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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마다 떠나는 미술이야기 6월

달마다 떠나는 미술이야기 6월

단오면 머리를 감겨 주시던 할머니

-풍속화 속의 단오 풍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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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현대미술의 정체
목요일은 역시 독서지. 그동안 너무 한국 현대미술을 등한시했었는데, 종합적으로 살펴보려면 아무래도 이 책이 좋지 싶다. 두껍지만 타이트하다. 이를테면 한국에서 어지간한 전공은 대체로 서울대학교가 최상위 그룹을 형성하고 있는데 미술은 왜 홍익대학교인지 의문을 가지셨다면 좋은 해답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저자는 이화대학교 교수다.) 한국 현대미술도 다른 나라의 현대미술처럼 제2차 세계대전 이후에 시작됐다고 봐야 할 텐데, 현대의 한국 거의 모든 분야가 그러하듯, 베끼기부터가 시작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후 유럽과 미국은 추상화가 점령했다. 이들은 각각 앵포르멜(informel)과 추상표현주의로 나뉘었는데, 전쟁 중 미술계의 폰 브라운들(가령 뒤샹이나 이브 땅기) 미국도 드디어 미술에 한 몫 끼기 시작했다는 점을 주목해야 한다. 한국전쟁을 누가 구해주고, 누가 한국에 문명을 가져왔다? 일단 미국이다. “일단”이라는 단어를 쓴 이유는 우리가 식민지를 겪었기 때문인데, 그때문에 일본 유학파 출신도 많았다. 즉, 한국의 현대미술 작가들은 미국에서 유행한 추상표현주의를 따라 그리면서도, 일본을 통해 접목한 유럽식(특히 프랑스) 전통도 잊지 않았다. 그리고서는 자기들을 “앵포르멜”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미국+일본(프랑스)이 우리나라 현대미술이라는 얘기다. 둘은 한국에서 꼭 구분되지 않았고 합쳐지기도 했었다. 물론 이 “앵포르멜”이라 불리우는 한국식 추상표현주의가 오래가지는 않았다. 군부 쿠데타가 일어나면서 다른 식으로의 탈출이 필요했던 것이다. 여기서 중요한 화가가 둘 등장한다. 박서보와 이우환이다. 분위기가 베끼기에서 좀더 “한국화”가 되면서 단색화가 나타난 것이다. 단색이라고 해서 그냥 로스코 류를 연상하실 수 있을 텐데 이게 그렇지 않습니다. 제일 비정치적이랄 수 있을 단색으로 작품을 그릴 수밖에 없는 환경과 위에 거론한 중요 인물 두 명 때문이다. 박서보는 한국에서 활동했고 이우환은 일본에서 활동했다(참조 1). 둘이 협력관계로 지내다가 나중에 라이벌 비슷하게 변해가는 과정이 한국 현대미술의 회화 쪽 전개양상이라고 봐도 좋을 것이다(참조 2). 박서보가 한국적 모더니즘에 천착한 반면 이우환은 모더니즘을 해체하고 한국적인 것을 비껴갔었다. 물론 한국 현대미술은 베끼기를 게을리하지 않았다. 최신 조류인 팝아트는 물론 하이퍼리얼리즘도 그대로 도입했기 때문이다. 조상현이나 변종곤과 같은 작가를 사례로 들 수 있을 것이다. 뒤샹을 따라한 김구림도 생각할 수 있다. 이른바 K-모더니즘을 구현하기 위한 노력이라고 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런 조류가 비단 회화만이 아니라 다른 종류의 예술에도 적용됐다. 그런데 위에 사례로 나온 작가들은 모두 남자들이다. 미술계는 여자 작가들의 존재를 잊을 수 없을 일. 예전부터 나혜석과 천경자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 책은 그런 작가들이 누가 있었는지 알려주고 있으니 확실히 종합적으로 훑어보기에 제격이다. 그렇다면 과연 한국 현대미술이란 무엇인가? 미국과 유럽(일본)을 베끼면서/들여오면서 끊임 없이 우리식으로 바꿔버린 이야기이다. 즉, “문화번역은 근본적으로 오역이다. 그러나 오역이야말로 번역의 진정한 의미를 드러내는 지점이기도 하다(p. 197)”. -------------- 참조 1. 박서보가 홍익대를 나왔었고, 그가 이끄는 화가군이 우리나라 미술의 주류를 장악했었다. 이우환은 서울대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건너가서 평론가 활동을 하고, 그 다음에 화가로 나서면서 박서보를 활용(?)했다. 물론 둘은 서로가 서로를 필요로 하는 존재였다. 2. 물론 이건 절반의 진실에 해당된다. 여성화가들의 존재와 함께 민중미술이라는 독특한 영역이 살아있기 때문이다.
당대 최고 화가의 모델이자 인기남들에게 둘러싸인 여성화가
서양미술사에서 인상주의에 관해 이야기를 할 때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인물은 끌로드 모네, 앙리 마티스, 에드가 드가, 에두아르 마네 등이 있으며 이 화가 모두는 남자입니다. 그러나 뛰어난 인상주의 화가들은 모두 남자였을까요? 정답은 "No" 입니다. 이름만 들어도 쟁쟁한 남자 화가들 사이에 '마네의 뮤즈'로만 알려진 화가 베르트 모리조(Berthe Morisot)가 있습니다. 여덟번의 인상주의 전시회 중 무려 일곱번을 참가한 인상주의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홍일점인 그녀의 삶과 작품을 소개합니다. 1. 재능 금수저 모리조는 로코코 시대의 화가인 장 오노레 프라고나르의 증손녀였습니다. 그리고 모리조의 아버지는 고위 공무원인 사법보좌관이었는데 아버지도 예술에 관심이 많아 예술가들의 후원자였으며 자기 자신도 아마추어 화가였습니다. 모리조는 어렸을 때부터 친자매인 에드마(Edma Morisot)와 함께 루브르 박물관에서 명화를 따라 그리며 그림 공부를 했습니다. 2. 코로의 제자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Jeon-Baptiste-Camille Corot)는 1850년대의 대표적인 풍경 화가였으며 '아버지 코로'라고 불리며 귀스타브 쿠르베, 클로드 모네, 베르트 모리조 등 젊은 화가들에게 많은 영향을 끼쳤습니다. 모리조는 코로의 지도를 받고 살롱에 출품한 작품이 당선되었을 때 코로의 허락 아래 '코로의 제자'라고 서명했다고 합니다. 3. 마네와의 만남 베르트 모리조의 예술 세계를 담은 영화인 '마네의 제비꽃 여인 : 베르트 모리조'에서 유부남인 마네와 만난 모리조는 서로 이끌리지만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관계로 묘사되고 있습니다. 둘의 미묘한 감정에 대한 사실 관계는 알 수 없지만 모리조는 마네의 작품에 모델로 서기도 하고, 마네의 예술관에 크게 영향을 받았던 것은 사실로 알려져 있습니다. 이후 모리조는 마네의 동생과 결혼합니다. 자세한 내용은 아래 원문을 참고하세요. # 원문 출처 : https://redfriday.co.kr/201 # 많이 본 컨텐츠 # 매일 업데이트되는 생활꿀팁과 알아두면 도움되는 이야기를 팔로우 하셔서 쉽게 구독하세요. # ‘좋아요’ 와 ‘공유하기’ 많이 부탁드려요.
제3제국을 묘사한 예기치 못한 출판물
https://www.faz.net/-in2-9mo4g 엘리자베트 뵈데커(Elisabeth Boedeker)라는 사서이자 여성운동 역사가가 있다. 1893년에 태어나 1980년에 사망한 인물로서 그녀의 저서 중에, "25 Jahre Frauenstudium in Deutschland. Verzeichnis der Doktorarbeiten von Frauen 1908 - 1933 / 독일 여성 학문 25년, 여성 박사논문 목록(1908-1933)"이 있다. 1935년에 나온 책이다. 하필이면 왜 1933년에서 끊었을까? 독일과 1933년을 아신다면 당연히 고개를 끄덕이실 것이다. 1933년 3월 총선을 통해 나치가 집권했기 때문이다. (전례가 없지 않지만) 독일 대학교에서 여학생 입학이 일반적으로 허용된 것은 1908년부터였다. 그래서 입학 허용 이전인 1902년 남녀 대학생 비율 36,000명 vs. 70명이었던 것이 1931년부터는 115,000명 vs. 22,000명으로 대폭 늘어난다. 그러니까 1908년부터 25주년 기념이기 때문에 1933년에서 끊었다는 이유도 있기는 하다. 뵈데커의 책에는 총 5,949편의 논문이 실려 있으며, 의학(참조 1)을 제외한 모든 학문을 망라하고 있다. 이중에 눈여겨 볼 전공은 다름 아닌 미술사학이었다. 히틀러가 제일 먼저 추진한 정책 중 하나가 바로 "퇴폐예술(Entartete Kunst)" 추방이었기 때문이다. 이 퇴폐예술은 다름 아닌, 모더니즘을 가리켰고, 그때문에 바우하우스는 나치가 집권하자마자 폐교의 길로 갈 수밖에 없었다(참조 2). 따라서 이 책에 있는 미술사학 논문의 저자들(여성 박사들)은 모두 1933년까지 미술관이나 갤러리에서 일하던 이들이었고, 대부분 1933년에 쫓겨난다. 1. Margaret (Grete) Ring(1887 베를린 - 1952 취리히): 그녀의 어머니는 다름 아닌 막스 리베르만의 처제. 네덜란드 회화를 전공했으며 영국으로 이주했지만 영국 갤러리도 1940년 독일 공군에게 폭격을 당했... 2. Lotte Eisner(1896 베를린 - 1983 파리): 그리스 화병 그림을 전공했으며, 독일 영화 비평으로 유명했지만... 3. Agnes Waldstein: 1929년 Folkwang-Museum zu Essen 최초의 카탈로그를 작성했다. 그런데 그 카탈로그 제목이 "Moderne Kunst/모던 아트"... 4. Annie Mainz, Elisabeth Henschel-Simon: 각각 함부르크, 베를린에서 큐레이터로 일하다가 쫓겨난 다음, 아예 팔레스타인으로 이주한다. 5. Lilli Fischel(1891 브룩샬 - 1978 카를스루에): "14세기 라인강 중류 지역의 조각"으로 박사 논문을 받았다. 그녀는 카를스루에 주립미술관 관장 역할을 맡으면서 모더니즘 화가들(대표적으로 반 고흐와 인상파) 전시를 추진했었고, 그때문에 쫓겨난다. (게다가 아버지가 유대인!) 6. Hanna Stirnemann(1899 바이스엔펠스 - 1996 베를린): 중세 독일 후기고딕 스타일로 박사를 받았으며, 나이 서른에 독일 최초의 정식 여자 관장이 됐다(예나 시립미술관/Jenaer Stadtmuseum). 그러나 6년뒤 관장 자리에서 축출되고, 해방 후에는 동독에서 다시 한 번 축출... 소위 "퇴폐 예술" 때문에 나치 정권 때문에 박해를 받았던 예술 관련자들은 매우 많다. 그래서 별도의 책(참조 3)이 있을 정도인데, 2010년에 나온 이 책보다는 당시 생상한 기록으로 남긴 뵈데커의 책이 더 가치가 있다는 말이 바로 이 기사다. 유대인 혹은 유대계라서, 게다가 모더니즘 전문가라서 쫓겨난 그녀들의 일대기는 박사로 승승장구하다가 몰락하는 여성 지식인들에 대한 서사이기도 하다. 기사의 표현처럼, 제3제국을 묘사한 예기치 못한 출판물이기도 하다. -------------- 참조 1. 의학의 경우 1908년 입학이 허용되자마자 공식적으로 5천 명이 졸업했었다(여자 의사의 수요는 계속 있었기 때문이다. 그냥 학위를 안 줬을 뿐이지). 그래서 논문이 워낙/이미 많은지라 제외. 2. 바우하우스 100년(2019년 1월 8일): https://www.vingle.net/posts/2553277 3. Biographischen Handbuch deutschsprachiger Kunsthistoriker im Exil / 유배당한 독일 미술사학자들 약사(略史): https://www.amazon.de/dp/3598113390/ref=cm_sw_r_tw_dp_U_x_rqp2CbWQP0MJP 4. 참고로 짤방 그림은 Thomas Theodor Heine (1867-1948)의 만평이다. "수험생, 환자에 대해 뭘 알아보시겠습니까?" "실크 속치마를 입고 있군요."
게르니카의 기원
피카소의 게르니카는 너무나 유명해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그림들 중 하나다(같은 맥락으로 너무나 유명하지만 너무 몰라서 별다른 설명이 필요 없는 모나리자같은 그림도 있다). 스페인 인민전선 정부가 피카소에게 의뢰하여 나온 그림으로서, 당연히, 말그대로 전쟁의 참상을 그렸다고 보는 편이 맞다. 그런데... 이러한 전통적인 시각에 도전하는 이론이 나왔다. 한 마디로, 게르니카는 이기주의가 충만했던 나르시스트, 파블로 피카소의 가족 초상화(참조 1)라는 얘기다. 스페인 내전에서 폭격을 당했던 게르니카와는 전혀 관련이 없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José María Juarranz(참조 2)라는 스페인의 한 연구자가 저서, “La obra maestra desconocida”에서 내놓은 이론이다. 피카소는 자신의 복잡한 여성편력을 감추기 위해 인민전선 정부가 의뢰해서 그린 그림인양 행세했었다. 사실 피카소의 모든 그림은 자화상의 다양한 변형에 불과하다. 후아란스 교수는 피카소를 벨라스케스, 혹은 고야보다 뛰어난 르네상스 예술가에 비유했다. 또한 대단히 비-정치적인 인물이라고 했다. 피카소는 스페인 내전에 일절 관심을 주지 않았고, 그에 따라 게르니카에도 관심이 없었다. 실제로는 아래와 같았다고 한다. 파리(la Rue des Grands-Augustins)에 있던 피카소의 스튜디오를 방문했던 폴 엘뤼아르(Paul Éluard)와 크리스티앙 제르보스(Christian Zervos). 그리고 후안 라레아(Juan Larrea) 중 한 명이 그림을 보고 “게르니카!”라 외쳤고, 그게 그대로 제목이 됐을 뿐이다. 그랬더니 피카소가, “너네들이 그리 부른다면, 게르니카라 하지 뭐”라 답했다고 한다(참조 3). 그림을 보면, 종래 스페인(정부이든, 파시스트이든)을 상징한다든 황소는 피카소 자신이라고 한다. 말은? 당시 이혼 중이던 부인, Olga Khokhlova이다. 폭력적인 묘사를 통해 관계 악화를 그리고 있다. 죽은 아이를 안고 있는 여인의 그림은 애인 중 하나인 Marie-Thérèse Walter과 사망한 그녀의 아이다. 램프를 든 여인은 보통은 인민전선 정부를 상징한다고 하나 실상은 피카소의 어머니. 1923년에 제작한 어머니 초상화와 비슷해서라고 한다. 그리고 이 어머니의 아래, 달리는 아이, 그리고 오른편에는 뭔가 외치는 여자가 있다. 1884년 말라가 지진을 의미한다고 한다. 맨 아래, 누워 있는 남자는 피카소의 막역한 친구였던 Carles Casagemas, 여자친구인 Germaine Pichot에게 차여서 권총 자살(참조 4)한 인물이다. 워낙 충격이 커서 피카소의 “블루 피리어드”를 만들어버린 장본인이기도 하다. 그림 속의 사내가 들고 있는 잘린 칼이 바로 권총을 상징. 그렇다면 게르니카는 크게 3 부분으로 구성된 셈이다. (1) 왼쪽에는 이혼 중인 처 올가(황소에게 막 뭐라 말하는 모습이라 왠지 모르게 납득…), (2) 오른쪽에는 말라가의 지진, (3) 아래에는 자살한 친구. 왠지 모르게, 입체주의/초현실주의/블루피리어드가 모두 모인 모양새다. 어떠신가? 작가의 말대로 Si non è vero, è ben trovato(참조 5)인가? 주말 특집. 믿거나, 말거나죠. ---------- 참조 1. 스페인의 유명한 가족 초상화가 바로 벨라스케스의 “Las Meninas”와 고야의 “La familia de Carlos IV”이다. 그래서 아래 단락에 발라스케스와 고야를 비교했던 것이다. 2. Institutos de Bachillerato의 지리학/역사학 교수였고, 게르니카만 14년 동안 연구했다고 한다. 3. 당시 파리에서 게르니카 폭격에 반대하는 시위 때문에 제목이 붙었다는 설도 있지만, 정확한 그 시기에 그런 시위는 없었다고 한다. 4. 제르맨은 유부녀이자(...) 그림 모델이었으며, 그녀의 친구랑 피카소가 사귀고 있었다. 위에 언급한 Casagemas가 자살한 뒤, 그녀는 피카소랑 사귀었다. 5. Si non è vero, è ben trovato. / 사실이 아니더라도 잘 만들었죠. - 16세기 때부터 이탈리아어에서 쓰인 표현 중 하나다.
설(창작 단편)
한 노인이 툇마루에 앉아 털신에 발을 집어넣는다. 오래되어 겉이 반질반질하다. 한참을 씨름하다 겨우 두 발을 신에 집어넣고 마당으로 내려선다. 마당에 선 노인은 무릎이 시린지 손을 무릎에 대고는 가만히 서 있다. 입에서는 오메 하는 소리가 흘러나온다. 무릎에서 손을 뗀 노인은 구부정한 허리에 한 손을 대고 걸음을 옮긴다. 산책을 나가는 건가 싶어 아까부터 안절부절 못하던 마당의 하얀 똥개 한 마리가 결국 웡웡 짖어 대기 시작한다. 노인이 다가가니 똥개가 배를 드러내고 드러눕는다. 노인이 헥헥대며 꼬리를 흔드는 개의 배를 긁는다. “복실아. 오늘은 이 할미가 무릎이 아픈께 산책은 나중에 가자잉.” 노인이 손을 떼고 일어나 대문으로 향한다. 말을 알아들었는지 복실이는 짖는 걸 멈추고 조용히 낑낑댄다. 노인이 나가고 파란 철문이 철컹 소리를 내며 닫힌다. 철문을 나선 노인이 논두렁을 따라 걷는다. 중간중간 아픈 무릎을 부여잡고 쉬어가며 2~30분쯤 걸었을까, 저 앞에 버스 정류장이 보인다. 아무도 없는 정류장, 노인은 아이고 소리를 내며 파란색 페인트가 다 벗겨진 의자에 앉는다. 추운 날씨에 노인의 귀가 빨갛다. 의자에 앉아서도 노인은 연신 무릎을 두드린다. 한참 무릎을 만지작거리며 추위를 견디던 노인의 귀에 버스 엔진소리가 들린다. 노인은 목도리를 고쳐 메고 자리에서 일어나 고목 같은 손을 흔든다. 버스가 노인의 앞에 멈추고 문을 열자 노인은 조심스럽게 계단을 오른다. 노인이 올라서기 무섭게 문이 닫히고 버스가 출발한다. 버스가 시장 앞에 서고 문이 열리자 노인이 천천히 내려선다. 문이 닫히고 출발하는 버스를 뒤로 하고 노인은 시장 안으로 걸음을 옮긴다. 설이 얼마 남지 않았지만 근처에 생긴 마트 때문인지 사람이 별로 없다. 노인이 한 옷가게 안으로 들어선다. 뽀글거리는 파마를 한 아줌마가 노인을 맞는다. “아이고, 우리 어머니 어떤 거 사러 오셨어?” 노인이 가게를 휘휘 둘러보더니 한쪽을 가리키며 말한다. “쩌그 있네. 내복 사러 왔는디 요즘 애기들은 어떤 걸 좋아한당가?” “애기가 몇살인디?” 아줌마의 말에 노인의 얼굴에 주름진 미소가 번진다. “손주가 7살이고 손녀가 5살이여. 지 애비랑 애미 똑 닮아가지고 을매나 잘생기고 이쁜디. 게다가 우리 변호사 아들 내미 머리를 물려받아갖고 머리들이 비상혀.” “오메, 아들이 변호사여? 부러워 죽겄네. 우리 아들은 스물 여덟이나 먹었는디 아직도 백수여, 백수.” 한숨을 내쉬며 내복들을 뒤적거리던 아줌마의 손에 파란색과 분홍색 내복이 들려 올라온다. “요즘 애기들이 제일 좋아하는 만화 캐릭터 그려진 내복이여. 5살, 7살이면 이게 좋을 것 같은디?” “박스 열어봐도 된당가?” 아줌마가 고개를 끄덕이자 노인이 박스를 열고 꼼꼼하게 내복을 살핀다. 바느질이 성긴지, 천은 좋은 걸 썼는지, 색은 빠지지 않을지. 한참 내복을 만지작거리던 노인이 박스를 닫고 건넨다. “이걸로 줘. 얼마여?” 아줌마가 능숙하게 박스를 포장한다. “원래 이만원씩인디 그냥 두 개에 삼만 오천원만 줘요. 포장도 해줄게.” 노인이 바지 주머니를 뒤적거리더니 만원 짜리 세 장을 꺼낸다. “삼만원 밖에 없는디 좀만 깎아줘. 다음에 또 팔아줄텐께.” “아이고, 안돼요 어머니. 삼만 오천원도 엄청 깎은 거에요. 남는 것도 없어.” 한참을 실랑이하더니 결국 삼만 이천원에 합의를 본다. 꼬깃꼬깃 접혀 있는 천원 짜리 두 장을 주머니에서 꺼낸 노인이 삼만원과 합쳐 지폐 다섯장을 건넨다. “어머니 다음에 꼭 오셔서 더 팔아줘야 돼요. 진짜 내가 손해 보면서 드린거야.” 노인이 내복이 담긴 봉지를 받아 들며 말한다. “걱정하덜 말어. 이번 설에 아들 내미랑 손주들 오면 꼭 데리고 올텐께.” 노인이 두 손에 묵직한 비닐을 든 채 파란 철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선다. 엎드려 있던 복실이가 벌떡 일어나 꼬리를 흔들며 노인의 뒤를 따른다. 툇마루에 비닐 봉지 두 개를 올려놓은 노인이 오메오메 소리를 내며 허리와 무릎을 연신 두드린다. 얼핏 보이는 비닐 봉지 안에는 곶감과 과자, 내복 등 여러 가지가 어지럽게 쌓여 있다. 시간이 지나 허리와 무릎에서 손을 뗀 노인이 비닐 봉지를 들고 집 안으로 들어간다. 주방으로 들어간 노인은 과일과 과자, 곶감들을 냉장고와 찬장에 가지런히 정리하고는 빈 비닐 봉지를 주방 한 구석 비닐 봉지가 가득 들어 있는 박스 안에 구겨 넣는다. 정리를 끝낸 노인의 귓가에 따르릉 거리는 전화 벨소리가 들린다. 노인은 내복 두 개를 들고 안방으로 향한다. 노인은 들고 온 내복 두 개를 펴져 있는 이부자리 위에 조심히 올려 놓고 유선 전화의 수화기를 집어 든다. “여보세요.” 노인의 얼굴이 꽃처럼 활짝 피어난다. “오메, 둘째냐. 잘 있냐잉?” 수화기 너머로 “잘 지내시죠 어머니” 하는 남자의 목소리가 얼핏 들린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연다. “그래 잘 있제. 너가 이번 설에 손주들이랑 며느리랑 내려온다고 해서 니 좋아하는 곶감이랑 애기들 선물도 다 사놨다. 니 형은 이번에 일이 바빠서 못 오고. 근디 언제쯤 내려오냐? 미리 방도 좀 뎁혀 놓고 해야된께.” 수화기에서 남자의 목소리가 조금씩 들린다. 꽤 길게 이어지는 말을 듣고 있던 노인이 대뜸 말한다. “괜찮은께 걱정 말어. 못 올수도 있제. 변호사가 오죽 바쁘겄냐. 다음에 보면 된께 엄마 걱정은 하덜 말고 일 열심히 혀. 니가 잘되는 것이 엄마한테 효도하는 것이여.” 노인이 입을 다문다. 가만히 있던 노인이 다시 입을 연다. “그려. 일 잘하고 항시 몸 건강하고. 다음에 시간 되면 내려오그라잉.” 노인의 얼굴에 피어났던 꽃은 어느새 흔적도 없이 시들었다. 수화기를 내려놓은 노인은 몸을 일으켜 이부자리 위에 있는 내복 두 개를 집어 든다. 자개로 된 옷장 문을 열자 한 구석에 무언가 쌓여있다. 어린이들이 입을 법한, 캐릭터들이 그려진 내복 박스 여러 개가 먼지가 쌓인 채 조용히 자리를 지키고 있다. 노인은 쭈글쭈글한 손으로 위에 쌓인 먼지를 슥슥 쓸어내고 그 위에 새로 산 내복 두 개를 올려놓는다. 노인은 옷장 문을 잡고 한참을 가만히 서서 내복들을 바라본다. 늙은 고목처럼 구부정한 모습으로 쌓인 내복들을 응시하던 노인이 천천히 옷장 문을 닫는다. 노인이 툇마루에 나와 앉는다. 앉아 있는 노인의 옆으로 복실이가 천천히 다가오더니 풀쩍 뛰어올라 노인에게 몸을 기대고 눕는다. 노인은 마디가 불거진 마른 손을 들어 복실이의 하얀 털을 쓰다듬는다. 가만히 앉아서. 하염없이.
나치의 예술작품들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zeitgeist/hidden-legacy-time-for-a-new-look-at-nazi-art-a-1281602.html 나치가 독일을 통치했던 기간이 거의 12년인데, 이 긴 세월동안 나치가 탄압했던 예술 작품들은 지금도 퇴폐예술(Entartete Kunst) 장르로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당연히 나치가 좋아했던 예술작 품들도 존재하고, 나치를 찬양한 예술 작품들도 분명 있기는 있다. 혹시 이거 연합군 측에서 파괴했을까? 아니다. 미국과 독일의 모처 창고에 그냥 모셔두고 있다. 독일에 있는 작품들부터 얘기해 보자.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역사 박물관이 Spandau 창고에 900여 나치 작품들을 그냥 모셔두고 있는 이유는 “잊혀지기” 위함이다. 나치 찬양 예술 작품들은 일종의 “타부”이고 그렇게 반성 좋아하는 독일도 그 시절 친나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부담스러워한다. 미국은 워싱턴 D.C. 근교의 Fort Belvoir에 있는 군용(!) 창고에 있다. 여기에 히틀러의 두상도 고이 모셔져 있다. 전쟁 이후 미군은 대략 9천여 점의 작품을 독일로부터 가져온다. 물론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독일에 돌려준 작품들도 좀 있기는 한데, 친 나치 작품들의 영향력이 우려되는 민감한 작품들은 그냥 미국이 갖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독일측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에 있는 나머지 작품들도 독일로 다시 반납해야 할까? 미군 대변인은 송환할 계획이 현재로서는 없다 답했고, 독일 문화부는 답변을 독일 외교부로 돌렸다. 게다가 그냥 있다는 점만 알 뿐, 미국에 정확히 어떤 작품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독일도 잘 모른다고 한다. 자… 혹시 이 두 곳 외에, 다른 미술관이나 개인 소장 작품이 있을까? 물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외가 없지 않지만 감히 전시까지는 못 하는 듯 하다. 그래서 당시 시절 친 나치 작품들에 대한 완전한 연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여론도 정말 그런 작품의 존재 자체를 대단히 부담스러워 한다. 에밀 놀데 전시회(참조 1)도 결국은 평이 별로 안 좋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냥 없는 셈 칠까? 그냥 나타났다 사라진 UFO처럼 여기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오히려 미국이 연구한 것이 있다(참조 2). 게다가 미군은 내년, 바로 저 장소에 육군 미술관을 개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과연 친 나치 작품들을 그때 공개할까? 게다가 그 연구를 보면,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친 나치 작품들 중에 모더니즘 작품들도 꽤 존재한다. 나치가 모더니즘을 싫어한 건 맞는데, 그냥 일관성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예술가들의 문제도 있다. 타락했다는 비판을 받은 후, 자기 스타일을 고쳐서 승승장구하다가, 독일 패전 이후 다시금 추상 스타일로 바꿔서 거의 꺼삐딴 리 급으로 계속 성공한 작가도 있는 모양이다. 즉, 에밀 놀데에 대한 독일의 차디찬 반응이 좀 위선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예술계가 실질적으로는 나치 청산을 못 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게 다 인간의 삶보다 그림에 훨씬 더 신경썼던 독재자 한 명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참조 1. 에밀 놀데(2019년 6월 19일): https://www.vingle.net/posts/2630740 2. 가령 뉴욕 St. John’s University의 Gregory Maertz 교수가 쓴 Nostalgia for the Future(2019년 5월) : https://cup.columbia.edu/book/nostalgia-for-the-future/9783838212814
레오나르도, 무슨 약을 빠셨습니까?
레오나르도 다 빈치를 보면 물을 만한 질문이 바로 이것이다(어쌔신 크리드 얘기가 아니다). “무슨 약을 하셨길래…?” 최근에 발굴되어 아부다비의 루브르 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레오나르도 다 빈치의 작품, 세계의 구세주(Salvator Mundi, 참조 1)를 보자. 예수의 눈이 붉은 색이고 표정이 매우 미묘하다. 한 마디로 약에 취한(stoned 혹은 high) 모습이다. 혹시 레오나르도도 마리화나 물고 그림을 그렸던 것 아닐까? 아니, 마리화나가 당시 북부 이탈리아에 있기는 있었나? 짧은 주말 특집 답변: 예, 있었습니다. 당시 교황 인노첸시오 8세는 1484년 교황 자리에 오르자마자,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라는 칙서(참조 2)를 발표한다. 여러가지 악마적 행위(즉, 마녀 행위다, 참조 3) 등등을 금지하는 칙서인데, 이 중에 마리화나(허브로 표현되어 있다)가 있다. 성체 대신 약을 빠는 행위가 미사 중에 있었다는 것인데... 이때는 레오나르도가 한창 일하던 시기임에 주목. 물론 믿거나, 말거나의 얘기이기는 하다. 하지만 눈빛은 물론 표정도 상당히 high를 의심할 수밖에 없는 느낌이다. 게다가 레오나르도는 말그대로 만물박사였기 때문에 “허브”에도 분명 관심이 많았을 것이다(참조 4). 하지만 하필이면 레오나르도 다 빈치에 대한 현대적인 관심은 19세기 영국 빅토리아 시기가 시작이기 때문에, 다 빈치의 양성애적인 성향과 함께 마리화나에 대한 관심은 일종의 “타부”였다. 결론은, 재즈의 도시 뉴올리언즈(혹은 뉴욕), 현대 예술의 도시 파리처럼, 약 빤 르네상스의 도시(참조 5) 피렌체...라 할 수 있을지도. 증거는 없지만 말이다. 그러고 보면 모나 리자도 약 빨아서 나온 그림일 수 있겠다. ---------- 참조 1. 4,500억 달러에 매각됐다. 뉴욕타임스는 이 그림의 실구매자가 우리 모두 주목하고 있는 무함마드 빈 살만 사우디아라비아 왕자라 보도했는데(크리스티는 보도를 부인했다), 아무래도 사우디아라비아보다는 UAE의 루브르에 내거는 편이 그에게 더 나았으리라. 2. Summis desiderantes affectibus: https://sourcebooks.fordham.edu/source/witches1.asp 3. 씐나는 마녀 생활(2017년 5월 13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5205402364831 4. 거 왜, 다 빈치의 블로그 출판물(...)인 Codex Atlanticus에는 분명 식물학 챕터도 있다. 5. 기사는 소설의 도시 런던을 거론하고 있는데, 소설의 도시는 필자에게는 애석하겠지만 파리가 아닐까. 19세기 중후반을 따진다면(그 이전에도?) 당시 미디어 제국은 프랑스였지 영국은 아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