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eal896p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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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고보면 같은 시대 사람.jpg

대박싱기방기....

그 와중에 사도세자 성의없이 뒤주사진 띡하고 박아놓은거보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18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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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ensTOP
사도세자 지못
오!! 유익하다 유익하다
이거 존나 쓸떼없는거 같으면서도 유익한거 같으면서도 재밌네ㅋㅋㅋㅋㅋ
오!!!!!
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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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펌] 냉혹한 공기총의 세계
다들 알겠지만 총은 존나 쎄다. 막강한 화약의 은총에 힘입어 총성이 전장에 울려퍼진 순간 전쟁터의 패러다임은 영영 바뀌어버렸다 하지만 처음부터 총이 완벽한 무기라고 보긴 힘들었는데 여러가지 약점 중에서도 제일 심각한게 연사력이었다 옛날 총들은 자동발사는 커녕 반자동도 안 되는 총들이었다. 한발 한발은 존나 뼈아프게 아파도 그 다음 한발을 날리려면 라면 끓여먹을 시간 정돈 아니더라도 물 올리고 봉지 뜯고 불 키는 시간 정돈 있어야 했다. 왤케 오래 걸렸는지 궁금할텐데 잠깐 이야기를 돌려서 이 당시 전쟁 꼬라지가 어떤 꼬라지였는지 보고가자 이 당시 주무기는 머스킷총이었는데, 이 새끼들은 위력은 존나 확실했지만 위력말고 다른 면에서는 좀 읭스런 면모가 있는 친구들이었다. 우선 앞에서도 줄창 말했던 연사력이 헬이었다. 머스킷총은 한 발 쏠 때마다 월탱 자주포만큼이나 긴 장전시간을 요구했는데 그럴만도 한게 총 한 발 쏘려면 화약봉지 뜯고 화약봉지 부어넣고 총을 똑바로 세우고 총알을 앞구멍으로 넣고 다시 화약 넣고 꼬질대로 존나 쑤시고 다시 들고 해머 젖힌 후에야 조준하고 쏠 수 있었다 시간도 개같이 오래 걸리는데 존나게 큰 총을 무조건 세워서 장전해야 되니 엎드려쏴는 꿈도 못 꿨다 한 대만 맞아도 대갈통 작살나는 총알이 날아다니는데 무조건 상남자 써서쏴 딜교를 해야 된다. 연사력만 문제냐면 그게 또 아니다 존나 구식 화약을 쏴갈기는지라 연기가 장난 아니게 솟아오른다 한 두 발만 연사해도 전장은 저 지경이 된다. 지 총에서 나오는 연기 때문에 총을 조준하지 못할 지경이 된다. 눈만 안 보이면 또 다행이겠지만 귀도 안 들렸다. 수천명 단위로 일렬로 나란히 서서 구식 화약을 뻥뻥 쏴갈기는데 당연히 소리도 존나게 크다. 바로 옆에서 고래고래 소리지르는 명령도 못 알아들을 정도로 어마어마한 소리가 나는데 귀머거리되는건 둘째치고 이딴 걸로 야간기습은 꿈도 못 꾼다. 이런 꼬라지니 당연히 사거리가 길 리가 없다 눈깔 앞에 연막탄이 날아다니는 수준인데 어케 조준 사격을 하냐. 당연하지만 반동 억제 그딴 건 생각도 안 하던 시대라 반동도 무지막지했다. 이 때문에 화력을 보장하려면 존나 머릿수 모아서 존나 각 재서 줄 세워놓고 100m 안쪽에서 상대 표정 봐가면서 싸워야했다 현대 시점에서 보면 뭔 븅신짓거리냐 탄식이 나오는 라인배틀이 이런 이유로 생긴 거다. 얘들이 빡대가리라 이렇게 싸우는게 아니라 이렇게 싸울 수 밖에 없던 거다 당연하지만 얘들도 이렇게 싸우는건 전혀 즐겁지 않았다. 인간은 자고로 난 다치기 싫은데 쟤들은 죽이고 싶은 종족이다 머스킷이 아무리 한방뎀이 쩔어도 죽창뎀만으로 전쟁질을 해먹을 순 없으니 군바리들의 고민은 한 곳으로 수렴했다. 어케해야 사속을 올릴 수 있을까? 캘리코를 붙이는 걸론 해결이 안 되는 이야기였다 아직 발명되려면 200년쯤 더 있어야되니까 이렇게 총신을 여러개 늘려보기도 하고 권총을 여러 개 들고다니기도 하고 줄 서서 앞놈 쏘는 동안 뒷놈 장전하는 식으로 물량을 늘려보기도 하고 아무튼 존나게 많은 방법을 생각해냈는데 근데 이런 꼼수는 결국 한계에 부딪치기 마련이다. 총신 여러개 달린 놈은 생긴게 븅신인만큼 명중률도 븅신이고 권총 여러발 달고 다녀봤자 권총이고 내가 줄 서서 쏘면 남들도 줄서서 쏜다. 결국은 총 자체의 연사력을 올려야 했다. 그리고 이걸 극단적인 방법으로 해결한 나라가 바로 나폴레옹 전쟁 당시의 오스트리아다 캥거루가 뛰노는 나라 오스트리아는 도대체 어떤 방식으로 당시 총의 지루를 해결했을까 오스트리아에 캥거루가 산다는 것을 부정하는 무식한 친구들은 없길 바란다 (캥거루는 오스트레일리아에 삽니다. 드립임.) 캥거루파워의 힘으로 오스트리아는 슈퍼 오버테크놀러지 연사총을 개발하는데 성공한다 바로 공기총이었다 좃밥의 대명사로 통하는 공기총이? 이런 황당한 생각이 들겠지만 진짜다 바르토로메우스 지란도니가 발명한 이 지란도니 공기총은 시대를 까마득하게 앞서가는 개사기 무기였다 호에엥 머스킷 이거 넘 느리고 앞도 안 보이고 귀도 안 들리고 사거리도 짧고 반동도 쎄서 개같아요 공기총을 쓰세요 아니 공기총으로 사람을 어케 죽여요 산소중독으로 죽임? 근데 진짜 사람이 죽었다 공기총이라니 이름만 들으면 별로지만 절대 좃밥이 아니었다. 왜냐면 이 새끼는 250미터에서 대갈통에 빵꾸를 이쁘게 뚫어놓는 화력이 나왔으니까 군필여고생들이니 250사로가 얼마나 먼 지는 다들 감이 잡힐 텐데 어케 공기총 주제에 이딴 화력이 나오냐고 싶을텐데 그 비결은 바로 개머리판이었다 지란도니 공기총의 저 웃기게 생긴 개머리판은 사실 개머리판이 통째로 압축공기통이다. 여기다 공기를 무지막지하게 때려놓고 압축한 다음에 총에 연결하고, 쏠 때마다 방아쇠를 당기면 압축된 공기가 총알을 힘차게 밀어내는 것이다. 이 압력이 위에서 설명한 날아가는 살상력의 힘이 되는 것이다. 위에서도 설명했지만 100m도 안 되는 거리에서 서로 얼굴보고 총알 땡기던 시대에 250m를 날아가는 총알이 나온 것만으로도 획기적이다. 호에엥 쩌내요 근데 공기총이라고 하니까 쏠 때마다 공기 불어넣어야 되는 거 아님? 장전 복잡해보여여 장전? 아아...이미 끝난 '이것'을 말하는 것인가? 사거리만 긴 게 아니었다. 저게 장전 끝난 거다. 기울여서 엄지 손가락으로 땡겨주면 끝이다. 이 정도면 수십년 뒤에 나올 볼트액션 총보다도 훨씬 간단하다. 한 발 장전하는데 30초 걸리던 시대에 뜬금없이 나타난 이세계총이다.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면 당시 총들이 앞구멍으로 총알 쑤셔넣는 전장식이었다면 지란도니 공기총은 튜브방식의 탄창을 도입했기 때문이다. 탄창 속에 줄줄히 총알이 들어있기 때문에 한 발 쏘고 기울여서 땡겨주면 바로 차탄이 장전되는 것이다. 거기다 짤 보면 알겠지만 화약을 써서 발사하는게 아니라 개머리판에 이미 들어있는 압축공기를 써서 발사하는 거라 반동이 하나도 없다. 반동이 없다는 건 곧 명중률이 존나 올라간다는 뜻이다. 근데 명중률을 높이는게 이것만이 아니다. 와 ㄹㅇ? 근데 화약 안 쓰면 연기도 안 나고 불빛도 안 나겠네? 개굿 거기다 화약 안 들어가서 소리도 조용함 공기총에서 화염이 뿜어져나올 리가 없으니 당연히 연기도 안 나고, 지란도니 공기총을 갈겨대는 오스트리아 캥거루들은 남들이 연기 들이마셔가며 으겍켁 눈먼 사격하고 있을 때 존나 깔끔하게 조준사격할 수 있었다. 총구화염도 당연히 없으니 구석에 짱박혀서 똥싸개 저격질을 해도 아무도 모른다. 거기에 소리까지도 화약무기에 비하면 무음 수준이다. 그래서 결정적으로 얼마나 연사 가능함? 20연사 나폴레옹 : 쒸펄 지란도니 공기총의 튜브형 탄창에는 약 20발의 총알을 우겨넣을 수 있었다. 30초에 한 발 쏘고 눈멀고 귀멀고 조루사거리 총쓰던 시절에 조용하고, 반동없고, 멀리나가고, 20발 반자동 연사가 가능한 개사기총이 갑자기 튀어나온 거다 그야말로 머스킷 시대에 씹새가 툭하고 떨어진 것이다 당연히 이런 고성능에 풀발기한 오스트리아 캥거루들은 이 개사기 공기총을 제식무기로 냉큼 채용했다 근데 여기서 뭔가 이상한 걸 느낀 친구들이 있을 텐데 저런 개사기 무기를 들고 있으면서 왜 오스트리아가 세계정복을 못했냐는 생각이 들 것이다 적힌 것만 읽어보면 지금쯤 영어 대신 오스트리아어 쓰고 군대 무기는 공기총으로 통일되고 집집마다 의무적으로 캥거루 기르고 있어야 될 거 같은데 말이지 세상에 장점만 있는 무기는 없다 지란도니 공기총에는 상상을 초월하는 단점이 있었다 님 님 이거 갑자기 왜 안 나가여 아 장전할 때 너무 쎄게 땡기셔서 고장남 님탓임 가서 새거 사오세요 뭐야 씹 이걸로 집도 사겠네 왤케 비쌈 근데 뭐임 이번엔 살살 땡겼는데 안 나가요 너무 살살 땡겨서 고장남 님탓임 다시 사오세요 지란도니 공기총은 존나 섬세해서 존나 비쌌고 존나 섬세해서 존나 잘 고장났다 이 당시 기술력으로 이만큼 뽑아낸 대가라고 해야겠지만 해도해도 너무한 수준이었다. 게다가 오스트리아는 그렇게 기술력이 좋지도 부자나라도 아니었기 때문에 이런 물건을 양산할 능력도 없었다 결국 사방에서 총이 고장나기 시작했는데 새걸 생산하긴 커녕 고장난걸 수리하는데도 벅차기 시작했다. 게다가 공기총이라는 특성상 공기압이 떨어지면 대미지도 같이 떨어지기 때문에, 앞에 나가는 건 멀리 빨리 쭉쭉 나가는 총알이었지만 연사가 계속될수록 사거리와 위력이 점차 줄어드는 문제점도 컸다. 하지만 이딴 건 전부 사소한 문제였고연 전투에서 사기 성능으로 씹발라 버릴 수 있는데 꾹꾹 참고 쓸려면 쓸 수가 있었다 존나 큰 마지막 문제점이 없었다면 그래도 20연사 뽕맛은 오지네 ㅎㅎ 근데 이거 다시 쏘려면 어케해야함 공기를 다시 채우세요 입으로? 펌프질이나 하십쇼 몇 번이나? 「1,500번」 씨펄 지란도니 공기총은 이 보기만 해도 무시무시하게 생긴 전용 펌프를 통해 공기를 재충전해서 써야 했다. 이 사기 무기가 널리 퍼지지 못한 결정적인 이유는 바로 그 공기총 매커니즘 그 자체였다 조용하고 반동없고 사거리 길고 위력 좋으면 뭐하냐? 30발 쏘려고 개머리판에 채워넣어야 하는 압축공기는 펌프질 1500번을 해야 하는 분량이다. 거기다 전쟁질하면서 딱 30발 쏘고 끝날 리가 없잖음. 예비개머리판도 당연히 들고 다닐텐데 개머리판을 3개만 들고 다닌다쳐도 펌프질 4500번을 해야한다. 씹헬지옥이다. 안 그래도 연사속도 빨라서 총알 소모 빠르다는 거 생각하면 더 들고 다녔으면 더 들고 다녔지 적진 않을걸 결과적으로 오스트리아 캥거루들의 팔근육이 전투 시작하기도 전에 모조리 빠개지는 결과로 돌아왔다 아무리 씹사기 무기라도 이딴 거 쏘려고 3시간동안 4500번 펌프질을 해야 한다면 고민이 존나 될 것이다 그래서 결국 오스트리아는 35년동안 꾹꾹 참으면서 지란도니 공기총을 써오다 딸근의 파열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머스킷으로 회귀하고 만다 존나 큰 장점이 있어도 존나 큰 단점을 가릴 수 없다면 결국 무기로선 실패작인가보다 [출처 - 디시인사이드 고질라맛스키틀즈]
[펌] 악덕 세금징수인이 과학자였던 이야기
오늘 우리가 다뤄볼 이야기는 세금징수인이자, 과학자였던 라부아지에에 대한 것이다. (앙투안_라부아지에) 라부아지에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부르주아지 변호사 아버지 밑에서 태어난 그는 대학에서 법을 전공하다가 산소를 발견해 당시 거의 상식 수준이었던 플로지스톤 이론을 개박살냈고, 질량 보존의 법칙을 발견했는데 변호사 지망생의 말빨이 어디 안 갔는지 다른 과학자보다 홍보에 탁월했던 그는 다른 과학자들에 비해 자신의 이름을 더 많이 알렸다. 과학이라는 학문에서 화학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양분한 그의 업적은 실로 대단했지만(더 알고 싶은 사람은 위인전이나 과학책을 참조하시라) 사실 과학 얘기만 하면 재미없으니 그가 얼마나 악랄했기에 시민들이 왜 그를 단두대에서 쳐죽였는지 알아보자. 이야기하기에 앞서 당대의 세금징수제도에 대해 잠깐 설명하자면 "여봐라" (루이 16세) "예 폐하" "영국놈들이 미국하고 싸운다는데" "그래요?" "영길리놈 미국 시켜서 줘패게 돈좀 줘봐" "맨입으로요?" "새끼 쪼잔하게... 130% 4년이면 되냐?" "장사 원데이 투데이 해봅니까? 오케이!" 팩트로 따지자면 깔 거리가 한둘이 아니지만, 당시 세금이 정해지는 방식은 대충 이런 식이었다. 좀 더 자세히 얘기하자면 프랑스 대혁명 당시의 세리는 국가공무원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바꿔 이야기하자면 관세청이 민영화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는데, 이들은 국가에 대금을 해 주고 징수를 할 권리를 얻어 세금을 걷는 식으로 장사를 했다. 즉, 왕에게 100달러를 빌려주고 나면, 왕은 이들에게 얼마 동안 세금을 걷을 수 있는 권리를 주었는데, 딱 100달러 받았으니 받은만큼만 걷을 수 있는 권리가 아니라 이자를 묻고 따블로 붙여 120% 정도를 4년에 걸쳐 걷게 하는 식으로 세금을 걷었던 것이다. 그러나 여기서 120%도 어디까지나 마지노선을 정해놓은 것일 뿐이다. 최소 20달러의 수입이 확정된 수준에서 얼마를 더 걷든지 왕은 ㅈ도 신경 안 썼다는 얘기다. 라부아지에는 일생동안 풍족하게 살았는데, 사실 알고보면 이게 다 조병갑급 탐관오리 행실에서 비롯된 돈이었던 셈이다. "오늘의 실험은 다이아몬드 태우기입니다" "뭐야씨12발 왜태워요" "니가 탄소라는 걸 증명해야되거든" "꽥" 다이아(였던것) 그러나 이런 그의 사치스러운 행보도 곧 끝나게 되는데 별건 아니고 대혁명이 터졌기 때문이었다. "못살겠다 (브루주아지들의 뚝배기를)갈아엎자" "본인 방금 살아남는 상상함" "하지만 어림도없지" (로베스피에르) "엌ㅋㅋㅋㅋㅋㅋㅋ" (사망) "뭐여;;" "저새끼도 순 나쁜새12끼에요 죽여야돼요" "제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그러세요" "너지? 파리에 성벽 세워두고 입출입할때 돈받은 놈이?" "네?" 그랬다. 라부아지에는 탁월한 머리를 과학뿐만 아니라 세금을 걷는 데에도 사용했는데 그의 질량 보존의 법칙에 의하면, 파리 내부의 돈이 일정하다고 했을 때 입출입 업자로부터 돈을 받아 세금을 징수한다면 돈이 증발하거나 사라지지 않는 이상은 결국 일정한 금액을 얻을 수 있게 되는데, 그는 이걸 실제로 세금을 걷는 데 사용하면 된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가 활용했던 방법은 굳이 파리 전체를 감시하지 않아도 경계만 감시하면 되는 극한의 효율성을 자랑했기 때문에 요즘에는 외화 송금을 감시하는 데 사용되는 방법이기도 하다. "시대를 앞선 세금징수 방법 잘 봤구요" "살려줘" "응 아니야 바꿔줄 생각 없어 돌아가" "ㅠㅠ" 그렇게 그는 향년 53세를 일기로 단두대에서 목이 잘려 사망하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과학자이자 범죄자로서 프랑스 교과서에 실려 있다. 다행히도 같은 시대에 활동했던 샤를은 살아남아 우리가 배우는 기체반응의 법칙을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후문이다. "휴... 세리가 아니라 살았다;;" + 추가로 그는 28세에 결혼을 했는데 당시 아내가 13살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굳이 세금 징수가 아니었어도) 충분히 죽을만 했다고 생각한다. (끝) [출처 - 웃긴대학 이그림]
세젤쉽 역사공부) 조선시대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의 차이와 관계
글을 소개하기 이전에 "대비" "왕대비" "대왕대비" 등 호칭 구별이 늘 어려워서 한번쯤은 여기에 올려보고 싶어서 올려봄. 흔히 많은 사람들은 대비 = 왕의 엄마 (전왕의 왕비) 왕대비 = 왕의 할머니 (전전왕의 왕비) 대왕대비 = 왕의 증조할머니 (전전전왕의 왕비) 이렇게 생각하지만 전혀 아님. 조선시대 내명부 여인들의 서열은 세자빈 - 왕비(중전) - 왕대비 - 대왕대비, 이 순서였음. 왕대비는 보통 왕의 어머니뻘이지만 사실상 바로 전왕의 왕비를 가르키는 말이였고 대왕대비는 전전왕의 왕비를 가르키는말임. 근데 조선시대에는 대비가 3명이나 된 시절이 있었는데 성종시절과 고종시절이였음. 조선 성종이 즉위하니 선왕인 예종의 부인인 왕대비 인혜왕대비 안순왕후 한씨 (성종 숙부 예종의 왕비) 선선왕인 세조의 부인인 대왕대비 자성대왕대비 정희왕후 (성종 조부인 세조의 왕비)가 있었음. 근데 문제가 되는 인물이 있었음. 문제는 성종의 어머니 수빈김씨였음. 성종의 아버지 덕종은 세자시절에 사망한터라 명목상 수빈김씨는 대비도 아니고 왕비도 아닌신세....대왕대비 정희왕후는 왕도 못되고 서른도 안되서 요절한 아들 의경세자를 왕인 "덕종"으로 추존시킴. 그리고 이로인해 수빈김씨는 - 인수왕비를 거쳐서 인수왕대비로 봉승되었고 서열이 왕비까지 거친 인혜왕대비 (예종 왕비 안순왕후)보다 서열이 더 위가 되었고 이때 왕실 내명부 서열은 세조왕비 (대왕대비 정희왕후) - 덕종왕비 (왕대비 소혜왕후) - 예종왕비 - (왕대비 안순왕후) - 성종왕비 (중전 공혜왕후) 순서가 되었음. 문제는 이러한 대비가 3명이나 살아있는 사태가 철종때 벌어짐. 헌종이 죽고 김대왕대비 (순조왕비)가 고종을 데려와 즉위시킴. 궁중에는 남편이 이미 사망한 왕비가 3분이나 계셨는데 1. 순조의 부인인 순원왕후, 명성대왕대비 김씨 2. 선왕인 헌종의 모친이자 효명세자의 부인 효유왕대비 조씨 (신정왕후) 3. 대행대왕 헌종의 부인인 왕비 효정왕후 홍씨 이렇게 3명의 서열이 문제였음. 문제는 지금까지 왕실 내명부 서열이 " 왕비 - 왕대비 - 대왕대비" 순서였지만 대왕대비 위에 자리를 하나 만들던가 해야 되는 상황이였고 기존의 " 왕비 - 왕대비 - 대왕대비" 순서가 아니라 왕대비 아래 대비라는 직함을 또 만들어서 " 왕비 - 대비 - 왕대비 - 대왕대비" 순서로 바뀌었음. 즉 기존의 대왕대비 순원왕후(순조비). 왕대비 신정왕후 (익종,효명세자빈)은 그대로 있고 그 아래 대비 자리를 만들어서 효정왕후를 대비로 존숭함. 그래서 왕실 여성 서열은 1. 대왕대비 김씨 (순조의 왕비) 2. 왕대비 조씨 (익종의 왕비. 효명세자빈) 3. 대비 홍씨 (헌종의 왕비) 4. 중전 김씨 (철종의 왕비) 이 순서였음. 신기한건 새로 즉위한 국왕 철종은 순원왕후와 순조의 양자였음. 즉 대비 홍씨 (효정왕후)에게는 시숙부였는데 선대 왕의 정실부인이였기 때문에 아침마다 문안인사를 갔다고 함. 그러던 중 1857년 대왕대비 순원왕후가 죽은 뒤로는 왕대비 신정왕후를 대왕대비로 올리고 대비 효정왕후를 왕대비로 올림으로써 1. 대왕대비 조씨 (익종의 왕비, 효명세자빈) 2. 왕대비 홍씨 (헌종의 왕비) 3. 중전 김씨 (철종의 왕비) 기존의 "왕비 - 대비 - 왕대비 - 대왕대비" 순서가 아닌, 다시 " 왕비 - 왕대비 - 대왕대비" 순서로 회귀한거임. 근데 문제는 철종이 죽은 이후 왕실서열이 꼬임. 바로.... 철종의 왕비 중전 김씨였음. 명목상 철종이 순조와 순원왕후의 양자여서 철인왕후는 대비 홍씨에게 시숙모임. 즉 철인왕후의 서열을 동서지간인 신정왕후와 동일시할지 혹은 효정왕후보다 낮게 할지 문제가 생겼으나 이때 새로 즉위한 국왕 고종의 아버지 흥선대원군은 안동김씨를 싫어함.. 그래서 철종의 부인 철인왕후 서열을 3명의 대비들중 가장 아래로 낮추었음. 결과적으로 왕실 여성들의 서열은 1. 대왕대비 조씨 (익종, 효명세자의 부인) 2. 왕대비 홍씨 (헌종의 왕비) 3. 대비 김씨 (철종의 왕비) 4. 중전 민씨 (고종의 왕비. 명성황후) 이 순서가 되었어. 대비 김씨는 조카며느리인 왕대비 홍씨에게 아예 서열이 밀린거임. 보통 선선왕의 왕비면 무조건 대왕대비가 되는건 아니였음. 이러한 비운을 가진 인물은 바로 조선역사에 2명 있었음. 성종의 제3왕비인 정현왕후는 성종 - 연산군 - 중중까지 3대왕을 거쳐서 대왕대비가 되야 하지만 연산군이 폐위될때 그의 왕비인 신씨도 같이 쫒겨남..그래서 그대로 왕대비 자리에 있었는데 그 이유는 어짜피 새로 즉위한 왕도 뭐 손주뻘도 아닌 친아들 중중(진성대군)이였음. 인종의 왕비 인성왕후는 인종시절 중전, 명종시절 왕대비였기에 선조가 즉위하고 대왕대비가 되자는 분위기가 있었으나 시어머니 문정왕후와 달리 다른상황이였는데 문정왕후는 아들 명종이 즉위할때 이미 인성왕후가 왕대비로 있었고 둘은 고부지간이여서 대왕대비로 승봉된 경우, 하지만 인성왕후는 바로 아래서열 명종비 인순왕후와 항렬이 같아서 대왕대비가 되지 못하고 그대로 왕대비자리에 있게됨. 더군다나 조정에서 인순왕후의 영향력이 상당했고 인성왕후는 뒷방신세여서 수렴첨정의 권한도 뺐기게 됨. 선조의 왕비 인목왕후는 선조(왕비) - 광해군(왕대비)를 거쳐 인조가 즉위했을때 광해군부인이 쫒겨났기에 그냥 그대로 왕대비자리에 있어도 되는거 아님?이란 생각이 있겠지만 새 국왕 인조는 선조의 손자였음. 즉 의붓할머니 - 의붓손자 관계였고 더군다나 당시 인조의 친어머니가 살아있던터라 대왕대비로 승격됨. 인조의 왕비 장렬왕후는 인조(왕비) - 효종(왕대비) - 현종(대왕대비)였기에 숙종때는 더 높은자리에 있어야 되는거 아니냐는 이야기가 있지만 당시 효종왕비 인성왕후는 고인이였고 궁중에는 현종비와 인조비 둘 뿐이였기에 그대로 4대왕을 거쳤어도 대왕대비자리에 있게됨. 만일 효종비 인성왕후가 살아있었으면 철종이나 고종때처럼 왕대비 아래 대비자리를 만들거나 혹은 대왕대비 위에 대상왕대비같은 자리를 만들었을것임. 영조의 왕비 정순왕후는 정조 즉위 이후 조모뻘이여서 대왕대비로 바로 올리자는 여론이 있었는데 왕대비자리에 오를 사람도 없었고 이당시 장조(사도세자)는 죄인인터라 혜경궁 홍씨 역시 왕대비자리에 오르지못함. 정조의 양부 진종 (효장세자)의 부인 조씨 (효순왕후) 역시 고인이였던터라 정순왕후는 그대로 왕대비가 됨. 서양에서는 대비(태후)를 " queen dowager"로 표현하는데 유럽왕실에서는 만일 현왕의 어머니면 영향력이 강하겠지만 단순히 선왕의 왕비였으면 딱히 영향력이 강하지 않았음. 재혼도 가능해서 헨리 8세의 부인 캐서린 파는 재혼도 했다고 함. 다만 선왕의 왕비였기에 존중의 대상이긴 했다고 해. 대략 늘 사극을 보면서 왕실여성들 호칭이 궁금해서 공부해봤음. 출처 어허 일케 봐도 헷갈리네.. 쨌든 왕비 - 왕대비 - 대왕대비 라는거군
[펌] 의학의 아버지, 히포크라테스도 고치지 못한 질병
고대 그리스. 서구문명의 시발점이라 부르는 이 시기에. 정치,경제,문화,군사,종교,철학,예술,건축등 이로 셀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이 시기에 발전했지만 단 의학만큼은  그리 발달하지 못 했다. 이 시절엔 질병을 신이 내린 징벌이라 믿어 신에게 벌을 거두어달라고 비는 것이 가장 좋은 해결책이라 믿었고 즉, 병에 걸리면 복불복으로 죽거나 사는 것이 정해지는 시기였다. 이 당시 가장 효과적인 치료법은 신화에 나오는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에서 기도를 드리는 것이었고 그렇게 아스클레피오스의 신전은 최대의 치료소이자 묘지가 되어 결국 사제들만 치료비와 장례비 명목으로 배를 불리고 있었다. 그런데 이런 원시적인 의학을 바꾼 한 사람이 있었으니 바로  우리에게 잘 알려진 서구 의학의 선구자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였다. 그는 질병이 신이 내린 벌이 아니라 사람의 몸에서 접하는 환경이 변화하여 발생한다고 주장하며 환자들의 상태를 관찰해 그에 맞는 치료법을 제시했다. 무려 지금으로부터 2400년 전에 현대적인 수술대를 발명하여 골절과 탈골에 대한 치료를 가능하게 만들었고 식초를 살균제로 사용하여 환부의 감염을 예방했다. 많은 그리스 사람들은 처음엔 그를 불경하다 생각했지만 그가 실제로 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여 낫게 하는 ‘기적’을 행하자 사람들은 그를 의학의 신 아스클레피오스의 후손이라며 '의학의 아버지' 라고 부르게 됐다. 하지만 그런 그에게도 고치지 못한 질병이 있었다. 심지이 본인도 이 질병에 걸려 치료를 위해 반평생을 노력했지만 결국 고칠 순 없었다. 당대의 유명한 인물들인 소크라테스,플라톤,아리스토텔레스도 피할수 없었던 이 저주받은 질병은 남성형 탈모였다. 히포크라테스는 이 저주받은 불치병을 고치기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관찰하며 연구에 매진하고 실험했다. 그가 처음 시도한 탈모 치료법은 아편과 장미 아카시아즙을 섞은 약을 바르는 것 이었다.. 하지만 관찰결과 머리에 좋은 냄새만 날뿐 효과는 거두지 못했고 좀더 독하고 공격적인 처방을 내리게 되었다. 바로 맵싹한 겨자무와 비둘기똥을 환자의 환부에(?) 바르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이 역시 두피만 매콤하게 자극할 뿐 치료법은 아니었다. 그러다 그는 한가지 엄청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바로 여성과 환관 즉 내시에게는 대머리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이 둘의 공통점은 '남성의 심볼'이 없다는 것이었다. 지금은 누구나 남성호르몬의 변화로 인해 탈모가 생긴다고 알고 있지만 이것을 무려 2400년 전에 발견한 것이었다. 히포크라테스는 거세가 바로 탈모의 궁극적인 치료방법이란 결론을 내릴 수 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 사실을 사람들에게 알렸지만 그 누구도 쉽게 이것을 선택할 순 없었다. 결국 의학의 아버지였던 히포크라테스 조차 탈모는 정복 할 수 없었지만 그의 탈모에 대한 연구업적을 기려, 오늘날의 사람들은 탈모가 진행되지 않는 옆과 뒷머리를 그의 이름을 딴 히포크라테스 환'이라고 부르고 있다. [출처 : 개드립-오삼도리]
조선시대에 일어난 희대의 패드립 사건
이성계: 이제 나라도 새로 번듯하게 차렸으니 여러가지 할 일이 많군 어디보자... 중국 사신: 에헴에헴 대명황제폐하의 명이오~ 응? 명나라가 우리한테 무슨 볼 일이 있다고?  (대충 조선어민 비난하는 내용)  고려의 배신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이하생략) !!!!!! 니 방금 한말 다시 해봐라  (???) "이인임의 아들 이성계가" 라고 했는데요? 내가 왜 이인임의 아들인데 시X발련아 ※ 이성계가 열받은 이유 이인임(성주 이씨): 고려시대 최강 권문세족, 후에 이성계+최영에게 숙청당함 이성계(전주 이씨): 고려시대 신흥무인, 아버지는 고려시대 무신 이자춘 애초에 본관도 다르고 정치색깔도 완전히 다른 둘이다 그래도 이해가 안된다면 ex) 트럼프 "느그 아부지 박정희라며?" 박원순 "시X발련아" 아니 고려에서 피난 온 망명자들이 님 아버지 이인임이라고 하던데요?? 우리나라 법률(대명회전)에도 그렇게 기록되었고요 (참자 참어...) 그러면 우리쪽에서 사신 보내서 해명할테니 오늘은 돌아가봐라... (그러나 태조가 해명글을 올렸는데도 불구하고 태종 이방원이 왕위에 오를 때까지 명나라는 답신조차 안 보냈었다 ..) 태종 이방원: (아버지에게 속죄할 겸 명나라가 친 패드립이나 고쳐달라고 할까?) 여봐라 명나라에 가서 이인임 건에 대한 조선의 의견을 전달하도록 하라 네이~ 명 영락제: 응? 이게 뭐야 방원 아우가 보낸 글이네 이런 사건이 있었군 사신은 전하라 내가 책임지고 고쳐줄테니 방원아우는 걱정하지 말라고 네이~ 역시 락제형님이야 화끈하게 고쳐주신다니깐 ㅎㅎ (그러나 약 100여 년뒤...) 저... 전하 긴히 드릴 말씀이... 중종: 무슨일이오? 최근 명나라에서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아직도 태조대왕의 가계도가 고쳐지지 않았다고 합니다  뭐라????? 내 이것들을 그냥 (명나라에 전화 넣는 중...)  명나라: 여보세요?  야!!!! 너네 우리 가계도 고친다메!!!!! 아니 우리가 너네 가계도 고치기 전에 고려사 좀 참고하니깐 이성계가 고려 4왕(공민왕, 우왕, 창왕, 공양왕) 죽였다며? 그건 또 뭔 개풀 뜯어 먹는 소리야 3명(우왕, 창왕, 공양왕)밖에 안죽였거든 (ㅅㅂ 3명이나 4명이나 그게 그거지) 아니 공민왕 죽인게 이인임아냐? 그게 왜? 이인임 아들이 이성계니깐 연좌제 적용하면 이성계가 공민왕 죽인거지 (대환장) 울 태조 아빠 이인임 아니라고!!!! 어쩌라고 십덕섀끼야 당장 바꿔!!! (이 시X)  결국 이 문제(종계변무)는 중종-인종-명종 때까지 해결되지 않았고 선조 21년(1587년), 선조의 피나는 노력으로 해결되었다. (임진왜란때 큰 똥을 싸질렀음에도 선조 뒤에 '조'가 붙은 이유가 200년 가까이 풀리지 않은 종계변무 문제를 해결했기 때문이다)
흥미로운 조선의 주막 네트워크
이 책이 흥미로운 건 그가 보고 들은 내용에 대해서는 제가 전혀 몰랐던 사실이 적혀있기 때문이었습니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조선 후기 주막 네트워크였죠. 부산에 도착하여 태백산맥을 따라 강릉 쪽으로 간 후 서울로 온 저자는  처음 부산에서 돈을 환전 했을 때 문화 충격을 경험합니다. 조선에서 사용되는 화폐는 무거운 동전이었으며, 여행자금을 동전으로 바꾸니 그 무게가 무려 25킬로그램에 달하는 거였습니다. 이 때문에 저자는 자신이 탈 말과 함께 돈을 실어 나를 말을 한 필 더 빌려야 했고, 이런 조선의 후진성은 저자를 당혹시킬만 했으나 조선은 저자도 놀랄만한 주막 네트워크를 보유하고 있음을 알게 됩니다. "모든 여행자들이 여행을 시작하면서 처음 묵게 되는 주막 주인에게  돈다발을 건네주고 영수증을 받은 뒤, 이후부터는 그것을 돈 대신 사용한다.  이후의 주막 주인들은 영수증에 여행객에게서 받아야 할 숙박비나  식대 그리고 기타 사소한 물품비를 표시해둔다. 여행자가 마지막에 머무는 주막의 주인은  여행자의 영수증을 받고 남은 돈을 내주게 되어 있다.  이 모든 것이 한반도 전역에 걸쳐 이미 오랫동안 지속되어 온 뛰어난 재정조직,  그리고 여인숙 주인연합회의 훌륭한 부기능력을 보여준다.  여행객이 규칙을 어기거나 돈을 악용한 경우는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이 모든 것이 전국의 주막 주인들이 조직이 광범위하고 일원화되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주막의 모습. 국밥 한 그릇을 먹으면 하룻잠을 잘 수 있었다.> 나는 이 편의를 이용할 기회가 없었다.  나는 실제로 그런 은행식 주막들이 마을마다 있으리라곤 믿지 않았다.  나중에 가서야 어디에나 다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그런 거래를 하려면 아주 경험 많은 통역사가 있거나 한국말을 잘 해야만 했다.  하여튼 통역사를 믿지 않았던 것은 후회스럽다."  (코레야, 1903년 가을, 개마고원, 41~42p) 정리하자면, 여행자가 어떤 행선지로 여행을 하기 위해선 숙박을 할 수 있는 주막의 이용이 필요한데, 돈의 무게가 무거워 운반하기 위한 경비가 들고 또한 오랜 여행기간동안 그것을 잃어버릴 리스크가 존재합니다. 그렇기에 처음 가는 주막에서 필요한 여행경비를 모두 지불하면 그것을 증명할 영수증이 나오고, 그 후의 주막에선 영수증만으로 처음 금액에서 사용하는 금액을 차감하는 식으로 화폐 없이 여행을 가능하게 한 것이죠. 그리고 여행을 마치는 마지막 주막에선 처음 지불한 금액에서 여행동안 지불한 금액을 차감하여 나머지 금액을 받을 수 있습니다. 이런 시스템은 저자가 묵은 모든 주막에 다 있었으며,  설마 낙후된 조선에 이런 시스템이 있을까 하는 의심에 통역사의 말을 믿지 않고 이용하지 않았지만 후에 보니 통역사의 말은 사실이었죠. 실제 저자는 조선의 신용거래나 대출 거래의 부재를 기관을 세울 능력의 부족으로 보지 않았습니다. 반대로 필요성의 부족으로 신용거래를 이용하지 않았을 뿐이고,  신용거래가 필요한 경우엔 T.Cook의 수표책에 결코 떨어지지 않는 여행자 신용거래 시스템이 존재했다고 언급하고 있지요. 출처 pgr 커뮤니티, 원문 코레야 1903년 가을 ㅡㅡㅡㅡㅡㅡ 신기하네 그냥 주모!! 국밥한그릇 주쇼!! 하는데인줄 알았는데
극사실주의 인형의 대가 'michael zajkov'
안녕하세요 여러분 :) 오늘의 여러분에게 소개해드릴 작가님은 극사실주의 인형을 만드는 러시아의 작가 michael zajkov입니다 ! 먼저 작가님의 작품을 조금 살펴볼까요 ? 여러분 저 디테일한 손과 미세하게 비치는 혈관 보이시나요. . . 디테일의 정점을 찍으셨어요 *_* 와 이 사진은 정말 모델이라고 해도 믿을 것 같아요 +_+ 그렇지 않나요 ? 주근깨 표현 진짜 어마무시하죠 +_+ 작가님의 인형들은 언제나 피부표현이 예술 ! 미세한 눈가 주름부터 눈썹결까지... 정말 완벽하지 않나요 ?! 청초하게 내려다보는 시선. . 얇은 피부표현과 반짝이는 입술 로맨스 소설 속 주인공 같은 비주얼이죠? <3 자 이렇게 리얼하고 아름답고 무서울정도로 사실적인 인형들, 과연 어떤 방식으로 작업하는지 궁금하지 않으신가요 *_* 그래서 작가님의 작업 과정을 준비해봤어요 ! 일단 작업의 밑바탕이 될 실사를 준비합니다 그리고 쓱싹 쓱싹 스케치를 진행 ! 호일을 뭉쳐 골격을 만들어 주고 그 위에 점토를 덧대고 눈알을 넣습니다 ! 그리고 계속 점토를 덧붙여 콧대와 광대, 입술의 굴곡을 만들어줍니다 :) 이목구비의 위치가 대충 잡혔다면 그 뒤로는 계속해서 묘사를 진행해요 +_+ 부드럽게 피부 표면을 갈아 지문과 요철을 깔끔하게 마무리합니다 ! 표면이 정리되었으면 사실적인 피부 표현을 위해서 붓등을 이용해 미세한 주름을 넣어줍니다 :) 새필로 눈썹과 피부 채색 진행 ! 속눈썹을 한올 한올 심어줍니다 :) 제일 놀랐던건 한 땀, 한 땀 머리카락을 심어주는 것 ! *_* 어느 세월에 저걸 다 심을 수 있죠. . . ? 이런 작업을 거쳐 완성된 작품 ! 똘망 똘망한 여자아이의 눈빛을 보세요 *_* 은은한 주근깨와 턱의 보조개, 다부진 입술 . . . 금방이라도 영국억양으로 앙칼지게 말을 걸 것 같지 않아요 ? 리얼리티 넘치는 michael zajkov 작가님의 작품을 더 만나보고 싶다면 아래 작가님의 인스타그램을 참고하세요 :) 작업하시는 영상도 확인하실 수 있어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