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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시체제2) 문화선전



비록 전시체제라는 특수한 상황이었지만 영화인들의 저항은 매우 수동적이었으며 전쟁에 적극적으로 협력하거나 위장으로 협력 혹은 식민지 각처로 흩어지는 방식으로 그 시기를 맞았는데 개인적인 예술표현이 상대적으로 제한되고 힘들었던 상황에서 그들은 어떤 형식으로든 살아남기 위해 노력했다.

한편으로는 서구영화와 단절되고 일종의 식민지 지배의 용이함이나 문화선전도구로서 영화를 제작해야 했기 때문에 자신들이 펼치고자 하는 영화세계란 묻혀버려야 했기 때문에 차라리 지식인들 가운데서는 서양의 근대문화에 회의를 느끼느니 일본의 미학적 전통으로 회귀하자는 움직임도 일었다.

이러한 움직임은 일본의 전시체제 상황과 절묘하게 맞아 떨어지게 되는데 일본의 ‘숭고한 정신’이야 말로 이미 퇴보한 유럽문화나 물질문명의 잔재에 지나지 않는 신대륙 미국문화에 비하면 우월하다는 사상이 지배적이었다.

서양문화를 바르게 이해할 수 있는 풍토가 아니었고 나치 독일에 의해 프랑스 파리가 점령되었다는 보고는 그들에게도 자극제가 되었다. 이들은 식민지배나 통치야 말로 일본의 숭고한 문화와 정신세계를 전파하고 동화시키면서 퇴락한 유럽문화나 미국문화로부터 동양의 사상을 지켜낼 수 있다고 본 것이다. 심지어 1942년에는 교토의 철학자를 중심으로 ‘근대(近代)의 초극(超克)’심포지엄이 개최되어 세계사에서 유래를 찾아 볼 수 없는 이른 시기에 포스트 모더니즘이 논의될 정도였다.

일본이 이러한 문화적 우월성을 강조하게 된 계기는 역사적 유래가 깊다. 섬나라라는 특성상 외부 문화의 유입이 컸던 것이 사실이고, 고대 일본의 경우 주로 한반도와 중국 등에서 수용된 문화와 종교가 일본의 기초를 쌓은 반면 중세시대 이후에는 아무리 통치세력들이 ‘쇄국’을 논한다 할지라도 반드시 교역과 문화교류의 창구를 열어놓았다는 점이다.

이들에게는 외부 문화를 수용하는데 있어서 몇 가지 원칙이 적용되었는데 ▲종교를 식민지 침투의 수단으로 삼거나 ▲내정간섭 ▲사상의 전파 같은 것들은 철저하게 제약 받았으며 심지어 개항이나 무역이 부분적으로 허용되었다 할지라도 이들을 위해 인공섬(데지마, 出島)을 만들어서라도 비록 외국인들을 철저하게 외부와 격려시켰다.

다만 일본은 종교 같은 서양문명을 거부하는 대신 그 안에서 필요한 것들을 발췌하여 이질적인 것이지만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이른바 ‘이화(異化)’정책을 펼쳐나가게 되는데 이를 통해서 생활양식이나 음식, 물건, 의복 등은 도입하지만 정신세계만큼은 일본의 고유적인 것들을 지켜나가는 전략을 썼다.

그러므로 포르투갈과 스페인이 경쟁적으로 일본에 선교와 무역을 병행하려 했을 때에도 예수회의 신부들은 스스로 육식을 거두고 의식주를 일본풍으로 바꾸는가 하면 초라한 복장을 선호하지 않는 일본인의 특징을 받아들여 수도회의 원칙에 어긋나는 실크옷을 입어 사제로서의 품위를 지키기도 했다. 때문에 포교원칙도 ‘일본인에게 순응하는 것’이 최우선일 정도였다.

따라서 일본은 포르투갈로 스페인(이들이 가톨릭을 앞세워 남미를 정복한 사실을 안 후)을 먼저 견제한 후 다시 가톨릭을 탄압하면서 포르투갈인을 국외로 추방 한 후 프로테스탄트인 네덜란드를 통해 포르투갈을 견제하는 한편 교역을 포기하기에 앞서 거래처를 바꾸는 치밀함을 보였다.

심지어 1600년에 네덜란드 판델하밴 회사 소속 선박인 리푸데호가 오이타현(大分県) 우스키(臼杵駅) 북부 지역에 표착하자 당시 집권자인 센고쿠 시대 최후의 승리자이며 에도 막부 시대 초대 쇼군인 도쿠가와 이에야스(德川家康)는 이 배에 타고 있던 영국인 윌리엄 애덤스(William Adams)를 오사카로 소환한 후 외교고문으로 중용한 후 1609년 네덜란드, 1613년에는 영국과도 통상을 개시하였다.

이를 통해 이에야스는 자신이 일본의 외교권을 가지고 있음을 대외적으로 선포하고 네덜란드와 일본을 통해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견제했는데 이 때에도 포르투갈과 스페인을 ‘남만인(南蠻人)’, 네덜란드와 영국을 ‘홍모인(紅毛人)’으로 구별하여 불렀다.

이때에도 일본 특유의 동화정책이 시행되어 윌리엄 애덤스는 ‘미우라 안진(三浦按針)’이라는 일본 이름으로 개명하였고 이에야스의 명령으로 함께 표착한 네덜란드인과 함께 80톤, 120톤의 유럽식 범선을 설계하여 만드는 한편 네덜란드로 하여금 무역허가를 얻게 하여 히라도(平戶)에 외국인이 경영하는 상점인 상관(商館)을 설치했다.

이러한 정책은 메이지 유신이 있기 전까지 막부시대에도 외부와 교역을 통해 쇄국만은 막았고 네덜란드를 통해 얻은 지식은 ‘난학(蘭學)’이라는 학문으로 정립되었다. 이중 의학은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보였지만 무엇보다도 서양문명 중에 물건에 잡착하였고 이를 일본화 하는 과정에서 ‘남만’이나 ‘홍모’가 아닌 ‘란(蘭)’이라는 새로운 가치기준을 만들어 서양에서 수입한 사상이나 물건에 대한 일본적 해석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갖게 했다.

또한 나가사키는 비즈니스센터의 역할 뿐 아니라 서양의 서적, 의학, 식물학, 물리학, 천문학 등 서양의 첨단 과학기술이 들어오는 창구가 되어 주었다. 따라서 입항하는 네덜란드 선박은 반드시 유럽과 아시아의 최신정보 보고서를 에도막부에 제출하도록 의무화하였는데 이를 ‘네덜란드 풍설서’라고 불렀다.

다만 쇄국과 기독교 금교령은 유효하였기 때문에 일본의 지식인들은 ‘나가사키’로 유학을 오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설탕, 별사탕, 카스텔라, 단팥빵, 카레라이스, 돈가스로 이어지는 서양문화의 수용과 일본화, 오랫동안 육류 섭취를 법으로 금지했었고 이 때문에 ‘소고기’를 문명개화의 상징으로 받아들일 정도였던 일본의 서양문화 수용이 훗날 식민지 지배에 어떤 영향을 주었을지 대략 짐작이 갈 것이다,

또한 중국대륙으로부터 ‘실크로드’를 통해 문물을 받아들인 것과 별개로 초기 포르투갈인으로 대표되는 일명 ‘별사탕로드’를 통해서 들여 온 비누, 안경, 유리, 망원경, 카르타, 시계, 인쇄기술, 서양의학, 서양음악, 서양회화와 신대륙에서 발견된 새로운 식물들은 일본에 생활혁명을 가져왔던 것이다.

특히 ‘카르타’의 경우 서양의 트럼프에 해당하는 것인데 화려한 색채의 유럽풍으로 그려진 총 48장의 카드를 일본화 하여 카르타(カルタ)가 만들어졌다. 그 중 4계절과 12개월의 꽃을 정하여 4장씩 만든 카드를 ‘꽃 카르타(花カルタ)’라고 불리게 되고 오늘날 화투(花鬪)가 되어 일본 식민지를 경험한 국가들 서민들의 오락수단이 되었다는 것만 해도 그들의 일본화와 식민지 지배전략이 얼마나 치밀한가를 알 수 있다.

신대륙을 발명한 컬럼버스가 후추라고 생각한 ‘고추’ 나 토마토, 감자, 고구마, 옥수수, 가지, 시금치, 호박을 한반도로 유입시킨 것도 알고 보면 ‘별사탕로드’를 통해 일본에 들여 와 다시 식민지로 전파된 것이다.

이러한 새로운 문화가 음식, 의복을 비롯 생활을 바꾸고 서양문화의 수용을 통해 이질적 문화를 일본화 했을 뿐만 아니라 또 다른 문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듯이 ‘문화통치’를 통해 식민지배를 하고 이를 통해 토착화 한 사례도 만만치 않은 것이 사실이다.

오랜 기간 일본의 지배를 받았던 나라들은 여러 형태로 일본이 그 흔적을 남겼고 대만 등은 기본적으로 이 흔적을 부정하지 않는 자세를 유지해 왔던 것이다.

다시 영화로 돌아와서 일본은 제목 자체만으로도 전의를 고조시키고 하나의 강령(綱領)인 영화들을 제작하는 한편 식민지 곳곳에 일본영화를 이식시키는 작업도 자의반 타의반으로 병행되었다. 이 흔적은 오래도록 남아 지금까지 유지 되는 게 현실이기도 하다. <미국 LA= 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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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베 신조 일본 총리(사진=연합뉴스) 아베 신조 일본 총리가 '국가간 약속'을 준수할 것을 한국 정부에 거듭 촉구하면서 한국이 한일 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복원하는 계기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NHK 등에 따르면, 아베 총리는 8일 참의원 본회의에서 "국가간 약속을 어기는 행위를 계속하는 한국과의 관계를 어떻게 가져갈지"를 묻는 세코 히로시게 자민당 참의원 간사장의 질문에 대한 답변에서 "한국은 중요한 이웃 나라이며 북한 문제 등에서 한일, 한미일의 협력이 중요하다"라고 전제했다. 아베 총리는 이어 "한일 관계의 근본을 이루는 한일청구권협정의 위반 상태를 방치하는 등 신뢰관계를 해치는 행위를 계속하는 한국에 대해 우선은 국제법에 근거해 국가와 국가간의 약속을 준수함으로써 한일관계를 건전한 관계로 되돌려 놓는 계기를 만들 것을 요구한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이날 오전과 오후에 최소 2차례 이상 같은 취지의 답변을 되풀이했으며, 앞서 지난 4일 임시국회 개회식에서도 이같은 내용의 발언을 한 바 있다. 아베 총리는 지난해 10월 한국 대법원의 징용 배상판결이 나온 이후 1965년 체결된 한일청구권협정을 내세워 한국 정부가 이 문제를 주도적으로 풀어야 한다는 주장을 되풀이 하고 있다. 한편, 아베 총리는 전날 동해 대화퇴 어장에서 발생한 북한 어선과 일본 수산청 단속선간의 충돌 사태와 관련해서는 북한 어선의 불법조업 행위가 확인되지 않아 구조선원들의 신병 구속 등 강제 조치를 하지 않고 주변에 있던 북한 어선에 신병을 인계했다고 말했다. 아베 총리는 또한 조건을 붙이지 않고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정상회담을 변함없이 계속 추진하겠다는 뜻을 거듭 밝혔다.
‘오니츠카’가 아식스로 이름을 바꾼 이유
... ‘일본 브랜드 네이밍’ 이야기 3편(1편 카레, 2편 커피)은 스포츠용품 회사다. 일본 3대 스포츠용품 메이커는 아식스, 미즈노, 데상트다. 이들 메이커는 글로벌 시장에서 최강자인 나이키, 아디다스 등과 경쟁을 벌이고 있다. 나이키, 승리의 여신 니케(Nike)에서 출발 나이키는 미국 오리건대 육상선수였던 필 나이트(Phil Knight)가 육상부 감독이던 빌 바워만(Bill Bowerman)과 함께 만들었다. 이들이 1964년 설립한 회사가 ‘블루 리본 스포츠’(Blue Ribbon Sports)다. 이후 1971년 나이키라는 이름으로 바뀌었다.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회사 이름으로 사용한 것. 1971년 캐롤린 데이비슨(Carolyn Davidson)이라는 그래픽디자인과 학생이 빠른 것을 상징하면서 하키 스틱처럼 날렵하게 뻗은 마크를 만들어냈는데, 그게 바로 나이키의 상징인 ‘스우쉬’(Swoosh)다. 나이키는 35달러에 이것을 구입했고, 스포츠화를 대표하는 로고로 대중의 사랑을 받게 됐다. 독일 브랜드 아디다스(Adidas)는 1920년대 제화업자 아디 대슬러(Adi Dassler)가 형 루돌프 대슬러와 함께 만든 회사다. 이 상표가 공식등록된 건 1949년. 아디 대슬러의 이름 ‘Adi’와 Dassler의 세 글자 ‘Das’를 붙여 Adidas라고 이름을 지었다. 형 루돌프는 나중에 독립해 퓨마(Puma)를 설립했다. 아식스, 라틴어 구절에서 회사 이름 따와 이제, 일본 메이커로 들어가 보자. 일본 스포츠용품의 리더는 아식스다. 창업주는 돗도리현 출신의 오니츠카 기하치로(鬼塚喜八郞: 1918~2007). 그가 1949년 효고현 고베에서 회사(농구화 제조사)를 설립할 당시의 사명은 ‘오니츠카’였다. 그의 이름을 딴 회사명은 이후 현재의 ASICS(아식스)로 바꾸었다. 오니츠카에서 아식스로 바꾼 까닭은 뭘까. 창업주 오니츠카 기하치로는 어릴 적 할아버지로부터 “남을 행복하게 하면, 자신도 행복하게 된다”(他人を幸せにすれば自分も幸せになれる)는 말을 들었다. 오니츠카는 살면서 이 말을 마음속에 새기고 살았다고 한다. 이런 생각은 스포츠화 브랜드를 만드는 데도 작용했다. 아식스라는 브랜드는 ‘건전한 신체에 건전한 정신이 깃든다(Mens sana in corpore sano)’는 뜻인 라틴어 구절에서 따왔다. 창업주 오니츠카는 이 구절의 앞 단어 Mens를 좀 더 의미가 강한 ‘정신’이라는 뜻의 Anima로 바꾸어 ‘Anima sana in corpore sano’라는 문장을 만들었다. 이 구절의 앞 글자를 하나씩 딴 게 ASICS다. 오니츠카는 왜 하필 라틴어 구절에서 브랜드 이름을 따왔을까. 그는 ‘혼의 경영’이라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밝혔다. “이봐 친구, 청소년들에겐 스포츠화가 필요해” <전쟁이 끝나고 군대에서 사회로 복귀하여 잿더미가 된 고베로 돌아온 나는 암거래시장에 모여드는 청소년들을 볼 때 마다 가슴이 아팠다. 회사를 설립하기에 앞서, 군대 친구 중의 한 사람이며 효고의 교육위원회 보건체육 과장인 호리씨를 찾아가 “앞으로 청소년들의 교육에 도움이 될 만한 사업으로 어떤 것이 좋을까”를 상의했는데, 그때 그가 해준 말이 ‘건전한 신체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것이었다.> 당시 친구 호리 코헤이(堀公平)는 “오니츠카, 지덕체의 세 가지를 균형있게 교육시켜 훌륭한 사회인으로 만들려면 스포츠가 최적이야”라고 말했다고 한다. 스포츠를 청소년들에게 권장하려면 스포츠화가 필요했다. 아식스의 탄생 이유다. 2007년 11월, 오니츠카가 사망하자 그의 추도식에는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약 중이던 스즈키 이치로 선수, 마라톤 선수 다카하시 나오코(高橋尙子:시드니올림픽 금메달리스트) 등 스포츠 선수들을 포함해 1600여 명이 참석했다.(돗도리현 추모 기사 중에서) 오니츠카는 그렇게 일본 청소년들에겐 ‘꿈의 운동화’를, 스포츠 선수들에겐 ‘땀의 운동화’를 선물하고 세상을 떠났다. <미즈노, 데상트 이어집니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1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창업자 데릴사위가 키운 스즈키 자동차
... 스즈키 자동차의 1대 창업주 스즈키 미치로(얼굴 사진). ... 은행원 하다가 오너 집안에 장가들어 마츠다 오사무(松田修)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후현 태생으로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은행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5년 후인 1958년, 은행원이던 그의 인생에 일대 큰 변화가 찾아왔다. 스즈키 자동차 실질적 창업주 스즈키 슌조(鈴木俊三)의 데릴사위가 된 것이다. 마츠다 오사무는 스즈키 슌조의 장녀와 결혼해 양자가 됐고, 그의 이름은 마츠다 오사무(松田修)에서 스즈키 오사무(鈴木修)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큰 변화가 닥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1977년에 창업자인 스즈키 미치오와 2대 회장인 스즈키 슌조, 3대 회장인 스즈키 지츠지로 등의 경영자가 잇따라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데릴사위인 내 어깨에 회사의 운명이 지워진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스즈키 오사무 저 ‘작아서 더 강한기업 스즈키’(김소운 옮김, 리더스북) 전현직 동시에 쓰러지면서 사장 자리 올라 전임, 현직 CEO가 동시에 쓰러지면서 스즈키 오사무는 순식간에 사장 자리를 맡았다. 입사 20년이 지난 1978년의 일이다. 닛케이비즈(2009년 3월 2일)는 당시 스즈키 오사무의 심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아, 내가 사장이야”- 스즈키 오사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등골이 오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쉴 때도 사장이라는 무게감이 덮쳤다.> 스즈키 자동차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즈키 오사무(鈴木修‧87) 회장은 이렇게 큰 변화를 두 번 겪었다. 그는 경차의 대명사인 스즈키를 ‘위대한 중소기업’(偉大な中小企業)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즈키 오사무는 2000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스즈키의 차는 차체만 작을 뿐, 회사는 이제 더 이상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 있다. 스즈키자동차의 슬로건은 ‘작게(小), 적게(少), 가볍게(輕), 짧게(短), 아름답게’(美)이다. 경차는 이익을 남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생산원가 절감이 생명이다. 오사무 회장은 공장 바닥에 나사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공장 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다”며 한 푼의 돈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즈키의 효자 상품은 알토(Alto:라틴어로 높다는 뜻의 altus에서 따왔다)다. 오사무의 사장 취임 직후인 1979년 첫 출시된 알토는 오랜 기간 인기를 끈 스즈키의 주역이다. 알토는 한국 대우자동차의 티코 모델이기도 하다. 스즈키 집안은 방직기계로 출발 스즈키 자동차는 창업주 이름에서 비롯됐지만, 처음부터 자동차업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목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스즈키 미치오(鈴木道雄:1887~1982)가 스즈키 방직기계(주)를 설립한 건 1920년이다. 그의 아들 스즈키 슌조(鈴木俊三)는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내놓으면서 업종을 변경했다. 1954년 ‘스즈키자동차공업’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포츠바이크와 경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붉은 S자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58년부터다. 1990년 10월에는 현재의 스즈키로 사명을 바꿨다.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 스즈키의 역사에서 인도 진출을 빼놓을 순 없다. 오사무 회장은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며 일본 자동차 메이커 중 가장 먼저 인도 시장에 눈떴다. 그가 사장 4년차이던 1982년(당시 52세), 스즈키는 자동차 기업으로서는 일본에서 꼴찌였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서 1등하기 어렵다면 해외에서 하자”고 마음 먹었다. 모두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도 시장 진출 선언이었다. 인도 정부와 공동으로 합작사‘ 마루티 우도요그’(Maruti Udyog)를 설립, 이후 자회사로 만들었다. 2007년에는 ‘스즈키 마루티 인디아’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마루티는 인도에서는 ‘국민차’로 불린다. 스즈키는 한때 인도 시장 점유율 70%를 웃돌기도 했지만, 현재는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7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98센트...식료품 배달원의 마라톤 우승화
... (일본 브랜드 네이밍, 스포츠 브랜드편 아식스/미즈노/데상트 관련 기사입니다.) 2003년 6월 22일 뉴욕타임스는 한 전설적인 마라토너의 부음(Johnny Miles, Upset Winner of Boston Marathon, Dies at 97)을 전했다. 식료품 배달원을 하다 보스턴 마라톤을 제패한 조니 마일스(1905~2003)의 사망 기사였다. 존 크리스토퍼 마일스(John Christopher Miles)가 본명, 조니(Johnny)는 별명이다. 그런 그는 1926년과 1929년 보스턴 마라톤 대회의 우승자다. 뉴욕타임스가 전한 조니 마일스의 우승 신화는 드라마틱했다. 캐나다 광산 마을의 식료품 배달원 조니 마일즈 조니 마일스가 태어난 곳은 캐나다 동남부의 광산마을 노바 스코디아(Nova Scotia). 가정 형편이 좋지 못했던 조니 마일스는 식료품 배달원을 하며 달리기를 시작했다. 10대 시절 지역경주에서 우승한 적은 있지만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나가지 전까지 10마일 이상을 달려본 적이 없던 그였다. 그런 그가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도전한 건 1926년이다. 하지만 경비가 문제였다. 동네 사람들이 보고만 있지 않았다. 뉴욕타임스는 “마일스의 이웃들은 그를 기차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에 보내기 위해 수백 달러를 모았다”(Miles's neighbors raised a few hundred dollars to send him by train to Boston for the 1926 marathon)고 전했다. 98센트...초라한 운동화 신고 보스턴 마라톤 출전 뉴욕타임스는 “단풍에 고향 노바 스코티아(Nova Scotia)를 상징하는 NS를 새긴 유니폼을 입었고, 운동화는 98센트 짜리였다”고 했다. 생전 첫 풀코스였다. 보스턴 마라톤 대회가 열린 날은 그해 4월 30일. 결과는 어떻게 됐을까. 당시 기록이나 관록으로 보자면, 조니 마일스 같은 아마추어가 도저히 우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1924년 파리 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알빈 스텐루스(Albin Stenroos)와 보스턴 마라톤 3연패의 클라렌스 데마르(Clarence DeMar)가 출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니 마일스는 두려울 게 없었다. 레이스가 진행되며서 데마르가 뒤쳐졌고 스텐루스가 주도권을 잡았다. 마일스는 훗날 보스턴글로브(Boston Globe)에 당시 레이스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위대한 선수들 제치고 더 위대한 우승 일궈 “나는 스텐루스를 쳐다 보았다. 그의 눈은 가라 앉아 있었고, 얼굴은 튀어 나와 있었다. 나는 그를 제칠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하트브레이크 힐(Heartbreak Hill)에서 나는 스텐루스를 앞질렀다.” (I looked at Stenroos and his eyes were sunken, his face was kind of pulled in and I figured this was the time to pass him. I passed him on Heartbreak Hill) 조니 마일스는 2시간 25분 40초의 기록으로 우승했다. 식료품 배달원의 기적과도 같은 반전 드라마였다. 조니 마일스는 1929년 한 차례 더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제패했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19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