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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랜만에 원고 청탁이 쏟아졌고, 일단 모두 수락했고, 밀려온 원고 앞에서 이게 과연 잘한 짓인가 싶어졌다. 하지만 나는 단지 쓸 뿐이다. 오랜만에 포털사이트에서 내 이름을 검색하다가, 제일 좋아하는 시라며, 내 시를 올려놓은 블로거를 발견했고, 믿기지 않아 나는 그 페이지를 몇 번을 들여다봤다. 그는, 아니 ‘그분’은 나의 그 시를 여러 번 읽었고, 위안을 받았다고 덧붙여 놓았다. 감사하기는 하지만, 너무 뜬금없어서, 내가 아는 누군가가 짜고, 나에게 서프라이즈라도 해주고 있는 것인가 싶었다. 그러나 누가 그런 짓을 하겠는가. 나는 사실 등단 후 이렇다 할 시를 써내지 못하고 있다. 그 와중에 쓴 지 3년이 넘은 시들은 누군가에게 뭇매를 맞았고, 나는 많이 위축돼 있는 상태이다. 그 심리의 결정적 이유는, 단순히 내 시가 지적을 받았다는 것에 있다기보다는, 나 역시 그 지적들에 동의하는 바가 여럿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애물단지가 돼버린 내 전작들을 모두 폐기처분할까 하는 요즘이었다. 비워야 또 채워질 테니까. 그런데 누군가는 위안을 받고 있다고 하니, 내가 과연 글 쓰는 사람으로서 멋대로 위축돼있을 권리가 있는가 싶어지기도 한다. 고민이 한층 더 깊어졌다. 사실 요즘의 나는 위축되는 동시에 정말 많은 것을 배웠고, 내가 윤리의식에서 어느 정도는 자유롭다고 생각한 것이 얼마나 오만방자한 생각이었는지 깨달았으며, 소설을 병행하기로 한 뒤로 시의 문장이 점점 산문화돼가는 것을 염려하며 지켜보는 중이기도 하다. 지금 나는 여러 층위로 난관에 봉착했는데, 아주 잠시 단비를 맞으며 나를 다시 돌아보고 있다. 어쨌든 ‘그분’께 감사드린다. 동료 시인이 자신의 따끈한 첫 시집을 들고 사무실을 방문했다. 우리 편집부는 그와 수박을 썰어먹으며 덕담을 했다. 메이저 출판사에서는 절대 시집을 내지 않겠다고 했던 바로 그 시인이다. 그는 좋은 시인이다. 아마도 조만간 적잖은 주목을 받게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한다. 그의 신들린 듯한 말놀이들은 재밌으면서도 깊이가 있다. 가령 그의 “사전(蛇傳)” 연작시에서 소제목 등에 쓰인 몇 가지를 들면, 소녀시대를 떠올리게 하는 “다시 만난 생계”라든가, 한석규, 심은하 주연의 영화 『8월의 크리스마스』를 떠올리게 하는 “파롤의 크리스마스”라든가(“파롤”은 아마도 소쉬르의 용어일 것이라 추정한다), 혜민 스님을 떠올리게 하는 “망쳐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그 외에도 “우리들의 일부러 진 영웅” “라면이 분다. 살아야겠다.” “빈곤은 개 이름” 등등. 그가 한창 이런 문장들을 모을 때, 나도 ‘웬수는 거들 뿐’이라는 한 문장을 그에게 넌지시 흘려본 적이 있다. 물론 당연하게도 그의 시에 쓰이지는 않았다. 아, 그게 누구인지, 어떤 시집인지 궁금할 분도 있겠다. 김건영 시인의 『파이』라는 시집이다. 그는 내가 여기에서 얼떨결에 자신의 시집을 홍보하고 있다는 것을 꿈에도 생각 못 할 것이다. 지금 내 옆에 그의 시집이 놓여있다. 시집 표지를 넘기면 그가 내게 쓴 짧은 글이 적혀 있다. “눈빛이 깊은 나의 ××× 시인께.” 생각보다 훨씬 악필이어서 놀란다. 괘, 괜찮다. 천재는 다 악필이라고 하지 않던가. 땡볕을 걷고 걸어 카페에 도착했더니, 이제는 날이 흐려져 있다. 타이밍이 예술이다. 이런 게 인생이야,라고 생각하면 편해진다. 저녁에는 떡볶이를 먹으려고 한다. 옆 테이블 손님이 의자를 하나 가져가도 좋냐고 물어본다. 네, 그러세요. 그녀가 의자를 가져간다.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다. 그들은 빙수를 먹고 있다. 여름휴가에는 여행이라도 다녀올까 생각한다. 취직 전에는 매일이 휴가였는데, 취직을 하고 보니 비로소 휴가가 휴가다워진다. 이래서 인간에게는 노동이 필요한가. 올해 여름부터는 양산 쓰기를 시도하려고 하는데, 남자용 양산을 파는 곳이 없다. 남자용 양산이라는 것이 과연 있기는 한가. 아무리 편견에서 자유롭고 싶다고 해도, 레이스가 달린 양산을 쓰기에는 조금 수줍다. 인터넷으로 적당한 양산을 알아봐야겠다. 내 피부는 소중하니까. 자, 이제 시를 쓸 시간이다. 시는 어떻게 쓰는 건가요. 시는 어떻게 쓰는 건가 하면요. 일단 쓰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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