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fmon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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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오는 귀신썰) 다른 이의 꿈 1화

오늘은 조금 포근한 이야기를 가져와 봤어
마음이 따뜻해 지는 이야기
왠지 아련해 지는 이야기
가을이잖아 ㅎ

귀신썰에도 감성을 한 번 더해 보쟈 ㅎㅎ
시작한다!

__________________


남편이 말했다.
자신은 저승사자라고.
죽은 자의 혼을 저승의 문으로 안내하는 저승사자.

남편의 심각한 표정에 나 역시 사뭇 진지해졌다.
이 인간이 무슨 큰 사고를 친 건가?

그러고 보니 요 며칠 남편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게다가 출근 시간에 서두르는 것 같지도 않았는데… 혹시… 회사에서 짤린 건가? 작은 회사이긴 하지만 퇴근 시간 확실하고 급여도 나쁘지 않은 직장인데…

순간 남아있는 아파트 대출금과 적금 만기일, 그리고 통장 잔고가 나의 머리를 스쳐지나갔다.
에이 설마! 나는 실눈을 뜨고 남편을 응시했다. 남편은 나의 눈길을 피한 채 이야기를 계속했다.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기억나? 당신이 교통사고로 죽었을 때… 내가 당신 살려줬잖아.”

하— 이건 또 무슨 헛소리인지…
나는 심란한 마음으로 남편을 불렀다.

“자기야…”

남편은 여전히 나의 눈길을 피했다.
나는 목소리를 높여 남편을 다시 불렀다.

“자기야?”

그제서야 남편은 나를 바라보았다.

“혹시… 회사에서 무슨 일 있는 거… 아니지? 응?”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다시 교통사고 이야기를 꺼내는 남편을 어르고 달래서 결국 출근을 시켰다.

4살 연하인 남편은 가끔씩 이렇게 아이 같을 때가 있다. 연애할 때는 그런 남편의 모습이 귀엽다고 생각했는데… 이제는 뭐랄까… ‘한심하다’는 표현은 너무 쎄고, 음… 그래… ‘피곤하다’는 표현이 맞겠다.

예전 같았으면 내가 맞장구도 쳐주고, 깜짝 놀라는 리액션도 해줬을텐데… 그런데 요즘 내 컨디션이 영 아니다. 특별히 힘든 일을 하는 것도 아닌데… 그냥 몸도 자꾸 피곤하고, 몸이 힘드니까 마음의 여유도 없어지는 것 같다.

음… 그런데……
그래, 저승사자 이야기는 농담이라고 치고, 뜬금없이 교통사고라… 내가 살면서 겪은 교통사고는 딱 두번이다. 지난 여름 휴가 때 바닷가 해안도로에서 작은 접촉사고. 그리고 어릴 적 아버지가 운전하시던 차에 난 사고.

어릴 적 사고에서는 차가 많이 망가지기는 했어도 우리 가족이 다치지는 않았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교통사고와 남편과의 첫만남은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남편을 처음 만난 순간은 무척 묘했다. 그래서 15년이 넘은 지금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그때 나는 자정이 넘기 전에 무언가를 사려고 늦은 저녁 자취방에서 급하게 나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자취집 문 밖에서 서성이던 남학생과 눈이 마주쳤다.

고등학생 즘 되었을까?
앳돼 보이는 남학생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늦은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겁이 난다거나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발걸음을 멈추었고, 남학생은 나에게 걸어왔다. 그리고 내 앞에서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그는 마치 내 주변의 모든 공기를 들이키려는 듯 길게 숨을 들이마셨다. 나는 어이가 없어 헛웃음을 지으며 그에게 물었었다. 나한테 무슨 냄새라도 나느냐고…

그때 남편이 뭐라고 대답했더라? 오래된 시간의 향기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기다림의 냄새라고 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때 그가 했던 말은 흐릿하지만 그의 얼굴은 생생하게 기억이 난다. 양 눈썹을 치켜올리고 지어보였던 미소. 그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환하게 빛이 났던 것 같다.

==
설거지를 마치고 잠시 쉴 겸 소파에 앉았다. 어젯밤 죽은 듯이 잠을 잤는데도 몸이 피곤했다. 이제 정말 몸이 늙는구나… 고개를 뒤로 젖히고는 눈을 감았다. 그리고 남편이 했던 이야기를 떠올렸다.

저승사자… 교통사고… 그리고 환생… 어디서 들어본 듯한 이야기인데… 무슨 이야기지?

소파에 기댄 채 잠이 드는 듯 하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래, 맞다.
로또 꿈!

오래전 다른 사람의 꿈을 사고 로또에 당첨된 일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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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생 시절.
나는 동아리 선배 언니와 원룸에서 함께 자취를 했었다.

그 선배 언니는 나와는 다르게 여자여자한 성격에 미모도 출중해서 주변 남학생들에게 인기가 무척 좋았었다. 그래서 동아리의 여러 남자 선배들이 나를 통해 언니에 대한 고급? 정보를 알아가곤 했다. 예를 들면, 언니가 좋아할 만한 선물, 보고 싶어하는 영화, 또는 언니의 주말 스케줄 같은 정보들 말이다.

하루는 언니가 오전 수업을 들으러 밖으로 나갔다가 바로 자취방으로 되돌아왔다.

“오늘 생각보다 쌀쌀하네. 너 입는 가디건 좀 빌려입어도 될까?”

나는 아직 세탁을 못했다고 말했지만, 언니는 괜찮다며 내 가디건을 걸치고 자취방을 나섰다.

그리고 그날 저녁.
내가 자취방에 돌아왔을 때, 언니는 자신의 침대 위에 멍한 표정으로 누워있었다.

언니는 빌려간 가디건을 아직 입고 있었고, 내가 방에 들어갔는데도 여전히 천장만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언니 이름을 불렀고, 언니는 그제서야 몸을 일으키며 나에게 왔냐며 아는 척을 했다.

“언니, 왜 그래? 무슨 일 있어?”
“아… 글쎄… 음… 내가 꿈을 꾼 거 같기도 하도… 잘 모르겠네.”
“무슨 소리야? 언니, 술 한잔 했구나?”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언니는 오늘 수업이 끝나고 자취방으로 오는 길에 있었던 이야기를 나에게 해주었다.

학교에서 자취방으로 오려면 6차선 도로의 횡단보도를 건너야 했다. 마침 신호등의 파란불이 끝나가고 있어서 언니는 급히 횡단보도를 건넜단다. 순간 자동차 타이어 미끌어지는 소리와 함께 자신의 바로 뒤에서 쿵 소리가 났다고 했다.

언니는 고개를 돌렸고… 사람 몸뚱이가 소리가 난 반대쪽으로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했다. 그 몸뚱이가 떨어진 곳으로 사람들이 모여들었고, 언니는 자신이 본 장면이 너무 끔찍해서 곧장 자취방으로 돌아왔다고 했다.

방에 돌아온 언니는 침대에 웅크리고 누워 울음을 터뜨렸다고 했다. 한참을 울던 언니는 인기척이 느껴져 반대쪽으로 고개를 돌렸는데, 낯선 남자가 자신의 머리맡에 서있었다고. 놀라서 기절을 할 상황인데도 언니는 이상할 정도로 마음이 차분했다고 했다.

잠시 후 남자는 언니에게 언니가 지금 죽었고, 그래서 언니를 데리러 왔다고 말했다고 했다. 그때 남자의 눈빛이 어색하게 느껴졌는데, 남자는 언니가 아닌 허공을 바라보며 말을 하고 있었다고…

언니는 남자에게 물었단다. 조금전 교통사고가 혹시 자기였냐고. 남자는 여전히 허공을 바라보며 그렇다고 대답을 했고, 신기하게도 언니는 남자의 말을 그대로 믿었다고 했다. 그래서 언니는 이제 저승으로 가는구나 라는 생각과 함께 침대에서 일어나 남자에게 앞장을 서라고 말했단다.

하지만 남자는 잠시 머뭇거리다 자기 얼굴을 한번 봐달라고 말했고, 언니는 아까부터 보고 있었다고 말했다고 했다. 언니의 대답에 남자는 실망한 표정으로 한참을 그대로 서있었다고… 남자가 말이 없어서 언니는 궁금한 마음에 남자에게 자신이 보이지 않느냐고 물었고, 남자는 죽은 영혼을 볼 수 없다고 말했단다.

잠시 후 남자는 슬픈 표정으로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방을 나갔고, 언니는 잠에서 깨어났다고 했다.

나는 언니에게 물었다.

“그래서 그 남자가 나가면서 무슨 말을 했는데?”

언니는 잘 모르겠다며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계속 캐묻자 언니는 부끄러운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오랜 시간을 기다리고 기다려서 나를 만났는데, 이렇게 보낼 수가 없다고…”
“이야— 언니의 엄청난 미모는 이제 저승에서도 통하는구나.”

나는 이게 예사 꿈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로또를 사야한다고 언니를 설득하기 시작했다. 나의 끈질긴 설득에도 불구하고 언니는 복권을 사본 적도 없고 살 생각도 없다며 손사래를 쳤다.

결국 나는 언니에게 그런 엄청난 꿈을 그렇게 버릴 거면 차라리 나에게 팔라고 제안했다. 나쁜 꿈이면 어떡하냐며 언니는 고개를 저었다. 상관없다며 내가 끈질기게 조르자 언니는 잠시 주저하다가 입을 열었다.

“그럼… 내가 꿈을 주는 대신에… 네 가디건… 내가 가져도 될까?”
“언니가 지금 입고 있는 거?”

언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 빨지도 않은 가디건은 왜?”
“글쎄… 그냥 느낌인데… 이 가디건 때문에 저승사자가 날 두고 혼자 간 거 같아서...”

나는 흔쾌히 오케이 했고,
시간을 확인했다.
밤 11시가 조금 넘은 시간이었다. 12시가 넘어 날짜가 바뀌면 꿈의 효과가 없어질 것 같았다. 나는 바로 편의점으로 가서 로또 넉장을 구입했다.

그래서 로또 결과가 어떻게 되었느냐고?
구입한 로또 중 하나가 3등에 당첨되었고, 세금을 제하고 100만원이 살짝 넘는 돈을 수령했었다.

당첨금의 절반을 룸메이트 언니에게 건내며 말했다. 언니가 직접 로또를 샀으면 분명 1등이었을 것이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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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이 퇴근했고,
우리는 말없이 저녁을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는 거실에서 텔레비젼을 보다가 안방으로 들어갔다.

불이 꺼진 안방은 어두웠다.
남편은 침대에 누워있었다.
나는 남편 옆에 나란히 누웠다.
낮은 목소리를 남편에게 말을 걸었다.

“자기야… 벌써 자는 거야?”
“아니… 아직…”
“아침에… 저승사자 이야기… 장난치는 것 같지는 않던데… 자기 혹시 무슨 일 있어? 혹시… 어디… 아프다거나……”

남편은 누운 채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왜 그런 이야기를 한거야?”

남편은 몸을 돌려 나를 향해 돌아누웠다.
그리고 방긋 웃으며 말했다.

“장난이었어. 하하.”

나는 남편의 팔뚝을 꼬집었다.

“으이구! 내가 오늘 내내 얼마나 걱정한줄 알아?”

남편은 환하게 웃으며 미안하다 말했다.
어둠 속에서 남편의 얼굴은 빛이 나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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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날 아침.
눈을 뜨고 거실로 나왔다.
남편은 이미 출근 준비를 마치고 혼자 아침을 먹고 있었다.

“미안. 내가 아침 챙겨줘야 하는데.”
“미안하긴. 누나 많이 피곤한 것 같던데, 들어가서 좀 더 누워있어.”

남편 말대로 더 자고 싶었지만 나는 남편을 마주보고 식탁에 앉았다. 남편 혼자 밥먹는 게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턱을 괴고 남편이 밥먹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남편은 그런 내가 부담스러웠는지 입을 열었다.

“뭘 그렇게 빤히 봐? 밥먹기 민망하게…”

나는 손을 뻗어 남편의 입술에 붙은 밥풀을 떼어냈다.

“에구에구, 우리 애기 밥먹으면서 흘리지 않고 잘 먹나 보려고 그러지~”

남편은 나를 보고 씩 웃어보이고는 말했다.

“누나, 우리 여행갈까?”
“뜬금없이 갑자기 왜? 나야 좋은데… 자기 여행 싫어하잖아. 집 나가면 고생이라며?”
“하하. 내가 그런 말을 했었나?”

남편은 식사를 마치고 식탁을 치우는 나를 향해 말했다.

“우리 신혼여행 갔던 곳 있잖아. 거기는 어때? 누나 종종 거기 다시 가고 싶다고 했잖아.”
“글쎄… 마음이야 가고 싶지. 그런데 문제는 돈이지. 그리고 자기 회사에서 휴가를 길게 줄지도 모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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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국 크라비.
우리가 신혼여행을 간 곳이다.
벌써 10년이 넘었구나.
시간 참 빠르다.

크라비 주변 섬 투어.
배를 타고 이동하는 중간 중간 바다 가운데에서 하는 스노쿨링. 카약을 타고 하는 정글 투어, 그리고 야시장과 타이 음식들. 남편이 뜬금없이 꺼낸 여행 이야기에 그때의 기억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그런데 신혼여행에서 남편은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을 했었다. 남편은 향신료 냄새에 무척 민감하게 반응했는데… 자기가 먹는 음식은 말할 것도 없고, 식당의 다른 테이블에서 향신료 냄새가 넘어오기만 해도 음식은 고사하고 물 한모금 넘기지를 못했다.

신혼여행을 다녀와서 시댁에 인사를 갔을 때… 헬쑥해진 남편과 나를 번갈아 바라보던 시댁 식구들의 눈빛을 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비록 음식 때문에 힘들긴 했어도, 남편은 신혼여행이 자기 삶에서 가장 행복한 시간이었다고 했다. 지금까지 경험하지 못한 큰 행복을 느끼는 사람은 그 행복이 끝나는 시간을 미리부터 걱정한다고 한다. 그래서 남편은 신혼여행 중에 죽음에 관련된 질문을 나에게 던진 게 아니었을까? 남편은 재미로 하는 심리 테스트라며 나에게 물었지만, 남편의 표정에는 심각함이 느껴졌었다.

남편이 물은 심리테스트 질문.
당신에게 미래를 보는 능력이 생겼다고 하자. 그래서 당신의 가까운 친구가 죽는 날을 알게 된다면, 당신은 그 친구에게 죽음을 미리 알릴 것인가? 만약 알려준다면, 당신은 친구가 죽기 얼마 전에 알려줄 것인가?

그때 나는 알려줄 것이라 답했고,
한달이면 죽음을 준비할 수 있을 것 같다고 말했었다.

태국 크라비로 여행을 가자고 고집을 부리는 남편을 어렵게 말렸다. 대신 우리는 제주도에 가기로 결정했다. 남편 말로는 제주도나 태국이나 가격 차이가 별로 없다 했지만, 솔직히 그 작은 차이도 아쉬웠다.

그리고 모른다면 모를까… 남편이 물 한모금 마시기도 힘들어할 것을 뻔히 아는데 태국을 고를 수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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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도는 이번이 세번째다.
하지만 4월의 제주도는 이번이 처음이었다. 지난주가 이미 유채꽃 절정이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래서 제주에 도착하자마자 우리는 지인이 추천해준 녹산로로 향했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유채꽃과 벚꽃. 노오란 꽃길에 마치 눈이 내리듯 벚꽃잎이 허공에 날라다녔다. 우리는 풍경을 즐기며 느릿느릿 움직이는 앞차를 따라갔다. 한참을 따라가다 보니 유채꽃 벌판이 펼쳐졌다. 탄성이 절로 나왔다.

남편이 물었다.
“우리 주차하고 좀 걸을까?”

남편과 나는 유채꽃으로 뒤덮인 들판을 걸었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나는 가만히 남편의 손을 잡았다. 남편의 손은 차가웠다. 그렇게 우리는 서로 손을 잡은 채 한참을 걸었다.

구경을 마치고 차로 돌아오며 남편이 말했다. 사람이 너무 많다고… 남편의 말에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생각했다. 늦은 밤 조용할 때 왔으면 더 좋았을 것이라고...

저녁을 먹고 호텔로 돌아왔을 때, 나는 씻자마자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꿈을 꾸었다.

꿈 속 나는 어두워진 유채꽃 들판을 걷고 있었다. 진한 노란색이 아닌 창백한 흰색의 유채꽃들이 바람에 흔들리고 있었다. 낮에 보았던 거대한 풍력 발전기가 보였다. 발전기의 날개가 천천히 돌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우웅— 우웅— 하는 풍차 소음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그리고 나는 주변이 쥐죽은 듯 조용하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나 말고는 아무도 없었다.
넓은 벌판에 나 혼자였다.

순간 내가 있는 곳이 낮에 구경한 장소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내가 지금 다른 세상에 있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끝없이 펼쳐진 하얀 꽃밭이 괴기스럽게 느껴졌다.

순간 나의 왼손을 감싸는 차가운 감촉이 느껴졌다. 손을 움츠렸지만 차가운 그것은 낚아채듯 나의 왼손을 움켜쥐었다. 헉—하는 소리와 함께 나의 몸은 굳어버렸다.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손을 잡고 있는 차가운 느낌은 여전했다.
팔에 힘이 들어갔다.
하지만 나의 손은 무언가에 붙들린 듯 꼼짝할 수 없었다.
그리고 머리 속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누나... 아직은 아니야…'

남편의 목소리.
나는 왼손에 느껴지는 남편의 차가운 손을 꽉 움켜쥐었다.

그리고 나는 잠에서 깨어났다.

==

여행을 다녀와서 몸무게가 많이 줄어 있었다. 여행 중 많이 피곤하고 입맛이 없어서 좀처럼 먹지를 못했다. 처음에는 좋아했는데, 체중이 너무 빠지는 것 같아 병원을 찾았다. 여러가지 검사를 받았고, 검사 결과가 나오는 다음주에 진료를 예약하고 집으로 돌아왔다.

검사 결과가 나오는 날 이른 아침.
병원에서 전화가 왔다. 수화기 건너 나를 확인하는 목소리가 차분하게 느껴졌다. 병원 직원은 보호자와 함께 올 수 있는지 물었다.

순간 머리에 스치는 생각...
검사 결과가 좋지 않구나…

나는 애써 목소리를 내리 누르며 대답했다. 남편과 함께 가겠다고.

의사는 친절한 목소리로 검사 결과를 설명했다. 의사의 긴 설명 중 나의 머리 속에 남은 것은 말기암이라는 단어와 몇몇 숫자들이 전부였다. 간암 4기…… 5년 생존율 10%.

나는 차분했다.
사실... 차분했다기 보다 아무 생각이 없었다. 아마도 그날 나는 내가 간암 말기라는 상황을 거부하고 있었던 것 같다. 병원에서 집으로 오며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듯 남편과 이야기를 나누었다. 말기암 판정을 받아서가 아니라... 그저 여느때 처럼 입맛이 없어서 저녁을 걸렀고, 조금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다음날 아침.
일어나 세안을 하고 양치를 하다가 거울 속 나와 눈이 마주쳤다. 거울 속 나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입에서 흘러나온 치약 거품이 턱으로 흘러내렸다. 흘러내리는 거품을 바라보다가 나도 모르게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대로 화장실 바닥에 주저앉았고, 목으로 넘어오는 치약맛에 헛구역질을 하면서 나는 울었다. 한참을 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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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개월에서 반년.
많이 피곤한 것을 제외하면 행동하는데 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한달 후… 아니 보름 뒤에는 나의 병세가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었다.

째각째각 흐르는 일분 일초가 아깝게 느껴졌다. 잠이 오지 않았다. 나의 옆에 누워 잠들어 있는 남편을 보았다. 남편의 얼굴은 여전히 빛이 나는 것 같았다.

남편은 잘생겼다.
정말 잘 생겼다.
내 눈에 콩깍지가 씌여서가 아니라 남편은 객관적으로 봐도 잘생겼다.

결혼 당시 친구들 사이에 남편의 외모에 대한 소문이 자자했었다. 심지어는 한 친구를 통해 내가 유력 대기업 오너의 손녀라는 소문을 들은 적이 있다. 소문은 꽤나 구체적이었다. 나의 아버지가 재벌 가문의 막내 아들인데, 그동안 행실이 좋지 않아 기업의 오너인 할아버지의 눈 밖에 났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내가 티내지 않고 검소하게 그리고 비교적 얌전하게 대학 생활을 해왔다는 것이다. 친구 말에 의하면 재벌 3세가 아니고서야 내가 그렇게 준수한 신랑감을 구할 수 없다는 게 소문의 이유라 했다. 소문을 듣고 기가 막혔지만 남편의 얼굴을 보고 있노라면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할 수도 있겠구나 싶었다.

나는 잠든 남편을 흔들어 깨웠다.
남편이 눈을 떴다.

“자기야. 깨워서 미안한데… 나 좀 많이 급해서.”
“응? 누나, 괜찮어? 진통제 필요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픈 게 아니고… 나 이렇고 있으면 안될 거 같아… 나 뭐라도 해야하는데… 이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는데… 나… 뭐 해야하지? 응?”

남편은 몸을 일으켜 앉아서 나를 끌어안았다. 그리고 남편은 나의 머리를 천천히 쓰다듬었다. 사랑받는 느낌. 남편이 나를 만지고 사랑하는 이 느낌.

나는 눈을 감았다. 남편의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남편의 체취. 나의 어깨를 간지르는 남편의 까끌거리는 턱수염. 나의 손끝에서 느껴지는 남편 등 근육의 굴곡. 나를 달래주는 남편의 목소리.

앞으로 이 느낌들을 몇번이나 더 느낄 수 있을까?

그날밤 나는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고 싶다 말했다. 그리고 다음날 퇴근한 남편은 당분간 회사를 나가지 않아도 된다 말했다.

막상 하루 24시간을 남편과 함께 지내니까… 뭐랄까…? 남편과의 애틋한 느낌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출근하는 남편을 보내며 느끼는 작은 아쉬움. 퇴근 후 집에 온 남편을 보고 느끼는 반가움. 이런 소소한 감정들이 느껴지지 않아 아쉬웠다.

나의 말을 들은 남편은 세상 별게 다 아쉽다며 웃었다. 그랬다. 세상 오만 것이 다 아쉬웠다. 바람이 머리칼을 스쳐지나는 느낌이 아쉬웠고, 햇빛의 눈부심도 아쉬웠고, 빗방울 떨어지는 소리도 아쉬었다. 특히 남편과 함께하며 느껴지는 기분과 감정들은 더더욱 아쉬웠다. 이제 마지막이 될테니까…

남편은 미안하다며 감정이 격해진 나를 달래주었다. 그리고 바람을 쐬자며 드라이브를 가자 했다. 양양을 향하는 고속도로를 달리다 44번 국도로 빠져나왔다.

구불구불한 도로에는 차가 많지 않았다. 대신 힘겹게 자전거 페달을 구르는 사람들이 종종 눈에 들어왔다. 안개가 자욱해졌다가 다시 시야가 맑게 트이기를 반복하는가 하더니 이내 한계령이라고 적힌 표지판과 휴게소가 나왔다.

우리는 한계령 휴게소에서 잠깐 쉬기로 했다. 휴게소 건물을 타고 흘러가는 안개를 보고있노라니 기분이 묘해졌다. 그곳에서 차 한잔을 마시고 우리는 차를 돌려 집으로 향했다.

집으로 오는 길. 한참 동안 말이 없던 남편이 입을 열었다.

“누나… 누나는 내세를 믿어?”
“응? 내세? 내세가 뭐야?”
“사람이 죽으면 다음생에 다시 태어나는 거…”
“아… 글쎄… 음……… 생각해본 적 없는데... 물론 내세가 있으면 좋겠지… 그런데 뜬금없이 그건 왜?”
“그냥…”
“왜…? 나 너무 힘들어하는 거 같아서?”
“아니야… 그냥 물어봤어.”

남편의 말에 나는 웃으며 말했다.

“뭘 그냥 물어봐? 내가 믿는다고 하면 재미있는 이야기 해주려고 물어본 거 아냐?”
“하하. 그런거 아니야.”
“어허! 왜 자꾸 빼는 거야? 알았어. 나 다음생이 있다고 믿으니까, 하려던 이야기 해줘.”

하지만 남편은 입을 다물었다. 남편이 하려던 이야기가 무엇인지 굼금해졌다. 흠… 그냥 처음부터 진지하게 믿는다고 할껄 그랬나?

그날밤.
나는 침대에 누워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이 나의 옆에 자리를 잡고 눕자 나는 입을 열었다.

“나 그 이야기 듣고 싶은데… 내세 이야기.”

남편은 웃으며 말했다.

“하하. 누나, 그게 그렇게 궁금해?”
“그 이야기 안들으면 나 오늘 못잘 거 같아.”
“하하. 알았어.”
“어서 해줘.”
“음… 이건… 어느 남자에 대한 이야기야.”

남편의 첫마디에 나는 남편 자신의 이야기임을 직감했다. 하지만 나는 그냥 남편을 향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 남자는... 음… 전생에 살았던 여러 삶들을 기억해. 특히 그가 사랑했던 사람들을 잊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어.”

남편은 이야기를 멈추었다.
어두운 방안이 조용해졌다.
남편이 숨쉬는 소리가 느껴졌다.
나는 남편의 품으로 파고 들며 말했다.

“이제… 그 남자… 이번생에서 나와 함께한 시간도 기억해 주겠지?”
“그럼…”

남편은 낮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계속했다.

“처음 몇 번의 삶을 살고난 후 그 남자는 한가지 확신을 가지게 돼.”
“어떤 확신?”
“다른 삶에서 자신이 사랑했던 연인들이 모두 같은 사람이라는 믿음.”

남편은 잠시 쉬었다가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 남자는 새로운 삶을 시작하면 환생한 자신의 연인을 찾아다녀."

나는 물었다.

“다른 사람으로 태어나는 건데… 어떻게 알아보는 거야?”
“글쎄… 그냥 느낌으로 아는거지.”
“그냥 느낌? 흠— 이해하기 좀 어렵네.”

남편이 물었다.

“누나는 나 처음 보는 순간 어땠어? 느낌이 딱 하고 오지 않았어?”

남편이 꾸며낸 이야기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나는 진지하게 남편과의 첫만남을 떠올렸다. 그날 나는 자취방을 나와 복권을 사기 위해 편의점에 가는 길이었다.

“음… 잘 모르겠어. 그때 자기가 얼굴에서 빛이 날 정도로 잘생겼다는 것 밖에 기억이 안나네.”

잘생겼다는 나의 말에 남편은 기분이 좋아진 듯 웃으며 말했다.

“하하. 그런거 말고. 음… 뭐랄까… 익숙한 얼굴이라거나… 아니면 꿈에서 나를 봤다거나… 그런 거 없었어?”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 전혀…”

남편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말했다.

“흠… 그럴리가 없는데…”

남편과 이야기를 마치고 잠을 청했다.
그런데…
꿈에 자기를 보지 않았냐는 남편의 말.
그 말이 자꾸 마음에 걸렸다.

남편을 처음 만났을 때,
이렇게 잘생긴 남자와 사귀게 될 것이라는 생각은 감히 하지도 못했었다. 그래서 남편이 적극적으로 나에게 다가왔을 때 나는 생각했었다. 그날 내가 잡은 진짜 로또가 바로 이 남자라고.

혹시......
그날밤... 남편은 내가 산 꿈의 주인인 룸메이트 언니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아닐까?

고개를 저었다.
에이! 무슨 말도 안되는 소리!
나의 기분을 풀어주려고 남편이 꾸며낸 이야기가 아닌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말자.

나는 애써 잠을 청했다.

==

긴장을 하면 얼굴에 보이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 남편이 그런 사람 중 하나다.

오늘 아침부터 남편의 얼굴이 심각했다.
많이 긴장한 표정이다.
물론 내가 암선고를 받은 후로 남편의 표정은 늘 좋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무언가 중요한 결심을 한 것 같았다.
혹시… 호스피스 병원으로 옮기기로 결정한 건가?
마음 속으로 그럴리 없다며 고개를 저었지만, 서운한 마음이 왈칵 밀려올라왔다.

아니나 다를까 남편은 심각한 표정으로 나를 불렀고, 우리는 식탁에 서로를 보고 마주앉았다.
한참을 머뭇거리던 남편이 결국 입을 열었다.

“누나… 나 많이 고민했는데… 아무래도 누나에게 알려줘야 할 거 같아서…”
“무슨 일인데…?”

남편은 나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남편은 눈을 내리 깔은 채 입을 열었다.

“누나 아픈 거 있잖아…”

남편은 깊게 숨을 들이쉬고 다시 입을 열었다.

“누나… 시간이… 시간이 얼마 안남았어… 이제…… 한달이야.”

나는 물었다.

“한달이라니… 그게 무슨 말이니?”

남편은 대답 대신 자신의 팔을 뻗어 나의 손을 잡았다. 그제서야 나는 남편이 말한 한달이 무슨 의미인지 알아챘다.

“하하… 무슨 소리야. 의사가 약 잘 먹으면 3개월에서 6개월이라 그랬잖아. 너 혹시…… 나 모르게 병원 갔다 온거야?”

남편은 고개를 저었다.

“너 그런 장난 치는 거 아니야. 나 화낸다.”

남편은 말이 없었다.
남편의 두 눈에 눈물이 맺혔다.
남편이 잡고 있는 손을 빼내었다.

“누나…”

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말했다.

“나 혼자 있고 싶어.”

문득 기억이 떠올랐다.
교통사고로 엄마가 갑자기 돌아가셨을 때… 그때 나는 친정에서 지내고 있었다. 엄마가 돌아가시기 한달 전… 남편은 장모님이 외로워하시는 것 같다며 나를 떠밀다시피 친정으로 보냈었다.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 역시 비슷했다. 남편이 나를 친정에 보냈고, 한달이 지나서 아버지께서 돌아가셨다.

==

그날 저녁.
식사를 마치고 나는 남편에게 잠시 이야기를 하자고 했다.

“나 궁금한 게 하나 있어.”

남편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오늘 생각해 보니까… 자기가 회사에서 무슨 일하는지 모르고 있더라고... 병원에 의료 용품 납품한다고 했잖아. 무슨 물건 납품하는 거야?”

남편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주저했다.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솔직히 나 오늘 인터넷에 자기 회사 검색해봤어. 그런데 찾을 수가 없더라구. 자기가 일하는 회사 정말 있는 회사야?”

남편은 여전히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 남편에게 속고 살았다는 생각에 감정이 북받쳤다. 나는 따지듯 물었다.

“너 뭐하는 사람이야? 너 누구야? 너 도대체 누구냐구!”

남편은 고개를 떨구었다.

그날 밤.
나는 진통제를 먹고 쓰러지듯 잠이 들었다. 그리고 다시 잠이 깼을 때, 남편은 침대에 나와 나란히 누워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나는 말했다.

“아까는 미안해…”

남편은 괜찮다는 표정으로 미소를 지어보였다. 나는 남편 품으로 파고 들었고, 남편의 커다란 팔이 나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리고 남편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남편은 자신이 저승사자라 말했다. 여러 병원을 돌아다니며 죽은 영혼을 저승으로 안내하는 일을 한다고. 처음부터 저승사자가 된 것은 아니라 했다. 언젠가부터 지난 삶의 기억을 가지고 태어나기 시작했고, 우연히 자기처럼 전생의 기억을 가진 사람들을 만났다 했다. 그리고 그들로부터 저승사자 일을 제안 받았다고 했다.

남편은 자신이 하는 일이 보람있는 일이라 말했다. 모든 죽음은 슬프고 아쉽지만 죽음이 늘 나쁜 것만은 아니라고… 종종 사람들이 진심으로 사랑하고 용서하는 시간이 바로 죽음의 순간이라고... 그리고 우리는 죽음을 통해 현재 삶을 매듭짓고 새로운 몸을 받아 다시 태어난다고 했다.

나는 남편의 이야기가 참인지 거짓인지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그렇게 남편의 이야기를 들으며 잠이 들었다.

==

대학 시절 룸메이트 언니.
죽기 전 언니를 만나고 싶었다.
대학 친구를 통해 언니의 연락처를 구할 수 있었다. 그런데… 막상 연락을 하려고 하니까 언니를 직접 만나면 후회할 것 같았다. 아침 내내 전화기를 만지작거리다 어렵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작은 커피 가게.
언니는 환한 웃음으로 나를 맞아주었다.
마흔이 넘은 나이에도 언니의 몸매와 미모는 여전했다.

언니는 나의 손을 꼭 잡은 채로 말했다.
얼굴이 반쪽이라고…
어디 아픈거 아니냐고…

나는 질끈 눈을 감았다.
그리고 눈을 다시 뜨고 밝게 웃으며 말했다.

“아프긴~ 나 언니한테 예쁘게 보이려고 한달 전부터 다이어트 했잖아.”

언니는 나에게 여전하다며 까르르 웃음을 지어보였다.

언니를 만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나는 후회하고 있었다.
만나지 말았어야 했는데…

집에 도착해 씻지도 않고 바로 침대에 누웠다.
눈물이 나오기 시작했다.
배게에 얼굴을 묻었다.
내가 미웠다.

처음에는 미안한 마음에 언니를 만나보고 싶었다.
언니의 연락처를 알아보는 중 친구를 통해 언니 상황이 그리 좋지 않다는 이야기를 들었고, 그때 나는 언니에게 죄책감마저 느꼈었다. 언니가 누려야 할 행복을 내가 빼앗었다는 생각에 직접 만나서 마음으로나마 사과하고 싶었었다.

하지만 여전히 아름다운 언니를 보고, 아직 미혼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가슴 속 질투심이 터지고 말았다. 그런 나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

남편 말대로 나는 한달 뒤 죽음을 맞이했다.

하지만 죽음의 순간은 남편의 이야기처럼 아름답지 않았다. 남편을 사랑하는 마음보다 우리의 사랑을 의심하는 마음이 앞섰고, 언니의 행복을 빼앗은 사실에 대한 미안함은 커녕 언니를 여전히 질투하고 있었다.

사실... 부끄러운 이야기지만...... 솔직히 나는… 내가 죽은 후... 남편이 언니를 만나서 서로가 알아보면 어쩌나 걱정하고 있었다. 남편이 나와 함께한 시간과 추억을 부정하는 것은 아닌지 걱정하고 있었다.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 내가 추하게 느껴졌다. 그렇게 질투와 자기 혐오 속에 호흡이 서서히 멈추었다. 이 고통에서 벗어난다는 생각에... 죽음이 반갑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 푹 쉬고 싶었다. 갑갑한 병실을 벗어나고 싶었다. 그래... 내가 좋아하는 우리집 소파에 앉아 쉬고 싶었다.

다시 정신이 들었을 때...
나는 거실 소파에 앉아있었다.
거실을 둘러보았다.
병원에 입원하기 위해 집을 떠날 때 모습 그대로였다.
현관문 도어락이 열리는 소리가 났다.
그리고 남편이 들어왔다.

남편은 무심한 표정으로 내가 죽었음을 알려주었다. 남편의 말에 나는 동요하지 않았다. 내가 죽었다는 말에 오히려 마음이 편안해졌다. 남편의 무심한 표정에 서운한 마음 역시 들지 않았다. 죽기 전 복잡했던 심정 역시 사라지고 없었다.

어느새 나는 남편과 함께 들판을 걷고 있었다. 어두운 들판에는 하얀 꽃이 끝없이 펼쳐져 있었다. 들판을 걸으며 남편은 말했다. 다음생 우리 다시 만나자고. 나를 반드시 찾아낼 것이라고.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생각했다.

이제 남편에게 사실을 알려야하지 않을까?
우리가 처음 만난 날… 남편이 기다리고 있던 사람은 내가 아니었다고.

잠시 고민했고, 말하지 않기로 했다.
질투심 때문이 아니었다.
사실을 알게 된다면 남편이 힘들어 할 것이다.
그동안 내가 힘들어했던 것처럼…

다음생에는 남편이 언니를 제대로 알아볼 것이다. 어쩌면 나의 장례식에서 서로를 알아볼지도 모른다. 나는 남편에게 말했다. 이제 나를 잊고 하루라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길 바란다고...

걷다보니 작은 문이 눈 앞에 나타났다.
아... 여기서부터는 나 혼자 가야하는구나…

남편을 보았다.
남편과의 마지막.
나답게 헤어지고 싶었다.
웃으며 말했다.

"혼자 밥먹으면서 궁상 떨고 있으면 귀신이 되어서 밥상 확 뒤집어 엎을테니까... 하루라도 빨리 좋은 사람 만나."

나의 말에 남편은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작은 문을 열었고,
문의 반대편으로 발을 내디뎠다.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나를 보고 있는 남편.
천천히 문이 닫혔다.

나는 작은 오솔길을 따라 걸었다. 길을 걸으며 남편과 함께 했던 시간을 곱씹었다. 남편과의 기억마저도 이제 마지막일 것이라는 느낌이 들었다. 아쉬웠다.

만약 하나의 기억만 간직할 수 있게 해준다면 어떤 기억을 골라야 할까? 아마도 신혼여행의 기억을 고를 것이다. 향신료 때문에 고생한 남편이 떠올랐다.

얼마나 걸었을까?
꽤 긴 시간을 걸은 것 같았다. 갈증으로 물이 마시고 싶었다. 조금만 쉬었다 가야겠다는 생각에 걸음을 멈추었다. 그때 흐릿하게 물 흐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조금 더 걷기로 했다. 물 소리는 점점 가까워졌다. 점점 심해지는 갈증에 걸음이 빨라졌다.

낮은 수풀이 우거진 좁은 길을 지나자 마침내 맑은 물이 흐르는 시냇물이 나타났다. 나는 시냇가에 쪼그리고 앉았다. 두 손을 모아 물을 한모금 들이켰다. 시원한 청량감이 온몸에 퍼져나갔다. 물을 한모금 더 마시려다 멈칫하고 말았다. 시냇물에서 고수풀 냄새가 은은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이 냄새… 이 고수풀 냄새... 무슨 사연이 있는 냄새인데… 뭐지?

기억이 날 듯 말 듯 답답했다.
한참이 지나서야 어럼풋이 기억이 나기 시작했다.

맞다... 남편이 싫어하는 향신료 냄새인데...
그런데... 어떻게 그걸 잊을 수 있지?
혹시 지금 먹은 시냇물 때문인가...?

갈증감이 다시 강렬해졌다. 하지만 더이상 시냇물을 마시지 않았다. 그리고 서서히 의식이 흐려졌다. 수풀 위에 누워 눈을 감았다. 흐려지는 의식을 붙잡고 애써 신혼여행의 기억을 떠올렸다.

스노쿨링을 하면 보았던 열대어들... 맑은 바다... 타이 음식......... 하하... 그래... 타이 음식...... 향신료 냄새........ 향신료 냄새...

그리고 의식이 끊겼다.

— 끝 —


[출처] 다른이의 꿈 | 오유
___________________


저승사자라니,
전생부터 이어진 인연이라니,
매번 다시 태어날 때마다 만난다니,
근데 어쩌면 그게 내가 아니라니.

실화는 아니고, 쓰니가 지어낸 이야기라지만
그래서 더 애틋하고 몽글몽글할 수 있는 것 같아.
다들 마음에 감성 한줌 지폈길 ㅎㅎ

비록 주말은 끝났지만
좋은 꿈 꾸고
내일부터 또 힘내자!

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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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뭉클해져요. 저승사자 남편. 남겨진 자의 슬픔도 느껴져요.
내가 아니라면 슬플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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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하.” 잠시 후 무속인은 얼굴에 웃음기를 지우고 말을 이었다. “죽었어야 할 사람이 살아있는 건 흔히 있는 일이 아니야. 자기도 뭔가 집히는 일 있을 것 같은데…” 커다란 사거리에서 버스가 멈춰 섰다. 창밖에 횡단보도를 건너기 위해 뛰어가는 사람이 보였다. 문득 오래전 기억이 떠올랐다. 대학 졸업을 앞둔 마지막 학기. 하루는 아침부터 몸이 으슬거리고 컨디션이 좋지 않았다. 겨울 옷을 담아둔 상자를 꺼내려니 오전 수업에 늦을 것 같았다. 급한대로 룸메이트 후배에게 얇은 겉옷을 빌려 입고 학교로 향했다. 그리고 그날은 수업이 끝나자 마자 자취방으로 돌아왔고, 씻지도 않고 침대에 몸을 뉘였다. 눈을 감았고, 미처 잠이 들기도 전에 가위에 눌린 듯 꿈을 꾸기 시작했다. 꿈 속에 나는 학교와 자취방 사이의 커다란 도로를 건너고 있었다. 조금 전 자취방으로 오는 길에 막 지나온 도로였다. 커다란 트럭이 나를 덮쳤다. 쿵! 하는 충격음이 온몸을 통해 들려왔다. 허공에 떠 날라가는 나의 몸뚱이가 보였다. 그리고 꿈에서 깨어났다. 내가 교통사고를 당했음을 기억해냈다. 침대 머리맡에 저승사자가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승사자는 내가 죽었음을 알려주었고, 나는 그를 따라가려 했다. 하지만 저승사자는 어떤 이유에서인지 나를 두고 홀로 사라졌다. 아마도 그때… 그 트럭이 나를 덮쳤을 때… 그때 내가 죽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 일이 있기 전 나는 어디에서든 주목 받는 사람이었다. 외향적인 성격도 아니었고, 말수가 많은 편도 아니었는데도 사람들이 나를 좋아라 했다. 남자들에게도 인기가 좋은 편이었다. 하지만 그 일 이후… 가까웠던 사람들과 특별한 이유 없이 멀어지게 되었다. 주변인들과의 인연이 끊어지는 느낌. 처음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았다. 하지만 두어달 시간이 지나고 나는 주변에 같이 밥먹을 사람 조차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졸업 후 들어간 직장에서는 사람들과 어울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내성적인 성격 탓인지 사람 사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점심시간이 되면 사무실에 혼자 남은 나를 발견하는 일이 흔했다. 설사 동료들과 함께 식사를 하더라도 나는 구석에서 조용히 밥을 먹었다. 회식 중에 한번은 일부러 가운데 자리에 앉은 적도 있었다. 나를 기준으로 양쪽 테이블에서 각각 이야기 꽃이 피었고, 나는 그 중간에서 어느쪽에도 끼지 못하고 혼자가 되어 있었다. 왕따나 따돌림이 아니었다. 누군가 나를 좋아하거나 챙겨주지도 않았지만, 나를 미워하거나 싫어하는 사람 역시 없었다. 나는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 되어 있었다. 대인관계가 힘들다는 나의 말에 그 무속인이 해준 이야기. 사람이 사고나 병에 걸려서 죽는 것 같지만 사실 그런 게 아니라고… 세상 사람들과 인연이 다하면 그때 죽음이 찾아오는 것이라 했다. 그동안 내가 사람들 때문에 겪은 힘든 일들이 조금은 설명이 되는 것 같았다. == 덤으로 사는 인생이니 착하게 살라는 말. 어릴 때부터 아이들을 좋아했던 나는 집 근처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시작했다. 적성에도 맞았고 보람도 있었다. 본격적으로 봉사활동을 하기로 했다. 보육원 장기 봉사를 위해서는 따로 교육을 받아야 했다. 각오는 하고 있었지만 쉬운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았다. 모든 아이들이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어려운 아이들이 몇몇 있었다. 상처로 마음의 문을 닫아버린 아이. 정에 굶주린 아이. 피해의식으로 공격적인 아이. 아이들과의 크고 작은 트러블을 겪는 봉사자들이 많았다. 실제 아이들과의 문제로 봉사활동을 그만두는 사람들도 없지 않았다. 존재감이 없었던 나.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아이들과 많은 시간을 함께 보냈지만 나는 아이들과 깊은 관계를 형성하지 못했다. 나에게 애착을 보이고 따르는 아이도 없었지만, 심술을 부리거나 나를 힘들게 하는 아이 역시 없었다. 비록 존재감은 없었지만 나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은 내 삶에 버팀목이 되어주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는 것보다 봉사활동을 통해 내가 받는 것이 더 크다고 느껴졌다. 겸손한 척 하느라 하는 상투적인 말이 아니라 사실이었다. == 10년이 지났다. 나는 같은 보육원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었고, 여전히 있는 듯 없는 듯 존재감이 없는 사람이었다. 한가지 신기한 점은 나 역시 다른 사람들에게 애착이 없었다는 것이다. 장애가 있거나 아픈 아이를 보면 안쓰러운 마음은 들었지만, 깊게 관여하거나 필요 이상의 도움을 주는 일은 하지 않았다. 보육원에서 일하는 10년 동안 나를 기억하고 찾아오는 아이 한명 없었지만, 나 역시 마음 속 오래 생각나고 보고 싶은 아이가 없었다. 그러던 어느날. 갓난쟁이 아기가 입소했다. 이름도 생일도 없었다. 생후 한달이 채 안돼 보이는 여자아이였다. 분유를 먹이고 트름을 시키기 위해 아기를 세워 안았다. 아기의 짧은 두 팔이 나의 목을 감았다. 분유 냄새가 섞인 아기의 땀 냄새가 느껴졌다. 순간 머리 속에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 은우. 은우는 대학 시절 무척 가깝게 지낸 동아리 후배였다. 내가 대학을 졸업하며 연락이 끊겼고, 작년 이맘때 은우에게서 연락을 받았다. 꼭 20년 만이었다. 한눈에 봐도 은우는 많이 아파보였다. 하지만 시원시원하고 밝은 성격은 그대로였다. 20년의 시간 때문이었을까? 대학 시절 3년을 한 자취방에서 동고동락했던 은우가 어렵게 느껴졌다. 마치 나를 꺼리는 듯한 느낌… 그때 은우는 도대체 나를 왜 만나자고 했을까? == 분유를 먹은 아기는 금세 잠이 들었다. 보육원에서 일하며 많은 아기를 봐왔지만 세상에 이런 순둥이가 없었다. 잠이 깼다고 또는 배가 고프다고 소리내 우는 법이 없었다. 처음에는 귀나 성대에 문제가 있지 않을까 걱정했는데, 의사 말로는 건강하다 했다. 아기가 잠든 사이 나는 은우에게 전화를 걸었다. 수신음과 함께 낯선 사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은우의 이름을 말했고, 잘못 걸었다는 대답과 함께 전화가 끊어졌다. 동아리 친구들에게 연락을 해서 은우의 소식을 물었고, 은우가 죽었다는 말을 들었다. 죽은지 벌써 일년이 되어간다 했다. 은우는 그때 작별 인사를 하려고 나를 만나자 했구나… 그래서 그때 은우의 눈빛이 많이 힘들게 느껴졌구나… 그때 따뜻하게 한번 안아주기라도 할 껄… == 하루는 보육원 원장님이 나를 찾았다. 원장님은 얼마전 입소한 아기를 내가 특별히 아낀다는 이야기를 들었다며 말문을 열었다. 아기의 건강 상태에 대한 이야기가 오갔고, 원장님은 아기의 출생신고를 해야 한다 말했다. 그리고 나에게 아기를 부르는 이름이 있는지 물었다. 없다는 나의 대답에 원장님은 예쁜 이름 하나 지어달라 부탁했다. == 1년이 흘렀다. 은우의 첫 생일날. 정확히 말하면 보육원에 입소하고 1년이 되던 날. 나는 직접 은우의 생일상과 돌잡이를 준비했다. 은우는 오늘이 자기 생일임을 아는 듯 방긋 웃으며 돈을 집었다. 짧은 생일 파티가 끝나고 원장님이 잠시 이야기를 하자며 나를 불렀다. 원장님은 나에게 은우를 입양하는 것에 대해 한번 생각해보라 했다. 은우의 입양 생각을 내가 그동안 안해봤을까… 아빠도 없이 내가 혼자서 키워야 하는데 은우에게 해줄 수 있는 게 많지 않다고 답했다. 원장님은 그래도 한번 더 생각해 보라며 이렇게 말했다. 엄마라는 선물을 받는데 세상에 다른 뭐가 더 필요하겠느냐고… == 은우를 호적에 올리고 신기한 일들이 생기기 시작했다. 먼저 이웃들이 나에게 아는 척을 하며 인사를 했고, 직장에서는 동료들이 사적인 일로 나에게 말을 걸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오랜 시간 연락이 없던 친척들에게 안부를 묻는 전화가 걸려왔다. 그렇게 나와 세상 사이의 끊어졌던 연결 고리들이 하나씩 다시 살아나기 시작했다. 퇴근 후 어린이집을 찾았다. 어린이집 선생님이 은우를 데리고 나오며 말했다. 은우처럼 어른스러운 아이는 처음 본다고. 은우 같은 아이들만 어린이집에 있으면 월급의 절반만 받아도 자기는 만족할 것이라고. 정말 그랬다. 입양을 결정하며 아이 키우는 일이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닐 것이라 예상했었다. 특히 나 혼자 아이를 키워야 한다는 생각에 걱정이 앞섰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막상 은우를 집에 데려오고 힘들다고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은우에게 애착이 깊어서가 아니라 정말 그랬다. 은우는 투정 한번 부리지 않았고 소리 내 우는 일이 역시 없었다. 말썽을 부리거나 사고를 치는 일도 없었다. 대소변 가리는 법도 혼자 터득해서 기저귀를 뗀 것도 이미 오래 전이었다. 말문이 틔이기 전에도 눈치가 좋아 사람들 말귀를 곧잘 알아들었다. 말 배우는 것 역시 빠른 편이였다. 3살이 되어서는 긴 문장을 이용한 대화가 가능한 정도였으니까. 하루는 은우를 데리고 집에서 조금 멀리까지 산책을 나왔다. 마실 음료를 사기 위해 마트에 들어갔고, 냉장고를 열어 물건을 고르는 사이 은우가 사라졌다. 마트 직원과 함께 가게 내부와 주변을 둘러보았지만 은우는 보이지 않았다. 혹시 혼자서 집에 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 걸어온 길을 되돌아 가며 은우를 찾았다. 하지만 은우는 보이지 않았다. 나는 은우의 이름을 부르며 은우가 사라졌던 마트로 되돌아왔다. 다시 마트로 들어가서 직원에게 은우를 봤는지 물었고, 직원은 미안하다며 고개를 저었다. 두손이 덜덜 떨려왔다. 힘을 주어 양손을 맞잡고 마트를 나왔다. 마트 바로 맞은편 경찰 지구대가 눈에 들어왔다. 아... 아까는 왜 파출소가 보이지 않았을까? 급히 파출소 문을 밀고 들어갔고, 한쪽 구석 의자에 웅크린 채 잠든 아이가 보였다. “은우야!” 경찰 말로는 은우가 혼자서 지구대를 찾아왔다고 했다. 문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열어보니 은우가 있었다고. 그리고 은우는 경찰에게 아빠를 찾아달라 말했다고 했다. 나는 물었다. “아빠요? 엄마를 찾은 게 아니고요?” 나의 물음에 경찰은 은우가 아빠라며 찾아달라던 남성의 이름과 주소를 보여주었다. 모르는 사람이었다. 혹시 누군가 은우에게 친부모에 대한 이야기를 해준 것이 아닐까? 어떻게 해야하지? 머리 속이 복잡해졌다. 경찰이 미안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이가 말을 워낙 잘해서…… 남편 분이 죽은 걸 아이가 아는 줄 알았어요…” 혼란스러웠다. 경찰에게 은우를 입양했다는 설명과 함께 방금 경찰이 한 말이 무슨 말인지 물었다. 경찰은 은우가 알려준 남성 이름과 주소로 조회를 했을 때 이미 사망한 사람으로 나왔다고 말했다. 그래서 경찰은 은우에게 아빠가 하늘나라에 있다 말을 했고, 그말을 들은 은우는 세상 무너진 듯 애처롭게 울다가 잠이 들었다고. 은우를 집으로 데려왔고, 나는 파출소에서의 일에 대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하지만 은우는 입을 다물었다. == 시간은 흘렀다. 은우를 키운 것은 나에게 큰 행복이었다. 학교에서 은우는 모범생이었다. 학교를 찾을 때면 선생님들은 침이 마르도록 딸아이를 칭찬했다. 공부는 말할 것도 없었고, 쾌활한 성격에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도 좋았다. 집에서도 더 바랄 것이 없는 딸이었다. 언제나 엄마부터 먼저 챙기는 효녀였고, 시간만 나면 함께 수다를 떠는 둘도 없는 친구였다. 은우가 있어 행복했다. 은우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의대에 진학했다. 의대 진학 후 2년 후. 본과에 들어가며 은우는 학교 근처에 자취방을 구했다. 은우가 독립해 집을 나가고 얼마 지나지 않아 몸이 급격하게 나빠지는 것이 느껴졌다. 알 수 있었다. 딸이 다 자랐고 이제는 내가 할 일이 끝났다는 것을… 딸이 결혼하는 모습을 보는 것이 마지막 바램이었는데… 딸과 함께한 지난 20년이 얼마나 행복했는지 알기에 더이상 욕심을 부리면 안될 것 같았다. 나는 주변을 정리하고 죽음을 준비했다. == 나의 마지막 순간. 나는 은우에게 낡은 옷을 건냈다. 은우는 옷을 펼쳐보고는 놀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엄마... 이 옷………. 이 옷은 왜…?” “잘 간직해.” 은우는 말이 없었다. “우리 딸 혹시 많이 아프거나 힘든 일 있으면 이 옷을 입어. 널 지켜줄꺼야.” 은우는 미소를 보이며 입을 열었다. “이 옷이 나를 어떻게 지켜줘…?” “이런 이야기 믿기지 않겠지만… 엄마 젊을 때 신기한 일이 있었어…” 나는 예전 교통사고에서 멀쩡하게 살아남았던 일을 딸에게 말해주었다. 말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분명 그 옷 때문에 저승사자가 나를 살려준 이야기. 그후 힘들었던 시간들. 무속인에게 들었던 이야기. 그리고 은우를 입양하고 삶이 바뀐 일까지 이야기 해주었다. 은우는 말없이 나의 이야기를 들었다. 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은우는 나의 품에 안겼다. “나로 인해 엄마가 행복했다니 정말 다행이야.” 나는 딸의 얼굴을 보듬었다. 그리고 눈을 감았다. 손끝에 딸아이의 눈물이 느껴졌다. 이제 정말 마지막이구나. 지난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스치기 시작했다. 오래전. 독감으로 고열에 시달리던 어린 은우. 해열제를 먹이기 위해 은우를 깨웠고, 약을 먹은 은우는 나를 위로하려는 듯 별로 안아프다며 방긋 웃어보였다. 그리고 대학 후배였던 은우의 얼굴이 떠올랐다. 다이어트를 하느라 살이 너무 빠졌다며 어색하게 웃던 은우. 딸아이의 목소리가 귓가에 전해졌다. “사랑해, 엄마. 우리 다음생에 다시 만나.” — 끝 —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출처] [단편] 덤으로 사는 인생 | 다른이의꿈★ ________________________ 은우는 다시 태어나서 룸메 언니를 만났구나. 언니와 - 은우 생각에는 - 어쩌면 언니의 운명이었을 수 있었던 남편을 이어 주려고 경찰서에 찾아 갔던 걸까, 아니면 그저 남편의 삶이 궁금했던 걸까. 세 사람의 인연은 어떤 모습인걸까. 그건 바로 내일 ㅋㅋ 알려 줄게! 이 이야기는 내일 마무리 될거야 ㅎㅎ 남은 하루 마무리 잘 하고 내일 또 보쟈! P.S. 근데 요즘 다들 왜 이렇게 댓글이 박하냐 ㅠㅠ
퍼오는 귀신썰) 다른 이의 꿈 3화
오늘은 밤에 바쁠 것 같아서 낮에 왔어 ㅎㅎ 하늘도 예쁘고, 예쁜 하늘 만큼 포근한 이야기니까! 모두의 마음에 감성 한 스푼 얹어지는 이야기였음 좋겠다 다른이의 꿈 이야기는 오늘로 마무리 될거야 같이 이야기 속으로 빠져볼까아? _______________________ 시간과 함께 기억은 흐려진다. 아무리 강렬한 기억이라도 결국은 잊혀지기 마련. 나의 기억들 역시 마찬가지다. 오랜 기억들은 시간의 흐름과 함께 변색되고 엷어진다. 하지만 신기하게도 머리가 아닌 코 끝에 새겨진 기억은 시간을 거슬러 생생하게 남아있다. 첫번째 삶. 정확히는 내가 기억하는 첫번째 삶. 참혹했던 전쟁의 기억은 더이상 나에게 아픔이 아니다. 하지만 흙웅덩이에 고인 핏물이 진흙과 섞여 썩는 냄새… 그 비릿한 냄새가 코 끝에서 느껴지면 몸과 마음의 모든 기능이 멈춰버리는 것 같았다. == “하하, 웃어서 미안. 그런데 자기 정말 고수풀 냄새 때문에 물 한모금 마시지 못한거야?” 그녀는 식당에서 창백해진 나의 얼굴을 보고 많이 걱정을 했다며 웃음을 터뜨렸다. 그녀는 잠시 생각하더니 고수 향을 이겨내는 강력한 냄새가 하나 있다 말했다. 그리고는 캐리어 가방 안쪽에서 컵라면을 꺼내들었다. 나는 말했다. “호텔인데 옆방까지 냄새 풍기지 않을까? 창문도 열 수 없게 되어있던데…” 그녀는 찡긋 웃으며 말했다. “신혼여행 온 새신랑이 배가 고파서 해야할 중요한 일을 못하면 안되잖아.” 우리는 사랑을 나누었고, 잠시 후 그녀는 나의 옆에 누워 잠이 들었다. 잠이 든 그녀는 몸을 뒤척이다 나를 향해 돌아 누웠다.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그녀의 체취. 시간의 흐름을 거슬러 나의 코에 각인된 또 하나의 냄새였다. 태국의 여름은 무척 덥고 습했다. 신혼여행 내내 그녀의 체취는 나의 코를 강렬하게 자극했다. 신혼여행 매순간순간 황홀한 느낌이 멈추지 않았다. == 그녀와의 첫만남은 교통사고였다. 망자의 혼은 자신이 사는 작은 원룸으로 돌아와 있었다. 망자는 자신이 교통사고로 죽었음을 인지하지 못했다. 망자에게 교통사고에 대해 설명하던 중 흐릿하게 느껴지던 향기.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녀였다. 새로운 몸을 받아 태어나고 그동안 애타게 찾아헤맨 그녀였다. 그때 나는 온전히 생각할 수가 없었다. 그녀를 살려낸 후에야 실수였음을 깨달았다. 죽었어야 하는 자의 삶은 녹록치 않기 때문이다. 나의 욕심으로 힘든 삶을 살아야 할 그녀에게 미안했다. 하지만 되살아난 그녀를 직접 봤을 때 미안한 마음은 사라졌다. 온 세상이 그녀의 체취로 가득한 것 같았다. 그녀와의 첫 대화. 그녀는 자신에게 무슨 냄새가 나는지 나에게 물었고, 나는 말했다. 오랜 시간 냄새를 느끼지 못했는데, 이제서야 코가 뻥하고 뚤려 냄새가 느껴진다고… == 이미 한번의 죽음을 되돌린 탓인지 그녀의 삶은 길지 않았다. 그녀는 10년 남짓 나와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세상을 떠났다. 그녀의 장례식…… 그리고 사십구제. 그녀가 없는 세상의 시간은 더디게 흘렀다. 그렇게 나는 그녀의 사십구제가 끝나길 기다렸다. 사실 그때까지 기다릴 필요는 없었다. 염습에서 시작하는 모든 장례 의식은 사실 죽은 자를 위함이 아니다. 남겨진 산 사람들을 위한 것이다. 49일, 그 길지 않았던 시간의 흐름이 격했던 나의 감정을 누그러뜨렸다. 그녀와의 기억을 정리할 수 있었다. 그녀의 미소. 그녀의 목소리. 그녀를 품에 안으면 느껴지는 포근함. 그녀의 손길. 그리고 그녀의 체취까지… 그렇게 그녀와의 기억을 곱씹었다. 이번삶 그녀는 무척 밝았었다. 이전의 삶에서 느껴졌던 어두운 그림자가 느껴지지 않았다. 어쩌면 이렇게 밝은 모습이 그녀의 진짜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전의 삶에서 단짝 친구의 죽음이 그녀에게 그렇게 깊은 상처를 남겼던 것일까? 다음생의 그녀는 어떤 모습일까? 이런 생각을 하는 사이… 죽음이 나를 찾아왔다. 그녀는 나의 이 세상 전부였고, 그녀의 죽음은 나와 세상과의 인연이 다했음을 의미했다. == 새로운 삶이 시작되고, 나는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필사적으로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체취만으로 그녀를 찾는 일은 늘 그렇듯 쉽지 않았다. 그렇게 시간은 하염없이 흘러갔다. == 망자는 60대 초반의 여성이었다. 망자는 나를 보고 말했다. “드디어 오셨군요.” 가끔 저승사자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저를 기다리신 건가요?” 망자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망자는 떠나기 전에 딸아이를 한번 보고싶다 말했다. 망자의 딸이 있는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 나는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여인의 향기를… 지난 삶은 그녀 자신의 죽음… 그리고 이번 삶은 그녀 어머니의 죽음이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전의 삶들과 달랐다. 그녀의 단짝 친구에게 무슨 일이 생긴 걸까? 그녀 머리에 꽂혀있는 검정 리본이 눈에 들어왔다. 그녀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바람에 실린 그녀의 체취가 느껴졌다. 숨을 크게 들이쉬는 사이 그녀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게 잠깐의 시간 동안 우리는 서로를 바라보고 있었다. 먼저 입을 연 사람은 그녀였다. “이제 코가 뚫려서 냄새를 맡을 수 있게 되었나요?” 무표정 했던 나의 얼굴에 미소가 번졌다. “나를 어떻게 알아봤나요?” 그녀는 여전히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요. 그냥…… 당신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아…” 그녀의 손을 잡으려 하는 순간. 그녀는 손을 움츠렸다. 다른 모습의 내가 어색해서 그런 것이라 생각했다. 시간이 필요할 것이다. 서두르지 않기로 했다. 하루는 한가지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다며 그녀가 입을 열었다. “지난삶… 우리가 처음 만났을 때… 그때… 그쪽이 교통사고로 죽은 나를 살려준 것으로 알고 있잖아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그때 그게... 내가 아니고… 나와 같은 자취방을 쓰던 언니였어요.” 그녀의 말에 여러 생각들이 머리를 스쳤다. 나는 물었다. “그런데… 그 이야기를 나에게 왜 해주는 건가요?” 나의 물음에 그녀는 한참이 지나서야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게… 혹시…… 그쪽이 찾는 사람이 내가 아니고… 그 언니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어서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어쩌면 그때 내가 실수를 했는지 모르지만, 내가 찾는 사람은 당신이 분명해요. 지금도 이렇게 느껴지는걸요.” 그러면 됐다고 말하는 그녀의 입가에 미소가 느껴졌다. 나의 왼손에 그녀의 손길이 느껴졌다. 그녀의 길고 부드러운 손가락들이 나의 손가락들 사이로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작은 얼굴이 나의 어깨 위에 자리를 잡았다. 그녀의 진한 체취가 느껴졌다. 지금 이 순간을 온전히 느끼고 싶었다. 머리속 그녀가 말한 그녀의 선배 언니에 대한 생각을 애써 지워냈다. == 의대생인 그녀는 무척 바빴다. 한가지 다행인 점은 내가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다는 사실이었다. 그래서 틈틈이 그녀와 시간을 함께 보낼 수 있었다. 그렇게 그녀와 만날 때면 그녀는 종종 나의 어깨에 기대 부족한 잠을 자곤 했다. 하루는 그녀에게 물었다. 왜 의사가 되고 싶어하는지. 그녀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툭 던지듯 대답했다. “수능 점수가 잘나와서 의대 말고는 갈 곳이 없었어.” 나의 심각한 표정에 그녀는 멋적은 듯 웃으며 말했다. “왜 그렇게 심각해? 내가 너무 잘난체 하는 것 같잖아.” “하하. 아니야. 이렇게 힘들게 공부하는데 특별한 이유가 있을 것 같아서.” “글쎄… 정확하게 표현하기는 힘든데, 소중한 사람이 다치거나 아프면 내가 직접 치료해주고 싶어서 의대에 왔다고 하면 믿으려나?” “에이— 그런 이유로 의사가 되는 사람이 어디있어?” “그치? 흠— 나도 솔직히 잘 모르겠어. 왜 의대에 왔는지…” 나는 짐작할 수 있었다. 그녀가 치료해주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구인지. 그녀는 은우로 살았던 지난 삶과 지금의 삶만 기억한다 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무의식 속에 그 이전의 삶까지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그녀가 기억하지 못하는 삶들. 그곳의 그녀에게는 늘 그녀의 단짝 친구가 있었다. 나는 그녀의 단짝 친구를 만난 적은 없다. 정확히 말하면 살아있는 그 사람을 만난 적이 없다. 하지만 한가지 확실한 것은 그 친구가 그녀에게는 그녀의 가족보다 더 소중한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가족이 죽었을 때 그녀는 그렇게 긴 시간 슬퍼하지 않았으니까. 이번삶. 그녀에게는 그 단짝 친구가 없었다. 처음에는 나 역시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편으로는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와 처음 손을 잡은 날. 교통사고로 죽었던 그녀의 선배를 내가 살려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번삶 그녀에게 그 단짝 친구가 없다는 사실은 그녀의 선배가 아직 살아있을 수 있음을 의미했다. 40년 전 일이었다. 나의 실수로 인해 그녀의 친구가 그 긴 시간 힘든 삶을 살고 있다는 생각에 마음이 좋지 않았다. == “은우야?” 그녀는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맞추었다.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그녀는 대답 대신 눈을 가늘게 뜨고 나를 바라봤다. 나를 탐색하는 듯한 그녀의 눈빛. 얼굴은 전혀 다른 사람이 되었지만 그 눈빛은 지난 삶의 그녀와 똑같았다. 피식 웃음이 나왔다. 그녀는 여전히 가늘게 뜬 눈으로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너 지금 나한테 심각한 이야기 하려고 했지? 넌 긴장하면 얼굴에 다 보여. 그건 어쩜 예나 지금이나 똑같니?” “하하. 그런가?” 그녀는 두손으로 나의 얼굴을 감싸며 말했다. “흠… 그래도 인물은 옛날이 더 좋았는데…” “하하하. 그래? 음… 못생겨져서 미안해.” “뭐, 미안할 것까지야. 그래도 내 눈에는 반짝반짝 예쁘게 보이니까 걱정하진 마.” 아주 오랜 옛날부터 그녀는 나에게 말하곤 했다. 나의 얼굴에서 빛이 나는 것 같다고. 내가 후각으로 그녀를 알아내는 반면 그녀는 아마도 시각으로 나를 알아보는 것 같았다. 그래서 그녀는 나의 미세한 표정의 변화까지 읽어낼 수 있는 듯 했다. 그녀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무슨 이야기를 하려고 했는데?” “하하. 별거 아니야.” “뭔데? 궁금하게… 나 곧 죽는 거야?” 나는 정색을 하고 말했다. “그게 무슨 말이야? 그런 거 아니야.” “알았어. 미안. 그런데 정말 뭔데?” “진짜 별거 아니고, 네 이름 있잖아….” “아… 그치? 신기하지? 하하.” 은우. 흔치 않은 이름인데 그녀는 지난삶과 같은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 “내 이름... 우리 엄마가 지어줬어. 그런데 우리 엄마 있잖아…… 전생에 네가 착각해서 살려준 선배 언니가 바로 우리 엄마야.” 그녀의 말에 나는 짧은 탄식을 내뱉었다. 목 뒷덜미의 머리털이 곤두서는 느낌이 들었다. 이미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지만 부정하고 있었던 사실. 그녀 단짝 친구가 죽어야 그녀와 내가 만날 수 있다. 나는 눈을 감았다. == 길지 않은 시간이 흐르고 그녀와 나는 작은 살림을 합쳐 동거 생활을 시작했다. 외과 수련의 과정을 시작한 그녀는 무척 바빴다. 사람이 이렇게 바쁠 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바빴다. 병원에서 쪽잠을 자는 일이 흔했다. 늦은 밤 집에 들어와서 자고 이튿날 새벽에 나가는 날은 그나마 여유가 있는 날이었다. 하루는 이른 저녁 그녀가 집으로 왔다. 그녀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나는 알고 있었다. 불과 몇시간 전. 그녀가 일하는 응급실에서 나는 작은 영혼을 거두어야 했었다. 그날밤. 그녀가 잠든 나를 깨웠다. 그리고 퉁퉁 부운 눈으로 나를 바라보고 물었다. 꿈에 작은 소녀가 죽는 모습이 자꾸 보인다고… 혹시 은화가 누구인지 아느냐고…. 그녀는 지난삶 이전의 삶들은 기억하지 못한다 했지만, 아마도 몇몇 강렬했던 기억들은 무의식을 통해 느끼고 있는 듯 했다. == 지난생 바로 이전의 삶. 그녀의 가장 슬펐던 삶. 내가 그녀를 처음 본 날은 보름달이 밝은 밤이었다. 그때 우리의 첫만남은 무척 빨랐다. 그녀와 나의 나이 겨우 아홉 그리고 여덟이었으니까. 내가 그녀를 찾아냈던 그 때… 그녀가 잃은 단짝 친구가 바로 은화였다. 우연히 일어난 사고였고, 그녀는 자신의 단짝 친구가 죽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그 이전의 삶에서도 단짝 친구의 죽음은 그녀에게 항상 큰 슬픔이었다. 하지만 그때 은화의 죽음은 어렸던 그녀가 감당해내기 힘든 충격이었다. 은화의 죽음 후 그녀는 한동안 말을 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실어증 증상은 조금씩 나아졌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그녀는 말 하는 것이 온전치 못했다. 혼례를 올리고 그녀와 함께 사는 동안… 한달에 한번 그녀는 뒷마당에 깨끗한 물한잔을 떠놓고 기도를 올렸다. 보름달이 하늘 높이 오르면 그녀는 단정한 옷차림으로 뒷마당으로 나갔고, 달이 서쪽 언덕 아래로 떨어지고 나서야 그녀의 기도가 끝났다. 차라리 추운 겨울이 나았다. 장마가 시작하는 초여름부터 늦가을까지… 기도를 마친 그녀의 얼굴과 손등은 온통 모기와 벌레에 물려 퉁퉁 부어있었다. 한번은 내가 물었다. 무얼 그리 애타게 빌고 기도하느냐고. 나의 물음에 그녀는 더듬거리는 어눌한 말투로 답했다. 은화가 다음생에 태어나면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게 해달라고 기도한다고. == 끅끅거리며 울음을 삼키는 그녀를 달래며 나는 생각했다. 어디까지 알려줘야 하는지… 잠시 고민을 했고, 그녀에게 은화의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하지만 은화의 죽음을 통해 내가 그녀를 찾았다는 말은 하지 않았다. 나의 이야기가 끝나고 그녀는 물었다. 내가 은화를 만난 적이 있는지. 은화의 혼을 인도하는 길… 자기보다 어린 아이가 저승사자일 줄을 몰랐다며 재잘거리던 은화가 머리 속에 떠올랐다. 은우와 나는 눈이 마주쳤고, 나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여전히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았고, 나는 그녀의 시선을 피했다. == 어느 늦은밤. 그녀는 응급실 당직 근무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와 침대에 몸을 뉘었다. 그때 먼저 자고 있던 나는 잠이 확 달아났다. 눈을 비비며 그녀에게 물었다. “오늘 태국 음식 먹었구나.” “응…… 미안……. 씻고 누우려고 했는데, 너무 피곤해서… 미안해…” “아니야, 괜찮아. 어서 자.” 나는 다시 잠을 청했고, 잠시후 그녀의 잠꼬대 같은 말이 들려왔다. “그런데…… 자기는…… 안 궁금해?” “응? 뭐가?” “있잖아… 내가 어떻게… 전생을 기억하게 됐는지……?” “그때 은우 네가 똑똑해져서 다 기억하는 거라 말하지 않았나?” 그녀는 웃음을 터뜨렸고, 나 때문에 잠이 다 달아났다며 나를 나무랐다. 그리고 그녀는 저승과 이승 사이를 흐르는 맑은 물을 아는지 물었다. 나는 안다 말했고, 그녀는 그 고수풀 향기 진한 시냇물이 전생의 기억을 지우는 것 같다 말해주었다. == 시간은 흘렀다. 은우 어머니의 다섯번째 기일. 우리는 그녀 어머니가 모셔져 있는 안식원을 찾았다. 은우는 유리 건너편 그녀 어머니의 사진을 한참동안 바라보았다. “엄마는 어쩌면 알고 있었던 것 같아.” 나는 물었다. “뭐를…?” 그녀는 여전히 사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내가 전생에 동아리 후배였다는 걸…… 내 이름이 흔한 이름은 아니잖아.” “너를 직접 알아본 것은 아닐 꺼고… 아마도 느낌으로 아시지 않았을까?”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안식원에서 서울로 돌아오는 길. 고속버스 창밖을 바라보던 그녀가 입을 열었다. “우리 벌써 5년이야. 시간 참 빠르다.” 그녀는 나와 눈을 맞추고 미소를 지어 보였다. 그녀는 다시 유리창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잠시후 그녀는 무언가 생각난 듯 다시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자기… 혹시……… 우리 만난 거……” 나는 마치 나쁜짓을 하다 걸린 아이처럼 심장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그녀는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고, 불안해진 내가 결국 입을 열었다. “맞아……… 너희 어머니 돌아가셨을 때가… 그때야… 너를 처음 찾았을 때가……” 그때 그녀는 별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았다. 
안식원을 다녀오고, 일주일 동안 그녀는 집에 오지 않았다. 그녀가 병원 연구실 간이 침대에서 자는 일은 흔했지만, 느낌이 좋지 않았다. 일주일이 지나고, 그녀는 빨래감을 한아름 안아들고 집으로 들어왔다. 샤워를 하고 나온 그녀는 저녁도 먹지않고 그대로 침대에 누워 잠이 들었다. 세탁기를 돌리고, 빨래를 건조대에 널어놓고, 침실에 들어갔다. 그리고 그녀가 깨지 않게 조심스럽게 침대에 누웠다. 다음날. 우리는 오랜만에 아침을 같이 먹었다. 식사를 마친 그녀는 묻고 싶은 것이 있다 말했다. 그녀는 긴장한 표정으로 나에게 물었다. 그녀의 어머니, 그러니까 지난삶 그녀의 선배 언니가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 우리가 처음 만난 것이 맞느냐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혹시 은화가 죽었을 때… 그때도 우리가 처음 만났던 거고?” “……………맞아…” 그녀의 표정이 굳어졌다. 우리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침묵을 깬 것은 나였다. “그 이전 삶에서도 마찬가지였어… 네가 아끼는 친구가 죽으면… 그때 나는 너를 찾아내. 그 전 삶에서도 그랬고… 또 그 이전 삶에서도…… 내가 네 친구의 혼을 거두러 가면……. 그곳에 네가 있어.” 그녀는 두손에 얼굴을 묻었다. 다시 일주일이 지나고, 그녀는 나에게 이별을 고했다. 그녀와 내가 만나기 위해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이 죽는다는 사실이 마음 아프다 했다. 나는 그녀를 이해한다 말했다. 그리고 긴 시간 그 사실을 숨겨 미안하다 말했다. 그녀의 두손이 나의 얼굴을 감쌌다. 그리고 그녀는 무언가 말했지만, 그녀의 흐느끼는 소리에 묻혀 제대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아마도 그때 그녀는 나에게 왜 저승사자가 되었느냐고 말했던 것 같다. == 내가 다시 그녀를 만난 것은 오랜 시간이 지나서였다. 육신은 죽은 영혼이었지만, 나는 그녀를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영혼을 저승의 문으로 인도하는 길. 나를 알아본 그녀가 물었다. “그동안 잘 지냈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시간이 느리게 느껴지긴 했지만 그렇게 나쁘지는 않았답니다.” 그렇게 조금은 무덤덤하게 서로의 안부를 물은 후, 나는 늘 마음에 걸렸던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예전에 우리가 함께였을 때… 당신에게 거짓말을 했어요.” “………뭔지 알 것 같아요. 그게 당신이 나에게 했던 유일한 거짓말이였으니까…” “알고 있었군요…" 그리고 나는 오래전 은화의 영혼과 나눈 이야기를 그녀에게 해주었다. == 저승사자라는 나의 말에 그 작은 영혼은 말했다. "너처럼 작은 아이도 저승사자가 될 수 있는 거야? 저승사자는 커다란 칼을 차고 다니는 줄 알았는데…” 그 작은 영혼은 자신의 죽음보다 저승사자의 모습에 더 큰 관심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은이, 이 가시나가 해준 이야기 순 거짓말이였네. 내가 처음부터 믿지 않은 게 다행이다. 헤헤.” 궁금한 마음에 나는 물었다. “그 은이라는 아이가 저승사자에 대해 알고 있어?” “응, 은이는 손금이 일자 손금이거든. 은이 말로는 자기처럼 일자 손금인 사람은 저승사자도 이기는 대단한 사람이라고 얼마나 자랑을 했다고.” “일자 손금?” “응, 일자 손금인 사람들은 전생에 저승사자가 휘두른 칼을 두손으로 잡아서 막은 사람들이라는 거야. 그렇게 칼을 막느라 손에 손금이 일자로 깊게 패인 거라고. 그런데… 이거 거짓말 맞지?”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은화의 영혼은 떠나기 전 자신에게 거짓말을 한 은이를 한번 보고 가면 안되느냐 부탁했고, 괜찮다는 나의 대답에 은화의 영혼은 이내 은이가 있는 곳으로 나를 안내했다. == “그 은이라는 아이가 혹시 제가 맞나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은화는 마지막으로 은이를 보고 뭐라 하던가요?” “자신이 발을 헛디딘 탓이지. 은이, 네  잘못이 아니라 했답니다.” 그녀는 말이 없었다. 우리는 말없이 걸었다. 하얀 꽃이 흐드러지게 핀 벌판을 그렇게 걸었다. 그녀와 나란히 걸으며 그녀의 향기가 느껴졌다. 코 끝에서 그녀의 향기가 느껴질 때마다 오래전 그녀와의 행복했던 시간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우리는 작은 문앞에 도착했고, 그녀가 나를 보고 있는 것이 느껴졌다. 그녀와의 마지막. 그녀의 목소리가 들렸다. “아까… 나 없이 살아온 지난 시간이… 그리 나쁘지 않았다고 해서 솔직히 많이 서운했어요… 혹시 거짓말이라면 당신 거짓말 하는 게 많이 늘은 것 같아.” “그건……… 나쁘지 않았다는 말이지… 아프지 않은 것은 아니였어요.” 한참이 지나 그녀의 목소리가 다시 들려왔다. “그랬다면 다행이야… 정말 다행이야.” 그리고 그녀의 영혼은 그 작은 문 뒤 편으로 사라졌다. == 지난 여느 삶과 같았다. 그녀가 죽고 얼마 지나지 않아 죽음이 나를 찾아왔다. 나의 혼을 거두어 준 또다른 저승사자와 함께 들판을 걸었다. 우리가 작은 문에 도착했을 때, 나는 그에게 말했다. 이제 저승사자 일을 그만두기로 했다고… 그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문을 지나 익숙한 오솔길을 홀로 걸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물 흐르는 소리와 함께 시냇물이 나왔고, 나는 물가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맑고 투명한 물에서는 진한 고수향이 올라오고 있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았고, 몸을 낮춰 얼굴을 시냇물에 넣어 물을 마시기 시작했다. 상쾌한 기운이 온몸에 퍼지며 기분이 좋아졌다. 문득 궁금해졌다. 방금 전… 왜 그렇게 가슴이 찢기는 듯 아팠던 걸까? —끝— [출처] 저승사자가 되지 말 껄 그랬어 | 다른이의꿈★ _________________________ 소중한 사람이 죽어야 만날 수 있는 인연이라니. 누구에게도 잘못이 없는 걸 알면서도 이을 수는 없었겠지, 나도 한 편으로는 이해가 가면서도 또 안타까운 마음은 어쩔 수가 없네. 여러분이었다면 어땠을 것 같아? 굳이 인연을 끊고 싶지는 않았을 것 같은데 그냥 뭐랄까 나도 결국엔 고수향이 나는 시냇물을 마셨을 것 같아 매번 그렇게 마셨을 것 같아 이걸 보고 있는 너넨 어땠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