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캐논 디자인을 바꾼 루이지 콜라니 떠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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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일본 카메라 메이커 캐논 T90 디자인을 탄생시킨 독일 산업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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뭔가 부족했다. 1980년대 중반 일본 카메라 메이커 캐논의 T시리즈가 그랬다. 당시 T80은 미놀타α7000에 완패하면서 한심한 상황이 이어지고 있었다. 뭔가 획기적인 제품이 필요했다.


그런 절체절명의 순간에 등장한 것이 전문가용 수동카메라 T90이었다. 종전까지 캐논 카메라 디자인은 사내 작업을 통해 이뤄졌다. 하지만 1986년 탄생한 T90은 그렇지 않았다.


당시 캐논은 외부 인력으로는 처음으로 독일 산업디자이너 루이지 콜라니(Luigi Colani)와 콜라보를 했다. 콜라니의 독특한 곡선형 디자인을 제품에 접목시킨 것이다.


콜라니는 카메라 손잡이 부분을 둥글게 처리해 사용성과 기능의 조작성을 높였다. 이는 불룩한 손잡이가 달린 카메라의 원조가 되었다. T90은 견고하기도 했다. 사진기자들은 이런 T90을 ‘탱크’라고 불렀다.


이렇게 캐논의 디자인을 바꾼 남자 루이지 콜라니가 16일(현지시각) 향년 91세로 별세했다. 심한 질병 이외에는 자세한 사인은 알려지지 않았다.


콜라니는 평소 자연을 닮은 곡선을 즐겨 사용했다. 이런 콜라니의 방식을 ‘바이오디자인’이라고 부른다. 뾰족한 모서리를 싫어했던 콜라니는 “나의 디자인 세계는 둥글다”(My world is round)고 강조해 왔다. 그런 그는 2017년 12월 한국 동대문디자인플라자(DDP)에서 전시회 겸 간담회도 가졌다.


간담회 도중 돌연 자신을 촬영하던 사진기자를 불러 캐논 카메라를 뺏어들고는 “이게 콜라니 스타일”이라고 외치기도 했다.


자동차 디자이너로 경력을 시작한 콜라니는 산업 디자인으로 영역을 넓혔다. 지금까지 자동차, 항공기, 가구, 주방기구, 의류, 안경 등 4000여 점의 작품을 스케치로 남겼다. 콜라니는 생전 “자신의 서랍에 있던 작품 70%가 사라졌다”고 말하기도 했다.


콜라니의 별세를 전한 매체들은 캐논 디자인에 공헌한 점을 높이 평가했다. 독일 통신사 dpa는 “콜라니가 디자인한 캐논 T90 카메라는 가장 큰 성공 중 하나이며 일본 브랜드 디자인에 큰 영향을 미쳤다”(Colani’s design of the Canon T90 camera was one of his biggest successes and strongly influenced the Japanese brand’s designs)고 보도했다.


사진전문 매체 코스모포토는 SLR의 형태를 바꾼 디자이너(designer who changed the shape of the SLR)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1986년 나온 그의 Canon SLR 제품은 카메라 디자인 역사에서 가장 혁신적인 것 중 하나”라고 했다.


이 매체는 “T90의 매끈한 프레임은 다른 캐논 SLR과 EOS 디지털카메라에 영향을 미쳤다”며 “오늘날에도 여전히 팔리고 있다”고 덧붙였다. <에디터 이재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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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 가문은 도요다...회사는 도요타
... <사진= 작은 사진은 도요타의 실질적 창업자인 도요타 기이치로.> ... 도요타(TOYOTA)자동차도 혼다차와 마찬가지로 창업주의 이름을 회사명으로 쓰고 있다. 하지만 도요타차는 사정이 좀 다르다. 창업 초기, 브랜드명이 도요타(TOYOTA:トヨタ)가 아닌 도요다(TOYODA:トヨダ)였다는 걸 알고 있는가? 창업 가문의 성(豊田)은 도요다(トヨダ, とよだ)라고 읽는다. 창업의 토대를 마련한 도요다 사키치(豊田佐吉:とよだ さきち)와 실질적 창업주인 그의 아들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とよだ きいちろう)가 그렇다. 그래서 처음에는 창업 가문의 성을 따서 도요다(トヨダ)라고 했다. 영문명도 TOYODA가 됐다. 창업 당시인 1935년 7월 TOYODA로 상표등록을 했다. 1년 뒤인 1936년 도요타 최초의 양산형 승용차 AA형엔 알파벳 TOYODA 엠블럼이 장착됐다. 하지만 미국 수출을 생각해 보니 그게 아니었다. TOYODA 발음이 문제였다. 창업자 도요다 기이치로는 외국인이 영어 회사명을 발음하기 어렵다고 해서 TOYOTA(トヨタ)로 바꾸도록 지시했다.(아사히신문 특별 취재반 저 ‘도요타시 1번지’) 도요다에서 도요타로 바꾼 이유 도요타 사사(社史)에 따르면, TOYODA(トヨダ)에서 TOYOTA(トヨタ)로 바꾼 다른 이유 3가지가 더 있다. ①‘상업,미술적으로 봐서 촉음을 붙이지 않는 것이 상쾌하고, 말의 음색(소리의 울림)도 좋다(商業美術的に見て、濁点を付けないほうが、さわやかであり、言葉の調子(音の響き)も良い)는 것이다. 또 ②일본어 도요타(トヨタ)의 획수가 8이라 재수가 좋다.(画数が8で縁起が良い)는 점도 작용했다. 끝으로 ③도요다라는 (가문의) 이름에서 멀어지게 돼, 개인 기업에서 사회 존재로의 발전적 의미를 담고 있다.(トヨダ<豊田>という人名から離れることにより、個人的企業から社会的存在への発展の意味を含める)고 한다. 그렇게 자동차는 도요타(トヨタ)가 정식명칭이 됐다. 그럼, 도요타가 진출해 있는 도시 풍전시(豊田市)는 도요타라고 읽을까, 아니면 도요다라고 읽을까. 도요타(トヨタ)로 읽는다. 고로모시가 도요타시로 ‘상전벽해 ’ 도요타차가 훗날 도요타시가 되는 고로모쵸(擧母町, 이후 고로모시)에 공장을 짓고 진출한 것은 1938년이다. 이 지역은 원래 양잠업이 번성했다. 1959년 1월, 고로모시 당국은 도요타차의 회사명을 그대로 시 이름으로 삼았고 도요타 본사의 소재지에 ‘도요타시 도요타쵸 1번지’라는 행정상의 선물까지 안겨줬다. 물론 ‘고로모’라는 이름을 지키자는 의견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도요타차의 본거지인 도요타시는 이후 인구가 종전보다 3배 가량 늘어나는 등 크게 발전했다. 양잠업을 하던 그 시골 동네는 이름 그대로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된 것이다. . 도요타차의 뿌리는 자동직기를 만드는 등 ‘발명왕’이라 불린 도요다 사키치(1867~1930)에서 출발한다. 자동직기에서 자동차로 사업 영역을 바꾼 것은 장남인 도요다 기이치로(1894~1952)였다. 도요다 사키치~도요다 아키오로 이어져 기이치로는 1929년 아버지와 개발한 자동직기 특허를 당시 세계 최대였던 영국 직기회사에 10만 파운드(당시의 100만엔)에 팔았다. 이를 자본으로 1933년 도요타자동직기제작소 내에 ‘자동차부’가 만들어졌다. 도요타차의 탄생이다. 회사는 1937년 8월, 현재의 이름인 ‘도요타자동차주식회사’가 되었다. 창업 가문은 도요다 사키치(豊田佐吉), 도요다 기이치로(豊田喜一郞), 도요다 쇼이치로(豊田章一郞)를 거쳐 현 회장 겸 사장인 도요다 아키오(豊田章男)로 이어진다. 참고로 도요타의 주력 차종 렉서스(LEXUS)는 독일어 LUXUS(사치, 일류를 뜻함)에서 만든 조어다. LEXUS는 6개 후보작(차종명) 중에서 2위에 올랐다. 하지만 고급스러움이 느껴지고, L과 X가 들어간 5문자는 발음하기 좋으며, 기억하기 쉽다는 이유로 최종적으로 선택됐다. 1986년 10월의 일이다. (하세가와 요조 저 '렉서스, 도요타의 도전')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4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소소한 탐구생활] 파노라마로 세상 믓찐 사진을 찍는 법!
어느 폰에나 있는 파노라마 기능! 있는것도 까먹고 잘 안쓰지만 파노라마를 이용하면 아주 재밌는 사진을 찍을 수 있다는 사실!!! 저도 제폰에 파노라마 기능이 있다는 사실조차 까먹곤 하는데여 ㅋㅋㅋㅋ 지난번에 미술관에 가서 작품을 배경으로 재밌는 파노라마를 찍는 사람들을 보고 아 저렇게도 찍을 수 있찌! 새삼 깨달았달까여? ㅋㅋㅋ 어떻게 그 기능을 활용한 사진을 찍을 수 있을까 하다가 파노라마 형식으로 사진을 찍는 'David Hilliard' 라는 작가의 작품을 찾아봤어여 파노라마를 활용해서 어떤 재밌는 사진을 찍으면 좋을까 소소하게 탐구해봤습니다 같은 인물이 움직여가면서 마치 세 쌍둥이처럼 찍는 방법! 이 방법이 제일 쉽고 요긴하게 파노라마를 활용하는 방법이에여 분신술 쓰는 나같달까... 요것도!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이 찍었는데 이건 특이하게 앞, 뒷모습으로 연출했어여 서로를 찍어주는 두 사람의 모습을 한번에 담아내기도 ㅋㅋㅋㅋ 여행가서 이런 사진 찍으면 넘나 재밌을 것 같지 않나여? 독특한 점은 뒷모습만 나온 여자분도 거울 속에서 눈을 맞추고 있다는 사실ㅋㅋㅋ 이런 디테일이 좋아여 따라해보고 싶은 사진 1등! 파노라마의 장점은 그 공간을 한 사진에 모두 담을 수 있다는 점 같아여 요렇게 옆으로 멋진 소품들이 있는걸 담았네여 둥그런 울타리 모양의 공감각을 담아낸 사진이에여 가운데에는 양을 안고있는 인물이 있어서 재밌는 사진이 연출된듯 파노라마의 또다른 장점은 역시 이런 입체적인 공감각을 단면인 사진 안에 담아낸다는 것이에여 같은 장소지만 파도가 묘하게 달라여 파노라마는 원래 같은 사진인듯 쭉 연결되어야 하지만 이렇게 역동적인 변화를 담는 것도 또다른 묘미에요 구도 한쪽에만 사람을 세워두는 연출이 재밌네여 이렇게 세로로 긴 파노라마도 있져! 최근에 어떤 글을 봤는데 바다 - 지평선 - 하늘을 가장 예쁘게 담는 방법이 파노라마를 세로로 찍는거래여 이런 재밌는 연출이 담긴 사진도 있어여 가로 세로를 둘다 가져가겠다는 의지가 담긴 사진ㅋㅋㅋㅋ 이게 일반 폰카메라에 있는 파노라마로는 찍기 힘들겠찌만 이 작가분은 한컷 한컷 찍어서 파노라마처럼 연결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이런 색다른 연출도 가능해요 그냥 폰카로도 가능할듯?! 박제 동물이 가득한 독특한 공간이 파노라마로 찍혀서 너무 특이하져 요것도 넓은 공간이 한 사진에! 긴 식탁을 담아낸게 특징이에여 이건 아무래도 좌우가 같은 공간인 것 같져? 같은 공간이지만 좌우대칭을 시켜서 보니까 아예 다르게 느껴지네여 데칼코마니 늑힘 요것도 세로로 연출한 사진! 사실 이게 하나의 사진이라고 생각하고 비율을 보면 안맞는데, 파노라마처럼 한컷씩 찍어서 붙였기 때문에 이런 독특한 공감각이 나올 수 있어여 이게 이 작가의 매력인듯!! 저도 그래서 이런 느낌으로 찍어본게 있습니다 ㅎㅎㅎ 요렇겤ㅋㅋㅋㅋ 미술관에서 사람이 없는틈을 타서 한번 찍어봤답니다 파노라마 기능이 모든 폰에 있는데도 의외로 잘 안쓰게 되는 기능이거덩여 열분덜도 이기회에 한번 찍어보는건 어때여? ㅎㅎ 아주 재밌답니다 호호 여행가서도 이렇게 찍으면 좋을 것 같아요 열분덜도 파노라마로 찍은 사진이 있다면 보여주세요 !!
독일의 5G와 화웨이
https://www.handelsblatt.com/25107766.html?share=twitter 메르켈이 또 한 건 해냈다. 독일 정부가 미국의 위협(참조 1)에도 불구하고 화웨이를 독일 5G 통신망 장비의 주요사업자로 대할 예정이기 때문이다. 이건 총리실이 찍어내린 경우라 할 수 있겠다. 여느 나라나 마찬가지겠지만 독일도 상명하복이다. 사실 전에 봤던 독일 양당(CDU와 SPD) 관계자들도(이제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화웨이에 대해 답답한 심경을 얘기했었다. 분명 미국은 압박을 주고 있고, 독일도 그 압박이 뭔지 모르는 바 아니다. 하지만 (1) 5G에 있어 화웨이만한 기술력(대규모/안정성/신뢰성 등)을 가진 회사가 말그대로 없다. (2) 절차에 맞게 경매에 신청한다면 막을 수가 없다. (3) 어차피 소스코드를 들여다봐야 할 텐데, 그건 화웨이만이 아니라 에릭슨과 노키아, 삼성도 모두 반대할 일이다. 자, 이 건은 한델스블라트가 독일 정부 문건을 입수한 폭로기사다. 원래 내가 알기로 독일 정부 내에서는 화웨이를 5G 장비 입찰에서 부분별로만, 즉 전체가 아닌 일부만 참여하도록 하는 방안을 연구했었는데 이번에 바뀌었다. 그냥 전체 시장 진입 허용으로 말이다. (참고로 현재 화웨이의 5G 참여를 금지한 국가는 미국 외에 호주와 뉴질랜드, 일본, 대만이 있다.) 그렇다면 메르켈의 총리실이 어떻게 뛰어들었느냐, 원래는 “신뢰할 수 있는 공급업체…”라고 되어 있던 요구조건을 크게 약화시켰다. 보안이 중요한 부문을 통신사가 제출토록 했고, 그 부분만 심사하는 식으로 말이다. (물론 최종버전이 변경될 가능성이 여전히 없진 않다.) 미국의 압박은 음으로 양으로 상당했던 모양이다. 공식적으로도 9월 Ajit Pai FCC 의장이 직접 독일로 와서 또 위협했을 정도니까 말이다. 당연히 부처 차원에서도 우려가 있었다. 5G가 워낙 소프트웨어 기반이기 때문에 통신사 업데이트가 있을 경우, 이를 실시간으로 정부가 중국측의 “홀”을 발견할 수 있겠느냐, 기술적으로 가능하기는 하느냐… 게다가 독일은 주요 통신사 모두 이미 화웨이 통신망 장비를 대대적으로 사용 중이다. LTE도 제대로 안 되는 지역이 많거늘(베를린에서 조금만 나아가도 아예 통신망 자체가 안 뜬다), 5G에서 뒤쳐지지 않으려면 조속히 통신망 설치라도 해야 하는데 말이다. 말인즉슨, 독일 통신사들도 모두 화웨이 편에 가깝다는 의미다. 앞서 (3)에서 말했지만 그나마 소스코드라도 봐야 할 텐데, 그걸 강제로 요구하면 중국의 사이버보안법과 뭐가 다르냐는 비판도 있다. 그러나 화웨이 반대가 미국만의 압박이 아니다. 사실 EU도 화웨이를 직접 거명하지는 않았어도 그 위험성 보고서를 상당히 최근에 냈었다(참조 2). 그런데도 메르켈은 규정을 고쳐가면서 화웨이의 장비 입찰 참여를 강행시켰는데… 아무래도 독일 경기 위축이 우려되어서가 아닐까 싶다. 올해 말 아니면 내년 초 즈음 마이너스 성장률까지도 예상하고 있기 때문이다. 재정확장을 못 하니 수출이라도 해야 할 텐데, 그러려면 중국에게 밉보일 수가 없는,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보다도 더 딱한 처지가 독일이다. 우리는 최소한 5G를 화웨이 없이 하는 통신사들이 있거든. 더 큰 의미도 있다. EU가 중국에게 있어서 단일대오를 형성하는데 실패했다. 독일이 화웨이를 결국 금지하지 않았고 (곧 EU가 아니게 되겠지만) 영국도 화웨이에 긍정적이니 말이다. 아예 일대일로, 중국몽(…)에 참여하기로 한 이탈리아는 말할 것도 없겠다. -------------- 참조 1. 미국의 독일 위협(2019년 3월 14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6991440849831 2. EU-Kommission warnt vor Gefahren für 5G-Netz(2019년 10월 9일): https://www.faz.net/-ikh-9s1u4
아껴 읽고 싶은 너와 나의 이야기: 15
Tomorrow is another day 제가 해와 달을 매일 볼 수 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합니다. 그 사람이 아니면 안 되는 것, 오로지 그 사람에게서만 나오는 것, 먼지처럼 때처럼 아무것도 씻어내지 않고 덜어내지 않고 켜켜이 쌓여서 그 사람만의 지문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그 지문은 그 사람을 지극히 사랑하는 다른 한 사람의 가슴에 오랫동안 새겨지는 것이다. ⠀ 냄새는 결코 다른 것으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란 말에 떠오르는 향들이 선을 따라 이어진 나의 지문. 온 몸에서 향이 퍼져나간다. ⠀ #외로움의 온도#해냄#조진국 재규어 운전석에 오르면 시동 버튼이 1분에 72회 깜박이기 시작합니다. 이는 움직이지 않을 때 맹수 재규어의 심장박동수와 같습니다. 디테일은 많은 것을 말해줍니다. 그리고 우리는 본능적으로 디테일에서 전체를 예감합니다. ⠀ 사람과 사물, 장소와 음악, 온도와 습도 등 작은 디테일함을 통해 전체를 예감할 줄 아는 사람이 좋다. ⠀ #평소의 발견#북하우스퍼블리셔스#유병욱 내가 상처를 잘 받는다면 상처를 잘 받는 나를 탓하면 안 됩니다. 사람마다 다르기에 누군가는 언어에 민감할 수도 언어의 표현을 더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습니다. ⠀ 그리고 사람들의 말에 상처를 잘 받는 사람일수록 다른 사람에게 상처 주지 않는 말을 하기 위해 더 노력합니다. ⠀ 탓과 노력을 끊없이 반복하던 벙어리가 드디어 말문을 열게 되었다. ⠀ #오늘처럼 내가 싫었던 날은 없다#21세기북스#글배우 자꾸 다른 이야기들을 옮기는 나 자주 저문다. 그늘엔 독이 스며 있다. 사과 멀쩡한 면을 다 깨물고 뒷면으로 고요하고 고독한 바다로 자꾸 갉아서 나아갔다. 한번 좀먹힌 부분은 다시 차오르지 않는다. 달이 아닌 사람들. ⠀ 독이 퍼지는 속도의 차이일 뿐이라 생각하면서도 아 너무 빨리 퍼지고 있는 것 같은데 덜컥 겁이 난다 검은 바다를 보면 내 생각이 날까 베개가 젖는다 눈을 감을 수 없다 ⠀ #베개는 얼마나 많은 꿈을 견뎌냈나요#문학동네#권민경 억압받는 사람은 체계적으로 작동하는 사회구조를 보지 못하고 자신의 불행이 일시적이거나 우연한 문제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차별과 싸우기보다 ''어쩔 수 없다''며 감수한다. ⠀ 새는 새장을 보지 못한다 ⠀ #선량한 차별주의자#창비#김지혜 어떤 추락은 너머가 된다 ⠀ 기억을 염려하는 순간 미리 슬프다는 감각에 몸서리친다 나는 ⠀ 직각의 바다 그 끝은 낭떠러지 떨어지고 부서지고 터진다 나눠지고 살아내고 떨어지고 부서지고 터지는 지난함의 무한대속에 압사 생의 마감 ⠀ #반과거#문학과지성사#장승리 이제는 그 문장처럼 사고하고 있다. 점점 책이 되어가는 기분이다.나는 펼쳐져 있다. 누군가에게 일컬어지길 기다리는 듯이 새까만 잉크들이 누렇게 빛바래갈 때까지라도 영영. 수많은 활자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눈을 통해 들어와 온 몸에 흐른다. 창가에 앉아 바람이 넘겨주는 책을 읽다 해가 진 뒤엔 좋아하는 작가님의 글을 읽고 또 읽는다. 한철 꿈이었던가. 가을 속 봄을 느낀다. #오늘만은 나랑 화해할래요#자화상#김민준
[심야전시] Writing Room by 오휘명 작가님
가을은 모든 것이 익어가는 계절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코 끝을 찌르는 은행 냄새에 익숙해질 때쯤 겨울이 찾아오겠죠. 점점 날씨를 / 삶을 모르겠습니다. 오늘 제가 좋아하는 오휘명 작가님의 전시를 다녀왔습니다. 전시 기간: 2019.10.14-10.20 전시 시간: 평일 PM5시-12시, 주말 PM 1시-12시 입 장 료 : 5,000원(카카오페이결제) 전시 장소: 마포구 망원동 435-5 2층 저번 박근호 작가님 전시 이후로 두 번째로 열린 심야전시 입니다. 일상의 소리가 전시장을 메우고 있습니다. 모든 벽면에 작가님의 글, 생각과 삶 그리고 숨들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출입구를 통해 들어오자마자 정면에 보이는 메모들은 실제로 작가님이 글을 쓰기 전에 수기로 작성한 것들이라고 합니다. 사전적 정의부터 글쓰기 전의 구상들이 적혀 있습니다. 사는게 자주 외롭고 조용했다 요즘 깊고 진하게 느끼는 생각이기도 합니다. 마음이 가난한 냄새. 마음이 고팠다. 눈물이 마려웠다. 우는 법을 까먹었습니다. 울고 싶을 때가 많은데 도통 눈물이 나지 않습니다. 사는게 지난하다고 느낄 수 밖에 없는 이유입니다. 작가님이 쓰신 책의 일부 입니다. 오휘명 작가님 편도 한 번 정리해서 올려야 겠단 생각이 듭니다. 오늘 밤하늘 보셨나요? 만월이었습니다. 그 빛이 아름다워 가던 발걸음을 멈춘 채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습니다. 그런 사람이 되고 싶단 생각, 종종 하곤 합니다. 짤막하게 읽기 좋은 글들이 천장에 매달려 있습니다. 자문자답하며 글을 읽는 걸 좋아해서일까요. 사진을 찍은 이유에 대해 생각해봅니다. 소설과 시 그리고 산문이 엮여져 있습니다. 하나씩 가져다 읽었는데 적당한 조도의 빛 아래에서 읽는 글, 자꾸만 빠져듭니다. 책으로 출간되지 않았거나 공모전 원고로 작성됐던 등의 이유로 볼 수 없었던 글을 보게 되어 좋았습니다. 평상시라면 담배꽁초 글이 더 좋았겠지만, 가을을 타고 있는 지금의 저에겐 사과 씨 글이 더 좋습니다. 누군가를 품고 싶단 생각이 자꾸만 드니까요. '동백꽃 필 무렵'이라는 드라마를 보고 계신 분 있으신가요? 그 드라마 속 사랑이 생각나는 글이었거든요. 모난 마음을 다지는 일부터 같이 시작하고 싶어집니다. 구상부터 발췌된 종이 조각 그리고 이 글까지 총 세 번에 걸쳐 봤습니다. 울대가 미지근해지는 글입니다. 저녁 8시부터 10시 사이에 글쓰기 퍼포먼스를 해주십니다. 제시어를 말하면 그에 따른 글을 써서 주시는데 전 '오늘'을 말씀 드렸습니다. 저의 제시어를 보고 글을 써주셔도 좋을 것 같네요. 누군가의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 글을 읽고 쓰는 공간입니다. 모두가 모여 한 사람의 숨을 나눠서 들이켠다는 것, 생각할수록 낭만적입니다. 평소 작가님이 글 작업하는 환경을 최대한 똑같이 옮겨 놓으셨다고 합니다. 진짜네요. 이 다섯글자가 생각나는 모습입니다. 요즘 시를 자주 읽는 제 눈엔 시집만 보입니다. 눈에 익은 글귀들 속에서 오늘은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 눈길이 멈춥니다. 글에 흠뻑 젖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소란스러운 까닭입니다. 두 눈을 깊게 감았다 뜨고 이 곳을 찾아보시는 건 어떨까요? 한철 꿈이었던가 싶을 시간이 될 지도 모르겠습니다.
타이어 회사 굿이어(Goodyear) 탄생 뒷이야기
... ... <만약 타이어가 없었다면? 인류의 위대한 발명품 자동차는 볼품없는 마차에 지나지 않았을 겁니다. 자동차 탄생에 필수적이었던 타이어 발명 과정을 살펴봤습니다. 아래는 일본 네이밍 이야기 4회 자동차편의 관련 기사입니다.> 로버트 톰슨-존 던롭 공기압 타이어 발명 스코틀랜드 발명가 로버트 톰슨(Robert William Thomson)이 공기압 타이어를 발명한 건 1845년이다. 자동차 명예의 전당(automotivehalloffame) 자료에 따르면, 가죽으로 둘러싸인 톰슨의 고무튜브는 조악했고 이내 잊혀졌다(but his invention was rather crude–a rubber tube wrapped in leather–and was soon forgotten) 그로부터 공기압 타이어에 대한 새로운 아이디어가 다시 나오기 까지는 43년이 걸렸다. 우연한 순간에 발명이 이루어졌다. 자동차 명예의 전당은 “1887년 스코틀랜드의 수의사 존 던롭 (John Dunlop)은 아홉 살 짜리 아들 조니가 단단한 고무 바퀴가 달린 세발 자전거를 타며 애를 먹고 있는 것을 보았다”(In 1887, John Dunlop, a practicing veterinary surgeon, watched as his nine year old son Johnny struggled with his tricycle mounted with solid rubber wheels)고 했다. 40년 후 ‘굿이어 타이어 앤 러버 컴퍼니’ 설립 공기압 타이어의 역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다. 이 무렵 미국에서는 유명한 타이어 회사가 하나 설립됐다. 굿이어 타이어 앤 러버 컴퍼니(Goodyear Tire and Rubber Company)다. 회사 이름에 굿이어(Goodyear)라는 이름이 붙여진 과정은 흥미롭다. 인터리스팅 엔지니어링 닷컴(Interesting Engineering.com)이라는 글로벌 커뮤니티 사이트에는 ‘가황의 아버지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 The Father of Vulcanization)라는 코너가 있다. 영어 불카니제이션(Vulcanization)은 고무에 황을 넣어 강도와 탄성을 증가시키는 가황(加黃)을 말한다. 이 단어는 로마 신화에 나오는 ‘불의 신’ 불칸(Vulcan)에서 따왔다. 그럼, 가황의 아버지 찰스 굿이어는 누굴까. 미국인 발명가 찰스 굿이어(Charles Goodyear:1800~1860)의 본업은 철물점 운영이었다. 그는 30대 이후에 여러 제품에 고무를 사용하는 연구를 하고 있었다. 그의 놀라운 고무 실험이 시작된 건 1834년이다.(His groundbreaking work on rubber would begin with his experimentation in 1834) 우연한 실험에서 더 단단하고 강도 높은 고무 발견 인터리스팅 엔지니어링 닷컴은 “그 5년 후 1839년 우연히 가황의 과정을 발견하게 되었다”(5 years later he would accidentally discover the process known as vulcanization)고 했다. 어느 날 찰스 굿이어는 인도 고무와 황을 섞는 실험을 하다가 실수로 혼합물을 뜨거운 스토브 위에 떨어뜨리고 말았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 혼합물이 녹기는커녕 더 강도 높고 단단한 물질이 되었다. 오늘날과 같은 견고한 타이어 탄생 순간이었다. 인터리스팅 엔지니어링 닷컴은 “대단한 발견에도 불구하고 찰스 굿이어는 1844년까지 가황고무 특허를 얻기 위해 고군분투했다”(Despite the significance of his discovery, Goodyear would struggle to patent vulcanized rubber until 1844)고 설명했다. 특허 공방전뿐만 아니라 찰스 굿이어는 엄청난 부채와 감옥 수감, 자녀들의 잇단 죽음이 겹치면서 불행한 삶을 살았다. 그런 그는 1860년 7월 19일 무일푼으로 죽었다. 실제로 많은 빚을 남겼다. 찰스 굿이어 기리는 뜻에서 회사 이름 지어 하지만 가황법을 발견, 고무 산업 개척의 길을 연 찰스 굿이어의 업적은 헛되지 않았다. 그의 사망 40년 후인 1898년, 미국 발명가이자 기업인인 프랭크 세이벌링(Frank Seiberling: 1859~1955)은 굿이어 타이어 앤 러버 컴퍼니(Goodyear Tire and Rubber Company)라는 회사를 설립했다. 인터리스팅 엔지니어링 닷컴은 “창업자 프랭크 세이벌링은 찰스 굿이어를 기리는 뜻에서 회사 이름을 그렇게 지었다”고 했다. 이 매체는 “이름이 같은 것을 제외하고는 찰스 굿이어 자신도 그 가족도 수십억 달러 규모의 이 회사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Apart from his namesake neither Charles himself or his family have any connection with this multi-billion dollar company)고 덧붙였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8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일본의 선구자들⑧/ 100엔숍 빅4
... ... 불황과 함께 찾아온 100엔숍 일본 아이치현 가스가이(春日井)시에 일본 최초로 100엔 균일 점포가 등장한 건 1985년이다. 100엔숍이라고 이름 붙인 이 점포는 불황의 상징이기도 했다. 이후 일본은 1990년대 초반 버블 붕괴를 맞으면서 헤이세이 불황(平成不況)이라는 이른바 ‘잃어 버린 10년’(失われた10年)의 터널 속으로 빠져 들었다. 구체적으로 버블 붕괴는 주식과 토지의 거품이 빠진 걸 말한다. 이에 일본은 거품 경제의 파국을 맞으며 긴 디플레이션 불황에 빠져 들었다. 그러면서 시장의 소비 패턴에도 큰 변화가 생겼다. 소비자들의 구매 욕구가 저하되고, 저렴한 상품을 요구하는 분위기가 팽배했다. 이런 요구에 부응한 아이템이 100엔숍이었다. 다이소-세리아-캔두-왓츠 '100엔숍 4인방' 다이소산교(大創産業). 100엔숍의 대표적 브랜드인 다이소(ダイソー)를 운영하는 기업이다. 매출 규모로는 다이소 다음으로 세리아(セリア: seria), 캔두(キャンドゥ: Can☆Do), 왓츠(ワッツ:watts)가 있다. 다이소산교를 창업한 야노 히로다케(矢野博丈, 76) 회장은 일본 100엔숍의 선구자 격이다. 그의 삶 속으로 들어가 본다. 1943년 중국 베이징에서 태어난 야노 히로다케의 본명은 쿠리하라 고로(栗原五郎). 아버지는 의사였다. 전시(戰時)에 중국 병원에서 근무했던 아버지는 일본이 패전하자 가족들을 데리고 고향인 히로시마현으로 돌아왔다. 의사 집안치고는 형편이 좋지 않았다. 야노 히로다케 회장은 “의사의 가정이라면 부자라고 생각하겠지만, 아버지는 가난한 환자에겐 치료비를 받지 않는 것으로 유명했다”며 “덕분에 우리 집은 늘 가난했다”고 말했다. (2018년 4월 시사매체 다이아몬드와의 인터뷰) 야노 히로다케는 고교 시절 복싱에 심취했다. 고3 때인 1964년에는 도쿄 올림픽 밴텀급 예비 선수로 뽑히기도 했다. 복싱 탓에 공부와는 멀어졌다고 한다. 대학은 쥬오대(中央大) 토목공학과 야간부로 진학했다. 이름과 성 다 바꾼 다이소산교 창업자 결혼 후 처가에서 경영하던 양어장 사업을 ‘말아먹은’ 야노 히로다케는 도쿄로 야반도주를 하고 말았다. 백과사전 판매원으로 뛰었지만 영업사원 30명 중 실적은 꼴찌. “운은 없지만 능력은 있다”고 믿었던 야노 히로다케가 야노상점(矢野商店)이라는 이동 트럭 잡화점을 연 것은 1972년이다. 야노(矢野)는 아내의 성이다. 그는 장사를 위해 쿠리하라(栗原)라는 성을 야노로 바꿔 버렸다. 그는 그 이유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뭔가 스스로 장사하기로 결정했기 때문에 ‘쿠리하라’보다는 두 음절의 심플한 야노 쪽이 기억하기 쉽고, 친해지기 쉽다고 생각했다.> (원문: 何か自分で商売すると決めていたので、「クリハラ」より2音でシンプルな「ヤノ」のほうが覚えてもらいやすいし、親しみやすいと考えたからだ。) 다이소(大創)로 회사 이름을 지은 이유 아버지 또한 그의 그런 결정을 존중해 줬다고 한다. 그런데 거기서 그치지 않았다. 한 술 더 떴다. 이름까지 바꿔 버렸다. 그는 “나중에 나는 고로라는 이름도 바꾸어 버렸다”(後に私は、「五郎」という名前も変えてしまう)며 “‘고로’ ‘고로 짱’에는 경영자로서의 위엄이 부족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작명가가 히로다케(博丈)로 지어 주었다”(「ゴロー」「ゴロちゃん」では経営者として威厳に欠けると思ったからだ。姓名判断の先生に「博丈」と付けてもらった)고 했다. 야노상점을 운영하던 중, ‘싼 게 비지떡’(安物買いの銭失い)이라는 불만이 들려왔다. 체계화된 회사 시스템이 필요했다. 야노 히로다케는 1977년 가게를 법인화했다. 그럴듯한 회사 이름도 필요했다. 100엔짜리 장사로는 대기업이 된다는 건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노릇이었다. 하지만 부부의 꿈은 컸다. ‘연매출 1억 회사를 만들자’(年商1億の会社を作る)는 목표를 세웠다. ‘언젠가 큰 회사(大きな)를 만들고 싶다’(創りたい)는 생각을 담아 대창(大創)이라고 지었다. 대창을 일본어로 읽으면 '다이소'다. 일본 전역에 3270개 매장 보유한 비상장사 1987년 12월 100엔숍 매장을 본격적으로 개시한 다이소는 현재 일본 전역에 3270개의 매장을 갖고 있으며, 취급 상품 수는 7만개에 달한다. 매출액은 4548억엔(4조 9832억원)을 웃돈다. 후발 주자인 세리아, 캔두, 왓츠가 상장사인 것과는 달리, 다이소산교는 비상장사의 현금 부자로 알려져 있다. 야노 히로다케는 2018년 3월, 사장직을 둘째 아들에게 물려주고 회장직으로 물러났다. 장남이 경영을 이어받지 않은 이유는 대학 의대 교수이기 때문이었다. (참고로 일본 다이소는 한국 다이소와는 별개의 회사다. 한국 다이소를 운영하는 아성산업은 2001년 다이소산교의 지분을 일부 투자 받아 다이소아성산업으로 회사 명칭을 바꾸고 간판도 다이소로 바꿔 달았다.) 2위 기업 세리아(seria)...이름 의미는 '성실함' 일본 100엔숍 매출 규모 2위는 세리아(セリア: seria)다. 기후현에 본사를 두고 있고, 1985년 설립됐다. ㈜산양에이전시(山洋エージェンシー)라는 이름으로 출발한 회사는 2003년 4월 지금의 ㈜세리아(セリア)로 상호 변경했다. 회사의 홈페이지에서 “세리아는 이탈리아어로 ‘마지메나’(まじめな)의 의미를 갖고 있다”고 밝히고 있다. ‘마지메나’는 성실함을 의미한다. 창업자는 가와이 히로미츠(河合宏光, 71). 고교 졸업 후 가업인 세탁소를 경영하다 1985년 100엔숍을 오픈했다. 세리아는 현재 일본 전역에 1506개 점포(취급 상품수 2만 개)를 갖고 있고, 매출은 1591억엔(1조 7432억원)에 달한다. 세리아의 간판에는 영어 세리아 글자 앞에 ‘컬러 더 데이즈’(Color the days)라는 문구가 붙어 있다. ‘일상을 물들이자’라는 이 컨셉은 100엔숍 답지 않은 100엔숍 추구를 목적으로 내걸었다. ᐅ상품수를 줄이고 ᐅ실용성 위주 제품을 판매하며 ᐅ잡동사니가 널부러진 이미지를 불식, 매장의 분위기를 살리려는 의도다. 3위 기업 캔두는 ‘감동’(칸도우)에서 따와 100엔숍 3위 기업인 캔두(キャンドゥ: Can☆Do)는 도쿄를 기반으로, 1993년 설립됐다. 사명은 ‘100엔으로 모든 사람을 행복하게 한다’. 경영 취지는 ‘낮은 가격으로 상품을 제공, 손님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이다. 회사 이름 캔두(Can☆Do)는 아이 캔 두잇(I can do it)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경영 취지 속 단어인 ‘감동’(感動)과 관련이 있다. 감동을 일본어로 칸도우(カンドウ)라고 하는데, 이를 캔두(キャンドゥ: Can☆Do)로 연결시킨 것이다. 캔두는 다이소와 세리아에는 미치지 못하지만, 일본 전역에 1000여 개의 매장을 갖고 있다. 매출액은 707억엔(7746억원). 오사카에서 가장 늦게 출발한 왓츠(watts) 가장 늦게 뛰어난 후발 주자 왓츠(ワッツ:watts)는 오사카에서 1995년 출발했다. 매장은 1160여 곳, 매출은 494억엔(5412억원) 규모다. 취급 상품 수는 세리아, 캔두와 비슷한 2만 개 수준이다. 100엔숍이 등장한지 30년, 매장들도 변신을 꾀한지 오래다. 100엔 균일이라는 간판을 떼거나, ‘탈100엔’을 추구하고 있다. 싼 값으로는 안된다며 300엔짜리 제품을 판매하고, 매장의 깔끔한 인상을 주는 등 신선함으로 승부하고 있다. <에디터 이재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29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일본 철도 레일 폭은 왜 제각각일까?
... <일본의 선구자들⑨/ 철도의 아버지 관련 기사입니다> 1435mm 궤간이 세계 철도 표준궤 일본 철도 마니아라면, 열차 레일의 폭을 유심히 한번 살펴봤을 것이다. 일본에는 다양한 너비의 궤간(軌間)이 혼재하고 있다. 레일의 폭을 궤간이라고 한다. 궤간의 세계적인 표준은 1435mm로, 신칸센에도 사용되고 있다. 1435mm 궤간을 ‘표준궤’라고 부른다. 일본 궤간의 역사를 간략하게 소개한다. ‘사설 철도법’(私設鉄道法)에 의해 만들어진 많은 사철(私鉄)은 1067mm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간사이의 사철 상당수는 1435mm이다. 1067mm와 1435mm 중간인 1372mm도 있다. 일본은 왜 이렇게 궤간의 너비가 제각각일까. 역사적으로 좀 거슬러 올라가 보자. 1076mm 궤간이 만들어진 이유 일본 최초의 철도 신바시~요코하마(新橋~横浜) 노선이 개통된 건 1872년. 당시는 3피트 6인치, 즉 1067mm을 궤간으로 정했다. 당시 영국 철도기사인 에드문드 모렐(Edmund Morel)의 의견이 반영됐고, 최종적으로 결정을 내린 이는 대장대보(大蔵大輔)라는 직책을 맡은 오쿠마 시게노부(1832~1922년)로 알려져 있다. (오쿠마는 두 번이나 총리를 지낸 인물로, 후에 와세다대를 창설했다.) 원래 일본의 철도는 관영(국철)으로 만드는 것이 원칙이었다. 하지만 관영만으로는 부족해 사설(私設) 철도를 허가해 줬다. 그때 레일 폭은 1067mm로 하도록 법으로 정했다. 1887년 제정된 ‘사설 철도 조례’(私設鉄道条例)다. 이 조례는 1900년에 시행된 ‘사설 철도법’(私設鉄道法)으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전국의 주요 간선은 사철로 건설됐다. 그러다 1906년 사철을 국유화하는 ‘철도 국유법’(鉄道国有法)이 만들어져 17개 기업이 국가 소유가 됐다. 17개 업체가 한꺼번에 국유화 되면서 민간 철도 건설은 시들해 졌다. 이에 일본 정부는 1910년 자율성을 높이고 민간에 의한 지방철도 정비를 추진하기 위해 ‘경편전철법’(軽便鉄道法)을 시행했다. 이 법은 궤간을 1067mm에 한정하지 않고, 더 낮은 비용으로 더 좁은 궤간을 만들 수 있도록 했다. 국철의 표준인 1067mm를 바꾸려는 움직임도 과거에는 있었다. 1910년대, 데라우치 마사타케(寺內正毅) 내각에서는 1435mm로의 변경을 고려했다. 궤간이 넓은 편이 수송력이 높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실현되지 않았다. 그러다 1964년 마침내 국철에 1435mm 궤간 철도가 탄생했다. 이것이 도카이도 신칸센이다. 같은 회사인데도 궤간 서로 달라 같은 철도 회사이면서 노선에 따라 궤간이 다른 경우도 있다. 그 중 하나가 도쿄도 남서부~ 가나가와현 북부에 걸친 노선을 운영하는 게이오 전철(京王電鉄)이다. 게이오의 노선망은 약 85km로 비교적 짧지만 게이오선 계통(京王線系統)과 이노카시라선(井の頭線)은 궤간이 다르다. 차량의 외형도 전혀 다르다. 여기엔 이유가 있다. 원래 이노카시라선은 전쟁 전, 오다큐 계열(小田急)계열의 제도전철(帝都電鉄)이 1067mm를 선택해 개업했다. 반면 게이오선은 ‘게이오전기궤도’(京王電気軌道)라는 이름으로 개업, 1372mm를 선택했다. 혹시, 일본 여행 중이라면 철도 궤간에 한 번 눈길을 줘보는 건 어떨까.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31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