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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업자 데릴사위가 키운 스즈키 자동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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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즈키 자동차의 1대 창업주 스즈키 미치로(얼굴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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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행원 하다가 오너 집안에 장가들어
마츠다 오사무(松田修)라는 사람이 있었다. 기후현 태생으로 주오대(中央大) 법학과를 졸업한 그는 은행에 첫 발을 들여놓으면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대학 졸업 5년 후인 1958년, 은행원이던 그의 인생에 일대 큰 변화가 찾아왔다. 스즈키 자동차 실질적 창업주 스즈키 슌조(鈴木俊三)의 데릴사위가 된 것이다.

마츠다 오사무는 스즈키 슌조의 장녀와 결혼해 양자가 됐고, 그의 이름은 마츠다 오사무(松田修)에서 스즈키 오사무(鈴木修)가 되었다. 그런 그에게 또 다른 큰 변화가 닥친 것은 1977년 무렵이다.

<1977년에 창업자인 스즈키 미치오와 2대 회장인 스즈키 슌조, 3대 회장인 스즈키 지츠지로 등의 경영자가 잇따라 병으로 쓰러지는 바람에 데릴사위인 내 어깨에 회사의 운명이 지워진 절박한 순간도 있었다.>(스즈키 오사무 저 ‘작아서 더 강한기업 스즈키’(김소운 옮김, 리더스북)


전현직 동시에 쓰러지면서 사장 자리 올라
전임, 현직 CEO가 동시에 쓰러지면서 스즈키 오사무는 순식간에 사장 자리를 맡았다. 입사 20년이 지난 1978년의 일이다. 닛케이비즈(2009년 3월 2일)는 당시 스즈키 오사무의 심정을 이렇게 보도했다.

<“아, 내가 사장이야”- 스즈키 오사무는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등골이 오싹한 생각에 사로잡혀, 이불에서 벌떡 일어났다. 쉴 때도 사장이라는 무게감이 덮쳤다.>

스즈키 자동차를 이야기 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스즈키 오사무(鈴木修‧87) 회장은 이렇게 큰 변화를 두 번 겪었다. 그는 경차의 대명사인 스즈키를 ‘위대한 중소기업’(偉大な中小企業)으로 키워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스즈키 오사무는 2000년부터 회장을 맡고 있다.

스즈키의 차는 차체만 작을 뿐, 회사는 이제 더 이상 중소기업이 아닌 대기업의 반열에 올라 있다. 스즈키자동차의 슬로건은 ‘작게(小), 적게(少), 가볍게(輕), 짧게(短), 아름답게’(美)이다. 경차는 이익을 남기기가 어렵기 때문에 생산원가 절감이 생명이다. 오사무 회장은 공장 바닥에 나사 하나가 떨어져 있으면 “공장 바닥에 돈이 떨어져 있다”며 한 푼의 돈도 허투루 하지 않았다고 한다.

스즈키의 효자 상품은 알토(Alto:라틴어로 높다는 뜻의 altus에서 따왔다)다. 오사무의 사장 취임 직후인 1979년 첫 출시된 알토는 오랜 기간 인기를 끈 스즈키의 주역이다. 알토는 한국 대우자동차의 티코 모델이기도 하다.


스즈키 집안은 방직기계로 출발
스즈키 자동차는 창업주 이름에서 비롯됐지만, 처음부터 자동차업으로 출발한 것은 아니다. 목화 농부 집안에서 태어난 스즈키 미치오(鈴木道雄:1887~1982)가 스즈키 방직기계(주)를 설립한 건 1920년이다. 그의 아들 스즈키 슌조(鈴木俊三)는 모터가 달린 자전거를 내놓으면서 업종을 변경했다.

1954년 ‘스즈키자동차공업’으로 회사명을 바꾸고 스포츠바이크와 경차를 본격적으로 생산하기 시작했다. 지금의 붉은 S자 로고를 사용하기 시작한 건 1958년부터다. 1990년 10월에는 현재의 스즈키로 사명을 바꿨다.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
스즈키의 역사에서 인도 진출을 빼놓을 순 없다. 오사무 회장은 “우물을 파려면 제일 먼저 파야 한다”며 일본 자동차 메이커 중 가장 먼저 인도 시장에 눈떴다. 그가 사장 4년차이던 1982년(당시 52세), 스즈키는 자동차 기업으로서는 일본에서 꼴찌였다. 그래서 그는 “국내에서 1등하기 어렵다면 해외에서 하자”고 마음 먹었다. 모두가 관심을 갖지 않았던 인도 시장 진출 선언이었다.

인도 정부와 공동으로 합작사‘ 마루티 우도요그’(Maruti Udyog)를 설립, 이후 자회사로 만들었다. 2007년에는 ‘스즈키 마루티 인디아’로 회사명을 변경했다. 마루티는 인도에서는 ‘국민차’로 불린다. 스즈키는 한때 인도 시장 점유율 70%를 웃돌기도 했지만, 현재는 50%대를 유지하고 있다. <에디터 김재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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윗분.. 흥선대원군인줄.. 이런기사 올린다고 스즈키에 돈주는 것도 아니고..
이러고 싶을까 ?? 아직도 왜놈들 기사거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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칸 그랑프리 일본 여배우와 한국의 봉준호
<사진= 봉준호 감독의 '마더' 시나리오 콘티. 봉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만화같은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사진은 시나리오보드집 '마더이야기'(마음산책) 캡쳐> 1954년 칸 그랑프리 ‘지옥문’의 여배우 사망 #. 2주 전인 5월 12일, 일본에서 한 원로 여배우가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다. 이름은 쿄 마치코(京マチ子), 95세였다. 그녀는 1954년 5월, 프랑스에서 열린 제 7회 칸국제영화제의 ‘히로인’이었다. 당시 58세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衣笠貞之助) 감독이 ‘지옥문’(地獄門)이라는 작품으로 그랑프리(지금의 황금종려상)를 거머쥐었다. 이 영화에서 여주인공으로 출연했던 이가 바로 쿄 마치코다. 1950년대 초, 일본영화는 국제적인 영화제에서 성과를 올리던 시기였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감독보다 앞선 1951년 ‘일본 영화의 천황’으로 불리던 구로사와 아키라(黒沢明:1910~1998) 감독이 ‘라쇼몽’(羅生門)으로 베니스국제영화제에서 황금사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의 히로인 역시 쿄 마치코였다. 출연한 영화가 국제영화제에서 잇달아 최우수상을 받으면서 그녀는 ‘그랑프리 여배우’(グランプリ女優)라고 별칭을 얻었다. 오사카쇼치쿠(松竹)소녀가극단의 댄서를 거쳐 영화사 다이에(大映)에 들어간 쿄 마치코는 당대에 ‘다이에 간판배우’로 이름을 날렸고, 관능적인 이미지로 큰 주목을 받았다. 평생 독신으로 지냈던 그녀는 장수 축복도 누렸다. 1924년생인 그녀는 일본왕의 치세기간으로 보면, 네 시대(다이쇼, 쇼와, 헤이세이, 레이와)를 살다 갔다. 일본 언론들은 “쇼와, 헤이세이 시대에 대활약했던 배우가 레이와(令和) 원년에 천국으로 떠났다”며 그녀를 추모했다. <사진= 1954년 아시아 최초로 칸 그랑프리를 받은 작품 '지옥문'. 여배우는 5월 12일 사망한 쿄 마치코.> 여장 역 맡던 배우가 칸에선 감독으로 그랑프리 #. 쿄 마치코를 배우로 기용했던 기누가사 데이노스케(1896~1982)는 ‘아시아 최초 칸영화제 그랑프리 감독’이라는 기록을 남겼다. 흥미로운 점은 이 감독이 닛카쓰 무코지마 스튜디오에서 여자 역을 연기하는 온나가타(女形: ‘오야마’라고도 부른다)로 배우 인생을 시작했다는 것이다. 온나가타 제도가 폐지되자, 그는 프리랜서 감독으로 변신했다. 이후 독립프로덕션(衣笠映画聯盟)을 세운 그는 소설가인 가와바타 야스나리의 도움을 받아 ‘미친 듯이 써 내려간 글’(狂つた一頁, 1926년)을 연출했다. 그런 그에게 국제적인 명성을 얻게 해준 작품이 있었다. 1928년 만든 ‘십자로’(十字路)다. 기누가사 데이노스케는 이 영화를 제작하면서 2년 동안 독일에 머물렀는데, 영화는 유럽 극장가에서 공개돼 높은 평가를 받았다. 그런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명성은 2차 세계대전 이후 상(賞)으로 이어졌다. 1953년 연출한 ‘지옥문’이 이듬해 칸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거머쥔 것이다. 아시아 감독 최초였다. 일본은 칸 황금종려상 다섯 차례 수상 #. 일본은 기누가사 데이노스케의 작품 ‘지옥문’을 필두로 4차례 더 칸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았다. 하지만 두 번 째 수상까지는 기간이 길었다. 26년이 지난 1980년에야 구로자와 아키라 감독이 ‘카케무샤’로 영예를 안았다. 이어 이마무라 쇼헤이(今村昌平:1926~2006) 감독이 1983년(‘나라아먀 부시코’)과 1997년(‘우나기’) 2번이나 수상하는 영광을 누렸다. 이후 21년이 지난 2018년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이 ‘어느 가족’이라는 작품으로 재차 명성을 이었다. 베니스, 베를린과 달리 칸은 ‘비즈니스 시장’ #. 칸영화제는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이듬해인 1946년 1회가 개최됐다. 영화제로는 1932년부터 시작된 베니스 국제 영화제의 역사가 더 길다. 하지만 베니스영화제가 무솔리니의 파시즘 정권하에서 운영되면서 초기에는 좋은 인상을 주지는 못했다. 1951년 출발한 베를린영화제는 3대 영화제 중 역사가 가장 짧다 칸영화제가 베니스, 베를린영화제와 크게 다른 점은 ‘비즈니스 시장’이라는 데 있다. 영화제이면서 ‘영화 시장(박람회)’인 것. 세계 각국의 감독과 배우들은 물론, 바이어와 배급사들이 매년 5월 칸으로 몰려든다. 칸에서 수상을 하면 현지에서 곧바로 판매가 이뤄지는데, 좋은 상을 받을수록 그만큼 판매가가 더 높아진다. 이번 칸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받은 봉준호 감독의 ‘기생충’도 예외는 아니다. 평단의 최고 평점에 최고상까지 거머쥐면서 전세계 192개국에 선판매 됐다. 종전의 기록(박찬욱 감독의 ‘아가씨’ 176개국)을 넘어선 역대 한국영화 최다판매다. <사진= 봉준호 감독의 콘티> 영화 시작 26년 만에 칸을 사로잡았다 #. 1969년생인 봉준호 감독은 나이 쉰 살에 마침내 칸을 접수했다. 대학시절 단편영화 ‘백색인’을 만든 게 1993년의 일이다.(이듬해 한국영화아카데미 입학) 영화를 만든 지 26년 만에 칸에서 인생 최고의 기쁨을 맛본 것이다. 장편영화로는 데뷔작 ‘플란더스의개’(2000년)를 필두로 이번 ‘기생충’이 7번 째 작품이다. 여러 영화제에서 꾸준하게 수상을 했지만 봉준호 감독에게 칸의 문턱은 높았다. 그가 칸에 처음으로 발을 디딘 건 2006년. ‘괴물’이 칸영화제 감독주간에 처음으로 초청을 받았다. 3년 뒤인 2009년엔 ‘마더’로 칸영화제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 다시 초청을 받았다. 봉 감독은 ‘마더’ 이후 10년 만에 칸의 빗장을 완전히 열어제치고 칸을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다. 봉 감독은 직접 각본을 쓰고 콘티를 그리는 것으로 유명하다. 시놉시스의 모든 신을 머리에 먼저 그려놓고, 마치 만화영화 그리듯 콘티를 만든다. 영화 ‘마더’의 스토리보드와 시나리오 집 ‘마더이야기’(마음산책)의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탄성이 절로 나온다. 독자들도 봉 감독의 콘티 두 장면을 감상해 보기 바란다.(사진) 봉 감독은 영화 만드는 의미에 대해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의도와 결과, 통제와 반항, 우연과 필연, 계산과 즉흥. 그 모든 대립항들이 오묘히 뒤섞여버린 수많은 순간들. 그것이 영화 만들기의 은밀한 흥분과 즐거움이 아닐까.> 한국영화 탄생 100년을 맞는 해다. 봉준호 감독의 칸 수상을 진심으로 축하, 또 축하한다. 아울러 2주 전 세상을 떠난 일본 여배우 쿄 마치코를 추모한다. 쿄 마치쿄와 봉준호, 칸이 두고 두고 기억할 재인(才人)들이다. <이재우 기자, 재팬올 발행인>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39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록그룹 '퀸'과 1975년 4월 17일의 일본
1975년 4월 17일 하네다 공항 대소동 환영 인파에 놀라..."다른 행성 온 것 같다" 1975년 4월 17일 오후 무렵. 도쿄 하네다 공항에는 전례 없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려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비행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들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자, 호놀룰루를 경유한 JAL061 편이 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았다. 트랩을 내려오는 주인공은 데뷔 3년차인 영국 출신 그룹 퀸(Queen)의 멤버들이었다. 섬 나라 일본에 첫 발을 디딘 멤버들이나, 이들을 맞은 팬들이 서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더 프레디 머큐리 등 멤버들은 일순간 동양의 작은 소녀들에게 포위당했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맴버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Brian Harold May)는 당시 “다른 행성에 온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브라이언이 행성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그가 실제 천문학자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적외선 천문학자(Infrared astronomer)였다. 잠시, 브라이언 메이 얘기다. 프레디 머큐리는 ‘프레디 머큐리, 낯선 세상에 서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노래하다’라는 책에서 “제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에서라도 브라이언 같은 적외선 천문학자가 기타를 집어들고 로큰롤 가수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썼다. 천문학 잡지 ‘에스트로노미’(Astronomy)는 ‘브라이언 메이, 과학과 음악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러분은 그를 록그룹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로 알고 있지만, 브라이언은 천문학 박사이기도 하다”(You know him best as guitarist, singer, and songwriter from the rock group Queen, but Brian May is also a Ph.D. astronomer”고 전했다. 일본에 도착한 퀸이 공연을 펼친 곳은 선배 그룹 비틀즈가 섰던 부도칸(武道館)이었다. 공항에 이어 공연장 소동도 변함없었다. 통곡하며 실신하는 여성이 속출했고, 팬들은 밀치고 넘어지며 스테이지까지 몰려들었다. 그러자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을 잠시 중단하고 “모두 침착하자”고 호소했다. 비틀즈 이후 최대의 소동이었다. 퀸의 공연은 2주간 전국에서 열렸다. 퀸은 이후 다섯 차례 더 일본을 방문했고, 마지막 공연을 한 곳은 1985년 5월 15일 오사카성 홀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죽기 6년 전이다. 여섯 차례의 일본 공연은 그만큼 퀸이 일본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퀸은 이처럼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였다. J-팝이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팝음악 잡지 ‘MUSIC LIFE’는 당시 인기 투표를 실시했는데, 그룹 퀸은 ᐅ1975~1978년 1위 ᐅ1979년 2위 ᐅ1980~1982년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91년 11월 24일은 퀸의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날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전하고 24시간 후 사망(당시 45세)했기 때문이다. 그룹의 마지막 앨범인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은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지 4년 뒤 발표됐다. 일본의 열성팬들은 2015년, 퀸의 일본 도착 40년을 기념해 4월 17일을 ‘퀸의 날’(The Queen Day)로 정했다. 일본에서 이런 소동을 벌였던 퀸과 프레디 머큐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부활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극장가에서도 히트 행진 중이다. 신드롬, 팬텀이라고 할 만하다. 음악평론가 스지 스즈키(スージー鈴木)씨는 “헤이세이 최후의 겨울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기억될 것"(平成最後の冬は、映画『ボヘミアン・ラプソディ』とともに記憶されるだろう。)이라고 했다. (일본은 내년 헤이세이 연호가 바뀐다) ‘Love Of My Life’, ‘I Want To Break Free’, ‘Spread Your Wing’ 같은 퀸의 노래들과 함께 2018년의 마지막도 저물어간다. '에~오~ 에~오'.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日 "韓 정부, '위안부 성노예 아니다' 인정" 주장 논란
2015년 12월 28일 윤병세 당시 외교부 장관(오른쪽)과 기시다 후미오 당시 일본 외무상이 서울 종로구 도렴동 외교부에서 열린 공동기자회견에서 일본군 위안부 합의 결과를 발표한 뒤 악수하고 있다. (사진=연합뉴스)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때 한국 정부가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반하므로 성노예 표현을 쓰면 안된다는 점을 확인했다고 일본 정부가 외교청서에서 주장하고 나서 논란이 일고 있다. 일본 외무성은 2019년 외교청서에서 "'성노예'라는 표현은 사실에 반하므로 사용해서는 안된다. 이 점은 2015년 12월 일·한 합의 때 한국측도 확인했으며 동 합의에서도 일절 사용하지 않았다"고 밝혔다. 일본 정부는 지난 2018년 외교청서에서는 '성노예'는 사실(史實)이라고 인식하지 않는다는 일본 정부의 입장을 계속 설명하겠다는 취지로 성노예 표현에 대응한다는 입장을 담았다. 그런데 올해 외교청서에서는 마치 한국 정부마저도 일본군 위안부가 성노예가 아니라는 일본 정부의 주장을 수용한 것처럼 주장하고 나선 것이다. 그러나 지난 2015년 한일 위안부 합의 과정을 검증한 한국 측 태스크포스의 2017년 보고서를 보면 성노예 표현과 관련해 일본 측의 비공개 요청사항이 있었다고 설명돼 있다. 보고서에 따르면, 일본 측은 한국 정부가 앞으로 '성노예'라는 단어를 사용하지 않기를 희망한다는 뜻을 밝혔다. 일본의 이같은 요구에 대해 "한국 측은 성노예가 국제적으로 통용되는 용어인 점 등을 이유로 반대했지만, 정부가 사용하는 공식 명칭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문제'뿐이라고 확인했다"고 보고서는 설명했다. 보고서는 이에 따라 한국 정부의 이 같은 대응이 "'성노예' 표현을 사용하지 않기로 약속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 측이 이러한 문제에 관여할 수 있는 여지를 남겼다"고 평가했다. 하지만 지난 1996년 유엔 보고서(일명 쿠마라스와미 보고서)는 일본군 위안부를 성노예로 규정하고 일본 정부는 피해자에게 사죄·배상하라고 권고하는 등 공신력 있는 국제기구는 일본군 위안부 제도가 성노예제였다고 인정하고 있다. 일본 외교청서는 또 지금까지 일본 정부가 발견한 자료 중에는 군이나 관헌에 의한 이른바 강제 연행을 직접 나타내는 기술은 보이지 않는다는 억지 주장을 계속 펴왔다. 이와 함께 일본군 위안부가 '20만명'이라는 숫자는 구체적인 뒷받침이 없는 숫자이며, 충분한 자료가 없기 때문에 위안부 총수를 확정하는 것은 곤란하다고 주장했다.
일본의 선구자들⑥/ 인스턴트 컵라면 개발자
... 인스턴트 컵라면을 만든 안도 모모후쿠 일본 닛신식품의 창업자 안도 모모후쿠(安藤百福:1910~2007). 그는 일본 식민지 시대 대만에서 출생한 대만인이다. 중국식 이름은 오백복(呉百福). 1966년 일본 국적을 취득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런 안도 모모후쿠가 세계 최초로 인스턴트 라면을 개발한 건 1958년 8월 25일이다. 패전 이후 먹거리 부족으로 허덕이던 시절에 ‘치킨라면’이라는 이름으로 첫 상품이 일본에 출시됐다. 일본의 선구자 6편은 인스턴트 컵라면 개발자 안도 모모후쿠다. 한 단계 진일보한 컵라면이 개발된 건 그로부터 13년이 지난 1971년 9월 18일, 지금으로부터 48년 전 일이다. 컵라면의 이름은 ‘컵누들’이었다. 세상에 없던 컵라면은 처음부터 잘 팔렸을까. 그렇지 않다. 안도 모모후쿠는 컵라면 개발 40년 후인 2001년 9월, 니혼게이자이에 ‘나의 이력서’라는 글을 연재한 바 있다. 그는 당시를 다음과 같이 회고했다. <1971년 9월, 자신감을 갖고 컵누들을 내놓았지만, 슈퍼마켓이나 소매점에는 들어가지 않았다. 나는 젊은 영업 사원들을 중심으로 팀을 짜서 음식 관련 장소가 아닌 백화점, 놀이공원, 철도가판대, 관공서, 경찰, 소방서, 자위대, 마작 가게, 오락실, 여관까지 돌게 했다. “팔렸습니다”라는 첫 번째 낭보가 날아든 것은 사이타마현의 육상 자위대를 돌고 있던 사원으로부터다. 연습장 온수차에서 컵라면에 뜨거운 물을 부어 대원들에게 보급됐다.> <사진= 컵라면 개발 당시의 안도 모모후쿠(왼쪽). 컵라면은 인질극 사건이 계기가 돼 대박을 터트렸다. 기동대원들이 컵라면을 먹는 모습(오른쪽) 사진=닛신식품 인질극 사건이 가져다 준 뜻밖의 대박 모모후쿠씨는 “그런데 단번에 수요를 폭발시키는 계기가 되는 사건이 일어났다”며 “1972년 2월 연합적군에 의한 아사마산장 사건이었다”고 했다. 모모후쿠씨가 언급한 아사마산장 사건은 도대체 뭘까. 이는 1972년 2월 19일, 일본의 신좌익 조직 연합적군(連合赤軍) 멤버 5명이 나가노현의 산악 지역에 있는 아사마산장(浅間山荘)에 난입해 인질극을 벌인 사건을 말한다. 산장을 포위한 경시청 기동대와 나가노현의 경찰 기동대는 열흘 동안 범인들과 대치하며 구출작전을 시도했지만 녹록치 않았다. 급기야 기동대는 사건 열흘 째인 2월 28일 돌입 작전을 감행했다. 범인 5명 전원을 체포하긴 했지만, 진압 과정에서 민간인 1명을 포함한 3명의 사망자가 발생했다. 열흘 간의 대치전에서 기동대가 가장 애를 먹은 것은 날씨였다. 영하 15도의 강추위가 계속됐다. 그런 탓에 기동대원들에게 배급된 도시락은 얼어 버려 먹을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지급된 것이 물만 부으면 바로 먹을 수 있는 닛신식품의 컵라면이었다. 안도 모모후쿠씨는 당시 상황을 이렇게 설명했다. <눈 속에서 산장을 포위한 기동대원들이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컵라면을 먹고 있었는데, 그게 TV 화면에 반복적으로 클로즈업됐다. 당시 컵누들이 납입 된 것은 경시청 기동대 뿐이었다. 사건이 나면서 다른 경찰들과 보도진으로부터 즉시 보내 달라는 전화가 직접 본사에 걸려왔다. 그런 사실도 신문에 크게 보도되었다.> 진압 작전은 엄청난 시청률을 기록했다. 당일인 2월 28일 NHK는 연속적으로 10시간 20분에 걸쳐 현장을 생중계했다. 안도 모모후쿠씨는 “오후 6시부터 7시까지의 체포 장면 시청률은 66.5%에 달했다”(犯人逮捕を挟む午後6時から7時の視聴率は66.5%に達した)고 했다. 당시 NHK의 특별 프로그램 시청률(50.8%)은 2000년대에 들어서도 보도 특별 프로그램의 최고 기록으로 남아있다. 컵라면 출시 1년 만에 매출 34배 뛰어 경이적인 시청률은 닛신식품에겐 엄청난 호재가 됐다. 그 생중계 장면을 지며본 시청자들은 “저 사람들(기동대원들)이 뭘 먹고 있는거야?”(彼らは何を食べているの?)라며 눈을 크게 뜨고 바라보았다. 모모후쿠씨는 “TV 생중계 장면은 해당 상품의 지명도를 한꺼번에 높였다”고 했다. 그런 홍보 효과는 곧바로 매출로 이어졌다. 그는 다음과 같이 회상했다. <이후 컵누들은 불이 붙은 듯 팔려 나갔고 생산이 따라 가지 못했다. 컵라면 매출은 출시 때인 1971년에는 2억 엔이었지만 사건 후인 1972년에는 전년 대비 33.5배인 무려 67억 엔이나 되었다”>(カップヌードルは火がついたように売れ出し、生産が追いつかなくなった。カップヌードルの売上は発売開始時の1971年には2億円だったのに対して、事件後の1972年には前年比33.5倍の67億円になっている。)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503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