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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㉒/ 전시체제6...상하이 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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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중국 상하이에서 활동했던 조선영화 황제 김염의 작품. 사진=CCTV 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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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 경제학’을 집필하고 있는 이곳은 미국이다. 한국에서 일본과 대립각을 세우는 것과 달리 이곳 미국에서는 피해자가 가해자를 용서하는 진풍경이 벌어지고는 한다. 지난 8월 8일, 미국의 공기관들과 대학들 그리고 교회 등에는 일제히 조기게양이 이뤄졌다. 특히나 필자는 사우스캐럴라이나에서 장기 체류 중이었으므로 그 경이적인 장면에 감탄을 연발하였는데 그 이유는 이랬다.

그날은 미국이 일본에 원자폭탄을 투여한 날로 비록 전쟁의 종식을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지만 일본인들에게는 사죄를 뜻하는 것이었다. 물론 일본이 태평양전쟁 당시 인류에게 행한 행위들에 대해서 무조건 면죄부를 주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과정 속에서 있었던 오류에 대해서는 미국은 적어도 이민자의 나라이자 금세기 최고의 나라답게 역사의 공과 과를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고 있었다.

덕분에 동양인이었던 나는 인종차별이 아직도 존재한다고 오해 받고 있는 미국의 남부에서 수시로 인사를 받았고 일본의 점심 인사인 ‘곤니찌와’(こんにちは, 今日は)를 수시로 듣고 다녔다.

전시체제라는 주제를 마무리 하면서 일본의 식민지 지배와 전쟁이 단순히 황민화 정책의 홍보가 아닌 순기능과 역기능도 존재한다는 사실을 언급하며 글을 마치기로 하였기 때문에 서론이 길었다. 우선적으로 이 연재는 일본영화의 경제학적 측면을 바라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일본영화의 영향이 아시아 전체에 미친 파급효과를 살펴보고 향후 전후의 영화산업에 미친 영향에 대해서 언급함으로써 전시체제시 일본영화를 정리하고자 한다.

이 중 가장 주목할 지역은 중국 상하이와 필리핀 그리고 인도네시아다. 이중에서 1937년 일본의 중국침략이 시작되자 영화제작사들 가운데에는 문을 닫거나 싱가포르·홍콩 등지로 옮겨가는 회사가 속출하였으며, 나머지는 충칭(重慶)으로 천도하는 국민당 정부와 중국영화는 그 궤적을 함께 했다.

당시 중국영화는 상하이가 중심이었고 여러 나라의 조차지가 공동으로 들어서 공동조계(租界)라는 공동통치구역이 들어섰다. 이곳에 조차지를 얻은 나라 중에는 일본도 있었는데, 이로 인해서 일본인 주도의 영화 대신 중국인이 만드는 순수 ‘중국영화’를 제작하면서도 내용에는 참견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보였다.

비록 1937년 일본이 상하이를 점령했다지만 영화 촬영소는 프랑스 조차 지역 안에 있었기 때문에 비교적 자유롭게 자립적으로 영화를 제작할 수 있었다. 그 이전까지도 사실 상하이는 자유로운 분위기였고 일제치하를 피해 도피해 온 식민지 조선의 영화인들에게는 ‘성지’역할을 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중 김염(金焰)은 가장 주목 받는 인물이었다. 상하이 시에서 활동한 영화배우이며 본명은 덕린(德麟), 레이먼드 킹으로 알려진 김염은 중국 영화의 황제라는 별명이 붙을 정도로 많은 팬을 확보하고 있었다.

김염은 당대 최고의 인기 배우였을 뿐만 아니라 항일운동을 ‘영화’로 풀어나갔던 대배우로, 중국 사실주의의 효시라고 부르는 ‘대로(大路)’등 40여 편의 영화에 출연하였다. ‘애국혼(愛國魂)’은 1928년 상하이에서 만들어졌는데 일제의 검열을 피해 만들었던 안중근 의사의 일대기이면서 무성극영화이기도 했다.

정기탁(鄭基鐸), 전창근(全昌根), 이경손(李慶孫), 정일송(鄭一松), 한창섭(韓昌燮) 등 조선인 영화인들이 망명길에 올라 상하이라는 국제도시를 통해 만든 영화였다. 이처럼 상하이의 영화는 전쟁 이전만 하더라도 항일영화가 적극적으로 만들어졌던 전통이었기 있었기 때문에 결국 일본은 육군의 도와상사(東和商事)의 가와키타 나가미사(川喜多長政)에게 중국 영화의 관리를 요청했다.

그는 영민한 인물로 이미 만에이(만주영화협회)의 실패 원인과 현지에서의 불평을 리서치한 끝에 일본인 주도의 영화제작을 포기하고 중국인에 의한 중국영화를 제작하도록 했다. 이 때문에 중국인 감독들은 훗날 중화민국 국민당군이 귀환하자 ‘한간’(漢奸 : 조국을 배신한 중국인)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했고 대부분 홍콩으로의 망명을 선택했는데 이 때문에 전후 홍콩영화는 상하이의 하청업자라는 오명을 씻고 영화산업을 융성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가와키타 나가미사는 더 나아가 중국인 회유를 위해 전력했는데 첫 작품으로 비록 스즈키 시게요시(鈴木重吉)를 통해 ‘동양 평화의 길’(1937)을 제작했는가 하면, 아예 1939년에는 상하이에 있던 12개의 영화사들을 합병하여 ‘중화전영’(中華電影)을 설립하고 ‘목란종군’(木蘭從軍)이라는 국방영화를 제작했고 항일영화인이었던 장센쿤(張善琨)까지 영입하기 까지 한다.

그러나 군부의 비호를 받은 일본인들이 영화계를 지배한 것은 사실이며 만에이와 합작으로 리샹란 주연의 ‘만세류방’(萬世流芳)을 제작하여 아편전쟁을 배경으로 한 중국인들의 영웅적 투쟁을 못하면서 일본 본토에서도 마키노 마사히로(まきのまさひろ)가 ‘아편전쟁’을 만든다. 반면 제2차 세계대전이 중국의 승리로 끝나 뿔뿔이 흩어졌던 영화인들이 상하이로 복귀하기 까지 이른바 ‘충칭시대의 영화’는 극심한 영화자재의 부족 등으로 흥행이 부진하였다.

인도네시아의 경우는 현지인의 영화 촬영을 금지하고 일본어로 된 선전계몽영화를 주로 제작하였는데 이중 대표적 작품은 두 가지로 히나쓰 에이타로(日夏英太郞, 본명 許泳)가 자카르타에서 촬영한 ‘콜링 오스트레일리아’(Calling Austrailia, 1944)와 ‘도나리구미’(隣組 : 반상회)를 결성하여 일본어와 일본정신을 배운다는 계몽영화가 바로 그것이다.

이중 히나쓰 에이타로는 입체적 인물이다. 조선인이었지만 히나쓰 에이타로라는 일본인으로 살다가 전후에는 닥터 후융(DR.HUYUNG)이라는 이름으로 인도네시아 독립영웅이 된 인물이다. 그는 ‘콜링 오스트레일리아’라는 다큐멘터리를 제작하여 스위스의 국제적십자사를 통해 연합국에 전달되었는데 포로인 오스트레일리아인들이 자발적으로 만든 것으로 꾸미는 바람에 전후 오스트레일리아에서 출연 포로들을 다시 불러 모아 허위를 고발하는 다큐멘터리를 다시 제작하는 해프닝이 있었다.
그는 인도네시아 최초의 키스신을 촬영한 감독으로 기록되었다. 심지어 네덜란드에 맞선 인도네시아의 독립 투쟁을 그린 영화 ‘프리에다’(Frieda) 등을 제작하며 국민 감독으로 불리고 있는데 우쓰미 아이코(內海愛子)가 ‘시네아스트 허영의 쇼와’(1987)에서 허영의 전기적 삶을 복원한 바 있다.

필리핀은 원래 미국의 식민지였다. 할리우드의 영향이 강한 뮤지컬과 멜로 드라마가 1930년대부터 이미 발달했는데 스페인과 미국 그리고 일본의 식민지를 골고루 경험했고 필리핀 최초의 영화 상영이 1897년 1월 마닐라로 알려져, 아시아 최초로 영화 상영이 있었던 인도 뭄바이 이후 두 번째였다고 기록되어 있을 정도로 앞선 행보였다.

1917년 최초의 영화사가 문을 열고 이후 첫 장편영화 네포무세노(Nepomuceno)의 ‘시골 소녀’(Country Maiden)가 1919년 개봉하면서 시작된 영화산업은 할리우드의 영화를 체험한 경험을 바탕으로 비교적 생소한 일본영화를 다시 접하게 되는 계기가 되는데 역시 일본군의 통제 하에 현지인과 합작으로 포로들을 출연시켰다.

여기에 등장하는 인물이 아베 유타카(阿部豊)다. 그는 1920년대 할리우드에서 영화를 배웠다는 인연으로 제럴드 드 레온(Gerald de Leon)이 공동으로 제작한 ‘저 깃발을 무찔러라’(The dawn of Freedom, 1943)를 만든다. 필리핀에서 미국을 몰아낸 일본군을 찬미하는 내용이지만 레온 쪽이 훨씬 더 고전적인 할리우드 방식을 따랐고 아베 유타카는 딱딱한 연출로 일관한다.

그러나 이러한 경험은 훗날 스페인에 맞선 무장봉기와 미국과의 전쟁으로 혼란스러운 시대를 배경으로 한 에디 로메로(Eddie ROMERO) 감독의 ‘그때 우리는’(As we were)을 통해 꿈을 좇아 도시로 나간 시골 청년이 혁명의 격랑 속에서 당시 필리핀이 겪던 고난의 과정을 그려내고, 마리 오하라(Mario O Hara) 감독의 일본 식민지 시절의 아픔을 그린 영화 ‘신이 부재한 3년’(Tatlong Taong Walang Diyos Three Godless Years, 1976)을 통해 모두를 희생자로 만드는 것이 전쟁이라는 메시지를 전 세계에 던지게 하는 계기가 된다.

또한 ‘신이 부재한 3년’은 필리핀인이면서 일본인인 주인공을 내세운 전쟁영화로 2차 세계대전 시기, 필리핀계 일본군 마수기가 시골마을 교사 로사리오를 강간하고, 임신시키는 것으로 시작한다. 분노에 찬 로사리오는 마수기의 모든 제안을 거절하지만 결국 그와의 결혼에 동의하게 되면서 필리핀인, 일본인, 그리고 미군들로부터 적대감을 불러일으키는 아이러니한 비극을 뛰어난 심리묘사로 담담하게 그려낸다.

이와 같이 일본의 영화인들은 전쟁이라는 특수한 상황 하에서 때로는 종군으로 때로는 단순히 창작을 위해서 혹은 식민지배를 정당화 하거나 새로운 영화 환경을 통해서라도 명맥을 이어나가는 한편 전후 일본 영화계의 중심인물로 자리매김할 자양분을 얻는다.

또 전후에도 계속 영화를 만들 수 있는 기반을 만들었다. 그러나 그중에는 기회주의자들도 상당수 존재했으며 대동아공영권 아래 있었지만 실제로는 여러 형태로 할리우드 영화와 만나고 그 영향을 받아가며 영화를 제작했다. 본토가 단절 속에서 독자적인 영화를 만들어 나갔다면 식민지에 흩어져 있던 영화인들은 할리우드 혹은 지배지 안의 영화인들과 교류 혹은 발굴을 통해 영화를 제작했다.

이중 상당수는 필리핀에서 ‘저 깃발을 무찔러라’에서 카메라를 담당했던 미야지마 요시오(宮島義勇)처럼 필름을 불태우고 증거를 없앤 후 전후 일본영화계에서 좌익세력의 중심인물로 활약한 경우도 있었던 것이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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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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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년 장편 애니메이션 제작에서 은퇴를 선언 했던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이 최근 다큐멘터리에서 복귀에 대한 의사를 밝혔습니다. 그의 오랜 팬이라면 반가운 소식이 아닐 수 없는데요. 그는 “아무것도 안하고 죽는 것보다, 하고 있는 와중에 죽는 편이 차라리 낫다”라고 덧붙이기도 했습니다.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에 대해 이야기 하고자 할 때, 그가 설립부터 함께했던 ‘스튜디오 지브리’를 빼놓고 이야기할 순 없을 것 같은데요. 오늘 일일영감에서는 ‘스튜디오 지브리’의 애니메이션 속 장면과 일러스트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1985년 6월, <바람계곡의 나우시카>를 제작한 회사를 모체로 설립된 스튜디오 지브리는 <이웃집 토토로>, <모노노케 히메>,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등 많은 사랑을 받았던 작품들을 다수 제작했으며, 국내에서는 지난 2014년 <스튜디오 지브리 입체조형전>이라는 이름으로 전시를 진행하기도 했습니다. 일상의 풍경과 상상 속 장면을 구현해내는 데에 그치는 것뿐만이 아니라 누구나 느낄 수 있는 지브리만의 감성이 녹아 들어 있다는 점이 가장 큰 매력이 아닐까 싶습니다. 스튜디오 지브리는 철저하게 수작업을 고수했던 이전과 달리 최근 CG애니메이션 시작 단계임을 밝혔는데요. 이전과 다른 작업 방식을 택하여도 지브리의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것은 당연한 사실이 아닐까 싶습니다. *<귀를 기울이면>, <바다가 들린다>, <코쿠리코 언덕에서>, <마녀 배달부 키키>, <이웃집 토토로>, <천공의 성 라퓨타>, <센과 치히로의 행방불명>, <하울의 움직이는 성>의 이미지가 첨부되어 있습니다. 스튜디오 지브리의 공식 사이트, > http://www.ghibli.jp
칸 그랑프리 일본 여배우와 한국의 봉준호
<사진= 봉준호 감독의 '마더' 시나리오 콘티. 봉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만화같은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시나리오보드집 '마더이야기'(마음산책) 캡쳐> 1954년 칸 그랑프리 ‘지옥문’의 여배우 사망 #. 2주 전인 5월 12일, 일본에서 한 원로 여배우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쿄 마치코(京マチ子), 95세였다. 그녀는 1954년 5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 7회 칸국제영화제의 ‘히로인’이었다. 당시 58세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 감독이 ‘지옥문’(地獄門)이라는 작품으로 그랑프리(지금의 황금종려상)를 거머쥐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이가 바로 쿄 마치코다. 1950년대 초, 일본영화는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성과를 올리던 시기였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보다 앞선 1951년 ‘일본 영화의 천황’으로 불리던 구로사와 아키라(黒沢明:1910~1998) 감독이 ‘라쇼몽’(羅生門)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의 히로인 역시 쿄 마치코였다. 출연한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잇달아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그녀는 ‘그랑프리 여배우’(グランプリ女優)라고 별칭을 얻었다. 오사카쇼치쿠(松竹)소녀가극단의 댄서를 거쳐 영화사 다이에(大映)에 들어간 쿄 마치코는 당대에 ‘다이에 간판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큰 주목을 받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그녀는 장수 축복도 누렸다. 1924년생인 그녀는 일본왕의 치세기간으로 보면, 네 시대(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를 살다 갔다. 일본 언론들은 “쇼와, 헤이세이 시대에 대활약했던 배우가 레이와(令和) 원년에 천국으로 떠났다”며 그녀를 추모했다. <사진= 1954년 아시아 최초로 칸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 '지옥문'. 여배우는 5월 12일 사망한 쿄 마치코.> 여장 역 맡던 배우가 칸에선 감독으로 그랑프리 #. 쿄 마치코를 배우로 기용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1896~1982)는 ‘아시아 최초 칸영화제 그랑프리 감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감독이 닛카쓰 무코지마 스튜디오에서 여자 역을 연기하는 온나가타(女形: ‘오야마’라고도 부른다)로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온나가타 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프리랜서 감독으로 변신했다. 이후 독립프로덕션(衣笠映画聯盟)을 세운 그는 소설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도움을 받아 ‘미친 듯이 써 내려간 글’(狂つた一頁, 1926년)을 연출했다. 그런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이 있었다. 1928년 만든 ‘십자로’(十字路)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는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2년 동안 독일에 머물렀는데, 영화는 유럽 극장가에서 공개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명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賞)으로 이어졌다. 1953년 연출한 ‘지옥문’이 이듬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쥔 것이다. 아시아 감독 최초였다. 일본은 칸 황금종려상 다섯 차례 수상 #. 일본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작품 ‘지옥문’을 필두로 4차례 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하지만 두 번 째 수상까지는 기간이 길었다. 26년이 지난 1980년에야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카케무샤’로 영예를 안았다. 이어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1926~2006) 감독이 1983년(‘나라아먀 부시코’)과 1997년(‘우나기’) 2번이나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21년이 지난 2018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이라는 작품으로 재차 명성을 이었다. 베니스, 베를린과 달리 칸은 ‘비즈니스 시장’ #. 칸영화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1회가 개최됐다. 영화제로는 1932년부터 시작된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역사가 더 길다. 하지만 베니스영화제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하에서 운영되면서 초기에는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1951년 출발한 베를린영화제는 3대 영화제 중 역사가 가장 짧다 칸영화제가 베니스, 베를린영화제와 크게 다른 점은 ‘비즈니스 시장’이라는 데 있다. 영화제이면서 ‘영화 시장(박람회)’인 것. 세계 각국의 감독과 배우들은 물론, 바이어와 배급사들이 매년 5월 칸으로 몰려든다. 칸에서 수상을 하면 현지에서 곧바로 판매가 이뤄지는데, 좋은 상을 받을수록 그만큼 판매가가 더 높아진다. 이번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예외는 아니다. 평단의 최고 평점에 최고상까지 거머쥐면서 전세계 192개국에 선판매 됐다. 종전의 기록(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176개국)을 넘어선 역대 한국영화 최다판매다. <사진= 봉준호 감독의 콘티> 영화 시작 26년 만에 칸을 사로잡았다 #. 1969년생인 봉준호 감독은 나이 쉰 살에 마침내 칸을 접수했다. 대학시절 단편영화 ‘백색인’을 만든 게 1993년의 일이다.(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 영화를 만든 지 26년 만에 칸에서 인생 최고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장편영화로는 데뷔작 ‘플란더스의개’(2000년)를 필두로 이번 ‘기생충’이 7번 째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에서 꾸준하게 수상을 했지만 봉준호 감독에게 칸의 문턱은 높았다. 그가 칸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건 2006년. ‘괴물’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처음으로 초청을 받았다. 3년 뒤인 2009년엔 ‘마더’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다시 초청을 받았다. 봉 감독은 ‘마더’ 이후 10년 만에 칸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제치고 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봉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놉시스의 모든 신을 머리에 먼저 그려놓고, 마치 만화영화 그리듯 콘티를 만든다. 영화 ‘마더’의 스토리보드와 시나리오 집 ‘마더이야기’(마음산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독자들도 봉 감독의 콘티 두 장면을 감상해 보기 바란다.(사진) 봉 감독은 영화 만드는 의미에 대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도와 결과, 통제와 반항, 우연과 필연, 계산과 즉흥. 그 모든 대립항들이 오묘히 뒤섞여버린 수많은 순간들. 그것이 영화 만들기의 은밀한 흥분과 즐거움이 아닐까.> 한국영화 탄생 100년을 맞는 해다. 봉준호 감독의 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 또 축하한다. 아울러 2주 전 세상을 떠난 일본 여배우 쿄 마치코를 추모한다. 쿄 마치쿄와 봉준호, 칸이 두고 두고 기억할 재인(才人)들이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영화 <마녀> 이런저런 설정 정보 모음
((스포 있음)) 1. 마녀는 처음부터 시리즈물로 기획되었음 넷플릭스에서 관심을 보여 몇 부작으로 할지 논의 등을 했는데 피드백이 느려 결국 다른 제작사와 계약하게 됨 2. 마녀2의 부제는 <충돌: collision> 3. 닥터백 캐릭터는 원래 남자였음 제작사 측 제안으로 조민수 배우가 캐스팅됐는데, 조민수 배우가 원래 대본 말투가 좋으니 변경하지 말아달라 해서 원래 남자캐릭터로 설정됐던 대사 그대로 연기하게 됨 4. 귀공자는 원래 이종석 배우 역할이었음 (시즌2에 특출한다고 함) 5. 명희의 대사는 감독님이 직접 고등학생들이 다니는 버스정류장을 찾아 다니며 대화를 듣고 충격받아 쓰신 것 (기차에서 귀공자한테 욕 날리는 씬은 고민시 배우 애드리브) 6. 귀공자는 원래 좀 더 까칠하고 주사를 많이 맞아 백발인 설정이었는데 최우식 배우 이미지와 맞지 않아 설정이 변경됨 7. 마녀는 애초에 청불을 생각하고 만든 작품인데 ‘영상물등급위원회’에서 15세 판정을 내림 (판타지 요소 때문이라고 함) 8. 마녀 연구소는 전세계에 7곳 시즌1 마지막 장면 닥터백 동생이 있는 곳도 원래 설정상 태국인데 제작비 부족 문제로 제주도에서 촬영했고 설정도 바뀜 9. 감독님 왈 시리즈물이 잘 되면 각 캐릭터별 솔로무비도 만들고 싶다고 함 (귀공자, 긴머리, 닥터백 등등) 10. 귀공자가 자윤에게 가장 부러워했던 것은 ‘이름’ (자윤은 일반 가정에서 자라며 이름이 생겼지만 다른 캐릭터들은 이름 없이 애칭뿐이다) 감독님 피셜 <마녀>는 이름을 가지고 싶어하는 아이들의 이야기 11. 마녀 프로젝트는 닥터백 동생이 설계한 것 동생이 닥터백보다 더 높은 위치에 있고, 더 똑똑하다 10년 전 닥터백이 아이들을 다 폐기하라고 했을 때 동생이 아이들 몇 명을 빼돌렸음 닥터백 동생은 아이들에게 애정을 갖는 인물 12. 최우식 배우는 속편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제가 부활 가능성이 있겠네요. 한 연구실 속 유리관에 갇힌, 눈을 감고 산소마스크를 낀 채로 귀공자가 다시 태어난다면 말이죠. 감독님이 제게 같이 하자는 말씀은 아직 안하셨죠. 그래도 '마녀' 옆에 누군가가 있어야겠다는 생각은 들어요. 그게 제가 되었으면 합니다” 13. 속편에서는 또 다른 능력자들이 등장할 예정 감독님 피셜 분명한 건 지금까지의 자윤의 상대보다는 더 업그레이드된 캐릭터들이고, 이것이 다음 편 부제를 ‘충돌’이라고 한 이유라고 함 출처ㅣ디씨인사이드 김다미 갤러리
왕세자 저격 미수 사건과 방탄차
1990년 11월 12일, 도쿄의 궁성에서 아키히토 일왕의 즉위 퍼레이드식이 펼쳐졌다. 검정색 오픈카를 탄 일왕 부부는 길가에 몰려든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헤이세이(平成) 시대’의 도래를 알렸다. 퍼레이드에 사용됐던 오픈카는 그해 영국에서 4000만 엔에 구입한 롤스로이스 코니쉬 차종이었다. 3년 뒤인 1993년 6월 9일, 나루히토 왕세자 부부의 결혼 축하 퍼레이드에도 이 오픈카가 사용됐다. 나루히토 왕세자는 내년 새로운 왕으로 등극한다. 가을에 역시 즉위 퍼레이드가 예정돼 있다. 하지만 이번에는 롤스로이스 오픈카가 동원되지 않는다고 한다. 구입한지 28년 동안 단 2번 밖에 사용되지 않은 이 차는 연식이 오래돼 현재 주행이 어려운 것으로 전해졌다. 일본 정부는 국산차를 사용할 것이라는 방침을 굳혔다. 현재 외국 국빈 접대 등에 사용되는 왕실의 공식 의전차는 도요타 센추리 로얄이다. 즉위 퍼레이드에 사용되는 차는 그 자체만으로도 엄청난 홍보 효과를 갖는다. 일본 전국민들의 눈길을 사로잡기 때문이다. 일본 왕실이 퍼레이드용 오픈카로 도요타에 특별 주문을 할지, 아니면 다른 회사의 차종이 선택될지는 알 수 없다. 그런 점에서 일본 자동차 메이커들의 수주 경쟁이 치열할 것으로 전망된다. █ 1대: ‘영일 동맹’ 맺은 영국의 다임러 차종 선택 과거 일본 왕실에서 사용했던 차종들은 국제정세에 따라 변해왔다. 왕실의 전용 의전차를 ‘어료차’(御料車: 일본어로는 고료샤)라고 한다. 왕실 전용차가 공식적으로 사용되기 시작한 것은 다이쇼(大正) 일왕 때부터다. 당시 국가 원수의 차를 구입하기 위해 유럽에 조사단이 파견됐다. 다임러, 벤츠, 피아트 등 회사를 방문했는데, 최종적으로 결정된 것은 영국의 다임러(독일 다임러와는 별개)였다. 다임러가 선정된 것은 당시 일본과 영국의 관계 때문이라고 한다. 일본은 1902년 영국과 ‘영일동맹’(동아시아 이권을 나눠 갖기 위해 체결한 조약)을 맺고 친밀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이런 이유로 1912년 다이쇼 일왕 즉위식엔 다임러 란도레(Landaulet)라는 차가 사용됐다. 당시 영국 왕실도 다임러를 사용하고 있었는데, 일본은 같은 모델을 도입했다고 한다. 이 차가 일본 왕실의 ‘1대 의전차’다. █ 2대: 왕세자 암살 미수에서 롤스로이스 유리창 뚫려 ‘2대 의전차’가 도입된 건 1921년(다이쇼 10년)이다. 고급차의 대명사인 영국 롤스 로이스의 실버 고스트 차종 2대를 들여왔다. 그런데 이 롤스 로이스를 수입한 2년 후, 황태자 암살 미수 사건이 발생했다. ‘도라노몬’(虎ノ門) 사건이다. ... ( 기사 더보기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217 ) <이재우 기자(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