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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성구절]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

인생을 살아간다는 건
끊임없이 쌓이는 먼지를 닦아내는 일이야.

천명관 <고래>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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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모도미난스
'호모도미난스' / 장강명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개인적으로 장강명 작가님의 책을 좋아한다. 문장이 그리 어렵지 않고 진행도 빨라서 일단 서사가 재미있을뿐더러 다 읽고 책을 덮고 나면 그 뒤에도 계속해서 생각이 이어진다. 읽을 때는 재미있고, 다 읽고 나면 생각에 잠기게 만드는 소설이 그리 많지는 않다. 이번에 읽은 호모도미난스도 흥미진진한 스토리 진행에 빠르게 책을 읽어 나갔지만 다 읽고 난 후에는 혼자 여러 가지 생각에 잠겼다.      이 소설은 어찌 보면 흔한 SF적 상상을 기반으로 진행된다. 호모사피엔스에서 진화한 새로운 종, 호모도미난스가 생겨나고 호모도미난스는 호모사피엔스의 생각을 조종할 수 있다. 이러한 상상은 이미 영화, 소설, 만화 등등 여러 작품에서 쓰였었고 소재 자체의 흥미성은 떨어진다고 할 수도 있다. 하지만 이 소설이 그러한 작품들과 다른 점은 결론을 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재를 다룬 몇몇 작품들에서는 결국 새로운 종이 멸종한다거나, 새로운 종이 기존의 인간을 지배한다거나 하는 결론이 나오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소설에서는 호모사피엔스에서 진화한 여러 호모도미난스들의 각각 확연히 다른 행동들과 사고를 보여주고 마지막에는 새로운 종, 호모도미난스들에 대한 어떤 결론도 나지 않은 채로 끝이 나버린다. 결국 작가님이 이야기하고 싶었던 건 SF적 상상, 그 자체가 아니라 그 상상을 소재로 인간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소설 속에는 주인공급의 몇몇 호모도미난스들이 나오는데 그들의 행동은 다들 제각각이다. 갑자기 가지게 된 사람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에 자멸하고 마는 10대 소년도 있고 자신은 이미 호모사피엔스를 뛰어넘는 종이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목표를 위해 호모사피엔스들을 거리낌 없이 죽이는 여성도 있으며 그저 그 능력을 가지고 돈, 여자, 명예, 권력만을 추구하며 흥청망청 살아가는 남자도 있다. 그런가 하면 라오스의 수행에 정진하는 승려들을 자신의 능력으로 해탈에 이르게 해 주겠다며 삶에 대한 미련을 버리도록 만들어 수많은 승려들을 죽음으로 이끌면서도 자신은 숭고한 목적으로 행동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고 호모도미난스라는 존재 자체에 대해 끊임없는 연구를 하는 사람, 호모도미난스 자체가 지구에 위협이 될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 등등, 모든 호모도미난스들은 각기 다른 목적, 다른 행동을 보여준다. 과연 이 호모도미난스들 중에 올바른 행동을 하고 있는 사람은 누구일까.      필자는 작가님이 호모도미난스를 통해 남들과 다른 힘을 가지게 된 호모사피엔스들의 모습을 표현하고 싶었던 것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호모도미난스들이 이전과 다른 행동을 하게 된 것은 남을 조종할 수 있는 능력, 힘을 얻었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그건 호모사피엔스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과거 청동기시대, 처음으로 철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민족은 다른 민족을 학살하고 지배했을 것이고, 강력한 군사와 기마병을 가졌던 몽골의 칭기즈칸은 주변을 정복해나갔다. 현대에도 돈이라는 힘을 가진 사람들이 돈이 없는 자들을 핍박하고 지배하기도 한다. 갑질이라는 용어만 생각해봐도 돈이든, 권력이든, 명예든 어떤 힘을 가진 자들이 힘없는 자들을 지배하는 일은 먼 과거는 물론 현재까지도 여기저기서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호모도미난스는 지금도 우리 사회 여기저기에 존재하고 있다. 사실 호모도미난스란 실제로 호모사피엔스를 조종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긴 자가 아니라 누군가에게 없는 힘이 있다는 이유로 다른 사람을 지배하려 드는 자들이 바로 호모도미난스, 지배하는 자인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은 조건에 관계없이 평등하다고 이야기하지만 과연 그것이 현대 사회에서 실제로 인정받고 지켜지고 있는가는 의심스럽다. 돈, 권력, 명예, 외모 등등 많은 것들에 의해 계급이 나눠지고 지배와 피지배가 이뤄지고 있는 사회가 바로 지금의 우리 사회다. 내가 누군가에게 호모도미난스였던 적이 있었는가에 대해 생각해봐야 하지 않을까. 소설 속 한 문장 디오게네스 : 대왕님은 소아시아를 정복한 뒤에는 무얼 하려 하시렵니까? 알렉산드로스 : 아마도 온 세상을 정복하려 하겠지. 디오게네스 : 그 뒤엔 무얼 하시겠습니까? 알렉산드로스 : 글쎄, 잘 모르겠지만 좀 쉬면서 인생을 즐기지 않을까. 디오게네스 : 그냥 지금 당장 그러시는 건 어떻습니까? - 디오게네스와 알렉산드로스 대왕과의 일화 중 (리뷰를 원하시는 책을 댓글에 적어주시면 직접 읽고 리뷰해보도록 하겠습니다.)
단편 : 여름의 주홍빛 녹색
“언니, 저 그 새끼랑 헤어졌어요.” “잘했어. 똥차 가면 벤츠 온다. 언니 말 믿어.” 조그만 술집에서 여자 둘이 소주를 마시고 있다. 안주는 두부 김치 하나. 언니라고 불린 여자는 아직 멀쩡해 보이는데 똥차랑 헤어졌다는 동생은 이미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테이블에 올라와 있는 소주병이 셋이나 되는 걸 보면 그럴 만도 하다. 동생은 아까부터 하던 똑같은 하소연을 세 번째 시작한다. 소주 한 병당 한 번 꼴이다. “그 새끼가, 아니 그 개새끼가 또 바람피웠어요. 그 썩을 똥차 새끼가! 진짜 쓰레기 아니에요? 바람피운 거 아주 무릎 꿇고 싹싹 빌길래 두 번이나 용서해 줬는데 세 번째 또 바람피운 거 알았을 때는 진짜 내가 화도 안 나더라고요. 그것도 똑같은 년이랑 세 번을 피웠어요. 그게 말이 돼요?” 앞에 앉은 언니는 동생의 말을 묵묵히 들어주고 있다. 세 번째 듣는데도 내색 하나 하지 않고 들어주는 언니에게 동생은 울분을 토한다. “내가 나보다 이쁜 년이랑 피웠으면 말도 안 해. 그 만들어지다 만 것 같이 생긴 년이 뭐가 좋다고. 진짜 욕을 안 할래야 안 할 수가 없네. 개만도 못한 새끼. 그래서 진짜 제가 그래, 두 번이니까 봐주자, 삼세번까지는 참아보자 했는데 역시나 세 번째가 왔어요. 옛말 틀린 거 하나도 없는 거 같아요. 사람 고쳐 쓰는 거 아니라더니. 진작 차 버렸어야 됐는데.” “그래 잘했어. 사실 오지랖 같아서 말 안 하고 있긴 했는데 나도 너한테 진작 헤어지라고 하고 싶었어. 입 근질거리는 거 참느라 얼마나 힘들었는데.”  언니와 동생이 동시에 소주를 원샷하고 잔을 내려놓는다. 빈 잔을 채우는 동안 잠시 조용하다. 쪼르륵, 소주가 잔에 차오른다. 동생이 크 소리와 함께 입에 두부와 김치를 함께 집어넣고 씹으며 말한다. “진짜 그 새끼는 제 인생에 길이길이 남을 새끼에요. 살다 살다 그런 똥차는 또 처음 만나봤어요.” “그래, 곧 좋은 사람 만날 수 있을 거야. 걱정 마.” 동생이 씹던 두부와 김치를 꿀꺽 삼킨다. “근데 언니는 지금까지 남자 몇 명이나 만나 봤어요?” “나? 한 네다섯 명 정도?” “언니는 그중에 누가 제일 기억에 남아요? 역시 첫 남자 친군가?  “제일 기억에 남는 남자?” “저는 아무래도 이 똥차 새끼만큼 기억에 남을 놈은 없을 거 같아요. 어떤 쪽으로든.” 동생이 킥킥대며 웃는다. 맞은 편의 언니는 골똘히 생각에 잠겼다. 잔에 찰랑찰랑 채워진 투명한 소주를 가만히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제일 기억에 남는 남자는 그중에는 없어.” “엥? 그럼 누군데요?” “우연히 만났던, 이름도 나이도 모르는 사람.” 금요일 오후 2시 여자는 예식장을 나왔다. 딱히 할 일도 없는 백수 처지에 아는 사람도 별로 없는 예식장에서 혼자 꾸역꾸역 밥까지 먹고 나오기에는 여자의 면피가 그렇게 두껍지 못했다. 그저 적당한 금액의 축의금을 내고 축하해요 오빠라는 말을 신랑에게 전한 뒤 조용히 구석 자리를 차지하고 앉아 박수 몇 번 치고 나왔지만 그래도 나름 지인의 결혼식이라 꽤나 차려입고 나왔다. 이렇게 꾸며 본 지가 얼마만인지 기억도 안 난다.  백수는 생활 반경이 점점 좁아진다. 백수 연차가 찰수록 만나는 사람도 없어지고 같이 취업 준비를 하던, 가끔 만나 소주 한 잔 하며 신세 한탄하던 친구들도 하나둘씩 회사의 일원이 되어간다. 백수가 아닌, 번듯한 바깥세상의 사람을 만나기에는 자신이 이 사회의 짐덩이 같은 존재라는 걸 스스로 너무도 잘 알고 있기에 만나자는 연락이 오면 한참을 고민하다 미안, 내가 좀 바빠서 라는 답을 보내기 일쑤다. 백수 연차 3년 차가 지나가는 여자가 남색 원피스를 입고 밖에 나오는 일은 거의 연례행사나 다름없다. 사실 여자의 계획은 결혼식이 끝나자마자 부리나케 집으로 달려가 취업을 위한 인적성 평가 문제집을 풀고 면접 예상 질문과 답변을 만드는 것이었지만 막상 예식장에서 나온 여자는 눈 위에 손으로 차양을 만든 채 하늘을 올려다보며 가만히 서 있었다. 날이 너무 좋았다. 햇빛은 따갑지 않고 따뜻한 빛의 입자를 온 거리에 뿌렸고 바람이 불어 나뭇잎들이 흔들릴 때마다 빛의 입자들은 더 잘게 부서지며 초록색 사이로 반짝거렸다. 문제집과 인강, 면접 예상 답변 만들기가 기다리고 있는 어두운 방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은 날씨였다. 그렇지만 여자에게는 딱히 할 일도, 만날 사람도, 가야 할 곳도 없었다. 그렇게 한 자리에서 한참 하늘을 바라보던 그녀는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검색했다.  ‘평일 서울 혼자 갈만한 곳’  검색 결과들이 주르륵 떴다. 경복궁 나들이, 서울숲, 북촌 한옥 마을, 동묘 벼룩시장 등등 온갖 키워드들이 어지럽게 스마트폰을 가득 채웠다. 화면을 슥슥 내리며 살펴보던 여자의 손이 멈췄다. 여자의 엄지 손가락이 화면을 한 번 터치하자 잠시 후 한 블로그가 화면에 나타났다.  ‘평일 오후 고전영화’ 누군가가 일기처럼 쓰는 블로그인 것 같았다. 제목 밑으로 어떤 영화를 봤으며 어떤 생각을 했는지 두 문단으로 정리되어 있었다. 여자는 글에 나온 영화관의 이름을 다시 검색했다. 종로역 3번 출구로 나와서 조금 걸으면 바로 그 영화관이었다. 위치 바로 밑에 뜬 상영 정보를 보니 처음 보는 제목의 영화들이 상영되고 있었다. 3시에 상영되는 영화의 이름이 마음에 들었다. ‘여름의 녹색’ 지하철역은 오른쪽이었다. 여자는 종로역에서 내려 영화관에 도착했다. 영화관 정문 오른쪽에는 오늘의 상영 시간표가 붙어 있었다. 13:00 기름과 물은 섞이지 않는다 15:00 여름의 녹색 17:00 그믐달 전부 처음 들어보는 영화들이었다. 저 셋 중에는 여름의 녹색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여자는 문을 열고 들어갔다. 안에는 조그만 매표소가 있었고 그 옆에는 사람이 없는 매점도 있었다. 꽤 넓은 공간 안에 움직이는 사람은 여자뿐이었다. 매표소 안의 직원은 바닥에 머리를 박은 채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눈치를 살피며 천천히 매표소로 걸어갔다. 여자가 창구 앞에 섰음에도 머리를 박고 잠들어 있는 직원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저기요.” 여자가 작은 목소리로 부르자 직원이 흠칫 떨더니 일어났다. 입가 오른쪽에는 침이 살짝 묻어있다. 직원은 소매로 침을 쓱 닦고 한껏 잠긴 목소리로 말했다. “어서 오세요. 어떤 거 드릴까요.” “여름의 녹색 하나 주세요.” “네, 팔천 원입니다.” 아직도 팔천 원에 영화를 볼 수 있는 곳이 있다는 것이 놀라웠다. 여자는 지갑에서 만 원짜리를 꺼내 내밀었다. 여직원은 이천 원과 티켓을 함께 건넸다. 분홍색 티켓에는 귀여운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다. “이십 분 전부터 입장 가능하세요.” 여자는 고개를 끄덕이고 티켓을 보았다. 이렇게 티켓으로 된 영화표를 받아 본 것이 얼마만인지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여자는 영화 티켓을 모으는 취미가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영화관에서는 티켓이 아니라 영수증 겸용의 흐물흐물한 종이 영화표를 주기 시작했고 영화 티켓을 모으곤 하던 그녀는 그런 시대의 흐름에 휩쓸려 취미 하나를 잃어버렸다. 전에 티켓을 모으던 상자가 있었는데 어디 있더라. 여자는 그 상자에 이 분홍색 티켓도 넣어놔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스마트폰을 보니 2시 50분이다. 아직 시간이 조금 남았다. 여자는 아무도 없는 매점으로 가 냉장고에서 생수를 한 병 집어 들었다. 여자는 매점 여기저기를 기웃거리며 직원을 찾았지만 사람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결국 여자는 겉에 물방울이 맺히기 시작한 생수를 들고 다시 매표소를 찾았다. 직원은 그 사이 머리를 박은 채 잠들어 있었다. 여자는 왠지 모르게 미안한 마음으로 다시 한번 직원을 깨웠다. “저기요.” “에!” 직원은 대답인지 비명인지 모를 소리를 내며 다시 일어났다. 검은 머리끈으로 질끈 묶은 그녀의 머리가 마치 달리는 말의 꼬리처럼 흔들렸다. “깨워서 죄송해요. 매점에 아무도 안 계셔서요. 이거는 어디서 계산하면 되나요?” 여자가 생수를 들어 보이며 묻자 직원은 손으로 입가를 훔치며 말했다. “아, 그냥 저한테 돈 주시면 돼요. 생수 천 원이에요.” 여자는 지갑에서 아까 받은 이천 원 중 한 장을 꺼내 내밀었다. 직원은 찢어지게 하품을 하며 돈을 받았다. 이제 2시 58분이었다. 관은 하나였다. 적어도 헷갈릴 일은 없어 보였다. 상영관의 문을 열고 들어가자 스크린에서는 영화 감상을 위한 에티켓을 티켓에 있는 것과 같은 캐릭터가 설명하고 있었고 좌석은 텅 비어 있어 영화관을 통째로 빌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영화관 안에서는 어릴 적 잡동사니를 쌓아 놓던 먼지 쌓인 다락방의 냄새가 났다. 여자는 티켓에 적힌 좌석은 아니었지만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중간 열의 제일 왼쪽 좌석에 가서 앉았다.  여자는 자리에 앉은 채 주변을 둘러보다가 누군가를 발견했다. 자신의 반대편, 오른쪽 끝 좌석에 남자 한 명이 앉아있었다. 구석이라 처음 들어올 때 못 본 것 같았다. 이 작은 관 안에는 왼쪽 끝의 여자와 오른쪽 끝의 남자 둘 뿐이었다. 남자는 한 달 전 여자 친구와 헤어졌다. 3년간 사귀었던 연인은 한순간에 참 싱겁게도 헤어졌다. 두 달 전부터 남자의 연인은 연락이 되지 않았다.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고 아무리 메시지를 남겨도 1 표시만 사라질 뿐, 답은 오지 않았다. 3년을 사귀는 동안 그녀는 절대 집 주소를 알려주지 않았었고 일하는 곳도 어디인지 알려주지 않았다. 이렇게 그녀가 일방적으로 연락을 무시하면 도저히 만날 방법이 없었다. 남자는 연인이 어떤 음식을 좋아하는지, 커피에 시럽을 몇 번 넣는지는 알고 있었지만 그 외의 것들은 하나도 모른다는 걸 연락이 단절되고 나서야 깨달았다. 처음부터 그녀는 이런 순간을 준비하고 있었던 것일까.  한 달 전, 내내 1만 사라지던 카톡창에 새로운 메시지가 떴다. 오늘 저녁 6시 반, 함께 자주 가던 카페에서 만나자는 메시지였다. 반쯤 포기하고 있던 남자는 한 달 만에 온 그녀의 메시지에 하루 종일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그냥 회사 책상에 앉아 컴퓨터 화면만 쳐다보았다. 6시가 되자마자 회사를 나온 남자는 카페에 가기 위해 버스를 탔고 버스가 목적지에 도착할 때까지 내내 눈물을 흘렸다. 그녀에게 아무런 연락이 없던 한 달 동안 한 번도 흘리지 않았던 눈물을 카페에 가는 버스 안에서 계속 흘렸고 도착해서는 카페가 있는 건물 안 화장실에서 5분간 얼굴을 씻었다. 그리고 6시 반에 앞에 앉은 차가운 얼굴의 전 연인에게서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다. 6시 35분, 커피가 나오기도 전 그녀는 카페를 떠났고 남자는 혼자 자리에 앉아 앞에 두 잔의 커피를 놓은 채 1시간 동안 창 밖을 쳐다봤다. 눈물은 흘리지 않았다. 남자는 그 후 일주일 동안 매일 다른 친구를 만나 술을 마셨다. 술이 떡이 되어서 원룸에 들어와 씻지도 않고 침대에 엎어져 잠들었고 다음날 아침 술 냄새를 풀풀 풍기며 출근했다가 퇴근 후 다시 술을 마셨다. 일주일 뒤에는 함께 마실 친구가 없어 편의점에서 소주 한 병과 마른오징어를 사 와 집에서 혼자 술을 마셨다. 그렇게 술에 절어 지낸 지 이 주가 지나 남자는 갑자기 일상으로 돌아왔다. 카페에서 헤이즐넛 라떼를 시키는 여자를 볼 때마다, 커피에 시럽을 세 번씩 짜는 사람을 볼 때마다, 호두과자를 먹을 때마다, 검정치마 노래를 들을 때마다, 마블 영화 광고를 볼 때마다 누군가 떠오른다는 점에서는 아직 일상으로 돌아왔다고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다른 사람이 볼 때에 남자는 완전히 원래의 남자로 돌아온 것 같았다.  아직도 가끔 밤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잠들곤 하는 남자는 갑작스러운 두통 때문에 오후 반차를 내고 병원에 들렀다. 딱 병원 점심시간이 끝나는 1시 반에 맞춰서 갔더니 대기하는 사람이 없어 바로 진료실로 들어갔다. 신경성 편두통이라는 진단과 함께 스트레스받지 마시고 술, 담배 당분간 줄이시라는 아무나 해줄 수 있는 이야기를 들은 남자는 약국에 들러 약봉지를 받아 들고 나왔다.  시계를 보니 시간은 이제 오후 2시였다. 남자는 예상치 못하게 남아버린 시간에 무엇을 할까 골똘히 생각하다가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 근처에 가끔 갔었던 영화관이 있었다. 독립 영화나, 인디 영화, 예술 영화들을 상영해주는 영화관이다. 이 영화관은 항상 오후 1시, 3시, 5시에 각각 한 번씩 영화를 상영했었다. 1시간 안에 간다면 3시 영화를 볼 수 있을 것이다.  남자는 원래 그곳에 종종 영화를 보러 가곤 했다. 전 연인이었던 그녀를 데리고 두 번 정도 함께 간 적이 있었는데 마블 영화를 좋아하는 그녀는 왜 저런 영화를 보는지 모르겠다, 하나도 재미없다 라며 남자를 타박했다. 그녀 덕분에 둘의 데이트 때 보는 영화는 항상 토르, 헐크, 어벤저스 같은 히어로물이었다. 그래서 남자는 데이트가 없을 때 그녀가 말한 왜 보는지 모르겠는 재미없는 영화를 혼자 보러 가곤 했다.  회사 근처 병원과 영화관은 가까웠다. 걸어갈 수 있을 정도로. 버스를 기다렸다가 타고 가서 도착하는 시간이나 걸어가는 시간이나 그렇게 차이가 나지 않을 것 같았다. 남자는 걷기로 했다. 점심이 지나 어정쩡한 시간, 회사원들은 이미 사무실로 돌아가 컴퓨터 앞에 앉아 있을 시간에 남자는 거리를 혼자 걸었다. 남들보다 조금 느린 속도로 걷는 남자는 햇살이 참 따뜻하다는 생각을 했다. 사실 최근 한 달간 햇빛을 몸으로 받아 본 일이 거의 없었다. 해가 그 빛을 완전히 뿜어내기 전에 출근했고 붉은빛 외의 다른 빛들은 모두 사라진 반쪽짜리 햇빛을 받으며 퇴근했다. 회사에 나가지 않는 주말에는 점심이 한참 지나 일어나서 TV를 좀 보다가 밤에 소주 한 병을 마시고 그대로 잠들었다. 오랜만에 걸어보는 낮 거리는 생각보다 한적했고 햇빛은 생각보다 따뜻했다. 30분 정도 걷자 영화관이 보였다. 땀이 나서 정장 상의를 벗은 남자는 와이셔츠 차림으로 영화관 안에 들어섰다. 영화관은 냉방이 되고 있는지 시원했다. 남자는 익숙한 걸음으로 매표소로 향했다. 남자는 자고 있는 매표소 직원을 불렀다. “저기요.” 직원이 졸린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처음 보는 직원이었다. 항상 여기 계시던 아저씨는 잘리신 건가. 직원이 바뀌었다는 이유 하나로 남자는 약간의 생경함을 느꼈다.  “3시 영화 하나 주세요.” 남자는 카드를 내밀며 말했다. 직원이 카드를 받아 긁자 직직거리는 소리와 함께 영수증이 나왔다. 직원은 영수증과 티켓을 함께 건넸다. “영화 시작 20분 전부터 입장 가능하세요.” 남자는 네라고 대답하며 티켓과 영수증을 받아 들었다. 직원은 변했지만 분홍색 티켓에 그려져 있는 캐릭터는 그대로였다. 그녀가 이 영화관에서 유일하게 마음에 들어했던 것이 이 분홍색 티켓이었다. 남자는 물끄러미 티켓을 쳐다보다 바지 주머니에 집어넣었다. 아직 2시 40분이 되기 조금 전이었지만 남자는 상영관 문을 열고 들어갔다. 오래 묵은 건물에서 나는 냄새가 반가웠다. 그녀가 싫어하던 이 냄새를 남자는 좋아했다. 아무도 없는 텅 빈 상영관에 들어온 남자는 중간 열 오른쪽 끝 좌석에 앉았다. 항상 이 곳에 올 때마다 남자는 그 자리에 앉았다. 애초에 사람이 많이 오는 영화관도 아니거니와 몇몇 오는 사람들도 거의 한가운데 자리에 앉았기에 중간 열의 오른쪽 끝 좌석은 남자의 지정석이나 다름없었다. 앉아서 아무것도 나오지 않는 스크린을 쳐다보는 남자의 눈길에 보답이라도 하듯 조금 뒤 광고가 나오기 시작했다. 남자는 정장 상의를 옆 좌석에 대충 걸쳐놓고 스크린에 시선을 집중했다.  같은 광고가 두세 번씩 나오기를 두세 번 반복하고 나서 영화 관람 에티켓과 대피 경로 등을 티켓에 있는 것과 같은 캐릭터가 알려주기 시작했다. 그때 뒤에서 낯선 빛이 뒤에서 들어왔다. 남자는 몸을 돌려 뒤를 보았다. 한 여자가 상영관 문을 열고 들어오고 있었다. 상영관 밖의 흰 빛이 여자의 뒤에서 비추고 있었다. 푸른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또각거리는 구두 소리를 내며 상영관 안으로 걸어 들어왔고 상영관의 문이 제자리로 돌아가면서 점점 가늘어진 흰 빛은 문이 완전히 닫히며 사라졌다. 남자의 시선은 움직이는 여자를 따랐다. 여자는 구두 소리를 울리며 천천히 걸어서 남자의 정 반대편, 왼쪽 끝 좌석에 앉았다. 그리고 여자가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렸고 남자는 자신도 모르게 여자를 향했던 시선을 스크린으로 돌렸다. 왜 여자의 눈길을 피했는지 남자도 알 수 없었다.  앞에서 날아다니는 캐릭터가 사라지고 상영관이 암전 되었다. 상영관 안에는 오른쪽을 보고 있는 여자와 스크린을 보는 척하는 남자가 있었다. 탁, 탁, 타다다다다다. 영사기 돌아가는 소리가 나면서 영화가 시작되었다. 오래된 필름 영화가 스크린에 투영되었다. 여자는 스크린에서 반사된 빛이 스민 남자의 왼쪽 얼굴을 보았다. 선이 가늘고 부드러운 남자였다. 영사기에서 쏘아지는 빛의 줄기에 떠다니는 먼지들 너머로 보이는 남자의 왼쪽 얼굴은 눈길을 잡아 끄는 힘이 있었다. 갑자기 남자가 자세를 고쳐 앉았다. 여자는 황급히 고개를 돌려 스크린을 바라봤다. 이제 본격적으로 영화가 시작하고 있었다. 오래된 일본 영화였다. 시간이 쌓인 영화라서 인물이나 배경의 선이 뚜렷하지 않고 부드럽게 뭉개졌다. 여자는 요즘은 볼 수 없는 필름 영화의 미흡한 기술력에 의한 부족한 뚜렷함과 선명함이 마음에 들었다. 일본 시골 마을의 무더운 여름 풍경이 펼쳐지더니 마루에 앉아 밖을 구경하는 남자아이와 엄마의 모습이 나타났다. 아이는 일본어로 물었다. “엄마, 여름은 왜 녹색이야?” 엄마가 대답했다. “여름이니까.” 아이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영화는 일본 영화 특유의 잔잔한 분위기 아래 따뜻한 색감을 입혔다. 여름이란 온통 녹색인 시골의 남자아이와 도시에서 전학 온, 사계절이 회색이었던 여자아이가 만나 매미 소리가 울리는 녹색 산을 헤집고 돌아다녔다. 여자는 따뜻하고 부드러운 영화의 색감에 빠져들면서도 문득문득 오른쪽을 쳐다보았다. 그때마다 남자는 스크린에서 반사되는 빛에 녹색, 흰색, 노란색으로 물든 얼굴로 영화에 집중하고 있었다. 여자가 남자의 얼굴을 보고 있을 때 남자가 살짝 자세를 고쳐 앉으면 여자는 다시 스크린으로 얼굴을 돌렸다. 여자의 눈은 영화를 보면서 머리는 자신이 왜 자꾸 저 남자를 쳐다보는가에 대해 생각했다. 여자는 남자에게 한눈에 반해버렸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학생 때처럼 얼굴을 보고 한눈에 반하는 시기는 이미 지났다. 여자는 스크린에 나타난 초점이 맞지 않는 나뭇잎의 뭉그러진 녹색을 보며 생각했다. 이 공간과 시간이 주는 아무 의미 없는 우연 때문이 아닐까. 하필 오늘, 이 곳에서 이 오래된 일본 영화를 보고 있다는 기억을 공유하는 것은 텅 빈 영화관의 여자와 남자 둘 뿐이었다.  여자는 자신이 남자를 자꾸 바라보는 이유에 대해서 합리적인 결론을 내렸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 뒤로 남자의 왼쪽 얼굴을 보지 않았다는 것은 아니다. 심지어 그 생각을 한 직후, 여자가 영사기에서 쏘아지는 빛의 궤적과 그 속에서 떠다니는 먼지들을 넘어 남자의 얼굴로 자신도 모르게 초점을 맞췄을 때 남자도 스크린이 아니라 여자를 바라보고 있었다. 아주 잠깐, 먼지 하나가 유영하며 영사기가 쏘아낸 빛의 궤적을 이탈하는 순간 둘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는 둘의 눈이 마주친 찰나의 시간 동안 어떤 감각이 흘러가고 흘러왔음을 느꼈다. 어두운 영화관 안에서 제대로 얼굴을 식별하기조차 어려웠지만 분명히 여자와 남자 둘 다 알고 있었다. 서로가 서로를 의식한 채 바라보고 있었고 그것은 의미 없는 단순한 시선의 스침이 아니었다. 남자는 가끔씩 여자가 자신의 얼굴을 본다는 것과 자신이 살짝 몸을 움직일 때마다 여자가 시선을 거둔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자가 스크린을 바라보고 있을 때 남자는 고개를 살짝 돌려 여자의 오른쪽 얼굴을 보았다. 긴 생머리에 푸른색 원피스를 입은 여자는 스크린에서 움직이는 네 잎 클로버를 찾는 시골의 소년과 도시에서 온 소녀를 보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가 어떤 사람일지 궁금해졌다. 무슨 일을 하는지, 이 시간에 혼자 영화를 보러 온 이유는 무엇인지, 독립 영화나 예술 영화는 좋아하는지, 오늘은 어떤 하루를 보냈는지, 이 영화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지.  영화는 이제 막바지로 접어들고 있었다. 도시에서 온 소녀는 결국 다시 도시로 돌아가게 되었다. 영화가 시작할 때보다 조금 성장한 것처럼 보이는 소년은 내일 도시로 떠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시즈코. 녹색 여름은 어땠어?” “회색 여름보다 훨씬, 훨씬 좋았어.” 소년이 소녀에게 네 잎 클로버를 내밀었다. “그때 못 찾았던 네 잎 클로버야. 이게 있으면 도시에서도 여름은 녹색일 거야.” 소년이 내민 네 잎 클로버를 소녀가 받아 들었다. 카메라가 점점 녹색 네 잎 클로버로 줌인되더니 그 위로 하얀 일본어 글씨가 떠올랐다. ‘여름의 녹색’ 화면이 검게 변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기 시작했다. 영화관에 어두운 노란색 조명이 켜졌다. 여자는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는 걸 보며 자리에 앉아 있었다. 오른쪽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여자가 오른쪽을 보자 남자가 한 팔에 정장 상의를 걸치고 걸어오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서 두 걸음 정도를 남겨두고 멈춰 섰다. 둘의 눈이 마주쳤다. 남자가 말했다. “혹시 시간 괜찮으시면 커피 한 잔 하실래요?” “그다음에는 어떻게 됐어요?” “뭘 어떻게 돼. 그냥 커피 한 잔 마시고 헤어졌지. 그리고 끝이야.” “뭐 전화번호나 그런 거 안 물어봤어요?” “응. 안 물어봤어.” “아니 그럼 그 여자분한테 왜 커피 마시자고 한 거에요?” “그냥. 영화가 재밌었는지 궁금했거든.” 남자는 여자의 이름도, 전화번호도, 나이도 물어보지 않았었다. 영화가 재미있었는지, 원래 독립 영화나 예술 영화를 좋아하는지, 이 영화관에는 가끔 오곤 하는지를 물어봤을 뿐이다.  “아니, 형. 남자가 돼 가지고.” “야, 닥치고 술이나 마셔.” 남자는 앞에 앉은 동생의 입을 소주잔으로 막았다. 빈 소주잔에 남자가 소주를 따랐다. 투명한 액체가 꼴꼴꼴 소리를 내며 잔에 채워졌다. “그 여자분 어떻게 사는지 안 궁금해요?” 남자가 대답했다. “조금 궁금하긴 하지. 그래도 안 물어보길 잘한 것 같아.” 남자는 가끔 여자가 생각났다. 그저 한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커피를 같이 마셨을 뿐인데도 여자는 남자의 머리에 강렬한 기억으로 각인되어 있었다. 여자가 떠오를 때는 항상 그때의 기억 전부가 함께 불려 왔다. 그 날 거리를 걸을 때의 따뜻한 햇빛과 영화관에서 났던 오래된 건물의 냄새, 타닥거리는 영사기의 소리와 영화관에 떠다니던 먼지들까지 모든 것들이 되살아나면 그 가운데에 여자가 있었다.  남자는 생각했다. 그녀도 가끔 이렇게 나를 떠올릴까? 그 날의 영화와 날씨와 감각이 머릿속에서 나와 함께 재생될까?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한 잔 하자.” 소주잔 부딪히는 소리가 청명하게 울리고 남자는 소주잔을 비웠다. 남자가 소주잔을 내려놓고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술집 창문 밖에 나무 한 그루가 서 있다. 여름밤, 나뭇잎은 가로등 빛에 물들어 주홍빛 녹색이다.
단편 : 반반 무 많이
C양은 알람을 5분 간격으로 세 번째 듣고서야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벌써 회사에 갈 시간이다. 매번 일어날때마다 회사를 때려치우고 싶지만 어쩔 수 있나. 먹고 살려면 가야지. 15분 더 자는 바람에 아침에 먹으려고 사놓은 샐러드도 못 먹고 후다닥 준비를 하고 집을 나왔다. 지각은 안할 수 있을 것 같다. 이어폰을 귀에 꽂고 종종걸음으로 지하철로 향한다. 지옥철에서 빠져나와 복잡한 거리를 헤치고 회사에 도착하자 진이 다 빠진다. 시계를 보니 출근시간 3분 전. 다행히 지각은 면했다. 옆자리에는 P양이 이미 출근해 앉아 있다. P양에게 인사를 건네기도 전에 책상 위에 떡하니 올려져 있는 가죽 가방에 먼저 눈이 간다. 명품 브랜드의 신상 가방이다. 최근에 연예인이 들고 다니는 게 사진에 찍혀서 유명해진 가방이다. P양의 호구 같은 남자친구가 사다 바친 게 분명하다. P양에게 인사를 건네면서도 C양의 눈은 고급스런 상아색 가죽 가방과 자신의 오래된 검은색 가죽 가방을 빠르게 훑는다. 오전 시간, 보고서를 써야 되는데 비몽사몽한 상태로 꾸벅꾸벅 졸다 보니 어느새 점심 먹을 시간이다. “다 같이 요 앞에 점심이나 먹으러 갈까?” 부장님의 말에 P양이 입을 가리고 호호 웃으며 좋아요 라고 선수를 친다. 여성스러운 척 하는 P양을 보자 짜증이 확 솟구쳐 올라오는 C양이다. 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자들한테 온갖 청순한 척, 약한 척 하면서 일을 떠넘기는 걸 볼 때마다 얼마나 열불이 터지는지. 결국 남자 선배들한테 P양이 넘긴 일이 자신에게까지 넘어올 때마다 P양의 뒤통수를 휘갈기고 싶은 적이 몇 번인지 셀 수도 없다. P양이 꼴보기 싫어서 똥 씹은 표정으로 대답하는 C양. “C양은 오늘 표정이 왜 그래? 오늘…… 설마 그날인가? 허허허.” 저 웃고 있는 부장 놈의 주둥이를 꼬매버리고 싶지만 C양이 할 수 있는 거라곤 어색하게 하하 웃는 것 뿐이다. 다른 직원들도 어설프게 부장의 웃음에 동조한다. 부장의 뒤를 따라 사람들이 나가자마자 C양은 옆에 놓인 쓰레기통에 침을 탁 뱉는다. “이 놈의 회사, 내가 언젠가 때려치고 만다.” 회사 앞, 부장이 좋아하는 백반집 좁은 테이블에 다닥다닥 모여 앉았다. 메뉴를 정하는데 고기를 좋아하는 C양은 당연히 갈비탕이다. 왠일로 P양은 비빔밥을 시킨다. 고기가 없으면 밥도 안 먹더니 무슨 영문인지 모르겠다. 어떻게 만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메뉴 여섯 개가 눈 깜빡할 사이 나와 테이블 위에 차려진다. P양이 어머 소리를 연신 내며 비비기 힘든 척 연기를 한다. C양 눈에는 훤히 보인다. “이리 줘봐요 P양. 내가 비벼줄게.” 옆에 있는 호구 남직원의 눈에는 진짜처럼 보였는지 남직원이 열심히 손을 놀려가며 P양의 밥을 비벼준다. 고마워요, 하며 살짝 어깨를 터치하는 P양. 남자친구도 있으면서 저게 뭐하는 짓인지. 구역질이 나올 것 같은 C양이다. “그런데 P양은 고기 들어간 음식 좋아하지 않았나?” 부장이 입 안 음식을 훤히 내보이며 말한다. 밥알 하나가 튀는 건 덤이다. P양은 입을 가리고 호호 웃는다. “저도 이제 채식하려구요. 살도 빠지고 건강도 챙기고 일석이조잖아요. 게다가 다 같은 생명인데 불쌍하기도 하고요.” P양은 가식적인 슬픈 표정으로 굳이 C양이 뜯고 있는 갈비를 가리키며 말을 끝낸다. 당황한 C양은 갈비를 입에 문 채 뜯지도 내려놓지도 못한다. “역시 우리 P양 대단하구만. 생명을 생각하는 마음도 외모처럼 참 예쁘고 말이야. C양은 평생 채식은 못하겠어? 그렇게 고기를 좋아해서야, 허허.” “아…. 예. 하하.” 농담이랍시고 던지는 부장의 말에 C양은 어설프게 갈비를 내려놓고 웃는다. “어머, 부장님. 그러지 마세요. 고기 먹는 건 개인 기호지, 나쁜 건 아니잖아요. 갈비탕 맛있게 먹어요, C양.” P양은 C양을 향해 웃으며 부장의 말에 한마디 덧붙인다. 말리는 시누이가 더 밉다더니 딱 그 짝이다. 두세달에 한번씩 새로 가죽가방을 사재끼는 P양에게 저런 소리를 듣고 있다고 생각하니 C양의 속에서는 열불이 터진다. 생명의 소중함은 개뿔. C양은 외려 더 우악스럽게 갈비를 뜯기 시작한다. 6시가 지나 퇴근시간이 되자 하나 둘 자리에서 일어난다. P양은 6시 땡 치자마자 인사도 하는 둥 마는 둥 하더니 이미 자리에 없다. 저 살찐 몸이 어떻게 저렇게 빠른지 의문이다. 슬슬 일을 마무리하고 정리를 하려는 C양에게 부장이 다가온다. “C양, 미안한데 이것만 좀 해줘. 한 30분이면 끝날 거야. 내가 오늘 밤에 일이 있어 가지고 말이야.” 부장이 비실비실 웃으며 기획서를 C양의 책상에 내려놓는다. 이런 썩을. 욕이 튀어나올 뻔 한 걸 가까스로 참고 C양은 억지로 미소를 띄우며 말한다. “네. 제가 해드릴게요.” “역시 우리 C양밖에 없어. 일도 잘하고 야무지고. 부탁 좀 할게.” 부장이 C양의 어깨를 슥슥 쓰다듬더니 자리로 돌아간다. 부장의 손이 닿은 어깨가 썩어 들어가는 느낌이다. 부장놈, 고작해야 밤에 룸싸롱이나 가려고 저러겠지. 회사에서 야근하고 들어가다 근처 룸싸롱에서 잔뜩 취해서 나오는 부장을 본 적이 한두번인가. 치사하고 더럽지만 인사 평가가 얼마 남지 않아 어쩔 수가 없다. 부장한테 밉보였다가 인사평가를 개떡 같이 받아 승진을 못 했던 작년 생각만 하면 이가 갈린다. 열불이 뻗치지만 하는 수 밖에. C양은 푹 한숨을 내쉬고 껐던 컴퓨터를 다시 켠다. 그 사이 부장은 쏜살같이 사무실 밖으로 사라졌다. C양은 컴퓨터가 켜지는 사이 퇴근하고 집에서 만나기로 했던 D양에게 카톡을 보낸다. ‘야, 미안하다. 부장놈 땜에 좀 늦게 퇴근할 듯. 내 원룸 비밀번호 알지? 그냥 누르고 들어가 있어.’ 개가 펄쩍 뛰면서 OK라고 외치는 이모티콘이 스마트폰 안에서 분주하게 뛰더니 멈춘다. 누가 D양 아니랄까봐 꼭 지 같이 생긴 이모티콘을 쓰고 있다. C양은 피식 웃더니 스마트폰을 책상위에 올려놓고 워드와 기획서를 번갈아 보며 열심히 문서 작업을 하기 시작한다. 6시가 지난 사무실에는 C양과 남직원 둘까지 총 셋 뿐이다. 그마저도 6시 40분쯤 되자 한 명이 자리에서 일어나고 10분 뒤 다시 한 명이 회사를 나간다. 사무실에는 혼자 남은 C양이 타닥타닥 자판을 누르는 소리만 울린다. C양의 안경에 비친 컴퓨터 화면에는 계속해서 검은 글씨가 길어졌다 짧아졌다 길어졌다를 반복하고 있다. “으아앗!” C양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기지개를 편다. 이제야 기획서 작성이 끝났다. 이미 창 밖은 어두워진 지 한참이다. C양은 컴퓨터를 끄고 끼고 있던 이어폰을 뺀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이 조용하다. 컴퓨터가 꺼지면서 내는 위잉 소리만 빈 사무실을 채운다. 곧 타닥 소리가 나더니 컴퓨터에서 나는 소리도 사라지고 갑자기 C양은 완벽한 정적 속에 놓인다. C양은 주변을 둘러본다. 아무도 없는 사무실에 혼자 앉아 부장이 떠넘긴 기획서나 쓰고 있는 처지가 참으로 한심하다는 생각을 한다. 후, 저절로 한숨이 튀어나온다. 언젠가부터 한숨이 많아졌다. 사실 모르고 있다가 D양이 말해줬을 때에야 깨달았다. “너 요즘 왜 이렇게 한숨을 많이 쉬어?” “내가?’ D양의 말에 놀라며 반문했었던 기억이 난다. 어렴풋이 느끼고는 있었다. 한숨이 잦아졌다는 걸. 그 반문은 한숨이 잦아진 걸 그제야 알게 되었기 때문이 아니라 D양의 물음이 너는 행복한 삶을 살고 있어? 라는 질문으로 번역되어 일부러 외면하고 있던 명치 즈음을 찔렀기 때문이었다. 스마트폰이 울린다. D양이 보낸 카톡의 미리보기가 화면에 떴다. ‘아직 회사?’ 시간이 벌써 9시가 넘어간다. 검은 가죽 가방에 짐을 대충 쑤셔 넣고 자리에서 일어난 C양은 사무실 불을 끄고 나간다. 사무실은 어둠 속에 비로소 텅 비었다. 삐, 삐, 삐, 삐. 차라락. C양이 문을 열고 들어가자 지 집인 양 바닥에 드러누워 낄낄대며 TV를 보고 있는 D양이 보인다. “아주 살판 났네.” “어, 왔냐?” 누워 있던 D양과 C양의 눈이 마주쳤다. 동시에 가벼운 웃음이 터진다. “그래, 부장 새끼 때문에 이제야 퇴근했다. 내가 드러워서 진짜 회사를 때려치던가 해야지.” C양이 가방을 대충 던지고 식탁 의자에 주저앉자 D양도 슬금슬금 일어나 맞은편에 앉는다. “고생이 많다, 짜식.” D양이 C양의 어깨를 툭툭 두들긴다. D양이 식탁에 앉은 채 리모컨으로 TV 채널을 돌린다. “짜증나는 게 부장 새끼 하나면 내가 말을 안 한다. P, 그 년은 진짜 뒤통수 후리고 싶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야.” D양은 돌아가는 TV 채널에 시선을 고정한 채 묻는다. “왜, 뭔 일 있었어?” “그 미친 년이 오늘 점심 먹는 데 지 채식 한다고 하더니 내가 뜯고 있는 갈비 가리키면서 생명은 소중하잖아요, 이 딴 소리 하고 앉았더라. 고기면 환장하는 년이. 그래 놓고 오늘 또 새로 가죽 가방 사왔더라. 생명이 소중하다는 년이 그렇게 가죽 가방을 사재끼냐? 진짜 돼지들은 상종할 게 못 돼.” “와 고 년 지능적이네. 내 주변 돼지 친구들은 다 괜찮던데 그 년은 상또라이네. 상또라이.” D양이 말하느라 채널 돌리기를 멈춘 사이 TV 뉴스에서는 공장식 인간 사육에 대한 보도가 나온다. C양이 말한다. “저거 봐봐, 인간들 저렇게 사육해가지고 고기로 만드나, 가죽 벗겨서 가방으로 만드나 죽는 건 마찬가진데 무슨 채식만 하면 인간들 생명이 보장되나? 그럴 거면 인간 가죽으로 만든 제품이나 인간 실험 통과한 화장품이나 다 하나도 쓰면 안되지, 다 쳐 쓰면서 인간권 운운하는 P 같은 년들 보면 짜증나 가지고. 그러면서 육식하는 동물들 싸잡아서 생명의 소중함을 모른다느니, 뭐니 하는 거 보면 어휴. 그래도 우리 닭들 중에는 그런 닭 없어서 다행이야.” D양이 덧붙인다. “야, 우리 개들도 마찬가지야. 우리 개들은 인간 고기는 먹어도 인간 가죽 제품 같은 건 거의 안 쓴다고. 고기를 먹더라도 차라리 인간 실험 화장품이나 가죽 제품들 안 쓰는 게 인간들한테 훨씬 도움 될 거다.” “그니까, 그 돼지년 그렇게 얘기하면서 내숭 떠는 거 보면 내가 욕이 절로 튀어나온다. 게다가 오늘 가방 보니까 상아색 가죽 가방이더만. 그거 그 색깔 가죽 얻으려고 억지로 피부색 다른 인간들 교배 시켜서 만든 거잖아. 그게 잔인하냐, 차라리 깔끔하게 도축해서 고기 먹는 게 잔인하냐? 그게 동물이 할 짓이냐.” D양은 다시 TV 채널을 돌리면서 말한다. “그니까 말이다. 니가 아주 고생이 많다. 야, 그나저나 배 안 고프냐?” 지금도 열불이 뻗치는지 C양은 부리를 딱딱 부딪힌다. 벼슬도 살짝 서 있는 것이 꽤나 화가 많이 났다. “P 년이랑 부장놈 얘기하니까 빡치네. 안되겠다. 우리 인간 튀김이나 시켜 먹을까.” D양이 맞장구 친다. “오, 좋아좋아. 안 그래도 엄청 배고팠다고. 맥주도 같이 시켜봐.” 검은 가죽 가방에서 스마트폰을 꺼내려던 C양이 멈칫한다. 그래도 이 검은 가죽 가방은 그냥 흑인 가죽이지 억지로 교배시켜서 만든 건 아니니까. 자기합리화를 끝낸 C양은 마음 편하게 흑인 가죽 가방을 열어 스마트폰을 꺼낸다. C양이 익숙하게 번호를 찍고 통화버튼을 누른다. 신호음이 몇 번 울리더니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전화를 받는다. “네, 두마리 인간 왕튀김입니다.” “네, 아저씨. 여기 예원 빌라 301호인데요, 인간 튀김 기본이랑 매운 맛 반반 되죠?” “네, 됩니다.” “그럼 그렇게 반반이랑 맥주도 두 통 갖다주세요. 아, 무도 많이 주세요!” “네, 반반에 맥주 두통, 그리고 무 많이요.” “네, 빨리 갖다주세요.” C양이 전화기에서 귀를 떼기 직전, 수화기 너머에서 누군가 외치는 소리가 들린다. “인간 튀김 반반, 무 많이!”
주유 공근 (周瑜 公瑾) A.D.175~210
역사에 있어 가장 무의미 하면서도, 가장 흥미로운 것은 역시 "만약에"(Maybe)라는 가정이 아닐까 한다. 특히 역사 속 인물들에 있어서 가장 많이 적용되는 '만약에'는 'OO가 더 오래 살았다면...'이 아닐런지. 오늘의 주인공은 삼국지를 읽어본 이들에게서 바로 저 '만약에...'를 가장 많이 되내이게 했을 인물 "주유". 삼국지에서 주유는 위에서 언급한 '만약에...'에 제일 많이 언급됨과 동시에 저승에서 나관중에게 명예훼손으로 소송을 걸었다면 초호화 변호인단을 꾸린 나관중의 거듭된 항소에 3심까지 가더라도 무조건 다 승소할 만큼.. 삼국지연의 최대의 피해자나 다름 없는 너프를 먹은 비운의 인물이다. 삼국지 등장인물 중 가장 빼어난 용모 + 명문가의 귀족 + 최상류 부유층 금수저 + 너그럽고 대범한 성격 + 천부적음악재능 + 천재적 전략가 기질 + 미녀 아내 등등.... 엄친아를 넘어 먼치킨이던 이 남자는 촉빠에 제갈량빠인 나관중에 의해 "제갈량과 맞다이를 벌인 죄"로 앞뒤 안가리고 덤비는 다혈질에, 상황파악 못 하는 넌씨눈, 속 좁아서 제 성격도 못 이기는 쫌생이로 격하되었다. 어린 초딩시절, 당시 원술 휘하의 장수던 손견의 장남인 손책을 조우하고 그에게 반해 그때부터 마음 깊이 손책의 사람이 되기로 다짐한 주유는 당시 대대로 명문가에 양주지역의 큰 호족의 자제였음에도 고작 일개 장수의 아들에 불과한 손책에게 다방면의 호의를 베풀며 둘의 우정은 깊어간다. 나이는 동갑이지만 생일은 손책이 빨랐고, 손책의 모친 오국태부인도 주유를 매우 예뻐 했으며 손견 또한 주유를 아들같이 대했고 주유는 자기네 집안이 보유한 가장 큰 저택을 손책에게 선물한 적도 있었다. (역시 친구를 잘 만나야..) 지금으로 치면 하버드를 졸업하고 잘 생긴데다 머리 좋고 돈 많은 신진그룹의 조태오가 아버지가 9사단에서 대대장 하시는 내 친구 창석이랑 친구나 마찬가지다. (지금은 창석이네 아버지 예편 하시고 베스킨라빈스 하심) 삼국지연의에서 어쨌건 삼국의 한 축을 맡는 손가의 출발점인 손견에 대한 미화가 커서 그렇지, 사실 죽는 순간까지도 손견은 원술 휘하의 장수였고 더구나 손책과 주유가 알게 될 당시의 손견은 진짜 크게 대단할 게 없던 장수였다. 손책이 십대 후반이 되면서부터 주유는 양주 일대의 여러 호족들에게 손책을 소개하고 친분을 쌓게 하고 안면을 트게 하는 등 손책을 키우기(?) 시작했고 물심양면으로 손책을 조건없이 도울만큼 손책에게 잘 대해줬다고 한다. 이후 손책의 바로 아랫동생인 손권과도 친분이 깊어졌고 손권 역시 하나님같이 여기던 형의 베프인 주유를 형님의 예로 모셨는데, 놀라운건 그래봤자 친구 동생이고 무려 일곱 살이나 어린 꼬맹이던 손권을 "깍듯이" 대했고 늘 존칭과 경어를 사용했다고 한다. 지금이야 결과론적으로 주유가 손권 아랫 사람이 된 역사를 아는 우리 입장에서야 '당연한거 아님??' 이라지만 그때만 해도 손책이 그렇게 크게될 지, 손권이 그보다도 더 크게될 지는 알 수 없던 상황.... 심지어 손책은 부친 손견이 전사한 후, 원술에 의해 잉여쩌리 취급 받다 소수병력만 이끌고 독립했는데, 이 때만 해도 손책의 성공을 점치는건 고영욱이 뽀뽀뽀 진행자를 맡을 확률보다 낮았다. 아마도 주유는 손책의 대단한 포텐셜을 감지하고, 자신의 모든 걸 바쳐 손책을 크게 성장시킬 마음을 먹고서 그랬던게 아니였나 하는 짐작을 해본다. 이전 제갈량편에서 짧게 언급했지만, "전략가"로서의 자질과 능력은 제갈량 이상이였고, 실제 역사에서 조조를 사실상 유일하게 처참히 발라버린 판의 총지휘자였다. 적벽대전 당시 고작 3만 여에 불과한 겁에 질린 오군을 이끌고 2만이 좀 안되던 유비군과 연합하여 당시 약 20만 ~ 24만 여 명으로 추산되던 조조군을 지워버린 가장 큰 주역은 각 군의 배치와 전술기획, 총 지휘를 한 주유였다. 지금 우리가 보기에 24만 VS 5만은 넘사벽 차이까진 아니라 보여질 수도 있지만, 무슨 첨단무기나 장비가 있던 것도 아니고 그냥 쪽수가 깡패고 전술이던 당시 상황에서 저 차이면 대개 GG 치는 경우가 부지기수.. 더구나 저 때의 조조군은 중국 특유의 빅뻥을 가미, "100만 대군"을 자칭하며 장강(양쯔강) 상류에 진을 쳤고, 당시 분위기는 영화 "300"에서 페르시아와 스파르타의 전쟁이나 엇비슷한 분위기, 상황이였는데 오히려 이길 수 밖에 없다는 자신감으로 뭉쳐서 여유있던 주유였다. 오의 대부분 고관대작들이 항복을 주창했으나, 항전론을 외친 최초 발언자는 "노숙"이였지만 노숙은 "우리가 이김!"이라기보다는 "아마 질거임...그래도 붙어보자능!!!" 이던데 반해 주유는 항전을 넘어, 승전을 자신했다. 그는 여느 전략가들처럼 혼자 이것저것 짜내기보다 여러 책사들과 장수들과 회의를 하고 거기에서 나온 여러 아이디어들 중 "될 만한" 기획안을 채택하는데 능한 '수석' 스타일이였다. 사실 저것도 대단한 게, 정말 뛰어난 대국안이 없으면 당연히 여러 아이디어 중 뭐가 옥석인지 알 수 없다. 적벽대전의 신의 한 수였던 "화공"도 주유나 제갈량의 아이디어가 아닌 무장이던 "황개"의 의견이였던걸 주유가 채택한 것... 게다가 유비를 대단히 경계했던 사람이였다. 당시 오 내부에서 대체로 유비를 그리 높게 보는 이가 없었고, 유이하게 노숙, 주유만이 유비를 높게 봤으나 둘의 대처는 달랐다. 노숙은 유비와의 화친을, 주유는 유비 및 유비세력의 조기견제를 주창.... 만약, 손권이 주유의 의견을 따랐다면 이후 황제까지 오른 유비는 없었을 것이나, 손권도 유비를 잠재적 위협요소라 인지는 했으나, 주유만큼은 아니였고 당시의 상황도 상황인지라 노숙의 의견을 따른다. 장로가 유장이 통치하던 익주를 공격하자, 그 소식을 듣고 손권에게 서촉정벌을 주장했다.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제안이였다. 일단 천하패권보다 형과 자신이 일군 강동의 지배력 강화가 우선이던 손권과, 역시 크게 다르지 않던 시각의 오 문무대신들에게, 성공할 시에는 천하의 남쪽 절반을 먹는 서촉 정벌은 실로 스펙터클 했다. 그러나 홈에서는 막강했어도 원정능력이 그닥이던 오군 이끌고 장거리 원정에 심지어 험준한 산지에다 오군 최대 장기인 수전을 벌일 수 없던 터라, 주유의 "서촉정벌"은 '하이리턴 & 하이리스크'로 받아들여졌고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 나는데 맞손뼉 없어 흐지부지 되었으나 이를 통해 주유의 야망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솔직히 이건 좀 많이 무리수였다...) 그는 실제로 서량의 마등&한수와 연합하고 요동의 공손일파와도 협력한 후 조조의 등 뒤를 흔든 틈을 타 형주와 서촉을 온전히 손에 넣어, 양쯔 이남 점령 후 북진하여 위를 쳐부술 플랜을 갖고 있었고... 그 당시에는 심지어 조조조차 천하통일을 염두 못한 시점에서 삼국지 등장인물 최초로 천하통일 플랜을 품었던 인물이였다. 제갈량과는 앙숙처럼 나오며 못 죽여 안달처럼 이미지가 각인 되었지만, 적벽대전 당시는 제갈량을 존중했고, 이후로도 비즈니스적으로만 적대했을 뿐, 그를 상당히 대우했다고 한다. "하늘은 어찌 주유를 낳고, 또 제갈량을 낳으셨나!" (旣生瑜, 何生亮) 주유는 이 말을 한 적이 없다. 주유가 화살 맞은 상처가 아물지 않은 상태에서 제갈량 탓의 빡침에 상처가 터져 끝내 죽었다는 것은 픽션으로, 병사했고 학자들은 말라리아로 추정하는 쪽으로 무게가 기운다. 적벽대전 당시 위의 스파이 역의 장간이 연의에서는 주유와 동문으로 나오지만 이는 허구... 둘은 이 때 처음 본 사이였다. 손책과 주유의 아내인 대교와 소교가 유명한데, 대교와 소교를 얻을 당시 손책은 이미 정실이 있어서 대교를 첩으로 들였으나, 미혼이던 주유는 소교를 정실로 맞았다. 아내를 많이 사랑했는지, 굉장히 자상히 아내를 잘 챙겼던 듯 한 기록이 있다. 상당히 젠틀했고 사실상 오의 군권을 잡은 손권 다음 2인자였음에도 누구에게도 위압적이거나 하대 하는 법이 없이 예의바르고 겸손히 대했다고 한다. 손견부터 손가를 섬긴 노장 정보가 초반 그를 몹시 무시했으나 변함없이 예의바르고 자신을 공경하는 그에게 감화되어 끝내 잘못을 빌었다. 이건 왠만한 이들 잘 모르는데... 신은 공평했는지, 키는 좀 작았다고 한다.ㅋ 노숙에게 장신이던 제갈량과 마주하며 목이 아프단 말을 한 적 있다. 음악적 재능이 대단하여 아무리 정신없거나 술 취한 와중에도 곡의 연주가 틀리면 지적했다고 하고, 악기도 다루고 노래도 잘 했다고 한다. 굉장한 말술을 마셨다고 하며 오에서 손권 다음가는 주당이였으나 흐트러진 모습을 보이진 않았고 술도 주위에 강권하진 않았다. 장남은 이것도 유전인지 요절, 차남은 개망나니, 막내딸은 남편이 요절.... 자식농사는 흉작이였던 듯..;;; 홍콩 영화배우 주윤발이 주유의 후손이라고 한다. 실제로 영화 적벽에서 원래 주유 역은 주윤발이 먼저 캐스팅 제의를 받았다고 한다. 검술에 제법 조예가 있었다고 하며, 감녕과의 대련에서 호각지세를 이뤘다고 한다! 허나 그렇다고 감녕과 무력이 동급이라 할 수 없는게, 감녕은 전장에서 다수를 상대하는 마상창술 (말 타고 창질)에 능한 야전장수였기 때문. (또 실전이 아닌 '대련'이였고...) 이건... 진짜 깨는 정보인데... 주유가 오의 군권을 쥐고 있었고 오는 지리적 특성상 양쯔강의 수군이 주력이라, 오는 수군의 총사령관인 "도독"이 지상군과 수군을 총괄한다. 아무튼 주유는 그런 수군 사령관임에도 함선에 탄 적이 "거의" 없었다.(아예 없진 않음) 그 이유는.... 그 이유는..... 바로 "배멀미".... 수군 도독인데도 배멀미를 해서 함선을 왠만하면 안탔고 본인도 이게 되게 창피했는지 이를 숨기려고 꽤 애를 쓴 모양이다. (멀미약이 있었다면 역사는 바뀌었을 지도..) 아무래도 주유의 리즈가 적벽대전 당시이다보니 적벽대전 관련 이야기가 많이 나왔는데, 적벽대전에 대한 자세한 이야기는 추후 단독으로 다룰 예정이라 일부러 너무 자세히 풀진 않았음! 또 주유가 워낙 손책과 베프인지라, 손책 이야기도 좀 나왔는데, 역시 손책도 나중에 자세히 다룰 예정.
나는 마음 놓고 죽었다
'나는 마음 놓고 죽었다' / 임선경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필자는 이 소설을 밤의 고속버스 안에서 읽었다. 마지막에 연이 엄마, 정순, 숙이 엄마 셋이 문방구집 아줌마와 드잡이질을 하는 걸 보고 그때서야 마음을 놓았다. 아, 연이는 자기를 아껴주는 사람들 사이에서 무럭무럭 사랑을 배우며 자라나겠구나. 그래서 연이 엄마가 마음 놓고 연이의 곁을 떠날 때, 나도 마음 놓고 책을 덮을 수 있었다.(사실 후반부에는 눈물이 나서 훌쩍대며 읽었다.) 이 소설은 이미 죽어서 귀신이 된 연이의 엄마의 눈으로 1970년대의 풍경을 생생하게 보여준다. 필자는 그 뒷세대에 어린 시절을 보낸 사람이지만 그때의 정서는 아직 1970년대와 통하는 부분이 있었기에 필자의 경험에 빗대어 이 소설을 이해하며 읽을 수 있었다. 그때는 집 앞에 나가면 언제나 같이 깡통차기를 할 아이들이 있었고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 옆의 정자에는 할머니, 아줌마들이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를 하며 쉴 새 없이 무언가를 하고 있었다. 우리 집 앞에는 항상 할머니가 비닐 위에 말려놓은 빨간 고추가 있었다. 그 고추는 무슨 맛일까 궁금했었던 기억이 난다. 조금 잘 산다는 아이의 집 책장에는 소년소녀 세계명작이나 위인전집이 1번부터 순서대로 쭉 꽂혀있었고 가끔 책 방문 판매원이 오면 엄마는 항상 주스를 한 잔씩 드렸었다. 소설 속에서 언뜻언뜻 필자의 어린 시절을 찾을 때마다 점점 더 이야기에 빠져들 수밖에 없었다. 이 소설이 좋았던 점은 소설 속에 나오는 등장인물들이 어린 시절 필자의 주변에 실제로 있었던 사람들이라는 것이다. 숙이 엄마처럼 목소리 크고 드센 아줌마도 있었고 희철이처럼 괜히 주변 사람에게 짓궂게 굴고, 문방구에서 도둑질하다 걸리던 아이도 있었다. 숙이 아빠처럼 물건을 척척 고쳐주는 아저씨나 매일 술에 취해 들어오는 아저씨도 기억 속에 남아 있다. 책을 방문 판매하는 기석이나 딸 낳았다고 며느리를 타박하는 미호댁, 반에서 잘 사는 공주님 같은 소영이와 사별한 남자와 재혼한 정순, 아빠와 떨어져 할머니, 할아버지와 살다가 아빠가 재혼하면서 다시 아빠와 새엄마와 살게 된 연이까지. 이 책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필자의 어린 시절 어디선가 보았고 경험했던 사람들이다. 그런데 어떻게 이 소설에 빠져들지 않고 버틸까. 어린 시절의 내 이야기인데. 연이 엄마는 연이에게 못해준 것, 엄마로서 부족했던 것만 기억에 남아 죽고도 연이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귀신인 연이 엄마는 귀신을 무서워한다. 피 흘리는 기괴한 모습 때문이라기보다는 다른 귀신들이 너는 그다지 대단한 원한도 없고 이유도 없으면서 뭔데 이 이승에 붙어있느냐고 따질까 봐 그렇다. 연이 엄마가 마음 놓고 이승을 떠나기에는 연이 주변에 온통 연이를 못살게 구는 사람뿐이다. 연이의 새엄마 정순은 물론이고 주인집 숙이 엄마도 왠지 연이를 못마땅해하며 희철이는 연이를 무시한다. 그런 사람들 사이에서 연이의 아빠, 사람 좋은 기석에게 연이를 맡기고 떠나기에는 기석도 그다지 미덥지 않다. 그래서 연이 엄마는 연이의 곁을 떠나지 못한다. 그래도 연이는 혼자 씩씩하게 살아간다. 어느새 글도 혼자 깨우쳐 읽을 줄 알게 되었고 혼자서 잠도 잘 자며 자신의 엄마는 죽었다고 당당하게 이야기한다. 희철이가 무시해도 혼자 마당에서 사방치기를 하며 놀고 학교 입학식 날에도 일어서서 선생님 이름 석 자를 읽었다. 그런 씩씩한 연이를 보면서도 연이 엄마는 끝내 마음이 놓이지 않는다. 그러던 어느 날 연이가 길을 잃고 만다. 오후반 학교를 땡땡이치고 뒷산에 올라가 놀다가 깜빡 잠들었는데 산에서 내려오니 처음 보는 동네였다. 영영 집을 못 찾을 뻔한 연이를 연이 엄마가 물 없는 우물에 사는 노파 귀신에게 애원해 큰 길가로 데려가자 마법처럼 희철이가 나타났다. "야, 홍연!" 내내 연이를 찾아다녔는지 먼지 투성이다. 그 뒤를 이어 단추도 제대로 채우지 못한 웃옷 자락을 펄럭이며 숙이 아빠가 나타나 연이를 업고 집으로 향한다. 집에서는 숙이 엄마도, 찬이를 업은 정순도 자리에 앉지 못하고 서성이고 있다가 연이가 들어오자마자 정순이 달려들어 연이를 껴안고 숙이 엄마는 아이고, 관세음보살을 외친다. 기석은 넥타이가 풀어헤쳐진 채로 땀을 뻘뻘 흘리며 뛰어들어와 연이를 감싸 안은 찬이를 업은 정순을 감싸 안고 희철이와 희철이의 엄마, 아버지는 마당에 서서 그 모습을 지켜본다. 연이를 무시하던 희철이도, 연이와는 이야기 한 번 제대로 해본 적 없는 숙이 아빠도, 연이를 못마땅해하던 숙이 엄마도, 아직 연이에게 진짜 엄마 노릇을 해주지 않고 있는 것만 같던 정순도, 정순과 연이 사이에서 중심을 못 잡고 있던 기석도 연이가 사라진 순간 정신없이 모두 함께 연이를 찾는다. 그 시절에는 그런 어디서 생겨난 건지 알 수 없는 연대가 있었다. 사이가 좋지 않았던 동네 사람들 사이에서도 어떤 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서로 발 벗고 나서 도와주고 일이 해결되면 마치 자기 일이 해결된 듯 기뻐하곤 했다. 도대체 어디서 나타났는지, 언제부터 시작됐는지 알 수 없는 그런 연대가 그때에는 있었다.  그제야 연이 엄마는 마음을 놓는다. 사라진 연이를 애타게 찾아주는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연이가 얼마나 사랑받고 있는지 깨달은 연이 엄마는 드디어 이승을 떠날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렇게 떠나는 연이 엄마와 함께 독자도 연이에 대한 걱정을 놓고 책을 덮을 수 있게 만들어주는 결말은 투박하고 따뜻했다. 참 좋은 소설이다. 이렇게 빠져들어서 읽었던 소설이 얼마만이고 또 읽으면서 눈물이 나왔던 소설이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자신 안의 어린아이를 찾고 싶은 독자에게 권하고픈 소설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나는 진심으로 고마웠다. 진심으로 울고 진심으로 화내는 이 엄마들에게 고마웠다. 희숙이 엄마, 찬이 엄마가 그냥 나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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