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hapter 51. 그놈을 뺏겠습니다
전화를 끊었다. 로라는 깊은 생각에 잠겼다. 눈물도 멈추질 않았다.
“사랑…이라.”
사랑은 이렇게 헤플 수도, 아플 수도, 가벼울 수도, 별 것 아닐 수도 있었다. 모르는 것이 아니었다.
“사랑…한데?”
도헌이 담배를 비벼 끄고 옆에 섰다. 로라의 표정을 살폈다. 흔들린 것인 가, 흔들리고 있는 것인가. 도헌의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사랑…한다는데.”
그렇게 말하는 로라의 목소리가 힘이 없었다. 아니, 힘이 있을 리가 없었다. 알면서도 도헌은 막막해져 왔다. 이제 선택은 로라의 몫이었다.
로라가 어떤 선택을 내리든 도헌은 존중해주기로 했다.
“누나.”
로라는 더 말을 잇지 않았다. 입을 꾹 다물었다. 그러곤 결심한 듯 자리에서 일어났다.
“들어가자. 모기 밥…되겠다.”
아무렇지 않은 척, 해보지만.
“누나.”
로라의 다리는 후들거리고 있었다. 가냘픈 어깨도 사정없이 흔들리고 있었다.
도헌은 가까이 다가가 로라의 어깨를 감쌌다.
“동정하지 마. 난 괜찮으니까.”
그렇게 말하는 로라의 목소리도 떨렸다. 도헌은 화가 치밀어 오르는 듯 했다.
“동정이 아니라…”
“내일…그 여자…만나서 물어보려고.”
로라는 뒤돌아선 채 엘리베이터 앞에 우두커니 섰다. 눈물이 자꾸만 흘러서 좀처럼 진정이 되질 않았다.
“뭐라고…물어볼 건데.”
“남자…친구랑…잘 되어 가고 있느냐고.”
“두 사람이…사귄다는 건…확신하는 거냐.”
"……"
"그래서, 그 대답을 듣고나선 어쩔건데."
도헌의 물음에 로라는 스르륵, 주저앉았다. 두 다리에 힘이 탁 풀려 버렸다.
“더 묻지…말아줄래….”
“…아.”
“나…도 지금 뭘.…어떻게 해야할지 하나도 모르겠거든."
그렇게 주저앉은 채, 로라는 하염없이 고개만 숙이고 눈물을 흘렀다. 엘리베이터가 도착했고 문이 열렸지만 로라는 오르지 못했다. 도헌 역시, 그런 로라의 뒤에서 로라를 바라보고 서 있을 뿐이었다.
그렇게 몇 번이 문이 더 열렸고, 닫혔고를 반복했다. 몇몇의 사람들이 타고 내리고를 반복했지만 둘은, 움직일 수 없었다.
도헌은 자신의 셔츠를 벗어 로라의 어깨에 걸쳐 주었다.
“뭐…야…흐읍.”
“콧물은…닦지 마요…”
* * *
“헐. 오로라, 눈 왜 저래.”
로준은 아침밥을 먹다 말고 방에서 나오는 로라를 바라보았다. 얻어맞은 듯, 두 눈이 퉁퉁 부어 있는 로라. 로준은 경악하며 도헌을 바라보았다.
도헌 역시, 묵묵부답인 채 로라의 밥을 펐다.
“누나, 밥 안 먹어요?”
“…….”
대답도 않은 채, 현관을 나서는 로라였다. 도헌은 한숨을 내쉬며 로라의 뒤를 쫓았다.
“누나.”
“안 먹어.”
그러곤 신발을 신고 그대로 집을 나서버렸다.
“너희 싸웠냐?”
싸웠냔 로준의 말에도 도헌은 아무런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두 눈이 퉁퉁 부은 채 힘없이 현관문을 닫고 나가버린 로라의 모습이, 자꾸만, 눈에, 아른 거렸다.
* * *
로라는 평소보다 한 시간 더 빨리 가게 문을 열었다. 불도 미처 켜지 못한 채, 로라는 어둑한 가게 안에 우두커니 섰다.
“하…뭘 어디서부터…시작해야 할지를…모르겠다.”
얼이 빠진 얼굴로 로라는 카운터 앞에 앉았다. 밤새 얼마나 울었던 지, 퉁퉁 부은 눈은 떠지지가 않았다. 참담한 심정이었다.
마음 한 편엔, 그래도, 라는 끈질긴 미련이 남아 있긴 했다. 그런 자신이 미워졌다.
“…….”
로라는 어둑한 매장 안에서 노트북을 켜, 제일 먼저 그 여자의 SNS를 켰다.
밤새, 그 여자의 SNS를 달달 외울 정도로 살피고 또 살폈다. 그녀의 친구 목록은 기태의 친구 목록의 사람들과 겹치기까지 했다.
“비참…하다, 오로라.”
남자 친구의 바람 난, 아니 정확히 말하면 첫 번 째 여자의 SNS나 뒤지고 있는 자신의 모습이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그 여자와 기태의 SNS를 뒤지면 뒤질수록 둘 사이가 연인 사이임이 확실해졌고, 또한 자신의 처지 역시 그의 ‘세컨드’임이 확실해졌다.
로라는 다시금 멈춘 듯한 눈물이, 흐르고 있었다.
“하아…흡.”
믿음 때문이었을까, 그는 그렇지 않을 거란. 강한 믿음의 배신이라 그럴 까.
로라의 심장은 갈기갈기 찢기는 기분이었다. 원망해서도 안 되었지만, 그 여자가. 수정이란 그 여자가 너무도 밉고, 싫어졌다.
“…아.”
그때. 그 여자의 SNS의 커버사진이 바뀌었다.
“…….”
바뀐 여자의 커버 사진을 발견하곤 로라는 노트북을 그대로 덮어버렸다. 더는…그 여자에게…물어볼 필요조차 없어졌다.
* * *
“정리할 생각…없죠.”
바닷가에 나란히 선 기태와 수정. 어젯 밤의 사랑한단, 기태의 말을 수정은 더 캐묻지 않았다.
“나는 그렇거든요.”
“…….”
“오빠를 다른 사람과 공유할 생각은 추호도 없지만.”
“…….”
“그렇다고 놓을 생각도 없어.”
수정은 단호했다. 나란히 바닷가에 서서 동트는 하늘을 바라보았다.
“아직은 나, 오빨 정리할 마음도, 그럴 생각도, 그럴 준비도 되어 있지 않거든.”
“…….”
“그 여자를 정리하든, 아님 그 여자도 안고 가든.”
수정의 말에, 기태는 그제야 수정을 돌아보았다.
“난 너에게. 헤어지자고 몇 번을 얘기했다.”
“…….”
“그런데, 싫다고 한 건…너다.”
그게 중요한 것이냐, 되묻고 싶었지만 수정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지금은 못 놓아요, 어쨌든. 그 여자…오빠 여자 친구 있다는 거, 알고 만나는 거예요?”
수정의 물음에 기태는 머리가 지끈거려 왔다.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나란 존재를 알고도…그 여자가 오빠 곁에 머물려고 할까요?”
“머문다고 해서…그걸 사랑이라고 치부하는 너는…도대체, 무슨 꿍꿍이 인거냐.”
“내가 말 할까요?”
“나서지 마라. 내가 알아서 해.”
“나란 존재를 알게 된다면 아마, 떠날 거야.”
“…지금 내가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는 사람은 너가 아니라 그 여자다.”
기태의 말에 수정은 눈물이 그렁그렁 한 채,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곤 휴대폰 카메라를 켜 나란히 서 있는 자신과 기태의 발 사진을 찍었다.
“뭐해.”
“여전히 우린.”
“…….”
“행복하다는 걸”
“…뭐?”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 주려고.”
곧 다정한, 다정하게 보이는 두 사람의 발 사진을 수정은 자신의 SNS 커버 사진에 업로드 했다. 기태는 그런 수정의 SNS를 빤히 내려다보았다.
“나 그런 거 싫어 한다고 했다.”
“오빠 얼굴 나온 것도 없고, 이름 한 글자도 언급된 것 없으니 안심해.”
기태는 주머니에 손을 푹 찔러 넣곤 돌아섰다.
“어디가요!”
“돌아가자, 이제.”
* * *
“누나…오호라 누나.”
도헌의 목소리가 들렸다. 노트북을 덮고서 두 시간이 지나도록 오픈도 하지 않은 채 엎드려만 있던 로라.
“들어…가도 돼요?”
입구에서 도헌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 가도 되냔 도헌의 말에 로라는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머리가 지끈지끈 거렸다.
“…….”
“헐…누나. 괜찮아?”
두 눈두덩이 빨갛게 부어올라 있었다. 눈도 뜨지 못한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있었다.
“열난다. 안 되겠다. 문 닫고 병원부터 가자.”
도헌은 싸온 죽을 카운터 앞에 놓곤 로라의 이마를 짚었다. 불 덩이었다.
“언젠간…이렇게 앓고 지나가야 할…거니까. 놔둬, 그냥.”
“…누나.”
“병원 가서 약 먹고 주사 맞는 다고해서…나아질 것 아니잖아.”
“그래도…너무 힘들어 보여요.”
“응…힘들어…너무.”
“…….”
“내 살점들을 다 칼로 도려내는 것 같아.”
“…누나.”
“차라리…내 머릿 속을 다 도려내주었음 좋겠어. 이 마음도.”
“…….”
“그 사람에 대한…모든 기억을…다…도려내 주었음 좋겠어.”
“…….”
“그래 준다면…그럴 수만 있다면…어떤 고통도…감내 할 수 있을 것 같다.”
로라의 말에 도헌은 살며시 로라를 끌어안아 주었다. 너무도 아파하는 로라를 보니, 도헌의 마음도 아파오는 듯했다.
“미안…해요, 누나…내가 끝까지…말렸어야 했는데.”
결국 우려했던 것이 현실이 되고 말았고, 역시나 로라는 너무도 아파했다. 모든 걸 예상했던 도헌이었기에 이렇게 아파하는 로라가 자신의 탓인 것만 같아, 마음이 불편해졌다.
“미안…은 무슨…. 왜 네가 미안하냐. 됐다.”
하고서 로라는 도헌을 밀어냈다.
“그…여자한텐…물어보기로 했어요? 그래서…어떻게 할 건데요. 나도 알아야겠어. 알고 있어야겠어."
“…….”
“하…. 누나. 누나가 많이 힘들고 어려울 거라는 거 아는데.”
“…구 여친이든 어쨌든 간에. 그 새끼는. 아니다, 누나"
"알아. 아니라는 것, 너보다 내가 더 잘 알아. 그러니…"
" ……"
"보채지 마."
로라는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여전히 꿈만 같고 믿기지않았다. 갑작스레 그에게 이별통보를 받는 것이, 차라리 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이토록 사랑했던 그를 미워하고 저주하진 않아도 되는 것이니까.
"우선 몸이 많이 상한 것 같으니, 문닫고 집으로 …"
그때였다. 로라의 휴대폰이 울렸다.
기태였다.
"누나."
로라는 기태에게서 걸려온 전화를 받지 못했다. 그대로 휴대폰을 엎어두곤 다시금 고개를 숙여버렸다.
곧, 벨소리는 끊겼다. 괴로워하는 로라를 바라보며 도헌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못할 것 같음, 내가 얘기해 줄게."
" ……"
"내가 대신 전화 받아서 다 알아버렸다고, 다 알게 되어버렸다고 …"
그때, 다시금 로라의 휴대폰이 울렸고 로라는 힘없이 전화를 받았다. 착, 가라앉은 로라의 목소리.
"네, 선생님."
"로라씨, 어디 아파요? 어제보다 목소리가 더 안좋아요."
이 순간에도, 기태가 자신을 걱정해주고 있는 이 순간에도 로라는 이 남자가 그 여자와 함께 있을거란 생각에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당장이라도 전화로 따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다. 하지만.
"네. 몸살이 걸린 것 같아서."
"어떡해요 그럼. 나 지금 올라가고 있으니 병원이라도 가 있을래요?"
밤새, 그 여자와 뒹굴었을 그다. 로라는 자꾸만 이 남자가 그 여자와 함께 있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져 마음이 미어져왔다. 자신을, 여전히, 농락하고 있는 그였다.
로라는 두 눈을 질끈 감고 입술을 달싹였다.
"네, 그럼 그렇게 할테니 얼른 오세요, 선생님."
"바로 병원으로 갈테니 병원 이름만 알려줘요."
"네 … 기다리고 있을게요. 선생님."
그렇게 말하고서 로라는 전화를 끊었다.
그에게 따지기는 커녕, 기다리겠단 말을 한 로라에게 순간적으로 화가난 도헌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오호라, 너 진짜! 그 자식이랑 갈때까지 가보겠다, 이거냐?"
그러자, 로라는 헝클어진 머리를 다시금 질끈 묶으며 파우치를 꺼냈다.
"나라고 못할건 없잖아."
"뭐?"
"내 사랑을, 이 마음을 우습게 보고 짓밟은 대가."
" …… "
"나도 그냥은 못 넘어가겠다. 나 이렇게 아픈 거, 내 아픈 거에 반의 반만이라도 돌려줘야겠어."
"누나. 내가 그 놈 만나지 말라고 했잖아!"
"세컨드로 남을거야. 원하는게 그거라면."
"누나."
"뺏을 거다, 그리고 아프게 짓밟을 거야."
로라는 결심한듯 붉은색 립스틱을 꺼내 발랐다.
"세상에서 애인있는 사람 건드리는 년, 놈들이 제일 쓰레기라는 거 알지만. 어쩔 수 없어. 이젠 내가 그 쓰레기가 되어야겠다."
* * * 로라의 복수가 시작되는 것인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