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체르노빌/Chernobyl(2019)

체르노빌에서 일어난 일을 그대로 그려낸 영화나 드라마가 아직까지 없었다는 점이 좀 의아하기는 했는데, 다시 생각해 보면 이해할 수 있는 일이기도 하다. 워낙에 인류 전체의 비극적인 사건 중 하나였기 때문이다. 차라리 괴물이 나오는 게임이나 영화로 하는 편이 더 마음이 편해지지 않았을까.

물론 나도 체르노빌의 상황은 콜오브듀티 모던 워페어의 잠입 미션으로 배웠… 이, 이게 아니고 HBO가 이 드라마를 매우 잘 만들었다. 고증 오류가 물론 없지는 않은데(참조 1, 2), 이 복잡한 사건을 그나마 알아볼 수 있게 해 준 공이 크다. 뭣보다 우리가 이렇게 아무 생각 없이 살아가는 것을, 가능하게 해 준 영웅들이다.

이를테면 그냥 불 끄는 게 일이니까 달려갔다가 화를 당한 소방수와 그를 끝까지 쫓아가 임종을 지켜봤던 그의 아내, 펌프를 작동시키겠다면서 자살 행동임을 알고 발전소 하부에 진입하기를 지원한 세 명의 엔지니어들, 자기가 직접 보고 태도를 바꿔서 모든 걸 지원했던 고위 간부, 묵묵히 옥상에 나아가 폐기물들을 40초 동안만 해치웠던 “바이오 로봇”들.

그리고 뭣보다 과학자들의 활약이 돋보인다. 물론 주연급의 울랴나 코뮤크(Ulana Khomyuk/Ульяна Хомюк)는 실존 인물이 아니지만 당시 레가소프(Валерий Алексеевич Легасов)를 도왔던 수 많은 과학자들을 상징하며, 또 여성이기도 하다(참조 3). 학자들의 양심이 레가소프의 마음을 더 움직인 것은 분명할 수 있겠다(참조 4).

의외의 인물로, 마지막화에서 검찰 역할을 했던 배우(Michael McElhatton)가 반가웠다. 왕좌의 게임에서 볼튼 가문의 수장을 맡았던 그 배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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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가령 광부들 장면에 대한 오류는 아래와 같다.

Chernobyl: The real-life heroes of nuclear disaster watch TV hit(2019년 6월 4일): https://news.sky.com/story/chernobyl-the-real-life-heroes-of-nuclear-disaster-watch-tv-hit-11734773

광부들의 보드카 음용 -> 보드카는 언제나 업무 후에 마심
광부들의 나체 -> 몇몇 사례는 있지만 전체는 아님
총을 겨누고 광부를 모집 -> NO.

2. 그 외에도 꽤 많은 오류가 있기는 하다. 당사자의 직접 증언을 들어 보자. 이를테면 집 안의 동물들을 쏘는 장면은 극화를 위해 만들어졌다.

What HBO got wrong: Chernobyl general gives hit TV show a reality check(2019년 6월 8일): https://www.rt.com/news/461348-chernobyl-disaster-tarakanov-hbo/

3. Ulana Khomyuk From 'Chernobyl' Is Not Based On A Real Person, But Emily Watson's Character Is Important All The Same: https://www.bustle.com/p/ulana-khomyuk-from-chernobyl-is-not-based-on-a-real-person-but-emily-watsons-character-is-important-all-the-same-17304139

당시 화학 쪽 Ph.D.의 여성 비율이 소련은 40%에 육박했다고 한다. 마지막 화에 나온, 소련 과학 아카데미 학자들이 모인 재판장에서도 보면 대략 4:6 정도의 비율이다.

4. 다만 레가소프의 자살 원인은 좀 불명확스러운 부분이 있다(참조 2). 드라마에 나온대로 왕따가 된 것은 맞는데, (BBC 다큐멘터리에 따르면) 그의 주장/제안에 따라 소련식 원자로의 흠결을 당국이 인정하고 수정에 나서기는 했기 때문이다.

게다가 드라마에는 나오지 않은 아들의 문제(사람을 죽였다)도 겹쳤고 해서 상당히 불안한 심리 상태였던 것만은 분명할 것이다. 실제로는 오디오테이프를 숨기지 않았고 그냥 남겼으며, 자살한 장소에 대해서는 (정확한 경찰 기록이 없어서인지) 논란이 좀 있다.

5. 사진은 아래 사이트에서 가져왔다. 옥상의 핵폐기물을 치우는 liquidator(ликвида́тор)들의 모습이다. 70만 명이 동원됐다고 한다.

Chernobyl, remembering brave Firemen and forgotten heroes(2019년 4월 18일): https://www.emergency-live.com/news/chernobyl-remembering-fire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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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독에 접근했던 소련
상당히 흥미로운 문서가 공개됐다. 미국 워싱턴 DC의 조지워싱턴 대학 내에 위치한 National Security Archive에서 아나톨리 체르냐예프(Анатолий Сергеевич Черняев, 참조 1)의 노트를 공개했다. 때는 1978년 봄, 브레즈네프 서기장 동지(...)는 서독과의 동맹을 추진했다. 네? 이게 상당히 좀 충격적인데, 브레즈네프는 서독의 제1동맹이 소련이 되고 제2동맹이 미국이 되기를 원했으며, 반대급부로 서독에게 폴란드 분할(!!!)을 제의할 참이었다. 당연히 원본 문서를 러시아나 독일은 절대로 공개하지 않을 듯 한데, 브레즈네프의 계산은 서독의 기술과 소련의 광물 교환이었다. 소련의 경제에 뭔가 충격 요법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브레즈네프는 이미 깨닫고 있었다는 의미다. 그는 서독도 소련의 제안에 매력을 느끼리라 여겼었다. 빌리 브란트였다면 혹시 검토 정도는 했을지 모르겠다. 문제는 헬무트 슈미트(참조 2)였다. 헬무트 슈미트는 7-80년대 서독의 역사를 아신다면 익숙하시겠지만, 정통 친미파였다. 말 많고 시끄럽던 퍼싱 미사일(독일 드라마, Deutschland 83에서 잘 묘사하고 있다)의 배치를 적극 추진(이는 그의 몰락을 가져온다. 참조 3)했던 인물이었다. 헬무트 슈미트는 소련의 무력 증강을 멈추기를 요구했다. 당연히 얘기가 안 될 수밖에. 그 정도 요구라면 미국이 말해야 들을까 말까였다. 물론 고르비빠 레이건이 나중에 소련과 함께 군비 축소를 실시하기는 하지만 그건 다른 주제이다(참조 4). ---------- 참조 1. 외교부장관은 아니고 외교 자문관이었다. 정식으로는 중앙당 외교위 위원이었기 때문에, 후에 고르바초프의 외교 총비서를 역임했고 영국 전문 역사학자이기도 하다. 조지워싱턴 대학측에는 2004년에 자신의 문서를 기증했다. 참고로 1986년, 역사적인 레이건-고르바초프의 아이슬란드 정상회담을 이끌어낸 주역이기도 하다. 2. 헬무트 슈미트의 사망(2015년 11월 11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3657527749831 3. 헬무트 콜의 서거(2017년 6월 18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5321334934831 4. 헬무트 콜과 겐셔, 냉전이 어떻게 연장될 뻔 했는가(2018년 3월 28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6148945509831
소련은 어째서 미국에게 우주개발을 뒤졌는가
https://www.lemonde.fr/festival/article/2019/07/16/pionniers-de-l-aventure-spatiale-les-sovietiques-ont-pourtant-perdu-la-course_5490102_4415198.html 소련은 어째서 달탐사에 뒤쳐졌을까? 60년대 초까지만 해도 미국보다 "월등히" 앞서간다는 인상을 전세계에 심어줬던 소련인데 말이다. 최초의 인공위성, 강아지(참조 1), 남녀 조종사, 달 궤도, 우주 유영 모두 소련이 먼저였다. 결론부터 말씀드리자면 주된 이유는 두 가지 정도로 말할 수 있다. 첫 번째는 실패를 알리거나 인정하지 않는 공산주의 방식이고, 두 번째는 단일 조직 안에서의 내부 경쟁이었다. 공산주의 방식은 어떻게 보면 치명적이다. 소련이 우주 개발에 있어서 먼저 나아간 것은 그만큼 여러 분야에 걸쳐 많이 있었다. 다만 그만큼 실패도 많았다. 어쩌면 애초에 의도치 않게 스푸트니크를 성공한 까닭에 그럴 수 밖에 없기도 했다. 승자의 저주라고 할 수 있을까? 1957년 스푸트니크를 올릴 때, 소련은 다들 인공위성을 탑재했던 대륙간탄도미사일 로켓(R-7)의 강력함에 대한 반응을 기대했었다. 게다가 그 초보적인 위성이라는 것이 로켓 개발사를 아는 누구나 기억하실 이름인 세르게이 파블라비치 카랄료프(Сергей Павлович Королёв)가 우겨서 인공위성을 집어넣은 것이었다. 내부적으로, 특히 발렌찐 피트라비치 글루슈코(Валентин Петрович Глушко)의 반발이 심했는데, 1957년이 마침 10월 혁명(러시아 혁명) 40주년인지라 후르쇼프가 카랄료프의 손을 들어줬었다. 그래서 스푸트니크의 내부 별명은 카랄료프의 "개인 장난감(личной игрушкой, 참조 2)"이었다. 그런데 "스푸트니크 충격(Sputnik crisis)"이라는 영어 표현이 생길 정도로 미국에 충격을 준 것은 R-7이 아니라 스푸트니크 위성이었다. 소련 정부 입장에서 보니, 예기치 않게 공산주의의 위대함을 선전한 꼴이었다. 스푸트니크의 성공은 우주로 진출하는 인류이자 해방자인 소련의 위상을 올려줬다. 자, 이제부터는 오로지 소련의 영광 뿐이야. 즉, 실패가 있어서는 안 됐다. 가령 1965년 3월, 생방송됐던(!) 최초의 우주유영(알릭세이 리오나프(Алексей Архипович Леонов)은 다시 우주선 진입시 문제가 좀 있었다. 우주복이 부풀어 올라서 출입구에 안 맞았던 것이다. 그리고 텔레비전은 갑자기 클래식 음악 방송으로 바뀐다(참조 3). 그리고 이듬해 카랄료프가 사망한다... 이때부터 갑자기 사건 사고가 많아진다. 소유즈 1호는 폭발했고, 새로 디자인한 로켓도 계속 폭발했다. (물론 미국도 아폴로 1호의 대참사가 있었다.) 특히 달을 향한 소련의 45회의 시도 중 성공 건수는 15건에 불과했다. 1/3의 성공률이지만, 실패한 사례는 소련의 담당자들 외에 아무도 몰랐다. 이렇게 내부적으로 실패가 누적됐지만 알리지를 않으니, 해결할 유인도 더 떨어졌다. 게다가 더 큰 이유는 내부 경쟁 격화였다. 바로 두 번째 큰 이유다. 잠시 시간을 현대로 돌려서 마이크로소프트가 Zune이라든가 Windows Mobile이라든가 SPOT Watch라든가 등등, 계속 실패만 거듭하고 있을 때 주된 이유로 거론됐던 것이 바로 마이크로소프트 사내 상대평가 시스템(Stack Ranking)이었다. 내부 경쟁을 북돋아서 회사 전체의 생산성을 늘리자는 아름다운 취지였지만, 그 결과는 사내 암투와 정보 독점 전쟁 뿐이었다(참조 4). 흐루쇼프도 똑같은 생각이었다. 계란을 한 바구니에 담지 말아야 하기도 하고, 경쟁을 시켜야 더 아름다운 결과가 나오지 않겠나? 결과는 내전이었지만 말이다. 심지어 흐루쇼프는 달탐사 프로젝트를 두 곳의 디자인실(OKB, 참조 5)에 각각 맡겼다. 1/3의 성공률이 이제 이해될 것이다. 미국은 오로지 NASA 한 곳만 맡았지만 말이다. 그래서 엔진 수를 늘리느냐, 엔진 자체를 강력하게 만드느냐로 파가 갈리고, 위에 나오는 글루슈코는 계속 카랄료프를 반대하고, 난리도 아니었다. 소련이 꼭 이상한 분야에 자본주의식 경쟁을 도입해서 별로인 결과를 내는 것 또한 처음이 아니다(참조 6). 달 착륙 경쟁은, 그에 따라 미국이 앞서갔다. 1969년 7월 13일, 아폴로 11호가 올라가기 3일 전, 소련도 루나(Луна) 15호도 상공에 올라갔었다. 궤도에 안 부딪히게 하자고 최초의 미소간 우주 협력이 있기도 했지만(참조 7), 루나 15호는 달에 충돌하면서 실패작이 되고 만다. 물론 소련은 달에 무인 차량을 보내서 달 토양 샘플도 지구로 가져오고 하는 등, 업적을 남기기는 남겼다. 그러나 지금은 모두들 아폴로 11호만 기억하고 있다. 게다가 미국은 관대했다. 닐 암스트롱이 달에 내려갈 때, 그는 지구에서 챙긴 "패키지" 좀 내보내라고 올드린에게 명한다. 이 패키지 안에는 1967년 아폴로 1호의 사망 대원들과 당시 이미 사망했던 유리 가가린, 소유즈 1호 폭발로 사망한 블라지미르 카마로프(Владимир Михайлович Комаров)를 기리는 메달이 담겨 있었다. ---------- 참조 1. Félix et Félicette(2013년 10월 4일): https://www.vingle.net/posts/194536 2. 기사에서는 "카랄료프의 장난감(le jouet de Korolev)"이라고 표현해서 약간 다르기는 하다. 60 лет назад СССР запустил в космос первый искусственный спутник(2017년 10월 4일): https://www.currenttime.tv/a/28773650.html 3. 물론 안의 공기를 빼서 무사히 복귀하여 지구로도 귀환했다. 그러나 당시 시청자들은 모두 그가 사망했으리라 짐작했다. 게다가 이 우주선(Восход)의 착륙지 또한 일종의 사고(오차가 수 백 킬로미터였다)가 나서, 소련은 향후 우주 프로그램용 우주선으로 소유즈(Союз)를 사용한다. 4. 현재 (사라지지는 않았지만) 상대평가 항목이 제거됐으며, 그것만으로도 큰 개선을 봤다. Microsoft axes its controversial employee-ranking system(2013년 11월 12일): https://www.theverge.com/2013/11/12/5094864/microsoft-kills-stack-ranking-internal-structure 5. Опытное конструкторское бюро의 준말인 Окб/OKB이다. 직역하면 "실험디자인실", 가령 OKB-1은 카랄료프가 맡았었다. 6. 소비에트 인테르니옛(2018년 7월 8일): https://www.vingle.net/posts/2439487 "최초의 글로벌 컴퓨터 네트워크는 협조적인 사회주의자처럼 행동하는 자본주의자들 덕분에 태어났다.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자들처럼 행동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낳은 것이 아니었다." 7. Recording tracks Russia's Moon gatecrash attempt(2009년 7월 3일): https://www.independent.co.uk/news/science/recording-tracks-russias-moon-gatecrash-attempt-1730851.html
소련 시절, 우크라이나의 히피
히피스러운 주말 특집, 소련에도 히피가 있었을까? 답변, 있었습니다. https://www.eurozine.com/the-hippies-of-soviet-lviv/?fbclid=IwAR2iVPhxTNg6ocitUSA5yarngGfpoNCVjgH477wXGkN4ANIg5YTH3ad-cKQ 물론 미국식의 주류 문화화된 히피 문화가 소련에 있었다는 말은 아니다. 소련이라는 체제의 특성 상 정치화는 피할 수가 없었고, 그에 따라 당연히 소련 당국의 개입이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소련의 히피들은 KGB의 상당한 주목을 이끌어냈다. (짤방의 중앙 인물은 에스토니아의 산스크리트와 요가, 명상 전문가이자 철학자인 Mihkel Ram Tamm이라고 한다.) 소련이 외부 문화에 꽉 막혀있지는 않아서 소련 여기저기에 히피들이 나타나기는 했지만 이 기사가 소개하는 히피들은 우크라이나의 리비우(Львів/Lviv)에서 일어난 일들이다. 어째서 리비우인가, 여기가 바로 우크라이나 문화의 중심지이기도 하고, 이 기사가 의도한 바는 아니지만 현재 우크라이나 vs. 러시아의 뿌리 중 하나가 이 히피 운동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여러 기록을 보면 1968년 10월 12일(바로 요맘 때다), “성스러운 정원 공화국(Республіка Святого Саду)”이라는 조직이 바로 우크라이나 히피의 첫 모임이었다. 자유를 목말라 하는 14세-18세의 소년들이 모임을 결성한 것으로서, 이들은 자기네 깃발도 만든다. 문제는 이 깃발에 우크라이나의 국장인 삼지창(Тризуб)이 들어가 있는 것. 소련 정권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의 발흥을 억누르기 위해 삼지창의 사용을 금지하고 있던 터였다. 물론 이들이 삼지창만 넣은 건 아니고, 특유의 센스(…)로 축구공과 호두나무도 그려넣었지만 말이다. 우크라이나의 히피들이 과연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었을까? 그렇다면 서구식 히피의 정의에 딱 안 들어맞지 않을까? 이들의 실제 행동을 보면 히피와 비슷하기는 했다. 금지된 록뮤직 콘서트를 주최하고 자발적인 모임으로 움직이기는 했는데… 얘네들이 배운 건 공산주의 청년조직, 콤소몰이었다. 우리 히피들도 조직을 본격적으로 한 번 만들어볼까? 그래서 리비우의 장발 히피들은 1970년 상반기, 모처에서 회동을 갖고 캠프파이어와 함께 조직을 어떻게 만들고 구성할지를 논의하는데,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는 걸 경계한 부모들이 경찰에 모임을 신고했다. 모조리 다 체포. 대학과 콤소몰에서 이들을 축출하기로 결정된다. 시도는 한 번 더 있었다. 1970년 10월, 아예 한 성당 안에서 장발족들이 모임을 갖고 월회비까지 정한다. 다같이 영화를 보러 가고 까페 몰려가고, 모임의 회장도 선출하고 등등. 그런데 이 히피 모임을 주도한 회장님은 나치 심볼이 있는 검정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고 한다. (나치 심볼에 검은색이라면 떠오르는 상징이 매우 많을 것이다.) 게다가 이 모임은 소련 체제에 적대적이었다. 그래서 곧바로 경찰이 또 습격. 회장님의 집에서는 발터 권총도 발견됐고, 그는 3년형으로 투옥된다. 여기에서 잡힌 히피들(14세에서 27세)은 강제 입대를 당하거나 콤소몰에서 추방됐다. 그때부터 리비우 방범대들은 장발족들을 단속하기 시작한다. 머리를 길게 기른 젊은 남자!? 하면 일단 잡아서 사진 찍고 지문 받고, 가위로 자르기도 했다. 그리고 1970년 말부터는 소련 내 대부분 지역에서 장발족 단속에 들어간다. 이들은 훌리건, 약, 탈선 등의 죄목으로 고소를 당했는데, 앞서 모임의 회장님은 히피 짓을 했다고 잡혀간 게 아니었다. 집안 내 무허가 권총 소지 때문에 잡혀갔었다. (게다가 당시 소련 체제에서 3년이면 거의 무죄 취급(…)) 어쩌면 KGB가 히피 조직을 (나서서) 만들었거나 방조했다가 일제 단속에 들어갔던 것은 아닐까? 게다가 러시아에 맞서 싸워서 서구로부터 칭송을 받는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뉴스에는 잘 나오지 않지만) 친-나치이거나 나치에 호의적인 사람들이 많이 있는 이유가 다 이런 데에서 나오지 않았을까 하는 의문이 든다. 물론 이들의 친-나치 행각이 리비우, 우크라이나의 역사 때문에 이해할 수는 있는 일이기는 하다.
이번에는 Nord Stream 2
별로 기억하는 친구들은 없지 싶은데 이 기사에서 야말 파이프라인에 대한 언급이 나왔다. 야말(Ямал) 반도는 서-시베리아 북쪽의 반도인데 여기에 천연가스가 풍부하게 매장되어 있다. 때는 1981년, 이때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생각해 보시라. 프랑스는 미테랑의 사회당 정권이 들어섰고, 독일/서독은 아직(!) 좌파인 헬무트 슈미트(참조 1)의 사민당-자민당 연정이 집권 중이었으며, 이탈리아 또한 5당체제 시절(참조 2)이었다. 당연히 소련과의 데땅뜨를 추진할 만한 환경이 조성됐다는 얘기다. 그래서 1981년 브레즈네프가 서독을 방문한 김에(!), 서독이 주동하여 여기에 프랑스와 이탈리아, 그리고 이익을 보고 접근한 대처(역시 자본의 힘!)의 영국까지 “야말 파이프라인 프로젝트”를 추진한다. 어차피 오일 쇼크 때 OPEC으로부터 호되게 당했으니 중동보다는 러시아 가스가 훨씬 나았다. 소련을 “악의 제국”이라 말한 로널드 레이건은 깜놀한다. 만약 이들 “주요” 서유럽 국가들이 소련과 가스 파이프라인을 연결한다면, (1) 서유럽 기술이 소련에 넘어가고(참조 3), (2) 소련 재정에 큰 도움이 될 뿐더러, (3) 미국과 서유럽 간 동맹을 흔드는 행위였다. 당시 레이건은 이 계약을 막고 싶었다. 그래서 서독에게 가스 대신 석탄이 어떠한지 물었다가가격 때문에 퇴짜를 당했고, 노르웨이/네덜란드의 북해 가스 제안도 퇴짜 당했다. 그래서 결국 1982년 6월, 레이건은 “미국 기술을 포함한 장비를 소련에 수출하는 외국 기업”들을 제재한다고 발표한다. 그러나 서독과 프랑스는 물론, 이탈리아와 영국까지(참조 4) 레이건의 제재를 말그대로 개무시한다. 레이건은 결국 제재를 종료시켰고, 때마침 소련에는 고르바쵸프가 등장한다. 자, 이런 역사적 배경(참조 5)을 알고 이 기사를 보시면 좋다. 드디어 기사 내용이다. 미국은 Nord Stream 2 참여국가들, 특히 독일의 가스 기업(참조 6)에게 제재를 부과하고 싶어한다. 위의 역사적 배경처럼 미국의 모든 지도자들은 서유럽 국가들이 러시아로부터 천연가스를 받는 계약을 싫어했다. 여기에는 트럼프도 예외가 아니다. 다만 트럼프 정부는, 유럽의 철강에 이어 자동차, 그 다음에는 천연가스까지 손대려하고 있다는 점을 주목하셔야겠다. 이란 핵합의(JCPoA)까지 깨뜨리기로 했으니 아예 “동맹국”들의 목을 죈다고 봐야 할까? 소위 “최대한의 압박”은 북한이 아니고 서유럽이 대상이었을까? 일단 유럽 국가들 입장에서 미국산 천연가스는 경제적이지가 않지만 여기서는 미국 회사들이 시장을 넓히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해석해도 되잖나 싶다. 게다가 이 Nord Stream 2 프로젝트에는 폴란드나 우크라이나가 누락되어있다. 이 두 나라가 미국에서 열심히 반대 로비 중. 트럼프 정부의 “패턴”이 보이지 않나? 강약강강강강(...) ---------- 참조 1. 헬무트 콜과 겐셔, 냉전이 어떻게 연장될 뻔 했는가(2018년 3월 28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6148945509831 2. Call me by your name(2018년 5월 7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6245033779831 3. 기본적으로 야말 파이프라인 계약은, “가스”와 천연가스 관련 “기술”의 교환이었다. 다만 워낙 큰 건이기 때문에 미국의 엑손과 모빌, 텍사코도 포함되었다(!). 4. 12번부터 17번 항목이다. 대처 총리는 슐츠 국무장관을 점잖게 나무라고 있다. 이걸 보시면 대처를 소련 스파이라고 봐도 될 정도다(나의 대처는 이렇지 않아?), 미국 국무부 전문(1982년 9월 9일): http://fc95d419f4478b3b6e5f-3f71d0fe2b653c4f00f32175760e96e7.r87.cf1.rackcdn.com/3727B78E766E4E5FA3E082138CD8EBE9.pdf 5. THE CASE AGAINST SANCTIONS(1982년 9월 12일): https://www.nytimes.com/1982/09/12/magazine/the-case-against-sanctions.html 6. 독일 기업(Wintershall과 Uniper)만은 아니다. 오스트리아의 OMV, 프랑스의 Engie, 네덜란드/영국의 로열더치셀도 포함된다. 왠지 야말 파이프라인 사건 당시의 국가들과 얼추 일치된다.
미국의 흔한 특수효과 처리 전후
가디언즈 오브 갤럭시 (밀어서 보세요) 얘는 라쿤이다.. 브래들리 쿠퍼가 아니다..(최면) 왕좌의 게임 (밀어서 보세요) 얘는 용이다.. 나는 용엄마다.. (최면) 트와일라잇 (밀어서 보세요) 얘는 늑대다.. 이건 털이다... (최면) 라이프 오브 파이 (밀어서 보세요) 있다.. 있다.. 뭔가 있다.. (최면) 캐리비안 해적 (밀어서 보세요) 나는 데비존스다.. 팬더가 아니다.. (최면) 매트릭스 (밀어서 보세요) 플로모션을 이용한걸로 유명하죠! 지금봐도 세련된 영화♥ 키아누 리브스의 콘스탄틴도 정말x100 좋아해요. 호빗 (밀어서 보세요) 형광등 100개 켜놓은듯한 아우라ㄷㄷ 보드워크 엠파이어 (밀어서 보세요) 저기 출연한 보조출연자분들 나중에 영화관가서 어리둥절 하셨을듯!! 어벤져스 (밀어서 보세요) 블랙위도우의 뜨거워하는 미간연기에 박수를 보냅니다ㅠㅠ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밀어서 보세요) 이 영화는 정말 100평 촬영장 안에서 영화 다 찍을 수 있었을듯^^ 더 울프 오브 월스트리트 (밀어서 보세요) 경이롭네요.. 우리나라에서 촬영장소 물색하러 동분서주 전국을 다니는 스태프들이 보면 물개박수 칠듯! 위대한 캐츠비 (밀어서 보세요) 100평 촬영장 안에서 영화 다 찍었을 영화2 ㅋㅋㅋㅋ 엑스맨 데이즈 오브 퓨처 패스트 (밀어서 보세요) 보다보니 이제 이정도 특수효과는 그림판으로도 만질 수 있을것 같은 느낌적인 느낌..! 라이프 오브 파이 (밀어서 보세요) 색깔이라도 좀 맞춰주지 그랬어요ㅠㅠ 눈이라도 성의껏 그려주지.. 저 상황에서 감정잡고 연기한 배우분에게 박수를 보냅니다. http://www.boredpanda.com/before-and-after-visual-effects-movies-tv/ 더 많은 특수효과는 여기서 볼 수 있어요~ 관심좀 주세요.. 귀찮으실까봐 댓글 달아달라고 못하는데 클립과 하트 정말 좋아해요...♥
소련의 마지막 흔적, .su
https://www.inverse.com/article/8672-the-bizarre-afterlife-of-su-the-domain-name-and-last-bastion-of-the-ussr?fbclid=IwAR0P9wAMznxW2COywsfR3ZZVPou0UfNXOZTUL300OyaX13kBDaXTlinFaiw 역사는 이상한 방식으로 그 흔적을 남기기도 한다. 이번 주말 특집은 지금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국가, 소련의 최상위 인터넷 도메인 .su의 이야기이다. 나라 이름에 따른 인터넷 주소는 국제인터넷주소관리기구(Internet Corporation for Assigned Names and Numbers, ICANN) 산하 Internet Assigned Numbers Authority (IANA)에서 지정한다. 이 IANA는 1988년에 설립됐으며, 곧바로 여러 나라들에게 이 주소 저 주소를 할당하기 시작했었다. 그래서 소련도 1990년 9월 19일, .su 주소를 받는다. 당연히 소비예트 유니온의 준말이다. 소비예트 유니온의 준말이라니, 차라리 .ussr이 낫잖을까 싶기도 한데, 애초에 .su 도메인을 제안했던 인물은 소련인도 아니고 19살 먹은 한 핀란드 대학생이었다고 한다(참조 1). 그런데… 그로부터 15개월 후, 소련이 분리되어버린다. 정말 막바지까지 그 강대한 제국이 무너질지는 아무도 예상치 못 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 su 주소는 끈질기게 지금도 살아남아 있으며 실제로 작동은 물론 새로운 주소 등록도 받고 있다(참조 2). 잠깐, 그때 무너진 국가는 소련만이 아닐 텐데요? 좋은 지적이다. 유고슬라비아는 .yu, 동독은 .dd(독일민주공화국의 약자다, 서독은 참고로 독일연방공화국), 체코슬로바키아는 .cs였다. 이들 모두 사라졌으며, 신규 등록을 받지 않고 있다. 그렇다면 도대체 .su 도메인은 어떻게 살아남은 것일까? 러시아의 음모일까? 의외로 살아남은 이유는 행정지체(…) 및 저항(!)이었다. 러시아의 도메인인 .ru가 1994년이나 되어야 등장했기 때문이다. 즉, 소련 붕괴 이후 인터넷 사이트를 만들려는 구-소련계 주민/법인들은 어쩔 수 없이(?) .su 도메인을 이용해서 등록해야 했으며, 이왕 살아 있으니 계속 살려야 한다는 IANA 내 러시아계 직원들의 저항 때문이었다. 게다가 러시아 내 인터넷 주소 할당을 위해 2001년부터 활동한 러시아공공네트워크연구소(Российски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развития общественных сетей (РосНИИРОС))는 .ru는 물론 .su도 관리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현재 .su를 사용하고 있는 인터넷 주소는 119,423개소가 있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라도 없는데 누가 이 .su를 사용하고 있느냐, 쏘오련에 대한 향수를 갖고 있는 이들인가(참조 1의 .su 도메인), 아니면 우크라이나 동부의 친-러시아 단체의 웹사이트인가(참조 3), 그것도 아니면 푸틴을 옹호하는 외곽 청년조직, “우리들(Наши, 참조 4)”인가? 수많은 사이버 범죄단체들이 이 주소를 사용하고 있다(참조 5). 스팸과 DDoS 공격, 인터넷 사기범들이 사용한다는 얘기다. 이들의 활동은 단순 사기에 그치지 않고 미국 선거 개입도 한 모양(참조 5). 가령 Exposed.su는 트럼프와 밋 롬니, 미셸 오바마 등의 신용 내역을 누출했다고 한다. (사이트는 현재 사라졌다.) 물론 그렇다고 하여 .su 주소가 사라지는 일은 러시아가 있는 한, 없을 것 같다. 생각해 봅시다. 발해 부흥운동은 거의 200년을 갔었다. 영국인들의 .eu 도메인 요구 또한 20년은 더 갈 수 있으며(참조 6), 소련에 대한 향수는 분명 대를 넘길 것이다. -------------- 참조 1. Юбилей Рунета: 10 лет назад финн Петри Ойала зарегистрировал домен .su(2000년 9월 19일): https://web.archive.org/web/20140102191207/http://netoscope.narod.ru/news/2000/09/19/312.html 애초 소련의 유닉스/데모스(ДЕМОС) 망은 중립국(!) 핀란드를 통해서 서방과 연결됐었고, UUCP(전송프로토콜)을 이용해서 소련과 세상을 이어준 것이 바로 핀란드 대학생, Petri Oyala였다. 참고로 실제 관여자들의 증언은 다음의 사이트에 자세히 나온다. (.su 도메인!) 

http://news.demos.su/private/demos.html 2. 새로운 su 주소 등록, 1년에 PayPal로 $29.95 밖에 안 한다!: https://www.register.su 3. 새로운 로씨야! https://novorossia.su 4. 원래는 http://www.nashi.su 이지만 사이트는 현재 사라졌다. 열람을 원하시면 아카이브를 통해서 보셔야 한다. https://web.archive.org/web/20120313181921/http://nashi.su/ 5. USSR's old domain name attracts cybercriminals(2013년 5월 31일): https://phys.org/news/2013-05-ussr-domain-cybercriminals.html 6. UK citizens might lose .EU domains after Brexit(2018월 3월 30일): https://www.engadget.com/2018/03/30/europe-brexit-eu-domains/
주말이 사라졌을 때
https://www.history.com/news/soviet-union-stalin-weekend-labor-policy 러시아는 공산주의 체제라는 거대한 실험을 시작하면서 이것 저것 새로운 시도를 많이 했었다…라고 표현하면 왠지 긍정적인 느낌마저 든다. 하지만 이건 어떨까, 주말을 없앤다. 이 실험은 강철의 대원쑤, 스탈린 동지마저 실패를 인정한다. 1931년부터 1940년까지 주말을 잠시 없앴다가 다시 살렸기 때문이다. 덕분에 주말 특집도 가능해졌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단 말인가? 때는 1929년 5월, 경제학자인 유리 라린(Юрий Ларин)은 “지속 생산 주일(Непрерывка/녜쁘례릐브카)”이라는 개념을 소개한다. 간단히 말해서 주말을 없애자는 내용이다. 이 의견에 관심을 가진 인물은 다름 아닌 스탈린. 스탈린은 즉각, 모든 언론에게 지시를 내려서 지속 생산 주일의 개념을 칭송하도록 시킨다. 이유가 몇 가지 있었다. ---------- 첫 번째, 산업 진보를 지속 추진하기 위해, 스탈린은 기계는 휴식하지 않는다는 개념으로 사람들도 휴식하지 않으면 생산성이 올라간다는 논리를 폈다. 두 번째, 주말, 특히 일요일을 없애고 모두들 일을 하게 만들면 교회(중앙아시아 지방에서는 모스크)에 큰 타격을 줄 수 있다. 안그래도 초기 소련은 반-종교 정책을 활발히 하고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사람들을 같은 날 못 모이게 하는 효과도 있다. 세 번째, 첫 번째랑 이어지는 개념인데, 이게 모두가 다 일 주일 내내 출근하는 개념은 아니었다. 이제까지(1920년대 얘기다) 주6일제로 근무를 했다면, 이를 주5일제로 바꿔서 생산성을 크게 늘린다는 개념이기도 했다. 즉, 5일을 한 주기(주일이 아니다)로 해서 교대 근무를 한다는 의미다. 휴일이 하나 늘어난 셈. ---------- 공산주의의 여러 가지 실험이 그러했듯, 이 “지속 생산 주일” 개념도 어떤 측면에서보든지 다 실패했다. 물론 그래도 11년 동안 실행이 되기는 했는데, 구체적인 건 다음과 같다. 이 지속 생산 주일은 노동자들 전체가 9-6로 일하는 개념이 아니며, 일부는 월-금, 일부는 화-일, 이런 식으로 로테이션을 돌렸다. 그렇다면 모두들 같은 날 쉬지 않으니 교통 체증이 없겠네요… 잠깐만. 노동자들은 자신이 일하는 날짜를 달력에다가 일종의 “스티커”를 붙였다. 기사를 보시면 나오는데, 밀, 붉은 별(!), 망치와 낫(!!), 책, 군사용 모자 등이다. 어느 날 일하고 어느 날 쉬는지 나와 있고 색상도 다양해서, 딱 보기에 예쁘기는 하다. 하지만 쉬는 이틀이 각자 모두 다르기 때문에 문제가 처음부터 발생했다. 아버지가 쉬는 날이 다르고 어머니가 쉬는 날이 다르니, 가족들 사이에서는 쉬는 날을 맞추는 편법이 계속 발생한 것이다. 서로서로 미리 작당하고 같은 스티커를 나란히 붙여놓는 식이다. 효과를 따지자면 종교 의식을 사람들 마음 속에서 좀 옅게 만들었다 정도였을 것이다. 확실히 예전보다 소련 국민들의 종교심은 줄어들었다. 다만 위에서 얘기한 “지속적 치팅”의 문제와 더불어 기계도 휴식이 필요하다는 사실(제아무리 21세기인 지금의 기계도 휴식은 필요하다), 농촌 지방에 거의 안 퍼졌다는 점 때문에, 결론은 실패다. 결국 1940년 원래 제도로 돌아가기 때문이다. 물론 그놈의 “생산성”을 높이기 위한 조치는 별도로 생겨났다. 무단 결근이나 20분 이상 지각하는 경우 “형사처벌”을 의무화시킨 것이다. 뭐든 억지로 하면 …주말까지 죽이려 했었던 소련의 실험과 다를 게 있을까.
소련 디자인
http://www.calvertjournal.com/features/show/3662 2016년에 소련의 힙스터, 스칠랴기 이야기를 쓴 적이 있는데(참조 1), 소련에도 있을 건 다 있었다. 이 스칠랴기는 1950년대였다. 대체 1950년대는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소련 소비주의가 탄생했다 이거다. 뭔가 좀 이상한 느낌일 수 있을 텐데, 1950년대는 소련이 스푸트니크를 통해 우주 개발의 간지를 보여준 시대였다. 미국은 뭔가 한 발자국 뒤지는 느낌이었고, 세계대전/한국전쟁도 끝난 이후로는 이제 좀 잘 살아보세의 분위기도 있었다. 하지만 다시 한 번 생각해 보자. 지금 시점, 그러니까 2020년을 향해 가는 지금 시점은 소련이 무너진지 한 세대(30년?)가 지날 때 쯤인데 아주 이상하게시리 소련 시절의 디자인을 보면 뭔가 쿨하다는 느낌적 느낌이 있다. 이거 왜일까? 자본주의 진영에서 서독과 일본 제품이 품질의 상징이듯, 공산주의 진영에도 품질의 상징인 나라가 있었다. 바로 동독과 체코슬로바키아이다. 워낙 제조업 기반이 있던 나라들인데 서독과 일본 제품들이 시대의 변화에 따라 계속 일취월장했지만 동구권의 소비재 사진을 보면 왠지 정체된 느낌이 있다. 무엇일까? 다시 시계를 돌려 1959년, 소련에서는 무려 미국 정부의 후원(!)으로 미국 박람회(American National Exhibition)가 열린다. 캐딜락이나 텔레비전, 화장품, 청바지(!) 등 미국이 자랑할 만한 문화가 총출동했으며, 기조연설을 당시 부통령이었던 닉슨이 가서 했었다. 이때 유명했던 말싸움이 하나 있다. 이른바 “부엌 논쟁(kitchen debates)”. 미국의 모델하우스 부엌에 소련 인민들이 너무나 많이 몰려들었던 탓인지 흐루쇼프는 심사가 매우 언짢았고, 닉슨과 방송을 통해 논쟁을 벌였었다(참조 2). 미국 부엌은 과연 일반적인 미국 노동자가 살 수 있는 것일까? 핵무기가 아닌 “우리 물건이 짱 좋음!”의 주제로 배틀을 벌인 것이다. 공산주의 유토피아는 이미 이때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지만 얘기는 여기가 끝이 아니다. 정신승리로는 뭔가 부족함을 느꼈던 소련은 1962년 “미적인 건설법 구현을 통해, 공업제품 및 문화-가정용 제품의 품질 개선”을 목표로 디자인 연구소, VNIITE(참조 3)를 개설한다. 인민에게는 장난감이, 디자인이 필요했다. VNIITE에서 발행한 "기술 미학" 잡지 하지만 소련의 관료주의가 으레 그러하듯(과연 소련만?), 실무자가 뭔가 아무리 그럴싸한 것을 올린다 하더라도 위에서 다 잘라냈다. 실제 제품화가 거의 안 된 것이다. 어떻게 보면, 그냥 “인간의 모습을 한 사회주의” 유행에 따라 나온 것일 수도 있었다. 그래도 VNIITE는 미영귀축(...) 디자인과 제품의 성지(聖地) 역할을 톡톡히 해낸다. 제품이 실제로 나오지는 않더라도 어떻게든 다 스며들기도 했었다. 바로 소련 디자인의 묘한 쿨함이 여기서 나온다는 것이다. 서양 제품을 그대로 본따서 만든다고 해도(가령 Vespa 스쿠터의 카피캣인 비야뜨카(Вятка)를 봐도 알 수 있다. 지울 수 없는 러시아의 흔적이 들어가 있다는 얘기다. 공산주의식 모더니즘과 서구 디자인에 대한 동경, 슬라브 터치의 3총사가 합쳐진 결과다. 진정한 소비예트 스타일이다. 스칠랴기가 그러했듯, 소비예트 디자인도 나름 스타일을 만들어냈고, 그 스타일은 21세기에도 쿨함을 보여주고 있다는 얘기다. ---------- 참조 1. 소련의 힙스터, 스칠랴기(2016년 11월 13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4631131734831 2. The Kitchen Debate (Nixon and Khrushchev, 1959) Part I of II https://youtu.be/D7HqOrAakco The Kitchen Debate (Nixon and Khrushchev, 1959) Part II of II https://youtu.be/z6RLCw1OZFw 3. ВНИИТЭ, 전러 기술미학 연구소(Всероссийский научно-исследовательский институт технической эстети)를 의미하며, 영문 위키피디어에서는 문을 닫은 것으로 나오지만, 현재는 러시아 교육부 산하에서 디자인 연구소/대학교의 형태로 운영 중이다.
소비예트의 구내식당
https://www.atlasobscura.com/articles/soviet-restaurants-in-russia 주말 특집 하면 역시 먹거리 아니겠습니까. 오늘의 이야기는 소련 시절의 구내식당이다. 사실 그 구내식당을 재현한 곳이 하나 있다. 모스크바 굼 백화점 3층에 있는 스탈로바야(столовая) 57(참조 1)이다. 스탈로바야는 말그대로 구내식당이라는 뜻. 여기가 요새 힙하다고 뜨는 모양이다. 저자는 30분간 줄 서서 기다려야 먹을 수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잠깐, 구내 식당이라고요? 그렇습니다. 스탈로바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일반명사다. 구내식당 얘기를 좀 하자면, 구소련은 구내식당을 하나의 국가 정책으로 추진했었다. 개개인이 요리를 한다는 것은 자원 배분에 있어 비효율적일 뿐 아니라(어떻게 보면 공산주의야말로 자본주의식 효율을 극단적으로 잘못 해석한 사례랄 수 있겠다), 구내식당의 확산은 여성을 ”부억의 노예”로부터 해방시키고(참조 2) 영양을 개선시키는 정책이었다. 물론 실질적으로 식량 공급을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기도 했다. 그래서? 레닌 시절의 소련은 그냥 다 공동식사로 바꿔버렸다. 무시무시한 말이기는 한데, 군대의 경우와 동일한 문제가 발생한다. 사상성이 중요시되다보니 요리 실력보다는 그냥 정치적으로 임용된 요리사들이 많았기 때문에 심지어 크레믈린 내 구내식당도 맛과 위생이 형편 없었다. 레닌이 몸소 검역을 실시하라 여러 번 명을 내렸을 정도였다. 다만 “표준화”가 이뤄지면서 1930년대부터는 좀 나아졌다고 한다. 가령 수프에 고기를 몇 그램 넣는지, 대학생과 관료 대상 식당에는 쇠(!)고기를 몇 그램 넣는지 정했었다. 당연히(…) 관료 식사의 쇠고기 비중은 대학생보다 높았다. 그러나 제아무리 표준화를 해도 그 넓은 소련 땅 모든 구내식당이 일률적일 수는 없었고 결국은 도농간 격차가 심해질 수밖에 없었다. 개별 요리사들 실력만이 아니라 제공받는 식재료도 차이가 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러모로 자본주의적인 정책을 도입했던 흐루쇼프는 “사회주의 경쟁” 정책을 구내식당에 실시한다. 요새 말로 하자면 규제 완화를 실시한 셈이다. 하지만 공산주의는 공산주의, 식량난이 끊이지 않았기에 구내식당 취직은 선망의 대상이었다고 한다(그래야 식재료를 빼돌리니까). 그랬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구내 식당이…? 소련에 대한 로망이 아직 남아 있어서(참조 3)? 물론 이 식당이 붉은광장 근처에서 제일 저렴한 식당이기 때문에 그렇다(참조 4). 더군다나 모스크바는 해외 관광객은 물론이고 러시아 각 지방에서 구경오는 러시아인 관광객들도 많으며(어떻게 보면 미국 국내 관광객도 많은 뉴욕과 비슷하다), 그들은 풍족하지 않다. 그러고보면, 러시아 디저트 중에 까르또슈카(картошка)라고 있다. 직역하면 “감자”라는 의미인데, 이게 감자가 아닙니다. 빵/케이크/과자/코코아파우더 남은 것으로 만든 맛있는 디저트, 만든 모양이 감자같아서 저런 이름이 붙었다. 내가 생각하는 구소련이 남긴 아름다운 디저트 중 하나인 까르또슈카를 먹고 싶습니다. (“안 선생님, 농구가 하고싶어요” 짤방도 떠오른다.) -------------- 참조 1. 트립어드바이저의 평을 보자. https://www.tripadvisor.co.kr/Restaurant_Review-g298484-d3201436-Reviews-Stolovaya_57-Moscow_Central_Russia.html 2. 소련 시절 식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이 기사에는 소련의 포스터가 있다. “꺼져라, 부엌의 노예!(Долой кухонное рабство!)”라 쓰여 있다. What was it like eating out during the Soviet Union? (PHOTOS)(2018년 12월 11일): https://www.rbth.com/russian-kitchen/329657-public-catering-soviet-canteens 3. 18세-34세 러시아인들 중, 소련 시절이 더 좋았다고 응답한 비율이 절반이었다. 이들은 소련 말 맥도널드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기억 못 할 것이다. Views on role of Russia in the region, and the Soviet Union (2017년 5월 10일): http://www.pewforum.org/2017/05/10/views-on-role-of-russia-in-the-region-and-the-soviet-union/ 4. 600루블(대략 9달러)이면 한 끼 가능하죠! Здесь едят, а не просто отдыхают: рестораторы отмечают запрос на «советские столовые»(2018년 12월 26일): https://www.bfm.ru/news/4030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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