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eavened
10,000+ Views

미스터 글로벌, 화제가 된 전통의상 부문 사진들.jpg

오 이런 대회가 있는지 몰랐는데 최근 <미스터 글로벌> 이라는 대회를 했었나봅니다.
각 커뮤에서 화제가 되고 있는 전통 의상 부문 사진들... 이런식으로 화려하게 각국 전통의상을 보니까 신기하네여... 그 나라 고유의 멋도 느껴지고...
그리고! 한국 분이 최종 우승하셨다고 합니다! 대단.. 그리곸ㅋㅋㅋ 킬포는 맨아래 미국...






미국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니 진심이였어?

+ 최종 우승 하신 김종우님.



TOP 5 일 때




(ㅊㅊ - 도탁스, 인스타그램)
22 Comments
Suggested
Recent
갓쓰고 대금불었음 더 궨즤났을듯
@Voyou 상상만해도 카~~~~~~!!!😌
식스펙은 의상에 다 포함되어 있나부네요
그와중에 슈퍼맨 미국이3위.. ㅋ
스리랑카 티켓끊으러 갑니다 넘잘생 ㅋㅋㅋㅋ
확실히 우리나라가 단아하고 절제된 멋이있죠. 색감도 좋고 ^^ 토고랑 튀니지 평소에 입어도 별로 안 이상할듯 ㅎ 그나저나 미국 어쩔....ㅠㅠ
Cards you may also be interested in
[퍼오는 귀신썰] 북망산 가는 길 -2-
연휴는 다들 잘 보내고 있어? 옛날 설은 어땠는지 생각도 안 날 정도로 잔잔한 명절이네 이런 것도 나쁘지 않구 설에 집에 안 가는 사람들도 많을텐데 외롭지 않게 같이 귀신썰이나 보자 ㅎㅎㅎ 그럼 이야기 이어 갈게! ___________________ 3. 집안 공기가 미묘하게 뒤틀린 것 같았다. 거실을 걸어 나가는데 이유 없이 ‘저릿’ 하는 느낌이라던가, 어쩐일 인지 공기 밀도가 평소와 다르게 느껴진다거나. 몸살이 오는 것쯤으로 치부하고 있다가 문득, 언젠가 한번 경험한 적이 있는 감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오래전 방문했던 선배형 방, 옥탑방 주제에 방이 세 개나 있던 그 집. 한구석 있던 방문을 열며 선배는 말했다. “이 방은 여자 귀신 두 명이 사는 방인데” 하하 대수롭지 않다는 듯 웃으며 방으로 들어갔지만, 방에 발을 디디자마자 바로 알 수 있었다. 그 말이 진담 이었다는 걸. 기묘하게 뒤틀린 것 같은 시각감, 거실과 완연히 다른 공기 밀도감, 들어가자 순식간에 축축해져 버린 것 같은 대기. 그 선배는 틀렸다. 방에는 여자귀신 두 명‘만’이 아니었다. 내 집 공기로 선배 집에서 느껴봤던 기분을 받게 되다니. 처음 그녀는 새로운 집에 대한 탐색전을 펼쳤나 보다. 삼사일간은 아무 일 없다는 듯. 나 또한, 뭔가 기분이 이상하긴 한데 꼬집어 정체를 말할 수 없는 불쾌감만 가졌다. 일주일여가 가까이 되자 그녀는 정체를 드러내고 싶었나 보다. 침대에 누워 잠을 청하고 있는데 어디선가 킥킥하는 여자 웃음소리가 들려 왔다. 웃음소리는 기이하게 멀었다. 그게 아니라면 기이하게 가깝던지. 처음 그 소리가 들렸을 때 ‘옆집 소리가 넘어오나?’ 생각을 했다. 방음이 꽤나 잘돼 있는 아파트라고 생각 했는데, 여자 웃음소리조차 막아 내지 못한다니. 일견 실소가 났다. 또, 킥킥 소리가 나자. 그게 아니다. 옆집이라고 다음에는 소리가 너무 가깝다. 수마가 몰려오던 머릿속에 얼음물을 끼얹은 듯 확 얼어붙었다. 이상하리만큼 가깝다. 공포감에 몸이 얼어붙었다. 눈을 댕그랗게 뜨고 방을 쳐다보고 있자니 십분 이십분의 시간이 흘러갔다. 이건 뭔가 이상하다. 눈을 한번 감았다 뜨니 십 분이, 또 다시 한번 감았다 뜨니 십 분이 훌쩍 지나가 버린 느낌이다. 킥킥, 온 몸에 피가 거꾸로 역류 했다. 소리 발신지는 침대 밑 이었다. 벌떡 일어나 뛰어 다니며 온 집에 불을 켰다. 그녀는 정체를 적극적으로 드러내고 싶어 했다. 그렇다고 정면으로 모습을 드러내지는 못했다. 소름끼치는 웃음소리만으로 괴롭혀 오던 그녀는 어느 날 정체를 드러냈다. 어느 날 머리를 감고 화장실과 드레스 룸의 불을 끄고 침대 끝자락에 앉아 있는데, 드레스 룸 안에 분명 누군가 있었다. 드레스 룸 시공간이 기묘하게 뒤틀려 보이기 시작 했다. 저기가 갑자기 왜 저래? 생각하며 뚫어져라 보고 있다가 드레스 룸 문 사이로 나를 쳐다보고 있는 빨간 눈과 눈이 마주쳤다. 국도에 서있던 그녀가 나를 따라 오다니. 상상 할 수도 없었다. 그 날 차에서 내려 그 자리를 맴돌았다거나, 무엇을 주워 온다거나 만지지도 않았는데 어떻게 나를 따라 온 거지? 가끔 그녀를 나를 만졌다. 힘들게 힘들게 잠이 들라 치면, 아주 차갑고 축축한 누군가 손이 내 발목을 스윽 하고. 한참을 시달리다 고양이를 데려 오기도 했다. 고양이가 귀신으로부터 나를 지켜준다거나 귀신을 쫒아줄거라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다만 작은 생명체 하나라도 더 있으면 약간 안심이 되지 않을까, 하는 심정으로 품에 안고 왔다. 자그마한 페르시안 친칠라는 내 품에 안겨 고물거리며 냐옹, 귀여운 애교를 부렸다. 집에 온 첫날부터 녀석은 하악질을 했다. 어느 순간에 거실 허공에 대고, 어느 순간에 화장실에 대고, 어느 순간에 침대 밑으로. 하악질을 할때마다 등과 꼬리를 곧추세우고 전력을 다해 하악질을 해대던 녀석은 어느날 퇴근하고 집에 오니 사라져 있었다. 도대체 17층, 온 창문이 꽁꽁 닫혀 있는 집에서 녀석이 어떻게 탈출 했는지 이해할 수 없었다. 온 집안과 아파트 단지를 새벽 까지 이잡듯 찾아 헤맸지만 녀석의 흔적은 찾을수 없었다. 4. 영범 형은 하루가 다르게 말라 갔다. 얼굴이 시커멓게 타들어 가고 살가죽이 말라 뼈에 붙어 가는 모습은 췌장암에 걸려 세상을 떠났던 고모부 모습과 닮아 있었다. 죽음의 그림자가 서서히 형의 신체에 영향을 끼칠수록 형은 삶에 강한 애착을 보였다. 수금이 안 된 거래처를 돌며 악다구니를 써 악착같이 받아 냈고 (수금이 안돼도 술 한 잔하고 허허 거리며 돌아오던 과거 모습과는 완연히 달랐다) 육개월후 공사일도 수주를 했다. “형, 이제 좀 집에서 쉬는 게 어때요?” 나는 그렇게 말했다. “쉬면 어떡하냐? 한 푼이라도 더 벌어야지” 형은 그렇게 말하며 사람 좋게 웃었다. 하긴, 암선고를 받기 몇 개월 전만 해도 이제 사는 게 좀 필 것 같다. 나도 노년에는 팔자피고 살아봐야 하지 않겠냐며 말했던 시기였다. “내가 있잖냐, 너도 알겠지만 내 삶이 얼마나 스펙타클 했냐. 우리 애들 좋은 옷 못 입히고 해외여행 한번 못시키고 이날 이때까지 살다, 이제 좀 햇볕이 드나 싶었는데 이렇게 됐네. 다른 건 몰라도 내 갈 때까지 신세진 사람들한테 해줄 수 있는 만큼 하고 가야지. 나는 그때 혹시 형이 살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어이없는 생각을 했다. 이미 얼굴로 길게 드리워진 죽음의 그림자를 보았으면서 말이다. 한 달 후 형의 사망통보를 받았을 때 나는 앓아누워 있었다. 이유 없이 몸에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온 전신이 아팠다. 불청객의 여자귀신 때문에 시시때때로 시달렸기 때문에 체력이 바닥을 치고 있을 때 였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녀는 적극적으로 어필하기 시작 했다. 샤워를 하며 머리를 감다 눈을 뜨면 앞에서 웃고 있었고, 잠을 자다 침대에서 눈을 뜨면 코앞에 둥둥 뜬 채 웃으며 나를 바라보는 날이 잦았다. 그날은 몸이 너무 아파 회사에 통보를 하고 집에 누워 있던 날 이었다. 정확히 오전 열시에 카톡으로 문자가 왔다. “**야 그동안 너 한테도 신세 많이 졌다. 신세 갚지도 못하고 가네. 미안하다.” 나는 잠들어 있느라 그 톡을 못 봤다. 잠이 깬건 열두시경 친구 녀석 전화 소리 때문 이었다. “형 갔다.” 녀석은 짧게 말했다. 아, 그래. 말을 하고 움직이려니 몸이 움직이지 않았다. 정말 거짓말처럼 꼼짝할 수 없었다. 온몸은 신열로 덮여 있었고 목이 아파 마른침조차 삼키지 못했다. 카톡에 미확인 메시지가 떠 있었는데 그 메시지는 영범 형이 보낸 문자 이었다. 기분이 이상했다. 나는 장례식장에 얼굴을 비추지 못했다. 훗날 친구 녀석들은 영범형 장례식장에 내가 나타나지 않은게 최대 이슈 였다고 한다. 종범이 아버지 가셨을 때도 모든 절차는 내가 다 처리 했었으니까. 5. 아픈 건 별개 문제였다. 즈음에 나는 현실적인 시공간이 무너져 내리는 경험을 하고 있었다. 땀을 흘리며 끙끙 거리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아파트 앞에 서 있었다. 쨍쨍 맑은 햇살에, 적당히 기분 좋은 산들 바람도. 나온 김에 마실거나 좀 사가야 걷다. 마트에 가서 물을 집어 들고 돈을 치렀는데, 다시 나는 침대에 있다. 꿈이었나? 하는 순간 다시 아파트 앞에 서있다. 꿈과 현실의 나선형 경계를 지나는데 어느 지점이 꿈이고 어느 지점이 현실인지 도무지 분간되지 않았다. 목이 말라 부엌으로 나가면 꿈에 샀던 그 물이 까만 비닐봉지 안에 든 채 식탁에 놓여 있었다. 너무 두려운 기분에 눈물을 흘렸는데 아파트 앞을 엉엉 울며 걷다 정신을 차리면 침대에서 엉엉 울고 있었고 도대체 어디가 어디냐 라는 심정에 정신을 차려보면 계속 아파트앞 도로를 걷고 있었다. 미궁에 빠진 현실에 괴로워 할수록 침대 밑 여자 웃음소리가 크게 들렸다. [출처] 북망산 가는 길 2 | hyundc ___________________ 왜 이렇게 무섭냐 대체 저 여자는 뭔데 따라와서 이렇게 괴롭히는 걸까 나는 저렇게는 못 산다 무서워서 어떻게 살아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다음 이야기는 내일 같이 보자! 잘 자고 오늘도 새해 복 또 받아! ㅎㅎㅎㅎ
학교 폭력에 시달렸던 박지성
나를 때린 수많은 선배들에게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는지 모르겠지만 얻어맞는 입장에서는 이해할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그저 후배라는 이유만으로 선배의 몽둥이 세례를 견디어야 한다는 것, 축구를 하기 위해서는 부당한 폭력을 묵묵히 참아내야 하는 상황이 나를 힘들게 했다. 잘못해서 맞는 것이라면 100대라도 기분 좋게 맞을 수 있었다.  하지만 어제는 저 선배가 기분이 좋지 않아서, 오늘은 이 선배가 감독한테 야단맞았기 떄문에 밤마다 몽둥이 찜질을 당해야 하는 것은 참기 힘든 일이었다. 학창시절 셀 수 없을 정도로 선배들에게 두드려 맞으면서 속으로 다짐하고 또 다짐했다. "나는 결코, 무슨 일이 있어도 후배들을 때리지 않겠다" 그리고 스스로와의 약속을 지켰다. 중학교에서 고등학교에서 최고참 선배가 되었을때도 나는 후배들에게 손을 댄 적이 없었다. 후배들에게 진정 권위있는 선배가 되고 싶다면, 실력으로 승부하기바란다. 실력과 인품이 뛰어난 선배에게는 자연스럽게 권위가 생긴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그동안 내가 뛰어난 선배들을 직접 겪으며 얻은 교훈이기도 하다. 어렸을적 어머니 심부름으러 오천원짜리 지폐를 들고 밖에 나섰다 잃어버렸던 날, 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어머니께 맞았습니다. 고작 한 대 맞은 것이라 그리 아프지 않았는데도 어머니는 그날 이후 며칠간 내게 무척 미안해했습니다. 축구부 합숙을 시작하면서 정말 정기적으로 매일 구타를 당하던 나를 보셨다면 아마도 까무라치셨겠죠. 박지성 어머니가 박지성에게 보낸 편지中 학창시절 멍이 시퍼렇게 들도록 맞고 들어와 혹시나 엄마 눈에 눈물이 맺힐까봐 친구하고 부딫혀서 그렇게 되었다며 겸연쩍게 씩 웃던 속 깊은 네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하구나. 아버지 자서전 中 지성이가 초등학교 6학년 겨울방학대 그 중학교 축구부에서 며칠 훈련에 참석했다가 심하게 몸살을 앓았다. 분명 학교에서 무슨일이있었던 것 같은데, 아무리 추궁해도 입을 열지 않았다. 여기저기 멍자국이 많아서 어떻게 된 일이냐고 물어도 신경쓰지 말라고만 했다. 나중에서야 이유를 말하길 "아빠, 내가 단체 훈련 끝나고 따로 개인 훈련을 했거든요. 그런데 선배들이 왜 너만 따로 훈련을 하느냐, 다른 선수들은 쉬고 있는데, 왜 유독 너만 튀는 행동을 하느냐면서 때리더라고요" 그후 박지성은 원래 가려던 중학교를 안가고 집에서 멀리 떨어진 중학교로감 아버지 자서전 中 "아빠, 전 절대 수원공고엔 가지 않을거에요. 3년 동안 화성에서 생활 하면서 다시는 수원에 가지 않겠다고 약속하셨잖아요. 지금 수원공고에는 절 괴롭혔던 사람들이 모두 뛰고 있단 말이에요" 수원공고 1학년 축구부 동기들도 지성이를 싫어했으니, 지성이의 마음고생이 어떠했으리란 건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다. 수원공고에 다닐 당시 선배의 구타에 못이겨 몇몇 선수들끼리 팀에서 도망을 치기로 계획을 짰다. 당연히 박지성도 그 멤버에 포함이 되어 있었다. 그러던중 디데이 며칠을 앞두고 훈련 후 선배의 구타에 박지성의 팔이 부러졌다. 어쩔 수 없이 박지성은 합숙소에서 집으로 돌아가야 했고, 부상으로 인해 축구부 숙소 이탈 약속을 지킬수 없게 되었다. 수원공고 시절 지성이가 훈련을 마치고 집에왔는데, 방에서 끙끙 앓는 소리가 났다. 무슨일인가 싶어서 방문을 열어봤더나 인기척 소리에 후다닥 이불을 덮고 엎드려 있는 지성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왜그래? 어디 아픈거야?" "아니. 그게 아니고요. 그냥 좀 힘들어서.. 별일 아니에요" 아무리봐도 이상하다 싶어 이불을 들쳤더니 세상에 무릎까지 바지를 걷어 올린 부분에 뻘겋게 피멍이 들어있었다. 지성이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강제로 바지를 내리고 엉덩이를 확인하자, 온통 씨뻘건 멍투성이였다. 운동하는 선수들이라면 훈련 외에 구타와 체벌은 덤으로 따라다니는 부분이라 나 역시 알면서도 웬만해선 눈감고 못 본척 넘기기 일수였다. 그러나 그때 내가 직접 목격한 모습은 도저히 용납할 수가 없었다. 당장 학교로 달려가서 지성이를 때린 사람을 붙잡고 마구 혼을 내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때부터일까, 지성이가 한국에서 축구를 했다간 선배들 등쌀에, 또한 줄서기 좋아하는 일부 사람들의  사심에 의해 제대로 크지도 못하고 주저 앉을 것만 같았다. 가끔 지성이는 이런말을 한다 "만약 내가 맞지 않고 축구를 배웠다면 지금 보다 훨씬 더 잘할 수 있었을 텐데.." 박지성 축구센터를 세운 이유도 이때문이다. 더이상 아이들이 폭력적이고 억압적인 분위기 속에서 축구를 배우기 보다는 더 나은 환경속에서 축구를 자유로이 즐기도록 하기 위해서이다. 박지성 축구센터를 통해 어린이들이 좋은 환경에서 공을 차고 달리면서 희망도 함께 꿈꾸길 바란다. 차범근이 박지성 국가대표 은퇴 발표를 하고 난뒤 쓴글.. "지성이가 은퇴를 합니다. 아니 한다고 합니다.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무릎에 물이 많이 차는 모양입니다. 무릎을 너무 많이 쓴 것이 그 이유입니다. 그것도 무리하게 어려서 부터.. 지난핸가. 지성이가 어딘가에서 스피치를 하면서 우리나라 처럼 맞으면서 축구를 하는 나라는 없다고 했던 기억이 납니다.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을 터인데 유독 그 얘기를 했습니다. 그 결과, 오늘 우리가 그토록 아끼고 자랑스러워 하던 최고의  선수를 30살에 은퇴시키는 안타까움 앞에서 멍하게 바라보고 있는 것입니다." 출처 : 오유 유소년 대회도 열고 자선경기도 열어서 열악한 환경에서 축구하는 애들한테 다 기부하던데 자기가 맞으면서 축구를 했던 시절이 끔찍한 트라우마로 남아서 그런지 자라는 아이들은 자신처럼 축구를 안 하길 바라는 마음이 엄청 큰거 같습니다.. 예체능계의 똥군기는 진짜 언제쯤 없어질까요
우리는 그를 ‘가왕’이라 부릅니다
대한민국에서 가왕(歌王)으로 불리는 가수 조용필. 그는 마음을 움직이는 노래로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울렸습니다. ​ 하지만 노래를 잘하는 가수는 많습니다. 그런데 왜 그는 항상 정상의 위치에 있는 것일까요? 그것은 그가 노래로만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것이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신 소록도 공연. 2009년 소록도를 처음 방문했을 때, 무대를 끝내고 돌아가면서 “다시 오겠습니다”라고 한 그의 말은 형식적인 인사치레로 들릴 법도 했습니다. ​ 하지만 그는 약속을 지켰습니다. 그것도 대충 때우기식 겉치레가 아닌, 하나부터 열까지 철저히 준비하고 찾아간 정성 어린 방문이었습니다. ​ 그리고 조용필 씨가 4집 앨범 발매 당시 전 매니저인 최동규 씨가 인터뷰로 공개한 일화도 우리의 마음을 따뜻하게 합니다. ​ 4집 앨범에 ‘비련’이란 곡이 실렸는데 어느 날 한 통의 전화가 걸려온 것입니다. 당시 4집 발매로 더없이 바쁜 일정을 소화하고 있던 때였다고 합니다. ​ 전화는 한 시골의 요양원장에게 걸려온 전화였습니다. “저희 병원에 14세 지체 장애 여자아이가 입원해 있습니다. 지금까지 어떠한 자극에도 감정의 미동도 없었는데 ‘비련’을 듣더니 갑자기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이의 부모님께서 돈은 얼마라도 드릴 테니 아이에게 조용필 씨가 직접 오셔서 노래 한 번 불러주시면 안 되냐며 간곡히 부탁합니다. 무리한 부탁인 줄 알지만, 노래가 안 되면 얼굴이라도 직접 보여주실 수 있는지..” ​ 매니저인 최동규 씨의 전화 내용을 전달받은 그는 잠시도 생각 안 하고 “병원으로 출발하자”라고 했다는 것입니다. ​ 그날은 공연이 4개나 잡혀있던 날이었다고 합니다. 당시 조용필 씨의 출연료는 꽤 높았으며, 공연을 취소하면 위약금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이었지만, 그는 위약금을 물어주고 시골 요양병원으로 간 것입니다. ​ 소녀는 자신 앞에 서 있는 조용필 씨를 아무 표정 없이 바라만 봤다고 합니다. ​ 그가 소녀의 손을 잡고 ‘비련’을 부르기 시작하자 소녀는 펑펑 울기 시작했고, 소녀의 부모도 지켜보던 병원 관계자들도 모두 울었다고 합니다. ​ 조용필 씨는 소녀를 조용히 안아주고 떠나려는데 아이의 엄마가 따라와 물었습니다. “선생님 너무나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저… 얼마를 어디로 보내드리면 될까요?” ​ 그러자 조용필 씨가 말했습니다. “따님이 오늘 흘린 눈물은 제가 그동안 벌었던, 또 앞으로 벌게 될 돈보다 훨씬 더 비싼 가치가 있습니다.” 그가 보여준 따뜻한 행동이야말로 돈으로 환산할 수 없는 정말 큰 감동입니다. 사람들에게 그는 최고의 정상에 있는 사람이었지만, 그에게 팬들은 정상에서 바라본 더 높은 산이었던 것입니다. ​ ​ # 오늘의 명언 가장 높은 곳에 올라가려면 가장 낮은 곳부터 시작하라. – 푸블리우스 시루스 –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 #가왕 #조용필
미얀마 실황 : 미얀마는 민주화의 꿈을 꾸는가?
우리의 근현대사의 아픔을 미얀마는 실시간으로 겪고 있네요. 부디 성공하길... + 조금 더 자세하게 알기) 출처 0. 들어가며 최근에 미얀마 군사 쿠데타관련으로 흥미가 많길래 미얀마와 관련된 글을 하나 쓰게 되었어 기본적으로 이 글은 내가 쓰는 글이 아니라 책을 참고해서 쓰는 것이기에 난 그저 편집자에 불과함을 밝히는 바야 1. 미얀마의 민주화바람 미얀마의 군사정권은 2011년까지 독재체제를 유지하다가 2011년부로 돌연 새로운 대통령에게 정권을 이양해버려 물론 그 대통령 역시 군부출신 인물이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민간정권이었으며 여러가지 개혁을 추진하겠다고 다짐했지 사실 처음에 군부가 지금까지의 군사독재를 끝내고 민간정권에 정권을 이양하면서 개혁을 공표했을때 대부분 헛소리한다고 생각했어 애초에 그 개혁내용을 보면 정권을 이양하되 의회의 25%는 군인에서 나오도록 헌법에 규정하고 이양했기에 영향력을 포기한다는 소리가 아니긴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의자유, 정치범 석방, 시위의 자유 등을 인정하는 군부의 태도는 미얀마 국민과 국제사회가 진짠가?라는 생각을 하게했지 (왼쪽 : 아웅산 수치. 오른쪽 : 군부출신의 대통령) 또한 명목상 최고지도자는 군부출신의 대통령을 두었지만 실질적으로는 민주화운동의 상징인 아웅산 수치가 실권을 가졌기에 군사독재에서 민주정권으로 넘어가는 과도기로 간주되었고, 미얀마의 미래에 대해 기대하는 사람들이 생겨났지 이런식으로 독재국가가 변화의 싹이 보이자 국제사회의 태도가 달라졌고, 특히 중국을 견제하려던 미국에게는 반드시 잡아야 할 국가로 보였어 당시 오바마행정부는 미얀마에 대한 제재를 해제하고 인도적 지원을 하면서 미얀마를 친미국가로 만들고자 노력했지 당시 미얀마를 방문한 오바마는 "어떤 개혁도 민족 화해 없이 성공하기는 어렵다"라고 말했어 이 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선 미얀마에 대해서 알아야 해. 미얀마는 100개가 넘는 민족들로 구성된 국가야. 물론 버마족이 다수민족으로서 70%정도를 차지해. 따라서 언제나 버마족이 중심이었고, 국명조차도 버마였던 시절이 있지. 그리고 모든 다민족국가가 그렇듯이 버마 역시 민족간 평화를 내세웠지만 어디까지나 이상론에 불과했어 미얀마의 현재를 알기위해서는 미얀마의 과거를 알아야겠지. 2. 미얀마의 근현대사 우선 미얀마의 군부는 스스로를 국가의 수호자로서 정의해. 모든 나라 군대가 그렇겠지만 미얀마 군부는 역사적 정통성을 가지고 있어 그리고 군부가 이러한 정통성을 갖게 해준 세력이 바로 일본제국이야 일본제국이 동남아전역을 지배했을때 당시 영국의 식민지였던 미얀마(당시 국명 버마)까지 점령했어 바로 이때 아웅산장군을 중심으로 미얀마 민족주의자들이 일본군과 협력해서 미얀마를 영국의 지배로부터 해방시킨거야 (물론 당시 중국에 있던 한국광복군이 영국과 협력해서 일본군(+미얀마세력)을 저지하고자 하기도 했지만 여기서는 생략하자) 그런데 영국을 몰아낸 일제는 그대로 미얀마를 식민통치했고 이에 반발한 미얀마 독립군은 그대로 일제를 향해 독립운동을 시작했지 뭐 단순히 게릴라에 불과했던 미얀마 독립군은 정규군인 일제를 이길 수 없었고, 결국 일제의 패망과 함께 독립을 맞이하....는게 맞는데 그러지 못했어 승전국인 영국이 다시 미얀마로 돌아왔거든 (별로 위대한 영국이 아니다 콘) 영국이 돌아와서 보니 일제에 저항했던 미얀마 세력은 아웅산을 중심으로 한 버마독립군과 영국군소속인 애국버마군 2개로 나뉘어져있었지 자세한 과정은 모르지만 영국이 미얀마에 돌아오고 아웅산장군이 암살되어버려. 흠.. 자세한 과정을 모르지만 대충 감이 오지? 아웅산장군이라는 구심점이 사라지자 버마독립군은 애국버마군에 흡수되었지만, 여전히 각각의 부대는 민족별로 구성되어있었어 근데 같은 군부의 지휘를 받는 각 민족부대들이 서로 적대시했던걸 보면 영국이나 일제보다는 다른 민족에 대한 적대감이 더 컸다고 보여 영국이 국력의 한계로 대충 식민지 포기하고 돌아가고 미얀마가 독립을 하게되자 이러한 민족갈등이 바로 내전으로 이어지지 또 당시 국제정세가 소련vs미국이었기에 중앙의 버마민족군(자본주의) vs 변방의 소수민족군(공산주의)라는 복잡한 내전양상을 가지게 되었어 근데 현재의 관점에서 바라보자면 소수민족들의 마음도 이해는 가는 편이야. 중간의 흰색부분이 미얀마의 핵심지대이고, 이곳에 사는 버마족은 인구의 70%를 차지하는 다수민족이야 그래 다수민족이니깐 국가의 중심이 되는 건 맞지만 소수민족들도 존중은 해줘야겠지? 애초에 민족 종교 역사가 다 다른 민족이니깐? 근데 국명부터 버마라고 해버리고 모든 국가의 기준을 버마족으로 잡아, 종교마저도. 불교를 국교로 정해버리면 이슬람을 믿는 소수민족은? 자연스럽게 중앙정부에 대한 반발이 발생했고 자치 혹은 독립을 요구하면서 중앙정부의 행정력은 버마족의 거주지까지로 제한되었지 이렇게 사회가 혼란스럽자 미얀마 군부가 쿠데타를 일으켜서 정권을 잡고 소수민족의 분리독립을 저지한다는 대의명분을 내세웠어 군인은 국가의 혼란과 위기를 막고 무능한 정치인들을 몰아내고, 혁명위원회를 구성해서 모든걸 처리하게 되었지. 어떤 나라랑 비슷하지? 군부정권이 시작되자 선거는 중지되었고 민주주의는 당연히 사라져버렸어. 물론 소수민족은 열심히 때려잡아서 독립은 저지했어 62년에 시작된 군사정권은 2011년까지 아주 오랫동안 지속되었어. 물론 군부가 경제정책을 잘 할리가 없으니 경제는 개판이었고 사회불만이 쌓여 민중들이 들고 일어났지만, "천안문"했어 그런데 2011년에 군부는 군사정권을 종결시키고 민간정권을 출범시키면서 개혁의지를 보이지. 왜 굳이 자신의 정권을 스스로 끝냈던걸까? 3. 왜 군부는 스스로 군사정권을 종결했는가? 60년도의 동남아시아와는 달리 2010년대의 동남아시아는 상호협력을 추구해 경제발전을 추구하고 있었지. 그런데 그런 흐름을 거부한 미얀마는 동남아시아의 3대 빈곤국(미얀마, 라오스, 캄보디아)에 속할정도로 경제가 피페해졌고 군부로서도 변화의 필요성을 느끼곤 있었어 또 군부가 내세웠던 소수민족의 독립을 방지해서 사회안정을 추구한다란 대의명분이 설득력을 잃어버렸기도 해 50년가까이 지속된 소수민족 탄압으로 소수민족의 세력은 크게 약화되어서 딱히 미얀마를 위협하는 요소가 없어졌거든 내부적으로 계속 민주주의를 원하는 국민의 압력과 외부의 국제적 압력을 버티면서까지 굳이 군사정권을 유지할 필요가 없어졌다고 판단한거야 군부가 원했던 건 권력이지 정부가 아니었으니깐 말이야. 그래서 군사정권을 끝내기전에 헌법을 통해 국회의 25%는 군인일 것을 명시하고 자신의 권력이 지속된다는 보장을 만든 다음에야 정상적인 선거를 시행했어 당연히 선거결과는 아웅산수치가 이끄는 민주주의 정당의 집권이었고 군부도 과거와는 달리 선거를 무효화하지않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었어 왜냐하면 어차피 의회의 25%는 군부가 차지하고 국방부와 내무부장관은 군부가 정하도록 헌법에 적어놨거든 군사독재의 현대화?를 통해 대내외적인 비난을 피하면서도 여전히 핵심권력은 유지할 수 있는거지 물론 아웅산을 중심으로한 여당은 지속적으로 헌법개정을 요구하지만 의회의 25%가 군부인데 통과가 될리가 없지 즉, 군부의 권력이 흔들리지 않는 선에서의 개혁만이 아웅산 민간정권이 할 수 있는 전부였다는 이야기야. 미얀마의 소수민족인 로힝야에 대한 지나친 탄압이 국제적 관심을 받았고 국제사회의 비난은 아웅산 수치를 향했어 민주주의의 상징이자 평화의 상징인 아웅산이 어떻게 로힝야에 대한 국가적인 탄압을 방치했느냐, 오히려 주도한거 아니냐?라는 비난이 일었지 완전히 틀린 말은 아니야. 아웅산은 로힝야에 대한 탄압을 충분히 인지했고 묵인한 사실은 분명하지 하지만 인지한다고 해서 아웅산이 할 수 있는게 무엇이 있을까? 군대는 전부 군부가 통제하고 군부가 용인했기에 집권한 아웅산이 뭘? 미얀마의 이러한 내부사정을 모르는 외부에서는 아웅산을 비난했고 이로인해 군부는 국제적 비난을 피해갈 수 있었지.  2011년에 군부가 정전협정을 맺은 소수민족을 향해서 군사작전을 개시했을때도 아웅산은 선제공격을 중단하라고 몇번이나 "명령"했어 하지만 군부는 선제공격이 아닌 "예방공격"이라며 공격을 개시했어. 형식적인 대통령과 실권자인 군부를 드러내는 대표적인 사건이야 4. 로힝야족, 역사와 종교 그리고 정치의 희생양 로힝야족은 "유엔이 세계에서 가장 박해받는 민족이라고 말했다"고 나무위키에 적혀있더라. 뭐 실제로 그렇기도 하지만 공식지정은 루머인듯 라카인이라는 지역에 로힝야족이 사는데 방글라데시와 국경을 마주해서 사실 이들은 방글라데시(과거 식민지인도)에서 온 민족들이야 불교가 대다수인 미얀마에서 인종, 문화, 언어, 종교적으로 인도에 속한 로힝야는 모든 것이 다른 이방인이야 애초에 영국이 미얀마를 지배할 때 백인의 숫자가 부족하니 인도인(로힝야)를 데려와 중간관리층 혹은 농경지를 개간하는 주민으로 이용한거지 과거 일본이 본토일본인을 조선으로 데려와 지배계층으로 두거나 조선인에게 빼앗은 토지를 경작하게 해주는거처럼 말이지 따라서 로힝야족은 버마족에게 있어 백인보다도 더 미운 존재가 되었지. 그런데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했다? 아 그럼 조지러가야지 조선의 많은 일본인들이 항복선언 이후 조리돌림당하고 본토로 귀국했던 것처럼 그게 자연스러운 흐름이야. 하지만 로힝야족은 그러지 못했지. 대부분의 로힝야는 돌아가지 못했고 심지어 동화조차 불가능했어 우선 인종적으로 로힝야와 나머지 민족들은 완전히 달라서 구분하기가 쉬웠어. 또 로힝야어와 버마어는 서로 소통이 불가능한 완전히 다른 언어야 또한 역사적으로도 로힝야에 분노했던 미얀마의 대부분 민족들은 로힝야를 국가의 일부로 인정조차 하지 않고 국적을 부여하지 않아 그들의 민족적 모국인 방글라데시는 경제는 붕괴했는데 인구만 1억이 넘다보니 로힝야를 데려올 능력이 없어 따라서 로힝야족은 국적이 없는 무국적자야. 또한 어떤 국가도 그들에게 교육같은 사회적 서비스를 제공해주지 않아 그러다보니 다수민족출신의 스님들과 대중들이 앞장서서 로힝야를 때려잡는 기묘한 사태가 벌어지고 있는거야. 불교가 평화의 종교라는 인식이 있는데 어딜 가도 소수종교는 평화롭고 착해. 한국에서의 이슬람을 보면 엄청 착하고 좋은 종교같지만 이슬람이 세력을 키운 나라에서는 알라께서 피를 원하시지 같은 논리로 불교국가인 미얀마에서는 오히려 불교가 타종교를 떄려잡는 모습이 나오게 되는거야 자, 이런 상황에서 로힝야사태에 대한 비난을 아웅산 수치로 향한다? 수치는 전지전능한 존재가 아니야 아버지의 이름인 "아웅산"을 통해 국민적 지지를 받고있는거지 실제로 군부가 허락하기전까지는 영국에서 살거나 가택연금상태에서 아무것도 못했어 물론 아웅산 수치 역시 자기딴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음은 확실해. 그녀가 노력하고 있다는 점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아 하지만 노력하는거랑 잘하는거랑은 분명히 다른 거야. 로힝야에 대한 탄압을 아웅산 수치가 막을 능력도 없고, 국민 대다수가 불교도인데 막는 시도라도 한다면 정치적 뒷감당이 되겠어? 아웅산 수치는 민주화의 상징이지만 그렇다고 전지전능한 인물은 아니야.  그녀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시간을 들여 점진적으로 군부의 영향력을 줄이면서도 대중의 지지를 잃지 않는거야 하지만 언젠가는 군부가 그어놓은 선에 도달할거고 그때가 되면 다시 정치적 변동을 겪을거야 5. 2021년의 군부쿠데타와 몇가지 예측 군부는 다시금 쿠데타를 실행했고 아웅산은 권력을 잃었지. 하지만 군부로서도 아웅산을 죽일 순 없고 연금이 한계일꺼야 21년의 쿠데타는 아직 진행중이고 알려진 것이 별로 없기에 우리로서는 그저 추측을 할 수밖에 없어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가지 확실한 것은 있지 우선, 미얀마의 군부문제는 외부세력에 의해 해결될 가능성은 적어. 중국이나 미국이 엄청나게 중요한 플레이어가 아니란 말이야 물론 중국과 미국은 미얀마를 놓고 경쟁을 벌이지만 어디까지나 조연에 불과하다는 말이지 두 번째로 한국의 6월항쟁과 같이 미얀마 국민들의 저항이 없다면 군부는 계속해서 권력을 유지할거야 현재 미얀마에서 시민들의 저항이 일어나고는 있지만 정말 강력한 수준의 저항이 있지 않다면 "천안문"할 뿐이야 세 번째로는 군부가 권력을 계속 유지하든, 혹은 군부가 몰락하고 시민들이 승리해서 아웅산이 실권을 가지든  쿠데타의 결과와 무관하게 로힝야에 대한 탄압은 계속될거야. 어느쪽이 승리하든 로힝야는 계속해서 희생양으로 존재하겠지 순전히 개인적인 예측이지만, 미얀마의 군부쿠데타는 성공으로 끝날거야 시민들의 저항은 거세겠지만 약간의 사상자가 발생하고 그저 미얀마의 민주화 역사에 한 줄이 추가되겠지 또 시간이 지나서 민주화 열기가 가라앉으면 다시금 아웅산 혹은 대체인물을 찾아 형식적인 권력 이양을 해서 국제사회의 비난을 피하고자 하겠지 군부는 쿠데타를 통해 민간정권에게, "선을 넘지 마라. 실권은 군부가 가지고 있으며, 군부를 위협하지 않는 선에서의 개혁만을 허락한다"라는 메시지를 전했다고 보는게 맞다고 생각해. 따라서 향후 복권될 아웅산(혹은 대체인물)은 어디까지나 민주화의 상징으로서 무력한 모습만을 보일 가능성이 커 그리고 어떤 예측 시나리오에서도 로힝야에게 우호적인 미래는 보이지 않아. 이런 모든 요소를 고려하면 미얀마는 베트남처럼 폭발적인 성장을 기대할 수 없어 개인적으로는 미얀마 대중이 군부를 몰아내고 아웅산을 중심으로 진정한 민주국가가 되기를 희망해 하지만 민주화에는 대가가 필요하고, 군부가 계속 권력을 유지하는게 가장 현실적인 시나리오인건 변하지 않아 6. 마치며 순전히 개인적인 이야기니깐 여기서부턴 안보고 바로 요약을 보는 것도 좋아 이 시점에서 초반에 나오는 목가적인 사진을 다시 보고와주면 좋겠어 미얀마의 상황을 대략적으로나마 알고있다면 사진들이 마냥 좋아보이지는 않을거야 그리고 그게 내가 잃어버린 즐거움 중에 하나라고 생각해. 내가 공부했던 국제정치학은 사람을 염세주의적으로 만든다고 생각해 국제정치학에서 자주 나오는 단어는 전쟁, 학살, 생존, 현실같은 거였고 평화, 협력, 공존같은 단어는 뜬구름잡는 소리가 되기 딱 좋았으니깐 누군가 조지아로 여행가서 와인마신다고하면 와인보다는 그루지아전쟁과 남오세티야부터 생각났고 학부시절 좋아했던 여자애랑 밥먹을때 tv에서 남북한 정상들끼리 악수하는 것을 보면서도 그녀는 감격했지만 나로서는 시큰둥하기만 했지 뭐 그렇다고 때려칠 생각은 없지만서도 말이지 아 그리고 댓글이나 추천 눌러줘요.. 읽판글쟁이는 그것만 보고 글쓰는거야.. 3줄요약 1. 미얀마의 군부는 실질적으로 한번도 권력을 놓은 적이 없다 2. 아웅산 수치는 어디까지나 민주화의 상징으로서 존재하지 실권을 가지지 못했다 3. 군사쿠데타는 성공할 것이며 미얀마는 민주화의 기나긴 꿈을 꿀 것이다 출처 - 협상의 전략(김연철)
[퍼오는 귀신썰] 북망산 가는 길 -3-
연휴도 이제 슬슬 끝이 보이네 짧은 듯 긴 듯 사실 최대로 얻을 수 있는 5일 연휴도 사실은 항상 짧은 기분이잖아 사람의 욕심은 끝이 없고 항상 더 쉬고싶고 ㅋㅋㅋ 그래도 하루 남은 연휴 맘 편하게 즐기도록 하자아 맘 편한 연휴에는 귀신썰이 최고고... 오늘 북망산 가는 길 마지막 편 같이 볼까? 시작! _______________ 6. “몸은 좀 괜찮냐? 도대체 얼마나 안 좋길래?” 형이 떠난 지 일주일이 채 되지 않은 시간, 종범이가 나를 찾아왔다. 괜찮다는 나를 불러내 동네 죽 전문점에 마주 앉았다. ‘남자 둘이 죽 집이라니’ 뜨거운 죽을 앞에 두고 피식 웃었다. “응 몸은 뭐, 며칠 전보다는 많이 나아 졌네.” 몸이 조금 나아지긴 했다. 의식은 여전히 현실과 꿈속 나선형 계단을 오르내리고 있었지만. “형은 잘 보냈지?” “응, 뭐, 잘 갔다. 양평 아버지 모신 가족공원에 같이 모셔놨지.” 우리는 죽을 먹으며 형과 있었던 일화와 어렸던 과거를 추억하며 낄낄 웃었다. “그런데, 음.......” 죽을 후후 불며, 낄낄 거리던 녀석이 자못 심각한 표정을 지었다. “그런데, 너 별일 없냐?” 녀석이 생뚱맞게 물었다. “아픈 게 별일 이지. 더 이상 무슨 일이라도 있어야 돼.” 나는 여전히 농담으로 답을 받았다. “그건 그런데, 이상하게 어제, 그제 꿈속에 형이 계속 나온다. 형이 나와서 계속 너한테 가보라네. 다른 걸 물어보면 말도 안 해. 그 말만 하고 사라 지길래. 나는 너도 아프다더니 정말 심각하게 아픈 건가 해서.” “뭐, 많이 안 좋긴 한데, 몸살인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지나면 나을 것 같기도 하고...그렇긴 한데.” 나는 말을 끌었다. “그런데 뭐?” “그게 이런 말 하면 믿기지 않겠지만 나 요즘 계속 여자 귀신한테 시달린다.” 말을 마치자 녀석이 푸하하 박장대소를 하며 웃음을 터트렸다. “진짜 뜬금없는 소리긴 하네. 그래 이쁘냐?” 녀석은 연신 큰소리로 웃으며 말했다. 어이없다는 녀석 반응을 보자, 괜한 소리를 했다는 후회가 밀려와 심드렁하게 답을 받았다. “아니 뭐, 이쁜건 모르겠는데. 눈이 새빨개” 갑자기 녀석의 움직임이 멈췄다. 심드렁하게 말을 받으며 죽을 푸던 내 눈이 녀석에게 향했다. 녀석은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린 채 나를 바라봤다. “그...그 귀신한테 시달린 게 언제 부턴데?” 숟가락을 들고 있는 녀석의 손이 덜덜 떨렸다. 무언가 있긴 있구나. 갑자기 죽집 내부 공기가 싸아 하게 침잔 했다. 7. 영범 형은 몇 해 전 흔적도 없이 사라진 적이 있다. 그때 녀석은 형이 ‘잠수’를 탔다고 했다. 지구상 존재하는 모든 빚쟁이들이 형을 쫓을 때였다. 종범이도 형이 얽어놓은 어마어마 빚보증으로 날마다 한숨지었다. 물론, 나에게도 적지 않은 금전적 신세를 지고 있던 형이 서울에서 사라져 버렸다. 녀석은 술집으로 자리를 옮기자고 했다. 우리는 죽집을 나와 옆 치킨 집으로 옮겨 치킨과 소주를 마주 했다. “사실 그때 이미 형수는 다른 남자하고 바람나 있었거든, 형수가 돈 벌겠다고 식당에 일을 나갔는데 거기 오는 손님하고 눈이 맞았나봐. 형은 그냥 웃더라. 남자가 능력이 없어지면 할 말 있겠냐고. 형수가 이혼하자고 길길이 뛰어서, 사실 그때 형이 이혼도장 찍어 줬어. 조건을 하나 건게 어머니께는 절대 말씀 안드리는거 하고, 애들 다 성인이 될 때까지 말 안하는 거 하고. 뭐 그렇게 말을 했다나봐. 그러고 나서도 형수한테 생활비는 꼬박 꼬박 보내 줬다더라.” 쪼르르 하고, 녀석은 치킨이 나오기도 전에 잔에 술을 채웠다. 형은 목포로 향했다. 아무도 아는 사람이 없는 곳이어서, 빚쟁이가 쫒아 오지 못할 것 같아서, 혹은, 조용히 삶을 마감하기 좋을 것 같아서. 여러 가지 이유를 추측할 수 있지만, 아마도 마지막 이유가 크지 않았을까? 친형제 같지 않겠지만, 나도 종범 형을 잘 안다. 겉으로 강한 척 해도, 여리고 여린 그 속내에 주위 사람에게 피해를 주고 말았으니, 그 죄책감을 감당하기 힘들었을 것이다. 삶을 정리하기 위한 여정에서 형은 한 여자를 만났다. 거친 선원들을 상대로 웃음과 술을 팔며 삶에 대한 미련을 소모 시키던 여자와 형은, 막다른 길에 들어선 동지로서 연정을 느꼇고, 그 연정은 다시 삶에 대한 강렬한 희망의 불씨를 지폈다. 형은 언젠가 녀석에게 목포에서 그녀와 같이 했던 이년의 세월이 자기 삶에 있어 오월의 햇살 같은 날들이었다고 한다. 그렇게 재기를 꿈꾸며 서울로 상경한 그들은 어머니께 철저히 외면당했다. 이혼했다는 사실을 꿈에도 모르고 있던 어머니는 정식으로 인사드리기 위해 횡성 시골을 찾아 들어간 형과 여자에게 악다구니를 퍼부으셨다. 형이 인사를 가기 며칠 전 종범이가 열심히 사전 작업을 했지만, 어머니에게 이혼이란 하나님 가르침에 정면으로 위배된 배척행위였다. 새 여자와 어머니를 마주한 형은, 진짜 마누라 데려 오라는 호통만 듣고 말았다. 나는 어머님을 이해한다. 어머님은 평생 하나님 테두리 안에 들어 사는 걸 최고의 기치로 여기셨다. 내가 종범이와 단짝 친구가 된 후 내 종교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걸 아신 후 어마어마하게 전도를 하셨을 정도니까. 그건, 어머니가 지닌 행복한 삶의 가치기준 이다. 나는 형을 이해한다. 그 여자도 이해한다. 종범이 녀석이 내게 그런 말 일언반구하지 않았던, 아니 못했던 것도 이해한다. 하지만 내가 그렇게 쉽게 이해할 수 있는 각자 행복에 대한 가치 기준들이 부딪히자. 여자는 목을 맸다. 횡성, 어머니 집 뒷산 나무에서. 왜 하필 그곳에서 목을 매었는지 알수 없지만, 여자는 나름의 방식으로 어머니에 대한 항거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거기 까지 이야기를 듣자 머릿속이 띵 하고 울렸다. “야, 잠깐만 우리 집에 올라가자.” 소주를 연거푸 입에 붓고 있는 녀석을 끌고 아파트로 올라갔다. 내가 횡성에 들렀을 때, 어머니는 감자와 여러 채소들을 박스에 담아 주셨다. 그리고 떠날 때쯤 모자란 것 같다며 이것저것 더 챙기신 후 커다란 보자기에 싸매 주셨는데, 한눈에 봐도 그 보자기는 너무 고급스러웠다. 그동안 본가에 들르지 못했던 감자와 야채는 고스란히 우립 집에 놔둔 상태였고, 어머니가 보자기로 싸주셨던 그 스카프 또한 여전히 우리 집에 있었다. “엇, 이거” 녀석은 스카프 주인을 바로 알아봤다. 8. 여자의 천도제를 지내는 날 종범이 녀석이 함께 했다. 모친과 자주 만나던, 모친만 보면 시주 좀 해달라고 징징거려 모친에게 가까이 하지 말라고 말했었던 땡중은 제법 법력 높은 천도제를 진행했다. 어쩐 일인지 천도제를 지내며 내 등을 펑펑 계속 때려 댔는데, ‘이 땡중이 내가 뒤에서 욕한걸 알고 사심을 담아 때리는 거 아냐?’ 생각이 들게 했다. 종범이는 나중에 자기도 때리러 올까봐 겁이 났다고 한다. 은혜도 모르는 놈. 내가 누구 때문에 맞고 있는데. “천도제가 저렇게 하는 거구나. 처음 봤네.” 천도제가 끝난 후 청량리 역 앞을 걸으며 녀석이 말했다. “그러게, 그런데 형이 그래서 그랬나? 죽는 날 아침 10시에 나한테 카톡을 보냈더라. 미안하다고.” “어? 무슨 소리야. 형 가기 전날 밤 9시부터 혼수상태 였는데. 네가 뭘 잘못안 거겠지.” 녀석이 생뚱한 표정으로 말했다. 엇?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 내가 뭘 착각 했나보다.” 말했다. 말이 끊겨 그저 조용히, 인적 많은 청량리 번화가를 걷고 있는데, 녀석이 갑자기 걸음을 멈춰 섰다. 왜 그래? 하는 심정으로 녀석을 쳐다보니,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울고 있었다. 소리죽여 가만가만 울다가, 흑흑거리며 제법 크게. 나는, 울고 있는 녀석을 두고 멀찍이 도망갔다. 아, 쪽팔려. 9. 그날 밤 영범 형이 꿈에 나왔다. 어쩐 일인지 그날은 이 상황이 꿈이라 는게 확실히 느껴졌다. 집 앞을 걷고 있는데 아파트 앞 편의점 파라솔 의자에 형이 앉아 웃고 있었다. 한손에 담배와 파라솔 테이블에 커피까지. “어디 가냐?” 아무렇지 않다는 듯, 형은 장난기 가득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 형, 형 때문에 내 진짜.” ‘죽어서 까지’ 라고 말을 하려다 멈췄다. “야, 뭐 다 그런 거지. 우리가 남이냐?” 형의 말에 갑자기 코끝이 찡해졌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너한테는” 말을 끊고 사람 좋은 웃음으로 나를 바라봤다. “그냥, 고맙다. 그 커피 마셔라. 너 주려고 사논 거야” “어, 고마워요 형.” 나는 캔 커피를 손에 쥐었다. 꿈인데 따스한 캔 커피 온기가 느껴졌다. “그런데, 좀 어때요 거기는? 이제 천국 지옥 이런데 막 심판 받아서 가나? 형은 어머니 말씀 안 듣고 맨날 교회 땡땡이 쳐서 천국 가기도 힘들 텐데.” 나는 킥킥대며 농을 했다. 내 말에 형은 얼굴을 빤히 바라봤다. “내가............여태까지 지옥에 있다 이제야 나왔잖니” 억, 나는 망치로 머리를 얻어맞은 기분 이었다. “그런데..” 형은 말을 이었다. “천국이었을 지도 모르지.” 라며 의자에서 일어섰다. “갈게. 늦기 전에 가야지.” 형이 편의점 옆 골목길로 걸어갔다. 그러자 골목 안에서 흰 원피스를 입고 낯익은 여자가 형을 향해 걸어 나와 형 팔짱을 꼇다. 어쩐 일인지 이제 나는 그녀가 무섭게 느껴지지 않았다. 그저 얼결에 고개를 꾸벅 숙이자, 여자도 쑥스러운 웃음으로 내게 꾸벅, 목례를 했다. 여자 눈이 빨갰다. “아참, 영범 형이 몸을 돌리며 말했다. 우리 어머니한테 한번 들러라 뭔가 말씀 하실 거다.” 10. 비가 와서 횡성 시골길이 가는 내내 질척거렸다. “야야, 주말에 가면 되지 뭘 그렇게 빨리 가자고 닦달이냐.” 종범이 녀석은 제 어머니에게 가는 길 내내 조수석에 앉아 투덜거렸다. “얌마, 내가 지금 우리 어머니한테 가냐? 너희 어머니한테 가지. 그리고 형가신지 얼마나 됐다고, 아무리 어머니가 괜찮다고 하셔도 마음이 어떠실지 모르는데 너 그러는 거 아니다.” 불퉁거리며 쏘아 붙이자 녀석이 잠잠해 졌다. 하지만, 안다. 녀석이 미안한 마음에 불퉁거린 다는 걸. 오래된 우정은, 사람의 마음으로 이해하기 힘든 어떤 미지의 영역으로 맞닿는다. 그러다 처음 여자 영가와 마주쳤던 곳을 지나며 내가 말했다. “여기다. 내가 처음 여자귀신하고 마주친 데가” “아!” 녀석이 말했다. “여기, 이길, 그 여자 분이 참 좋아 했던 길인데. 자기 어릴 때 자랐던 이모 집 옆 개울하고 닮았다고.” 어머니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웃으며 우리를 맞아 주셨다. “주말에 천천히 오지 비도 오는데 뭐 하러 왔어.” 말씀 하시는 어머니 얼굴에 생기가 사라져 있었다. 저녁을 차려 주셨고, 형 장례식에 참석한 사람들, 고마웠던 얘기들, 잡다한 이야기를 모자가 나누는 내내 나는 조용히 옆에 앉아 듣고만 있었다. 비가 오면 마당 하수구가 자꾸 막힌다는 말씀에 친구 녀석이 우비를 꺼내 입었다. “넌 앉아 있어라, 내가 후딱 보고 올게.” 녀석이 나가자 어머니는 내게 커피를 타 주셨다. “그래 부모님은 별고 없으시지.” 미소를 가득 담으신 채 말씀 하셨다. “네. 그렇죠 뭐.” “아, 참 그리고.” 어머니는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 방에 가셔서 두툼한 봉투를 들고 오셨다. “영범이가 말이다. 예전에 너한테 돈 빌려 쓴게 있다며? 왜 얘기 안했냐. 영범이가 가기 일주일 전쯤에 말이다. 몸도 안 좋았던 놈이 언제 그렇게 악착 같이 모아 놨는지 꽤 돈을 모아 놨더라. 애초 살면서 그런 돈을 만들어 놨으면 그렇게 고생하면서 살지 않았어도 됐을 텐데.” 어머니 말씀을 듣자 사형선고를 받고도 그악스럽게 일을 해대던 형의 모습이 떠올랐다. ‘신세진 사람한테 도리는 하고 가야 하지 않겠냐?’ 형은 말했었다. “이건 네 거라고, 나중에 너 오면 꼭 챙겨 주라고 하더라.” 어머니가 내 주신 봉투에 수표뭉치가 두툼히 들어 있었다. “야뇨 어머님. 전 됐어요. 그게 언제적 얘긴데요. 그냥 어머니 필요 할 때 쓰세요.” 나는 봉투를 다시 어머니께 내밀었다. “아니다. 이건 네 거다. 이건 네 거야. 가져가라. 그래야 나도 마음이 편할 것 같구나.” 어머니는 결연한 표정으로 말씀 하셨다. “그리고 말이다. 네게 항상 고맙구나. 영범이 녀석이나 종범이 녀석이나 힘든 역할은 죄 네게 떠맡기고. 고맙다. 항상, 고마워” 어머니 눈가에 이슬이 맺혔다. 어딘가 기억 저 깊은 곳, 고왔던 어머니 얼굴은 깊고 깊은 주름으로 그동안 살아오신 굽이친 삶에 회한을 대신했다. 참고 참았던 고삐를 더는 지탱하지 못하셨던 듯 어머니는 낮고 긴 울음을 토해 내셨다. “얘야 넌 말이다.” 잠시 숨을 고르고 낮은 목소리로 말씀 하셨다. “네 어머니.” 나는 다소곳이 대답했다. “너는 스스로 행복 하게 살아라. 스스로 말이다. 효도 하려고 굳이 애쓰지 마라. 효도란 게 말이다...효도란 게.........내 자식이 그저 제가 행복하게 살아 준다면 그만한 효도가 없다는 생각이 드는구나. 너무 늦게 알았지만 어쩌겠니. 산다는 게 그런 거지.” 낮고 길게 오열하는 어머니 손을 나는 꼬옥 잡아 드렸다. 서울로 오는 차안에서 녀석과 나는 말이 없었다. 영동 고속도로는 내내 막혔고 녀석은 분당 지하철에서 내려 달라고 말했다. “야야, 차 너무 막히니까. 나 내려 주고 너 그냥 가라.” 말하며 차 문을 열려는 녀석에게 나는 말했다. “야, 잠깐만 이거” 나는 어머니께 받았던 돈 봉투를 꺼내 들었다. “어머니 집에 벽지도 많이 낡았고 싱크대며 화장실이면 손댈 데가 꽤 많더라. 이걸로 되는대로 수리 좀 해 드리자.” 내가 돈 봉투를 내밀자 녀석은 무슨 말인가 내게 하려 했다. “야, 됐고. 너 돈 안 받으면 나 이돈 그냥 아무 교회 가서 헌금해 버린다. 뭐 교회마다 헌금 봉투 종류도 많더만.” 반 협박을 하자 녀석이 피식 웃으며 봉투를 받아 챈다. “리모델링하려면 이걸로는 좀 모자란다. 내가 보태서 알아서 할게.” 문을 열고 내리는 녀석에게 “그러던지” 웃으며 말했다. “그리고.” 나는 녀석에게 말했다. “행복하게 살라더라. 어머니가. 그게 효도라시네. 너도, 행복하게 살아라 친구야.” 녀석은 차문을 닫지 못한 채, 쏟아지는 작달비를 우산도 없이 고스란히 맞으며 씨익하고. [출처] 북망산 가는 길 3 | hyundc ___________________ 아 너무 슬프잖아 마음은 단순하고 단순한 마음은 죽고서 더 단순해지고 왜 그랬을까 생각해봤자 답은 아무도 모르겠지 상처주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 매번 그런 생각을 해 모두 그러도록 하자 물론 나 자신에게도 말이야 또 받아랏 새해복!
윙크 날리는 16살 꼬맹이 '입양해줘서 고마워요, 엄마'
얼마 전, 캐서린 씨는 20살의 노령묘를 하늘나라로 떠나보냈습니다. 슬픔을 이겨내기 위해 노력했지만,  녀석에 대한 그리움은 쉽게 잊혀지지 않았습니다. 녀석의 마지막 얼굴이 자꾸만 떠올랐습니다. 녀석이 행복했는지 궁금했습니다. 해주지 못한 게 많은 것 같아 미안함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평소와 같이 반려묘를 그리워하며 슬픔에 젖어있던 그녀는 순간 한 가지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리곤 곧장 컴퓨터 앞에 앉아 지역 보호소 홈페이지에 접속했습니다. 반려묘에게 마지막까지 전하지 못한 사랑을 사랑이 가장 필요한 녀석들에게 돌려주는 것입니다. 사랑이 가장 필요한 녀석들은 보호소에 있는 유기 동물입니다. 그중에서도 못다 한 사랑을 주고 싶은 아이들. 즉, 나이가 많은 동물이었습니다. 캐서린 씨는 홈페이지를 꼼꼼히 살펴봤고, 그중 소니라는 이름의 16살 핏불 믹스가 눈에 들어왔습니다. 소니의 사연은 아래와 같았습니다. '소니는 지금도 당신을 사랑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당신만 소니를 사랑하면 됩니다.' 그녀는 소니의 표정을 본 순간,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뭉클한 감정이 밀려왔습니다. 미안함, 동정심, 사랑. 그 모든 것들이 섞였는지도 모릅니다. 물론, 충동적인 입양이 되지 않도록 오랜 시간에 걸쳐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소니와 함께 살 때 문제가 없는지 주위 환경과 개의 성격에 대해서도 꼼꼼히 공부했습니다. 마침내 결심한 그녀는 보호소에 전화해 말했습니다. "소니의 입양을 고려 중인데, 이번 주말에 직접 보러 가도 될까요." 약속의 날, 캐서린 씨는 슬픈 표정의 소니와 첫 만남을 가졌습니다. 소니는 그녀의 따듯한 손길에도 긴장한 듯 보였고, 보호소는 그녀에게 함께 시간을 보내며 천천히 고민해보라고 조언했습니다. 약 30분 후, 캐서린 씨가 담당자를 호출해 말했습니다. "네. 소니는 제가 생각하던 모습 그대로예요. 제가 입양할게요." 캐서린 씨는 소니를 차 뒷좌석에 태우고 집으로 향하던 중, 잠시 뒤를 돌아보고는 눈물이 왈칵 쏟아져 나왔습니다. 소니가 활짝 웃고 있었습니다.  "너도 행복하니? 나도 행복해." 소니는 이제는 더 이상 외롭지 않아도 된다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 보였습니다. 녀석은 눈을 마주친 그녀에게 가벼운 윙크를 날렸습니다. 소니는 집에 온 첫날부터 엄마와 사랑에 빠졌습니다. 캐서린 씨는 본래 소니가 잘 침대를 따로 마련했지만, 소니는 엄마 품에서 자길 원했습니다. 자신의 품에 파고드는 16살의 아기를 바라보며 그녀는 미소를 지었습니다. 그녀는 사랑을 베풀고자 소니를 입양했지만, 오히려 소니로부터 더 큰 사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언제나 그래요. 동물들은 우리가 주는 사랑보다 더 많은 사랑을 돌려주거든요. 동물들은 전생에 우리 부모님이라도 됐던 걸까요." 소니를 껴안고 잠이 든 캐서린 씨는 꿈속에서 만난 반려묘에게 마지막 감사 인사를 전했습니다. 나를 사랑해줘서 고맙다고. 내게 준 사랑은 우리가 다시 만나는 날 꼭 돌려주겠다고 말이죠. 사진 The Dodo, @KATHRYN LAROCHE ⓒ 꼬리스토리, 제발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꼬리스토리가 들려주는 동물 이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