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oozynx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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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광복절

오늘을 또 감사하며
어제 퇴근길 집에 오며
한참 지난 군함도 영화를 봤다
개봉당시 역사 왜곡등 시끌했지만
군함도에서 당시 노역을 하던
강제 징용 된 사람들의 고됨은 전달 되는 것 같았다

작년에는.글로 쭉 써내려갔었는데
어제 영화보다 보니 무한도전에서 방송한 하시마 섬이 생각났다
내가 블라블라 얕은 지식을 쓰는 것 보다
네이버 지식백과 첨부

무한도전 방송 당시
일본은 관광지로 일부 개방해서
역사를 감췄던 모습이 기억난다
그리고 현지인들의 관광률이 높았던것 같다
2015년 유네스코 등재 당시
산업개발 부분만 알려 논란이 되었는데
아직까지도 숨긴 역사를 공개하지 않고 있다

진정한 멋짐은
잘못을 빨리 사과 할 줄 아는 사람이다

시끌시끌한 요즘
진심이.담긴 사과를 받았더라면 하는 생각이
참 많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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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5) - 1935년, 진주
'처음 형평운동을 일으켰을 당시 약 12년간 기간을 예상하여, 이를 선전, 사업, 실험의 3기로 나누어 착착 수행해 왔습니다. 이제 거의 3기의 과정을 모두 실천했기 때문에 형평운동은 완성된 것으로 봅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대중과 같은 수준에서 그들과 같은 보조로 운동을 전개한다는 의미에서 명칭도 새로 고친 것입니다.' 1935년 4월 26일 조선일보와의 인터뷰에서 형평사 창립 발기인 중 하나인 백정 장지필은 이렇게 말합니다. 이 시점 즈음부터 형평사는 이름을 대동사로 바꾸죠. 한편, 마찬가지로 형평사 창립에 관여했던 강상호는 대동사와 상호 교류를 단절하고 은둔하다시피 합니다. 어째서 그는 모멸을 참으면서 몸소 참가한 사회 운동 단체에서 손을 뗀 걸까요? 정말 장지필 말대로 백정들의 형평 운동은 완성되었을까요? 1923년 형평사가 회원 80여 명으로 처음 시작했을 때 이후 대동사가 되기까지 그 사이엔 많은 일들이 있었습니다. 1923년 24개 동리 농청 대표자 70여 명이 모여 반형평운동을 결의했던 의곡사. 진주 시내와 비교적 가깝다는 이유로 이 장소가 선정되었다고 합니다. 농청은 시골 마을 두레의 집회소 역할을 하는 조직으로 하층 농민이나 머슴 등이 주로 구성원이었다고 하네요. 결국 반형평운동은 같은해 6월 형평운동이 여러 사회운동단체의 지지를 받고, 진주노동공제회가 양측 중재에 적극적으로 나서서 겨우 마무리되었다고 합니다. 형평사가 3남으로 빠르게 세를 불리던 1924년 2월, 부산에서 형평사 전조선임시총회가 열립니다. 전국 지사, 분사 대표 330여 명이 참여한 이 모임에서 주목할 만한 이야기가 나오죠. 바로 경남 진주에 있는 본사를 서울로 이전하자는 내용이었습니다. 본사 이전 문제는 이때 회의에서 결론을 내지 못하고 유보됩니다. 하지만 그 해 4월, 서울 본사 이전을 주장해온 장지필, 오성환 등이 대전에서 갑작스럽게 형평사 혁신 동맹 결성을 발표하죠. 이들은 본부를 서울로 하고, 그때까지 백정들의 처우 개선 문제만에 중점을 둔 형평 운동에 사회주의 노선을 도입하기로 합니다. 한편 같은 날 진주 본사에서 열린 전국형평사대회에선 사회주의 노선에 반대하는 결의가 채택됐죠. 형평사 단체가 하루아침에 양분되어버린 겁니다. 양측 단체는 대립을 지속하다 같은 해 8월 형평사 통일 대회에서 각자 조직을 해체하고 조선형평사중앙총본부를 결성하기로 결의합니다. 본부는 진주에서 서울로 옮기기로 합의했죠. 하지만 이후 진척은 지지부진했습니다. 양측은 결의 이후에도 계속 대치했고, 급기야 진주 본사가 지난 대회 합의를 불승인하는 결의를 내립니다. 이로 인해 양 파벌은 재교섭에 들어갔죠. 다행이 1925년 4월 서울 전조선형평대회에서 양 파벌은 통합에 합의합니다. 형평사 외 타 사회운동 연계 문제는 당분간 형평사가 내부 결속을 중점으로 다루기로 해 일단 보류했죠. 그러나 지방 형평청년회 등 하부 조직들은 개인 혹은 형평청년회 단위로 청년운동단체에 가입합니다. 이로서 형평사 역시 당대 사회 운동, 민족 운동 세력과 연결을 갖게 됐죠. 겨우 한 고비 넘겼나, 싶더니 금새 다음 고비가 찾아왔습니다. 1927년 4월, 일제는 만주 독립군 단체인 정의부와 연계된 한반도 내부 조직을 확인하고 조직원과 간부들을 이잡듯이 찾아내 체포하죠. 이른바 고려혁명단 사건입니다. 고려혁명단 사건은 형평사에도 영향을 미쳤죠. 만주와 간도 지역 독립 운동 조직과 연계된 천도교 및 형평사 간부들이 고려혁명단 간부를 겸직하는 경우가 있었던 겁니다. 서광훈, 장지필, 오성환 등 형평사 간부들이 이 일로 줄줄히 체포되고, 형평사 조직 역시 위축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1928년 4월 정기 총회에선 일제의 탄압을 계기로 각지 청년회를 해체하고 형평사 사내에 청년부 조직을 두기로 결의했죠. 조직 형태는 기존 느슨한 연맹체가 아닌 중앙집권제로 변경했습니다. 하지만 또다시 보류해둔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릅니다. 타 사회 운동과 제휴하는 문제로 제휴를 주장하는 신파와 전통적 형평 운동을 계속하자는 구파가 대립한 겁니다. 양측 갈등은 1929년 표면화되기에 이르죠. 1929년 말부터 세계대공황 여파가 전세계를 덮칩니다. 한반도 전역에서 학생, 노동자, 농민 등 다양한 집단에서 식민통치에 반대하는 대중 투쟁이 벌어진 것도 이 당시 경제적, 사회적 불안의 영향이 없다고는 못하겠죠. 형평사 내에서도 기존 조직을 해소하고 혁명 준비 조직을 재결성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시되었습니다. 당연히 반대파와 치열한 논쟁이 붙었고, 조직 내 갈등을 점점 증가만 했죠. 그러다 1933년 일명 '형평청년전위동맹' 사건이 터지면서 형평사는 치명적인 손실을 입습니다. 일제 경무청에서 발표한 바는 이렇습니다. 1931년 2월 광주 지역에서 수육판매조합 설립과 관련해 분쟁이 발생합니다. 수육판매조합이란 도축을 한 고기를 받아와 파는 정육점을 의미하죠. 경찰이 이 분쟁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형평사 내부에 비밀 결사가 있단 사실이 발견된 겁니다. 경찰은 신중한 내사 끝에 1932년 12월 25일 광주 형평사원 정석홍을 검거합니다. 이후 약 7개월간 형평사원 약 100여 명이 소위 형평청년전위동맹에 가담한 혐의로 검거되죠. 1932년 161개 지부 8293명 사원을 자랑하던 조직은 1935년에 98개 지부 6540명 사원 규모로 급감합니다. 또 지도부가 와해되다시피해서 상대적으로 온건한 성향의 지도부가 형평사 조직을 장악하게 되죠. 1935년 4월, 형평사가 대동사로 개칭한 것엔 이러한 속사정이 있었습니다. 애국기 충남호 헌납 포스터. 중일전쟁,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일제에 각 사회단체는 국방성금을 모금하는 등 협조적인 태도를 보였습니다. 대동사는 성금을 거두어 '대동호'라는 비행기를 일제에 헌납했죠. 대동호는 위 충남호와 함께 1938년 7월 9일 대전에서 헌납식을 가졌습니다. 당시 기상이 나빠 기체 두 대는 오지 못하고, 대신 울산에서 군용기를 띄워 대전 상공에서 비행 묘기를 선보였다네요. 이때 대동사는 이미 경제적 친목 이익단체로 변질해 있었습니다. 1940년이 되자 형평사의 핵심 조직이라고 할 수 있는 도부조합, 즉 도축자 조합이 일제 관제 조합인 조선축산조합에 흡수되어 버립니다. 대동사는 정치, 경제, 사상운동을 원천 금지당하죠. 조선 백정들이 차별받지 않는 세상을 만들겠다던 형평사의 꿈은 이렇게 완결되지 못하고 끝나 버렸습니다. 시간이 흘러 광복을 맞은 후, 강상호는 칩거 생활을 끝내고 진주 3.1 동지회라는 조직을 만듭니다. 또 자신에게 빚을 진 사람들을 자기 집에 초대하곤, 마당 앞에서 보란듯이 그들의 빚 문서를 태워 탕감해 주죠. 그러한 행보가 사람들의 이목을 끈 건 어쩔 수 없었습니다. 이승만 정부 시절 강상호는 좌익 인사로 분류되어 경찰의 감시를 받았습니다. 보도 연맹이 조직되었을 때는 반강제로 가입하기도 했죠. 하지만 보도 연맹 학살 사건이 있기 전, 누군가 낌새가 이상하단 사실을 귀띔해 주어 학살 이전에 겨우 몸을 빼어 달아날 수 있었습니다. 6.25 전쟁이 끝나자 그는 다시 고향으로 돌아옵니다. 이번엔 전쟁 당시 그가 진주인민위원장을 맡았단 소문이 돌죠. 정부 당국은 그를 철저하게 조사했습니다. 강상호가 사망한 건 1957년 12월 29일. 그는 죽을 때까지 당국의 감시 조사에서 자유롭지 못한 채 여생을 마쳤죠. 그가 죽가, 전국 백정 출신 인사들이 진주로 모여들어 9일장을 지냈습니다. 살아 생전 민족 운동과 백정 신분 해방 운동에 앞장서 나선 그에게 고마움과 애석함을 표하려고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었죠. 좌익 인사 활동 혐의 때문에 강상호는 오랫동안 공식적으로 그 업적을 인정받지 못했습니다. 지난 2005년이 되어서야 재평가가 이루어져 대통령표창이 수여됩니다. 그의 묘 역시 현충원의 독립유공자 묘역으로 옮기려 했지만, 많은 사람들이 그를 형평운동의 발상지인 진주에서 모시는 게 의미가 더 크다고 반대했다는군요. 진주에 있는 강상호 선생 묘역. 1992년 6월 창립한 형평운동기념사업회라는 단체에서 지역 사회와 협력해 묘역을 정비하고 안내판을 설치했다고 합니다. 사진은 해당 단체에서 찍은 제막식 당시 사진입니다. 1960년 한 청년이 육사에서 쫓겨났습니다. 4학년 때 그가 백정 출신이라는 사실이 밝혀지자 학교 측에서 퇴학 처분을 한 거죠. 지역 의원까지 지낸 아버지조차도 자식에게 아무런 힘이 되지 못한 모양입니다. 형평사가 꿈꾼 평등 세상은 여전히 멀게 보였죠. 학자들은 산업화로 인해 농촌공동체가 해산하고, 현재의 주민등록제가 시행되는 등 영향으로 1970년대가 되어서야 비로소 신분 차별이 사라졌다고 봅니다. 하지만 현실이 어디 그리 녹록한가요? 일제 강점기란 비극적인 시대에, 형평사와 반형평사의 충돌 사건은 을들의 전쟁 가운데도 가장 극적인 사건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오늘날에도 비슷한 전쟁은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겠지요. 그 모습을 보면서, 마냥 안타까움만 가질 수 없는 까닭은 바로 제 자신 또한 그러한 을들과 마찬가지 신세이기 때문이 아닐까 합니다. 죽거나 다쳤거나, 혹은 아픈 모든 이들을 위하여 애도를. 바라건데 매일 눈을 뜨는 내일이 잠자리에 눕는 오늘보다 더 나은 세상이기를 기원합니다.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고려는 외교로 해결이 안 되면 여지없이 맞서 싸우는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이에 거란의 2차, 3차 침공 시에는 서희에 의해 고려 영토로 인정받아 개척한 강동 6주에 쌓은 여러 성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적을 차단했고, 3차 침입 시에는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정예군 중 하나인 우피실군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더이상 거란이 송나라를 압박하지 못하게 되면서, 송, 거란, 고려 3국간 힘의 균형이 맞춰집니다. 이에 송나라는 거란의 최강 부대를 압살해버린 고려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당시에 송과 거란이 각각 황제라고 칭하자 고려 역시 스스로 황제국임을 내세우게 되지요. 중세 유럽에서야 교황이 신의 이름으로 한 명의 황제만을 로마제국 황제의 후예로 지명했지만, 동양에서는 힘센 쪽이 스스로 황제라고 부를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흔히 5000년 내내 중국에 짓눌리다가 현재에 이르러서 겨우 수십 년간 중국을 얕볼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섰다가 다시금 눈치 보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귀주대첩 이후 고려 사신은 송나라에 가서 갑질을 톡톡히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송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이자 동파육 요리법의 발명가로도 유명한 소동파는 고려를 증오한 대표 인물이 되고 맙니다. 소동파는 7번이나 “고려 오랑캐와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다지요? 그 이유가 바로 고려 사신들에게 접대하는 비용이10만 관도 넘게 들며 고려 사신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과 말을 징발하고 영빈관을 수리하느라 고통받고 있다며 그 돈이면 수만 명의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송 황제 : “여봐라. 고려에서 사신이 온다.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영빈관을 빨리 수리하라” 고려 사신 : “여~ 황제님. 성대히 환영해주셔서 감사하고려. 우리에게 줄 선물도 잘 준비하셨소?” 소동파 : “아. 열받아. 동쪽 오랑캐한테도 뜯기다니! 동파육이나 쪄서 빼갈이랑 마시면서 스트레스 풀어야지~.” 고려 사신 : “동파 선생, 열받으셨소? 거란이 쳐들어올 때 우리 고려가 송을 도와줄지 다시 한번 고려해보시요?” 송 황제 : “거. 동파는 찌그러져 있으라. 불쾌하게 만들어 미안하다. 우리랑 계속 잘 지내자~.” 고려 사신 접대에 쓰인 비용이 정말 10만 관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상소문이 사실이면 북송이 서하(西夏)에게 뜯기던 공물의 2배 비용이고 거란에 바치던 공물값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답니다. 거란이나 서하에게는 군사력에서 밀리니 그만큼 뜯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도와준다던 동맹국에게도 뜯기는 건 참을 수 없었나 봅니다. 이처럼, 거란을 물리친 고려는 중원 정통왕조인 송나라로부터도 상납을 받으며 큰소리를 쳤으니 실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가 바로 이때가 아니었을까요? 비록 영토는 줄었지만 고려 인구는 고구려에 비해 2배 이상 많았고 상시 동원 가능한 군대가 20만~ 30만 명이었다고 하니 국력은 고구려보다 오히려 더 강했으며 후대 조선보다 더 강력한 상비군을 조직한 국가였습니다. 이처럼 고려가 한때 중국에게 갑질한 내용을 정작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만, 중국인들은 그게 그렇게 사무쳤는지 1999년 제작한 대만 드라마 ‘소년 포청천’에 고려 태자가 송나라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가 살해당하자 고려가 이에 앙심을 품고 쳐들어올까 봐 송 황제가 덜덜 떠는 에피소드가 등장했다고 하네요. 뭐 고려 태자가 살해당했다는 건 전혀 역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이긴 합니다. 어이~, 너네 중국은 쭉 우리한테 갑질했어. 이 사람들아! 어떻습니까? 그동안 몰랐던 고려의 위대함이 새삼 놀랍지 않으십니까?
소고기 먹기를 금하라 (3) - 1925년, 숭인동
때는 일제강점기, 경성부 관리들은 고민에 빠져 있었죠. 그들이 고민하는 원인은 지은지 고작 8년 된 부립 도축장때문이었습니다. 1914년 건설한 경성부립도축장은 한일합방 후 본래 아현동, 신설동에 있던 관립도축장, 그리고 현저동, 이태원의 사설도축장 등 여섯 곳을 통폐합해 근대적 위생 규격에 맞게 지은 관영 도축 시설이었죠. 문제는 이 시설이 처음 요망 조건을 다 채우지 못했다는 데 있었습니다. 오죽하면 설비가 부족하고 비위생적이기까지 하다는 평가까지 들었을까요. 이전 구한말 제정된 포사규칙은 민간업자를 규제하는 데 그 초점이 있었습니다. 근대적 공공위생 차원에서 도축 장소와 방식을 규정하는 법률은 1900년을 넘어서부터 차례차례 제정되었는데요. 러일전쟁 후 일제가 통감부를 설치하면서 이러한 법률 제정은 더 탄력이 붙었습니다. 기존 분리되지 않았던 도축장과 고기를 판매만 하는 정육점을 나누어 규정한 <도수장 및 수육판매규칙(1905.9)>, 도축장을 관영화, 허가제 운영한 <도수규칙(1909.8)> 등이 이 때 만들어지죠. 이에 따라 기존 도축업에 종사하던 백정들의 지위 역시 흔들렸습니다. 부유한 일부 백정은 허가를 얻어 점포를 냈지만, 대다수는 관영 도축장에 소속된 고용노동자 신세로 전락했죠. 1908년 8월, 서대문 밖 합동에 서부도축장이 문을 엽니다. 하지만 불과 3개월만에 부지 협소 등을 이유로 새 시설 부지를 탐색하게 되죠. 그 결과 아현동, 신설동에 대한도수장이란 관영 도축장이 들어섭니다. 아현동 시설이 돼지를 통째로 삶아 털을 제거하는 탕박 시설을 갖춘 방면, 신설동 시설은 철저히 소 도축에만 집중했죠. 한일합방 후 일제는 이들 시설을 총독부 내무부 위생과로 배속합니다. 이것을 나중에 한성부가 생기면서 넘겨받게 되죠. 그 뒤는 맨 처음 문단에서 설명한 대로입니다. 일제는 관리 효율을 명분삼아 기존 관영 및 민간 시설을 통폐합해 부립도축장을 조성합니다. 위치는 서대문형무소 남쪽 현저동 도축장이었죠. 1917년 현저동 경성부립도축장 모습. 대부분 나무 구조물이어선지, 시설은 빠르게 낡아버렸습니다. 거기다 수도 및 배수 시설이 형편없어서 핏물과 오물이 고여 여름마다 곤욕을 치뤘다고 합니다. 무엇보다도 시설은 기대만큼 효율적이지 못했는데, 도축 작업을 하는 백정들이 손에 익은 과거 방식 그대로 작업을 수행했기 때문이었죠. 시카고의 도살장이 포드에게 컨베이어 벨트 제조 공정의 영감을 줄 정도로 효율화, 고도화된 산업 시설이었던 것과 비교되는 대목입니다. 현저동 시설에 문제가 많았기에, 결국 경성부는 지은지 8년 된 부립도축장을 버리고 새 시설을 세우기로 결정합니다. 선정된 부지는 숭인동 동묘 근처였죠. 아직 서울이 지금처럼 규모가 크지 않을 때입니다. 동묘 인근은 서울 외곽이라 민가와 멀리 떨어져 있고, 청계천 하류와 가까워 배수 조건도 서대문 시설보다 나았습니다. 무엇보다도 이곳엔 이미 1923년 조성된 가축시장이 있었죠. 주요 산지인 강원도 등지에서 소가 들어오면, 동묘 시장을 거쳐 경성부 일대 주민들에게 공급했습니다. 숭인동은 도축장이 들어서기에 최적의 입지처럼 보였죠. 그리하여 일제 강점기 내내 서울 시민들이 먹는 고기는 이곳 숭인동에서 도축해 공급했습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일제 역시 경성부 인구 증가에 맞춰 도시 계획을 수립하고 시가지를 확대하려 했죠. 자연히 도축장은 숭인동 아닌 다른 곳으로 또다시 옮겨야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결국 일제 시대 내에는 실현되지 못합니다. 숭인동 가축시장과 도축장이 마장동으로 옮긴 건 광복 후 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이 되어서야 가능했죠. 시카고 도축장 작업 과정. 시카고에선 이미 1867년부터 기계화된 공정을 도입해 도축에서 최종 제품까지 고도로 분업화된 하나의 라인에서 처리했다고 합니다. 각 단계에는 비숙련공이 투입되어도 충분히 제 몫을 해낼 수 있었다네요. 일부 몰양심한 육가공업체들이 물의를 일으키는 일도 종종 있었지만요. 이렇듯 도축 관련 법령이 발달하고 시설이 개선될수록 백정들의 처지는 나아지긴커녕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신분 차별은 일제 시대에도 없어질 조짐이 없었죠. 1922년 대구 백정들이 야유회를 가면서 기생들을 불러 끼고 놀았는데, 양민들이 그걸 보고 혀를 차며 기생들을 비난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그 결과 대구 기생 조합이 해당 연회에 참가한 기생들을 제명해 버렸죠. 그 뒤로는 백정들이 아무리 불러도 기생들이 백정들 자리에 참석하는 일은 없었습니다. 하다못해 경제적으로라도 나아지면 기를 펴겠는데, 그것도 아니었습니다. 이전에 백정들은 도축 작업을 한 후 쇠기름같은 부산물을 자기 몫으로 주장할 수 있었죠. 그같은 부산물은 일종의 가외 수입처럼 여겨졌습니다. 하지만 임금 노동자가 된 후로는 그마저도 어려워졌죠. 백정들이 가내 수공업으로 행하던 가죽 공예도 근대화된 공장에서 찍어내는 물건들과 경쟁하기 힘들었습니다. 어쩌다 돈을 벌어 부자가 되어도 사회의 시선은 따가웠습니다. 어떤 백정들은 자기 자식만이라도 공립, 사립학교에 보내려고 부탁도 넣고 기부도 했지만 입학을 거절당하거나 아이가 차별을 못이겨 중퇴하는 일을 거듭했습니다. 또 어떤 백정은 일본으로 건너가 메이지 대학에 입학할 정도로 뛰어났지만, 도중에 학업을 중퇴하고 귀국한 뒤 총독부에서 일자리를 구하려다 포기했습니다. 백정은 총독부에서 받아주지 않는단 걸 뒤늦게 알아서였죠. 3.1운동이 일어나고 민족 운동이 활발해지는 와중에도 여전히 백정들은 식민지 속의 영원한 을이었습니다. 사람들은 일제의 가혹한 식민 정책 아래서 우리 민족이 독립하길 꿈꿨지만, 백정들이 오랫동안 겪어 온 차별과 억압에서 해방되어야 한다고 생각한 사람들은 적었습니다. 결국 백정 사회 스스로 이 모순을 해결할 새 움직임이 대두하죠. 무대는 이제 1923년 경남 진주로 넘어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