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뒤면 10월인데, 아직 선풍기를 쐬고 있다. 여름은 올해에 미련이 많은 것 같다. 당최 떠날 줄을 모른다. 가을이 설 자리가 없다. 가을은 밤에만 간신히 온다. 반년 전부터 봐둔 트렌치코트가 있는데, 구매를 해야 할지 난감하다. 많은 이들이 잘 알겠지만, 트렌치코트를 입을 기회란 상당히 적어서, 약간의 더위를 감안하고 늦여름에 입든지, 약간의 추위를 감안하고 초겨울에 입든지 하는 수밖에 없다. 아무리 날을 잘 골라서 입어도, 하루 중 어느 순간은 트렌치코트가 좀 덥게 느껴지거나, 춥게 느껴지는 것이다. 그렇다고 밤에만 돌아다닐 수도 없잖은가. 트렌치코트를 입고 잠자리에 드는 상상을 잠깐 해본다. 트렌치코트를 처음 고안한 사람은 트렌치코트가 설 자리가 이토록 협소하다는 것을 예상했을까. 그런데도 트렌치코트를 찾는 사람들이 많은 것으로 봐서는, 그의 생각이 옳았던 것 같다. 트렌치코트는 찰나의 패션이다. 트렌치코트의 구매 여부는 더 고심한 후 결정해야겠다. 문학과 연관이 없는 취미를 하나 갖고 싶다는 생각을 오래전부터 하고 있다. 어쩌면 당연하게도 그중 하나가 악기로 기울었는데, 그렇다면 이제 악기 중 무엇이 될 것이냐가 문제다. 크게 관악기와 현악기, 타악기로 구분해 볼 수 있을 것이다. 관악기는 애초부터 접었다. 물론 편견이겠지만 어릴 적 리코더를 불다 보면, 연주에 심취해 악기 속이 습기와 침으로 흥건해지는 일이 있었는데, 그런 곤란한 상황은 만들고 싶지가 않다. 모든 관악기가 그런 식은 아니겠지만, 아무래도 입을 대야 하고, 연주에 심취하다 보면 왜인지 내가 굉장히 못생긴 표정을 짓고 있을 것만 같다. 관악기 연주자들이 다 그렇다는 것이라, 어쩐지 나라는 인간은 그렇게 돼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다. 오해 없으시길 바란다. 그래서 자연스레 관심이 현악기로 기울었는데, 조금 독특한 현악기를 찾아보다가, 시타르라는 악기를 알게 된 것이고, 사실 시타르는 내가 존경하는 시인이 즐겨 연주하는 악기이기도 해서 흥미롭기도 했지만, 결국 그를 따라 하고 싶지는 않아서 시타르 역시 접었다. 그러다 문득 샤미센이라는 악기에 관심이 기울었고, 다음 문제는 과연 샤미센을 가르쳐주는 곳이 있기는 한가, 라는 생각이 들었으며, 알아보니 종로에 위치한 일본공보문화원에서 종종 수강생을 모집해 가르쳐주는 것 같았다. 그러나 아, 그렇군, 하고 말았던 것이며, 우선 샤미센에 대한 생각은 접어두고, 해금을 또한 생각해보았는데, 혹시 해금을 독학할 수는 없을까, 하고 알아보니, 해금은 독학하기에는 몹시 어렵다는 것만 알게 되었다. 사실 나는 연주할 수 있는 악기가 하나 있긴 하다. 바로 피아노인데, 현재 나는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5년이 넘었으며, 말 그대로 피아노 연주에 있어서는 장롱면허라고 할 수 있는 상태이다. 함부로 피아노 건반 앞에 앉았다가는 사람을 칠 것 같아서는 아니지만, 어쨌거나 피아노를 치지 않은 지 오래되었고, 흥미가 없는 바는 아니지만, 큰 열정이 생기지는 않는다. 피아노는 현재 집 한구석에 흉물로 방치돼있다. 백남준이 피아노를 넘어뜨리던 퍼포먼스용으로나 쓸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는 사촌이 결혼을 앞두고 식에서 내게 연주를 부탁해서, 사실 연습 삼아 몇 번 피아노를 치긴 했지만, 그것은 가족을 위해 사촌이 직접 연주를 해준다는, 아주 미미한 ‘의미’는 있을지언정 의미를 제외하고는 아무것도 없는, 형편없는 연주밖에 되지 않을 것이어서, 이래저래 취소되었다. 어쨌든 오랫동안 생각을 하면서도 결국 악기에 대한 취미를 못 가지는 것은, 사실 악기를 연주하고 싶은 것이 아니라, 뭔가 독특한 것을 해보고 싶어서, 악기를 동원하는 것뿐이고, 사실상 그 정도의 열정이 없기 때문이다. 악기에게 사죄하고 싶다. 아, 타악기 얘기를 빼먹었다. 젬베는 애초부터 관심이 없었고, 드럼은 내 박자 감각이 받쳐주지 못한다는 생각으로 처음부터 접었다. 내 취미는 생각해보니 아무래도 이래저래 핑계 대기인 것 같고, 조금 더 논리적인 핑계를 대기 위해서 논리학과 철학 관련 서적 읽기를 취미로 삼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그것도 크게 열정이 일지는 않는다.
realrapp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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