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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페이스 보이

"스페이스 보이" / 박형근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스페이스 보이. 2018년 세계문학상 대상 수상작이다. 정유정, 도선우, 김근우(판타자 소설을 좀 봤던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바람의 마도사를 썼던 그 김근우가 맞다!) 등 쟁쟁한 작가들을 배출해 낸 세계문학상인만큼 이제 세계문학상 타이틀은 문학계에서 상당히 높은 위상을 가진 타이틀이 되었다. 반쯤은 그 타이틀을 보고, 반쯤은 밀리의 서재에서 서비스를 하길래 읽어보게 된 스페이스 보이는 음, 뭐라고 표현해야 할지 모르겠다. 한없이 자유분방한 소설이라고 해야 할까? 적어도 한국 소설에서 이런 느낌을 받은 적은 처음이었다.

이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가 일기를 쓰는 형식으로, 편한 반말의 대화체로 서술된다. '나'는 오디션을 거쳐 우주비행사로 선발되어 ISS(국제 우주정거장)에서 2주간 머물며 임무를 수행할 예정이었다. 그런데 로켓이 발사되고 ISS에 도착한 순간 '나'는 정신을 잃고 만다. 정신을 차리고 나니 학교 보건실 침대에 누워 있는 '나'. ISS는 온데간데없다. 밖으로 나가자 펼쳐진 학교 운동장에는 교복을 입은 아이들이 축구를 하고 있다. 근데 뭔가 이상하다. 하늘이 한 선을 기준으로 뭉텅 잘려나가 있다. 그 위는 암흑뿐. 그런 '나' 옆에 갑자기 나타난 칼 라거펠트.

"여기는 우주 맞아."

그는 자신이 우주인이라고 말하며 우리들은 지구인들에게 정체를 들키고 싶지 않고 자신의 모습도, 이 학교와 주변의 풍경도 모두 너의 기억을 재현한 것뿐이라고 말한다. 칼 라거펠트(모습을 한 우주인)는 얌전히 이 세계에서 지내다 지구로 돌아가면 무엇이든 네 소원을 하나 이뤄주겠다고 말하는데 그 소원의 범위는 끝을 알 수 없는 우주인의 기술만큼이나 무엇이든 가능하다. 로또번호, 세계적인 운동선수나 예술가가 되는 것, 천재적인 능력을 가지게 되는 것 등등. '나'는 자신의 기억이 재현된 이 세계를 탐험하다(별의별 이상한 게 다 있다. 펄펄 끓는 피넛버터 늪이라던가, 기타 피크가 달린 나무라던가, 전자 기타를 칠수록 풍성해지는 전기숲이라던가.) 이 세계가 자신의 뇌 속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지구로 돌아가기 전 마지막 날, 이 곳에 대한 기억을 지우고 소원을 이뤄주겠다는 칼 라거펠트에게 '나'는 말한다. 아무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을 테니 내 기억을 지우지 말 것, 10월 28일에 폭우나 한 번 쏟아지게 해 줄 것.

이 소설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 있다. 앞의 절반은 우주에서의 이야기, 뒤의 절반은 지구에서의 이야기다. 앞에서 말했듯 우주에서의 이야기는 상상과 환상이 뚝뚝 흘러넘친다. 읽기만 해도 기분이 둥둥 뜨는 상상의 산물들이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그 모든 것이 '나'의 뇌 속이라는 설정도 좋았다. 뇌 속 신경의 모습과 우주의 모습이 비슷한 모양이고, 결국 우리가 사는 우주가 누군가의 뇌 속이 아닐까?라는 흥미진진한 상상을 세련되게 보여준다.

'나'는 지구에서의 모든 기억을 지우고 다시 시작하기 위해 우주로 왔지만 결국 떠날 때는 칼 라거펠트에게 어떤 기억도 지우지 말아 달라고 이야기하는 장면도 인상 깊다. 잊히지 않는 기억은 잔인할 텐데?라는 칼 라거펠트의 말에 지구로 돌아가 봐야 그럴지 아닐지 알 것 같다는 '나'의 대답은 얼핏 보면 우주에서의 뇌 속 탐험을 이야기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가 우주로 떠나며 지우고 싶었던 그 기억에 대한 대답이다. 결국 기억을 지우기 위해서, 딛고 일어서기 위해서는 그 기억을 마주하는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먼 곳으로 훌쩍 떠나 다 잊었다고 홀로 애써 머리를 흔들어 봤자, 정면으로 바라보고 씹어 삼켜 소화시키지 않은 기억은 언젠가 불쑥 익숙한 향기 하나에 튀어나오게 되는 법이다.

'나'가 지구로 돌아온 이후 시작되는 이야기는 우주에서의 분위기와 정반대다. '나'는 지구로 돌아오자마자 한국의 영웅이 된다. 인터뷰, 방송 출연, 광고, 출판 제의 등등이 끝도 없이 쏟아져 들어오고 '나'는 모든 연예인을 뛰어넘은 셀럽이 된다. 소속사가 생기고 TV만 틀면 '나'의 얼굴이 나오고 일거수일투족이 기사거리가 되고 로또 번호는 필요도 없을 만큼 돈이 쏟아져 들어온다. 그 모든 짓이 의미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나'는 성실하게 임한다. 끝없는 운동, 식단 조절, 경락 마사지, 보톡스와 필러를 통해 몸매와 얼굴을 만들고, 가짜 집에서 처음 보는 스탠더드 푸들과 리얼리티 프로그램을 찍고, 이슈를 위해 애인이 있는 여자 연예인 도지은과 합의 하에 연애 스캔들을 낸다. 그리고 우주로 떠나며 지우고 싶었던 기억의 주인공 혜주를 만난다. 결혼을 앞둔 혜주에게 '나'는 말한다. 이제 내게 돌아오라고. 이제 나는 네가 결혼할 그 남자보다 돈도 많고 사회적 지위도 높고 몸도 더 좋다고. 지우고 싶었던 너와의 기억이 사실 나에게는 가장 행복한 기억이었다고. 혜주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리고 10월 28일, 혜주가 오픈 웨딩카를 타고 달리고 있을 그 날 폭우가 쏟아진다.

지구에서 '나'가 겪는 이야기는 우주에서와 달리 현실적이다. 인기, 유명세가 곧 돈이 되는 지구에서 잘생기고 키 큰 우주 비행사는 어떤 인물보다도 탐스러운 연예계의 블루칩이고 '나'는 순순히 그 순리에 따른다. 인터뷰는 쓰여 있는 가짜 대본에 충실하게 따르고 대필 작가가 써 준 책을 '나'의 이름으로 출판하고 소속사 간의 합의 하에 서로의 이슈 메이킹을 위해 도지은과 가짜 열애 기사를 낸다. 보여주기 위한 가짜 '나'를 만드는 것이다. 대중은 가짜에 열광하고 '나'는 돈방석에 올라앉는다. 하루에 3시간도 못 자고 밖에 마음대로 돌아다니지도 못 하고 진짜 '나'를 드러내지 않는 대가로. 하지만 혜주는 가짜 '나'에게 돌아오지 않는다.

이런 일이 비단 연예계에서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인스타그램, 페이스북, 트위터, 온갖 SNS가 판치는 현 사회에서 많은 사람들은 가짜 자신을 만든다. 게시물을 보는 사람들이 부러워할 만한 나, 좋아요를 눌러줄 만한 나, 남들에게 자랑할 만한 나를 꼼꼼하게 선별해서 전시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꽉 눌러 짜서 멋있고 아름다운 부분만을 뽑아내는 것이다. SNS는 자랑의 전시회장이 된다. 물론 그럴 수 있다. 누구나 시험에 합격한 순간, 고대하던 것들을 자신의 힘으로 성취한 순간을 자랑하고 싶고 그것은 당연한 감정이다. 하지만 그러한 감정이 SNS라는 최적의 시스템을 만나 한없이 증폭되면 과열되기 마련이다. 멋있고 아름답고 부러운 것들이 넘쳐나는 SNS에서 느끼는 열등감을 극복하기 위해 가짜 자신을 만들어내는 사람들이 생기는 것이다. 지구에서 '나'가 겪는 이야기는 가짜 자신, 가면을 쓴 자신이 반쯤 필수가 되어버린 현대 사회를 비웃는다. 가짜 '나'를 만들고 가짜 삶을 살면서도 그 모든 일이 무의미하다고 말하는 '나'를 통해서.

스페이스 보이라는 제목만 보고는 흥미진진한 SF 소설을 상상했건만 이 책은 내 섣부른 기대를 철저히 깨부쉈다. 우주 이야기로 독자를 살살 낚아놓고 뒤에서는 지금의 우리를 아프게 꼬집는다. 아직도 얼얼하긴 하지만(SNS를 켤 때마다 괜히 찔린다.) 꼬집힐 가치가 있는 소설이다. 일기라는 형식과 건방지기까지 한 대화체는 신선하고 그 속에 담긴 메시지는 기분 좋게 찜찜한 생각에 잠기도록 만든다. 스페이스 보이와 함께 즐거운 독서가 되기를.(원래 남의 일기를 훔쳐보는 건 즐겁기 마련이다.)

소설 속 한 문장

"그래요, 이 엿 같은 지구를 돌아가게 하는 건 사랑이죠."
"아니, 지구를 돌아가게 하는 건 지구 중심의 자기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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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을 파는 상점' / 김선영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시간을 파는 상점이라는 제목 자체가 호기심을 자극했다. 저 제목 하나에서 무궁무진한 이야기가 나올 수 있을 것 같은 느낌이 드는데 과연 어떤 방향으로 뻗어나갈까 알아보자는 생각으로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모르고 읽기 시작했지만 청소년 문학상 수상작이었는데 필자가 항상 청소년 문학을 읽을 때마다 느끼지만 왠지 모르게 청소년 문학에는 마음이 따뜻해지게 만드는 마법이 있다. 이 소설도 필자가 처음 상상했던 방향과는 달랐지만 다 읽고 책장을 덮을 때에는 가슴 한쪽이 따뜻해졌다. 주인공 백온조는 소방관인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어머니와 둘이 살아가고 있다. 고등학생인 온조는 스스로 돈을 벌기 위해 아르바이트를 시작하지만 번번이 실패하고 만다. 그러다 아르바이트생이 받는 시급에 대해 생각하던 온조는 아예 자신의 시간을 파는 것은 어떨까 생각하다 인터넷 카페를 통해 시간을 파는 상점을 열게 된다. 온조 자신의 시간을 이용해 의뢰자가 원하는 부탁을 들어주는 상점이다. 거기에는 몇 가지 원칙이 있다. 1. 자신의 능력 이상은 거절할 것. 2. 옳지 않은 일은 절대 접수하지 않을 것. 3. 의뢰인에게 마음이든 뭐든 조금의 위로라도 줄 수 있는 일을 선택할 것. 4. 무엇보다 시간이 돈이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줄 것. 이상의 네가지 원칙을 가지고 시간을 파는 상점은 운영하게 된 온조는 여러 의뢰자들의 부탁을 받고 그것을 해결해나가며 시간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점점 깊게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악플, 주변인의 시선, 이것이 도덕적으로 맞는 일인가에 대한 스스로의 의문 등 여러 가지가 겹치며 상점의 운영에 위기를 겪게 되는 온조가 성장해가는 이야기가 소설의 주된 내용이다. 사실 필자가 처음 생각했던 소설의 내용은 실제로 시간을 파는 약간의 판타지가 가미된 내용이었다. 누군가가 바꾸고 싶은 과거의 시간을 다시 팔거나 하루 24시간이 부족한 이들에게 추가적인 시간을 팔거나 하는 상점의 이야기를 생각했다.(물론 거기에는 대가가 따를 테고 그 대가가 소설의 주된 이야기가 되지 않을까?) 하지만 이 소설은 어디까지나 현실에 바탕을 둔 소설이었다. 주인공 온조가 직접 자신의 시간을 팔아 의뢰인의 부탁을 들어주는 것. 어떻게 보면 별 것 아니기도 한 이야기를 가지고 이 소설은 시간이라는 심오한 개념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시간이란 건 누구에게나 한정되어 있다.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하루에 24시간 밖에 사용할 수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람에게 시간의 가치는 같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간을 가치 있게 쓰는 사람이 있는 반면 아닌 사람이 있고 24시간도 부족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반면 24시간이 차고 넘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소설에 나오는 혜지라는 아이를 보면 엄마와 아빠의 실에 묶여 자신이 하고 싶은 것은 무엇 하나도 제대로 하지 못한다. 동화를 쓰고 싶지만 결사 반대하는 부모님 밑에서 하기 싫은 공부를 하루 종일 해야하는 그 아이는 부모님의 감시 아래 친구도 본인 마음대로 만들지 못한다. 그런 아이에게 시간이란 어떤 의미가 있을까.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자신이 하고 싶은 일에 쓰지 못하는 아이에게 시간이란 그저 흘러가는 것일 뿐이다. 현대의 청소년들 중에는 그런 아이들이 많을 것이다.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오롯이 본인에게 쓰는 것이 아니라 부모님의 소망을 이루기 위해 사용하는 아이들. 그런 아이들에게 시간을 올바로 쓰는 법을 알려줘야 하는 것이 부모님과 어른들의 의무가 아닐까. 강토와 할아버지의 이야기에서는 시간이 가진 치유의 힘에 대해 생각하게 만든다. 혼자 쓸쓸하게 돌아가신 할머니와 그런 할머니를 찾아뵙지도 않는 아버지. 그리고 그런 아버지에게 유학 비용을 돌려내라는 소송을 청구한 할아버지. 그 사이에서 어린 강토는 씻지 못할 큰 상처를 받았을 것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가족들끼리 서로 칼을 들이대는 상황이란 끔찍할 테니까. 그러나 시간이 지날수록 계속해서 쓰라릴 것만 같던 상처도 아물어 가고 할아버지와 아버지 간의 날 선 감정도 서서히 무뎌져 간다. 결국 시간이 필요한 것이다. 서로를 용서하고 이해하고 다시 얼굴을 마주보기 위해서는. 아마 거의 모든 사람들이 시간을 통한 치유를 겪어보았을 것이다. 정말 다시는 얼굴도 보고싶지 않던 가족이나 친구도 시간이 지나면 그 감정이 옅어지듯이 시간이란 서로의 상처를 치유하는 힘을 가지고 있지 않나 생각해본다. 따뜻한 소설이다. 인물들 하나하나가 통통 튀고 시간에 대해 인물들의 입을 통해 말하는 작가의 이야기는 시간이란 개념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도록 만든다. 특히 청소년들을 주인공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인만큼 독자들의 학창시절을 생각나게 하고 이는 저절로 독자들의 시간을 과거로 되감아 마음이 따뜻해지도록 만든다. 삶이 조금 버거울 때 읽어보면 좋은 소설이다. 소설 속 한 문장 : "시간이 필요하겠지. 내게 시간이 필요한 것처럼 강토에게도 말이야."
초크맨
'초크맨' / C.J. 튜더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저번에 읽었던 스티븐 킹의 미스터 메르세데스 이후로 인터넷을 찾아보다 스티븐 킹이 강력 추천한다는 평가가 있는 소설을 발견했다. C.J. 튜더 라는 작가의 데뷔작인 초크맨이라는 소설이었는데 저번 스티븐 킹의 소설을 매우 재밌게 읽었던 차에 주저없이 책을 집어들고 읽기 시작했다. 감상부터 말하자면 재미도 있고 나쁘지 않은 소설이지만 작가의 다음 작품을 찾아 읽을 생각이 들지는 않았다. 이 소설은 에디라는 주인공의 어린 시절과 학교 교사가 된 성인 시절이 교차되어가며 진행된다. 어린 시절 늘 네명의 친구, 개브, 미키, 호포 그리고 니키와 함께 다니던 에디는 마을 여기저기서 의문스러운 일들을 마주한다. 그 사건들의 마지막을 장식한 살인 사건은 당시에는 약간의 미심쩍은 점을 남긴 채로 종결되고 만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나이가 든 에디는 학교 교사로 평범한 하루를 보내고 있던 와중에 어릴 적 친구 미키가 찾아와 과거 일어났던 살인사건의 진범을 알아냈다고 하며 그걸 토대로 글을 쓰려고 하니 도와달라고 요청한다. 그렇게 미키와 저녁을 먹고 헤어진 다음 날 미키는 강에 빠져 죽은 채로 발견된다. 어린 시절 죽은 미키의 형과 똑같이. 뭔가 이상함을 느낀 에디는 미키의 흔적을 찾다가 점점 어린 시절 일어났던 살인 사건의 진상에 다가가게 된다. 일단 이 소설의 좋은 점을 이야기하자면 초반부 스토리가 흥미진진하다는 점이다. 미스터리 소설이자 스릴러 소설인만큼 의뭉스러운 일들이 여기저기서 일어나고 10대 소녀 일라이저의 살인 사건이 일어나며 그 정점을 찍는다. 게다가 그 사건들의 주위를 끊임없이 떠돌아다니는 초크맨 그림은 계속해서 호기심을 불러일으킨다. 호포의 개를 죽인 사람은 누구지? 미키의 형은 정말로 발을 헛디뎌 강에 빠진걸까, 타살은 아닐까? 갑자기 나타난 하얀 분필의 초크맨 그림은 도대체 누가 그린 걸까?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은 누구고 왜 토막을 냈을까? 일라이저의 사라진 머리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 걸까? 이렇듯 수많은 의문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그러한 어린 시절의 사건을 수십년이 지난뒤 성인이 된 주인공이 해결해나간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그리고 전혀 다른 시간대의 같은 인물을 번갈아가며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어색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 두 시간대의 에디가 서로를 통해 사건을 해결해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렇지만 단점이 너무 명확하다. 앞에 수없이 뿌려놓은 사건들의 진상이 드러나는데 그 진상들이 그다지 납득이 되지 않는다. 초크맨의 특징은 앞에서 일어난 사건들의 범인이 각각 모두가 다른 인물이라는 것이다. 호포의 개는 그때부터 이미 치매 증상이 조금씩 보였던 호포의 어머니의 실수에 의해 죽었고 미키의 형이 강에 빠져 죽게 된 것은 그의 자전거를 강에 빠뜨린 개브 때문이었다. 하얀 분필의 초크맨 그림은 에디가 그린 것이었고 일라이저를 죽인 범인은 자신이 임신시킨 여학생과 일라이저를 착각한 니키의 아빠, 마틴 목사의 짓이었으며 일라이저의 사라진 머리는 에디가 몰래 가져왔다. 이렇듯 마치 누군가 한 명의 일관된 범행으로 보였던 것들이 사실 각각 다른 사람들의 소행이었다는 것은 한 명의 범인을 상상하고 있던 독자들을 깜짝 놀라게 할 수도 있지만 반대로 각각의 사건들에 대한 모든 논리를 납득할만하게 제시하지 못하면 독자들이 결론을 받아들이기 힘들게 되고 마는 것이다. 그 모든 사건들의 진상이 정교하게 맞아들어가며 감탄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아니라 결국 "아, 뭐야. 그냥 다 각자 다른 이야기고 결국 살인 사건은 목사가 착각해서 죽인 걸로 끝이잖아?" 라는 생각이 든다고 해야할까. 살인 사건에 얽힌 진상을 하나하나 파헤치고 그 속의 복잡한 관계를 해체해가며 얻게 되는 카타르시스가 부족한 느낌이었다. 그러한 부분에는 소설에서 주요 용의자로 몰고 가던 헬로런 이라는 인물의 너무 이른 죽음도 한몫하지 않았나 싶다. 이러한 스릴러 소설에서 너무 범인처럼 묘사하는 인물은 당연히 범인이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그래도 마음 한켠에 혹시나 진짜 저 사람이 범인인가 하는 생각이 들면서 소설의 긴장감을 유지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지만 그 인물이 너무 이른 타이밍에 죽어버리면서 당연히 다른 누군가가 범인이겠지 하는 생각을 확고하게 만들었고 이는 소설의 긴장감을 떨어뜨리고 말았다. 조금 더 살려두었으면 지금보다 흥미진진한 소설이 되지 않았을까. 재미있는 소설이다. 하지만 초반부의 흥미로움에 비해 후반부에서 진실을 알게 되었을 때 오는 놀라움과 스릴러 소설 특유의 그 뒤통수를 제대로 얻어맞은 듯한 얼얼한 느낌은 부족하다. 다른 스릴러 소설과 다른 이야기 진행과 사건의 진상이 이 소설의 장점이자 단점인 듯 하다. 전형적인 스릴러 소설에 지쳐있다면 한번쯤 읽어볼만 하지 않을까. 소설 속 한 문장 : 예단하지 말 것. 모든 것에 의문을 제기할 것.
7년의 밤
'7년의 밤' / 정유정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정유정 작가의 작품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내 심장을 쏴라나 7년의 밤의 경우 영화화 되었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지만 영화 또한 직접 본 적은 없었다. 아무런 사전 정보 없이 지인의 추천으로 읽게 된 소설인데 두꺼운 책의 두께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속도로 읽어 버렸다. 속도감이 굉장한 소설이었다. 댐 문을 열어 아예 마을 하나를 침수시켜버린 희대의 살인마 최현수의 아들 최서원. 그가 있는 곳마다 최서원이 살인범의 아들임을 알리는 편지가 도착한다. 도대체 누가 보낸 것이고 왜 이러는 것인지도 알 수 없는 의문의 편지. 결국 최서원은 살인자의 아들이란 꼬리표를 달고 사회의 차가운 시선을 받으며 학교와 집을 이리저리 옮겨다니다 과거 아버지가 댐 경비를 설 때 알게 된 안승환과 함께 살게 된다. 주변의 시선을 이기지 못해 학교를 자퇴하고 검정고시를 준비하게 된 최서원. 뛰어난 잠수실력의 다이버이자 작가 지망생인 안승환과 함께 살던 최서원은 우연히 안승환이 쓰던 글을 보게 된다. 그 글은 자신의 아버지 최현수가 댐 문을 열어 세령마을 주민들을 몰살시킨 날에 대한 이야기였다. 글을 읽어 나가던 최서원은 점점 감춰져 있던 그 날의 진상에 다가가게 된다.(더 쓰면 스포일러가 되기에 여기까지만.......) 책을 모두 읽고 나서 뇌리 속에 가장 깊게 박힌 인물은 오영제였다. 소설 내의 절대적인 불가해의 악역. 그는 일반인은 이해하지 못하는 사고방식을 가진 소시오패스이자 최서원의 아버지 최현수와 대립하는 인물이다. 평범한 사람은 이해하기 힘든 소시오패스의 행동과 사고 흐름을 일반 독자들이 이해하기 쉽게, 그러면서도 공감하지는 못하게, 거의 완벽에 가깝게 서술해 낸 정유정 작가의 필력과 사전 정보 조사가 대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실 본인이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것에 대해 이렇듯 자연스럽게 서술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양의 조사와 연구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감탄스러울 뿐이었다. 그렇지만 가장 생각해 볼 부분을 많이 던져준 인물은 최현수였다. 사실 오영제란 인물은 소설 내에서 너무 절대적이고 확실한 악으로 그려져서 크게 생각해봐야 할 부분이 없었지만, 최현수란 인물은 매우 입체적인 인물이었기에 그의 이야기를 곱씹을수록 저 근원 깊은 곳까지 질문을 던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여기부터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습니다.) 최현수는 오영제의 손아귀에서 자신의 아들을 구해내기 위해 댐 문을 열어 세령마을을 침수시키고 그 곳에 사는 많은 이들의 목숨을 앗아간다. 필자는 과연 내가 저 상황에 처한다면 어떤 선택을 내릴지 생각해 보았다. 내 아이를 구하기 위해서 수많은 타인들의 목숨을 뺏어야만 한다면 어느 쪽을 선택할 것인지 쉽사리 결론을 내릴 수 없었다. 자신의 아이를 구하기 위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뺏은 최현수의 행동이 정당하다고 볼 수는 없지만 그렇다고 그의 행동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었기에 도저히 한 쪽을 선택하기 힘들었다. 여기서 다른 한 가지의 윤리적 의문이 또 들었는데, 소수와 다수의 목숨의 가치에 관한 의문이었다. 소설에서와 같이 내 아이의 목숨이 아니라 내가 모르는 한 사람의 생명과 수백명의 생명을 저울질해본다면? 다수의 생명을 구하기 위해 소수의 생명을 희생하는 게 정당한 것일까. 눈 앞에 있는 한 사람을 죽이면 수백명이 목숨을 구한다고 했을 때, 망설임 없이 눈 앞에 있는 사람을 내 손으로 죽일 수 있을까. 필자는 사실 아무리 생각해봐도 결정을 내리지 못했다. 과연 여러분이라면 어떤 선택을 할지. 순수문학과 장르문학의 아슬아슬한 경계선에서 주제의식과 재미 두 가지를 모두 잡았다고 극찬 받는 정유정 작가의 소설답게 서사의 재미와 흡입력, 인간 본연의 가치와 윤리에 대한 질문, 이 두가지를 모두 놓치지 않고 그려내고 있다. 재미있는 페이지 터너이자 책을 모두 읽고 덮었을 때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소설을 읽고 싶다면 7년의 밤을 꼭 읽어보시길. 주관적인 별점 : 5점 (흠잡을 곳이 없었다.)
82년생 김지영, 조금 예민하고 크게 슬프다 [5분영화겉핥기]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시험기간이 무려 3주째 이어지고 있습니다. 막학기라 그런지 별로 의욕도 없는데 고역입니다. 시간이 남길래 과제를 하려 했으나발길은 역시나 영화관을 향하더군요. 왜냐하면 오늘은 화제작이 개봉을 하는 날이기 때문입니다. 오늘의 영화는 소설원작 '82년생 김지영'입니다. 모두가 사실 리뷰를 쓰기 꺼려하더군요. 특히 저같이 블로그를 하는 사람이나 후기를 주로 작성하는 분들은요. 그 이유는 대부분 아시겠지만 현상의 기폭제 역할을 했으니까요. 저는 소설을 읽어보지 않은 사람으로서 영화만 보고솔직하게 느낀점을 남겨보려 합니다. *본 글은 개인의 솔직한 견해와 의견일 뿐입니다. 영화는 영화로만 일단 영화를 사랑하는 사람으로서 영화는 그냥 작품 자체로서 감상했으면 좋겠습니다. 지금 현상황도 때론 영향을 주고 받기도 하지만 배우가 어쨌다, 이 부분이 어쨌다 미시적인 부분을 크게 부풀리는 해석은 확실히 지양했으면 합니다. 실제로 지금 영화 개봉 1일차임에도 불구하고 사이트 평가글들은 폭발적입니다. 아직 10만명도 보지 않은 영화에 대해 어떻게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반응할 수 있을까 신기하기도 합니다. 영화도 마치 지금 현 상태를 반영하듯 이렇게 말합니다. 본인들의 생각을 말하고 떠드는 건 상관없지만 적어도 피해를 주지는 말아야 하며, 행여나 상처를 줄 말들은 들리지 않게 해야죠. 모두의 이야기 영화는 모두의 이야기를 다루고 있는게 맞습니다. 그래서 본 영화가 어떠한 갈등의 촉매제가 되진 않았으면 좋겠습니다. 역시 이래서 그랬구나, 역시 누구는 이렇구나 하는 무분별한 일반화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싸우려고 영화를 보지 않고, 남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살고 있지 않으니까요. 집안일을 여성인 김지영이 하고 있습니다. 일을 포기한 것도 김지영입니다. 육아를 대부분 맡아하는 것도 김지영입니다. 하지만 반대로 남성일 수도 있고 남편인 대현의 일상일 수도 있는 얘기입니다. 남성과 여성이 바뀐다고 해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근본적인 원인은 사회입니다. 육아휴직조차 제대로 못 쓰게 하는 직장과 아내에게 일을 편중시키는 가족문화, 남아를 선호하는 전통사고의 잔존은 '성'이라는 문제로 해결되지 않습니다. 우리 모두가 차이는 있지만 가지고 있는 마음의 고통을 다룬 이야기입니다. 조금 예민하고 공격적이다 소설에 비해서는 덜 자극적이라는 평이 많더군요. 원작을 경험하지 못해 비교는 안 됩니다만 저에게는 영화도 날카로웠습니다. 굳이 이런 사건을 보여줬어야 했나? 굳이 저런 멘트까지 나왔어야 했나? 싶더군요. 이렇게 하나하나에 반응하는 스스로에게도 회의감이 들 정도입니다. 전체적으로 남성이 여성에게 주는 상처가 주를 이루며 작품에 등장하는 남성은 대부분은 생각이 없고 무례합니다. 반면에 여성은 대부분 피해자고 희생적입니다. 여성들끼리의 문제를 다루는 부분은 시어머니와 관련한 고부갈등이 전부고 남성의 고통이 나오는 부분은 육아휴직을 고민하는 부분 정도입니다. 그마저도 여성이 남성에게 줄 수 있는 가능성은 고려하지 않았습니다. 영화가 잘 만들어졌고 감동적이나 전반적으로 깔린 의식은 조금 예민하고 남성에게 공격적이라고 생각합니다. 묵직하게 슬프다 눈물이 안 날수가 없더군요. 분명 가족들을 먹여 살리기 위해 일생을 바친 미숙이라는 어머니의 역할을 제대로 이해하기란 힘듭니다. 그런 삶을 살아보지도 않았고 견뎌내지도 못했을 삶이기에 헤아리기란 어렵습니다. 그럼에도 어머니가 느꼈을 고통과 딸에게는 전해주고 싶지 않은 아픔, 그리고 잘 살았으면 하는 걱정이 하나가 되어 커다란 슬픔이 됩니다. 미숙을 연기한 김미경 배우님은 종합적인 감정을 표정 하나에 다 실었습니다. 응축된 감정에 동요하지 않기란 매우 힘듭니다. 덕분에 오랜만에 영화관에서 엄청 고생했습니다. (눈물 닦느라요) 개인의 잘못은 올바르게 돌아가길 전체적인 주제는 김지영의 대사에서 나옵니다. "절 아세요?" 이 한 마디입니다. 우리는 아는 사람보다 모르는 사람과 함께 세상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에는 너무나 쉽게 모르는 사람에게 상처를 줍니다. 오히려 친하고 소중한 사람들에 대해서는 아는 게 없고, 모르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자꾸만 과하게 알려고 파고들죠. 어딘가 이상하지 않나요? 챙길 사람들만 신경쓰고 살기에도 바쁘고 힘든데 왜 굳이 남들까지 신경쓰고 살아야할까요? 그들이 당신에게 얼마나 큰 피해를 주었나요, 아니면 그럴 특별한 이유라도 있는 건가요. 본인의 삶을 남들이 알기 힘든 것처럼, 남들의 삶도 본인이 알기 힘듦을 아는 역지사지의 마음가짐이 절실히 필요한 시기라고 생각합니다. 혹시 누군가의 잘못된 언행이 있다면 그 본인에게 올바르게 돌아가기를 희망합니다. 오발탄처럼 아무에게나 흩날리지 말고 말이죠. 당당하게 맞서다 어딘가에 구속되고 억압받는 삶을 산 김지영은 마침내 온몸을 내리쬐는 태양 앞에서 당당하게 서 있었습니다. 영화는 듣고만 있지 말고, 능동적으로 헤쳐나가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부조리한 상황에서 당당하게 맞서라고 얘기합니다. 기죽지 말고 슬퍼하지만 말고 화내고 당차게 할 말은 하고 살라는 뜻입니다. 의외로 후련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기분이 한결 나아질지 모릅니다. 자랑거리는 아니지만 그게 당연한 반응이니까요. 단, 본인 당사자의 억울함에 한해서입니다. 우리는 타인의 대변인도 아닐뿐더러 세상물정을 다 아는 도사도 아니고 사람의 감정을 통달한 독심술사도 아닙니다. 그러니 우리는 우리 삶에 최선을 다합시다. 우리가 경험한 것에 한해 마음껏 대답합시다. 한 마디로 모두에게 용기를 주고 모두의 슬픔을 이해하는 영화였습니다. 쿠키영상은 없구요, 관객수는 100~200만 예상합니다! 이상 '82년생 김지영'에 대한 솔직한 후기였습니다.
심여사는 킬러
'심여사는 킬러' / 강지영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저의 생각을 쓴 글입니다.) "살인자가 되는 거네요. 삼천만원 때문에." 요즘은 정말로 삼천만원 때문에 살인자가 될 수 밖에 없는 사람이 많을 것 같다는 생각이 책 마지막 장을 덮는 내 머릿속에 묵직하게 들어앉았다. 마치 심은옥 여사처럼. 남편을 몇년 전 먼저 보내고 아들 하나, 딸 하나와 함께 살고 있는 심은옥 여사. 간신히 세 가족을 버티게 해주었던 마트 정육점 일도 잘리고 퇴근하던 대낮에 생활 정보지 구인란을 무작정 뒤진다. 거의 모든 구인란에 걸려 있는 나이 제한에 좌절도 채 하지 못하고 눈을 옮기다 40세 이상 주부사원 모집, 월 300 이상 보장이라는 스마일 흥신소의 구인 광고를 보고 예봉중학교 졸업, 정육점 운영이라는 두 문장을 쓴 이력서를 들고 스마일 흥신소의 문을 두드린다. 스마일 흥신소는 평범한 흥신소 일과 함께 물밑으로 청부살인을 받고 있는 곳이었고 평범하디 평범한 50대 아줌마인 심은옥 여사는 딸과 아들, 그리고 현실과 돈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흥신소의 사장 박태상의 손을 맞잡은 채 킬러가 되기로 한다. 이 소설은 주인공인 심은옥 여사의 이야기에서 시작해 스마일 흥신소의 사장 박태상, 흥신소에서 함께 일하는 최준기, 딸 진아와 아들 진섭의 이야기까기 심은옥 여사와 얽힌 여러 인물들의 이야기가 옴니버스 식으로 진행된다. 개인적으로 이런 식의 소설에는 잘 적응을 하지 못하는 편이다. 한 인물의 시점으로 쭉 서술되는 소설이 집중이 잘 끊기지 않아 좋아하는 편인데 '심여사는 킬러'는 어떻게 보면 집중을 방해할 수도 있는 옴니버스식 이야기 진행을 가지고도 그런 느낌을 전혀 받지 못할만큼 흡입력 있었다. 특히 옴니버스 식으로 진행된 이야기들이 서로 얽혀가는 과정이 감탄이 나올만큼 굉장했다. 여러 인물의 이야기를 다루면서도 한 치의 쓸모없는 부분이 없도록 이야기를 연결하고 복선을 회수해나가는 과정이 너무나도 치밀해 마치 빈틈없는 추리소설을 보는듯한 느낌이었다. 한 인물의 이야기를 읽다보면 그 전에 보았던 인물들의 이야기가 얽히고 설키며 이전의 이야기가 전혀 새롭게 느껴진다. 평범한 심은옥 여사는 우리네들 어머니의 자화상이다. 돈 몇 푼이 아까워 마트 세일 시간을 일일이 체크하고는 바로 옆의 마트를 놔두고 내가 신던 다 해진, 발에 맞지도 않는 런닝화를 신고 30분을 걸어 세일하는 마트를 찾아가는 바로 우리의 어머니. 그런 심은옥 여사가 삼천만원의 돈을 위해서 전날밤을 눈 뜬 채로 지새우고 첫 목표였던 찜질방 여사장의 갈비뼈 사이에 날이 잘 갈린 칼을 바들바들 떨리는 손으로 찔러넣었을 때는 과연 어떤 기분이었을까. 돌아와 몇 시간 동안 몸을 박박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오지 못했을 때는. 당장 딸과 아들만이라도 길바닥에 나앉지 않고 따뜻한 이불 속에서 잠들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공부 잘하는 딸에게 과외라도 하나 시켜주기 위해, 아들에게 하얀 봉투에 대학 등록금만큼의 만원짜리를 넣어 손 꼭 잡고 전해주기 위해 어머니는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하고 점점 그 수렁 속으로 빠져들어간다. 그녀의 이야기는 영화에서나 보던 킬러라는 그녀의 직업에도 불구하고 너무도 현실적이라 더 아프게 다가왔다. 실제로 지금 우리나라는 극심한 빈부격차 아래 극소수의 부유한 사람들과 소수의 중산층, 그리고 대다수의 서민과 빈곤층들이 살아가고 있는 국가다. 서민과 빈곤층의 사이에 속해 있는 필자로서는 이 소설을 읽고 공감할 수 밖에 없었다. 바로 내일 잘 곳, 먹을 것, 입을 것을 걱정해야 하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너무 잘 알고 있고 그들이 자식을 가진 아버지, 어머니라면 심은옥 여사와 같은 선택을 할 수 밖에 없었을 거라는 사실이 가슴아프게 다가왔다. 바로 그 점이 킬러라는 비현실적인 주인공의 직업에도 이 소설이 묘하게 현실적이고 공감되게 만들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어린 나이에 어른이 되어버린 심은옥 여사의 딸 진아와 아들 진섭의 모습, 그리고 그 외의 다른 인물들도 모두 사회의 어두운 부분에 존재하는 현실을 보여준다. 이 소설을 읽으면 애써 외면하려 했던 당신 옆의 어두운 현실을 정면으로 직시하게 될 것이다. 이 소설의 놀라운 점은 자칫 너무 무겁고 부담스러울 수 있는 주제를 너무 무겁지 않게, 또 너무 부담스럽지 않게 흥미롭고 재미있는 이야기의 탈을 쓰고 풀어낸다는 것이다. 한국 사회의 이면에 존재하는 자들의 현실을 보여준다는 주제의식과 함께 이야기로써 가져야 할 흡입력과 재미를 놓치지 않고 치밀하게 짜여진 소설을 써낸 강지영 작가에게 찬사를 보낸다. "살인자가 되는 거네요. 삼천만원 때문에." 우리 주변에서도 충분히 일어날법한 일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 그렇기에 우리는 우리가 외면하고픈 어두운 곳을 늘 바라보고 인지하며 생각해야한다. 어떻게 바꾸어 나갈 것인가. 이를 위해 찬란한 빛의 반대편을 볼 준비가 됐다면 심호흡을 하고 '심여사는 킬러'의 첫장을 펼쳐들어라. 주관적인 별점 : 4.5개 (결말이 좀 급하게 마무리 된 감이 없지 않으나 그 외에는 완벽하다.)
선을 넘었다, '기생충'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입니다. 오랜만에 포스팅을 하게 됐네요. 곧 종강이니까 방학하고 나면 바로바로 후기를 쓰겠죠? 제가? 본 영화는 꽤 있는데도 많이 밀려있네요 포스팅이,바쁘더라도 분발하겠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칸 영화제 황금종려상 수상작, 영화 '기생충'입니다. 이미 개봉 전부터 봉준호 감독과 송강호 배우의 만남으로 큰 화제를 모았던 작품이죠. 그런데 칸 영화제에서 최고수상의 영예까지 얻었으니 인기는 날개를 달은 격입니다. 비록 시간이 없다는 핑계로 포스팅을 미루고 있던 저지만 이번만큼은 영화 보자마자 바로 컴퓨터 앞에 앉아 후기를 씁니다. 본론만 간단히 말하자면 어마무시한 여운을 가진 작품입니다. 양극화를 극단적으로 영화를 묘사하자면 양극화 현상을 극단적으로 보여준 작품입니다. 다시말해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이미 존재하는 양극화라는 사회문제를 전혀 현실적이지 않게 표현했는데요. 문제는 이러한 묘사가 과연 어디까지 허구일까 가늠이 안 된다는 점입니다. 다수의 중간층을 제외하고 상하위 소수의 입장을 모르는 사람들은 영화를 보고도 확실히 정도를 정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 영화를 보면 볼 수록 블랙코미디라는 사실을 망각할 정도로 소름 돋게 영화 자체가 사실일 수 있겠다 싶더군요. 그 정도로 작품은 평범한 소재를 전혀 평범하지 않게 극적으로 보여줍니다. 자신의 분수에 대하여 영화는 잔혹합니다. 미장센적으로도 치명적이나 인물을 바라보는 시각 역시 잔혹했다고 생각합니다. 영화 제목 '기생충'에서도 느껴지지만 숙주에게 몰래 붙어 기를 빨아먹고 사는 벌레같은 사람들의 모습을 그립니다. 하지만 기생충에 입장에서 이러한 행동은 결국 자신의 생존을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죠. 숙주의 입장에서는 굳이 누군가에게 기생하지 않아도 충분히 살 수 있기 때문에 기생충이 굳이 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과연 이들을 벌레라고 치부하며 살아가야 할까요? 아니면 그 사람들에게 어떤 시선을 가지자고 말하는 걸까요? 영화를 보고 온 저라도 확실히 단정짓기는 어려운 문제입니다. 선을 넘을 필요가 없는 인간들 반대로 기생충으로 묘사되는 인간과 달리 사실과는 멀리 떨어져 자신들만의 세상에서 사는 인간들도 있습니다. 언제나 양극은 존재하기에 극빈곤의 삶이 있다면 부유한 상류의 삶도 존재하겠죠. 충분히 부유한 사람들은 기생충과 달리 선택의 여지가 있습니다. 정확히 말하면 굳이 위험을 감수할 필요가 없는 사람들이죠. 영화에서는 '선을 넘는다'는 표현이 자주 나옵니다. 이는 공사를 구분하는 선도 맞지만 이면적으로는 자신의 분수와 주제의 선을 말하기도 합니다. 기생충이 숙주가 되려고 마음먹지만 선을 넘는 순간 스스로를 갉아먹고 다른 기생충들과 충돌하여 전멸하는 사태까지 벌어지게 됩니다. 영화는 잔인하게도 이 선에 대해 단호합니다. 극명하게 보여주는 예는 부유한 사람들이 멍청할 정도로 순수한 모습으로 묘사되기까지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기생충은 숙주를 넘어서지 못하는 모습입니다. 그들은 사는 세상이 달랐습니다. 모든 사건은 자신의 분수를 지키지 못하고 선을 넘었기 때문에 발생합니다. 무계획이 계획이다 언뜻 명언처럼 보이지만 사실 이 또한 생존을 위한 법칙일 뿐입니다. 계획을 세우면 계획대로 흘러가지 않고, 오히려 실망과 좌절의 반복을 맛 보게 됩니다. 이미 마음 속 깊이 자리잡은 패배의식은 그들의 선을 더 견고하게 만들어주는 장치입니다. 언제나 실패하지 않고 제대로 흘러가는 계획이란 사실 무계획에서 출발한다는 엉뚱한 발상은 피식 웃음 짓게 만들 수도 있지만, 자세히 들여다본다면 얼마나 스스로를 연민의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지 느껴지게 됩니다. 하지만 결국 무결점의 무계획으로 인해 더 큰 사고로 번지게 되고 마지막에는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끝나게 됩니다. 무계획이 당연히 정답은 아니지만 그들의 선택지는 무계획이라는 하나의 선지 밖에 없었고 선을 넘으면 응당한 대가를 받아야 하는 멈추지 않는 악순환에,그들은 그저 갇혀있는 기생충이었습니다. 돌이나 기생충이나 작품은 그들을 묘사하는 대상을 기생충에 한정하는 모습은 아니었습니다. 저는 작품 전반에 등장하는 선물용 돌에 신경이 쓰였는데요. 후반부에 강에 다른 돌들과 선물용 돌이 함께 있게되는 장면이 있습니다. 사실 선물용 돌도 그저 평범한 돌일 뿐인데 자신의 자리를 벗어난 존재라고 생각했습니다. 누군가는 평범한 돌일 뿐인데 거기에 의미를 부여하고 정말 특별한 힘을 갖고 있게끔 착각하게 만들죠. 하지만 그 본질은 절대 변하지 않습니다. 돌은 돌이고 기생충은 기생충일 뿐 다른 존재를 흉내내고 쫓으려 한들 본성은 변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누군가는 냄새로, 또 누군가는 용도로, 다른 누군가는 생김새로 그 본질을 제자리에 돌려놓게 만듭니다. 영화는 사필귀정의 원칙에 따라 모든 것들은 각자 제 자리를 찾아 돌아가도록 인도합니다. 그들만의 모스부호 영화는 철저히 그들은 인간과 다른 어떠한 다른 존재로 인식합니다. 대표적으로는 기생충, 다르게는 돌이나 여하 다른 존재들로 말입니다. 그 증거로는 영화 내내 등장하는 모스부호입니다. 자세히 보면 상류층들은 모스부호를 인지하지도 않으며 관심도 없습니다. 아직 세상을 잘 모르는 어린아이가 관심을 가지는 모습을 살짝 넣습니다만, 그렇다고 내용이나 결말에 큰 영향을 주지는 않습니다. 땅 밑에 사는 사람들은 자신들끼리 말이 아닌 부호로 서로의 안부를 묻고 상황을 전달하고 있습니다. 아이러니한 상황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인간답게 살고 싶어 발악을 하지만 결국 살기 위해 인간이기를 벗어나는 행동들을 하며 그들은 무엇이 되어가고 있나 혼란스럽게 합니다. 존경의 대상이자 원망의 대상, 같은 부류지만 서로가 서로의 포식자인 셈임을 교묘하게 녹여낸 작품입니다. 영화를 자세히 보시고 해설을 보신다면 봉준호 감독의 천재성을 피부로 느끼실 수 있습니다. 물론, 저 나름대로의 생각일 뿐이고 다른 분들과 의견이 다를지 모릅니다만 생각을 정말 많이 하게 되는 시간이 됐습니다. 결말에 대하여 결론적으로 결말에 대해 모든 분들이 궁금해하실 거라 생각합니다. 열렸는지 닫혔는지 애매하거든요. 저는 열린 결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독전의 마지막 장면처럼 말이죠. 과연 그는 그래서 어떻게 된 것인가? 이 점이 논란의 대상입니다. 꿈을 이룬 후의 회상일 수도 있지만, 망상일 뿐 현실은 여전히 현실일 뿐이라는 의견도 존재하겠죠. 저는 후자에 더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하긴 합니다. 영화의 성격상 그들의 선을 바꾸려고 하지 않을 거라 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들이 올라오기에는 너무 깊이 내려갔습니다. 후반부는 정말이지 충격 그 자체입니다. 곡성에서의 소름을 또 한 번 겪었습니다. 쿠키영상은 없지만 엔딩 크레딧 올라가는 시간 동안 긴 여운에 빨리 일어서지는 못했습니다. 어딜봐도 현실에서 일어날 법한 일들이지만 정말 현실이라면 너무 공포스럽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모든 장르를 총 망라해 평범한 소재를 얘기한 봉준호 감독은 정말 보면 볼 수록 놀랍기만 합니다. 감히 말하기를 올해의 영화입니다. 기준이 후한 편이지만 혼자나마 호들갑 좀 떨겠습니다. 여러분들의 의견도 언제든 들려주셨으면 좋겠습니다. 영화 '기생충'이었습니다.
생각보다 엄청난 우주의 구성
1. 지구 너무 잘 아니 설명생략 2. 태양계 우리 지구가 속해있는 곳 3. 카이퍼 벨트 & 오르트 구름 태양계를 껍질처럼 둘러싸고 있다고 예상하고 있는 가상의 천체집단 4. 우리 은하 지름 약 10만 광년 그렇게 거대한 태양조차도 우리 은하에만 5~6천억개가 존재할 것으로 예상됨 그런데 우리 은하도 아주 작은 은하에 속하며, 바로 이웃 은하라는 안드로메다 은하에는 항성만 1조개가 넘개 존재할 것으로 예상 5. 국부 은하군 우리 은하, 안드로메다 은하같은 은하들이 약 50여개가 모여 구성되어 있는 은하군 가장 작은 은하 무리를 은하군이라고 부름 그 중 우리가 속해있는 곳이 국부 은하군 (우리 은하군은 30여개로 구성되어 있음) 우리 은하가 속한 국부 은하군은 지름만 약 500만 광년 그런데 이 국부 은하군은 은하군들 사이에서도 작은 은하군으로 분류됨 스테판 오중주라고 불리는 밀집은하군 6. 은하단 수백~수천여개의 은하들이 중력으로 묶인 곳 우리 은하를 중심으로 35억광년 내에서만 약 20개에 가까운 은하단이 존재할 것으로 예측 처녀자리 초은하단 우리 은하가 속해있는 초은하단 국부 은하군을 포함하고 있으며, 때때로 국부 초은하단이라고 불림 처녀자리 초은하단에만 약 5만여개에 가까운 은하가 존재할 것으로 추정 예전에는 처녀자리 초은하단이라고 표현했는데, 2014년 이 처녀자리 초은하단은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으로 편입됨 8.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저 처녀자리 초은하단조차도 이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의 일부일 뿐 초은하단이 여러개가 모인 곳이 바로 라니아케아 초은하단 즉, 지구, 태양, 태양계, 오르트구름, 우리 은하, 국부 은하군, 처녀자리 초은하단을 포함한 집합체 당연히 우주에는 이런 라니아케아 초은하단이 여러개 존재함 대표적으로 섀플리 초은하단 바다뱀자리-센타우루스자리 초은하단 물고기자리-고래자리 초은하단 히페리온 원시 초은하단 같은 것들이 있음 9. 슬론장성 우주의 거대한 벽 관측 가능한 우주 지름의 약 1/60에 해당됨 대표적으로 우주에서 가장 무겁고 거대하다고 알려진 헤라클레스자리-북쪽왕관자리 장성도 이런 유형 10. 우주 필라멘트 우주 거대가락이라고 불리는 곳 우리 지구부터 장성들까지 전부를 포함하고 있으며, 크기는 약 930억 광년으로 추정됨 일부의 학자들은 이 필라멘트조차도 우주의 아주 극히 일부일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음 (출처) 요즘 우주 여행을 다녀오는 슈퍼리치들이 생기고 있으니(사실 우주여행이라기엔 그저 성층권을 벗어난 것 뿐이지만) 우주에 대한 관심이 더 커지고 있죠. 우리가 아는 것만 해도 이렇게나 방대한데 실제 우주는 정말 상상도 할 수 없는 망망함이겠죠. 셀 수 없이 많을 여러 종의 생명체들이 있을텐데 죽기 전 한 번은 만날 수 있을까요.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디아더스의 귀신과 사람의 공존처럼 어쩌면 우리와 어떤 외계 생명체는 다른 물질로 만들어져 서로를 인식하지 못 한 채로 공존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고요.
명작의 탄생, '조커' 영화 솔직후기/리뷰/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비도 오는 김에 친구랑 감자탕을 먹었어요. 영화관이 앞이길래 영화도 보러 갔어요. 의식의 흐름대로 흘러갔던 하루였네요. 근데, 결과는 대만족이었어요. 10월달 화제의 영화, '조커'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사실 우리는 히스레저의 조커가 더 익숙합니다. 자세한 스토리는 모르지만 범접할 수 없는 매력으로 다크나이트의 배트맨과 비슷한 사랑을 받았던 캐릭터죠. 처음에 조커가 다른 누군가에 의해 다시 만들어진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솔직히 반신반의했습니다. 과연 이전의 그를 넘어설 수 있을까 의문이 들었죠. 그런데 직접 보고 온 지금, 저는 2명의 조커를 섬기게 됐습니다. 그도 사람이었다 우리가 알고 있는 조커는 무자비하고 냉소적이고 살인에 감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과연 그의 과거는 어떠했을까? 궁금했습니다. 이 작품은 조커의 탄생비화로 간단히 설명할 수 있겠습니다. 하지만 단순히 탄생의 배경뿐만이 아니라 세상에 던지는 야유, 인간에게 던지는 물음과 같은 어둡고 깊은 내면의 주제를 다루기도 합니다. 결국 조커라는 캐릭터도 원래는 사람이었고 그렇게 괴물이 된 조커가 나올 수 밖에 없었다고 영화는 설득합니다. 보통은 설득이 안 되고 허무맹랑하나 이번엔 2시간 내내 그의 힘에 매료됐습니다. 자본주의 사회라 쓰고 고담으로 읽는다 배트맨과 조커의 화려한 싸움을 혹시라도 생각한다면 그런 기대는 접으시길 바랍니다. 액션은 얼마 나오지 않고 폭력보다 조커의 내면에 집중합니다. 허나 애드 아스트라보다 더 깊고 우울하며 관객이 관찰자가 아닌 당사자가 되는 작품입니다. 조커의 배경은 평범한 인간이었을지 모르고 순수한 꿈을 지닌 청년이었을지 모르며 자본주의 사회 속 짓밟힌 아웃사이더일지 모릅니다. 즉, 시작은 자본주의 속 우리들 중 누군가입니다. 고담 시티는 철저하게 잇속으로 더럽혀진 현대사회를 압축적으로 축소한 세계라고 보시면 됩니다. 그 속에서 누군가는 폭동을, 누군가는 선동을 시작합니다. 첫 장면부터 중요하다 조커는 장면 하나하나, 사건 하나하나가 중요합니다. 관객들을 설득시키기 위해서는 세세한 작업이 필요합니다. 첫 장면부터 자신의 얼굴을 칠하는 '해피'는 웃으면서도 눈물을 흘리는 희한한 장면을 표현합니다. 이는 조커가 아닌 슬프지만 웃을 수 밖에 없는 인간으로서 '해피'에 가깝습니다. 그러다 점점 사건이 심각해지고 클라이맥스에 이르러 해피가 '조커'로 각성하게 되죠. 처음은 순수하고 겁쟁이었습니다. 다음은 충동적이고 분노에 차 있었죠. 또 다음은 깨달음을 얻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심판자가 되어 있었습니다. 수동적이고 무시받던 외톨이가 결정을 내리는 능동적인 처형자가 되는 그림을 2시간에 걸쳐 감상하면 됩니다. 인간으로서의 마지막 한 때는 인간이었던 '해피'가 어떻게 '조커'로 변화하게 되는지, 어느 순간 '조커'로 됐는지 구분지으면 더 흥미롭습니다. 모든 걸 잃어버렸음에도 세상에 기댈 곳 하나 있었다면 해피는 조커가 되지 않았을지 모릅니다. 한 구석도 믿지 못하게 됐을 때, 잃을 게 없어졌을 때 마침내 괴물은 태동하게 된 것입니다. 그도 그저 평범한 인정을 바랬고 평범한 위로를 기다렸습니다. 하지만 개인밖에 모르는 인간들 틈에서 순수한 인간은 괴물의 탈을 쓰고 변화하게 됩니다. 호아킨의 연기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는 명품입니다. 조커 그 자체입니다. 영화를 보는 내내 소름과 전율의 연속이었습니다. 호아킨 피닉스의 연기로 긴박한 장면이 많지 않지만 전혀 지루하지 않았고 빠르게 시간을 녹여냈습니다. 수어사이드 스쿼드의 조커와는 비교가 안 될 정도의 깊이 있는 조커입니다. 히스레저와 비교할 수 있을 정도입니다. 우리가 원했던 조커의 모습, 기다렸던 괴물의 탄생, 진정한 안티 히어로의 출현이 이 작품에서 나타났습니다. 스토리도 좋고 연출도 좋고 설득력도 있고 모든 게 좋지만 단순히 호아킨 피닉스 연기 하나만으로 영화를 보는 이유가 충분할 정도입니다. 명대사 천국 조커하면 공감가는 명대사로 유명한데요. 이번 작품에서도 인상적인 명대사를 많이 남겼습니다. 내 인생이 비극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개 같은 코미디였어 당신들이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것처럼, 웃기고 안 웃기고도 판단할 수 있는 거야? 코미디는 주관적이야 방금 웃긴 조크가 하나 생각났거든. 이해 못할 거야 조커의 탄생 코미디와 비극, 웃음과 슬픔, 부자와 빈민, 모든 건 반대되지만 동시에 주관적인 것. 하지만 부자와 빈민의 역전은 현실에서 일어나기 힘들죠. 그렇기 때문에 조커는 모든 인간이 같은 상태를 경험하길 원합니다. 돈을 뺏어서 빈민에게 나눠주는 의적이 아니라 돈을 태워서 없애버리는 공정한 심판자입니다. 그리고 부자나 빈민할 거 없이 잘못하거나 예의가 없으면 죽어야 마땅하다고 생각합니다. 조커가 생각한 예의는 상대를 멋대로 판단거나 무시하는 행동이 없는 상태입니다. 그는 자신만의 철학이 있었고 룰이 있는 빌런입니다. 무섭지만 싫지 않고, 난폭하나 설득력이 있는 조커를 우리가 어찌 미워할 수 있을까요. 영화는 우리도 조커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암시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모습과 다르지 않은 호아킨의 조커, 꼭 영화관에서 확인하시길 바랍니다. 쿠키영상은 따로 없습니다. 청불이라 대박까지는 힘들 수 있습니다만 300만~400만 정도 기록할 수 있지 않을까 싶네요. 이상 영화 '조커'의 솔직한 리뷰였습니다.
세상이 외면했던 그들의 이야기를 담은 소설5
소설은 허구입니다. 작가가 상상한 세계, 꾸며낸 인물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가죠. 하지만 이 허구, 상상의 세계는 현실을 반영합니다. 어떤 소설은 소설보다 더 현실적으로, 바로 보지 못했던 부조리와 참상을 일깨우기도 하죠. 세상이 외면했던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게 하고, 소외된 세상 이야기와 마주하게 합니다. 많은 이야기 가운데 인권을 다시 생각하게 하는 소설을 소개합니다. 세상을 지배하는 미의 기준은 시대와 지역마다 다릅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변화는 계속되고 있죠. 이런 물음이 있었습니다. “이 기준이란 건 자연스럽게 생겨난 걸까?” 자연스러운 현상이라면 왜 유독 한 쪽을 구속하는 형태로, 제약을 가하는 모습이 그렇게 많은 걸까?   이 소설은 중국 1000년을 지배한 미의 기준, 전족을 소재로 한 여성에 대한 억압과 강요된 미적 기준이 만든 갈등과 비극을 이야기 합니다. 전족을 하지 않으면 순탄한 삶의 기회조차 얻지 못했던 여성들의 이야기.  오랜 세월 남성들은 자신의 지배를 정당화 하기 위해 여성을 이용했을 뿐 아니라 여성의 자율성을 빼앗고, 소유하는 것으로 권력을 과시해 왔습니다. 자유를 찾으려는 여성들을 또 다른 구속과 제약에 빠지게 만드는 일도 쉬지 않았죠. 과연 이 소설 속 이야기를 옛 이야기, 중국이라는 다른 나라 이야기로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을지, 우리 사회가 나아가야 할 방향, 해야 할 일은 무엇인지 생각하게 합니다. 전족 자세히보기>> https://goo.gl/XPpmDB 제국주의 일본은 자신들이 미개했던 조선을 개화하고 발전하게 해주었으니 오히려 감사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그러한 주장이 계속되고 한국에서도 그에 동조하는 이들이 있죠. 식민지란 문화의 상대성과 다양성을 무시한 채 오로지 군사력의 강대함으로 세계를 바라본 결과의 하나입니다. 지금의 우리는 자유인가요.  이 소설은 영국의 식민지였던 버마를 배경으로 합니다. 영국에서 자리를 잡지 못한 낙오자들이 마지막에 선택하는 오지. 원주민은 동등한 인간이기보다 가축에 가깝습니다. 그 안에서 주인공은 갈등합니다. 백인의 세계와 원주민의 세계, 어느 쪽에서도 인정받지 못한 채 이루지 못할 사랑을 꿈꾸죠.  세상에 정말 더 우월한 인종은 존재하는가? 존재한다고 해도 그 판단은 어느 인종, 어떤 나라, 하나의 세계의 사람들이 할 수 있는 것은 아닐 겁니다. 인간을 초월한 존재들이나 시도해볼 수 있는 일이죠. 인간은 자신의 지배, 군림을 정당화 하기 위해 약자와 패배자를 규정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모두 동등한 존재 가치를 지닙니다. 다름을 우월함으로 규정하는 실수를 반복해서는 안 됩니다. 버마시절 자세히보기>> https://goo.gl/XPpmDB 미국은 가장 부유한 나라, 가장 강대한 나라입니다. 하지만 인권을 이야기할 때는 가장 차별이 심한 나라, 빈부 격차가 큰 나라, 경직된 나라라는 오명을 피할 수 없죠. 가장 적극적으로 노예를 사고 팔았던 나라 역시 미국입니다. 그리고 그 미국의 흑인들이 자유와 권리를 얻은 건 그리 오래된 이야기가 아닙니다.  이 소설은 1960년 대 미국을 배경으로 합니다. 생계를 위해 자신의 아이와 가정은 내버려둔 채 백인 가정에서 허드렛일을 해야 했던 흑인과 그러한 차별과 부조리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애썼던 사람들의 조용하지만 격렬한 혁명 이야기를 담고 있죠.  2008년 오바마 대통령이 당선됐을 때 미국의 인권이 혁신적으로 향상되기를 기대했던 이들이 적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미국은 트럼프를 선택했고, 백인 우월주의자들은 그 기세를 되찾았습니다. 평등과 자유를 위한 혁명은 지금도 전 세계에서 진행되고 있습니다. 그들의 이야기가 남의 이야기는 아니기에, 우리도 함께 해야만 합니다. 헬프1 자세히보기>> https://goo.gl/XPpmDB 전쟁과 갈등 속에서도 사랑과 우정은 피어납니다. 가난이나 신분의 차이도 우정이 싹트는 걸 막지는 못하죠. 그러나 그렇게 힘겹게 싹튼 우정은 때로 간단히 짓밟히기도 합니다.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서로의 가슴에 안고 평생을 살아가기도 하죠.  이 소설은 아프가니스탄을 배경으로 전쟁과 갈등, 상처와 치유에 이르기까지 한 사람의 긴 이야기를 담고 있습니다. 신분의 차이를 넘어 우정을 맺지만 친구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는 소년과 전쟁으로 나라를 떠나야 했던 설움, 오래 전 지켜내지 못했던 친구와의 우정을 회복하고자 하는 최후의 시도까지 감동적으로 그려내죠.  아무리 전쟁과 갈등이 좋은 소설, 감동적인 이야기를 만들어 내는 원동력이 될 수 있다고 해도 전쟁이 없는 세상의 평화보다 낫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소설이 주는 작은 감동에 비해 전쟁이 만드는 슬픔은 너무나 압도적으로 거대하니까요. 안심하고 우정과 사랑을 키워나갈 세상을 꿈꿉니다. 연을 쫓는 아이 자세히보기>> https://goo.gl/XPpmDB 지구 위의 생명은 끊임없이 진화를 거듭하며 적응하고 발전하며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계속해 왔습니다. 자신이 살아남기 위해 다른 종을 해치기도 하고, 공존의 길을 찾기도 하면서요. 영화 <혹성탈출>은 진화한 영장류와 인간의 생존 경쟁을 담고 있습니다. 만약 이 시대에 진화한 신 인류가 출현한다면 인류는 그들을 어떻게 대할까요? 이 소설은 신 인류의 출현이라는 사건을 소재로 합니다. 다른 인류가 가져올 지 모르는 위협, 반복되어온 생존 경쟁에서의 도태를 두려워하며 신 인류를 말살하고자 하죠. 다른 한 쪽에서는 신 인류를 지켜내고자 합니다. 현재의 지구에서 계속 살아가기 위해 신 인류의 도움이 필요할 거라는 판단에서요.  인간은 스스로를 가장 진화한 생명, 가장 똑똑하고 지혜로운 존재라고 믿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렇게 지혜로운 인간이 어떤 문제 앞에서는 이성적 판단력을 잃고 두려움이라는 감정에 지배당하기도 하죠. 역사 속 수 많은 전쟁이 두려움에서 시작되었음을 이제는 알고 있습니다. 같은 실수를 반복할 것인가, 아니면 이 세계에서 공존하는 방법을 찾을 것인가. 지금도 유효한 물음 아닐까요. 제노사이드 자세히보기>> https://goo.gl/XPpmDB 역사 속에서 다름은 차별과 억압, 지배와 살해의 정당한 이유가 되었습니다. 열등하기에 짐승을 죽이듯 죽여도 되고, 미개하기에 짓밟고 빼앗아도 된다고 이야기하는 이들이 있었습니다. 성별의 차이에 필연적 차별의 근거가 있다고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 모든 게 사실이 아님을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제는 앎을 행동으로 옮겨야 할 때 아닐까요. 무료다운로드 >> https://goo.gl/XPpmDB
이게 인생영화, '그린북' 솔직후기/리뷰/해설 (약스포주의)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입니다. 최근 화제인 작품이 있습니다. 작품에 대한 찬사는 물론 각종 시상식에서 상을 휩쓸고 있는데요. 왜 이걸 이제서야 봤나 싶습니다. 오늘의 영화는 인물들의 환상적인 케미를 자랑하는 영화 '그린북'입니다. 정말 이 조합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요. 왜 그렇게 모든 이들이 작품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지 드디어 직접 눈으로 똑똑히 확인했습니다. 이 둘의 조합으로 말할 거 같으면 자유로운 유대인과 섬세한 흑인의 만남입니다. 어딘가 이상하지 않은가요? 셜리는 흑인이지만 힙합이 아닌 클래식을 연주하는 천재 음악가입니다. 토니는 이탈리아계 유대인이지만 찬송가가 아닌 주먹을 날리는 백인입니다. 보통의 편견에서는, 흔한 작품에서 보이는 흑인과 유대인의 이미지와 사뭇 다릅니다. 이렇게 고개를 갸우뚱하게 만드는 어색한 조합이지만 이는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또 다른 놀라움을 선사하게 됩니다. 하지만 영화를 본 사람들은 공감할 거예요. 돌직구의 유대인과 생각이 많은 흑인이라는 이 두명의 조합은 우월주의에 빠져있는 백인 둘의 조합을 월등히 뛰어넘는다는 사실을요. '을'과 '을'의 만남 처음부터 이 둘이 어울릴 거라 생각하는 사람은 많지 않습니다. 심지어 토니는 보수적이고 인종차별적인 성향이 짙었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돈을 준다기에 흑인의 운전기사를 자처하게 되죠. 애초에 맞지 않는 퍼즐을 끼워놓은 모양새였습니다. 그런데 영화를 계속보다 보면 이 둘이 서로를 비슷하게 바라보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됩니다. 둘은 모두 백인사회에서 '을'에 해당하기 때문입니다. 셜리는 돈 많고 유명한 피아니스트지만 단지 '흑인'이라는 이유로 홀대 받습니다. 토니는 백인이지만 이탈리아계 유대인이면서 클럽 문지기나 하는 입장이기 때문에 알게 모르게 자격지심을 키워왔습니다. 무엇보다 이 둘은 자신을 차별하는 백인을 위해 일하는 역설적인 위치에 놓여있다는 공통점이 있었습니다. 서로 다른 듯 같은 모습을 느껴가며, 둘은 어느새 상대방을 진정으로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서로를 향해 나아가는 진심 티격태격하던 이 둘도 시간이 지나며 서로에게 진심을 느끼기 시작합니다. 인물들의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변화하는 모습은 절로 웃음이 새어 나오죠. 예를들어 토니가 자신의 아내 돌로레스에게 안부차 편지를 쓰는 장면이 있습니다. 교양 있는 셀리는 내용을 더 로맨틱하게 바꿔주는데요. 처음에는 투박한 내용에서 시간이 흐를수록 감정이 풍부해지는 덕에 돌로레스는 감동까지 받습니다. 처음에는 적응하지 못했던 토니의 수다력에 셜리는 어느새 적응을 하고 있었고, 주먹으로 화를 삭이던 토니가 셜리의 침착함에 폭력을 멈추기도 합니다. 겉만 보면 분명 인정하기 힘들었던 이 둘의 조합은 그렇게 서로에 대한 진심으로 변화하고 있었습니다. 단순한 인종차별을 말하는 영화가 아니다 이 작품은 단순히 인종차별만을 비판하는 작품이 아닙니다. 서로에 대한 이해의 결핍을 가장 큰 문제점으로 지적합니다. 제가 눈물을 흘린 장면이 있는데요. 그 장면에서 영화가 제시하고 싶은 문제의식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부분이기도 했습니다. 상대방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오만한 편견이었고 또 다른 차별일 수 있죠. 차별 받는 누군가는 스스로 차별을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 과정에서 어느 진영에도 확실히 소속될 수 없었던 '애매한' 입장을 얻게 됩니다. 결국 자신의 정체성마저도 의심해 버리는 상황이 문제인 것이죠. Who Am I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 속해 있는 사람인가 의심이 든 적 있나요? 누군가는 매일 하는 고민일지 모릅니다. 타인의 배려도 공격으로 느껴지고 스스로를 괴롭히는 지경에 이르죠. 이는 서로에 대한 진정성 있는 이해에 부족때문입니다. 영화는 상대를 아는 척하는 일이 얼마나 위험한지를 보여줍니다. 대표적으로 돈 셜리로 대표되는 인물을 통해 전달되는데요. 그는 차별을 각오하고도 백인들 앞에서 아무렇지 않은 척 계속해서 공연을 합니다. 굳이 차별을 마주하는 이유는 그에게는 남들과 다른 '용기'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려면 바로 그 용기가 필요하기 때문입니다. 또 다른 용기 하지만 토니도 용기가 없는 인물은 아닙니다. 토니는 토니만의 가치관이 있고 '을'로서 살며 강인하게 박힌 철학이 있었습니다. 어쩌면 셜리와 토니가 가진 용기가 서로 다른 유형의 용기였기에 둘의 만남은 운명적이지 않았나 싶습니다. 토니는 차별에 대항하는 법을 몰랐습니다. 오로지 주먹이 먼저 나가 상대방의 입을 틀어막기 바빴죠. 대신 그는 자신의 소중한 사람들을 지킬 줄 아는 남자였습니다. 그래서 차별에 저항할 줄 알지만 외로움을 자처하는 셜리를 만나 서로에게 절실히 필요한 존재로 거듭나게 됐다고 봅니다. 결론적으로 이 둘의 조합은 완벽할 수 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인내심을 가져야 승리한다? 작중에서 셜리는 인내심을 가져야만이 차별에서 승리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본인이 여지껏 참고 버텨왔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작품은 다른 길을 제시합니다. 전통적인 백인 식당에서 인종차별을 당하고 식사를 할 수 없게 되자 둘은 흑인들이 주로 식사하는 식당으로 향하는데요. 융통성 없이 배척만 하는 백인사회와 달리 경계하지만 이내 받아들이는 흑인사회가 대비되기도 하는 부분이었습니다. 흑인사회가 우월하다는 뜻이 아니라 '화합'이 정답이라고 봤습니다. 서로를 진정으로 이해하고 받아들인다면 진정한 승리로 가는 길이 아닐까요? 사람의 진심은 숨기려해도 드러남을 알려주는 작품이었으니까요. 'Get Out' 'Liberty Heights' without 'GreenBook' 왜 차별이 나아졌다고 생각하는 지금까지도 이런 작품들이 많이 나오는 걸까요? 왜냐면 차별이 줄었다고 생각하는 우리들의 생각조차도 '아는 척'에 불과하니까요. 직접 차별을 당하고 고통받는 사람들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으니까요. 그린북이 없이도 리버티헤이츠를 나가 화합을 향해 아무렇지 않게 나갈 수 있는, 모두가 조화롭게 어울러 살 수 있는 세상은 언제쯤 올지 모르겠습니다. 그래도 분명한 건 60년전이나 지금이나 더 편견 없는 세상을 향해 나아가고 있다는 점이겠죠. 그 긴 여정에 큰 한 발자국을 남긴, 영화 '그린북'이었습니다.
책방 3화 :: 꿈을 좇아 퇴사하려 합니다
안녕하세요:) 책으로 하는 방송, 책방입니다! 책방은 사연을 받아 그 사연에 맞는 책을 직접 골라 소개해드리고 있습니다:) | 📖서점의 추천책 📖|undefinedundefined 오늘은 그림으로 유명한 책을 가져왔습니다.  평범한 40대 가장이었던 주식 중개인 찰스 스트릭랜드가 자신의 포기할 수 없었던 화가라는 꿈을 위해 가정도, 자식도, 부와 명예까지 모든 것을 내팽개치고 꿈을 위해 온갖 어려움을 겪은 끝에 걸작을 완성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첫 번째 이유 많은 사람들은 꿈을 위해 찰스 스트릭랜드가 너무 많은 것을 버렸다고 비난을 하지만 그 비난을 감수하는 그의 노력들은 무시할 수 없습니다. 그는 죽음 직전까지 가는 과정도 불사하죠. 고민자 분도 꿈을 이뤄나가는 과정에서 분명 불안함이 생길 거예요. 지금과 같은 비교적 편안하고 안락한 길은 아니겠지요. 하지만 이 책을 통해 그런 불안함을 좀 덜어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추천합니다. 이 책을 추천하는 두 번째 이유 주인공은 아니지만 '아브라함’이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이 인물 또한 출세를 포기하고, 자기가 발견한 이상적인 삶을 선택하는 인물입니다. 전도 유망한 의사였고, 최고의 권위를 누릴 수 있는 사람이었는데 그 앞 길을 내팽개칩니다. 그러면서 2인자였던 이가 그 자리를 차지하게 됩니다. 그는 아브라함에 '인격이 없다’고 합니다. 멍청한 선택을 했다는 거죠. 아브라함은 작은 보건국 관리직을 맡으며 늙은 그리스 여자와 병치레를 하는 아이 대여섯과 함께 살고 있으니까요. 하지만 반대로 생각해보면 어떨까요. 아브라함은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다는 것이기 때문에, 오히려 적지 않은 인격이 필요했다는 것이죠. 그런 노력들이 보이는 작품이었기 때문에 추천합니다.  | 📖클로이의 추천책 📖|undefinedundefined 하루키 하면 떠오르는 몇 가지 키워드들이 있죠. 고양이, 재즈 등등. 그중에서도 달리기를 이야기하는데요. 그러면서 소설가로서 인생을 시작하게 된 이야기를 회고록처럼 쓴 책입니다. 그래서 저도 새해 즈음에 이 책을 읽었는데요, 뭔가 시작하고 싶을 때 읽으면 좋은 책인 것 같아 추천합니다. 하루키도 원래는 직업이 소설가가 아니라, 재즈클럽 사장님이었는데, 전업작가가 되었죠. 때문에 하루키도 굉장히 고민이 많았다고 해요. 새로운 일을 시작했으니까요. 고민이 될 때 이 책을 읽어보시면 용기를 얻을 수 있지 않을까 해서 추천합니다. 어쨌든 나는 그렇게 해서 달리기 시작했다. 서른세 살. 그것이 그 당시 나의 나이였다. 아직은 충분히 젊다. 그렇지만 이제 ‘청년’이라고 말할 수 없다. (중략) 그런 나이에 나는 러너로서의 생활을 시작해서, 늦깎이이긴 하지만 소설가로서의 본격적인 출발점에 섰던 것이다. 33살에 시작을 했고, 꾸준히 포기하지 않았고, 자신만의 길을 쭉 달렸기 때문에 전 세계적인 작가가 되셨듯, 고민자분도 계속해서 가다 보면 어떤 자신의 목표에 당도할 수 있을지 않을까 싶어 추천합니다.  이 분처럼 고민이나 다른 사연이 있으신 분들은 이메일(captaindrop@flybook.kr)또는 댓글로 사연을 남겨주세요. 책방에서 정성스럽게! 책을 추천해드릴게요:) 그럼 다음 책방에서 만나요! 👇유튜브 구독하면 더 빨리 받아볼 수 있어요!👇 유튜브 바로가기 >> https://youtu.be/4VPvT965y0U 플라이북 바로가기 >> https://goo.gl/W8u7Lh