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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후 황금기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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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신도 가네토(新藤兼人)감독의 '벌거벗은 섬'의 장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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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영화와 한국영화의 가장 큰 차이점을 들자면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다. 첫째로는 일본영화는 ‘과거와 전통’을 매우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렇기 때문에 리메이크는 물론이거니와 과거의 암울한 시대를 극복한 스토리들을 자주 소재로 삼는다.

예를 들어 ‘올웨이즈-3번가의 석양’(Always 三丁目の夕日: Always-Sunset On Third Street, 2005), ‘플라워즈’(フラワーズ, Flowers, 2010, 기무라 타쿠야의 드라마 ‘남극대륙’(南極大陸, 2011) 같은 전후 극복기 혹은 메이지 유신 시기 등의 영화나 드라마들이 많은 인기를 구가하고 공감한다.

그러나 한국은 이와 반대다. 윤제균 감독의 ‘국제시장’(Ode to My Father, 2014)의 논쟁에서 보듯이 극렬한 반대에 부딪히곤 한다. 또한 일본이 오즈 야스지로 감독의 ‘동경 이야기’ (東京物語, 1953) 등 수많은 영화들을 리메이크 한 데 반하여 한국은 리메이크에 인색하다. 원작의 출처가 일본인 경우도 많아서 차라리 ‘속편’을 제작하는 것을 더 중요시 여긴다.

게다가 일본영화는 장르의 체계(전통)가 잘 잡혀 있지만 한국은 장르 개념과 전통이 약하다. ‘전통을 이어온다’ 라든지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시리즈물’이 드물다. 그리고 일본의 경우 영화사를 판단할 때 ‘업력’으로 평가하지만 애석하게도 한국의 경우는 ‘동아수출공사’ 정도가 남아 있을 뿐 ‘업력’으로 평가받을 만한 영화사가 드물다.

일본이 선·후배 간 멘토와 멘토링 관계로 100년 넘는 영화 역사적 전통을 계승하고 있다면 한국은 너도나도 흥행 감독이 되면 제작사를 차리고 흥행에 실패하면 역사 속에서 사라지게 마련이다. 정치적 상황에 맞춰 끼리끼리 코드에 맞는 영화인들끼리 같은 포맷의 비슷한 배우들을 돌려막기 하며 우후죽순처럼 비슷한 영화들을 양산해 내는 경향이 강하고 정치적 코드에 따라 선·후배 간의 관계도 유지되기 때문에 ‘업력’이 무시되기 때문이다.

이러한 차이들 때문에 ‘일본적 정서’로 세계시장을 두드렸던 일본과 이제서야 ‘한국적 정서’로 영화제를 파고드는 한국 간의 격차는 좁혀지지 않고 있는 게 현실이다.

일본영화는 일찌감치 스튜디오 시스템을 정착 시켰고 한국은 과거 ‘신필름’을 제외하고는 영세한 시스템을 면치 못했는데 이러한 경향은 곧 프로듀서의 부재로 연결되어 작품의 질적, 양적 저하를 면치 못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필름도 보관되지 못했고 흥행영화도 ‘납북’되어 김정일의 창고로 가 있거나 영화제 출품 뒤 분실되었다. 특히나 일본과 한국은 똑같이 ‘검열’을 겪었지만 일본은 이것 마저도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바꿔 나갔지만 한국은 ‘저항만이 살길’이라는 부정적인 방향으로 흘러갔다. 다만 일본영화가 황금기와 쇠퇴기를 반복하는 동안 한국의 영화인들은 그들의 황금기 작품이나 쇠퇴기의 극복과정을 무작정 따라한 경향이 컸다.

그러다 보니 이따금 일본의 고전 영화들이나 로망 포르노들을 접하다 보면 ‘어디서 본 듯한’도 아니고 ‘어, 이건 한국영화 아니었나...’하는 착각이 들 만큼 일종의 ‘복제품’ 영화들이 많다. 그 이유는 자명했다. 한국이 일본의 식민지배를 경험하는 동안 일본어에 익숙해져 있었고 일본문화와 일본영화를 지속적으로 접했고 이후에도 일본 애니메이션의 강한 영향력을 받고 있었고 심지어 ‘일본문화수입개방’조치가 1990년대 후반에야 이뤄져서 수많은 제작자들이 일본 원작을 무상으로 차용해도 한국 관객들은 모를 수밖에 없었다.

그런 의미에서 요사이 일본과 한국 그리고 중국간 영화나 드라마의 리메이크 교류는 매우 바람직하다고 여겨진다. 이로 인해서 원작영화와 비교해 보는 재미도 쏠쏠하고 ‘오리지널’이 어디에서 유래 되었는지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서론을 길게 잡아간 것은 일본의 황금기와 쇠퇴기 그리고 이 극복과정에서 영화사들의 눈물겨운 변신과 생존기가 어쩌면 지금 한국영화의 위기를 슬기롭게 극복할 단서를 제공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다. 특히나 일본 영화는 원칙적으로 주요 영화제에 소개되거나 거기서 상을 받지 않고서는 프랑스 혹은 미국이나 서구지역에 알려질 가능성이 현저히 낮았다.

그러나 전후 황금기를 거치면서 미군정의 강한 통제를 받았던 일본의 영화계는 전쟁 기간 동안 단절 되었던 할리우드 영화들을 다시 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미국을 비롯한 서구 지역에서 인정을 받아야 비로소 예술계나 영화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다는 분위기가 조성되었다.

미국과 서구지역에 최초로 일본영화의 바람을 일으킨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감독의 ‘라쇼몽’(羅生門, 1950)만 해도 먼저 1951년 베니스 영화제의 황금사자상을 받은 후 할리우드로 넘어가 1952년 미국 아카데미상 특별상을 수상 했는데 이 영화는 일종의 법정 심리극으로써 제작사인 다이에이(大映)의 사장 나가타 마사카즈(永田正和)조차도 ‘이 영화의 이유를 모르겠다’라고 비판했지만 영화제 출품으로 먼저 검증을 받은 경우였다.

이러한 수상은 1956년도 멜버른 올림픽 수영 평형 금메달 리스트인 ‘마사루 후루카’(古川 勝)의 1950년 세계신기록 수립 그리고 1951년 9월 8일 일본과 48개국과 체결한 평화조약인 ‘샌프란시스코조약’ 등과 맞물려 전후(戰後) 일본인들에게 큰 희망을 안겨주게 된다. 뿐만 아니라 일본영화계가 눈을 뜨게 되는데 칸, 베니스, 베를린, 로카르노 영화제 등에 소개된 일본영화는 세계 비평계의 주목을 받게 되고 좋은 평을 받게 되면 ‘아르떼’(Arte)T.V 같은 문화 채널의 구입이 성사되어 양적인 면에서나 질적인 면에서 승리를 거두는 일석이조의 효과가 있다는 점도 깨닫게 되었다.

점차 이 공식은 일본영화계에서 정설로 굳어져서 비록 외면받는 ‘좌파적’영화들이라 하더라도 동구권 영화제인 모스크바 영화제, 까를로비바리 영화제 등에 출품 되어 수상을 하면 일반적인 배급자들이 꺼려하는 영화들을 프랑스의 회사들의 중개를 통해 역으로 서구에 알려진다는 사실도 터득했다.

특히 당시 유럽의 영화환경들이 많이 바뀌어 독립영화들을 배급하는 회사들이 늘어나면서 일본영화들은 고전영화, 장르영화, 독립영화 등 가리지 않고 심지어 영화제를 거치지 않더라도 프랑스 영화관에서 상영될 수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특히 신도 가네토(新藤兼人)감독은 이 시절 ‘블루오션’전략을 썼다. 좌파적 성향이 강했고 독립제작사를 선호했던 그의 반골적 기질은 자칫 상업적인 성공이 있어야 자유스런 표현이 확실했던 일본영화계의 관행 속에서 영원히 독립영화 감독으로 남을 뻔했는데 남들이 출품하지 않는 영화제들을 공략한 경우다.

그것도 냉전시대에 서구권이 아닌 동구권 영화제들을 말이다. ‘좌파 계열’이라는 핸디캡을 ‘작가주의 영화’로 성공시킨 사례이기도 했고 또한 선택의 여지도 없었다. 일본 독립영화계의 대부로 불린 그는 ‘원폭의 아이’(原爆の子, 1952)를 통해 까를로비바리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벌거벗은 섬’(裸の島, Naked Island, 1960)을 통해 모스크바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면서 ‘사회파 리얼리즘의 기수’로 탈바꿈했다.

특히 영화 ‘벌거 벗은 섬’의 경우는 영화 내내 아이를 잃고 오열하는 어머니의 울음소리를 제외하고는 단 한 마디의 대사도 나오지 않는 작품으로, 독립제작사인 ‘근대영화협회’에서 제작했고 100% 로케이션으로 촬영되었으며 부부역을 맡은 두 주연배우(호리모토 마사노리, 후지와라 레이코)를 제외하고는 모든 출연진이 현지 주민들로 구성된 파격적 영화였다.

이 영화의 성공은 여러모로 시사하는 바가 컸는데 우선 스튜디오 시스템 하에서 정착되지 못한 감독이 ‘제3의 길’을 찾았다는 점과 이후 무려 60여개국에 수출되었다는 점에서도 긍정적이었다. 주로 고전영화와 장르영화로 주요 영화제를 정복해 나갔던 구로사와 아키라(黑澤明),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 나루세 미키오(なるせみきお), 이치카와 곤(市川崑), 기노시타 게이스케, 고바야시 마사키(小林正樹)등 만의 황금기가 아님을 상기시켜 주었다.

때문에 세계는 냉전 시대라는 특수성과 맞물려 서구권과 동구권 모두 일본영화에 자연스럽게 열광하게 되었고 훗날 주로 아시아 영화들을 표방 했지만 실상은 일본영화를 중심으로 한 새로운 영화제인 낭트 영화제(Nantes Festival Des 3 Continents)가 창설되기에 이른다. 이를 계기로 일본영화의 회고전과 기념전이 열리게 되었으며 프랑스에 개봉되지 않은 아시아와 아프리카, 중남미 등 3대륙의 영화를 소개하는 영화제로 정체성을 굳히면서 손쉽게 일본영화들을 접하고 이해하게 된 까닭에 비서구적인 영화 중에 일본영화가 가장 많이 알려지게 되었다.

체제 경쟁이 심했던 시기이기 때문에 서구 영화제에서 외면받은 작품이 동구권 영화제에서 수상하는 등 호재도 많았다. 물론 작품성에서 뛰어난 작품들과 작가주의 작품들이 많았고 ‘사회적 경향’에 눈을 뜨게 되면서 자연스럽게 영화제의 눈높이에 맞추다 보니 상위장르와 하위장르로 구분할 수 있는 수준으로까지 발전하기에 이른다.
물론 일본 영화가 초창기 가부키와 소설 등 탄탄한 원작을 기반으로 하고 있었던 것처럼 많은 영화인들이 우수한 ‘원작’을 찾는 일에 노력을 기울였다. 따라서 일본은 영화를 통해 세계의 문을 두드리면서 문학을 동시에 소개하게 되었고 이 결과로 1968년 가와바타 야스나리(川端康成), 1994년 오에 겐자부로(大江健三郎), 가즈오 이시구로(石黒一雄) 등 무려 3명의 노벨문학상 수상자를 배출하기에 이른다.

이 때문에 이 시기 일본영화는 단순한 ‘이국적 호기심의 대상’이 아닌 예술적 가치를 인정 받는 영화들을 탄생시켰고 일본영화의 주요 유형이었던 ‘지다이게키’(時代劇)와 ‘겐다이게키’(現代劇)외에도 그 사이에 배치 되며 주로 메이지시대와 관련한 영화들을 뜻하는 ‘메이지모노’(明治勿), 오락적 대중영화인 ‘고라쿠에이가’(娛樂映畫)까지 광범위하게 발전하게 되었다.

특히 시네마스코프로 대표되는 새로운 진보와 카메라 기술의 발전 그리고 어느 누구도 모방하지 못할 디테일 한 미장센들과 베테랑과 신인들의 조화는 때로 경쟁하면서 섬세한 미학과 연출력은 다작을 하면서도 ‘장인’이 될 수 있는 기초를 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미국 LA=이훈구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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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진= 1935년 최초의 토키영화 '춘향전'(이명우 감독). 이 ‘춘향전’을 시작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이 리메이크, 멜로드라마의 대명사가 되었다. 사진은 한국영화 100년 영화 포스터 전시회장.> ... 식민지 조선은 대만과는 사뭇 달랐다. 어차피 민중들의 의사와 상관없이 대한제국의 황실과 몇몇 친일인사들의 야합으로 이뤄진 병탄이었던 까닭에 식민지배는 늘 난항을 거듭할 수밖에 없었다. 조선의 민중 저항운동이었던 ‘동학농민전쟁’ 역시 명성황후 민비정권이 외세를 끌어들여 무자비한 진압을 했고 강제합병의 조건에서 빠지지 않는 게 ‘이왕직 보존’이었음을 감안 할 때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은 총독부의 고민이었고 가혹한 방법으로 진압하였다. 이러한 정치적 상황은 영화산업을 활발히 전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일본은 조선에 영화라는 ‘이미지’를 통해서 자연스럽게 일본어와 문화를 조선에 이식시키려했지만 반대로 조선의 영화인들은 혹독한 검열에도 불구하고 민족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한 수단으로 영화를 제작했던 것이다. 그러나 일본이 먼저 영화를 받아 들이고 기술적 진보를 가져온 까닭에 조선의 영화인들은 그 영향력에서 벗어 날 수 없었고 20세기가 지나가고 21세기에 접어들었을 때에도 여전히 일본식 현장문화와 잔재가 남아 있었다. 다만 흥미로운 것은 일제치하에서나 현재까지도 일본인들에게는 조선, 지금의 한국배우들에 대한 평가가 매우 후하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일본의 영화계에서 재일한국인 배우들에 대한 선호도가 높고 각 시대의 미남, 미녀를 기준 하는 일이 반복되고 있는 것을 보면 무승부의 싸움이라고 볼 수도 있겠다. 1910년대 경성(京城)에 극장가가 형성되고 1920년대 전국적인 영화 상영이 이루어지면서 영화는 조선민중들의 중요한 오락거리가 되었다, 1907년에 주승희가 발의하고 안창묵과 이장선이 합자하여 2층 목조 건물로 세워진 반도 최초의 극장인 ‘단성사’가 일본인의 손에 넘어갔다가 광무대 경영자 박승필이 인수하여 상설 영화관으로 개축하였다. 이후 조선극장 ·우미관(優美館)과 더불어 북촌의 조선인을 위한 공연장으로 일본인 전용 영화관인 희락관(喜樂館) 등과 맞서 단성사는 우리 민족과 애환을 함께 해 왔고 영화역사의 100년을 함께 해 왔다. 1919년 10월 최초로 조선인에 의해 제작된 연쇄활동사진극(連鎖活動寫眞劇) ‘의리적 구투(義理的仇鬪, 의리의 복수)’를 상영하였는데 1910년대 일본에서 크게 유행하던 연쇄극 형식을 따른 것으로 신파의 영향을 받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1924년 초 단성사 촬영부는 7권짜리 극영화 ‘장화홍련전’을 제작, 상영함으로써 최초로 조선인에 의한 극영화의 촬영·현상·편집에 성공했다. 이러한 성과에도 불구하고 신파의 영향력은 오늘날까지도 깊이 뿌리 내리고 있는데 심지어 조선 시대의 구전 예술인 판소리, 유행가에도 스며들어 ‘한국형 멜로드라마’로 이어진다. 조선총독부 역시 대만과 마찬가지로 계몽영화를 기획하여 당시 대중 연극계의 리더격인 윤백남(尹白南)에게 저축 장려 영화인 ‘월하의 맹세’(月下─盟誓, 1932)를 ‘조선총독부 체신국’에서 제작하는데 조선 최초의 극영화(劇映畫)로 경성호텔에서 신문기자와 관계자 100여 명을 초대하여 시사회를 가졌으며 약 1년간 경성과 경기도 일대에 선을 보이고는 1924년 2월부터 지방순회상영을 하였다. 이월화가 배우로 데뷔하였고, 각본·감독·연기를 모두 조선인이 맡았으나 촬영과 현상은 일본인이 맡았다. 1924년 일본인이 조선키네마 주식회사를 설립하여 총포 화약상인 다카사 간조를 사장으로 내세우고 일본에서 기술자들을 데려와 ‘해의 비곡’(1924)을 내놓자 이에 대항하여 조선인들이 설립한 독립제작사가 줄을 이었다. 이 시기는 교토에서 독립 제작사가 줄줄이 탄생한 것과 같은 시기인데 일본이 조선에 영화사를 세운 것은 일본영화산업이 번창하는 만큼 조선도 번창할 것이라는 계산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면에는 1923년 하야카와 마쓰지로(早川孤舟)감독의 ‘춘향전’의 성공이 자극제가 되기도 했다. ‘춘향전’은 당시 인기변사였던 김조성과 개성 기생 한명옥이 이몽룡과 춘향 역으로 출연했다.식민지 조선에서 처음으로 제작된 완전체 영화(이전에는 ‘연쇄극’이라 하여 연극 공연중에 짧은 필름을 상영하는 형태를 띠고 있었다)로 실제 조선인 배우를 캐스팅하고 남원에서 올로케이션 촬영을 했으며 제작, 감독 및 각본, 촬영 등 주요 역할은 일본인 스태프들이 담당해 흥행했다. <사진= 한국 영화 100주년 영화 포스터 전시회장.> ... 이러한 흥행 성공이 결국 ‘조선 키네마 주식회사’ 설립의 근거가 된다. 그러나 민족고유의 이야기인 ‘춘향전’을 일본인이 제작했다는 사실에 많은 조선의 영화인들에게는 자극제가 된 것으로 본다. 하지만 ‘춘향전’은 일본의 ‘주신구라’와 비슷하게 국민영화가 되어 1935년 최초의 토키영화로 이명우(李明雨) 감독의 ‘춘향전’을 시작으로 남북한을 통틀어 가장 많이 리메이크되어 멜로드라마의 대명사가 되었다. 여기서 언급할 인물은 윤백남이다. 그는 경성으로 올라와 황금정(지금의 을지로 5가)에 제작사‘윤백남 프로덕션’을 차리고 첫 작품으로 ‘심청전’을 제작했다. 조선인의 자본에 의해 만들어진 최초의 영화 제작사였으며, 조선영화에 대한 결집된 열망으로 만들어졌고 윤백남, 이경손, 주삼손, 나운규, 김태진, 주인규, 김우연 등 멤버들이 참여 했다. 이에 윤백남은 이경손(李慶孫) 감독, 니시카와 히데오(西用秀洋)를 촬영감독으로 하여 일본에서 사온 중고 카메라(당시 350원)로 촬영하여 1925년 봄 조선극장에서 개봉했다. 당시 심청 역을 맡은 이는 조선 키네마의 최덕선이었고, 심봉사 역에는 나운규였다. 신인으로서는 파격적인 기용이었지만 심봉사의 외모에 가장 잘 어울렸다는 것이 이유였는데 그는 아예 장님을 방문하기도 하고 열정적으로 대본을 외우면서 성격파 연기 배우로 발돋움했다. 관객들은 나운규의 연기를 두고 천재라는 찬사를 보냈지만 불행히도 일본 측 투자자의 약속이 어그러져 제작비 부족으로 인한 어려움을 여실히 드러냈다. 이경손의 연출력도 도마에 올랐지만 심청 역의 최덕선의 연기도 수준미달이었으며 특히 허술해 보이는 용궁 세트나 인당수를 재현한 마포나루에서 인형을 떨어뜨린 점 등이 지적되며 흥행에 실패 하고 만다. 이후 이경손은 이광수 원작의 ‘개척자’를 통해 다시 영화계에 복귀한 후 계림영화협회와 손잡고 일본의 오자키 고요(尾崎紅葉)가 쓴 ‘금색야차(곤지키야사, 金色夜叉)’를 번안한 ‘장한몽(長恨夢)’으로 화제를 불러일으켰다. 지금도 ‘이수일과 심순애’ 혹은 ‘김중배의 다이아몬드 반지’로 회자되는 작품으로 매일신보 출신 기자 조일재는 원작을 조선의 실정에 맞게 번안했다. 그 결과 이수일과 심순애가 탄생하게 된 것인데 두 사람의 애틋한 만남과 헤어짐은 관객들의 사랑과 찬사를 받으며 극장을 눈물바다로 만들었다. 그러나 영화의 이면에는 뒷담화가 무성했다. 심순애역을 맡은 여배우 김정숙은 뛰어난 미모를 지녔지만 선천적으로 말더듬이었다고 한다. 배우로서는 부적합했지만 타고난 미모를 이용, 윤백남 프로덕션의 ‘심청전’에 출연한 것이 계기가 되어 ‘장한몽’의 여주인공으로 발탁되었다. 무성영화시대였기 때문에 가능한 일이었다. 이수일 역을 맡은 이는 일본인 주삼손이었는데 미남형 배우였기에 전격 캐스팅되어 촬영에 돌입했다. 그러나 자신을 캐스팅 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은 나운규 감독이 돌연 주삼손을 빼돌리고 촬영 방해를 하는 바람에 대체된 배우가 등장하는데 바로 심훈(沈薰)이다. 훗날 소설 ‘상록수’로 유명해진 인물이지만, 당시에는 조선일보 기자였는데 신극 연구단체 극우회(劇友會)의 회원이었기에 전격 출연을 했다. 그러나 관객들은 이인일역(二人一役)의 영화를 매우 어리둥절해 했다고 한다. 이후 이경손은 이내 상하이를 거쳐 방콕으로 망명의길을 택한다. 한편 1926년 나운규(羅雲奎)의 민족영화 ‘아리랑’은 조선영화의 황금시대를 열었다는 평가를 받는데 영화사 연구에 의하면 나운규가 감독을 맡았다는 설과 일본인 쓰무라 슈이치(津守秀一) 감독을 맡았다는 두 가지 학설이 전해오기는 하지만 항일운동을 한 경력이 있는 나운규가 감독, 각본, 주연을 맡았다는 것만으로도 이슈가 되었고 특히 변사의 애드립으로 조선총독부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주인공 미치광이 청년이 여동생을 괴롭히는 관리의 앞잡이를 살해하고 감옥에 간다는 스토리를 담고 있는데 변사가 항일운동을 하다가 고문을 당한 후유증이라고 설명하자 관객들이 크게 흥분하였고 이에 입회하고 있던 경관이 상영중지를 선언했다. 상영이 끝날 때쯤 가수가 일어나서 창작민요인 주제가 ‘아리랑’을 선창하면 관객들은 함께 불렀다. 1928년 나운규는 ‘벙어리 삼룡’을 감독했다. 이 영화는 나도향의 원작소설을 각색한 문예영화였는데 이 영화를 통해 주연 여배우였던 류신방과 연인 사이로 발전하기도 했다. 나운규는 17편의 작품을 남기고 35세의 나이에 요절한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476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이훈구의, 일본영화 경제학/ 전후 황금기5
... <사진= 오카다 마리코(岡田 茉莉子)> ... 전후황금기를 논할 때 감독들이나 제작사 못지 않게 주목할 것이 이 시기를 빛낸 배우들이다. 세계 유수의 영화제에 작품을 출품하는 작품들마다 배우들의 연기력이 뒷받침되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세계의 영화제에서 그랑프리를 수상하는 영화들을 보면 작품성과 감독의 연출력 그리고 배우들의 연기, 이렇게 삼박자가 맞아야 하는 경우를 본다. 요사이 한국영화가 침체되는 주요 원인 역시 ‘배우 돌려막기’라는 견해가 많은데 현장 영화인들의 의견으로는 ‘흥행 되는 배우’를 캐스팅 할 수밖에 없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백화점 쇼윈도에 전시된 옷을 자기가 구입한다고 광고에 등장하는 모델과 같은 효과를 낼 수 없는 것처럼 이 과정에서 몸에 맞지 않는 배역을 맡아 기계적으로 연기 하는 경우도 빈번하다. 닛카쓰가 신인 발굴에 앞장선 것처럼 작금의 한국 영화계 역시 과감한 캐스팅 그리고 돌려막기의 유혹을 견뎌내야 할 것이다. 물론 감독들의 ‘뮤즈’ 혹은 ‘페르소나’가 있다. 그러나 그건 다작이 가능한 거장들의 얘기다. 일본의 황금기는 정말 많은 영화들을 만들었지만 배우들을 돌려막기 하지는 않았다는 사실에서 더욱 가치가 빛났다. 그 시기에 일본 역시 꼼수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일본에서의 상업적 성공을 전제로 해외 영화제에 출품하는 경향도 많았다. 그러다 보니 흥행에 성공한 영화의 경우 같은 배우를 캐스팅하여 모방 작품을 다시 만드는 경우도 많았다. 갑작스럽게 일본 영화가 ‘수입자’의 입장에서 ‘수출자’의 입장이 되어 보니 더욱 그러한 유혹에 노출되기 십상이었다. 어쩌면 메이지 유신 이후 서구의 수준으로 일본이 올라가고자 하는 바람은 모든 일본인들의 염원이기도 했다. 덕분에 세계인들에게 사랑받는 배우가 탄생하는 일도 있었다. 하라 세츠코가 일본 본토에서 가장 사랑받는 여배우였다면 세계적으로 인지도가 높은 여배우는 단연 ‘교 마치코(京 マチコ)’다. 그녀는 올해 5월 12일 도쿄의 한 병원에서 심장병으로 세상을 떠나기까지 ‘그랑프리의 여왕’으로 불렸다. 다이에이(大映)의 간판스타였던 그녀는 미조구치 겐지(溝口健二)감독의 ‘단십랑 삼대(團十郞三代, 1944)’로 데뷔한 이후 육체파 여배우로 명성이 높았다. 다이에이의 간판답게 동 스튜디오의 작품들인 베니스국제영화제 황금사자상 수상작 ‘라쇼몽’(羅生門, 감독 구로사와 아키라, 1950), 칸국제영화제 황금종려상의 ‘지옥문’(地獄門, 감독 기누가사 데이노스케, 1953), 베니스국제영화제 은사자상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 감독 미조구치 겐지, 1953)에 출연하며 국제적으로 명성을 얻었다. 배우로서도 모범적이어서 82세까지 총 97편의 영화에 출연했는데 전후 황금기를 빛낸 가장 위대한 배우였음에 틀림없다. 출연작마다 해외 영화제에서 수상한 경력도 대단하지만 그녀의 연기에 대한 열정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으며 한 작품에서 여러 가지 캐릭터를 소화해 낼 수 있는 몇 안 되는 배우였다. 라쇼몽(羅生門, 1950)은 살인사건이 주제였기 때문에 인간은 각자 자기에게 유리한 쪽으로만 주관적으로 사고하고 합리화시킨다는 내용을 담고 있기 때문에 살해당한 사무라이와 그의 부인, 체포당한 사무라이 세명이 관아에 들어가서 당시의 일을 회상하는 플래시백 구성으로 인해 쿄 마치코에게는 4개의 캐릭터를 소화해 내야 하는 어려운 영화였지만 결국 해냈다. <사진= 오카다 마리코(岡田 茉莉子)> 영화계에 처음 입문할 때 ‘짙은 눈썹이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을 받고 얼굴이 클로즈업 되는 영화의 특성에도 불구하고 눈썹을 밀어 버리고 ‘라쇼몽’에 출연한 일화는 유명하며 국제영화제마다 기모노를 즐겨 입고 등장했다. 숙녀와 악녀를 동시에 소화할 수 있는 명품 배우였다. 그 시절 일본 전후 황금기를 빛낸 여배우 몇몇을 소개한다. 이름만 들어도 알만한 거장 감독들의 영화에 등장하는 여배우들은 지금 봐도 ‘아우라’(Aura)가 있다. 오즈 야스지로(小津安二郞)의 뮤즈였던 하라 세츠코(原 節子)는 이미 언급하였고 다른 여배우들을 언급하고자 한다. 오카다 마리코(岡田 茉莉子)는 뚜렷한 이목구비에 발랄하고 쾌활한 캐릭터를 잘 소화해 내는 배우다. 나루세 미키오(成瀬 巳喜男, なるせみきお)의 ‘부운(浮雲)’에서는 남자주인공 토미오카(모리 마사유키, 森雅之)와 사랑에 빠져서 유키코(다카미네 히데코, 高峰秀子)를 가슴 아프게 만든다. 오즈 야스지로의 ‘가을 햇살(秋日和, Late Autumn, 1960)’에서는 하라 세츠코와 함께 출연했는데 딸이 결혼을 하도록 결정적인 역할을 맡는 친구인 스시집 딸 역으로 발랄한 캐릭터를 무리 없이 소화했는데 미소가 일품이란 평가를 받는다. 역시 오즈의 ‘꽁치의 맛(秋刀魚の味, 1962)’에서는 바가지를 잘 긁어주는 부인 역으로 사다 케이지와 부부 역할을 맡기도 했다. 키네마준보 베스트10 여우주연상을 받은 그녀는 시노다 마사히로(篠田正浩), 오시마 나기사(大島渚)와 함께 일본 쇼지쿠 누벨바그의 기수로 명성이 높은 ‘요시다 기주(吉田喜重)’의 뮤즈로 명성을 쌓았다. ‘아키츠 온천(秋津温泉, 1962)’은 전후 일본 사회의 병폐와 인간 소외를 미학으로 승화시킨 작품으로 오카다 마리코가 직접 기획을 한데다가 당시 신인감독이었던 요시다 기주를 직접 지명하여 화제가 되었다. 덕분에 요시다 기주의 초기 대표작으로 불리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느 온천여관을 배경으로 펼쳐지는 남녀의 사랑을 그리면서 물이 지닌 관능성을 빼어나게 보여주고 있다. 오카다 마리코에게는 이 작품이 100회 출연 기념작일 만큼 당시 인기 여배우였음에도 신인감독인 요시다 기주를 지명하여 세상을 놀라게 하더니 2년 후에 결혼까지 한다. 이후 그의 작품에 빠짐없이 등장하는 것은 물론이다. <사진= ‘아키츠 온천(秋津温泉, 1962)’> ‘여걸(女傑)’이라는 별칭을 얻은 타카미네 히데코(高峰秀子) 역시 이 시절 가장 빈번하게 등장하는 여배우다. 한국에서는 나루세 미키오(成瀬 巳喜男, なるせみきお)의 ‘부운(浮雲)’을 통해 잘 알려졌지만 사실 그녀의 대표작들은 기노시타 게이스케(木下惠介)의 영화들속에서 발견된다. ‘스물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와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カルメン故鄕に歸る, 1951)’이다. ‘스물 네 개의 눈동자’는 사실 한국에서 가장 많이 표절된 스토리다. 1928년, 가난한 섬의 쇼도지마 분교에 젊은 여선생이 부임한다. 서양복을 입고 자전거로 통근을 하는 오이시 선생의 모습은 마을 사람들을 놀라게 하지만 점점 섬의 생활에 융화되며 12명에 불과한 학생들은 선생님께 애정을 표하게 된다. 그러나 전쟁이 나고 오이시 선생의 남편과 여러 제자들마저 전사를 하게 되고 딸마저 나무에서 떨어져 죽게 되는데 훗날 다시 분교로 부임하게 되고 제자들의 아이들이 기다린다. ‘카르멘 고향에 돌아오다’는 약간 덜 떨어진 스트리퍼가 동료를 데리고 고향에 데려와 소동을 일으키는 코미디인데 일본 최초 칼러영화인데다가 흥행에도 성공하여 속편 ‘카르멘 사랑에 빠지다(カルメン純情す, 1952)’가 제작된다. 전후 사회의 정치와 위선(재무장, 민족주의, 서구화)에 대해 가차 없이 풍자한 코미디로 영화사(映畫社)에 길이 남을 명연기를 펼쳐 보였다. 놀라운 감정이입과 재치 그리고 슬랩스틱 코미디에서나 볼 수 있는 과장된 연기로 영화에서 주고자 하는 감독의 의도(위선에 대한 비판)를 제대로 살려냈다는 평가를 받는다. 그녀는 나루세 미키오의 뮤즈로도 유명했는데 ‘부운’ 뿐만 아니라 ‘여자가 계단을 오를 때(女が階段を上る時, 1960)’를 통해 절정의 연기력을 과시했다. 교통사고로 남편을 잃은 게이코는 긴자의 고급 바에서 얼굴마담으로 밝은 미래를 꿈꾸지만 뜻대로 되지 않아 절망에 빠지지만 손님을 맞아야 하는 여인의 숙명을 그렸다. <사진= ‘버스 차장 히데코(秀子の車掌さん, 1941)’> 직접 의상을 담당해 화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훗날 ‘선택의 여지 없이 홀로 험난한 삶을 살아가는 한 여인의 인생을 들여다 본 잔혹하리만치 아름다운 걸작(2011년 시네마테크부산 - 나루세 미키오 특별전)’이라는 평가를 받는다. 나루세 미키오의 걸작 중 걸작인 ‘버스 차장 히데코(秀子の車掌さん, 1941)’는 그래서 화제였다. 나루세 미키오의 뮤즈 신화의 출발답게 주인공 이름이 ‘히데코’로 다. 군국주의 시대인 1941년도 작품이라고는 믿겨 지지 않는 시골 차장의 얘기를 경쾌하게 풀어가는 이 영화 이후로 15편의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출연한다. 마지막으로 감독이자 배우였던 다나카 키누요(田中絹代)를 언급하지 않을 수 없다. ‘무사시노 부인(武藏野夫人, 1951), ‘오하루의 일생(西鶴一代女, 1952)’과 ‘우게츠 이야기(雨月物語, 1953)’, ‘산쇼다유(山椒大夫, 1954)’ 등 주로 미조구치 겐지의 걸작 영화들에 출연하여 일본적인 아름다움의 극치를 표현했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기노시타 게이스케 감독의 ‘나라야마 부시코(楢山節考, 1958)’를 통해 키네마준보의 여우주연상을 수상하기도 했지만 무엇보다도 쿠마이 케이(熊井 啓)감독의 ‘산다칸 8번 창관(サンダカン八番娼館 望鄕, 1974)’으로 1975년 제25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은곰상 여자연기자상을 수상했다. 이 영화는 의외로 한국에 알려지지 않았다. <사진= ‘스물네 개의 눈동자(二十四の瞳, 1954)’> ‘일본 오욕의 역사를 관통하는 한 여인의 기구한 삶’을 이야기 하는데 2차 세계대전 당시 강제 여성 위안부 문제를 주제로 삼아 화제가 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창관(娼館)’은 위안소다. 풀어 쓰자면 ‘위안소 8번 방’이라는 뜻이 된다. 소녀 오사키가 12살이 되던 해에 삼촌의 꼬드김으로 보르네오령의 산다칸에 가게 되는데 그 이유는 점점 불구가 되어가는 오빠의 다리를 수술하기 위해 비용을 벌 목적이다. 그러나 그곳은 해군 위안소였고 그곳에서 만신창이가 되어 돌아온 기구한 여인 오사키를 동네는 물론 가족마저도 외면하는 스토리는 낯설지 않다. 뿐만 아니라 이를 취재한 인류학자 게이코가 마침내 산다칸에 찾아갔을 때 ‘창관’에서 죽어간위안부들의 묘들이 모두 다 고향 일본을 등지고 있어 충격을 받는다. 다나카 기누요는 1964년 제 14회 베를린국제영화제에서 이마무라 쇼헤이(今村 昌平)감독의 ‘일본곤충기(일본 곤충기, にっぽん昆蟲記, 1963)’로 여우주연상을 받은 ‘히다리 사치코(左 幸子)’이후 두 번째 수상으로 말년에 받은 것이어서 더욱 화제였다. 특히 그녀는 일본 최초의 여류감독인 타즈코 사카네(坂根田鶴子)에 이어 두 번째로 감독으로 입봉하게 되는데 청혼을 거절당한 나루세 미키오의 집요한 방해 끝에 이뤄낸 쾌거였다. 그녀는 특히 첫 연출작인 후미오 니와(丹羽 文雄)의 원작소설 ‘연문(戀文, Love Letter, 1953, 기노시타 게이스케 각본)’으로 1954년 칸 영화제에 초청 받는 한편 1953-1962년 사이에 5편의 작품을 더 연출한다. <미국 LA=이훈구 작가>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607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일본 기차여행을 위한 유용한 툴과 참고도서
일본 기차여행에 좀 더 구체적이고 실질적으로 다가갈 수 있도록, 일본 기차여행에 도움이 되는 몇 가지 툴과 정보가 될 만한 책에 대해서 소개해 드리고자 합니다. 1. 시각표(時刻表) 일본에서 기차여행을 하다보면 ‘시각표(時刻表)’라는 책을 들고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습니다. 이 ‘시각표’에는 일본의 모든 기차들의 시간표가 작은 글씨로 빼곡히 씌어 있는데, 성경책보다도 많이 팔린 일본 최고의 베스트셀러라고 합니다. 시각표를 들고 기차여행을 하는 사람은 ‘고수’ (혹은 오타쿠)라고 볼 수 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미리 기차여행의 코스와 시간을 다 조사해서 가기 때문에 시각표를 가져가지는 않습니다. 그런데 제가 좋아하는 어떤 분은 수년전에 “인터넷이 편한 건 알지만, 시각표를 넘겨가며 줄을 긋고 행선지를 상상하는 기분을 결코 대체할 순 없다. 초속 5센티미터의 주인공처럼.”이라고 말하더군요. 저도 언젠가는 아무런 사전 계획 없이 시각표만 들고 정처 없이 여행을 떠나보려고 합니다. 2. HyperDia HyperDia는 인터넷 환경에서 PC나 모바일로 검색하는 일본 열차 시각표입니다. 출발역, 도착역, 날짜와 시간을 기입한 후에 검색하면 추천하는 경로들을 시간 순으로 나타내줍니다. 각 경로의 출발과 도착 시간, 환승역, 열차 종류, 소요 시간, 요금 등을 알 수 있습니다. 일본어와 영어 버전이 있고, PC는 무료인데 모바일은 유료입니다. 모바일 HyperDia 1년 사용료는 21,000원입니다. 3. 전국철도여행(全国鉄道旅行) 일본 전국의 JR과 사철이 다 나와 있는 철도 노선도입니다.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의 전국 철도 노선도가 1장의 자바라식으로 되어 있습니다. 내가 여행 갈 곳에 어떤 철도와 역이 있는지를 한 눈에 볼 수 있어서 좋습니다. 4. 에키벤 ~철도 도시락 여행기~ (하야세 준. AK. 원제 駅弁ひとり旅) 일본에서 큰 인기를 얻어서 영화로도 만들어진 만화인데, 한국어 번역판이 나와 있습니다. 제가 일본 기차여행에 대해서 가장 많은 정보를 얻고 있는 책입니다. 일본 열도는 물론 오키나와, 대만, 사할린까지 철도, 역, 에키벤에 대한 정보가 구체적이고도 풍부하게 나와 있습니다. 각권의 지역은 다음과 같습니다. 1권 : 규슈(九州) 2권 : 시코쿠(四国)/추고쿠(中国) 3권 : 간사이(関西) 4권 : 홋카이도(北海道)1 (남부 및 중앙부) 5권 : 홋카이도(北海道)2 (동부) 6권 : 홋카이도(北海道)3 (북부) 7권 : 도호쿠(東北)1 (아오모리, 아키타) 8권 : 도호쿠(東北)2 (이와테, 미야기) 9권 : 도호쿠(東北)3 (야마가타, 후쿠시마) 10권 : 기타칸토(北関東) 11권 : 추부(中部)1 (나가노) 12권 : 추부(中部)2 (기후) 13권 : 도카이(東海)1 (나고야) 14권 : 도카이(東海)2 (시즈오카, 야마나시) 15권 : 간토(関東) 별권 : 대만+오키나와편 5. 저스트고 낭만의 일본 기차 여행 (박정배. 시공사) 출판된 지 10년이 넘었지만 그 방대한 정보로 인해서 지금까지도 많은 도움이 되고 있는 책입니다. 비록 지금은 절판되었지만 중고로 구할 수 있습니다. 6. 기차홀릭 테츠코의 일본철도여행 (문정실. 즐거운상상) 이 책도 출판된 지 10년 가까이 되었지만 많은 아기자기한 정보를 제공해줍니다. 책 제목의 테츠코(鉄子)는 여성 철도 매니아를 일컫는 말입니다. 남성 철도 매니아는 텟짱(鉄ちゃん)이라고 부릅니다. 7. 일본 철도 명물 여행(이토 미키. 에디션더블유) 여성 감성의 기차여행 코스에 대한 정보를 예쁜 그림과 함께 제공하고 있습니다. 8. 홋카이도 보통열차 (오지은. 북노마드) 기차를 좋아하는 가수 오지은 씨가 보통열차를 타고 홋카이도의 구석구석을 2,400km의 거리를 달린 여행기입니다. 그녀는 29살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달라지고 싶다는 생각으로 여행하였고, 여행하면서 느낀 청춘과 기차에 대한 생각을 일기처럼 썼습니다. 9. 드로잉 일본 철도 여행 (김혜원. 씨네21북스) 일러스트레이터인 저자가 한 달간 일본 전국 기차여행을 하면서 스케치한 그림을 중심으로 한 여행기입니다. 10. 일본기차여행 (인페인터글로벌. 꿈의지도) 홋카이도에서 규슈까지 기차여행하기 좋은 일본의 38개 도시와 기차역과 역 주변 관광지에 대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 일본의 지역 구분
록그룹 '퀸'과 1975년 4월 17일의 일본
1975년 4월 17일 하네다 공항 대소동 환영 인파에 놀라..."다른 행성 온 것 같다" 1975년 4월 17일 오후 무렵. 도쿄 하네다 공항에는 전례 없던 진풍경이 벌어졌다. 무려 3000명에 가까운 사람들이 한 비행기의 도착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 이들은 도대체 누구를 기다렸던 걸까. 이윽고 오후 6시가 되자, 호놀룰루를 경유한 JAL061 편이 공항 활주로에 내려 앉았다. 트랩을 내려오는 주인공은 데뷔 3년차인 영국 출신 그룹 퀸(Queen)의 멤버들이었다. 섬 나라 일본에 첫 발을 디딘 멤버들이나, 이들을 맞은 팬들이 서로 놀라기는 마찬가지였다. 리더 프레디 머큐리 등 멤버들은 일순간 동양의 작은 소녀들에게 포위당했고, 공항은 아수라장이 되었다. 맴버인 기타리스트 브라이언 메이(Brian Harold May)는 당시 “다른 행성에 온 줄 알았다”며 놀라워했다. 브라이언이 행성이라는 말을 언급한 것은 그가 실제 천문학자였기 때문이다. 정확히 말하면 적외선 천문학자(Infrared astronomer)였다. 잠시, 브라이언 메이 얘기다. 프레디 머큐리는 ‘프레디 머큐리, 낯선 세상에 서서 보헤미안 랩소디를 노래하다’라는 책에서 “제아무리 황당무계한 꿈에서라도 브라이언 같은 적외선 천문학자가 기타를 집어들고 로큰롤 가수가 되리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고 썼다. 천문학 잡지 ‘에스트로노미’(Astronomy)는 ‘브라이언 메이, 과학과 음악의 인생’이라는 제목의 기사에서 “여러분은 그를 록그룹 퀸의 기타리스트이자 싱어송 라이터로 알고 있지만, 브라이언은 천문학 박사이기도 하다”(You know him best as guitarist, singer, and songwriter from the rock group Queen, but Brian May is also a Ph.D. astronomer”고 전했다. 일본에 도착한 퀸이 공연을 펼친 곳은 선배 그룹 비틀즈가 섰던 부도칸(武道館)이었다. 공항에 이어 공연장 소동도 변함없었다. 통곡하며 실신하는 여성이 속출했고, 팬들은 밀치고 넘어지며 스테이지까지 몰려들었다. 그러자 프레디 머큐리는 라이브 공연을 잠시 중단하고 “모두 침착하자”고 호소했다. 비틀즈 이후 최대의 소동이었다. 퀸의 공연은 2주간 전국에서 열렸다. 퀸은 이후 다섯 차례 더 일본을 방문했고, 마지막 공연을 한 곳은 1985년 5월 15일 오사카성 홀이었다. 프레디 머큐리가 죽기 6년 전이다. 여섯 차례의 일본 공연은 그만큼 퀸이 일본에 대한 애정이 있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퀸은 이처럼 1970년대 중반~1980년대 초반, 일본에서 가장 인기있는 밴드였다. J-팝이 여기에서 출발했다고 분석하는 평론가들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팝음악 잡지 ‘MUSIC LIFE’는 당시 인기 투표를 실시했는데, 그룹 퀸은 ᐅ1975~1978년 1위 ᐅ1979년 2위 ᐅ1980~1982년 1위를 차지할 정도였다. 1991년 11월 24일은 퀸의 팬들에게는 충격적인 날이다. 프레디 머큐리가 에이즈 감염 사실을 전하고 24시간 후 사망(당시 45세)했기 때문이다. 그룹의 마지막 앨범인 ‘메이드 인 헤븐’(Made in Heaven)은 프레디 머큐리가 죽은 지 4년 뒤 발표됐다. 일본의 열성팬들은 2015년, 퀸의 일본 도착 40년을 기념해 4월 17일을 ‘퀸의 날’(The Queen Day)로 정했다. 일본에서 이런 소동을 벌였던 퀸과 프레디 머큐리는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로 부활했다. 한국 뿐만 아니라 일본 극장가에서도 히트 행진 중이다. 신드롬, 팬텀이라고 할 만하다. 음악평론가 스지 스즈키(スージー鈴木)씨는 “헤이세이 최후의 겨울은 영화 ‘보헤미안 랩소디’와 함께 기억될 것"(平成最後の冬は、映画『ボヘミアン・ラプソディ』とともに記憶されるだろう。)이라고 했다. (일본은 내년 헤이세이 연호가 바뀐다) ‘Love Of My Life’, ‘I Want To Break Free’, ‘Spread Your Wing’ 같은 퀸의 노래들과 함께 2018년의 마지막도 저물어간다. '에~오~ 에~오'. <비영리매체 팩트올 전 편집장>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나를 찾아줘, 세상 가장 솔직한 리뷰 (영화 후기/작품해설/쿠키영상/관객수예상) [5분영화겉핥기]
안녕하세요! 재리예요!! 중간고사 끝난지가 언제라고 벌써 기말고사 시즌이네요. 당장 다음주부터 시험이 시작되는 바람에 보고 싶은 영화도 마음껏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볼 영화는 산더미처럼 쌓여가는데 할 일은 줄지 않고 괴롭기만 한 상황입니다. 오늘의 영화는 이영애의 복귀작 '나를 찾아줘'입니다. 참새가 방앗간을 어떻게 그냥 지나치겠습니까. 일정을 마무리하고 뒷일은 미뤄둔채 심야로 또 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다양한 작품이 있었지만 시간에 맞추다 보니 먼저 보게된 스릴러였습니다. 잃어버린 공백 몇년만에 그녀가 돌아온지 감이 오질 않았습니다. 사실 이전 작품들을 많이 보지도 않았습니다. 오히려 이번 작품을 계기로 배우 이영애의 작품들을 찾아보고 싶습니다. 작품의 전반적인 분위기, 배우가 스토리를 뿜어내는 힘은 확실히 좋았습니다. 그렇다고 완전 저의 개인적인 취향에 맞는 연기는 아닙니다만 확실히 이영애라는 타이틀이 빛나는 작품이었습니다. 하지만 이영애를 포함한 몇몇 배우들 자체의 힘만으로는 거대한 영화를 모두 이끌어가기는 힘들어 보였습니다. 비어버린 설명 6년이라는 시간 동안 주인공들은 잃어버린 아들을 찾기 위해 고군분투했습니다. 별로 소득은 없었으나 희망을 잃지 않고 노력하는 모습처럼 보여집니다. 그러나 굳이 그 긴 시간을 둔 이유는 무엇일까, 왜 지금 이 시기에 사라진 아들에 대한 단서가 나온 것일까 생각하게 됐습니다. 아들을 숨기고 있는 무리들 측면에서 봐도 이상한 점은 많았을텐데, 정말 의도적인 납치가 아니라면 진작에 아이의 정체를 알았을텐데 싶었습니다. 즉 아무도 설명에 책임을 지려하지 않고 감정 중심으로 사건을 끌고 가며 상황이 이러하니 그저 몰입하라는 말로 들리게 됩니다. 물론 사건이 이끌어지긴 합니다만 배우들의 힘이 아니었다면 움직이지도 못했을 부표였습니다. 스릴러인가 드라마인가 스릴러적인 측면이 강하긴 합니다만 영화를 보다보면 답답하고 화가 나기도 합니다. 사회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내는 영화처럼도 보이기에 온전한 스릴러 영화를 즐기기도 애매합니다. 혈혈단신으로 아이를 찾아 떠나는 엄마의 모습은 분명 약하기에 그 자체로도 위태로운 스릴이 있지만 굳이 그 상황에 최선의 행동은 아니었다고 생각합니다. 마치 억지로 스릴을 짜내기 위한 설정에 가장 어려운 길을 선택한 모습처럼 보였습니다. 그래서 저는 작품이 스릴러의 탈을 쓴 드라마였다고 생각합니다. 심장 쫄깃한 장면보다는 영화가 말하고 싶은 메시지에 더 초점이 맞춰졌기 때문입니다. 분노케 하는 메시지 영화를 다 보고 나와도 시원한 구석이 없습니다. 연민과 슬픔이 곁다리로 오지만 중점이 되는 정서는 분노입니다. 아이를 매개체로 어른들은 이기적인 마음으로 서로를 위협하고 선을 넘기 시작합니다.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고 필요 이상으로 대처하며 일을 점점 더 의도적으로 키웁니다. 결국 말하고자 하는 바는 절대 악은 없다, 평범한 인간도 범죄자가 될 수 있다, 한 번 밟은 죄의 엑셀은 멈출 수 없다는 반사회적인 주제들입니다. 사연 없는 인물은 없다지만 이런 사회라면 정말 꿈도 희망도 없는 곳이구나 생각하게 됩니다. 물론 현실과 크게 동떨어지지는 않는다고 생각합니다만 안 그래도 극적인 현재를 더 부풀려 보여준 느낌이었습니다. 부족하게 채워진 그림 계속 말씀드리지만 배우들의 힘은 분명 잘 느껴지는 작품입니다만 영화 자체적인 매력은 부족합니다. 영화 중간중간 설득력 있는 전개보단 자극적인 진행을 우선시하고 감정을 호소하기 전 충분한 사전작업이 없었습니다. 결말에 이르러서도 그래서 어떻게 됐다는 거지? 고개를 갸웃거리게 됐습니다. 열린 결말처럼 생각의 가능성을 넓혔다기 보다는 희망을 바라는 건지 어떤 다짐을 한 건지조차 제대로 이해하기 어려웠습니다. 차라리 은유를 사용했다면 이면의 내용을 찾으려 생각을 했겠지만, 이건 분명 비유가 아닌 그냥 채색이 덜 된 그림의 모양이었습니다. 실종된 아이들에게 관심을 가지자는 의미는 그래도 건졌지만 지나치게 분노를 조장한 부분에 대해서는 납득이 힘들었습니다. 그래서 안 그래도 힘든 겨울왕국 시장에 큰 동원력은 기대할 수 없겠습니다. 쿠키영상은 없고 관객수는 70만 정도 예상합니다. (너무 짠가) 단순히 말하자면 이영애의 복귀와 건재한 힘을 확인할 수 있는 작품, 영화 '나를 찾아줘'였습니다.
일본의 선구자들⑮/ 립스틱의 원조
... 일본 립스틱의 뿌리… 화장품 회사 ‘이세한’ ‘키스해도 떨어지지 않는다’(キッスしても落ちない). 1955년, 당시로는 대담한 카피를 담은 립스틱이 일본에서 선을 보였다. 남녀가 키스를 해도 루즈가 입술에서 지워지지 않고 그대로 남아있다는 것이다. ‘키스 미 슈퍼 립스틱’(キスミースーパー口紅)이란 브랜드의 이 제품을 만든 회사는 ‘이세한’(伊勢半, ISEHAN). 일본에서 여성용 화장품 메이커로는 가장 오랜 역사를 가진 기업이다. ‘일본의 선구자들’ 시리즈 15회는 일본 립스틱의 뿌리 ‘이세한’이다. 1955년으로 되돌아가 보자. 당시 ‘키스 미 슈퍼 립스틱’의 지면 광고는 남녀가 금방이라도 키스하려고 하는 듯한 모습을 담고 있다. 출시 이후 상당한 논란을 일으킬 정도로 반향을 불러왔고, 여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이런 덕에 생산이 따라가지 못할 지경이 되면서 대히트를 쳤다. ‘키스미’’(KISSME) 시리즈의 립스틱 인기 끌어 이세한이 화제를 불러 모은 건 이뿐 아니다. 앞서 일본 화장품업계로는 최초로 신문에 컬러 광고를 실었다. 1952년 1월 1일자 마이니치 신문 조간에 광고가 실리면서 세간을 놀라게 했다. 이세한은 이보다 더 앞선 1946년 ‘키스미 특수 립스틱’(キスミー特殊口紅)을 내놓으면서 처음으로 히트작을 성공시켰다. 전쟁 이후 식량이 부족하던 시절을 반영한 ‘입술에 영양을 준다’는 카피가 먹혔던 것. 상품 한가지 더. 이세한은 1970년 일본 최초로 윤기나는 립스틱인 ‘키스미 샤인 립’(キスミーシャインリップ)을 출시해 폭발적인 성공을 거뒀다. 이세한의 회사 연혁 페이지에는 “연간 1000만개 이상 팔려 나갔다. 이 제품은 지금도 ‘코스메틱계의 전설’로 불리고 있다”(年間1千万本以上を売り上げた。これは今でも「コスメ界の伝説」と呼ばれているという)는 설명이 올라 와 있다. 이처럼 이세한은 ‘키스미’(KISSME) 시리즈로 소비자들에게 브랜드 이미지를 심어 주었다. <사진= 1952년 일본 화장품업계 최초로 신문(마이니치) 컬러 광고를 낸 '키스미' 립스틱.(왼쪽) 1955년엔 '키스해도 떨어지지 않는다'는 카피를 내세운 제품을 선보였다.> ... 1825년 창업…시세이도보다 업력 앞서 이세한의 창업 역사는 1825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사와다한에몬(澤田半右衛門)이라는 사람이 지금의 니혼바시 근처에서 염료가게 이세한(伊勢半)을 창업했다. 2025년엔 200년을 맞는 노포기업이다. 업력 역사로 보면, 일본 최대의 화장품업체 시세이도(1872년 설립)보다 수십년 앞선다. 에도 시대, 여성들은 붉은 색에 상당한 매력을 갖고 있었다. 당시는 지금처럼 스틱이 아닌 붓으로 입술에 바르거나 문지르던 시절이었다. 립스틱의 원료가 되는 홍화(紅花)라는 꽃잎에 불과 1% 밖에 들어 있지 않는 붉은 색소를 추출, 수공정을 거쳐 염료를 만들었다. 창업자 사와다는 비단벌레(玉虫)를 뜻하는 타마무시색(빛의 방향에 따라 녹색이나 자줏빛으로 보이는 컬러)의 ‘소정홍’(小町紅)이라는 제품을 만들어 평판을 얻었다고 한다. 세월이 흘러 이세한은 1955년 산하에 키스미판매주식회사를 설립했고, 10년 뒤인 1965년엔 키스미판매주식회사의 이름을 키스미코스메틱으로 변경했다. 그러다 2005년 키스미코스메틱과 이세한(주)를 합병해 지금의 이세한이 됐다. 2009년 첫 여성 사장 사와다 하루코 취임 이세한의 홈페이지를 한번 클릭해보자. 화면 상단에 KISS ME라는 글자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키스미=이세한’이라는 것. 이세한의 현 사장은 2009년 취임한 사와다 하루코(澤田晴子). 이 회사 첫 여성 CEO다. 그녀는 이세한의 7대 회장인 사와다 이치로(澤田一郎)의 아내다. <에디터=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613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
100년 이상 일본 노포기업 3만 5018개(최신판)
... “1458개 기업이 새롭게 100주년 진입” 흔히 100년 이상된 가게나 기업을 노포(老舗)라고 부른다. 100년은 단순한 숫자를 넘어 전통과 자존심을 의미한다. 일류 명문대를 졸업한 자녀가 부모의 노포에 둥지를 트는 일이 흔한 게 일본이다. 이런 일본에서는 노포기업이 몇 개나 될까. 때마침 도쿄상공리서치가 2020년 최신판 노포기업을 발표했다. 도쿄상공리서치가 12월 2일 발표한 자료에 따르면, 2020년 창업 100주년을 맞는 일본 노포기업은 이토요카도(유통), 킨테츠 백화점 등 1458개사로 조사됐다. 도쿄상공리서치는 “2020년 새롭게 창업 100주년을 맞는 1458개사가 정식으로 노포기업에 진입, 2020년의 노포기업수는 3만 5018개가 된다”(新たに2020年に創業100年を迎える企業の1,458社が晴れて老舗企業の仲間入りし、2020年の老舗企業数は計3万5,018社になる)고 했다. 2020년에 창업 200주년, 300주년, 400주년을 맞는 대표적인 노포기업과 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820년 창업한 직물회사 이부키(伊吹, 교토), 불단 제조업체 에이라쿠야(永楽屋, 시가현) 등 15곳이 업력(業歴) 200년에 올라섰다. △직물업체 야시로니(矢代仁, 교토)와 사찰의 지붕공사를 전문적으로 하는 코지마고무덴(児島工務店, 오카아먀현) 등 4곳은 창업 300주년을 맞았다. △화과자점 토라야혼포(虎屋本舗, 히로시마현)는 유일하게 창업 400주년 명단에 이름을 올렸다. 사찰 건축업체 곤고구미 ‘업력 1443년’ 최고 100년 단위를 넘어 ‘업력 1000년’이 넘는 노포기업도 상당수 있다. △가장 오래된 노포로는 사찰 건축을 전문적으로 하는 곤고구미(金剛組, 오사카부)가 있다. 578년에 창업, 2020년 업력 1443년을 맞는다. △그 다음으로 587년에 창업한 꽃꽂이법인 이케노보카도카이(池坊華道会, 교토)가 업력 1434년으로 그 뒤를 잇고 있다. △이어서 705년에 설립된 니시야마온천(西山温泉)의 게이운칸(慶雲館, 야마나시현)이 업력 1316년으로 3위에 올라있다. 717년 창업한 료칸 고만(古まん,효고현)도 업력 1304년을 자랑한다. <에디터 김재현> http://www.japanoll.com/news/articleView.html?idxno=611 저작권자 © 재팬올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출처 : 재팬올(http://www.japanol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