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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안보 예외

지난 2019년 4월 5일, WTO는 우크라이나 vs. 러시아가 걸려 있는 패널 보고서를 채택했다(참조 1). 여기에 대해서는 내가 얘기를 한 적이 있다(참조 2).


“국가 안보”를 대상으로 한 첫 WTO/GATT 판례라고 말이다. 기록을 보니 상소기구(AB)로 또 소를 제기하지는 않았던데(여러 이유가 있을 거라), 그냥 이 패널 보고서를 받아들이기로 한 모양이다. 이 “안보 예외(GATT 1947, 제21조)”는 대단히 민감 이슈이며, 여러분도 이게 왜 중요한지 지금은 모두들 알고 계실 것이다.


한 마디로, 안보가 위험하다면서 온갖 무역제한조치를 할 수 있다는 근거가 되기 때문인데, 이 “안보 예외”가 패널 보고서에서 어떻게 나왔는지부터 알려드리자면… 향후 어떤 나라이든지 간에 “안보 예외”를 함부로 거론하기 힘들게 만들어 놓았다. 일단 승소국(?)은 러시아다. 안보를 이유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트럭을 막아도 된다는 결론이다.


잠깐, 러시아가 이겼다며? 그러면 어느 나라든 안보 예외를 해도 된다는 말 아닌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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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닙니다. WTO 패널은 그 요건을 상세하게 제시했어요. “국가안보”를 멋대로 회원국이 결정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참조 3), 바로 UN 총회 정도가 인정하는 “무장 분쟁(armed conflict)”의 “객관적 사실(objective fact)”이 있고 영토와 국민을 보호할 정도의 조치가 있어야 “국가 안보”를 원용할 수 있다는 조건이다. 그냥 상대국을 벌하기 위해서 국가안보를 휘두르면 안 되고, 어지간한 갈등을 이용해서 국가안보를 잠칭하면 안 된다는 추론도 가능하겠다.


그렇다면 이런 국가안보는 왜 등장한 것일까? 바로 그 연원을 따져 보자는 것이 이 드래프트 논문(참조 4)의 내용이다. 양도 얼마 안 많으니 여러분들도 짬 나면 읽어 보시기 바란다.

국가안보가 화두가 됐던 것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IMF, IBRD와 함께 UN 산하에 ITO(국제무역기구)를 만들려고 할 때(GATT 조약문이 이때 만들어진다), 미국 군부와 국무부 내의 “국가 안보” 조항 해석 다툼에서 비롯됐었다.


곧 냉전이 시작될 터였기 때문이다. 기본적으로 미국 군부는 “국가안보”를 언제든 미국이 사용할 수 있는 무기로 조문에 넣기를 희망했고, 국무부는 자유무역의 확산을 무기로 조문에 넣기를 희망했다. …충돌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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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어느 소속이든지 간에 “국가안보”를 남용할(abuse) 수 있다는 문제는 심각했었다. 그래서 논의됐던 것이 국가안보 조항에 대한 낱말 하나 하나의 분석이었다. 국가안보를 이용해서 수량제한을 정당화시킬 나라가 “덜 개발된 국가들”이라 하면서 말이다. (아이러니를 느끼실 것이다.)


미 군부는 특히 자원(석유와 금속, 참조 5) 확보에 집중했었다. 자원 많은 미국이 일부러 해외 자원을 끌어다 쓴다는 신화가 바로 이때부터 나오잖았을까 싶은데, 실제로는 소련과의 전쟁 대비였다. 즉, 위에서 말했듯 미 군부는 모든 상황을 대비, 국가안보의 개념을 확장시키려 했었다.


그래서 국무부가 개입, 현재의 어느 정도는 애매한 문장들로 바꿔놓은 것이다. 국가안보를 국가가 혼자서 정할 수는 있겠지만 그게 다 앞뒤가 맞아야 한다는 것이, 금번 WTO 패널의 판단이기도 했고 말이다. 결국은 사법심사가 가능하다는 전제 하에, 정치와 외교가 개입할 여지를 터 줬다고 봐야 할 일이다.


따라서… 현재 여러 건들이 저마다 “국가 안보”를 외치며 올라와 있기는 한데, 정말로 인정을 받으려면 험난한 길이 예상된다. 어떻게 보면 상당히 상식적인 결론이라고 해도 되겠다. 그러나 정말로 그런가 알아보려면 시간이 많이 걸리기 마련. 역시 주말은 논문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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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이 패널 보고서는 DS512 건이다. 물론 거의 동일한 건으로 DS532도 있기는 하지만 DS512의 보고서가 나왔으므로 진행이 될지는 불투명하다. 단, 두 가지 소를 소송경제로 합친 것은 아니다. https://www.wto.org/english/tratop_e/dispu_e/512r_e.pdf

2. 의견에 일치한 미국과 러시아(2018년 7월 31일): https://www.vingle.net/posts/2467147

3. 즉, 패널이 하는 말은, “국가 안보”의 사법심사가능성(justiciability)이 존재한다는 선언이라고 봐도 좋겠다.

4. Trade Multilateralism and U.S. National Security: The Making of the GATT Security Exception(2019년 7월 18일): https://papers.ssrn.com/sol3/papers.cfm?abstract_id=3422488

5. 바로 이때 언급되는 금속(metal)이 바로 현재 미국이 철강제품에 대한 국가안보 예외 주장의 기반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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