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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 추천]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


안녕하세요! 책과 더 가까워지는 곳 플라이북입니다.

날씨가 점점 쌀쌀해지고 있네요.
가을을 지나서 겨울로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런 날씨에 사랑 이야기로 마음을 녹이시는 건 어떨까요?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은 사랑 이야기가 담긴 책을 소개합니다!

외모는 똑같지만 성격은 정반대인 쌍둥이 자매!
예측할 수 없는 반전의 따뜻한 사랑 이야기

내가 제일 사랑하는 우리
미사 지음ㅣ한스미디어 펴냄

과연 키다리 아저씨는 누구일까?
첫사랑의 기억을 되살려주는 낭만 로맨스

키다리 아저씨
진 웹스터 지음ㅣ인디고펴냄

방공호 속에 묻혀있던 217통의 연애편지
옛 시절의 향수를 불러오는 시간 여행

서촌의 기억
안채윤 지음ㅣ자화상펴냄

엇갈린 시간 속에 살고 있는 두 사람
잠시도 긴장을 늦출 수 없는 반전의 반전

내일
기욤 뮈소 지음ㅣ밝은세상 펴냄

사라져버린 연애 세포를 살리고 싶을 때
전 유럽을 사랑에 빠뜨린 로맨틱 판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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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콜라 바로 지음ㅣ마시멜로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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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
소련 사회가 어떻게 돌아갔는지에 관심이 많고 소련스러운 아름다움(?)을 좋아하기는 하지만, 100년도 못 버텼던 소련은 분명 실패한 국가였다. 국가의 기본적 기능이 전혀 작동하지 않아서였는데, 그런 나라치고는 당당히 당시 초강대국 미국과 냉전을 벌인 주인공이기도 했었다. 13일의 금요일은 역시 독서지. 이 “처형당한 엔지니어의 유령”은 정말 거대한 생각거리를 안겨다주는 좋은 논픽션이다. 소련 초기(스탈린 집권 초기이다), 기술과 사회 사이에서 합리적이고 정의로운 “제대로 일하기”를 강조하다가 재판을 받지도 못하고 처형당한 엔지니어, 표트르 팔친스키(Пётр Иоакимович Пальчинский)의 일대기이다. 그러고 보면 공산권 국가, 소련의 지도자들이 어째서 대부분 엔지니어 출신(참조 1)인가 하는 점이 궁금했었다. 공산주의가 특히 과학기술을 좋아해서? 틀린 답은 아닐 테지만, 책을 보니까 알겠더라.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인문 사회계는 일단 반동분자가 될 가능성이 매우 높기도 하고(…) 대체로 공산주의 저작물 외에는 거의 교육이 없기도 했었다. 전공자들에게 일종의 “유리 천장”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공계는 실질적으로 필요하다. 다만 이공계 전공자들이 반동분자가 될 가능성이 없지는 않으므로, 이들을 공학자로 키우기보다는 정말 세부적인 전공만 가르쳐서 엔지니어로 육성하고, 그들을 당 내부에서 승진시켰다. 엔지니어들도 그를 알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얼마나 세부적인 전공만 하냐면, 저자의 경험담을 들어보는 편이 나을 것이다. “마침내 어느 날 모스크바 근교로 소풍을 나갔는데 자신을 엔지니어로 소개하는 젊은 여성을 한 명 만났다. 어떤 유형인지 물었더니 제지 공장용 볼 베어링 엔지니어라 답했다. 그래서 내가 기계공학 엔지니어군요, 라고 묻자, 그녀는 자신이 제지 공장용 볼 베어링 엔지니어라 다시 답했다. 믿을 수 없어서 설마 ‘제지 공장용 볼 베어링 학위’를 받았냐고 물어보니, 그녀는 그 학위를 받았다고 답했다.” (p121-122) 대단히 편협한 교육을 받은 것이다. 이런 교육을 받은 테크노크라트들이 당 지도자로 성장했다(참조 2). 위에도 얘기했지만 이들은 상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로지 생산량 목표 달성/초과에만 신경썼다(참조 3). 엄한 곳에서만 자본주의식 경쟁을 부추긴 것이다. 그렇지만 “엔지니어식” 사고방식이 지배했기 때문에 소련이 실패했다고 보기에는 너무 구차하다. 당연히 소련 실패의 핵심은 오로지 영광만을 보이려 하고, 실패나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며, 실무자들 의견과 전혀 관계 없이 상층부의 정치적 판단만이 절대적으로 옳았던 점에 있었다(참조 4). 팔친스키가 숙청된 이유는 다름 아닌 팩트 폭력을 너무 많이 휘둘러서였기 때문이리라. 바로 이러한 실패의 요소들이 비단 소련에만 있었을까? 이게 바로 이 책을 읽으면서 들었던 의문점이다. 소련이라는 단어를 지우자. 오로지 잘 된 것만 보여주고 싶고, 실패나 실수를 위에서 용납하지 않으며, 실무자 의견은 도외시되고 윗분의 판단만 그대로 따른다… 소련과 그리 멀지 않은 방식으로 운영되는 곳이 여기저기 보일 것이다. P.S. 주석을 보면 이 책의 주인공, 팔친스키의 영문 표기에 대한 해명(?)이 나온다. 미국의 경우 의회도서관의 러시아어 음역 표기법에 따를 경우 오히려 영어권 독자들에게 혼란감을 줄 수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른바 “표준” 표기법은 세계 어디서나 환영받기 힘든 법. -------------- 참조 1. 군 출신이었던 체르넨코, 신학교를 갈 뻔 했던(…) 스탈린 빼고는 모두 다 엔지니어들이었다. 그런데 그 전통을 고르바초프가 깬다. 고르비는 법학도였고 최측근이 사학자였다. 2. 1986년 소련공산당 정치국에서 기술 교육을 전공으로 한 사람들의 비중이 89%였다고 한다. 최고위층이 그냥 다 엔지니어들 모임인 셈이다. 물론 미국도 엔지니어 출신 대통령이 없진 않았다. 허버트 후버. (당시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다들 아실 것이다.) 3. 소비에트 인테르니옛(2018년 7월 8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6397441474831 "최초의 글로벌 컴퓨터 네트워크는 협조적인 사회주의자처럼 행동하는 자본주의자들 덕분에 태어났다. 경쟁 위주의 자본주의자들처럼 행동하는 사회주의자들이 낳은 것이 아니었다." 4. 달착륙에서 소련이 진 것도 결국 같은 이유다. 소련은 어째서 미국에게 우주개발을 뒤졌는가(2019년 8월 8일): https://www.facebook.com/minbok/posts/10157359906059831
Chapter 63. 지켜줄게요.
"뭐하는 짓이야!" 가게 문이 활짝 열리곤 화난 음성이 들렸다. 로라도 수정도 모두 놀란 눈으로 입구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곳엔, "오빠!" 기태가 서 있었다. 기태의 등장에 수정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로라는 그런 기태를 물끄러미 응시할 뿐이었다. 그녀의 표정엔 아무런 색깔도 없었다. "나와. 네가 지금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앉아 있어!" 하며 기태는 우악스럽게 수정을 잡아끌었다. 로라는 덤덤히 그런 상황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었다. "이 여자였다며? 버젓이 옆에 두고, 날 바보 만들었더라?" 수정은 악을 쓰며 기태를 세차게 노려보았다. 기태는 그런 수정을 바라보지도 않은 채, 상처받은 얼굴로 앉아있는 로라를 내려다보았다. 기태의 시선이 로라에게 향해 있다는 걸 깨달은 수정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나와. 너 지금 실수하는 거다." "실수는 내가 아니라 오빠가 하고 있어요." "근데 그게 왜? 네가 뭔데. 이젠 아무것도 아니지 않냐?" 그 어느 때보다 차갑고 냉정한 그였다. 수정은 이번엔 로라를 세차게 바라보았다. "그쪽이 오빠 부른 건가요? 흑기사 노릇이라도 해달라고?" "뭐라…구요?" "아까는 잘도 얘기 하시더만요? 왜 지금은 입 꾹 다문 채 피해자 코스프레 하시나요?" "이봐요!" "사과 못 한다면서요! 어쨌든 당신, 복수니 뭐니 그깟 핑계 대가며 오빠 곁에 남으려 한 건 사실이잖아! 버젓이 내 존재 알아 놓고서도!" 수정의 말에 로라는 자리에서 일어나 수정 앞에 섰다. 수정은 지지 않고 로라를 응시했다. "복수니 뭐니 그깟 핑계는 댔지만." "……" "나 그것 마저도 더러워서 관두고 끝냈습니다. 당신 오빠랑." "……" "정 그렇게 궁금하시면 당신 오빠한테 직접 물어보시던가요." 표정 하나 변하지 않는 로라였다. 기태는 그런 로라만 응시한 채 어찌할 바를 몰랐다. 한 눈에 보기에도 안절부절 못하는 기태를 어이없다는 듯 바라보던 수정은, 자신이 지금껏 알던 기태가 아닌 듯 낯설게 느껴졌다. "오빠…내가 알던 오빠…맞아?" "……" "대체 왜 이러는 건데…어? 왜 이러는 거냐구요!" 수정이 울부짖으며 기태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려쳤다. 그런 수정을 여전히 거들떠도 보지 않고 기태는 연신 무표정의 수정을 바라보며 한숨만 내쉬었다. "미안합니다. 정말 미안합니다, 로라씨." 수정이 울부짖을수록, 기태는 더욱 로라만 바라보았다. 그런 기태가 원망스러운 수정이었다. 그런 로라가 괘씸한 수정이었다. "왜 저 여자한테 사과를 해? 같이 즐겼잖아! 같이 행복했잖아!" "조용히 하지 못해?!' "사과는 나한테 해야 하는 것, 아냐?" "왜지? 난 너에게 충분히 내 마음 설명했고." "……" "이별까지 고했지만, 떠나지 못한 건 내가 아니라 너 아니냐." 로라는 싸늘한 눈빛으로 기태를 올려다보았다. 자신의 앞에서 아웅다웅하는 둘의 모습이 이내 보기 싫어졌다. "사과 하려면 네가 해야지. 너 때문에 내가 로라씨를 잃게 된건데." "뭐…? 나 때문에 잃어…?" "그만들 하세요. 나가주세요." "이봐요, 오로라씨. 그렇게 당당할 입장 아니거든요? 나 참, 어이가 없어서." "못 당당할 이유는 뭐죠? 나, 그 쪽에게는 화내고 싶지 않습니다. 돌아가 주세요." "타이밍이 안 좋았던 겁니다, 로라씨." 돌아서는 로라를 향해 기태가 애원했다. "오빠!" "타이밍이 안 좋았을 뿐. 정말 로라씨에겐 티끌의 거짓 감정은 없었습니다." "타이밍이라…" 로라는 타이밍을 운운하는 기태를 싸늘한 시선으로 돌아보며 타이밍이란 세 글자를 낮게 읊조렸다. "그 개 같은 타이밍 때문에." "……!" "나는 내 사랑을 배신당해야 했고." "……." "그 개 같은 타이밍 때문에." "……" "사랑도 배신당했는데, 사과까지 해야 하네요." "…로라씨." "그만." 로라는 미간을 잔뜩 찌푸리며 한 걸음 다가오는 기태를 피해 한 걸음 물러났다. “그만 하세요.” “…….” “충분하잖아.” “…….” “내 꼴 우습게 만들었고, 나 아프게 만들었고.” “……” “그래서 그만하겠다고, 당신 손 놓은지 오래고.” “…….” “그런데 당신이야 말로, 이별을 고한 날 떠나지 못하고 있는 거잖아.” “……” “그래서 그런 당신 때문에.” “…….” “나는, 나와 당신을 헤어지게 만든 그 여자에게.” “……!” “미안하다, 사과까지 해야 하고.” “…….” “나도 억울해 죽겠는데! 욕까지 들어 먹고 있잖아. 비참하지 않아, 내 꼴이?” “…로라씨.” “그 이름도 더는, 부르지 마.” “…….” “그만해…제발…그만 해줘.” 애원하듯 그리 말하는 로라의 검은 눈동자에 눈물이 그렁그렁 맺혔다. 울지 않기 위해 애썼다. 여기서 울고 싶진 않았다. 울어도, 이 둘이 없는 곳에서 울고 싶었다. 여기서 눈물까지 보인다는 건 로라의 자존심이 허락지 않는 일이었다. 기태는 그런 로라를 죄스런 마음으로 응시하다, 이내 눈물이 뿌옇게 차오르는 그녀를 애써 바라보지 않았다. 대신 수정의 손을 우악스럽게 잡아끌며, 그녀의 말대로 그녀를 혼자 두게 하려 했다. “가자.” “못 가.” “양수정!” “똑바로 말 해. 오빠도 여기서 똑바로 말하세요.” “뭐를 대체!” “이 여자랑 끝내겠다고!” “아니, 못 해.” “오빠!” “결혼도 하지 않겠다, 너희 아버지께 직접 말씀도 드렸고!” “…….” “내 마음도 확고한데! 대체 너는 왜!” “……” “왜…날 이렇게 힘들게 하는 거냐.” 기태가 그렇게 수정에게 윽박을 지르고 있던 그 때, - 땡그랑. 굳게 닫혔던 가게 문이 열렸다. 로라는 황급히 떨어지는 눈물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입구를 응시했다. 수정과 기태 역시, 서로를 응시하던 날카로운 시선을 거두곤 땡글아, 소리가 나는 입구를 바라보았다. 그런데 “왜 자꾸 너희.” “……!” “내 여자 친구 괴롭히냐.” “…구도발.” “죽을래?” * * * “어머니…, 어떡하면 좋죠. 도헌이 마음…완전히 돌아선 것 같은데요.” 지혜는 입술을 악물며, 한숨을 내쉬었다. 도헌의 친모 역시,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저리 냉정할 땐, 지 애비를 똑 닮았다니까.” “…….” “그래도 걱정 마라, 지혜야. 시간이 지나면 저 녀석 다시 너한테 돌아갈 것이니까. 삼 년이란 시간이 얼마나 길고 큰 시간인데.” “…….” “지금이야 네가 괘씸해서 저리 냉정하게 대하는 거지만, 또 달라. 시간이 지나고 네 허전함을 느끼면 다시 연락 올 거니.” “…….” “걱정 말고 있어.” “예…어머니.” 지혜는 고개를 끄덕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연신 도헌이 사라진 문 쪽을 바라보며 로라의 얼굴을 떠올렸다. 자신 대신 이젠 도헌의 옆에 있는 그 여자의 얼굴. “그런데 집에선 뭐라고 하시니? 이 사실…아셔?” “아뇨. 아직 도헌이…귀국한 것도 몰라요.” “…다행이다. 사돈어른 아시면…괜히 걱정만 하시지.”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무엇을. 사돈어른께서 우리를 신경 써 주신 게 얼만데. 앞으로도 모르시게 네가 알아서 잘 둘러대. 결혼은 어떻게든 할 수 있게 할 테니.” 지혜는 그런 도헌의 친모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도헌이 이번 달 유학 생활비…” “어?” “어제 집에서 주셨어요. 어머니 계좌로 입금해드릴게요.” 지혜의 말에 도헌의 친모는 멋쩍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은 도헌의 유학 경비며, 매달 생활비를 지혜 집에서 꼬박꼬박 도헌의 모에게 주고 있었다. 도헌의 집안 사정이 어려운 것은 아니었으나, 그 돈을 도헌의 친모는 받아 챙기고 있었던 것이었다. 당연, 지혜 집안에선 도헌이 지혜와 결혼할 사이니 돈을 챙겨주는 것을 당연한 일이라 여기고 있었다. 자신의 딸이 그토록 좋아하는 남자니, 딸을 봐서라도 챙겨주는 것이었다. “미안하구나.” “…아니에요, 늘 그랬듯 도헌이는 절대…절대 모르게 해야 해요. 이번에 이런 일까지 터졌는데, 어머니가 그 돈 받으시는 거 알면…” “당연하지. 성질 머리 더러운 그 자식 알면 집 안이 발칵 뒤집어 질 건데.” “그런데…아버님께선…” 지혜는 조심스레, 도헌의 아버지를 물었다. 그러자 도헌의 친모는 흐음…, 헛기침을 하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어찌해서 네 일을 알게는 되었다만…반응이 좋진 않으시지.” “…어떡해요, 어머니.” “그래도 그 양반은 내가 밀어 붙이면 되니까 걱정 마.” “…애써 주셔서…감사합니다. 죄송하구요.” 지혜는 한숨을 내쉬었다. 도헌의 친모가 아님 이젠 와장창 끝이 나 버릴 사이. 지혜는 그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돈으로라도 도헌의 친모를 매수해야만 했다. 그것이 진정 사랑이 아닌 줄 알면서도…, 그것의 결말은 처참할 것 역시 알면서도. * * * “구도헌씨.” 도헌은 싸늘한 눈빛으로 저벅저벅 가게 안으로 들어서더니, 이내 눈물범벅이 된 로라 곁에 섰다. “하여튼. 나만 없으면 일이 생겨요.” “…….” “이러니 내가 우리 자기를 두고 일을 볼 수가 없지.” “…….” “이 아줌마는 뭐야. 아~. 차 선생, 퍼스트?” 무례할 수도 있는 그 말을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으며 도헌은 수정을 향해 고갯짓을 해버렸다. “이봐요! 퍼, 퍼스트라니요!” “왜. 세컨드인가? 아니잖아?” “이보세요!” “아. 영어가 맘에 안 들어서? 오케이. 첫 째 여자. 됐습니까?” “구도발. 그만 해.” 도헌의 말에 수정은 금세 얼굴이 붉어졌다. 그리곤 말끔한 모습의 도헌을 위 아래로 훑더니 기태를 올려다보는 수정이었다. “오로라씨 남자 친구 분 같은데. 오빠도 알고 있었어?” “알다마다. 님 남친이 나랑 오순도순 같이 먹으라고 저 김밥 싸준 건데?” 도헌은 피식 웃으며 기태가 준 도시락 통을 가리켜 보였다. 그러자 수정은 그런 도헌을 한 번 흘겨보더니 이내 기태가 한심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니 오빤 대체 무슨 생각으로…”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에 대한 궁금증 해소는 나가서 해주시겠습니까?” “뭐라구요?” “난 우리 자기랑 점심 먹어야 해서. 그럼.” 하며 도헌이 수정의 등을 떠밀었다. 그러자 기태는 그런 도헌을 싸늘한 시선으로 바라보더니 이내 발걸음을 옮기며 나지막이 로라를 향해 읊조렸다. “미안합니다. 로라씨.” 도헌은 그런 로라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로라는 무표정한 얼굴로 코끝이 빨개진 채 땅바닥만 응시하고 있었다. 도헌은 그런 로라의 손을 꼭 잡았다. “……?” “울지마요.” “…안 울거든?” “앞으론 쟤네가 못 괴롭히게.” “…….” “내가 옆에서 꼭 지키고 있을테니까.” * * *
제 5 장. 달(月)의 기운이 흩어지다!
“아악-.” 잠자리에 누웠던 윤화가 외마디 비명을 내지르며 벌떡, 몸을 일으켰다. 식은땀에 흥건히 젖은 채였다. 윤화는 거친 호흡을 내뱉으며 가슴을 움켜쥐었다. “달…달의 기운이…흩어지려해. …이를 어쩐담.” 윤화는 더듬더듬 초를 찾았다. 윤화의 비명에 마루에 누워있던 노인은 황급히 문을 열었다. “무슨 일인 게야?” “악몽을 꾸었어.” “…….” “안…좋아. 기운이…좋지 않아.” 오늘이 좌상댁과 약조한 꼭 열흘이 되기 이틀 전 날이었다. 이미 두 아가씨의 운명을 본 윤화는 오늘 무화산을 떠나기 위해 미리 짐을 꾸려놓은 상태였다. 약조한 날까지 좌상 댁에 답을 드리려면 적어도 오늘 출발해야 했다. 식은땀을 뻘뻘 흘리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윤화는 마루로 뛰쳐나왔다. “아가씨들의 운명을…가로 막고 있는 게 더 있었어.” “…뭐?” “그 날. 그 저잣거리에서 마님을 뵈었을 때 국모의 기운을 지닌 분의 운명을 가로막고 있는 것은, 쌍생아라는 것. 달의 기운이 두 개였다는 것.” “…….” “그것인 줄로만 알았는데.” “…….” “아니었어, 할아버지.” “…….” “내가 미처 보지 못한 검은 기운이 있었어.” 윤화는 맨발로 뛰쳐나와 아직 검푸른 새벽녘의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오늘 좌상댁에 답을 드리러 사람을 보낸다 했지.” “…….” “내가 가마.” “할아버지.” 윤화는 노인의 말에 가쁜 숨을 몰아쉬며 노인을 돌아보았다. 뒷짐을 진 채, 윤화 곁에 선 노인은 검푸른 하늘을 올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중헌 일 아니냐.” “할아버지, 그치만.” “서찰만 그 댁에 무사히 전해주면 된다하지 않았느냐.” “…그렇지만.” “네 어미의 처녀시절의 연서도 네 아비에게 내가 은밀히 전해주고 했었지. 걱정 붙들어 매.” 노인은 가벼운 농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는 윤화의 긴장을 풀어주려 했다. 윤화는 슬픔과 두려움에 가득 찬 눈으로 노인을 바라보았다. “혹여나 그 서찰이 다른 이의 손아귀에 넘어간다거나 전해주지 못하게 되면 큰일 아니냐.” “아냐. 내가 직접 가야겠어.” “그러다 네가 변이라도 당한다면.” “…….” “그것은 니가 그리 귀히 여기는 그 분들 모두에게 해가 되는 일 아닐 게냐.” “할아버지….” 노인의 고집을 꺾기는 어려워 보였다. 불길한 기운이 자꾸만 엄습해 와 윤화는 어찌할 바를 모른 채 떨기만 했다. 난생 처음 느껴보는 흑(黑)의 기운에, 윤화는 떨기만 할 뿐이었다. 하지만 노인은 윤화가 겪고 있는 무녀로서의 이 고초를 이미 자신의 처였던, 윤화의 외조모에게서 종종 보았기에 낯설지 않았다. “흑의 기운이든, 정의 기운이든. 그 모든 기운을 받아내고 견뎌내고 이겨내야 하는 것이 무녀인 너의 몫, 아니더냐.” “할아버지.” “나도…네가 네 할미처럼 무녀가 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노인은 자신의 손녀에게 한 번도 털어놓지 않았던 속내를 오늘에서야 드러냈다. 윤화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자신의 할아버지를 올려다보았다. 주름이 깊게 팬 얼굴이 윤화의 속을 더욱 아프게 내려치는 듯했다. “하지만 네 말대로, 네 할미의 말대로 다 연유가 있겠지.” “…….” “그리고 내가 그 서찰을 그 댁에 전해주려고 마음먹은 데에도 다…연유가 있지 않겠느냐.” 노인의 말에 윤화는 한숨을 푹 내쉬었다. “날이 밝는 대로 서찰을 써서 줄게, 할아버지.” “…….” “정말…무사히…아무 탈 없이 좌상 댁에 전해드리고…와야 해.” “예끼, 이 놈! 네 할배를 그리 만만히 보는 것이냐? 이래봬도 소싯적에 산 속 도적놈들은 내가 다 때려잡았다, 이눔아!” “할아버지….” 노인은 껄껄껄 웃으며 윤화의 등을 어루만졌다. 어느덧 무화산 저 너머로 뉘엿뉘엿 해가 밝아 오고 있었다. * * * “예상이 빗나갔어.” “…….” “달의 기운을 받으신 분은 채랑 아가씨가 아니라.” “…….” “채희 아가씨였어.” 윤화는 정수를 떠 놓은 상 앞에 예를 갖추고 앉아 치성을 드리다, 입을 열었다. 그러곤 붓과 노란 화선지 한 장을 꺼내 좌상 댁에 전할 서찰을 써내려갔다. ‘마님, 예측이 빗나갔사옵니다. 둘 째 아기씨인 채희 아가씨가 국모가 되실 운입니다. 이 서찰을 받는 즉, 채랑 아가씨를 이 곳 무화산, 제 처소에 머물게 하소서. 세자빈 간택이 있고 난 후, 초하룻 보름달이 환히 뜨는 밤이, 세자저하와 세자빈의 합궁일이 될 것이옵니다. 그 날의 보름달의 충만한 기운을 채희 아가씨와 채랑 아가씨가 각자의 자리에서 맞으신다면 두 분의 운명은 제자리를 찾을 것이옵니다. 이 서찰은 즉시 태워 없애주셔요. 저는 무화산을 떠나 치화산으로 거처를 옮길 생각입니다. 부디, 다시 마님을 뵙는 그날 까지 안녕, 또 안녕하시옵소서.’ 그렇게 서찰을 쓰고 난 후, 윤화는 다시금 두 손을 모아 예를 갖추어 자신이 모시고 있는 신께 절을 했다. 노인은 그런 윤화의 뒤에서 모든 걸 체념한 얼굴로 하늘만 바라보고 섰다. “할아버지. 다 되었어.” “먼저 치화산으로 떠나 있거라.” “싫어. 할아버지가 예 당도하면 같이 떠날 것이야.” “만일을 대비하자는 것이다. 만일 내가 변을 당한다면 그것은 필시 이 서찰의 존재나 너와 나의 행보를 꿰뚫고 있는 이가 있다는 말일 텐데.” “…….” “그자들이 너를 가만히 살려 둘 것 같으냐?” “할아버지 왜 자꾸 그런 재수 없는 소리만 하는 거야! 누가 우리 목숨 줄을 노리기라도 한 단 말이야?” “네 할머니는 항상 그래왔다. 이런 위험한 일을 풀고자 할 땐, 항상 최악의 경우까지 생각하고 행했다. 알고서 미리 대비하자는 것이 나쁜 것은 아니지 않느냐.” “그렇지만….” “곧 뒤따라 갈 터이니 딴 곳으로 새지 말고 곧장 치화산으로 향하기나 해.” 노인은 윤화가 건넨 서찰을 받아 낡은 도폭 소맷자락에 푹, 넣곤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자꾸만, 연신, 윤화의 마음이 불안하기만 했다. “할아버지! 꼭 바로 뒤따라야 해! 알았지?!” “알겠다고 이눔아! 얼른 짐이나 싸!” 뒤도 돌아보지 않고 성큼성큼 산을 내려가는 노인의 뒷모습에서 윤화는 오래도록 눈을 떼지 못했다. * * * “약조한 날이 오늘이지요.” 좌상 댁, 정경 채화는 마른 침만 꼴깍 꼴깍 삼키며 마당을 왔다, 갔다 불안에 떨었다. “부인.” “왜이리 불안한 것일까요.” “믿어봅시다, 운명을.” 좌상은 채화의 어깨를 감싸 안았다. 방에선 이미 채비를 끝낸 두 아기가 누워있었다. 둘 중 하나는 오늘 이 집을 떠나 기약 없는 그 날까지 무화산에서 지내야만 했다. 정경은 한숨을 푹 내쉬며 안채로 들어와 두 아기를 보듬었다. “미안하구나. 따뜻한 밥 지어 맥이고, 예쁜 옷 지어 입혀서 그렇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함께…살고 싶었는데…” “…….” “부족한 어미라…, 이리도 못난 어미라…미안하구나, 내 새끼들.” 채화는 두 아기를 보듬고선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어찌하였든, 둘 중 하나와는 이별인 날이었으니. 곱게 싸놓은 보따리를 먹먹한 눈동자로 내려 보던 채화는 마른 침을 삼켰다. 약조한 시간이 점점 다가오고 있었다. “벌써 신시가 되었는데, 아직 아무 소식도 없으니…” 좌상은 안채로 들어서며 근심 가득한 얼굴로 둘 째, 아기인 채희를 내려다보았다. 오늘 이 곳에 아무도 당도하지 않는다면 윤화가 예언한대로 첫 째인 채랑이 국모의 운을 타고난 아이고, 둘 째 아기인 채희가 이곳을 떠나야 했다. 이미 예견된 운명이었지만…, 좌상은 심란하기만 했다. “아무래도…” “…….” “채희가…떠나야 할 운명인가 봅니다.” 좌상은 담담한 척, 그 말을 내뱉었지만 마음이 착잡해져오는 것을 막을 도리는 없었다. 좌상은 아무것도 모른 채 곤히 잠들어 있는 채희를 조심스럽게 안아 올려, 하염없이 채희를 내려다보았다. “아가…참으로 기구한 운명이구나.” 어느덧 좌상의 눈동자에도 뿌연 눈물이 드리웠다. * * * 무화산을 떠난 지 이틀 째 되는 날, 노인은 부지런히도 걷고 걸었다. 끼니조차 거른 채, 제 시간 안에 좌상 댁에 당도하기 위해 묵묵히 걸었다. “이 서찰을 무사히…전해드려야 할 텐데.” 어느덧 날이 뉘엿뉘엿 저물고 있었다. 시간은 신시를 지나 유시를 향해 가고 있었다. 추운 겨울이라, 해가 짧았다. 이제 도성까지 한 고개만 넘으면 되었다. 노인은 도포 소맷자락 속에 담긴 서찰을 다시금 더듬으며 깊은 산 속으로 들어섰다. 밤공기가 차가웠다. 내일 눈이라도 한바탕 내릴 참인지, 달빛을 밤 구름이 뿌옇게 에워싼 듯 했다. 옷깃을 여미며 노인은 오로지 구름이 쌓인 뿌연 달빛에 의존한 채, 어두운 산길을 걷고 또 걸었다. 그 때, “바스락.” 바스락, 낙엽 밟는 소리가 들려왔다. 노인은 걷던 걸음을 멈추어 섰다. 등 뒤로 식은 땀 한 줄기가 슥, 흘렀다. 좋지 않은 예감이 몰려왔다. 노인은 그대로 멈춘 채, 뒤를 돌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 노인은 발걸음을 다시 옮겼다. 아까보다 더 빠른 걸음으로. 그리고 그런 노인의 뒤를 따르기 시작하는 분주한 발 소리 하나. 무언가 잘못 되었다는 것을 직감한 노인이었다. 노인은 서찰이 든 도포 소맷자락을 꾹 쥔 채, 내달리기 시작했다. 낙엽과 빈가지가 노인의 다급한 발자락에 스쳐 바스락 바스락 다급한 소리를 내었다. 그리고 그 뒤를 맹렬히 따르는 검은 그림자! 노인은 숨이 턱 끝까지 차올랐다. 내달리고 또 내달렸다. 이 고개만 넘으면, 이 고개만 넘어 저잣거리에만 당도한다면 몸을 숨길 방도가 있을 테였지만. “허억-허억-허억-” 이 어둠이 내린 숲에서 노인은 그저 독 안에 든 쥐일 뿐이었다. 노인의 거친 숨소리가 숲을 가득 매웠다. 그리고 순간, 노인이 있는 힘껏 내달리다 그만 돌부리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 “으윽-!” 그리고 노인이 예상한대로 노인이 넘어져 숲속을 뒹굴자 그런 노인의 목에 서늘한 칼이 겨누어졌다. 노인은 가쁜 숨을 몰아쉬며 자신에게 칼을 겨누고 있는 자를 올려다보았다. 주위에 불빛 한 점 없는 탓에 얼굴이 또렷이 보이지 않았지만 건장한 사내인 듯 했다. “누구냐! 원하는 게 무엇이냐!” 노인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뒷걸음질 쳤다. “내 놓거라, 그 서찰을.” “…무, 무슨 서찰을 말이냐, 이놈아!” 노인이 발뺌하자, 자객은 더욱 노인의 목에 칼을 깊숙이 들이밀었다. 노인은 마른 침을 살피며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렀다. “그 무당 년이 준 서찰을 내놓으란 말이다. 그 서찰을 들고 대체 어디로 향하고 있던 게지?” “누구의 사주를 받고 이러는지 모르겠으나! 짚어도 한참을 잘 못 짚었소이다! 내겐 서찰 따위는…!” “너는 어차피 죽게 되어있다. 끝까지 발뺌하고 그 서찰을 내놓지 않는다면 너는 내 손에 죽을 것이고, 그 서찰을 내놓지 않고 도망을 간다 해도, 내 손에 죽게 될 것이다.” “…….” “니가 살 길은 오직 하나. 그 서찰을 내게 넘겨주는 것 뿐.” “…….” “그 서찰을 내게 넘긴다면 니가 그 서찰을 들고 어디로 향하고 있었는 지는 궁금해 않겠다. 목숨 또한 살려줄 것이다.” 노인은 잠시 망설이더니 복면을 쓴 자객을 올려다보았다. 그러곤 더듬더듬 자리에서 일어나 나무에 기댔다. 마른 침을 삼키며 두 눈을 질끈 감았다. “윤…화야….” 노인은 비통한 표정으로 손녀의 이름을 나지막이 불렀다. “이것을 내어줄테니…그럼…약조하시오. 내 손녀만큼은…손녀만큼은 꼭 살려주시오.” “약조하지.” 그리고 노인은 벌벌 떨며 소맷자락 속 서찰을 꾹, 쥐었다. * * *
Chapter 65. 너희 잘 봐, 내가 얼마나 얘를 사랑하는 지.
“어머….” “전화 안 받기에… 와봤더니.” 기태였다. 기태가 우두커니 서 있었다. 살짝 풀린 동공, 은은하게 풍겨져 오는 알싸한 알콜 냄새. 로라는 가만히 기태를 올려다 보았다. 술에 취한 듯 기태가 살짝 흔들렸다. “가세요.” “죄송… 합니다.” 돌아서는 로라의 팔을 붙잡는 기태였다. 그런 기태의 손을 뿌리치는 로라. 기태는 다시금, 그런 로라의 팔을 쥐었다. “미안 합니다.” “됐다구요.” “사과 하고 싶었어요.” “가시라구요.” 로라는 그런 기태의 손을 다시금 뿌리치며 등을 돌렸다. 참고 있었는데, 괜찮은 줄 알았는데… 이상하게 눈물이 났다. 눈물이…, 눈물이 나고 있었다. 젠장할. “내 사랑은…” “…….” “이렇게… 왜… 매번….” “…….” “피어보기도 전에….” “…….” “망가지냐.” 기태가 혼잣말을 하듯 중얼거렸다. 로라의 눈물이 툭, 떨어졌다. 기태는 다시 로라의 어깨를 조심스레 쥐었다. 사실은 기태도 울고 있었다. “많이 좋아했다는.” “…….” “많이 좋아하고 있다는.” “…….” “많이 좋아할 거라는.” “…….” “그 말로는 다….” “…….” “받지 못…하겠죠.” “…….” “용서.” 기태는 두 눈을 감았다. 뜨거운 눈물이 하염없이 흘렀다. 그리곤 돌아선 로라 앞에 무릎을, 끓었다. 다시금 무릎을 꿇은 기태였다. 그리고 그 광경을 멀리서 모두 지켜보고 있는 수정이었다. “아니… 차기태… 네가 왜 무릎을 꿇어….” 수정의 손에 어마어마한 힘이 들어섰다. 그리고 자신이 사랑하는 남자가 사랑해 달라, 용서해 달라, 구걸하고 있는 상대의 여자에게 치가 떨릴 만큼 화가 치밀었다. 수정은 차에서 내려 로라에게 가기 위해 한 걸음 내딛었다, 그런데. “빠지시죠.” “……?” 도헌이었다. 트레이닝복 차림의 도헌이 수정의 앞을 가로막았다. 수정은 도헌을 빤히 바라보곤, 이내 로라의 남자 친구라는 것을 깨닫곤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럼 그쪽이 뭐 어떻게 해보세요.” “…….” “우리 오빠가 왜 그쪽 여자 친구한테 무릎을 꿇어야 해요?” “…….” “납득이 되질 않거든.” “……” “무릎이라면 그쪽 여자 친구가 꿇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수정은 도헌에게 따져 물었다. 그러자 도헌은 표정 하나 바뀌지 않고 딱딱하게 수정을 바라보다 붉은 입술을 열었다. “웬 줄… 아직도 몰라?” “…뭐라구요?” “네가 그렇게 사랑하는 저 남자는.” “…….” “이제 널 안 사랑한다는 거 아니냐.” “……!” “그러니 네가 아닌… 내 여자 친구 앞에서 무릎을 꿇고 있겠지.” “… 이봐요.” “이 보고, 저 보고 간에. 남자 친구인 나도 가만히 있는데.” “…….” “이제 여자 친구도 뭣도 아닌 네가… 왜 나서.” “뭐라구요?” 도헌이 죽일 듯이 수정을 노려보며 입술을 지그시 깨물었다. 수정은 어이없다는 듯, 도헌을 빤히 바라보며 팔짱을 꼈다. “내 여자 친구 그만 괴롭혀.” “……” “안 그래도 쟤가 얼마나 여리고, 얼마나 순진하고, 얼마나 순수하고 얼마나 눈물이 많고…” “…….” “얼마나….” 이상했다. 쿵, 쿵, 쿵. 도헌의 심장이 급격하게 뛰기 시작했다. 로라를 떠올리자, 로라의 사랑스런 얼굴을 떠올리자 심장이 병에 걸린 것처럼 팔딱 대기 시작했다. 도헌은 말을 하다 멈추곤 얼떨떨한 채로 뒤를 돌아보았다. 로라가 울고 있었다. 여리고, 순진하고, 순수하고, 눈물 많은 로라가… 울고 있었다. “…나.” “…….” “오호라… 좋아하냐.” 남자 친구인 척 해달랬는데, 감정 이입을 너무 심하게 했나보다. 도헌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다시금 수정을 바라보았다. “그러니까. 그만 괴롭…” 그때였다. 로라의 고함이 들려왔다. “아 그만 하시라구요!” 순간, 도헌은 로라의 고함을 듣자마자 튕기듯 로라에게 달려갔다. 수정은 순식간에 사라진 도헌을 바라보았다. “그만 못 해?!” “구도… 발?” 도헌이 가쁜 숨을 몰아쉬며 로라 앞에 우두커니 섰다. 기태는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도헌을 올려다 보았다. 도헌이 화난 얼굴로 무릎을 꿇고 있는 기태를 차갑게 내려다보고 있었다. “됐다잖아.” “…….” “가시라잖아.” “…….” “그만 하시라잖아!” 도헌이 소리쳤다. 로라는 훌쩍 훌쩍 눈물을 훔치며 놀란 얼굴로 도헌을 바라보았다. “너… 어디서… 튀어 나온 거야.” “… 오로라, 그만 흔들어.” “…….” “아니? 그만 힘들게 해.” “…….” “내 여자 친구…” “…….” “그만 울리라고, 새끼야.” “악!” 하며 도헌이 무릎을 꿇고 있는 기태를 향해 주먹을 강하게 날렸다. 로라는 악, 소리를 지르며 자리에 주저앉았고 동시에 지켜보고 있던 수정 역시 이쪽으로 달려왔다. 도헌의 주먹에 나가 떨어진 기태는 허망한 듯, 피식 웃음을 터뜨리며 아스팔트 바닥에 널브러졌다. 달려온 수정은 도헌의 가슴 팍을 주먹으로 내려치며 씩씩 댔다. “네가 뭔데 우리 오빠 때려! 너희들이 뭔데 우리 오빠 아프게 해!” “그만들 좀 해.” “……” “얘… 언제까지 괴롭힐 작정이냐고.” 도헌은 씩씩대며 놀라, 자리에 주저앉은 로라를 일으켰다. 그리곤 분노를 억누르며 로라의 어깨를 따스히 감쌌다. “다신 내 여자 친구 찾아와서… 무릎 꿇는 짓거리 따위 하지 마라.” “…….” “그 땐 한 대 때리는 걸로 안 그쳐.” “…….” “가자, 로라야.” 로라야. 쿵, 쿵, 쿵. 로라야, 하는 따스한 도헌의 음성에 이번엔 로라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기 시작했다. ‘로… 라야? 미… 미쳤나 봐!’ 벌겋게 달아오른 얼굴. 귀까지 화끈거렸다. 로라의 온 몸의 피가 빠르게 돌기 시작했다. 자신의 오른 손을 맞잡은 도헌에게까지 자신의 두근거림이 전해질 것만 같았다. “… 그만들 연기하시죠.” 그때, 널브러진 기태가 슬프게 미소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곤 휘청이며 자신을 부축하는 수정의 손을 뿌리쳤다. “연기… 그만 하라고, 이제.” “…….” “두 사람… 거짓말 하고 있잖아.” “…….” “나 때문에.” 기태의 말에 수정의 눈이 커졌다. 덩달아, 로라의 눈도 커지고 말았다. 로라는 흠칫 놀라며 도헌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도헌은 미동도 않았다. 굳은 얼굴로 그저 정면만 응시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까지… 거짓말까지 해가며… 나를 왜 밀어내려 하냐고.” “…….” “아직… 날, 자의적으론 밀어내지 못해.” “……” “구도헌씨까지 끌어들인 거잖아.” 휘청이는 기태를, 도헌이 바라보았다. 그리곤 피식, 낮은 미소를 입에 걸었다. 로라는 들켜버린 건가 싶어,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잡고 있는 도헌의 손을 더욱 쥐었다. 곧, 도헌이 입술을 열었다. “거짓말….” “구도발.” “왜 그렇게 생각하는 거지.” 도헌은 무채색의 얼굴로 기태를 응시하다 곧, 자신의 옆에서 떨고 있는 로라를 바라보았다. 그리곤 로라의 어깨를 쥐어 자신 쪽으로 돌렸다. 로라는 어, 하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희 잘 봐.” “…….” “내가 얼마나 얘를.” “…….” “사랑하는 지.” 순간이었다. 억, 소리도 로라가 내지 못 했다. 순식간에 도헌의 입술이 로라의 입술을 뜨겁게, 아주 진하게 빨아 들였다. * * * 오랜만입니다^^! 중단은 하기 싫었어요, 더디더라도 꼭 완결은 짓고 싶어 돌아왔습니다! 마지막까지, 우리 오구 커플 예쁘게 봐주셨으면 좋겠어요~
#12 필사모임 <쓸모있씀!> 열두 번째 카드
안녕하세요!! 제가 조오금 늦었습니다ㅜㅜ 이번주는 어쩐지 정신없이 지나갔어요. 하지만 필사없는 한주를 보낼 수는 없으니 호다닥 달려왔어여! 😃 여러분은 겨울 하면 뭐가 떠오르시나요 후후 저는 새하얀 눈이 떠오르는데요! 이 '새하얀 것'에 집중한 작가님이 있습니다. 바로 한강 작가님의 <흰>이라는 작품이에요. 작가는 흰것에 대해 '더럽혀지는 색깔'이자, '더럽혀지지 않는 색깔'이라고 말했어요. 그 모순적인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에 대해 이끌리셨다고 해요. 이전작인 <소년이 온다> 가 참혹과 어둠에서 빛과 존엄으로 가는 작품이라고 믿고 있기에, 더욱 '흰' 색깔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셨다고 합니다. 작가의 이런 시각이 참 인상 깊었어요. 그래서 요즘같은 겨울에 소개해드리고 싶어 <오늘의 문장>으로 가져와봅니다 ^^ 어느 추워진 아침 입술에서 처음으로 흰 입김이 새어나오고, 그것은 우리가 살아 있다는 증거. 우리 몸이 따뜻하다는 증거 차가운 공기가 캄캄한 허파 속으로 밀려들어와, 체온으로 덥혀져 하얀 날숨이 된다. 우리 생명이 희끗하고 분명한 형상으로 허공에 퍼져나가는 기적. 여러분은 이렇게 '계절'과 '색'과 관련하여 생가나는 시나 소설이 있으신가요? 전 겨울 하니 '설국'이라는 작품도 떠오르네요. 그리고 마지막으로, <흰> 이라는 작품이 시같은 소설이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소설같은 시, 시같은 소설. 혹시 추천해주실만한게 있을까요? 이자리를 빌어 추천을 부탁드려봅니다 😃 저도 하나 소개해드릴게요. 황정은 작가의 <백의 그림자> 시같은 소설이 읽고싶으신 분들께 소개해드릴게여!! 그럼 오늘도.. 여러분의 아름다운 필사의 흔적을 기다리겠습니다 ㅎㅎ 참여해주시는 모든 분들 기다릴게요!! 쓸모있씀 회원들을 위한 막간의 꿀팁 1 글씨 잘 쓰는 법 쓸모있씀 회원들을 위한 막간의 꿀팁 2 다양한 쓰기의 방법 오픈런 신규 참여신청
Chapter 51. 그놈을 뺏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로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눈물도 멈추질 않았다. “사랑…이라.” 사랑은 이렇게 헤플 수도, 아플 수도, 가벼울 수도, 별 것 아닐 수도 있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한데?” 도헌이 담배를 비벼 끄고 옆에 섰다. 로라의 표정을 살폈다. 흔들린 것인 가,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도헌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사랑…한다는데.” 그렇게 말하는 로라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아니,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도헌은 막막해져 왔다. 이제 선택은 로라의 몫이었다. 로라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도헌은 존중해주기로 했다. “누나.” 로라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자. 모기 밥…되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지만. “누나.” 로라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헌은 가까이 다가가 로라의 어깨를 감쌌다. “동정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로라의 목소리도 떨렸다. 도헌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했다. “동정이 아니라…” “내일…그 여자…만나서 물어보려고.” 로라는 뒤돌아선 채 엘리베이터 앞에 우두커니 섰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서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뭐라고…물어볼 건데.” “남자…친구랑…잘 되어 가고 있느냐고.” “두 사람이…사귄다는 건…확신하는 거냐.” "……" "그래서, 그 대답을 듣고나선 어쩔건데." 도헌의 물음에 로라는 스르륵, 주저앉았다.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려 버렸다. “더 묻지…말아줄래….” “…아.” “나…도 지금 뭘.…어떻게 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그렇게 주저앉은 채, 로라는 하염없이 고개만 숙이고 눈물을 흘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렸지만 로라는 오르지 못했다. 도헌 역시, 그런 로라의 뒤에서 로라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 문이 더 열렸고, 닫혔고를 반복했다. 몇몇의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지만 둘은, 움직일 수 없었다. 도헌은 자신의 셔츠를 벗어 로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뭐…야…흐읍.” “콧물은…닦지 마요…” * * * “헐. 오로라, 눈 왜 저래.” 로준은 아침밥을 먹다 말고 방에서 나오는 로라를 바라보았다. 얻어맞은 듯,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로라. 로준은 경악하며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 역시, 묵묵부답인 채 로라의 밥을 펐다. “누나, 밥 안 먹어요?” “…….” 대답도 않은 채, 현관을 나서는 로라였다. 도헌은 한숨을 내쉬며 로라의 뒤를 쫓았다. “누나.” “안 먹어.” 그러곤 신발을 신고 그대로 집을 나서버렸다. “너희 싸웠냐?” 싸웠냔 로준의 말에도 도헌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힘없이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린 로라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 거렸다. * * * 로라는 평소보다 한 시간 더 빨리 가게 문을 열었다. 불도 미처 켜지 못한 채, 로라는 어둑한 가게 안에 우두커니 섰다. “하…뭘 어디서부터…시작해야 할지를…모르겠다.” 얼이 빠진 얼굴로 로라는 카운터 앞에 앉았다. 밤새 얼마나 울었던 지, 퉁퉁 부은 눈은 떠지지가 않았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마음 한 편엔, 그래도, 라는 끈질긴 미련이 남아 있긴 했다. 그런 자신이 미워졌다. “…….” 로라는 어둑한 매장 안에서 노트북을 켜, 제일 먼저 그 여자의 SNS를 켰다. 밤새, 그 여자의 SNS를 달달 외울 정도로 살피고 또 살폈다. 그녀의 친구 목록은 기태의 친구 목록의 사람들과 겹치기까지 했다. “비참…하다, 오로라.” 남자 친구의 바람 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첫 번 째 여자의 SNS나 뒤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여자와 기태의 SNS를 뒤지면 뒤질수록 둘 사이가 연인 사이임이 확실해졌고, 또한 자신의 처지 역시 그의 ‘세컨드’임이 확실해졌다. 로라는 다시금 멈춘 듯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아…흡.” 믿음 때문이었을까, 그는 그렇지 않을 거란. 강한 믿음의 배신이라 그럴 까. 로라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원망해서도 안 되었지만, 그 여자가. 수정이란 그 여자가 너무도 밉고, 싫어졌다. “…아.” 그때. 그 여자의 SNS의 커버사진이 바뀌었다. “…….” 바뀐 여자의 커버 사진을 발견하곤 로라는 노트북을 그대로 덮어버렸다. 더는…그 여자에게…물어볼 필요조차 없어졌다. * * * “정리할 생각…없죠.” 바닷가에 나란히 선 기태와 수정. 어젯 밤의 사랑한단, 기태의 말을 수정은 더 캐묻지 않았다. “나는 그렇거든요.” “…….” “오빠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 “그렇다고 놓을 생각도 없어.” 수정은 단호했다. 나란히 바닷가에 서서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나, 오빨 정리할 마음도, 그럴 생각도,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거든.” “…….” “그 여자를 정리하든, 아님 그 여자도 안고 가든.” 수정의 말에, 기태는 그제야 수정을 돌아보았다. “난 너에게. 헤어지자고 몇 번을 얘기했다.” “…….” “그런데, 싫다고 한 건…너다.” 그게 중요한 것이냐, 되묻고 싶었지만 수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은 못 놓아요, 어쨌든. 그 여자…오빠 여자 친구 있다는 거, 알고 만나는 거예요?” 수정의 물음에 기태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나란 존재를 알고도…그 여자가 오빠 곁에 머물려고 할까요?” “머문다고 해서…그걸 사랑이라고 치부하는 너는…도대체, 무슨 꿍꿍이 인거냐.” “내가 말 할까요?” “나서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해.” “나란 존재를 알게 된다면 아마, 떠날 거야.” “…지금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너가 아니라 그 여자다.” 기태의 말에 수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휴대폰 카메라를 켜 나란히 서 있는 자신과 기태의 발 사진을 찍었다. “뭐해.” “여전히 우린.” “…….” “행복하다는 걸” “…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곧 다정한, 다정하게 보이는 두 사람의 발 사진을 수정은 자신의 SNS 커버 사진에 업로드 했다. 기태는 그런 수정의 SNS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나 그런 거 싫어 한다고 했다.” “오빠 얼굴 나온 것도 없고, 이름 한 글자도 언급된 것 없으니 안심해.” 기태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곤 돌아섰다. “어디가요!” “돌아가자, 이제.” * * * “누나…오호라 누나.” 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트북을 덮고서 두 시간이 지나도록 오픈도 하지 않은 채 엎드려만 있던 로라. “들어…가도 돼요?” 입구에서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가도 되냔 도헌의 말에 로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지끈 거렸다. “…….” “헐…누나. 괜찮아?” 두 눈두덩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열난다. 안 되겠다. 문 닫고 병원부터 가자.” 도헌은 싸온 죽을 카운터 앞에 놓곤 로라의 이마를 짚었다. 불 덩이었다. “언젠간…이렇게 앓고 지나가야 할…거니까. 놔둬, 그냥.” “…누나.” “병원 가서 약 먹고 주사 맞는 다고해서…나아질 것 아니잖아.” “그래도…너무 힘들어 보여요.” “응…힘들어…너무.” “…….” “내 살점들을 다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아.” “…누나.” “차라리…내 머릿 속을 다 도려내주었음 좋겠어. 이 마음도.” “…….” “그 사람에 대한…모든 기억을…다…도려내 주었음 좋겠어.” “…….” “그래 준다면…그럴 수만 있다면…어떤 고통도…감내 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라의 말에 도헌은 살며시 로라를 끌어안아 주었다. 너무도 아파하는 로라를 보니, 도헌의 마음도 아파오는 듯했다. “미안…해요, 누나…내가 끝까지…말렸어야 했는데.” 결국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고, 역시나 로라는 너무도 아파했다. 모든 걸 예상했던 도헌이었기에 이렇게 아파하는 로라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미안…은 무슨…. 왜 네가 미안하냐. 됐다.” 하고서 로라는 도헌을 밀어냈다. “그…여자한텐…물어보기로 했어요? 그래서…어떻게 할 건데요. 나도 알아야겠어. 알고 있어야겠어." “…….” “하…. 누나. 누나가 많이 힘들고 어려울 거라는 거 아는데.” “…구 여친이든 어쨌든 간에. 그 새끼는. 아니다, 누나" "알아. 아니라는 것,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러니…" " ……" "보채지 마." 로라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꿈만 같고 믿기지않았다. 갑작스레 그에게 이별통보를 받는 것이, 차라리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사랑했던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진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우선 몸이 많이 상한 것 같으니, 문닫고 집으로 …" 그때였다. 로라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태였다. "누나." 로라는 기태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대로 휴대폰을 엎어두곤 다시금 고개를 숙여버렸다. 곧, 벨소리는 끊겼다. 괴로워하는 로라를 바라보며 도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못할 것 같음, 내가 얘기해 줄게." " ……" "내가 대신 전화 받아서 다 알아버렸다고, 다 알게 되어버렸다고 …" 그때, 다시금 로라의 휴대폰이 울렸고 로라는 힘없이 전화를 받았다. 착, 가라앉은 로라의 목소리. "네, 선생님." "로라씨, 어디 아파요? 어제보다 목소리가 더 안좋아요." 이 순간에도, 기태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이 순간에도 로라는 이 남자가 그 여자와 함께 있을거란 생각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전화로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네. 몸살이 걸린 것 같아서." "어떡해요 그럼. 나 지금 올라가고 있으니 병원이라도 가 있을래요?" 밤새, 그 여자와 뒹굴었을 그다. 로라는 자꾸만 이 남자가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마음이 미어져왔다. 자신을, 여전히, 농락하고 있는 그였다. 로라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네, 그럼 그렇게 할테니 얼른 오세요, 선생님." "바로 병원으로 갈테니 병원 이름만 알려줘요." "네 …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생님." 그렇게 말하고서 로라는 전화를 끊었다. 그에게 따지기는 커녕, 기다리겠단 말을 한 로라에게 순간적으로 화가난 도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호라, 너 진짜! 그 자식이랑 갈때까지 가보겠다, 이거냐?" 그러자, 로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금 질끈 묶으며 파우치를 꺼냈다. "나라고 못할건 없잖아." "뭐?" "내 사랑을, 이 마음을 우습게 보고 짓밟은 대가." " …… " "나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 나 이렇게 아픈 거, 내 아픈 거에 반의 반만이라도 돌려줘야겠어." "누나. 내가 그 놈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세컨드로 남을거야. 원하는게 그거라면." "누나." "뺏을 거다, 그리고 아프게 짓밟을 거야." 로라는 결심한듯 붉은색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세상에서 애인있는 사람 건드리는 년, 놈들이 제일 쓰레기라는 거 알지만. 어쩔 수 없어. 이젠 내가 그 쓰레기가 되어야겠다." * * * 로라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인가요.
<Writing Club> 일기/에세이 글 쓰기 모임 #4
어김없이 찾아온~ 일기/에세이 글 쓰기 모임 네 번째 시간! 다들 월요일 잘 보내고 계신가요~? 월요일인데 춥기까지 하니까 사람이 굼떠지는 것 같아요. 이제 정말 누가봐도 겨울인 느낌이 드네요. 항상 습관처럼 목도리를 챙기게 되었습니다. 언제든 새롭게 참여하시는 분도 **환영 환영**입니다! 이 카드를 처음 보신다거나 글쓰기 톡방에 포함이 안되어있으신 분들도 댓글이나 새로운 카드로 하루를 정리하는 일기 글을 써보세요! 제가 던진 주제도 좋고, 특정 주제를 떠나 하루의 감상을 표현하는 글도 좋습니다. 한번 시작하기 어려울 수 있지만 댓글 창이나 카드에 단 한문장만이라도 써봅시다~! 기록의 힘을 믿어봐요! 네 번째 시간을 함께 하기에 앞서서, 모임의 간단한 방향을 알려드리겠습니다! +노트북으로 글을 작성하실 분들은 빙글에 어플리케이션 뿐 아니라, 컴퓨터로 접속이 가능한 웹 버전이 있기 때문에 웹버전 빙글을 켜서 글 작성을 하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이번 네 번째 주제는 <내가 아는 어떤 사람에 대해> 입니다. 가끔 아니 사실은 자주 타인에 대해 쓰게 되곤 합니다. 글을 쓰고 싶은 사람이 가족일 수도, 친구일수도 또는 연인일 수도 있겠죠. 아니면 동경하는 사람? 좋아하는 가수? 연예인? 선생님? 아예 다른 사람이 될 수도 있을것이고요! 저와 함께 글을 쓰는 많은 사람들은 나름 자신만의 뮤즈가 있더라고요! 여러분도 뭔가 뮤즈라고 할만한 분이 계신가요? 오늘은 그냥 나 말고 어떤 사람에 대한 얘기나 어떤 사람이 얽힌 글을 써보고 싶어서 이런 주제를 선택하게 되었어요 :) 오늘 가져와본 글은 가수이자 현재는 작가로, 또 책 관련 팟캐스트를 운영 중인 요조의 글을 가져왔습니다. 동생에 대한 글이에요. 글이 길이가 좀 있는데 다 가져와야하는 글입니다! 쓴 글은 이 곳의 댓글로 작성해주셔도 되고, 아니면 또 다른 카드로 작성해주셔도 됩니다! + 다른 주제여도 좋습니다! @ccstar81 @Mmark @RedNADA @jessie0905 @qudtls0628 @ckoh3142 @sekir @leejs307 @allkcklow106 @moonlitsalon @syp2 @impereal12 @h162101 @syhee1973 @card2 @virgincoke @supia3587 @toystore @item84 @greentea6905 @hheeyo @chj4254 @ebbal @su0su @ct7809 @tan0123 @angksdbdp @alone81 @kooew @AloneTalk @petaterra @fabrics @applecolor @beartank4444 @serengeti73 @lovablewolf @sweet848 @hhyy9004 @jmano @doTTob @foxkkykhk @yejin3039 @silkway @okjokj19 자! 지금부터 같이 써봅시다! 다른 주제로 쓰고 싶으시면 쓰셔도 되고, 시간이 맞지 않으셨다면 더 후에 쓰셔서 올려주셔도 됩니다! ----------------------------------- 일기/에세이/글쓰기 모임에 참여는 언제나 환영입니다~!~!~! 들어오셔서 메시지를 간단하게 남겨주셔야 톡방이 나의 톡방으로 설정됩니다! https://vin.gl/t/t:5b88052jx4?wsrc=link
사랑은 어떤 화학적 성질을 가지고 있을까?
몸과 뇌에는 호르몬과 신경전달물질을 포함한 여러 가지 화학물질이 있다. 이것이 모여 사람의 감정을 조성한다. 사랑의 두가지 중요한 부분은 끌림과 애착 체계에 영향을 주며 각각 다른 화학 물질의 조합으로 이루어진다. 사랑의 단계에 따라 뇌의 특정 부분이 활성화된다. 뇌의 좌뇌와 우뇌는 각각 다른 역할을 맡고 있다. 우뇌는 감정, 창의력, 상상력, 총체적 사고를 담당하고, 좌뇌는 논리, 추리, 계획, 분석적 사고를 담당한다. 사랑은 우뇌가 담당한다고 알려져 있다. 뇌 영상학은 우리가 로맨틱한 사랑을 경험할 때 뇌의 두 부분이 활성화된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첫 번째는 본능과도 관련있는 내측 섬엽에 있는 병소들로 구성되어있고, 두 번째는 행복한 감정을 생산하는 전대상피질이다. 뇌의 이 부분들 때문에 사랑에 빠진 감정을 행복하고 자연스러운 일로 느낀다. 사랑 초기 단계에는 뇌의 다른 부분들이 활성화된다. 이곳에서는 도파민이 넘쳐나서 꼭 무언가에 취한 듯한 기분이 들게 한다. 도파민은 ‘러브 드러그’라고도 불린다. 마약처럼 중독성이 있기 때문이다. 사랑의 초기 단계는 열중과 욕망, 갈망으로 가득하다. 성욕은 성호르몬인 에스트로겐과 테스토스테론에 영향을 받는다. 갈망은 몸 전체와 연관이 있는데, 몸 전체에서 투쟁 ‐ 도피 반응에 연관된 화학 물질인 아드레날린(에피네프린)이 분비되기 때문이다. 심장 박동 수와 각성을 높이고 동공을 확장시키며 땀샘을 자극하는 등의 생리 반응이 일어난다. 로맨틱한 사랑 앞에서는 가장 중요한 세 가지 신경흥분 전달물질인 세로토닌ㆍ도파민ㆍ노르에피네프린이 증가한다. 세로토닌이 증가하면서 홀린 듯한 기분을 느낀다. 이때 도파민도 생성되는데, 감정과 사고 통합에 영향을 주고 성호르몬을 내뿜는 시상하부를 자극한다. 도파민은 흥분, 새로움, 위험 부담 등으로 촉발되기도 한다. 도파민과 노르에피네프린은 쾌감과 중독성 있는 감정을 만들어낸다. 사랑에 빠진 단계가 지나면 파트너와의 관계에 느긋함과 편안함을 느낀다. 안정기에 접어들면, 옥시토신이나 바소프레신 같은 다른 뇌 화학물질이 장악한다. ‘포옹 호르몬’이라는 옥시토신은 친밀감을 느끼게 해준다. 섹스나 스킨십(키스ㆍ쓰다듬기ㆍ포옹 등)을 겪으면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파트너와 대화할 때도 옥시토신이 분비된다. 연애를 오래 지속하기 위해 대화가 중요한 이유다. 옥시토신은 연인 관계에서 애착을 평생 유지하기 위한 핵심 요소다. ‘일부일처 호르몬’이라고 알려진 바소프레신은 서로에게 충실할 수 있게 돕는다. 동물 실험 중에 바소프레신을 억제하자 커플이 서로에게 덜 전념했다. 사랑이 생물학적 요소로 움직이는 감정이라는 사실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양한 화학물질은 지금 당신이 연애의 어느 단계를 경험하느냐에 따라 달리 구성된다. 연애 초기에는 세로토닌과 도파민처럼 기분을 좋게 만드는 화학물질이 지배하고, 사랑이 깊어지는 후기에는 유대감과 친밀감, 신뢰 등이 쌓이면서 뇌에 옥시토신과 바소프레신이 분비된다. 사랑은 아주 복잡한 주제지만, 과학을 통해 사랑에 대한 유용한 정보를 얻을 수 있을 뿐 아니라 진정으로 사랑하는 관계를 어떻게 오래 지속할지도 알 수 있다. 사랑에 연관된 모든 신경화학물질의 이름을 기억할 필요는 없지만, 당신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인지한다면 분명 도움이 된다. 이 물질들이 번갈아 분비되지 않는다면 이성적이고 논리적으로 생각하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최대한 감정에 휘둘리지 않는다면 더 현명하게 연애할 수 있을 것이다. ※ 위 콘텐츠는 《또, 괜찮지 않은 연애를 시작했습니다》에서 발췌 · 편집한 내용입니다.
날짜 없음
'날짜 없음' / 장은진 저 (지극히 주관적인 제 생각을 쓴 글입니다.) 그게 온다고 한다. 179번부터 0번까지 하나씩 줄어드는 숫자들. 끝을 향해 달려갈수록 숫자의 크기는 점점 줄어든다. 시작인 179도, 끝인 0도, 그게 온다고 말한다. 과연 그건 정말 왔을까? 와서 세계를, 지구를, 도시를, 회색 눈들을, 그 속에 누워있는 시체들을, 컨테이너 박스를, 반을, 그를, 나를, 집어삼켜버렸을까. 어느 날 갑자기 붉은 눈이 내렸다. 사람들은 저마다 붉은 눈의 이유에 대해 뜬구름 같은 해답과 소문들을 내놓지만 진실은 알 수 없다. 시간이 지나면서 붉은 눈은 회색으로 바뀐다. 하늘에는 때가 낀 양말과 더러워진 털을 가진 양 떼 같은 회색 구름이 떠 있고 회색 눈이 끝없이 쏟아진다. 오늘도, 내일도, 낮에도, 밤에도 회색 눈은 회색 구름에서 계속 떨어져 내린다. 늘 회색 구름과 회색 눈에 덮여있는 도시, 회색시는 낮과 밤이 구분되지 않는다. 1년이 넘도록 쏟아진 눈에 회색시의 기능들은 마비되어버리고 불길한 소문들만 알음알음 회색 눈을 타고 퍼진다. 해를 보지 못한 사람들은 점점 피골이 상접하고 피부색마저 회색으로 변한다. 회색인이라 불리는 그들은 안전한 곳을 찾기 위해 줄줄이 회색시를 떠난다. 누구도 돌아온 적 없고 목적지가 어딘지도 모르는 회색인들의 행렬. 회색시에는 세 종류의 사람이 생긴다. 행렬을 따라 어딘지 모를 곳으로 떠나는 회색인, 끊이지 않는 회색 눈과 보이지 않는 미래에 스스로 죽음을 택하는 사람, 평범한 생활을 이어가려 노력하는 사람. 세 번째 사람에 속하는 주인공 해인과 그녀의 애인인 그, 그리고 그의 반려견 반이 소설의 주요 등장인물이다. 회색시에는 한 가지 소문이 퍼져 있다. [그게 온다고 한다]는 소문. 그게 무엇인지는 소설 내내 나오지 않는다. 하지만 179부터 0으로 줄어드는 소설 속 챕터(?)별 숫자들과 그게 오면 모든 것이 끝나버릴 것처럼 이야기하는 인물들의 대화를 보면 그게 뭔지 어느 정도 짐작은 된다. 지구가, 적어도 인류 문명이 끝나버릴 만한 거대한 자연재해, 혹은 인간의 멸망을 일으킬 만한 사건일 것이다. 소설 속에서 우리는 의사인 주인공 해인과 구둣방을 운영하는 그녀의 남자 친구 그(이름이 나오지 않는다), 그리고 그의 반려견 반이 컨테이너 박스 속에서 하루를 보내는 이야기를 엿볼 수 있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하루다. 바로 다음 날, 그게 온다는 이야기가 파다하다. 그 날 하루 동안 많은 사람들이 그의 구둣방인 컨테이너 박스의 문을 두드린다. 근처 분식집 아주머니인 또와 아주머니, 맡긴 구두를 찾으러 온 노인, 우산 장사를 하는 그의 친구, 회색인의 행렬을 따라갔다가 반죽음 상태로 돌아온, 이미 회색인이 되어 버린 기타 리페어샵을 운영하던 진수 등등. 이 책은 담담하게 그것이 오기 전 하루 동안 해인과 그와 반과 그들이 있는 컨테이너 박스를 방문하는 여러 방문객들의 이야기를 보여준다. 일반적인 디스토피아, 혹은 아포칼립스를 다룬 소설의 강점으로는 무너져가는 세계를 구하려는 주인공의 분투와 그 속에서 살아남으려는 사람들의 처절함, 생존자들 간의 싸움과 다툼에서 생겨나는 긴장감을 들 수 있겠지만 이 소설은 전혀 다르다. 이 소설은 끝을 앞에 둔 소시민들의 모습을 담담하게 그린다. 세계를 구하겠다는 야심 찬 주인공도 없고 처절하게 살아남으려 남을 약탈하고 죽이는 인물도 없으며 손에 땀을 쥐게 만드는 사건도 딱히 없다. 또와 아주머니는 곧 다가올 끝을 외면하며 하루하루 손님 없는 분식집을 운영할 뿐이고 구두를 찾으러 왔다는 노인은 내일이면 찾아올 그것에 대해 체념하고 자신의 죽음을 넌지시 암시한 채 구두를 찾지도 않고 돌아간다. 홍 여사님은 두 달만에 찾아와 전과 다름없이 폐지와 폐품을 받아 손수레를 끌고 돌아가고 유나라는 여고생은 학교를 안 가도 돼서 좋다고 말하면서도 수의사가 될 것이라며 오지 않을지도 모르는 미래를 이야기한다. 주인공인 해인과 그녀의 연인인 그도 마찬가지다. 내일이면 모든 게 사라질지도 모르는 오늘, 그들은 평범한 하루를 보낸다. 늘 먹던 김치찌개를 끓여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고, 시디플레이어로 음악을 들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반을 쓰다듬으면서. 그 지점이 좋았다. 곧 다가올 마지막에 대한 절망과 체념과 포기로 얼룩진 인물들이 아니라는 점이. 내일이면 사라질지도 모를 세계와 회색 눈이라는 절망 속에서 퍼지는 사람 간의 당연한 호의와 공감의 모습도 인상적이었다. 내일이 세상의 마지막이라도 인간으로서 당연히 가져야 할 가치들, 사랑, 공감, 연민이 남아 있는 인물들의 모습은 뭉클하기도 했다. 반의 기도를 막은 누런 콧물을 직접 입으로 빨아내 반을 살려내고, 숨이 꺼져가는 진수를 살리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해인과 그의 모습. 보이지 않는 홍 여사를 걱정하던 구두를 찾으러 온 노인과 홍 여사가 늘 고맙게 생각한다며 해인에게 쥐어 준 곶감 몇 개. 고층 빌딩에서 뛰어내린 죽은 연인의 놓쳐버린 손을 다시 수습해 이어주는 해인. 유나와 해인에게 신을 수 있을지 없을지 알 수 없는 직접 만든 단화와 부츠를 선물한 그. 몇 시간 후면 이 모든 게 사라질 회색 눈뿐인 세상에 조그맣고 또 커다란 행동과 언어들이 남아 있다는 점이 기뻤다. 해인의 가족들, 엄마, 아빠, 여동생은 회색인들의 행렬을 따라 떠나기로 하고 그 전날 해인과 마지막 파티를 한다. 해인의 아빠는 그와 함께 남겠다는 해인에게 그가 무슨 일을 하는지, 돈을 얼마나 버는지, 나이는 몇이고 부모님은 무슨 일을 하시는지 묻지 않는다. 그를 많이 좋아하는지, 함께 있으면 안 무섭겠는지를 묻고 그럼 됐다고 말한다. 아이러니하다. 온전한 세상일 때는 사랑만으로 함께 있을 수 없다. 연인의 직업이 무엇인지, 함께 살 집은 있는지, 부모의 직업은 무엇인지, 나이는 몇인지, 아이는 없는지, 결혼한 적은 없는지. 둘의 사랑에 온갖 요인들이 끼어든다. 부모와 가족의 반대, 친구들의 만류, 주변의 시선 등등. 사랑해서 결혼한다는 지극히 당연한 이야기가 당연해지지 않는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고 싶다는 그 당연한 이야기는 온통 회색 눈으로 뒤덮여 거의 모든 기능이 마비된, 하루하루 사람들이 죽어나가고 머지않아 모든 게 사라질 당연하지 않은 세상이 되고 나서야 당연한 이야기가 된다. 서로를 사랑하고, 그것만으로 함께 살 수 있는 세상은 사실 당연하지 않은 세상인 걸까. 시종일관 조용하고 고요하다. 그렇다고 슬프거나 침통하거나 체념과 포기의 기운이 감도는 것도 아니다. 담담히 보여줄 뿐이다. 내일이면 모든 게 없어질 세상에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전기가 나가고, 불이 꺼지고, 온몸이 덜덜 떨리는 추위 속에서 서로를 꽉 껴안은 해인과 그가 서로를 놓치지 않았기를. 그래서 다음과 같이 이어지기를.  -1 그것은 오지 않았다. 소설 속 한 문장 "많이 좋아하니?" "네. 많이요." "같이 있으면 설레니?" "네." "함께라면 안 무섭겠니?" 나는 확신 있게 고개를 끄덕였다. "됐다. 그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