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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프트뱅크vs 라쿠텐...차량공유 시장의 '돈줄'


손정의의 소프트뱅크는 우버(Uber)의 최대주주
우버 라이벌 리프트(Lyft)의 최대주주는 라쿠텐
일본 이동통신시장 이어 차량공유 시장 대리전

세계 최대 차량호출 서비스업체 우버(Uber). 그 우버를 쫒아가는 라이벌 리프트(Lyft). 두 회사는 출자 면에서 공통점이 하나 있다. 회사 형태는 글로벌이지만 중심 돈줄이 ‘일본’이라는 것.


우버의 최대주주는 손정의 회장이 이끄는 소프트뱅크로, 지분 15%을 갖고 있다. 리프트는 우버(2008년) 보다 4년 늦은 2012년 로건 그린(최고경영자,35)과 존 짐머(사장,34)가 공동 창업했다. 대학 캠퍼스를 이동하는 카풀이 모델이다. 당시 로건 그린은 다른 도시의 대학에 다니는 여자 친구를 만나기 위해 차를 얻어 탔던 경험에서 사업 아이디어를 얻었다고 한다.

차량 공유업체 2위 리프트는 그동안 우버에 가려 크게 조명받지 못했다. 우버가 소프트뱅크, 도요타 등 글로벌 기업들의 투자를 유치한 것과는 대조적으로 리프트는 돈을 끌어오는데 어려움을 겪었다.

그런 가운데 로건 그린과 존 짐머은 2015년 일본 전자상거래업체 라쿠텐(楽天)과 접촉했다. 이와 관련, 닛케이 아시안 리뷰(Nikkei Asian Review)는 “라쿠텐은 2015년 이래 리프트에 7억 달러를 투자했고 지분 13%를 보유하고 있다”(Rakuten invested $700 million in Lyft since 2015 and held a 13% stake)고 했다.(4월 1일자)


미키타니 히로시가 이끄는 라쿠텐이 리프트의 최대주주가 된 것이다. 지분 5%가 넘는 리프트의 주요 주주로는 ᐅ라쿠텐(13.1%) ᐅ제너럴모터스(7.8%) ᐅ피델리티(미국 자산운용사, 7.7%) ᐅ앤드리센 호로위츠(실리콘밸리 IT 벤처 투자사, 6.3%) ᐅ알파벳(구글 모회사, 5.3%) 등이 있다. 리프트에는 현재 150여 투자자(사)가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소프트뱅크와 라쿠텐이 우버와 리프트의 최대주주라는 점에서 손정의와 미키타니 히로시 회장은 우버와 라쿠텐을 앞세워 ‘차량공유 대리전’을 벌이고 있는 셈이다. 전자상거래 업체로 힘을 키운 라쿠텐은 이동통신업계에도 진출해 소프트뱅크, NTT도코모, KDDI와 함께 '빅4'를 형성하고 있다.


창업은 뒤졌지만, 기업공개는 리프트가 먼저 했다. 리프트는 3월 29일 기업공개(IPO)를 통해 뉴욕증시 나스닥에 상장했다. 첫날 주가는 공모가(주당 72달러)보다 8.74% 뛴 78.29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리프트의 시가총액은 222억 달러(약 25조원)로 추산된다.

상장 3일 뒤인 4월 2일 ‘비즈니스인사이더 재팬’은 “라쿠텐은 리프트의 주식 3140만주(13%) 가까이를 보유하고 있다”며 “그 가치는 26억 달러에 달한다”(楽天は3140万株近く、約13%を保有、その価値は26億ドル)고 전했다.



리프트의 성공적 상장으로 라쿠텐은 엄청난 이익을 얻게 됐다. 일본 영자매체 재팬투데이는 5월 10일 “리프트의 지분 이익이 반영돼 라쿠텐의 1분기 영업이익이 4배 뛰었다”고 보도했다.

반면, 우버는 주식시장 데뷔에서 주춤했다. 우버는 리프트 상장 40여 일 뒤인 5월 10일, 예상했던 주당 50달러보다 낮은 45달러의 공모가로 뉴욕증시에 상장했다. 리프트와 달리 첫 거래일에 우버는 공모가에서 7.62% 하락한 41.57달러로 거래를 마쳤다. 상장 시점 기준, 우버의 시가총액은 697억 달러로 평가됐다.

우버와 리프트의 주가 행진에 따라 소프트뱅크와 라쿠텐, 두 경영자의 희비가 엇갈리게 됐다. <김재현 기자>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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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에서 계속> 야쿠시마 여행의 묘미는 ‘숲 트레킹’이다. 그 숲을 제대로 보려면 야쿠스기랜드, 시라타니운스이계곡, 조몬스기 코스 등 세 가지를 다 보는 게 좋다. 야쿠스기랜드에서는 천천히 걸으면서 여유를, 애니메이션 ‘원령공주’(모노노케히메)의 배경지인 시라타니운스이계곡에서는 신비함을, 야쿠시마의 상징 조몬스기가 있는 코스에서는 웅장함을 느낄 수 있다. 야쿠시마를 두 번 방문하고서야 알았다. 세 코스가 제각각의 특징을 갖고 있다는 걸. 역시 비를 피해갈 순 없었다. 시라타니운스이계곡과 조몬스기 코스에선 비옷을 입은 채 우산을 들고 산을 올랐다. 물 먹은 나뭇뿌리에 미끄러지기라도 하면 끝장. 단단히 발 아래를 주시하며 걸었다. 시라타니운스이계곡은 녹색 숲을 즐기기엔 그만이었다. 세상에 그렇게 많은 이끼가 있다니 놀라울 뿐이었다. 야쿠시마를 찾는 사람들의 목적지는 조몬스기. 예전에는 7200살이라는 이야기도 나왔지만, 과학적 방법으로 실제 측정 해보니 이 할아버지 삼나무의 나이는 2700살 정도란다. 조몬스기를 찾았던 그날도 전망대엔 사람들로 북적였다. 이 신령스러운 삼나무를 쳐다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조몬스기 코스는 과거 벌채한 삼나무를 실어 나르던 철길을 2시간 정도 걸어야 도착할 수 있다. 왕복 4시간을 꼬박 걸어야 하는 셈. 야쿠스기랜드를 찾은 날은 비 대신 안개를 만났다. 몸은 희뿌연 안개에 젖고, 마음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젖었다. 그것도 충분히 흠뻑. 세 코스를 돌다보면 야쿠시마 원숭이, 사슴과 자주 마주친다. 이 섬에는 ‘사람 2만, 원숭이 2만, 사슴 2만’이라는 말이 있다. 그렇게 모두가 어울려 사는 섬이다. 지인이 민박집에 부탁해 여사장님의 소형차를 빌렸다. 그 차를 타고 이틀 동안 섬을 일주했다. 야쿠시마에 살았던 야마오 산세이라는 농부시인의 집도 방문했다. 그는 오래전 고인이 됐다. 지금은 그의 아내가 집을 지키고 있지만, 찾아간 날은 70세가 넘은 산세이의 남동생분이 안내를 해줬다. 야쿠시마, 철학, 자연 등에 대해 많은 책을 쓴 산세이의 서재에 들어서자 책 냄새가 코 끝으로 스며들었다. 오래된 흔적들의 냄새가 나쁘지 않았다. 주인 없는 서재를 둘러보며 한 개인의 위대함을 다시 느꼈다. 책상 위에 방명록이 있었다. 산세이의 남동생분이 기록을 남겨도 좋다고 했다. 짧게 몇 줄 적었다. 다음 방명록을 쓰는 한국인이 있다면 누군가 내 이름을 볼 것이다. 이 또한 보이지 않는 인연이 아닐까. 산세이 남동생분의 배웅을 받으며 골짜기를 내려왔다. 한 가지 물음을 안고. ‘우리는 어떤 삶을, 우리는 어떤 인연을 맺으며 살아야 하는 걸까.’ <4편에 계속>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이나모리 가즈오②/ 그가 경영세습을 안 한 이유
<1편에서 계속> 가고시마 대학에 수백억 원을 기부한(①편) 교세라의 이나모리 가즈오(稲盛和夫‧86) 명예회장은 세습 경영을 하지 않은 일본의 대표적인 경영자다. 그는 2005년 교세라의 경영을 전문경영인에게 맡기고 은퇴했다.(2010년 JAL 회생을 위해 경영 일선에 복귀하긴 했다) 그가 2세 세습을 하지 않은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이나모리 회장은 2013년 10월 18일, 주간아사히와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첫 번째 이유는 자녀를 딸만 뒀기 때문이다. 두 번째 이유는 교세라는 전 종업원의 행복을 추구하는 회사이지, 이나모리가(家)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세 번째 이유는 세습을 하더라도 잘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원문: 一つ目の理由は、子どもが娘だけだったからです。二つ目の理由は、京セラは全従業員の幸福を追求するための会社で、稲盛家のものではないからです。三つ目の理由は、世襲してもうまくいくわけがないと思ったからです。) 이나모리 회장은 딸만 셋 뒀다. 물론 딸과 사위들에게 경영권을 넘겨줄 수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하지 않았다. ‘종업원의 행복을 추구한다’는 그의 말은 경천애인(敬天愛人)이라는 교세라의 사시와 ‘교세라 철학’을 바탕으로 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자신의 책(‘회사는 어떻게 강해지는가’)에서도 세습에 대해 입장을 밝힌 바 있다. 다음과 같다. <내 경우에는 애초에 대물림 경영을 생각한 적도 없었고, 지금은 회사 자체가 사회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기 때문에 경영 세습을 생각할 수도 없습니다. 하지만 중소기업이라면, 가업으로서 세습이 되더라도 문제될 것은 없다고 생각합니다.>(‘회사는 어떻게 강해지는가’ 165쪽 인용, 김정환 옮김, 서돌출판사 2012) 경영 세습을 하지 않은 이유로 사회적 책임을 꼽은 것이다. 이나모리 회장은 평소에도 그런 책임을 외면하지 않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JAL(일본항공) 회생 건이다. 2010년 JAL은 2조 3000억 엔의 부채를 안고 있었다. 회생은 불가능해 보였고, 회생을 믿는 이들도 많지 않았다. 당시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와 마에하라 세이지 국토교통상 등이 삼고초려를 한 끝에 은퇴한 그를 모셔왔다. 이나모리 회장은 제안을 수락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일본항공이 그대로 도산한다면 일본 경제도 큰 영향을 받을 것이다. 일본 산업의 상징이기도 하고, 직원 수 만 명의 일자리와 관련된 일이기도 하다. 나는 늙어서 일주일에 3일만 시간을 낼 수 있으니 월급은 받지 않겠다.> 나이가 들었음에도 사회적 책임을 ‘나 몰라라’ 하지 않은 것이다. 실제로 그는 한 푼의 월급도 받지 않았다고 한다. 이나모리 회장은 1997년 65세가 되던 해, 교토에 있는 사찰 엔후쿠지(円福寺)로 출가하기도 했다. 승적(僧籍)의 법명은 다이와(大和)다. 그가 쓴 많은 경영서에 불교적 가치관이 빠지지 않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3편에 계속>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이재우 기자>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고교야구 고시엔과 오키나와 반환 운동
열도의 여름을 뜨겁게 달궜던 100년 역사의 ‘여름 고시엔 대회’가 막을 내렸다. 효고(兵庫)현 고시엔(甲子園)구장에서 열리는 이 대회는 경기장의 이름을 따 고시엔 대회라고 불린다. 3~4월 열리는 ‘봄 고시엔’(선발고교야구대회)와 8월에 개최되는 ‘여름 고시엔’(전국고교야구선수권대회)이 있지만, 대개 고시엔하면 여름 대회를 말한다. 고시엔 대회는 효고현 나루오 구장에서 열렸다. 대회 인기가 높아지면서 관객 수용이 문제였다. 그래서 6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고시엔 구장이 1924년 들어섰다. 10회 대회부터 고시엔 구장에서 열리게 된 것이다. 고시엔 구장은 프로구단인 한신의 홈구장이기도 하다. 고시엔 대회가 열리는 동안은 한신 은 구장을 옮겨 경기를 치른다. 그만큼 고시엔의 인기는 프로 못지않다. 그런 고시엔이 일본 고교 야구선수들에게 선망의 대상이다. 출전 선수들은 시합에 지면 눈물을 머금으며 고시엔 구장 그라운드의 흙을 담아간다. 그해 여름의 뜨거웠던 고교 청춘을 기념하기 위해서다. 선수들에겐 평생 ‘가보’와도 같은 상징물이다. 그럼, 선수들이 매번 가져가는 흙은 어떻게 보충할까. 또 이 흙은 어디서 오는 걸까. 일본 스포츠매체들에 따르면, 선수들이 1년 동안 가지고 가는 양은 약 2톤에 달한다고 한다. 가지고 간 양만큼 다시 보충이 된다. 고시엔의 흙은 흑토와 모래를 혼합한 흙이다. 오카야마, 미에, 가고시마, 오이타, 돗토리현 등 전국 각지에서 엄선된 흙만 가져온다. 모래의 경우는 중국 복건성에서 들여온다고 한다. 봄과 여름 대회를 치를 때, 흑토와 모래의 비율이 각각 다르다고 한다. 비가 많은 봄에는 배수를 좋게 하기 위해 모래가 많이 사용된다. 빛 반사가 심한 여름에는 공을 더 잘 보이게 하기 위해 흑토를 많이 넣는다. 그런데 이 고시엔의 흙과 관련, 일본의 쓰라린 역사가 있다. 바로 오키나와다. 오키나와의 고등학교들은 한때 고시엔에 출전할 수 없었다. 세월이 지나 출전은 했지만, ‘상징물’인 흙을 갖고 갈 수 없었다. 여기엔 이런 사연이 있다. 고시엔 구장의 흙 과 오키나와 슈리고교생들의 눈물. 태평양전쟁이 끝났지만 오키나와는 일본에 반환되지 않고 미국의 통치하에 있었다. 미국령이기 때문에 오키나와의 고등학교들은 고시엔 대회에 나갈 수 없었다. 마침내 첫 출전이 이뤄졌다. 1958년 8월 40회 대회였다. 첫 출전 영광의 학교는 오키나와의 슈리(首里)고교. 하지만 슈리고는 1회전에서 후쿠이현의 강호 쓰루가(敦賀) 고교에 1대3으로 패하고 말았다. 슈리고 역시 고시엔의 전통대로 흙을 가져가기로 했다. 선수 몇 명이 비닐 봉지에 흙을 담아 갔지만, 오키나와에 도착했을 때 문제가 발생했다. ‘본토의 흙을 반입해서는 안된다’는 것이었다. 오키나와는 미국법을 적용받는 땅이었다. 그런 미국법에 따라 ‘식물 검역법’에서 제동이 걸린 것이다. 선수들은 또다시 눈물을 흘려야 했다. 소중히 가져온 고시엔의 흙을 고스란히 바다에 버릴 수밖에 없었다. 이 사건은 당시 언론에 보도되면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 그런데 기적과도 같은 작은 사건이 벌어졌다. 사연을 접한 항공사의 한 여성 승무원이 고시엔 구장의 작은 돌 40개를 오키나와에 전달한 것이다. 당시 검역법에 따르면, 흙은 반입이 금지되지만 돌은 상관이 없었다고 한다. 슈리고의 고시엔 출전 기념비에는 지금도 이 ‘고시엔 돌’이 박혀 있다고 한다. 그게 시작이었다. 슈리고 사건이 계기가 되면서 오키나와 반환 운동이 한층 달아 올랐다. 1960년 오키나와 조국복귀협의회(縄県祖国復帰協議会)가 결성됐고, 본격적인 대중운동이 힘을 받았다. 운동은 오래 걸렸다. 드디어 12년 뒤인 1972년, 오키나와 반환이 이뤄졌다. 드라마틱한 일은 2010년 봄과 여름에 연이어 일어났다. 2010년 오키나와의 코난(興南)고교가 봄 고시엔과 여름 고시엔 대회에서 연속 우승을 한 것이다. 오키나와로서는 ‘고시엔 흙 반입 거부 사건’(1958년)에 이어 50년 만에 거둔 최고의 경사였다. <일본 도요(東洋)대 유학생 이모씨>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일본 기차여행을 위한 유용한 툴과 참고도서
일본 기차여행에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일본 기차여행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툴과 정보가 될 만한 책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시각표(時刻表) 일본에서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시각표(時刻表)’라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각표’에는 일본의 모든 기차들의 시간표가 작은 글씨로 빼곡히 씌어 있는데, 성경책보다도 많이 팔린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시각표를 들고 기차여행을 하는 사람은 ‘고수’ (혹은 오타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미리 기차여행의 코스와 시간을 다 조사해서 가기 때문에 시각표를 가져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어떤 분은 수년전에 “인터넷이 편한 건 알지만, 시각표를 넘겨가며 줄을 긋고 행선지를 상상하는 기분을 결코 대체할 순 없다. 초속 5센티미터의 주인공처럼.”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도 언젠가는 아무런 사전 계획 없이 시각표만 들고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2. HyperDia HyperDia는 인터넷 환경에서 PC나 모바일로 검색하는 일본 열차 시각표입니다. 출발역, 도착역, 날짜와 시간을 기입한 후에 검색하면 추천하는 경로들을 시간 순으로 나타내줍니다. 각 경로의 출발과 도착 시간, 환승역, 열차 종류, 소요 시간, 요금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어와 영어 버전이 있고, PC는 무료인데 모바일은 유료입니다. 모바일 HyperDia 1년 사용료는 21,000원입니다. 3. 전국철도여행(全国鉄道旅行) 일본 전국의 JR과 사철이 다 나와 있는 철도 노선도입니다.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의 전국 철도 노선도가 1장의 자바라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행 갈 곳에 어떤 철도와 역이 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4. 에키벤 ~철도 도시락 여행기~ (하야세 준. AK. 원제 駅弁ひとり旅)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어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만화인데, 한국어 번역판이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일본 기차여행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정보를 얻고 있는 책입니다. 일본 열도는 물론 오키나와, 대만, 사할린까지 철도, 역, 에키벤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이고도 풍부하게 나와 있습니다. 각권의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1권 : 규슈(九州) 2권 : 시코쿠(四国)/추고쿠(中国) 3권 : 간사이(関西) 4권 : 홋카이도(北海道)1 (남부 및 중앙부) 5권 : 홋카이도(北海道)2 (동부) 6권 : 홋카이도(北海道)3 (북부) 7권 : 도호쿠(東北)1 (아오모리, 아키타) 8권 : 도호쿠(東北)2 (이와테, 미야기) 9권 : 도호쿠(東北)3 (야마가타, 후쿠시마) 10권 : 기타칸토(北関東) 11권 : 추부(中部)1 (나가노) 12권 : 추부(中部)2 (기후) 13권 : 도카이(東海)1 (나고야) 14권 : 도카이(東海)2 (시즈오카, 야마나시) 15권 : 간토(関東) 별권 : 대만+오키나와편 5. 저스트고 낭만의 일본 기차 여행 (박정배. 시공사) 출판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방대한 정보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책입니다. 비록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중고로 구할 수 있습니다. 6. 기차홀릭 테츠코의 일본철도여행 (문정실. 즐거운상상) 이 책도 출판된 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많은 아기자기한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책 제목의 테츠코(鉄子)는 여성 철도 매니아를 일컫는 말입니다. 남성 철도 매니아는 텟짱(鉄ちゃん)이라고 부릅니다. 7. 일본 철도 명물 여행(이토 미키. 에디션더블유) 여성 감성의 기차여행 코스에 대한 정보를 예쁜 그림과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8. 홋카이도 보통열차 (오지은. 북노마드) 기차를 좋아하는 가수 오지은 씨가 보통열차를 타고 홋카이도의 구석구석을 2,400km의 거리를 달린 여행기입니다. 그녀는 29살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행하였고, 여행하면서 느낀 청춘과 기차에 대한 생각을 일기처럼 썼습니다. 9. 드로잉 일본 철도 여행 (김혜원. 씨네21북스)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한 달간 일본 전국 기차여행을 하면서 스케치한 그림을 중심으로 한 여행기입니다. 10. 일본기차여행 (인페인터글로벌. 꿈의지도)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기차여행하기 좋은 일본의 38개 도시와 기차역과 역 주변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 일본의 지역 구분
와세다 대학이 의대에 '목 매는' 이유
일본 경제매체 도요게이자이(10월 27일자 보도)에 따르면, 게이오대의 한 해 기부금(2016년 결산)은 87억3900만 엔, 와세다대는 30억9500만 엔이었다. 명문 사립 라이벌인 두 학교의 기부금이 이렇게 큰 차이가 나는 건 왜일까. 이유는 의대가 ‘있고 없고’의 차이다. 게이오대 의대는 일본의 1% 학생들이 들어가는 명문 중의 명문이다. 반면 와세다대는 사립 최고 종합대학 자리에 있으면서도 의대가 없다. 기부금이 많은 상위 20개 일본 사립대 중, 의학부를 가진 곳은 13개 학교다. ‘기부금=의대’라는 등식이 성립하는 것. 기부금의 ‘큰 손’은 의대 입학 학생을 둔 부유층 가정이 대부분이다. 문과 중심의 대학에서 거둬들이는 기부금과는 자릿수에서부터 차이가 난다. 와세다대가 의대에 집착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와세다대의 한 졸업생(OB)은 이렇게 말했다.(시사매체 슈칸겐다이 11월 7일자 보도) <“대학 브랜드 제고와 재정 기반 강화를 위해서는 의대를 만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틀림없이 와세다의 간절한 소망이다. 의대가 생긴다면, 말 그대로 범에 날개를 단 격으로, 의학부를 가진 게이오에 열등감을 갖지 않게 된다.”> (원문:「大学ブランドの向上と財政基盤強化のためには、のどから手が出るほど作りたい学部。まさに早大の悲願だ。医学部ができれば文字通り鬼に金棒で、医学部を持つ慶應義塾大学に引け目を持たなくて済むようになる」) 그럼, 와세다는 왜 의대를 만들지 않았을까. 슈칸겐다이는 “메이지 시대의 자유민권운동을 이끈 와세다대 설립자 오쿠마 시게노부는 정치인 육성을 중시해 의학에 관심이 없었다고도 전해진다” (明治期の自由民権運動を牽引した早大創設者の大隈重信は政治家育成を重視し医学部には興味がなかったとも伝えられる)고 보도했다. 오쿠마 시게노부(1832~1922년)가 와세다대의 전신인 도쿄전문학교를 설립한 건 1882년이다. 그는 이토 히로부미와 라이벌 관계를 형성했던 당대의 권력자였다. 두 번이나 총리(8대, 17대)를 지낸 그는 1907년 정계를 은퇴하고 와세다대 총장에 취임했다. 슈칸겐다이에 따르면, 1961년 국민보험제도가 도입된 이후 와세다대의 ‘의대 인수설’이 계속 흘러 나왔다고 한다. 분위기가 가장 무르익었던 사례가 2008년 도쿄여자의대와의 제휴였다. 슈칸겐다이는 “두 대학의 제휴는 ‘와세다의 의학부 설치 포석’이라는 견해도 있었다”며 “그 후에도 ‘의료 사고 발생 등으로 경영이 어려워진 도쿄여자의대를 와세다가 합병하는 것은 아닌가’라는 관측이 난무했다”고 보도했다. 그런 소문이 나돌긴 했지만 성사는 이뤄지지 않았다. 도쿄여자의대측에서 반발이 있었던 것. 현재, 와세다대의 오랜 소망은 좌초된 상태다. 슈칸겐다이는 의대 인수설과 관련 “라이벌도 있다”며 “주오(中央)대학과 도시샤(同志社)대학도 의대를 갖고 싶어한다. ‘좋은 매물’이 나올 경우, 쟁탈전이 벌어질 가능성은 충분히 있다”고 덧붙였다. 이런 와중에 11월 5일, 와세다대의 새로운 총장이 취임했다. 정치경제학부의 다나카 아이지(田中愛治) 교수다. 와세다의 정치경제학부에서 총장이 탄생한 것은 50년 만이라고 한다. 다나카 총장은 전전(戰前)엔 일본 공산당 중앙위원장으로, 전후(戰後)엔 ‘우익의 해결사’라고 평가받는 다나카 세이겐(田中清玄)의 아들이다. 아사히신문의 자매매체 아에라닷컴(6월 30일자 보도)은 “다나카 교수는 대담한 구상을 안고 있다”(田中教授は大胆な構想を抱いている。)며 “의대를 인수해 와세다 대학 의학부를 만들고 싶은 것”(医科大学を買収し、早稲田大学医学部をつくりたいのだ。) 이라고 했다. 슈칸겐다이는 “다나카 총장이 의대를 보유할 비책을 가다듬고 있는 것이 틀림없다”고 했다.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록그룹 '퀸'과 1975년 4월 17일의 일본
1975년 4월 17일 하네다 공항 대소동 환영 인파에 놀라..."다른 행성 온 것 같다" 1975년 4월 17일 오후 무렵. 도쿄 하네다 공항에는 전례 없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려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비행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들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자, 호놀룰루를 경유한 JAL061 편이 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았다. 트랩을 내려오는 주인공은 데뷔 3년차인 영국 출신 그룹 퀸(Queen)의 멤버들이었다. 섬 나라 일본에 첫 발을 디딘 멤버들이나, 이들을 맞은 팬들이 서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더 프레디 머큐리 등 멤버들은 일순간 동양의 작은 소녀들에게 포위당했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맴버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Brian Harold May)는 당시 “다른 행성에 온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브라이언이 행성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그가 실제 천문학자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적외선 천문학자(Infrared astronomer)였다. 잠시, 브라이언 메이 얘기다. 프레디 머큐리는 ‘프레디 머큐리, 낯선 세상에 서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노래하다’라는 책에서 “제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에서라도 브라이언 같은 적외선 천문학자가 기타를 집어들고 로큰롤 가수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썼다. 천문학 잡지 ‘에스트로노미’(Astronomy)는 ‘브라이언 메이, 과학과 음악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러분은 그를 록그룹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로 알고 있지만, 브라이언은 천문학 박사이기도 하다”(You know him best as guitarist, singer, and songwriter from the rock group Queen, but Brian May is also a Ph.D. astronomer”고 전했다. 일본에 도착한 퀸이 공연을 펼친 곳은 선배 그룹 비틀즈가 섰던 부도칸(武道館)이었다. 공항에 이어 공연장 소동도 변함없었다. 통곡하며 실신하는 여성이 속출했고, 팬들은 밀치고 넘어지며 스테이지까지 몰려들었다. 그러자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을 잠시 중단하고 “모두 침착하자”고 호소했다. 비틀즈 이후 최대의 소동이었다. 퀸의 공연은 2주간 전국에서 열렸다. 퀸은 이후 다섯 차례 더 일본을 방문했고, 마지막 공연을 한 곳은 1985년 5월 15일 오사카성 홀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죽기 6년 전이다. 여섯 차례의 일본 공연은 그만큼 퀸이 일본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퀸은 이처럼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였다. J-팝이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팝음악 잡지 ‘MUSIC LIFE’는 당시 인기 투표를 실시했는데, 그룹 퀸은 ᐅ1975~1978년 1위 ᐅ1979년 2위 ᐅ1980~1982년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91년 11월 24일은 퀸의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날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전하고 24시간 후 사망(당시 45세)했기 때문이다. 그룹의 마지막 앨범인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은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지 4년 뒤 발표됐다. 일본의 열성팬들은 2015년, 퀸의 일본 도착 40년을 기념해 4월 17일을 ‘퀸의 날’(The Queen Day)로 정했다. 일본에서 이런 소동을 벌였던 퀸과 프레디 머큐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부활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극장가에서도 히트 행진 중이다. 신드롬, 팬텀이라고 할 만하다. 음악평론가 스지 스즈키(スージー鈴木)씨는 “헤이세이 최후의 겨울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기억될 것"(平成最後の冬は、映画『ボヘミアン・ラプソディ』とともに記憶されるだろう。)이라고 했다. (일본은 내년 헤이세이 연호가 바뀐다) ‘Love Of My Life’, ‘I Want To Break Free’, ‘Spread Your Wing’ 같은 퀸의 노래들과 함께 2018년의 마지막도 저물어간다. '에~오~ 에~오'.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아열대인 오키나와에서 맥주를 만든 이야기...
태평양전쟁에서 승리한 미군(극동군 총사령부)은 오키나와에 ‘류큐열도미국민정부’(琉球列島米国民政府)를 설치해 그곳을 통치했다. 1957년 어느 날, 미군의 민정관(民政官) 보나 F. 버거 준장은 오키나와의 상공회의소에서 강연을 했다. 그는 “앞으로 오키나와 산업의 기둥은 ‘시멘트’와 ‘맥주’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인터넷 매체 ITmedia 비즈니스) 시멘트는 건물이나 도로 등을 건설하는 ‘하드’ 측면, 맥주는 오키나와 사람들에게 희망과 의욕을 주는 ‘소프트’ 측면을 의미했다. 당시 이 강연을 주의 깊게 듣고 있던 한 경영인이 있었다. 구시켄 소세이(具志堅宗精:1896~1979)라는 사람으로, 그는 자신의 이름을 딴 된장, 간장 회사(具志堅味噌醤油)를 경영하고 있었다. 전후(戰後) 복구 차원의 새 사업을 구상중이던 그는 때마침 버거 준장의 말을 듣고 맥주사업을 실현에 옮겼다. 1957년 5월 구시켄을 필두로, 지역 유지들이 힘을 모아 회사를 설립했다. 회사는 세웠지만 곧바로 맥주를 생산해 낼 수는 없었다. 왜 그랬을까.  사실, 아열대의 오키나와에서 맥주 산업을 일으킨다는 것은 상식 밖의 일이었다. 더군다나, 오키나와의 수질도 문제였다. 오키나와는 산호초가 융기한 섬이어서 토양이 알칼리성으로, 경수(硬水)가 주를 이뤘다. 그런데 이 경수가 맥주 제조에는 적합하지 않았다. 구시켄은 오키나와 각지를 현지 조사한 끝에, 산이 있는 나고(名護) 지역에서 맑은 연수(軟水)를 찾아냈다. 그는 그곳에 공장을 세웠다. 2년에 걸친 수질 조사와 공장 건설을 통해 마침내 회사가 설립됐다. 회사 설립 발기 당시, 사명은 ‘오키나와 기린 맥주 주식회사’였다. 본토 맥주 대기업 기린과 기술 제휴를 도모했던 것. 하지만 협상이 무산되면서 기린이라는 이름을 떼고 ‘오키나와 맥주 주식회사’가 됐다. 기업 브랜드 네이밍의 경우, 창업자의 의지가 반영된 경우가 대부분이다. 하지만 오키나와를 대표하는 맥주 브랜드에는 뭔가 특별한 게 필요했다. 회사는 1957년 11월, 신문에 파격적으로 현상 공모 광고를 냈다. 1등 당선 상금은 83달러 40센트로, 당시로서는 상당한 고액이었다. (이 돈의 가치를 알고 싶은가. 1958년 대한민국의 1인당 국민소득이 80달러였다.) 공모 결과, 현민들로부터 2500여 건이 접수됐고 그 중에서 별자리(별 3개) ‘오리온’이라는 이름이 선택됐다. 오리온 맥주 홈페이지에는 당시 선정 이유가 올라와 있다.  “첫째, 오리온은 남쪽 별이라는 점에서 (열도의 남쪽인) 오키나와의 이미지와 일치한다. 둘째, 별은 사람들의 희망과 동경을 상징한다”고 밝히고 있다. 그런데 3번째 이유가 흥미롭다. “당시 오키나와를 통치하고 있던 미군...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67 ) <이재우 기자‧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창업자 데릴사위가 키운 스즈키 자동차
스즈키 자동차의 1대 창업주 스즈키 미치로. 마츠다 오사무(松田修)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후현 태생으로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은행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5년 후인 1958년, 은행원이던 그의 인생에 일대 큰 변화가 찾아왔다. 스즈키 자동차 실질적 창업주 스즈키 슌조(鈴木俊三)의 데릴사위가 된 것이다. 마츠다 오사무는 스즈키 슌조의 장녀와 결혼해 양자가 됐고, 그의 이름은 마츠다 오사무(松田修)에서 스즈키 오사무(鈴木修)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큰 변화가 닥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1977년에 창업자인 스즈키 미치오와 2대 회장인 스즈키 슌조, 3대 회장인 스즈키 지츠지로 등의 경영자가 잇따라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데릴사위인 내 어깨에 회사의 운명이 지워진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스즈키 오사무 저 ‘작아서 더 강한기업 스즈키’(김소운 옮김, 리더스북) 전임, 현직 CEO가 동시에 쓰러지면서 스즈키 오사무는 순식간에 사장 자리를 맡았다. 입사 20년이 지난 1978년의 일이다. 닛케이비즈(2009년 3월 2일)는 당시 스즈키 오사무의 심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아, 내가 사장이야”- 스즈키 오사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등골이 오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쉴 때도 사장이라는 무게감이 덮쳤다.> 스즈키 자동차를 이야기 할 때, ... <김재현 기자> (이어지는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00 )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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