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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팀팩 맞은 나치


제2차 세계대전 때 군인들이 스팀팩을 맞고 싸웠다? 맞는 말이다. 그런데 그 스팀팩 이름이 뭘까? 이 또한 주말 특집.

답변은 어떻게 보면 쉽다. 우리에게 친숙한 명칭 히로뽕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우연히 발견/발명한(참조 1) 이 마약, 메스엠피타민(methamphetamine)은 1900년대 초 서유럽과 미국에도 제조법이 퍼진다. 미국은 Benzedrine이라는 이름으로, 독일은 Pervitin이라는 이름이었다. 다만 이 링크 걸린 글의 주제는 나치의 마약 사용이다.

이 Pervitin은 1939년 당시 독일에서 처방 없이 아무나 일종의 각성제로 살 수 있었으며, 심지어 초컬릿에 섞여서 영양식품으로 판매되기도 했었다. 독일 내 제조사인 Temmler는 원래 코카콜라의 대용품을 만들려고 했었는데 결과는 히로뽕. 수요자는 거의 모든 국민이었다. 노동자는 물론 애새끼(…) 때문에 힘든 어머니들, 시인, 나치당 당수(…참조 2)에 이르기까지 인기가 드높았다.
그런데 친구들은 나치가 카페인을 싫어했음을 이미 알고 계실 것이다(참조 3). 독일에게는 역시 커피보다 수 백 배는 더 강력한 각성제가 필요했었다. 유럽을 점령해야 하니까.

그래서 전쟁 초기, 폴란드와 프랑스 전선에서부터 독일은 병사들에게 Pervitin을 투여한다. 스팀팩 맞은 군인들은 사흘을 쉬지도 않고 행군했고, 두려움도 없었으며, 배고픔과 피곤함도 몰랐다. 그야말로 전격전을 펼칠 수 있었던 것. 말 그대로 전격전은 약빨이었다. (그러니 전격전의 전설을 믿지 맙시다. 응?) 여담이지만 이쯤 되면 울펜스타인 게임의 나치 괴물들이 가짜가 아니었던 셈이다.

자, 문제는 나치 독일이 전쟁 초기에 대승리를 거뒀다는 점이다. 정말 약빨인가? 이제 군대에 몰빵하자, 싶었던 독일은 1941년부터 주부와 청소년, 노년층에게는 Pervitin의 복용을 금지한다. 당시 전쟁에 동원된 독일군은 300만 명이 넘었었다. 하지만 마약중독이 서서히 군대 내에서 나타났으니…

마약중독은 더 강력한 마약을 원하게 마련이다. 1944년의 독일은 Pervitin과 다른 마약을 섞은 더 센 마약을 실험한다. 쉽게 말해서 히로뽕과 코카인, 몰핀을 섞었으며, 이를 강제수용소(Sachsenhausen) 수용자들을 대상으로 테스트했다. 어차피 이들도 약에 취해서 노동을 시켜야 했다. 그 부작용 때문에 학자들은 지금이라도 중단해야 한다고 요청했지만 지도부는 약 공급을 계속 유지시켰다.

노벨문학상 수상자이자 독일 녹색당의 창업자에 가까운 하인리히 뵐(Heinrich Böll)이 군인이던 시절, 부모에게 보낸 편지를 보자(참조 4).
„Schicke mir, wenn möglich, bald ein paar Pervitin“ / “가능하시면 페어비틴 몇 개 좀 제게 빨리 보내주세요.”
노벨 문학상 수상자도 중독에 빠뜨릴 정도이니 전쟁 이후에는 마땅히 금지해야 하잖았을까? 그러나 전쟁으로 얻은 기억은 쉽사리 잊을 수 없는 법이다. 독일 월드컵 팀은 Pervitin을 복용하고 1954년 스위스 월드컵에서 우승했으며(참조 4), 콘라트 아데나워 총리 또한 60년대까지 약을 복용했었다고 한다(참조 5).


독일 연방군 또한 “비상시”를 대비하여 1970년대까지 Pervitin을 비축했고, 비행기 조종사들은 1988년까지 메스암페타민이 들어간 약을 처방 받았다(참조 2).

미국은? 최근의 이라크 전쟁 때 때 흥분제가 사용됐다는 주장이 있다(참조 6). 스팀팩을 투여한다는 군대 문화가 거 쉽게 바뀌는 게 아니다. 스팀팩은 지금도 스타크래프트에 주요 기능으로 잘 보전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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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1888년 도쿄대학의 나가이(長井長義) 교수는 감기약을 만들려다가 메스암페타민을 제조해버렸고, 이것이 각성제에 효과가 있음을 알았다. 이 화학조합은 후에 “히로폰”이라는 상품명으로 나왔다.

The pH Levels of Different Methamphetamine Drug Samples on the Street Market in Cape Town(2011년 6월 26일): https://www.ncbi.nlm.nih.gov/pmc/articles/PMC3189445/

2. 알베르트 슈페어는 히틀러가 마약 때문에 판단력이 흐려졌다고 진술했다고 한다. 그의 증언에 따르면 히틀러의 Pervitin 복용은 1942년부터였다. 처음에는 아침에 한 알씩이었다가 하루 수 회로 점점 늘어났다고.


3. 디카페인 커피의 탄생(2019년 1월 6일): https://www.vingle.net/posts/2552321

4. Peppige Panzerschokolade(2006년 12월 28일): https://taz.de/!336058/

5. „Die Welt wird verrückt“(2017년 2월 11일): https://www.spiegel.de/spiegel/print/d-149533944.html

6. 'Go' pills for F-16 pilots get close look / Amphetamines prescribed in mission that killed Canadians(2003년 1월 4일): https://www.sfgate.com/news/article/Go-pills-for-F-16-pilots-get-close-look-2687644.php

언급된 GO 약은 메스암페타민은 아니고 암페타민 계열이다. 암페타민에서 메스암페타민이 나왔으며, 암페타민은 각성제에 (정식으로?) 쓰이는 화합물 중 하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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따발총을 든 소녀
이 사진은 도대체 누구인가? 1956년 헝가리 혁명을 아마 알고 계실 텐데 당시 11월 초 부다페스트 거리에서 촬영한 반소련 저항군 일원 중 하나이다. 이름은 Szeles Erika Kornélia, 셀레시 에리커 코르넬리어(참조 1)이다. (헝가리어는 성씨가 앞에 오는 거 알고 계실 것이다.) 그렇다면 이 사진은 어디에 실렸는가? 덴마크의 오래된 주간지, Billed Bladet의 1956년 11월 13일자로 나와 있었다고 한다. 촬영자는 Vagn Hansen. 문제가 있다. 잡지가 나온 11월 13일은 이미 셀레시 에리커가 목 뒤로 총을 맞아 사망한 이후였다(참조 2). 일단 셀레시 얘기부터 해 보자. 그녀는 1941년생이고 유태계 가족에서 태어났었다. 그래서 잠시 세이브더칠드런 덴마크 지부로 보내서 살려냈다고 하는데, 그래서 그런지 덴마크어를 좀 했다고 한다. 아버지는 당연히(?) 강제수용소에 끌려가 사망했고 어머니가 무남독녀로 홀로 키워낸다. 당시 사정에 맞게 크고 나서는 고등학교까지 진학하지는 않고 조리학교에 들어간 다음, 한 호텔에 보조 요리사가 된다. 그당시 서너살 위의 한 오빠와 사귀면서 사상전향(?)이 일어난다. 유태계 집안이어서 그런지는 몰라도 어머니는 상당한 공산주의자였다고 한다. 그러나 딸인 에리커는 급격한 반공주의로 바뀐다. 그래서 당시 소련의 억압에 대해 반항했고 급기야는 반항군에도 들어간 것. 어차피 헝가리군을 당시 소련이 해체시켰기에 반항군은 군 출신도 많았다. 이때가 10대 중반, 헝가리 혁명의 시기인 1956년이다. 다르게 보면 스탈린 사망 이후, 헝가리가 간이 커졌다고 볼 수도 있을 텐데, 아직 너무나 어린 나이인 15세여서 반항군 내에서는 에리커가 전투병을 하기에는 너무 어리지 않나 하는 의견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간호 보조로 역할을 바꾼다. 바로 그당시 Vagn Hansen을 포함한 덴마크 저널리스트들이 멋대로(외교관 차량을 위조(!)해서 들어갔다, 참조 3) 헝가리에 들어갔었고, 아직 편제가 바뀌기 직전의 에리커를 촬영했던 것이다. 그러나 에리커는 수 일 후, 적십자 마크를 달고 쓰러진 반항군을 구하러 다니다가 소련군의 총에 맞아 사망한다. 11월 7일이었다. -------------- 1956년 당시 에리커의 사진이 나온 잡지를 본 Henning Schultz는 이 소녀에 대한 동경과 사랑의 감정이 휘몰아쳤다. 도대체 이 따발총을 들고 다부진 표정을 한 소녀는 누구일까? 문제는 잡지 사진에 이름만 덩그러니 있다는 점이었다(참조 4). 과연 그 때 살아있기는 했을까? (답: 사망했다.) 에리커 사진에 대한 집념을 갖고 있던 그는 지리학자로서 은퇴한 이후인 2000년대 후반부터 그녀를 찾기 시작했다. 아직까지도 그 잡지를 여러 권 갖고 있던 그에게 있어 그녀는 일종의, 헝가리 혁명의 상징(참조 4)이었다. 슐츠는 헝가리 언론사와 정부, 박물관 등 여러 군데에 의뢰를 했고 그제서야 초등학교 동창, 포크댄스 그룹의 일원 등등이 나오기 시작한다. 그때에서야 자세한 신원을 알 수 있었다(참조 5). 2008년, 슐츠의 도움을 통해 사진 촬영가였던 Vagn Hansen은 공식적으로 이 사진을 포함한 헝가리 혁명 당시 촬영한 사진들을 헝가리 역사 박물관 측에 기증한다(참조 6). 그리고 그녀는 정말로 헝가리 혁명의 상징 중 하나가 됐다. -------------- 참조 1. 한국에도 알려져 있는 인물이기는 하다. 자유를 향한 '혁명의 순간' 사진으로 남았다(2016년 11월 7일): http://naver.me/FcUMXfsQ 2. The heroes of 1956: The girl, who was already dead when her photo went around the world (2016년 10월 17일): https://dailynewshungary.com/heroes-1956-girl-already-dead-photo-went-around-world/ 3. »Pressefotograf var det værste. Jeg ville være fin portrætfotograf på femte sal”(2005년 5월 25일): https://journalisten.dk/pressefotograf-var-det-vaerste-jeg-ville-vaere-fin-portraetfotograf-pa-femte-sal/ 4. "Vörös hajú, szeplős, zsidó származású kislány volt" - Rábukkantunk a forradalom titokzatos jelképére!(2008년 11월 2일): https://mazsihisz.hu/hirek-a-zsido-vilagbol/archiv/voros-haju-szeplos-zsido-szarmazasu-kislany-volt-rabukkantunk-a-forradalom-titokzatos-jelkepere 5. https://hu.wikipedia.org/wiki/Szeles_Erika_Korn%C3%A9lia 6. AJÁNDÉK DÁNIÁBÓL(2008년 3월호): http://fotomuveszet.net/korabbi_szamok/200803/ajandek_daniabol
나치의 예술작품들
https://www.spiegel.de/international/zeitgeist/hidden-legacy-time-for-a-new-look-at-nazi-art-a-1281602.html 나치가 독일을 통치했던 기간이 거의 12년인데, 이 긴 세월동안 나치가 탄압했던 예술 작품들은 지금도 퇴폐예술(Entartete Kunst) 장르로 매우 유명하다. 하지만 당연히 나치가 좋아했던 예술작 품들도 존재하고, 나치를 찬양한 예술 작품들도 분명 있기는 있다. 혹시 이거 연합군 측에서 파괴했을까? 아니다. 미국과 독일의 모처 창고에 그냥 모셔두고 있다. 독일에 있는 작품들부터 얘기해 보자. 베를린에 있는 독일 역사 박물관이 Spandau 창고에 900여 나치 작품들을 그냥 모셔두고 있는 이유는 “잊혀지기” 위함이다. 나치 찬양 예술 작품들은 일종의 “타부”이고 그렇게 반성 좋아하는 독일도 그 시절 친나치 예술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부담스러워한다. 미국은 워싱턴 D.C. 근교의 Fort Belvoir에 있는 군용(!) 창고에 있다. 여기에 히틀러의 두상도 고이 모셔져 있다. 전쟁 이후 미군은 대략 9천여 점의 작품을 독일로부터 가져온다. 물론 1950년대부터 1980년대까지 독일에 돌려준 작품들도 좀 있기는 한데, 친 나치 작품들의 영향력이 우려되는 민감한 작품들은 그냥 미국이 갖기로 했다고 한다. 물론 독일측도 이 사실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미국에 있는 나머지 작품들도 독일로 다시 반납해야 할까? 미군 대변인은 송환할 계획이 현재로서는 없다 답했고, 독일 문화부는 답변을 독일 외교부로 돌렸다. 게다가 그냥 있다는 점만 알 뿐, 미국에 정확히 어떤 작품들이 얼마나 있는지는 독일도 잘 모른다고 한다. 자… 혹시 이 두 곳 외에, 다른 미술관이나 개인 소장 작품이 있을까? 물론 있다고 한다. 그러나 예외가 없지 않지만 감히 전시까지는 못 하는 듯 하다. 그래서 당시 시절 친 나치 작품들에 대한 완전한 연구가 제대로 안 되어 있다고 한다. 게다가 여론도 정말 그런 작품의 존재 자체를 대단히 부담스러워 한다. 에밀 놀데 전시회(참조 1)도 결국은 평이 별로 안 좋았었다. 그렇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할까? 그냥 없는 셈 칠까? 그냥 나타났다 사라진 UFO처럼 여기면 마음이 편해지지 않을까? 그래서 오히려 미국이 연구한 것이 있다(참조 2). 게다가 미군은 내년, 바로 저 장소에 육군 미술관을 개장할 예정이라고 한다. 과연 친 나치 작품들을 그때 공개할까? 게다가 그 연구를 보면, 세간의 인식과는 달리 친 나치 작품들 중에 모더니즘 작품들도 꽤 존재한다. 나치가 모더니즘을 싫어한 건 맞는데, 그냥 일관성이 없었다고 봐야 할 것이다. 예술가들의 문제도 있다. 타락했다는 비판을 받은 후, 자기 스타일을 고쳐서 승승장구하다가, 독일 패전 이후 다시금 추상 스타일로 바꿔서 거의 꺼삐딴 리 급으로 계속 성공한 작가도 있는 모양이다. 즉, 에밀 놀데에 대한 독일의 차디찬 반응이 좀 위선성을 갖고 있다는 얘기다. 예술계가 실질적으로는 나치 청산을 못 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이게 다 인간의 삶보다 그림에 훨씬 더 신경썼던 독재자 한 명 때문이라고만 할 수 있을지 잘 모르겠다. -------------- 참조 1. 에밀 놀데(2019년 6월 19일): https://www.vingle.net/posts/2630740 2. 가령 뉴욕 St. John’s University의 Gregory Maertz 교수가 쓴 Nostalgia for the Future(2019년 5월) : https://cup.columbia.edu/book/nostalgia-for-the-future/9783838212814
동독을 살리려 했던 중국
https://www.welt.de/geschichte/plus202839652/Akten-Fund-So-wollte-China-1989-in-letzter-Minute-die-DDR-retten.html?wtmc=socialmedia.twitter.shared.web 이 내용은 독일 외교부 문서 공개가 되면서 알려진 사실인데 다른 나라 언론에 보도가 잘 안 된 것 같다. 동독이 무너지려 할 때 중국이 손을 뻗치려 했었다는 내용이다. 어쩌면 중국의 유럽통이 이탈리아가 아닌 동독이 됐을지도? 그 뿌리는 천안문 항쟁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경 천안문의 1989년 여름은 정말 뜨거웠었다. 그러나 중국 당국은 군대를 동원하여 시민을 밀어버리고 “질서와 안전”을 회복했었다. 당시 동독 외교부 장관이었던 Oskar Fischer는 중국 외교부장 첸치천(錢其琛)에게 “중국과의 연대”를 표방하고 사회주의의 안정을 무너뜨리려 했던 최근의 반사회적 열정의 시도를 비난했다. 심지어 2주일 후 최후의 동독 서기장이 될 에곤 크렌츠가 중국을 직접 방문하기도 했었다. 중국을 이렇게 강력히 지지하는 나라는 정말 많지 않았다. 심지어 당시 소련도 중국에게 개혁을 요구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이때가 1989년 10월 얘기다. 베를린 장벽이 무너졌던 때가 11월 9일이다. 이미 당시 동독에서는 젊고 유능한 인재들 20여만 명이 속속 나라를 빠져나가는 중이었다(참조 1). 여행 허가 없이 그냥 헝가리와 체코슬로바키아로 빠진 다음, 오스트리아나 서독으로 들어간 것이다(참조 2). 10월 27일, 중국은 북경 주재 동독 대사를 불러 제안을 한 가지 하고, 동독 대사관은 그 내용을 본국에 전문으로 보낸다. 제안을 듣자마자 말이다. “…원하는 수만큼 능력 있는 중국 노동자들을 보내드리겠음. 금전적인 비용을 지불하지 않아도 되며, 이는 정치적 도움임. 다만 그 값은 제품으로 보내주면 좋겠음.” 에곤 크렌츠 서기장에게 전달된 것은 10월 28일, 그러나 그는 빠져나가는 동독인들 처리에 정신 없었다. 그래서 총리 역할을 맡고 있던(참조 3), 빌리 슈토프(Willie Stoph)에게 이 전문이 전달된다. 이때가 10월 30일이었다. 슈토프는 중국의 제안에 호의적이었다. 심지어 서구 통화를 대가로 지급할 필요조차 없다니! 중국측이 동독을 방문해서 관련 부처와 함께 필요한 협정을 체결해 보자는 내용으로 전문을 보내고자, 동독 외교부로 문서를 보낸다. 걸어서 10분 거리에 있는 외교부로 바로 전문 내용을 보냈건만… 독일의 관료주의도 이상하게 힘을 발휘한다. 빨간 “지급(Eilt)” 도장도 찍혀있었건만 11월 1일에서야 동독 외교부는 해당 공문을 받았다. 게다가 동독 외교부 내부에서도 우려의 목소리가 있었다. 최후의 평양 주재 동독 대사를 지내게 될 Klaus Zorn은 이미 918명의 중국 계약 노동자들이 콤비나트에서 일하고 있는데(참조 4) 더 들여오려면 조건을 좀더 꼼꼼히 점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래서 11월 2일, 슈토프는 다시금 내각 회의를 소집하는데… 여러분들 아시다시피 11월 9일에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다. 그리고 위에 썼지만 11월 내내 동독인들은 동독을 빠져나가고 있었다.논의할 여유가 없었고, 며칠 후 동독 내각은 모두 사표를 제출한다. -------------- 참조 1. Massenflucht(2016년 2월 29일): https://www.hdg.de/lemo/kapitel/deutsche-einheit/wandel-im-osten/massenflucht.html 2. 인상적인 역사적 장면이 하나 있다. 당시 겐셔 서독 외교부 장관이 직접 체코로 날라가서 동독인들을 구하는 장면이다. “동독 주민들의 대탈출을 막기 위해 동독 정부는 체코에게 동독 사람들 나가지 못 하게 하라 부탁했었지만, 겐셔가 아예 직접 체코로 날라가서 체코 주재 독일 대사관 발코니에 섰다. 내가 당신들 데리러 왔노라고.” 한스 디트리히 겐셔(2016년 4월 3일): https://www.vingle.net/posts/1508089 3. 정확히는 정부 내 각 부처를 아우르는 내각의장(Vorsitzender)이 더 가까운 번역어일 테지만 보통의 경우는 그냥 ‘총리’로 번역한다. 4. 동독도 서독처럼 구인난이 좀 있어서 중국만이 아니라 베트남 노동자 59,000명, 모잠비크 노동자 15,000명, 쿠바 노동자 8,300명이 당시 동독에서 일하고 있었다고 한다. 1988년 당시 동독 내 외국인 노동자는 93,500명 정도였다. 모두 공동생활을 했는데 지금과 비슷하게(…) 일상적으로는 차별당하기 일쑤였고 동독인들이 저지르는 혐오 범죄의 대상이기도 했다.
[펌] 19세기 미국을 방문한 일본 최초의 방미사절단의 반응
1860년, 미일수통상조약의 비준 및 교환을 위해 도쿠가와 막부는 일본 역사상 처음으로 미국에 <공식사절단>을 보내게 됩니다. 막부는 이를 위해 네덜란드로부터 서양식 함선을 구매하여 <간린마루>라는 이름을 짓고 막부의 사절들은 여기에 승선하여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향하게 됩니다. 칸린마루호 동양국가의 정부관료들이 서양에 가보는 것은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 사절단의 일행으로는 후쿠자와 유키치도 포함되어 있었고일전에 소개해드린 가츠 가이슈도 있었습니다 (그는 진심으로 조선과 중국을 존중했던 인물이었죠)  물론 동양국가 중에서도 일본은 일찍이 서양국가들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이미 수집하고 있었고 체계적으로 정리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직접 서양에 가보는 것은 그들에게도 이때가 처음이었습니다. 이와 같은 문명의 조우는 분명 엄청난 충격이었을겁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많은 양의 기록을 남겼는데요 그 중의 일부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샌프란시스코 인터네셔널 호텔의 식사에 대해 "국(수프)은 느끼하고 안에는 간이 안 된 생선이 들어있다" "쌀은 일본쌀보다 하얗지만, 정말 맛이 없다" "고기는 짜고 약간의 야채와 하얀 콩이 곁들여져있다" "연어는 그냥 물에 끓인 것이다" "커피라는 차는 너무 쓰고 설탕 없이 먹기 힘들다" "식사는 물론 훌륭하게 준비되었고 미국에서 분명 엄청난 만찬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 입맛에는 너무 맛이 없고 버터 때문에 너무 느끼했다. 하지만 우리는 배고픔을 참지 못해서 이것저것 조금씩 맛을 볼 수밖에 없었다" **필라델피아 호텔에서 "아..또 스테이크로다, 미국인들은 우리의 입맛을 전혀 고려하지 않는 모양이다" 이에 따라 미국인들이 쌀밥을 준비했지만 버터와 같이 볶은 쌀이어서 사절단 일행은 이를 정중히 거절했답니다. 그래서 미국 측에서 다음날에는 설탕을 친 쌀밥을 준비했더니.. 사절단 일행이 일기에 기록하길 "우리는 쌀밥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렸다. 허기를 채우기 위해 빵을 먹을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호텔룸에는 차가 준비되지 않았는데... "미국인들은 일본인이 녹차를 얼마나 좋아하는지 알지 못한다"라고 불평합니다.  이렇게 계속 궁시렁대기는 했지만 아이스크림은 정말 좋아했다고 합니다.  "여러 색으로 칠해진 얼음모양의 과자는 달고 맛있었다" 서양의 테이블 매너도 상당한 고역이었던 모양입니다. "대통령과 동석하는 식사에서 우리는 최대한 예의바른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연속적으로 나오는 접시 하나 하나 모두 낮설었고, 우리는 이를 어떻게 먹는지도 알지 못했다. 그래서 우리는 우리 옆에 앉아있던 아가씨들의 행동을 하나하나 따라할 수밖에 없었다.  식사가 끝날 무렵 각자 앞에 작은 물항아리가 놓여졌는데 대통령의 조카딸이 여기에 손을 적시는 것을 보았다. 하지만 우리가 이를 봤을 때 는 너무 늦어버렸다. 우리의 비서 모리타가 항아리에 있던 물을 마셔버린 것이다! 오구리가 그의 옷소매를 잡아당기면서 눈치를 주자 그는 그제서야 자신의 잘못을 깨닫고 뒤늦게 손을 적시는 시늉을 했다." 이어 그들은 무도회장에 초대되었는데 남녀가 뒤섞여 춤을 추는 모습은 정말 낮선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남자가 여자와 함께 방 여기저기 움직이면서 춤을 추는 모습을 보았다. 여인이 움직일 때마다스커트가 엄청 커지는 것을 보니 웃음을 참기 힘들었다. 미국에서는 가난하건 부자이건, 젊은이건 늙은이건 모두 춤을 좋아한다고 한다. 무도회는 자정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이들에게 미국의 정치는 더욱 낮선 것이었습니다. 그들은 그들의 생각과는 달리 미국의 지도자는 왕이나 황제가 아니었고 일반인들이 선출한 또 다른 일반인이었으며 대통령궁은 그의 소유가 아니라 국가의 재산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미국의 의회는 더욱 더 놀라운 것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이곳은 시끄럽고 난잡한 곳이었고 어떤 일을 하는 곳인지 도무지 알기 힘든 곳이었습니다.  사절단이 기록하길 "이곳의 사람들은 큰 몸짓으로 연설을 하는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보인다" "중요한 국가의 대사에 대해 논의하고 있는 것 같은데, 사람들이 서로 큰 소리로 이야기하고 부의장이란 사람이 연단에 서있는 것을 보니 마치 에도의 니혼바시 시장처럼 보인다" 가장 놀라운 것은 역시 최첨단 기술이었습니다. 그리고 19세기의 기술을 대표하는 물건은 당연 <기차>였습니다. 사절단은 기차를 처음 타면서 적지 않이 놀랐습니다. 바퀴 달린 쇠붙이가 엄청난 소리를 내면서 그들의 상상을 초월하는 속도로 달렸기 때문입니다. 그들이 기록하길 "열차는 8개의 차량이 이어진 것이었고 철로를 따라 움직였다. 점점 속도를 내자 실내는 크게 흔들렸으며 너무 시끄러워서 서로의 말을 잘 듣지 못할 정도였다." 하지만 그들이 더욱 놀랐던 것은 열차의 운임이 개인당 24달러에 불과했다는 것이었고 무엇보다 이 엄청난 물건이 그들이 미국에 오기 8년 전에 <민간인>이 건설했다는 것입니다.  또 하나의 인상적은 물건은 민간에 판매되는 <신문>이었습니다. 그들이 봤던 신문에는 일본의 간린마루가 소개되어 있었으며 일본의 사절단에 대한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따라서 사절단은 미국 신문에서 자기들을 어떻게 다루는지 무척 궁금해했으며 신문이라는 매체를 중요시하게 되었습니다.  또한 Roanoke라는 곳에 머물고 있었을 때 그들은 신문에서 일본에 중요한 정치적 사건이 일어났다는 기사를 읽었습니다 (아마 당시의 대로(오늘로 치면 총리) 이이 나오스케의 암살 소식을 들은듯)... 사절단이 기록하길 "10,000 마일이 넘게 멀리 떨어진 곳의 소식이 불과 40일만에 신문에 기사화된다는 것이 자못 놀랍다" 또한 그들이 워싱턴에 왔을 때 그들 주변에 호기심 많은 사람들이 바쁘게 수첩에 메모를 적는 것을 보았는데, 사절단이 저들은 뭐하는 사람들이냐고 물어보자, 저 사람들은 신문사를 위해 일하는 기자들이라는 말을 들었습니다. 저들이 저렇게 바쁘게 메모하는 이유는 최대한 빨리 기사를 내기 위함이라는 말과 함께 말이죠.  목욕시설도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꼭지를 돌리는 것만으로 물이 쏟아졌고, 왼쪽으로 또는 오른쪽으로 꼭지를 돌리는 것만으로 온수와 냉수를 바로 쓸 수 있었습니다. 또한 시내의 가스등은 밤에도 도시를 환하게 비추었고 미국과 영국처럼 멀리 떨어져있는 곳 또한 '전신'으로 이어져 있어 실시간으로 통신하는 것이 가능했습니다.  하지만 이 모든 놀라움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군사력의 실체는 그들을 실망시켰습니다. 그들은 대부분의 요새들이 그저 장식에 불과하다는 것을 쉽게 깨달았고 또한 군대의 숫자가 부족하다는 것도 제빨리 파악했습니다. 사절단이 기록하길 "Roanoke, Pawhatan, Niagara는 모두 거대한 군함이며 미국인들이 자랑스러워한다. 하지만 이 군함들에는 진짜 군인이 12~13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항해사와 노동자에 불과하다. 우리는 미국을 무척 두려워했었다. 하지만 실제로 총과 대포를 운용할줄 아는 이들은 매우 적었다. 왜냐하면 미국은 군인을 쉽게 고용하고 또 해고하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 무사들의 용맹과 충성심으로 미국을 완전히 파멸시킬 수도 있겠다고 은밀히 생각했다" 그들은 또 뉴욕에서 군인 8,000 명의 행진을 구경했는데 이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코멘트를 남겼습니다. "기병대는 모두 직업군인이지만, 나머지 보병은 모두 며칠밖에 복무하지 않는 상인들에 불과하다" "미국의 군사력은 '실속'이 없다" 무사계급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평민들이 돈을 받고 군대에서 일하는 게 어이없고 허술해보였다는 말입니다.  무사계급과 평민의 신분이 구분되던 막부체제의 관료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죠.  하지만 이렇게 비아냥대면서도 미국의 항구에서 조선소를 방문하고 나서는 입이 쫙 벌어졌다고 합니다.  다른 한편으로는 서양인들이 여인을 대하는 모습이 이들에게 너무 어색했습니다. "미국인들은 여자를 마치 우리가 부모를 모시듯 섬긴다" "방 안에 남녀가 같이 있을 때 방에 들어오는 자는 여자에게 먼저 인사를 건내고 그 후 나머지 남성들에게 인사한다" "남자는 여자에게 인사할 때 모자를 벗어야 하지만, 여자는 그렇게 하지 않아도 된다" "길을 걸을 때는 남자가 여자를 위해 길을 비켜주어야 한다" 한 관리의 집에 초대받았을 때는 "가장이 우리를 접대하기 위해 하인들과 같이 분주히 움직일 때 그의 아내는 우리와 함께 방에 머물면서 우리와 담소를 나눴다. 마치 그녀가 가장인듯했다" 사절단은 미국 여인들에 대한 품평도 남겼는데... "미국 여인들은 매우 하얗고 아름다운 옷으로 치장했지만, 그녀들의 머리색은 전혀 매력적이지 않다. 마치 강아지의 눈색과도 같다" 하지만 흑발의 백인에 대해서는 "백인여인들은 매력적이고 아름답다. 마치 일본인형처럼 생겼다"고 기록했습니다. 미국 대통령의 조카 엘렌이 사절단의 부대사에게 일본여인에 비해 미국여인들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고 물었을 때 그는 "미국여인들이 더 아름답다고" 답했습니다. 그리고 "미국여인들의 피부가 더 희다"라고 덧붙였습니다. (진짜 그렇게 생각했던건지 아니면 대통령의 조카가 물어보니까 립서비스한건지는 본인이 알겠지만 ~~~~)  다른 사절단이 기록하길 "미국여인들은 가슴을 가리는 데 특별히 신경을 쓴다. 아기에게 모유를 먹일 때에도 천으로 가슴을 가린다" (당시 일본은 어머니가 아기 모유를 먹일 때 가슴을 드러냈다고 합니다) 아무튼 이렇게 미국을 여행한 최초의 일본인들은 정말 큰 충격을 받고 본국으로 돌아갔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돌아갔을 때 총리에 해당하는 대로(大老) 이이 나오스케는 암살되었고 정국의 분위기는 서양을 몰아내고 천황의 존엄을 지키자는 존왕양이파가 주도하게 되었습니다 (근데 역설적으로 나중에 이들이 근대화를 추진한다는 게 함정...) 하지만 이들의 폭넓은 경험은 후일 일본의 개화에 큰 영향을 남겼습니다.  무엇보다 정부관료들과 사회의 엘리트들이 직접 보고 체험한 것이라, 그 영향은 당연 적을 수 없었겠죠.  아무튼 흥미로운 일화입니다.  훗날 조선도 미국에 방미사절단을 보내는데 뉴욕의 현대화된 도시를 보고 그야말로 어마어마한 충격을 받았다고함 
방위비 인상 반대한다! 반미주의 부추기는 트럼프
미 정가와 각계에서 한국에 대한 트럼프식 방위비 분담금 인상에 비판을 하고 있다고 한다. '이건 강탈이다' 라고 생각 할 만큼 억지요구가 바로 방위비분담에 대한 인상요구다. 동맹이라 불리는 한국에 대한 것 치고 무례한 행동인데 프럼프 자신만 모르는 것 같다. 마치 외교를 하랬더니 일진 돈뜯기 흉내를 하는 꼴이다. 문통이 잘하겠지 하고 믿는 구석이 있어서인지 국민들도 조용하다. 하지만 미국 내부는 그렇지 않다. 그레이스 맹 민주당 대변인은 한미관계를 불안정하게 만들고 미국의 안보와 경제적 이익을 위험에 빠트린다고 블룸버그 통신이 인용해 지적했다. msnbs는 트럼프는 이전부터 한국을 소외시키고 모욕해왔다며 한국은 중국의 일부였다는 말도 했다. 2017년 5월에는 한미fta를 비난하고 거래를 폐기위협하며 상황을 악화시켰고 사드배치비용도 한국이 부담해야 한다고 했으며 방위비문제와 관련 미 민주당은 물론 공화당의원들 사이에서도 깊은 우려가 나오는 실정이라고 보도했다. 특히 비용인상에 응하지 않을 경우 철수까지 언급하는 등 한국을 분노하게하고 불안하게 하고 있다고 전한다. 트럼프가 미군이 주둔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모르는 것 같다고 꼬집기도 합니다. 전나토연합군 총사령관 제임스 스타브리디스는 미군은 한국을 지키기 위한 선의의 행동으로 주둔하는 것이 아닌 그 지역에서 미국의 영향력을 증진시키기 위해 있는 것이고 그 지역에서 자유무역을 하고 일어나는 사건들에 목소리를 낼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주둔하는 것! 미군은 미국의 국가 안보를 달성하기 위해 존재한다. 해리티지재단의 분석가 브루스 클린저는 방위비 인상요구는 터무니없이 높은 금액일 뿐 아니라 방식도 반미주의를 촉발시킬 수 있다. 미 트로이대 서울캠퍼스 국제관계학 교수 다니엘 핑스턴은 이런 행동은 강탈에 불과하고 마치 조폭 두목이 돌아다니며 보호비를 뜯어내는 것 이상이며 미국이 요구하는 금액은 한국이 정치적으로 받아들이기 불가능하고 그것은 분노를 불러 일으킬 뿐이다. 미국내에서도 이러한데 국내에서는 '방위비인상 결사반대'라는 여론 형성조차 일어나지 않으니 참으로 안타깝다.
방위비 협상이 웃기는 이유
50억달러... 한화로 5조8천억 원에 이르며 매우 큰 돈으로 미국이 한국에 주한미군 주둔에 따른 분담비 명세서다. 이걸 해마다 내야하고 해마다 오를 수 있다. 올해 부담액(1조389억원)의 6배에 달하는 액수다. 현재 방위비 협정에 규정된 한국의 분담 항목은 주한미군에서 일하는 한국인 노동자 인건비와 군사건설비, 군수지원비로 묶여 있다. 새로운 항목에는 주한미군의 순환배치와 한-미 연합훈련 비용 등이 포함된 것으로 전해진다.  트럼프는 한국이 50억에 이르는 방위비용을 보호받으며 5억달러만 부담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럴바에 아예 철수를 하라고하자는 요구가 터져 나올만큼 비판적 시각도 늘어났다. 현실적으로 주한미군 철수 가능성이 큰 것은 아닌데 헛소리를 늘어 놓는 것은 대한민국을 우습게 본 것이다. 주한미군 주둔으로 중국 봉쇄를 위한 한국의 전략적 가치가 크고, 신설된 평택 미군기지가 너무 유용해 포기할 수 없으며, 한국을 포기하면 일본이 위험해지고, 본토보다 한국 주둔 비용이 더 저렴하다는 등의 이유 때문이다. 그러면 미군이 철수할 경우 책임질 수 있는가? 나는 있다고 본다. 군사정권 시절의 군사력 비교를 하지 않아도 지금 한국은 북한의 군사력에 압도적이다. 그러나 국가안보에서는 어떤 상황도 단정할 수 없다. 모든 국가는 최악의 상황까지 가정해 철저하게 대비해야 하기 때문이다.  왜 저럴까 하는 생각이 드는건 나만의 생각일까? 전작권을 넘겨주고 다시 찾아올 생각도 없는 놈들, 군대도 안 간 놈들이 안보를 아무렇지 않게 입에 올리며, 병사에게 갑질을 하는 놈이 있으니 그러는 게 아닐까 싶다. 우리는 역사를 배우며 자기나라를 지키는데 다른나라에 힘을 빌리면 그에 따른 댓가가 컸다는 걸 배웠다. 주한미군을 당연시하는 사고에서 벗어나서 한·미 동맹을 지혜롭게 관리할 필요가 있다. 흔히 ‘자주’라는 감성팔이로 불필요하게 미국을 자극해선 곤란하다고 하는데 자극하는 것은 미국이지 우리가 아니다. 자국을 자신의 힘으로 지키지 못하는 나라는 정상국가가 아니라고 본다. 최근 쿠르드족이 미국의 철수 결정을 비판하자 트럼프 대통령은 그들을 지켜준다고 약속한 적이 없다면서 자기방어는 스스로 책임져야 한다고 충고했다는 사실을 흘려듣지 않아야 한다. 터무니 없는 분담금 상향요구에 분담비의 남는 돈을 미국에 송금하는 놈들이 턱없는 요구를 하고있다. 웃긴소리다. 달라면 순순히 주는 돈 빼앗는 일진을 닮았다. 주한미군 주둔비분담을 넘어 밖으로의 영역까지 분담금이라는 부담을 지우려는 저런 발상으로는 미국을 대표하는 자의 모습이라고 볼 수 없다. 비용산정에 투명성도 없고. 주둔에 따른 비용부담도 없고 엉망인 분담금은 투명하고 체계적으로 관리되어야 한다.
불행은 넘침에 있습니다
나우루 공화국은 오세아니아 미크로네시아에 위치한 섬입니다. 바티칸 시국(0.44km²)과 모나코(2km²)에 이은 세계에서 세 번째로 작은 나라이며 21㎢ 연안을 따라 도로를 일주하는데 30분이면 족합니다. 식민지 개척 시절 독일과 호주의 지배를 받다가, 태평양 전쟁 시기에는 일본에 잠시 점령되기도 했습니다. 나우루인은 약 3000년 전 섬에 정착한 이후, 주로 양식업을 하며 살아왔습니다. 그런데 나우루 공화국을 이루고 있는 섬은 철새들의 배설물과 바닷물이 오랜 시간 화학적 결합으로 변형된 인산염으로 변해 있었고, 인산염은 화학비료의 중요한 원료로 사용되었습니다. 처음 나우루에서 인산염을 발견한 것은 서구 열강입니다. 이들은 관리해 준다는 명목으로 인산염을 깨 갔으며 나우루에서 받은 대가는 수익금의 2% 정도에 아주 적은 비용이었습니다. 그리고 1968년 독립한 나우루는 인산염이라는 희귀한 자원을 국유화했으며 정부는 국민과 공평하게 수익을 나눠 가졌습니다. ‘석유 재벌’ 국가에 맞먹는 수준의 부자가 되었습니다. 부자가 된 국민은 최고급 자동차를 타고 다녔으며 자가용 비행기를 타고 피지와 하와이로 쇼핑하러 다닐 정도였다고 합니다. 집집마다 가정부와 집사가 있었습니다. 집은 나라에서 사주었습니다. 학비도 병원비도 모두 공짜였습니다. 그러면서 나라에서는 세금도 걷지 않았습니다. 나우루 국민들에게는 모든 것이 공짜였고 어떤 일도 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나우루 사람들은 아무 일도 하지 않았습니다. 인산염을 채굴하는 것도 외국인 노동자에게 맡겼으며 심지어 국정을 돌보는 공무원들도 외국인에게 맡겼습니다. 하지만 넘쳐날 것 같았던 인산염은 바닥을 드러냈습니다. 1990년대에 접어들자 위기의 조짐이 시작되었지만, 나우루인은 과거의 삶으로 돌아갈 생각이 없었습니다. 30,000불을 넘나들던 1인당 GDP는 2,500불까지 추락하게 되었습니다. 외국인 노동자들이 모두 떠났습니다. 돈을 벌기 위해 일을 하는 방법은커녕 빨래와 청소와 요리조차 하는 방법을 잊어버린 나우루 국민들만 남았습니다. 그리고 오랜 기간 인산염 채굴을 지나치게 파내어서 섬의 고도가 낮아져 섬 자체가 바다 밑으로 사라질 위험도 있다고 합니다. 풍족할 때 게으름을 피우다가 부족할 때 힘겨워하는 어리석음은 먼 나라만의 이야기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항상 자만하지 말고 경계를 해야 합니다. 지금 당장의 이득 때문에 미루고 있는 일들이 훗날 우리에게 위험으로 다가올지도 모르는 일입니다.   # 오늘의 명언 지나침은 모자람만 못하다. (過猶不及) – 논어 선진 편 – =Naver "따뜻한 하루"에서 이식해옴.... #지나침 #모자람 #게으름 #나태함 #풍족함 #빈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