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imddong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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ㅡ인생에 절반을 통째로 삼켜버린

밤은 어째, 고요하기만 하네요..

괜찮습니다 저는 익숙해진 탓에 살금살금 살아갑니다

굳이 감추려 하지 않아도 어차피 보이지도 않는 이 밤은

최소한의 변화만으로 평탄하게 느껴지는

정적인 이 패턴들의 풍경에 평안을 기울이는 것에 익숙해져 있습니다

하지만, 어째..

낮에 헌 옷함에 버리고 온 애정 하던 낡은 신발 한 켤레가

신경이 쓰이기는 하네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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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도 어제 얘길 해야 할 것 같다. 어제는 영화 <랑종>을 보았다. 관객들의 혹평 세례가 이어지고 있어 다소 우려했지만, 개인적으로 실망할 수준은 아니었다. 공포 체험을 확실하게는 시켜준다. 애초에 나홍진에 대한 믿음이 있었다. 그가 연출한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제작자이고, 시나리오의 원안을 썼으니 감독인 반종 피산다나쿤과 세계관을 공유하고 있을 것이었다. 관객들이 실망한 몇 가지 이유가 있겠으나, 내가 생각하기에 그 중 한 가지는 바로 선과 악의 대결장이 일종의 기울어진 운동장이라는 것이다. 살아있는 자들에 대한 죽은 자들의 원한이 곧 악을 만든 것이어서, 핍박받는 인간 쪽이 꼭 절대적인 선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굳이 나눈다면 그렇다는 거다. 이 영화는 끝날 때까지 인간들의 무력함이 이어진다. 악에 대항해 뭔가 해보지만 사실상 손 쓸 도리가 없다. 관객들은 공포를 느끼다 못해 다소 지치게 되는 거다. 영리한 영화는 악당에 공을 들인다. 악당이 너무 약하면 영화가 망작이 되기 쉽지만, 악당이 너무 비할 데 없이 강하기만 하면 그것도 문제다. 선과 악의 팽팽한 대립이 긴장감을 만드는 것인데, 악이든 선이든 어느 한쪽이 너무 강하고, 다른 한쪽이 한없이 무력하다면 관객들은 맥이 빠지기 마련이다.   몇 년 전에 보았던 <빙의>라는 한국 드라마가 떠오른다. 사실 이 드라마를 보고 나서 굉장히 충격을 받았는데, 그 충격의 원인이 뭔가 하면 이 작품 역시 악의 일방적인 우세에 있었다는 거다. 게다가 이 영화는 <랑종>과는 다르게 코메디의 지분이 꽤 높았는데, 어떠한 명분도 없이 그 유쾌한 인물들의 밑바닥을 다 드러내 버리고, 갑자기 모두 말살시킨 후 전혀 다른 장르로 둔갑시킨다. 이 작품은 결국에는 악을 처단하기는 하지만 패배에 가까운, 요령부득의 작위적인 승리를 끌어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드라마는 작가가 너무 감당할 수 없는 수준까지 악을 키워놓은 후 수습하지 못한 꼴이다. 그때 나는 단순히 작가의 무능이라고 치부하고 덮어놓을 수가 없었다. 조금 진지하게 말하건대 그건 작가가 작품의 인물들을 살해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런 기분은 처음이었다. 그건 무능을 넘어 무책임이다. 작가는 인물들을 마음대로 살리고 죽일 수 있는 사람이 아니다. 인물들이 스스로 말하고 움직이는 수준으로 만들어주어야 하는데, 그래야 명분이 생긴다. 모든 작품이 팽팽한 대립을 선사할 필요는 없다. 다만, 어느 한쪽이 그렇게까지 일방적이려면 그에 대한 명분 또한 갖추고 있어야 한다. 다행히, 그리고 나홍진 감독의 전작들에 대한 신뢰를 통해 보자면 어쩌면 당연히, <랑종>은 <빙의>와는 다르게 그렇게까지 일방적일 수밖에 없는 나름의 명분을 영화 마지막에 밝혀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너무 맥이 빠진다고 하면 할 말은 없지만 설득이 되는 측면은 있다. 지금부터는 스포일러가 섞여 있다. 이 영화가 알려주고 싶은 것은 사실 믿음에 대한 질문이 아닐까. 결국 하고 싶은 말을 무당 '님'을 통해 밝히고 있는 것이다. 무당 '님'은 신내림을 받은 후 바얀 신을 평생 섬기며 살아왔지만, 또 조카를 어떻게든 살리고 싶어 하지만 그렇게 될 거라고 섣불리 희망하지 못한다. 심지어 바얀 신이 정말로 존재하는지 모르겠다고까지 고백한다. 바얀 신이 선일지 악일지 그것도 인간은 알 수 없다. 믿음이라는 것이 결국 그런 것은 아닐까. 정말로 뭔가를 느껴서가 아니라 뭐라도 믿고 살아야 버텨지는 삶. 그 믿음을 저버리는 순간 끝도 없이 추락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은 아닐까.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님'은 바얀 신에 대한 흔들리는 믿음을 토로하고, 얼마 뒤 미궁의 죽음을 맞이한다. 인간이 원혼들에게 그토록 무력하게 짓밟히던 그 모든 장면이 조금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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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빈센조>를 오랜 시간에 걸쳐 다 보았다. 개그 스타일이 어쩐지 익숙해서 찾아보니 <열혈사제>와 같은 작가다. 사실 이 드라마는 사랑스러운 캐릭터들이 여럿 있지만, 역시 송중기로 시작해서 송중기로 끝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개인적으로는 <태양의 후예> 이후 송중기의 연기 행보가 썩 달갑지는 않았었다. <태양의 후예>에서의 송중기는 사실 정말 멋졌다. 그러나 그 이후로 그가 계속해서 '나 멋있지?'라고 말하는 듯한 그런 배역들만을 골라서 연기하는 것 같아 금세 질리고 말았던 것이다. 사실 영화 시나리오는 소위 가장 잘나가는 배우가 아닌 이상 전적으로 그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도 아니고, 철저히 자본과 결탁되어 골라지는 나름대로 최선의 결과이겠지만, 영화판에서의 송중기의 위치는 그렇다 쳐도 드라마에서는 나름대로 선택의 반경이 넓을 것이라 생각한다. 그러나 이번 <빈센조> 역시 송중기는 어김없이 멋 그 자체의 남주이고, 그냥 멋지다 못해 거의 신격화된 수준의 캐릭터가 아닌가 싶을 정도다. 다행인 것은 이번 역시 잘 해냈다는 것이다. 결국에는 나 역시 극 중 '빈센조 까사노'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빈센조 까사노는 <태양의 후예>의 유시진을 넘어서 우아하기까지 하다. 그렇다. 어쨌든 배역을 잘 소화했으면 된 것인데, 잘 소화한 만큼 다음 작품을 고르기는 더 힘들 거라는 생각이 든다. 아마 송중기는 배우로서 앞으로의 계획을 잘 세워야 할듯싶다. 벌써 삼십 대 후반인 그가 다양한 연기 스펙트럼으로 배우력을 증명해야 할 때가 곧 오지 않을까.
사유글자화
잘 지내고 계신가요? '잘'만큼 지극히 주관적인 부사는 없다고 생각하지만 잘 지내고 계시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물음이었습니다. 오늘 날씨, 2019 첫눈, 체감온도 뚝! ⠀ 눈 내려요. 단톡방에서 네 글자를 보자마자 타자기에서 손을 떼고 문 앞으로 달려나갔다. 눈이 내리는구나. 눈을 처음 본 아이처럼 내리는 눈을 바라보고 또 바라보다 너에게 연락을 했다. ⠀ 밖에 눈이 내려. ⠀ 30분쯤 지났을 때 너에게 답이 왔다. ⠀ 여기는 눈이 안 와. ⠀ 손 위의 눈이 녹는지도 모른 채 온난하던 때가 있었다. 전화기로 흘러들어오는 목소리만 들어도 웃음이 나고 밤잠을 줄여가며 이야기를 나누던. 모든 것은 과거형이 되어버렸고 현재 남은 건 말라버린 입술과 초점 없는 눈빛 정도. 하얀 빛이 투영된 눈 속에 네가 담기고 의미를 알 수 없는 눈물이 흘러내린다. 빈 기둥 형태의 결정이 바닥에 떨어져 내려 깨진다. 독감기로 인해 며칠째 누워있는 방 여기저기에 젖어있는 것들이 널려있다. 가습기를 켜 놓지만, 엄마는 불만족스러우신지 젖은 수건과 그날 손빨래한 것들을 문 뒤와 옷장 여기저기에 널어두신다. ⠀ ''방 안이 건조하면 안 돼.'' ⠀ 뜨거운 입김을 내뿜으며 천장을 바라보다가 옷장 문고리에 걸려있는 회색 맨투맨으로 눈길이 향한다. 밀물과 썰물의 형태를 하고 있는 옷의 물기는 위에서부터 말라가고 있다. 이곳은 서해안도 동해안도 아니니 큰 차이 없이 방 안의 건조도에 따라 짙은 회색에서 옅은 회색으로 변해갈 것이다. 바다가 보고 싶었던 자는 말라가는 옷에서도 바다를 본다. “여기 사서예요?” 널브러져 있는 짐을 치우고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는 발을 내려달라고 말한 나에게 그가 물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째려볼지언정 그 어떤 말도 하지 않은 채 나의 말에 따랐기에 이 물음은 날 당황시키기에 충분했다. 벌게진 얼굴로 “네”라고 대답한 채 몸을 틀어 그곳을 빠져나왔다. 1층으로 내려와 CCTV 화면으로 그를 바라본다. 짐을 치우고 테이블 위의 발은 내려져 있으나 여전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 내가 사서가 아니면 뭐. 하는 마음도 있었지만 그가 요즘 매일 오는 노숙자인 것이 짜증 나는 탓이다. 정해진 주거 없이 주로 공원, 거리, 역, 버려진 건물 등을 거처로 삼아 생활하는 사람. 노숙자에 대한 사전적 정의를 찾아보며 그의 큰 배낭과 양손에 쥐고 있는 4개의 비닐 꾸러미를 떠올리다가 코를 쥐어 잡는다. 처음부터 그가 싫었다. 숨쉬기 싫을 정도의 냄새에 어지러움을 느꼈을 때부터 일 거다. 닦지 않아 뿌옇게 변한 안경을 쓴 채 서가 사이를 오가는 도서관에 오는 노숙자. 주민등록증상의 주소가 서울이면서 왜 인천까지, 그것도 수많은 장소 중에서 왜 도서관에 오는 것일까. 왜 쉴 새 없이 허공에 대고 말하는 것일까. 왜. 도대체 왜. 타인에게 수많은 물음을 가지기는 오랜만이었다. 그 또한 많은 의문을 가졌을까. 내가 왜 이렇게 되었을까. 갈 곳이 없는 나는 어디로 가야 하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 것일까. 신은 나를 버린 걸까. 언제까지 혼자여야 하는 것일까. 사람들은 왜 나를 싫어할까. 왜. 도대체 왜. 혼잣말을 중얼거리는 그를 보며 쥐고 있던 주먹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과거로부터 비롯된 것들이 현재라는 모습을 하고 있고 이는 미래로 연결된다. 그의 과거에 현재에 대한 답이 있을 거고, 그가 해야 하는 일은...’까지 생각하다가 주먹을 쥐었다. 나 같은 사람이 곁에 없었을 리 만무하다. 모든 것은 그가 자초한 것일지도 모른다. 어쩌면 타인에 대한 무관심이 그를 그렇게 만들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때의 난 냉정했고, 그랬기에 네 경찰에게 둘러싸여 내가 왜 도서관을 떠나야 하냐며 항변하는 그를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그 무서운 사람 떠났어요?” “경찰에 신고해서 떠났어요. 이제 안 올 거예요.” 덩치 크고 쉴 새 없이 혼잣말을 하다가 이따금 말을 걸어오던 그는 어느샌가 무서운 사람이 되어 있었다. 그의 부재가 모두에게 평온함을 가져다준다는 현실이 손바닥의 손톱자국을 더 깊고 선명하게 만든다. 의문이 의문에서 그쳤을 때 비롯된 것들이란 이런 법이다. 인간이 느낄 수 있는 5가지 감각을 오감이라고 하며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이 이에 해당한다. 공책에 '커피 같은 경우 5가지의 맛 중 평균적으로 3가지의 맛을 느낀다고 함' 이라고 적고 그 아래로 세 개의 선을 긋는다. 신맛, 쓴맛, 그리고 공란. 한 가지 맛이 생각나지 않는다. 책을 펼쳐보니 단맛이란다. 내 인생에서 빠진 요소라서 생각나지 않은 것일까. 모든 것이 충족된 채 태어나더라도 살아가면서 수많은 것들을 겪다 보면 추가되는 것도 빠지는 것도 있는 법이다. 단맛에 노란색 형광펜을 진하게 긋고 다음 문장으로 넘어간다. 향미의 호불호는 개인의 감각적 예민함과 선호에 달려 있기 때문에 답은 언제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에게 있다고 한다. 이 문장을 읽으며 커피를 삶과 연결 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답은 언제나 커피를 마시는 사람에게 있다'는 말은 '모든 것은 나에게 달렸다'는 주체적인 말과 결이 비슷하기 때문이다. 커피 관련 서적은 오랜만이기에 흥미를 느끼며 다음 장으로 그다음 장으로 책장을 계속해서 넘긴다. 커피를 마시는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모든 조건이 동일하다고 가정했을 때 대다수의 사람들이 좋아하는 커피를 만들 수 있는 최적의 온도가 이론적으로 존재한다고 한다. 바로, 90~96°C. 물은 100°C에서 끓으나 커피는 90~96°C에서 맛있다는 점이 위로가 된다. 결여된 것이 많은 자에게 6°C의 차이란 그런것이다. 부족한 것으로부터 느낄 수 있는 안정감. 이 역설속에서 오늘도 오감으로 커피를 마신다. 그대를 누구보다도 사랑합니다. 동백꽃의 꽃말같은 사랑을 꿈꿨던 적이 있었다. 말 그대로 꿈인걸 안 뒤로는 그거 다 진부한거라고 치부해버렸지만. '동백꽃 필 무렵.' 오늘은 사랑한다는 말을 하고 싶게 만든 드라마에 대한 이야기를 해볼까한다. 주변인들에게 추천만 하다가 이렇게 글로 남기는 이유는 울었기 때문이다. 울고 싶어도 울지 못하던 내가 소리까지 내가며 눈물을 뚝 뚝 흘렸다. 사는게 형벌이라던 극 중 어머니는 너와 함께한 몇 년이 적금을 타는 것 같았다고 말한다. 평생을 사랑했다한다. 이 드라마를 보며 꽤 자주 울컥 거렸고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사랑이 고팠던걸까 싶을정도로. 남녀와 부모 자식간의 사랑의 결은 다른듯해도 비슷한 구석이 꽤 많다고 생각한다. 순수한 교차점이 우리를 살게 한다. 얼마전에 사랑한다는 말을 입 밖으로 낸 적이 있다. 생경함에 얼굴이 붉어지다 온 몸이 물들어버렸다. 사랑이 아닌 내가 진부했구나 생각하며 한번 더 사랑한다고 말한다. 사랑해 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