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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조금 늦게 잔 탓도 있지만 오늘은 어찌나 잠이 자도 자도 쏟아지는지 중간에 두세 번을 깼으면서도 일어날 생각이 들지 않았고, 거의 정오까지 계속해서 잤다. 언제나 그랬듯 자는 동안 쉬지 않고 꿈을 꾼 듯한 느낌이다. 그 모든 것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인상적으로 다가온 것 중 둘은 그것이다. 하나는 내가 아는 한 사람이 아주 오래된 느낌의 남루하고 촌스러운 옷을 입고 등장한 것이다. 내가 평소에 생각하는 그는 나보다 한참 젊은데도 불구하고 고루한 가치관을 갖고 있는데, 그에 대한 내 생각이 옷차림에 반영된 것은 아닌가 싶다. 또 하나는 최근에 어떠한 이유로 오랫동안 보지 못하고 있는 친구의 등장이었는데, 평소 나는 그가 별일 없이 잘 지내기를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꿈에서는 그에게 크게 화를 내고 있었다. 그 친구에 대한 양가적인 마음 중 내가 애써 숨기고 있는 감정이 꿈에서 드러난 것일 테다. 특히 첫 번째, 옷차림으로 발현된 그에 대한 내 평가의 반영을 떠올리면서 이건 거의 프로이트의 연구 사례 같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잠이 계속해서 쏟아지는 이유는 이처럼 계속되는 꿈으로 인한 숙면의 불능 때문일 텐데, 이렇듯 나는 꿈 없는 잠을 자본 기억이 거의 없다. 이건 아마 지나치게 걱정이 많고 고민이 많고 생각이 많은 성향 때문이겠지만, 요즘은 종종 그러한 꿈의 범람이 성가시다는 생각도 든다. 사실 꿈을 꾸는 것은 즐겁기도 하다. 특별히 악몽을 꾸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하도 꿈을 꾸는 통에 새벽녘에 일어나면 그 사이에 꿈이 휘발돼버릴까 싶어 곧바로 인터넷 창을 켜고 그 꿈의 해몽을 검색해보기도 한다. 그 해몽들이 들어맞는 경우는 사실 거의 없다. 그러나 나는 꿈을 통해 요근래 나의 강박이 무엇인지를 되짚어보기도 한다. 내가 애써 숨기고 있는 고민과 욕망들이 대개 꿈으로 나타난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동안 참 여러 가지 양상의 꿈들을 경험해 본 것 같다. 물론 착각에 의한 것도 있겠지만 꿈을 꾸면서 오감을 다 느껴보고자 했고 느껴본 적이 있다. 현재까지 나는 오감 중 미각을 빼고는 모두 경험해 보았는데, 가장 어려운 것이 촉각과 미각이었다. 시각적인 꿈은 대개 총천연색으로 나타나지는 않고 한 지점만 명확히 컬러를 드러내는 경우다. 그러니까 흑백이라고 정의하기도 사실상 힘들지만, 가령 흑백에 가깝다고 인지되는 풍경 가운데 누군가의 티셔츠만이 빨간색으로 드러나는 경우이다. 후각적인 꿈의 경우는 기억하기로는 두 번인데, 둘 다 탄 냄새였다. 선잠에 들어있는 경우였는데, 나는 그것이 분명 현실의 냄새라고 생각했지만, 잠에서 깨자 냄새가 바로 사라졌다. 두 번의 경우 모두 그렇다. 내 인지의 불명확성을 조금도 고려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어쨌거나 두 번이나 있었던 일이다. 청각의 경우는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누군가 불러준 문장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보고 읽은 것이 아니다. 분명히 누군가의 목소리로 발음된 것들이 많다. 그러나 이것은 대개 메모장에 적어놓고 맨 정신으로 읽어보면 건질 만한 것이 없다. 촉각은 꽤 힘들었지만, 어떤 물건의 테두리를 꼭 움켜쥐고 그 감각을 기억한 것인데, 일어났을 때 내 주위에 꿈 속의 물건으로 착각을 했을 만한 그 어떤 것도 없는 상태였다. 그러니까 현실에서 내가 어떠한 물건을 잠결에 잡았을 경우, 꿈 속에서 그것이 다른 물건으로 발현되어 촉각에 도움을 받을 수도 있는 것인데, 그럴 만한 물건은 내가 누워 있는 곳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나는 꿈속에서 온전히 현실의 어떤 도움 없이 내 의식이 만들어 낸 촉각을 경험한 것이다. 물론 그것이 온전히 착각이 아니라면 말이다. 미각은 사실 최근에 경험을 했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아무래도 아닌 것 같다. 아직 미각은 성공하지 못했다고 봐야 할 것 같다. 가위는 아주 어릴 때 한 번 그리고 청소년기에 한 번, 그리고 요즘은 아주 피곤할 때 가끔씩 한 번 눌린다. 대개 가위에 잘 눌리는 사람들은 악몽을 동반한다고 하는데, 내 경우 가위가 특별히 악몽을 동반하지는 않는다. 그러나 몸을 움직이지 못하고, 목소리를 내지 못하는 그 상황보다 더한 공포는 사실 없다. 꿈을 꾸면서 이것이 꿈이라고 인지하는 자각몽 역시 두어 번 정도 꿨고, 역시 어릴 때 꿨다. 최근에는 전혀 꿔본 적이 없다. 이처럼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꿈에 대한 비슷비슷하면서도 특별한 경험들을 갖고 있을 것이다. 작년에는 어떤 잡지에 시 세 편과 산문 한 편을 발표했는데, 그 중 한 편은 실제로 경험한 일을 꿈을 꾼 것처럼 각색한 것이고, 한 편은 꿈에서 경험한 일을 실제 겪은 것처럼 각색한 것이었다. 그리고 나는 산문에 썼다. 이토록 꿈을 많이 꾸는 삶이라면 차라리 꿈이라는 것이 생시와 동일한 지분을 갖고, 하나의 견고한 세계로 존재했으면 좋겠다고. 그때 우리는 어느 쪽을 꿈으로, 생시로 불러야 할까. 그런 경계가 모호해진다면, 그렇다면 우리가 현실에서 좋지 않은 일을 겪었을 때 꿈에 가서 이 한 마디를 하면 그만 아니겠냐고. "참 나쁜 꿈을 꾸었군." 꿈이 마치 생시와 평행세계처럼 흘러간다면, 그래서 내가 같은 꿈을 계속 이어서 꾼다면 어떨까. 꿈에 가면 생시처럼 내가 사는 집도 있고, 내가 다니는 직장도 있고, 또 그쪽 세계의 내 부모가 다르고, 내 친구들이 다르다면. 우리는 남루한 일상을 반대쪽 세계를 통해 상쇄시킬 수도 있을까. 우리는 실제로 현실처럼 너무나 생생한 꿈을 꾸기도 하고, 꿈에서나 일어날 것 같은 놀라운 일을 현실에서 마주하기도 한다. 우리의 감각 체계가 너무나 무딜 뿐 어쩌면 그런 세계는 이미 존재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 오늘도 나는 무척 높은 확률로 꿈을 꾸게 될 것이다. 내게 알은 체를 하며 다가오는 이가 있다면 물어봐야겠다. 우리 집이 어디냐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