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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편) 움짤로 보는 50년 전 한국.gi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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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군의 월남전 파병이 결정되었다.

만 38세의 나이에 맹호부대 사단장 겸 주월한국군 사령관으로 임명된
채명신 소장(당시 38세, 조선경비사관학교, 6.25 참전)이 수통과 탄띠를 패용하고 
현충원에 묵념을 올리고 있다.

수도사단 맹호부대 사단장 - 소장 채명신 (당시 38세)
제9보병사단 백마부대 사단장 - 소장 이소동 (당시 38세)
해병 제2여단 청룡부대 여단장 - 준장 이봉출 (당시 39세)




1965년, 파병을 위해 도열한 수도기계화보병사단 (맹호부대) 병력





전선으로 떠나는 제 9보병사단 (백마부대) 장병들의 결연한 표정





부동자세의 해병 수색대 병사들





서울 시가지를 통과하는 장병들을 향해 기도를 올리는 노인과 
부채질을 해 주는 아주머니의 모습이 카메라에 담겼다.





월남 전선으로 향하는 국군 수송을 위해 36개편의 열차가 동원되었다. 
시민들과 장병들의 어머니들이 언덕 위에서 열차가 떠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다.





대구역에서 잠시 정차한 수송열차.
한 병사가 역까지 배웅을 나온 어머니의 손을 붙잡고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국군 장병을 위해 기차역에서 먹을 것을 나누어주는 중년 여성.





부산항에서 승선 전, 부하들을 향해 악수하는 중대장을 바라보는 
해병 소위 이학철 (당시 23세)





파월 1진 청룡 제3대대 9중대장 김종세 대위 (중앙, 당시 28세), 
박준교 상병 (왼쪽, 당시 22세), 정명국 일병(오른쪽, 당시 21세)이 인터뷰를 가지고 있다. 

김종세 대위: '적들에게 우리 대한 국군의 전투력과 기백을 보여주겠습니다.'
대한뉴스 박무환 기자: '삼천만의 마음이 국군과 함께 합니다. 호국영령들이 대한의 남아들을 수호할 것입니다. 무운을 빕니다.'




마지막 승선 인원인 맹호 혜산진부대 소속 소대장 소위 최정길(당시 24세)이 
부산시 부시장을 비롯한 환송 인원들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당시 국내 최대의 여성단체 한국 부인회 회원들이 맹호부대 장병들을 환송하고 있다.





떠나는 장병들을 환송하는 부산 시민들과 수송선 난간을 가득 메운 장병들.





출발하는 수송선. 부산 시민들의 응원에 군가로 화답하는 장병들





멀어지는 부산항을 바라보는 해병 병사의 모습





첫 국내 기술로 만든 라디오가 시판되었다. 납땜질에 열중하는 어린 여공들.





식목일에 나무를 심기 위해 산으로 향하는 시민들.
민둥산에 나무를 심고 있다.





가을 날, 학생들 간의 유도 대결이 펼쳐지고 있는 어느 학교 교정.





1967년, 제2회 전국학생씨름대회. 씨름 프로대회가 존재치 않던 시절, (씨름 프로대회는 80년대) 
전국 고등학교의 힘깨나 쓴다는 학생들이 모였다. 다른 지역 학생들의 경기를 살펴보는 서울 고등학생들.




치열한 결승전, 경북 영신고등학교 학생이 우승을 차지했다.






강원도 삼척시에 폭설이 내렸다. 지붕에 쌓인 눈을 치우는 주민들.





생활 체육으로 나날이 인기를 더해가는 씨름이 소개되었다.
씨름 대회를 구경하는 수많은 인파들.





소나기에도 구경하는 사람들. 우승자 김학용 (당시 26세) 씨가 황소 한 마리를 상품으로 수령하고 있다.
(* 김학용 씨 훗날 프로 씨름이 생기고 감독이 되면서 강호동을 천하장사로 키워냈다. 2007년 별세.)





국군 장성들 월남전선 방문.
전쟁터에서 경계근무 중인 해병 병사의 덥수룩한 수염을 만지며 웃는 육군참모총장.





주월 맹호부대 병사들이 시멘트로 만든 역기로 밀리터리 프레스를 하며 체력 단련을 하고 있다.






대다수가 임관과 동시에 월남 전선으로 파병될 ROTC 5기생 생도들이 
대간첩작전에 참여한 경력이 있는 교관으로부터 산악 게릴라전 교육을 듣고 있다.






'웃지않는 한국 해병대' - 미국 UPI 뉴스 보도

1967년, 짜빈동 전투에서 중대 병력으로 월맹 정규군 정예 1개 연대 병력과 
맞붙어 승리한 해병 11중대 장병들이 미군의 초청을 받아 계단 위에서 위문 공연을 지켜보고 있다. 

선글라스를 낀 정경진 대위 (당시 28세, 중대장)와 김용길 중사 (좌측, 당시 26세), 
중앙에서 카메라를 노려보는 어느 청룡부대 11중대 병사가 카메라에 담겼다.





당시 '철권'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김기수의 경기를 보기 위해 서울 운동장 특설링을 가득 메운 시민들. 
복싱 세계 주니어미들급 챔피언인 김기수 (당시 27세)가 도전자 프레디리틀 (미국)과 15라운드까지 맞붙고 있다.





도전자를 압도하는 김기수. 기립박수로 환호하는 시민들.





타이들 방어에 성공한 김기수(당시 27세)의 기념촬영.





1968년, 부산시 풍경





1968년, 서울의 모습





하늘에서 본 1968년 서울





첫 개통한 아현고가의 모습, 자전거가 지나다니고 있다.
4 Com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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찡하네요....
기도하는 어머니 모습에 울컥합니다.
요즘 군인들 대하는거 보면 어쩌다 이리되었나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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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는 언제였을까?
고려는 외교로 해결이 안 되면 여지없이 맞서 싸우는 전법을 구사했습니다. 이에 거란의 2차, 3차 침공 시에는 서희에 의해 고려 영토로 인정받아 개척한 강동 6주에 쌓은 여러 성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적을 차단했고, 3차 침입 시에는 강감찬 장군의 귀주대첩으로 거란의 정예군 중 하나인 우피실군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입어 더이상 거란이 송나라를 압박하지 못하게 되면서, 송, 거란, 고려 3국간 힘의 균형이 맞춰집니다. 이에 송나라는 거란의 최강 부대를 압살해버린 고려를 우대하지 않을 수 없게 됩니다. 당시에 송과 거란이 각각 황제라고 칭하자 고려 역시 스스로 황제국임을 내세우게 되지요. 중세 유럽에서야 교황이 신의 이름으로 한 명의 황제만을 로마제국 황제의 후예로 지명했지만, 동양에서는 힘센 쪽이 스스로 황제라고 부를 수 있었으니까요. 우리는 흔히 5000년 내내 중국에 짓눌리다가 현재에 이르러서 겨우 수십 년간 중국을 얕볼 수 있는 위치로 올라섰다가 다시금 눈치 보는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귀주대첩 이후 고려 사신은 송나라에 가서 갑질을 톡톡히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북송의 문신이자 대문장가이자 동파육 요리법의 발명가로도 유명한 소동파는 고려를 증오한 대표 인물이 되고 맙니다. 소동파는 7번이나 “고려 오랑캐와는 상종도 하지 말라.”는 상소를 올렸다지요? 그 이유가 바로 고려 사신들에게 접대하는 비용이10만 관도 넘게 들며 고려 사신이 가는 곳마다 백성들과 말을 징발하고 영빈관을 수리하느라 고통받고 있다며 그 돈이면 수만 명의 백성을 구할 수 있다는 논리였습니다. 송 황제 : “여봐라. 고려에서 사신이 온다. 성대한 잔치를 준비하고 영빈관을 빨리 수리하라” 고려 사신 : “여~ 황제님. 성대히 환영해주셔서 감사하고려. 우리에게 줄 선물도 잘 준비하셨소?” 소동파 : “아. 열받아. 동쪽 오랑캐한테도 뜯기다니! 동파육이나 쪄서 빼갈이랑 마시면서 스트레스 풀어야지~.” 고려 사신 : “동파 선생, 열받으셨소? 거란이 쳐들어올 때 우리 고려가 송을 도와줄지 다시 한번 고려해보시요?” 송 황제 : “거. 동파는 찌그러져 있으라. 불쾌하게 만들어 미안하다. 우리랑 계속 잘 지내자~.” 고려 사신 접대에 쓰인 비용이 정말 10만 관이었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 상소문이 사실이면 북송이 서하(西夏)에게 뜯기던 공물의 2배 비용이고 거란에 바치던 공물값에 필적하는 수준이었답니다. 거란이나 서하에게는 군사력에서 밀리니 그만큼 뜯기는 건 어쩔 수 없지만, 도와준다던 동맹국에게도 뜯기는 건 참을 수 없었나 봅니다. 이처럼, 거란을 물리친 고려는 중원 정통왕조인 송나라로부터도 상납을 받으며 큰소리를 쳤으니 실로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가 바로 이때가 아니었을까요? 비록 영토는 줄었지만 고려 인구는 고구려에 비해 2배 이상 많았고 상시 동원 가능한 군대가 20만~ 30만 명이었다고 하니 국력은 고구려보다 오히려 더 강했으며 후대 조선보다 더 강력한 상비군을 조직한 국가였습니다. 이처럼 고려가 한때 중국에게 갑질한 내용을 정작 우리는 잘 모르고 있지만, 중국인들은 그게 그렇게 사무쳤는지 1999년 제작한 대만 드라마 ‘소년 포청천’에 고려 태자가 송나라에 와서 행패를 부리다가 살해당하자 고려가 이에 앙심을 품고 쳐들어올까 봐 송 황제가 덜덜 떠는 에피소드가 등장했다고 하네요. 뭐 고려 태자가 살해당했다는 건 전혀 역사적으로 말도 안 되는 내용이긴 합니다. 어이~, 너네 중국은 쭉 우리한테 갑질했어. 이 사람들아! 어떻습니까? 그동안 몰랐던 고려의 위대함이 새삼 놀랍지 않으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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