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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선구자들⑥/ 인스턴트 컵라면 개발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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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스턴트 컵라면을 만든 안도 모모후쿠

일본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1910~2007). 그는 일본 식민지 시대 대만에서 출생한 대만인이다. 중국식 이름은 오백복(呉百福). 1966년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안도 모모후쿠가 세계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한 건 1958년 8월 25일이다. 패전 이후 먹거리 부족으로 허덕이던 시절에 ‘치킨라면’이라는 이름으로 첫 상품이 일본에 출시됐다. 일본의 선구자 6편은 인스턴트 컵라면 개발자 안도 모모후쿠다.

한 단계 진일보한 컵라면이 개발된 건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71년 9월 18일,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일이다. 컵라면의 이름은 ‘컵누들’이었다. 세상에 없던 컵라면은 처음부터 잘 팔렸을까. 그렇지 않다. 안도 모모후쿠는 컵라면 개발 40년 후인 2001년 9월, 니혼게이자이에 ‘나의 이력서’라는 글을 연재한 바 있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71년 9월, 자신감을 갖고 컵누들을 내놓았지만, 슈퍼마켓이나 소매점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젊은 영업 사원들을 중심으로 팀을 짜서 음식 관련 장소가 아닌 백화점, 놀이공원, 철도가판대, 관공서, 경찰, 소방서, 자위대, 마작 가게, 오락실, 여관까지 돌게 했다. “팔렸습니다”라는 첫 번째 낭보가 날아든 것은 사이타마현의 육상 자위대를 돌고 있던 사원으로부터다. 연습장 온수차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대원들에게 보급됐다.>


<사진= 컵라면 개발 당시의 안도 모모후쿠(왼쪽). 컵라면은 인질극 사건이 계기가 돼 대박을 터트렸다. 기동대원들이 컵라면을 먹는 모습(오른쪽) 사진=닛신식품



인질극 사건이 가져다 준 뜻밖의 대박

모모후쿠씨는 “그런데 단번에 수요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며 “1972년 2월 연합적군에 의한 아사마산장 사건이었다”고 했다. 모모후쿠씨가 언급한 아사마산장 사건은 도대체 뭘까.

이는 1972년 2월 19일, 일본의 신좌익 조직 연합적군(連合赤軍) 멤버 5명이 나가노현의 산악 지역에 있는 아사마산장(浅間山荘)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산장을 포위한 경시청 기동대와 나가노현의 경찰 기동대는 열흘 동안 범인들과 대치하며 구출작전을 시도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급기야 기동대는 사건 열흘 째인 2월 28일 돌입 작전을 감행했다. 범인 5명 전원을 체포하긴 했지만,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1명을 포함한 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열흘 간의 대치전에서 기동대가 가장 애를 먹은 것은 날씨였다. 영하 15도의 강추위가 계속됐다.

그런 탓에 기동대원들에게 배급된 도시락은 얼어 버려 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급된 것이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닛신식품의 컵라면이었다. 안도 모모후쿠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눈 속에서 산장을 포위한 기동대원들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컵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그게 TV 화면에 반복적으로 클로즈업됐다. 당시 컵누들이 납입 된 것은 경시청 기동대 뿐이었다. 사건이 나면서 다른 경찰들과 보도진으로부터 즉시 보내 달라는 전화가 직접 본사에 걸려왔다. 그런 사실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진압 작전은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당일인 2월 28일 NHK는 연속적으로 10시간 20분에 걸쳐 현장을 생중계했다. 안도 모모후쿠씨는 “오후 6시부터 7시까지의 체포 장면 시청률은 66.5%에 달했다”(犯人逮捕を挟む午後6時から7時の視聴率は66.5%に達した)고 했다. 당시 NHK의 특별 프로그램 시청률(50.8%)은 2000년대에 들어서도 보도 특별 프로그램의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컵라면 출시 1년 만에 매출 34배 뛰어

경이적인 시청률은 닛신식품에겐 엄청난 호재가 됐다. 그 생중계 장면을 지며본 시청자들은 “저 사람들(기동대원들)이 뭘 먹고 있는거야?”(彼らは何を食べているの?)라며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모모후쿠씨는 “TV 생중계 장면은 해당 상품의 지명도를 한꺼번에 높였다”고 했다. 그런 홍보 효과는 곧바로 매출로 이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후 컵누들은 불이 붙은 듯 팔려 나갔고 생산이 따라 가지 못했다. 컵라면 매출은 출시 때인 1971년에는 2억 엔이었지만 사건 후인 1972년에는 전년 대비 33.5배인 무려 67억 엔이나 되었다”>(カップヌードルは火がついたように売れ出し、生産が追いつかなくなった。カップヌードルの売上は発売開始時の1971年には2億円だったのに対して、事件後の1972年には前年比33.5倍の67億円になっている。) <에디터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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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선구자들⑭/ 야마하 중흥의 아버지
... 가와카미 겐이치(川上源一:1912~2002). 그는 30년(1950~1977년 4대 사장, 1980~1983년 6대 사장) 동안 악기업체 야마하의 경영을 맡으면서 회사를 세계 최대의 악기 메이커로 도약하는 기반을 만들었고, 오토바이 제조업체 ‘야마하 발동기’도 창업해 사장을 겸했다. 그런 그를 ‘야마하 중흥의 아버지’라고 부른다. 가와카미 겐이치는 야마하 창업자 가문 출신이 아니다. 아버지가 야마하(당시는 일본악기제조주식회사) 재건에 도움을 주면서 경영권을 이어받게 됐다. 그의 아버지 가와카미 가이치(川上嘉市:1885~1964)는 도쿄제국대학 공학부를 수석 졸업한 수재였다. 스미토모전선제조(住友電線製造: 현재의 스미토모전공)의 임원으로 일하던 가와카미 가이치에게 일생일대 기회가 찾아온 건 1927년이다. 야마하 창업자 야마하 도라쿠스 당시 일본악기제조(주)는 창업자 야마하 도라쿠스(山葉寅楠:1851~1916)가 사망하면서 사업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여기서 야마하 도라쿠스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의료기계 수리공으로 일하던 야마하 도라쿠스는 시즈오카현 하마마쓰(浜松)에서 망가진 오르간을 수리하는 데 성공하면서 악기 사업에 진출했다. 1889년 ‘야마하풍금제작소’를 거쳐 1897년 ‘일본악기제조주식회사’를 세웠다. 오르간 제조에 이어 1900년엔 일본 최초로 피아노 제작에 성공했다. 일본악기제조주식회사는 창업자의 이름을 따서 창업 100년을 맞은 1987년에 사명을 현재의 ‘야마하’로 변경됐다. 창업자 야마하 도라쿠스가 사망한 이후 회사는 노동쟁의까지 겹쳤다. 이럴 때 구원투수로 등판한 이가 스미토모전선제조의 가와카미 가이치였다. 3대 사장에 오른 가와카미 가이치 덕에 회사는 도산 위기를 넘겼다. 가와카미 가이치는 1950년 서른여덟 살인 장남 가와카미 겐이치(川上源一)에게 사장 자리를 물려줬다. 겐이치는 좀 색다른 ‘야마하 음악교실’이라는 경영전략을 폈다. 가와카미 겐이치의 ‘야마하 음악교실 전략’ 야마하의 전략은 이랬다. 아이가 태어나면 매달 1000엔 씩 저금을 하라고 권했다. 4세부터 야마하 음악교실에서 피아노를 배우고 10세가 될 무렵에는 쌓인 돈으로 피아노를 구입하는 스토리를 만들었다. 야마하 음악교실을 전국적으로 전개하면서 야마하 팝송경연대회와 세계가요제(1970~1989년)도 개최했다. 야마하 음악교실을 열어 직접 수요를 창출하는 이런 비즈니스 모델은 큰 성공을 이뤘다. 일본이 지금도 피아노 보급률 1위인 이유는 여기에 있다. 가와카미 겐이치가 경영을 맡는 동안 야마하 오토바이와 야마하 골프클럽(골프채) 사업도 전개했다. 그가 일본 기업사에 길이 남는 유명한 말을 남긴 건 1977년이다. 65세이던 그는 “발밑이 밝을 때 굿바이”(足元が明るいうちにグッドバイ)라는 말을 하곤 사장직에서 퇴임했다. 가와시마 히로시에서 가와카미 히로시로 사장 이어져 사장 자리를 물려준 사람은 야마하 내부에서 성장한 가와시마 히로시(川島博: 혼다 2대 사장 가와시마 키요시의 동생)였다. 그러나 가와카미 겐이치는 1980년 다시 사장으로 복귀했고 1983년엔 마흔두 살의 장남 가와카미 히로시(川上 浩)를 후임 사장으로 지명했다. 가와카미 히로시는 고등학교 2학년 때 전일본 양궁선수권에서 우승한 특이한 경력을 갖고 있다. 일본대학 이공학부를 졸업한 그는 소니에 입사해 테이프 레코더 상품화 개발에 종사했다. 1971년 일본악기제조(현재 야마하)에 입사해 아버지에게 경영권을 물려받은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습적 인사는 사내에서 비판을 받았고 리조트 사업 부진이 겹치면서 7대 사장 가와카미 히로시는 결국 사장직에서 물러났다. 그런 가와카미 히로시는 1992년 퇴임 회견에서 “처음부터 42세의 풋내기가 야마하의 사장이라는 대임을 완수할 것으로는 생각하지 않았다. 가능하면 사장은 다른 사람이 해주면 좋겠다”(最初から42歳の若輩でヤマハの社長という大任を果たせるとは思っていなかった。できれば社長はほかの人がやってくれるといいなと思っていた)고 말했다. 현재 매출 4조 7000억...악기 부문 3조 400억 130년 전 오르간 수리에서 출발한 야마하는 ‘악기의 대명사’를 넘어 음향기기, 전자제품, 오토바이, 골프 등 다양한 업군을 거느리고 있다. 야마하 경영지표에 따르면, 2019년 3월기 야마하의 현재 매출은 4374억엔(약 4조 7000억원)에 달한다. 이중 악기 매출은 2819억엔(3조 400억원)이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609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