들어간 예산이다 높이 30m짜리 소나무를 통째로 좀비로 만드는데 들어간 비용이 싸진 않겠지? 약 1억 5천만엔이 들어갔다. 참고로 2019년 지금까지도 도호쿠 대지진으로 집 없이 살고 있는 피난민들이 5만명이 넘는데 이딴데 예산을 10억을 넘게 쏟아부었다. 뭐 의미가 있는건 알겠는데 전후과정이 존나게 바뀌지 않았나 싶은데 뭐 그러거나 말거나 여전히 일본은 이 소나무의 복제품, 소나무 파편, 소나무가 그려진 동전 등을 신나게 관광상품으로 팔아먹고 있다 꺾이지 않는 갓본인의 정신 스고이 [출처 : 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칸 그랑프리 일본 여배우와 한국의 봉준호
<사진= 봉준호 감독의 '마더' 시나리오 콘티. 봉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만화같은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시나리오보드집 '마더이야기'(마음산책) 캡쳐> 1954년 칸 그랑프리 ‘지옥문’의 여배우 사망 #. 2주 전인 5월 12일, 일본에서 한 원로 여배우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쿄 마치코(京マチ子), 95세였다. 그녀는 1954년 5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 7회 칸국제영화제의 ‘히로인’이었다. 당시 58세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 감독이 ‘지옥문’(地獄門)이라는 작품으로 그랑프리(지금의 황금종려상)를 거머쥐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이가 바로 쿄 마치코다. 1950년대 초, 일본영화는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성과를 올리던 시기였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보다 앞선 1951년 ‘일본 영화의 천황’으로 불리던 구로사와 아키라(黒沢明:1910~1998) 감독이 ‘라쇼몽’(羅生門)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의 히로인 역시 쿄 마치코였다. 출연한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잇달아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그녀는 ‘그랑프리 여배우’(グランプリ女優)라고 별칭을 얻었다. 오사카쇼치쿠(松竹)소녀가극단의 댄서를 거쳐 영화사 다이에(大映)에 들어간 쿄 마치코는 당대에 ‘다이에 간판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큰 주목을 받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그녀는 장수 축복도 누렸다. 1924년생인 그녀는 일본왕의 치세기간으로 보면, 네 시대(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를 살다 갔다. 일본 언론들은 “쇼와, 헤이세이 시대에 대활약했던 배우가 레이와(令和) 원년에 천국으로 떠났다”며 그녀를 추모했다. <사진= 1954년 아시아 최초로 칸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 '지옥문'. 여배우는 5월 12일 사망한 쿄 마치코.> 여장 역 맡던 배우가 칸에선 감독으로 그랑프리 #. 쿄 마치코를 배우로 기용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1896~1982)는 ‘아시아 최초 칸영화제 그랑프리 감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감독이 닛카쓰 무코지마 스튜디오에서 여자 역을 연기하는 온나가타(女形: ‘오야마’라고도 부른다)로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온나가타 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프리랜서 감독으로 변신했다. 이후 독립프로덕션(衣笠映画聯盟)을 세운 그는 소설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도움을 받아 ‘미친 듯이 써 내려간 글’(狂つた一頁, 1926년)을 연출했다. 그런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이 있었다. 1928년 만든 ‘십자로’(十字路)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는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2년 동안 독일에 머물렀는데, 영화는 유럽 극장가에서 공개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명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賞)으로 이어졌다. 1953년 연출한 ‘지옥문’이 이듬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쥔 것이다. 아시아 감독 최초였다. 일본은 칸 황금종려상 다섯 차례 수상 #. 일본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작품 ‘지옥문’을 필두로 4차례 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하지만 두 번 째 수상까지는 기간이 길었다. 26년이 지난 1980년에야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카케무샤’로 영예를 안았다. 이어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1926~2006) 감독이 1983년(‘나라아먀 부시코’)과 1997년(‘우나기’) 2번이나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21년이 지난 2018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이라는 작품으로 재차 명성을 이었다. 베니스, 베를린과 달리 칸은 ‘비즈니스 시장’ #. 칸영화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1회가 개최됐다. 영화제로는 1932년부터 시작된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역사가 더 길다. 하지만 베니스영화제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하에서 운영되면서 초기에는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1951년 출발한 베를린영화제는 3대 영화제 중 역사가 가장 짧다 칸영화제가 베니스, 베를린영화제와 크게 다른 점은 ‘비즈니스 시장’이라는 데 있다. 영화제이면서 ‘영화 시장(박람회)’인 것. 세계 각국의 감독과 배우들은 물론, 바이어와 배급사들이 매년 5월 칸으로 몰려든다. 칸에서 수상을 하면 현지에서 곧바로 판매가 이뤄지는데, 좋은 상을 받을수록 그만큼 판매가가 더 높아진다. 이번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예외는 아니다. 평단의 최고 평점에 최고상까지 거머쥐면서 전세계 192개국에 선판매 됐다. 종전의 기록(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176개국)을 넘어선 역대 한국영화 최다판매다. <사진= 봉준호 감독의 콘티> 영화 시작 26년 만에 칸을 사로잡았다 #. 1969년생인 봉준호 감독은 나이 쉰 살에 마침내 칸을 접수했다. 대학시절 단편영화 ‘백색인’을 만든 게 1993년의 일이다.(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 영화를 만든 지 26년 만에 칸에서 인생 최고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장편영화로는 데뷔작 ‘플란더스의개’(2000년)를 필두로 이번 ‘기생충’이 7번 째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에서 꾸준하게 수상을 했지만 봉준호 감독에게 칸의 문턱은 높았다. 그가 칸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건 2006년. ‘괴물’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처음으로 초청을 받았다. 3년 뒤인 2009년엔 ‘마더’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다시 초청을 받았다. 봉 감독은 ‘마더’ 이후 10년 만에 칸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제치고 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봉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놉시스의 모든 신을 머리에 먼저 그려놓고, 마치 만화영화 그리듯 콘티를 만든다. 영화 ‘마더’의 스토리보드와 시나리오 집 ‘마더이야기’(마음산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독자들도 봉 감독의 콘티 두 장면을 감상해 보기 바란다.(사진) 봉 감독은 영화 만드는 의미에 대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도와 결과, 통제와 반항, 우연과 필연, 계산과 즉흥. 그 모든 대립항들이 오묘히 뒤섞여버린 수많은 순간들. 그것이 영화 만들기의 은밀한 흥분과 즐거움이 아닐까.> 한국영화 탄생 100년을 맞는 해다. 봉준호 감독의 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 또 축하한다. 아울러 2주 전 세상을 떠난 일본 여배우 쿄 마치코를 추모한다. 쿄 마치쿄와 봉준호, 칸이 두고 두고 기억할 재인(才人)들이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