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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트 샤펠,

좁은 나선형 계단을 앞사람의 등만 보며 올랐다. 어디에선가에서 연이어 터지는 희미한 탄성이 우리의 귀에 조금씩 더 명확하게 들려오기 시작하자 이름 모를 우리 앞의 등들의 걸음이 조금씩 빨라졌고 우리는 이 짧은 고행이 곧 끝남을 알 수 있었다. “와아.”  우리의 뒤를 이어 누군가가 올라오고 있다는 사실도 깜빡 잊은 채 우리는 그만 그 자리에 멈춰 서고 말았다. 우리에게 쏟아져 내려오는 것은 빛이 아니었다. 좁은 어깨를 하고 걷던 봄날, 우리의 머리를 뒤덮으며 내리던 시린 붉은 비, 그 여린 듯 진했던 벚꽃비처럼 그것은 한 뭉텅이로 우리의 추억 안에 지울 수 없는 색을 밀어 넣고 있었다. 그때 알았다. 이 비도 좀처럼 무뎌지지 않을 거라는 것을. 
한국에서 받아온 기본 서류들을 번역하고 공증을 받기 위해 트램을 타고 벼룩시장이 유명한 Vanve까지 갔다. 그리곤 다시 지하철 13호선을 타고 주 프랑스 한국대사관이 있는 Varenne역으로 갔다. Varenne역은 근처에 로댕 미술관이 있는 곳으로 지하철 출구로 나와 대사관들이 모인 거리로 걸어가다 보면 왼편으로 육군박물관이 보이고 그 앞 광장 너머로 에펠탑이 보이는 마치 서울의 광화문과 같은 느낌의 지역이다. 육군박물관 뒤편으로 황금색 돔이 유난히 눈에 띄는데 그곳이 바로 프랑스혁명의 영웅이자 동시에 역적인 애증의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와 그의 일가가 묻혀 있는 Tombeau de Napoléon이다. 공증이 완료된 서류를 다음날 오전 11시 이후에 찾으러 오라고 해서, 다음날 오전 수업을 마치자마자 우리는 다시 트램에 올랐다. 트램은 전 세계 각국에서 지원을 받아 만든 그래서 각국의 이름을 딴 기숙사들이 모여 있는 씨떼 유니벡시떼를 지난다. 건물들은 조금 낡았지만 가격이 싸서 인기가 많고 따라서 입주하기가 하늘에 별따기인 곳이다. 하루를 다녀왔다고 익숙해진 풍경들을 지나 Porte Vanve역에서 메트로 13호선으로 갈아타기 위해 기다리는데 우리의 근처에 서있는 누군가의 인상이 문득 나의 눈을 잡아맸다. 오랜 시간 연기를 하고 또 영화를 만들다 보니 사람들을 관찰하고 혼자서 그들의 성격이나 처한 상황 그리고 감정이나 목적까지도 추측 추리 상상하는 버릇이 몸에 깊게 베여 있다. 그래서 사람들을 보다 보면 나도 모르게 많은 것들을 지레짐작하게 된다. 그것이 어떤 편견이 되진 않을까 싶어 절로 완료되는 짐작들을 애써 지워 버리려고 애먼 노력을 또 하곤 하는데 이곳은 낯선 땅이라 내 생각들이 편견일 확률 또한 높아서 여태껏 한국에서 보다 더욱 조심을 해왔다. 프랑스의 지하철에 대한 여러 글들을 많이 봤고, 소매치기와 거동이 이상한 사람들을 마주친 여러 사람들의 경험담도 또 그때 그들의 대처들도 지나치게 보고 이곳으로 왔지만, 지난 한 달간 딱히 위험한 상황을 만난 적은 없었다. 프랑스에서 유학하는 사람들이 모여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에서 아무런 사건 없이 생활을 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후 방심했을 때 소매치기를 당하고 말았다는 글을 읽고는, 반은 장난으로 ‘방심하다 당한다’ 며 서로에게 잦은 주의를 주곤 했지만, 시간의 힘이 참 무서워 요즘은 긴장을 거의 안 한 채 지내고 있던 참이었다.  13호선은 우리가 주로 타고 다니는 7호선과는 다르게 의자가 한편으로는 한 열이 나있고 다른 한편으로 두 열이 나있는 비대칭 구조이다. 다른 호선의 지하철들처럼 정방향의 의자와 역방향의 의자가 서로 마주 보게 되어 있는 구조는 마찬가지였다. 나와 엠마는 두 열의 의자가 나있는 쪽에 정방향의 의자에 나란히 앉았고, 그 남자는 다른 쪽 한열의 역방향 의자에 앉아 있었다. 문득 들었던 부정적인 인상을 지워내고는 핸드폰으로 뭔가를 검색을 하고 있을 때, 어떠한 짐작되는 이유도 없이 그 남자가 불쑥 나의 앞자리로 자리를 옮겨 왔다. 다른 이곳의 사람들과 달리 나를 빤히 바라보는 모습에 혹 소매치기를 하려는 건 아닐까 싶어 하던 검색을 멈추고 핸드폰을 주머니 안으로 집어넣었다. 그런데 이 남자의 목적은 우리의 물건이 아닌 건지 우리를 방심하게 만들려는 어떠한 수작도 없이 노골적으로 우리를 노려보는 게 아닌가. 우리는 괜한 상황을 만들지 않으려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이 남자는 계속 우리의 돌린 옆얼굴을 노려보다가 심지어 창문으로 고개를 돌려 창문에 비친 우리를 눈을 찾아내 노려보기 시작했다. 순간 확실해지는 이상함에 나는 등이 굳었다. 평일 오전이라 객차에는 사람이 거의 없었다. 창문에 비친 남자를 주의 깊게 견제하며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을 했다. 남자는 왠지 모를 흥분까지 느끼며 우리의 돌린 얼굴과 창문에 비친 우리의 이미지를 번갈아 노려보는 일을 지속적으로 반복했고 급기야 몸을 조금씩 떨기까지 했다. 연기를 통해 익힌 경험을 비추어 보면 일반적으로는 감정이 신체의 징후를 만들어내지만 신체의 징후 또한 숨은 감정을 불러일으키기에 나는 더욱 긴장을 했다. 남자의 신체 징후는 분명 이 감정이 그의 내면 안에 가만히 갇혀 있을 만한 것이 아니라고 말해주고 있었다. 남자의 감정과 신체가 서로를 계속 불러내며 확장을 해가고 있을 때 열차는 다행히 이름 모를 정거장에 멈춰 섰다. 나는 마치 이곳이 Varenne역인 듯, 당연한 듯 엠마를 데리고 열차에서 내렸다. 엠마도 긴장을 많이 했는지 놀란 얼굴을 쉽게 지우지 못하고 있었다. 나는 남자가 우리를 따라 내리는 건 아닌지 걱정이 되어 끝까지 그를 살폈다. 다행히 그 남자는 열차 안에 그대로 남아 있었다. 하지만 열차가 정거장을 떠날 때까지 남자는 우리를 노려 보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굳었던 식은땀이 등줄기를 따라 서서히 녹아내렸다. 그리고 그날 밤 우리는 잠자리를 설쳤다.
결국 다음날, 여러 번 울린 알람에도 우리는 침대 위를 떠나지 못했다. 오전 수업이 시작하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우리는 겨우 몸을 일으켰다. 뒤늦게 발을 돌려 올린 창문 밖에서 위로 같은 햇빛이 쏟아져 들어왔다. 햇빛을 받으며 숨을 좀 녹인 후 우리는 하나의 사건을 렌즈로 파리를 바라보진 말자고 다짐을 했다.  기왕 학교를 못 간 김에 우리는 파리의 동쪽 크레테유라는 곳에 위치한 우리 지역 CAF 아정스에 서류를 내러 가기로 했다. CAF는 주택보조금을 산정, 집행하는 기관으로 인터넷으로 가입, 신청을 한 후 필요한 서류들을 준비해서 우편을 통하거나 직접 제출을 하면 검토 후 각자에 맞는 보조금을 산정해준다. 아날로그의 나라 프랑스도 많은 변화가 있어 CAF도 모든 서류를 스캔한 뒤 온라인상으로도 제출할 수 있게 되었다지만 검토에 많은 시간이 소요된다기에 가장 빠르게 처리된다는 직접 제출을 하러 간 것이다. 파리가 아닌 외곽 지역은 위험한 곳도 많다고 들었기에 우리는 어제의 기억까지 더불어 떠올리며 긴장을 했다. CAF 아정스는 우리 집에서 버스를 타고 종점까지 간 후 조금 걸으면 되는 곳에 있었다. 버스를 타고 외곽지역을 둘러가는 동안 보는 풍경은 파리의 중심지와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공항을 오가는 도로에서처럼 거리에는 그래피티가 가득했고 현대식으로 지어진 커다란 아파트 단지도 높은 굴뚝이 있는 발전소나 공장 같아 보이는 곳도 자주 눈에 띄었다. 넓어진 센느강의 모습도 고풍스러운 건물을 병풍처럼 두르고 있던 파리에서의 모습이 아니라 여느 곳에 흐르는 고요한 강 그 따름이었다. 강변은 온통 풀밭이었고 강 위에는 큰 새들이 앉아 먹이를 찾고 있었다. 낯선 거리의 모습에 경계와 신기함이 반쯤 섞인 시선으로 두리번거리며 CAF 아정스에 도착을 하자 먼저 건물 입구에 긴 줄을 선 많은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파리의 주거비용이 사람들에게 얼마나 벅찬 짐이 되는지 아침부터 먼 곳까지 와 긴 줄을 견디고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보면서 다시 한번 실감할 수 있었다. 순서를 기다려 아정스의 직원에게 검토를 받고 제출하는 것이 제일 좋다는 글을 인터넷에서 읽었지만 건물 밖에 장치해둔 CAF전용 우체통에 집어넣는 것과 별 차이가 없다는 글도 많아서 우리는 긴 줄에 두 명을 더 보태는 일을 포기하고 그냥 우체통에 서류를 집어넣고 가기로 했다. 우리 말고도 많은 사람들이 우체통에 서류를 집어넣는 모습이 보여 우리는 조금이나마 마음을 놓을 수 있었다. 서류가 잘 검토되길 바라며 우체통에 서류를 집어넣고 기념사진을 찍는데 아정스를 들렸다가 나온 한 흑인 아저씨가 우리를 응원을 해줬다. 그리고 홀로 줄을 서고 있던 한 한국 청년이 그 모습을 보며 우리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혹시  한국이신가요? 서류 그냥 여기에 넣고 가면 되는 거예요?” 서류를 봉투에다 넣어서 밀봉을 한 후 우체통에 넣어야 하는데 그 청년은 그런 사항을 전혀 모르고 있었다. 아정스 안에 가면 봉투를 준다는 글을 본 것 같아 청년에게 알려주었다. 청년은 고맙다며 아정스 안으로 가고 우리는 남은 오후를 소중히 보내기 위해 빠른 걸음으로 지하철 역으로 향했다.
먼저 파리의 동쪽에 있는 시네마테크 프랑세즈에 들려보기로 했다. 내가 무척 가보고 싶어 하던 곳이었는데 영화의 성지에는 역시 영화를 보러 가는 것이 좋을 거 같아서 프랑스어가 조금 더 들릴 때까지 미뤄둬야지 했었다. 다만 오늘은 파리의 동쪽으로 나온 김에 인상적이라는 건물의 모습도 봐볼 겸, 영화 박물관이라도 봐보고 갈까 해서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있는 Bercy역으로 갔다.  역에서 나와 조용하고 깨끗한 거리를 조금 걸으니 사진에서 봐왔던 역시나 다양한 곡선들이 인상적인 시네마테크 프랑세즈가 눈에 보였다. 이곳은 빌바오에 있는 구겐하임 미술관을 지은 프랭크 게리의 작품으로 원래는 미국 문화원이었던 곳이다. 2005년, 에펠탑을 마주 보고 있어 관광객들에게 유명한 샤이요 궁 안에 있던 옛 시네마테크를 옭겨오기 위해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했다고 한다. 영화 몽상가들에 등장하던 68 혁명의 주무대였던 프랑스 영화의 최전성기를 지탱하던 ‘그 시네마테크’ 는 이 건물이 아니지만 시네마테크는 위치나 외형보다는 내용이 더 핵심이기에 Cinematheque Fracaise라는 글자를 보는 순간 나도 모르게 아이처럼 들떴다.
시네마테크 앞에는 조용하고 예쁜 공원이 있었고 그 안에는 작은 회전목마가 있어 이질적인 건물과 함께 영화와 같은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하지만 역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의미가 없을 거 같아 예고편처럼 사진 몇 장만 찍고서 다음을 기약하기로 했다. Bercy는 계획도시처럼 긴 공원을 따라 길고 낮은 아파트가 쭉 이어진 곳이었다. 공원이 끝나는 지점에 Bercy village라는 예쁜 쇼핑몰이 있었다. 이곳은 한때 세계 최대의 와인시장이 있었던 곳으로 건물의 외관을 최대한 유지한 채 내부만 리모델링을 해서 지금의 쇼핑몰로 꾸민 곳이다. 당시 와인을 운송하던 기찻길도 그대로 남아 있어 마치 파리가 아닌 지방 소도시의 번화가를 온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규모는 작지만 테라스 자리에 앉아 햇볕을 쬐기에는 좋은 곳 같았다. 햇볕은 좋았지만 날씨는 꽤 차가웠는데 테라스 자리에는 사람들이 가득했다. 우리도 이곳에서 점심을 먹으며 남은 낮을 즐길 수 있는 공간을 고민해 보기로 했다. 
 엠마가 마침 지하철을 타면 한번 만에 가는 곳에 Châtelet역이 있다며 Sainte Chapelle에 가보자고 했다. 처음 어학교재를 사러 시떼섬에 갔을 땐 긴장된 걸음으로 그 앞을 지나치기만 했던 곳이다. “Oui.”
Sainte Chapelle은 고등법원 건물과 붙어 있어 파리의 관광지 중에서도 최고 수준의 보안 검사를 하고 있었다. 흡사 공항에서와 같이 짐 엑스레이 감사와 금속탐지 검사도 거친 후 부속 건물의 뒷문으로 나가자 센느 강 어느 다리에서도 보이던 날카로운 첨탑이 가고일 꼬리를 꽉 쥔 채 우뚝 서 있었다. 검은 괴수들이 사방으로 울부짖고 있는 검은 첨탑 너머의 하늘은 티 없이 파랬다. 그래 신은 이곳에는 없는 거지. Sainte Chapelle은 성루이라고 불리는 루이 9세가 동로마제국의 황제에게 금전적 지원의 형식으로 사들인 예수의 가시 면류관과 후일 모은 예수의 못 박힌 십자가 조각 등의 성물을 보관하기 위해 지은 왕실 전용 예배당이자 보물창고이다.
티켓을 끊고 듣어간 곳은 성당이라고 하기에는 너무 낮은 높이에 기둥이 유난히 많은 별다른 감흥을 주지 못하는 단출한 홀이었다. 심지어 그곳 안에 기념품을 파는 곳과 안내 전단을 배포하는 곳까지 같이 자리하고 있어 더욱 이곳이 사람들이 그렇게나 찾을 만한 곳인가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알고 보니 그곳은 궁중 관리들과 성당을 관리하는 이들을 위한 예배공간이고 왕의 목적을 달성하고자 준비된 곳은 이 낮은 홀이 위층 공간이었다. 이곳이 보통의 성당들 보다 낮은 이유도 기둥이 많은 이유도 위층을 위한 어쩔 수 없는 희생이었다. 파리에 온 후 수없이 오른 나선형 계단을 앞사람의 등만 보며 올랐다. 위쪽 어딘가에서 사람들의 탄성이 연이어 들려왔다. 아래층의 모습에 실망해서인지 별다른 기대는 가지지 않고 허벅지를 손으로 도우며 계단을 오르는 일에만 집중을 하다가 그만 나도 모르게 큰 소리를 뱉고 말았다. “와아.”
그곳은 그 안 든 것이 어떠한 모습의 어떤 마음의 사람이든 그 안에 든 것이 어떤 피비린내가 나는 프로필을 지닌 물건이든 아이들의 보석함의 고증 없는 ‘보석’ 들처럼, 모두를 모든 것을 그저 순수히 빛나게만 만들어버리는 섬뜩한 마법의 공간이었다. 15미터의 거대한 스테인글라스가 최소한의 테두리만 두른 채 공간 안으로 피할 수 없는 색깔을 쏟아내고 있었다. 아름다웠다. 고개를 들고 오래도록 바라보게 하는 것들, 가령 하늘이나 별 같은 것들. 내가 한다던 비워내고 납득하는 그런 아름다움 말고 집요하게 강요하는 채우고 또 채워서 지나침을 훨씬 더 지나쳐 내가 모르는 곳으로 그곳으로 넘어가 버린 아름다움을 보면서 나는 내가 하는 예술이 미리 지고서 핑계만 오래 고민하고 있던 건 아닌지 조금 씁쓸했다. 이 곳은 온통 빼곡하다. 빈 손으로 꾸밈도 없이 걷기 위해 오랜 시간 나를 붙잡고 얘기를 해 왔는데 벌칙처럼 온통 내가 못하는 그저 아이처럼 넋 놓고 바라보고 있어야 할 것이 가득한 이 곳으로 불쑥 와버렸다.
우습다. 사람은 그렇게 멋대로 걸어간다. 자기 물건이 가장 지겨워서, 자신과 다른 이의 품으로 기꺼이 간다. 그렇게 걷다 보면 어느새 낯설어진 나를 나는 또 가까스로 소개를 해야 하겠지. 내가 마치 이런 사람이었던 것처럼.
 돈도 잘 내고 길도 잘 찾고 하지만 내일에 해야 말만은 여전히 모른다. Oui ou Non 으로 대답하는 내 시꺼먼 마음에 뭐가 걸쭉하게 녹아 있는지 꺼내지 못해서 모르겠다. 가끔은 주말에 무엇을 또 보러 가기가 조금 겁날 때가 있다. 보고 좋아하는 거 말고 내가 해서 보여주고 싶어 그런 거겠지. 안다. 그 마음.  좋은 것을 보고 나면 우린 더 많이 지쳐 파리 지하철의 악명도 다 잊고서 머리를 붙여가며 졸기까지 한다. 안다. 당신의 그 마음도. 글, 영상 레오 촬영 레오, 엠마 2019.10.29 파리일기_두려운 날들이 우습게 지나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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헐 중간에 엄청 긴장하고 봐쪄여
@goodmorningman 그러게요 저도 파리와서 처음으로 얼었던 순간이었어요 ㅠ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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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채꽃으로 물든 서래섬
이번 포스팅은 햇빛이 반짝이는 오월에 서래섬을 다녀온 이야기입니다. 신반포역 1번 출구에서 10-15분 정도 걸으면 서래섬이 나오며, 주차 공간도 있어 자가용으로 가기도 좋습니다. 서래섬: 서울 서초구 반포동 다리를 건너자마자 오른편에 있는 미니 장미 정원입니다. 곁에 쭈그려 앉아 장미를 따라 그리던 여대생의 모습이 인상적이었습니다. 낭만은 어디에나 있습니다. 왼쪽으로 고개를 돌리자마자 감탄사가 절로 나옵니다. 유채꽃밭이 광활하게 펼쳐져 있습니다. 유채꽃 자체는 작지만, 군락을 이룰 때 아름다움이 배가 됩니다. 노란 물결에 물드는 눈이 좋습니다. 벌과 나비, 새가 날아다니고, 꽃과 나무가 흔들립니다. 인공적이지만, 이런 공간을 만듦으로써 사람과 동물이 함께 쉴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오래 공존하고 싶습니다. 오은 시인의 '없음의 대명사'속 표현이 생각나는 풍경입니다. 범람하는 명랑. 유채꽃밭은 쉬는 공간이 거의 없기에 햇빛을 정면으로 받아야 합니다. 썬크림 꼭 바르시고, 선글라스나 모자, 양산, 물을 챙기시는 걸 추천합니다. 근처에 편의점이 있지만, 다리를 다시 건너야 해서 미리 챙겨서 가시면 더 편리합니다. 누구나 한두 가지쯤은 다시 돌아보고 싶은 과거가 있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오늘을 잘 살아야 합니다. - 책 '생에 감사해'에서 발췌 - 끝까지 가면 흔들그네와 벤치, 꽃 정원이 있습니다. 가볍게 둘러보고 다시 유채꽃밭을 지나 편의점으로 향했습니다. 마르고 허기진 몸을 간단히 채우고, 다시 길을 나섭니다. 다른 날 찍은 영상이지만, 하루를 마무리 지으며 곁들여 봅니다. 유채꽃밭 포스팅, 잘 보셨나요? 풍경보다 제 뒷모습이 많이 나와 머쓱해집니다. 조용히 살고 싶으면서도 어딘가에 내 흔적을 남기고 싶은 역설을 느끼며 오늘도 기록합니다. 여러분의 오늘을 궁금해하며 보름달을 삼키며 잠에 듭니다.
피의 언덕, 몽마르뜨
파리의 집들은 건물에 창을 가리는 가리개가 장착이 되어 있다. 오래된 집들은 나무판자로 짜인 나무 덧창이 유리창 바깥쪽에 달려 있고, 우리 집처럼 발같이 내렸다가 올렸다가 할 수 있게끔 되어 있는 곳도 많다. 우리 집은 큰 도로를 끼고 있어, 밤늦은 시간까지도 오가는 차들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우리 집 벽에다 침입자를 풀어놓는다. 하여 내가 좋아하는 노을이 흩어지고 나면 덧창을 돌돌 돌려 빛과 집을 갈라 둔다.  불을 끄면 그야말로 암흑이다. 서로를 더듬어야 찾을 수 있을 만큼 어둡다. 처음에는 이러한 어둠에 적응이 안되었지만 지금은 금세 그녀의 온기에 기절을 해버린다. 아침이 오면 소리는 아침을 알려도 빛은 어떤 소식도 전해줄 수가 없다. 그래서 아침에 일어나 어두운 방을 더듬어 창가로 가 무거운 발을 천천히 돌려 열 때면 일종의 기대감이 생긴다. 오늘 날씨는 어떨까? 프랑스의 겨울은 거의 흐리고 비도 잦기 때문에 기대는 자주 무너지지만 오늘처럼 맑은 날이면 어디론가 당장이라도 달려 나가고 싶은 마음이 든다. 날이 아주 좋았다. 이틀 전만 해도 소나기가 같은 비가 내리다가 해가 지자 파리에서는 무척 귀하다는 눈이 되어 내렸다. 파리에서 맡는 첫눈이라니. ‘신기하다’ 라는 말을 또 버릇처럼 뱉으며 우리는 아이처럼 팔을 우산 밖으로 내밀어 내리는 눈을 일부러 옷에 묻히곤 했다.  날이 아주 좋았다. 오늘은. 구름이 아예 없는 것은 아니었지만 햇빛은 어떻게든 틈을 찾아 땅을 노랗게 다 칠을 해두었다. 엠마도 오랜만에 밝은 날에 기분이 좋은지 오늘은 조금 먼 곳까지 가보자고 했다. 어디가 좋을까 하다가 몽마르뜨가 눈에 걸렸단다. 관광객들에겐 악명 또한 높은 곳이라 우리가 여태껏 가볼 생각도 않았던 곳. 우리 집은 파리의 남쪽에 있어서 몽마르뜨까지는 시간이 꽤 걸린다. 프랑스의 겨울은 낮이 짧기 때문에 우리는 마음부터 서둘렀다. 혹시 몰라 돗자리와 커피, 따뜻한 차까지 챙겨 들고 집시들과 팔찌를 강매하는 이들이 있다는 곳, 몽마르뜨를 향해 겁 없이 발걸음을 서둘렀다. 우리는 사람들이 많이 찾는 2호선의 Anvers역이 아니라 14호선의 Abbesses역에서 내렸다. 노을이 내리는 시간에 맞춰 몽마르뜨에 오르기 위해서 시내에서 상점들을 둘러보며 시간을 조금 보냈다. 어제는 노란 조끼 시위 때문에 시내의 주요 역들이 문을 닫았다는데.. 오늘도 알 수 없는 시위가 있어 시내에는 무장한 경찰들이 가득했다. 아직은 본격적인 세일 시즌이 아니어서 쇼핑에는 별달리 흥미를 느끼지 못하고 거리의 건물들에 내려앉은 귀한 햇빛이나 구경하면서 몽마르뜨 언덕 쪽으로 걸었다.  중간에 생라자흐 역이 있어 화장실도 들를 겸 들려보았다. 생라자흐역의 대합실은 2012년에 전면적인 리모델링을 해 깔끔한 현대식 상점들이 벽을 온통 차지하고 있었다. 모네의 그림과 앙리 카르티에 브레송의 사진과 같은 분위기는 적어도 쇼핑몰로 바뀐 지금의 대합실에서는 찾을 수 없었다. 이미지와 삶의 장소에서 사람들은 전혀 다른 것을 바란다. 유지와 변화, 낡음과 새로움, 불편과 편리 사이의 갈등은 모든 오래된 도시들에겐 쉽게 가라앉힐 수 없는 문제들일 테다. 사람들이 바라는 정상적인 사람들이 모인 도시의 매끄럽고 조용한 하루도 누구에게는 견딜 수 없는 병실 같은 곳이 될 테고. 아무래도 테러가 일어난 지 몇 년이 안 되어서인지 자동소총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4명씩 짝을 이뤄 역 안을 순찰하고 있었다. 베레모를 쓰고 있지만 허리에 철모를 차고 있었다. 어깨를 뭉치게 할 한 팔 길이의 자동소총을 매고 주변을 둘러보는 병사는 여드름이 다 지워지지 않은 금발의 청년이었다. 역시나 이곳도 파리의 다른 곳과 마찬가지로 화장실이 유료였다. 1유로나 하는 통에 줄까지 길어 우리는 화장실 가는 것을 포기하고 생라자흐역에서 지하철을 타고 Abbesses역으로 곧장 가기로 했다.  Abbesses역에서 몽마르뜨 언덕으로 나가는 출구는 무척 독특했다. 병원에서와 같은 육중한 엘리베이터가 두 개쯤 있고 계단은 중세 시대 성처럼 나선형으로 빙빙 돌아 올라가게 되어 있었다. 스무 번도 더 꺾이는 나선형 계단에 어지러움마저 느끼며 허벅지를 부여잡고 지상으로 나가자 아이들이 졸라대는 회전목마 너머로 기대하지 않았던 ‘사랑해 벽’ 이 보였다. 굳이 가봐야지 하는 생각은 안 했었는데 막상 보니 파란색 벽이 무척 예뻤고 사람들이 그리 많지는 않아 슬쩍 들려서 사진을 찍고 찍어주었다. “자, 이제 긴장해.” “응, 긴장해.” 서로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사인을 해달라는 꼬마들이 천사 같은 웃음을 띄면서 달려들었고, 우리는 ‘농, 파흐동.’을 연발하면서 아이들을 벗어나 좁은 언덕길을 향해 총총걸음을 걸었다.  걱정과 달리 Abbesses역에서 사크헤 쾨흐 대성당까지 가는 길에는 집시들과 팔찌를 강매하는 무리들이 없었다. 좁은 골목들이 갈라진 틈으로 파리의 시내들이 조금씩 내려다 보였다. 좁은 길에는 카페와 빵집, 작은 레스토랑 그리고 중고의류와 액세서리들을 파는 가게들이 많이 있었다. 우리가 들려 본 한 가게는 옛 창고를 그대로 고쳐서 쓴 듯 철제로 된 나선형 계단을 서로 비켜주면서 내려간 지하 쇼룸은 오래된 지하무덤에 온 것만 같았다. 좁은 쇼룸 안에는 한 벌씩 밖에는 없을 듯한 옷들이 적당히 진열되어 있었다. 대부분의 커플들과 부부들이 그러하듯 여자들은 옷을 고르고 남자들은 통로와 구석에서 자신들의 파트너를 넌지시 바라보면서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길을 내어주느라 또 나름 바빴다. 서로 눈이 마주치면 어색해서 한 두 번을 옷을 찾는 듯 뒤적거리는 것도 꼭 같았다. 나도 엠마가 옷을 고르면 가서 한마디 의견을 보태주고 다시 물러나서 여러 사람에게 길을 내주고 다시 자리를 잡고 하는 일을 반복했다. 내심 마음에 드는 옷이 있는 듯했지만 한국과 달리 구입은 하지 않고 나의 손목만 잡고 상점을 빠져나가는 엠마였다.  또 두어 번의 긴 계단을 기어가듯 오르자 하얗고 이질적인 사크헤 쾨흐 대성당이 우리의 눈을 찔러댔다. 대리석 안에 함유된 방해석 성분 때문에 시간이 지나도 하얀빛을 잃지 않는다는 모스크를 닮은 신기한 이름의 거대한 성당. 마치 파리의 자잘한 건물들을 피해 언덕에 내린 우주선 같은 이 이상한 성당을 향해 조금씩 걸어가자 성당을 등 뒤에 두고 어디론가로 연신 셔터를 눌러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보였다. 그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산 하나 없는, 같은 높이의 건물들로 대지를 말끔히 지워 놓은 파리의 전경이 한눈에 보였다.  “우와.” 우린 우리도 모르게 탄성을 질렀다. 우리의 뒤쪽에서 걸어오던 여러 국적의 사람들도 연이어 탄성을 질렀다. 마치 넓게 덮인 구름의 무게에 눌린 듯 지독히도 같은 높이의 건물들이 조금씩 다른 모양으로 조금씩 다른 아이보리 빛을 반사시키면서 번져 있었고 간혹 보이는 뾰족하게 높은 성당의 첨탑들과 두드러지게 높아 보이는 에펠탑의 머리만이 이곳도 역시 하늘을 탐하는 ‘인간’의 도시임을 외치고 있었다. 산도 없고 어떠한 굴곡도 없는 평평하고 둥근 판이 우리를 바늘로 하여 천천히 돌고 있는 듯 어지러운 느낌마저 들었다.  아직은 노을도 시간이 남아 우리는 성당 안으로 들어가 보기로 했다. 사크헤 쾨흐 대성당은 게임의 속 배경인 것만 같은 둥근 모양의 외형과는 달리 실내는 성당 안에 든 사람들에게 강제로 숭고함을 쥐어주게끔 만들어져 있었다. 넓은 성당의 한가운데에 거대한 돔이 서 있었고 그 돔의 가슴쯤을 갈라 낸 창문들에서 내려온 빛들이 반사와 반사를 이어가면서 성당 전체를 같은 밝기로 밝히고 있었다. 어두운 벽 곳곳에 모자이크된 성화들은 어두운 색들로 채색되어 있어 그림 하나하나가 눈에 들어오기보다는 모두가 성당 안의 어떤 전체적인 분위기를 만들어 내고 있었다. 다만 중앙 제대 위의 작은 돔을 가득 덮은 예수의 성심을 나타난 거대한 모자이크화만은 사람들에게 이 성당의 존재 이유를 강변하고 있는 듯 강렬했다. 대성당은 미사와 기도를 드리는 성당 중앙을 비어 두고 관람객들이 그 주변을 한 바퀴 둘러 나갈 수 있게끔 되어 있었다. 우리가 성당 안을 천천히 돌아나가는 동안 1885년부터 끊이지 않고 이어져 오는 성체조배가 행해지고 있었다. 수녀님이 부르는 성가는 조금 섬뜩하게 아름다워 잠시 멈춰 바라보는 사이 하마터만 나의 죄를 다 고백할 뻔했다.  대성당이 자리 잡은 몽마르뜨 언덕은 지금은 낭만과 예술의 상징으로 여겨지지만 역사적으로는 파리 전역을 내려다볼 수 있는 지리적 이점 때문에 파리를 온통 불태울 수 있는 포대가 설치되어 있었던 곳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은 파리의 최후의 보루였고, 이곳을 차지한 이들이 곧 파리의 주인이기도 했다. 나폴레옹 3세가 프로이센에게 무력하게 항복을 한 후 세워진 제3공화정은 프로이센에 대한 항전을 계속 이어가지만 곧 파리를 포위당하고 만다. 프로이센 군에게 사방을 포위당한 채 132일 동안 외부로부터 어떠한 물자도 공급받지 못한 파리의 시민들은 동물원의 동물들, 거리의 고양이, 심지어 숨은 쥐까지 잡아먹어야 할 만큼 비참한 상황이었다. 이에 결국 3공화정부는 프로이센에게 굴욕적인 항복을 하고 이후 선거를 통해 구성된 정부는 왕당파등 보수파가 다수를 차지하게 된다.  정부를 차지한 보수파들은 대혁명의 유산이자 프로이센에 대항해 최후까지 항전을 하던 파리를 오히려 적으로 여기며 파리를 무력화시키고자 몽마르뜨의 포대를 장악하고 파리에 있는 국민 의용군의 무장을 해제하려고 했다. 그런 공화정부에 반대해 일어난 파리 시민들의 봉기는 세계 역사 상 최초의 사회주의 정부인 파리 코뮌을 출범시키게 된다. 지금 봐도 놀랄만한 여러 가지 진보적인 정책들을 펼치며 시민들에 의한 정부를 꿈꾸었던 파리 코뮌은 72일 만에 사회주의 혁명을 두려워하는 유럽의 지원에 힘입은 보수적인 공화정부에 의해 잔인하게 진압되었다. 당시 175만 정도였던 파리의 인구 중에 2프로에 가까운 3만여 명의 시민들이 한 번에 학살을 당했다. 코뮌에 대한 보수파의 피비린내 나는 학살이 끝난 후 보수파 정부는 프로이센에 대한 굴욕적인 패배를 포함한 이 모든 비극이 자신들의 도덕적인 타락의 징벌이라는 교회의 믿음에 따라 다분히 의심스러운 속죄하는 마음을 담아(속죄하는 말 아래 기존의 질서로 다시 정리되길 원하는 보수파의 의도 또한 담아) 피의 언덕 꼭대기에 이 대성당의 건립을 추진했다. 대성당은 30여 년의 시간 동안 진짜로 징벌을 받고 있었을 민중의 기부금만으로 만들어졌다. 건축가가 이 지독한 분위기를 만들어 내기 위해 얼마나 노력했을지. 건물을 나와 전망대로 유명한 대성당의 돔에 오르려다 6유로나 하는 가격과 가득한 사람들, 그리고 얼마 남지 않은 낮 등을 이유로 우리는 그만 발길을 돌렸다. 사람들이 다 보는 곳 말고, 나만이 발견한 것 같은 착각이라도 가질 수 있는 곳을 원하는 건 바꿀 수 없는 나의 혹은 우리의 버릇이다. 어릴 적부터 예술하는 사람을 꿈꾸면서 처음에는 지독히 노력을 했고 마침내는 지울 수 없는 강박이 되어 버린 것이 바로 ‘나만의 것’이라는 환상이다. 어릴 때는 남들이 따라 할까 무서워서 무슨 생각이 들면 남들에게 심지어 선생님에게도 의견을 구하지 않았고 남들을 따라 하게 되는 일도 무서워서 사람들의 충고 또한 흘려듣고 보고 배워야 할 작품들 또한 일부러 보지 않으려 하면서 스스로를 작은 감옥에 가뒤 놓곤 했었다. 이제 와서 보면 예술이라는 것은 자기 안에서 시작하는 것은 맞지만 오로지 자기 안에서만 결정되어 나오는 것은 아니고 문제로 가득한 어떤 가여운 자아가 세상과 부딪히는 순간, 누구의 결재도 없이 어지럽게 튕겨 나오는 것들, 다만 그것 중에 무엇일 뿐인 것을 안다. 그 여러 잔해들 속에서 또 마치 자신 능력 안에서 키워 낸 자신만의 것인 듯 하나를 골라 몰래 적당히 망쳐가다가 너무 늦었다며 께름하게 자기 이름을 써 놓고 뒤돌아 울곤 하는 거겠지. 아름다움은 세상에 있는 것은 아니다. 세상은 그저 순수함 그 자체이니까. 아름다움은 순수함을 잡으려는 욕심이고 그래서 순수함을 결국 훼손시키는 폭력적인 행위이기도 하다. 시선은 한계가 있다. 너비와 깊이 또 지속시간에서 모두 한계가 있다. 그러므로 결국 바라보는 행위조차 순수함을 잘라내는 것이다. 아름답다면서 무엇과 무엇을 갈라놓고 무엇만을 더 오래 기억하려고 하는 것 그 자체가 일종의 불순함이다. 아름다움이라는 것 자체가 있다고 믿는 사람도 있고, 자신을 아름다움의 시작으로 여기는 사람도 있지만 결국 그 누구도 자신만의 힘으로는 아름다움을 얻어낼 수 없다. 무엇보다 일단 만나야 하는 것이니까. 그리고 그 어떤 단계에서 조차 순수한 자기만의 의견을 가질 수도 없다. 오래된 무한에 가까운 기억들이 나를 속이고 나의 의견에 남들의 의견을 섞고 티가 나지 않게 흔들어 놓는다. 고민하고 고민하다가 모르겠다고 하고 내 이름을 써 놓았지만 그게 나의 것일까 나는 결국 무엇일까 하는 질문만은 절대로 지울 수가 없다. 순수하게 넓은 지평에서 나의 우연한 위치와 나의 보잘것없는 선택이 실은 내가 하는 건지도 모를 선택이 모여서 만든 조악한 형상. 그러니까 무엇도 열광할 만큼 대단하지 못하고 또 무엇도 경멸할 만큼 나쁘지 않다. 결국은 하나의 다 우연한 조각일 뿐.  하지만 길을 즐긴다는 불순함은 길을 하나로 보지 않는 일에서만 가능한 것. 한 걸음이 한 걸음과 다르다고 믿게 만드는 몹쓸 자의식이 결국 오해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를 한 걸음과 다른 한 걸음이 있다고 믿게끔 만드어 주는 것. 결국 예술이 종교에 기대어 생명을 이어왔지만 그것은 일종의 기만이었고 예술은 종교를 위한 것이 아니라 차라리 다른 종교 인지도. 예술을 한다는 것은 내가 우연한 기회에 잘라 가진 무엇으로 ‘이건 정말이지 ‘무엇’ 을 의미하고 있어!’ 라며 누군가에게 강요하는 일. 그러니까 그것은 곧 위험한 포교인 거다. 성공하면 권력을 가지지만 실패하면 돌을 맞거나 쫓겨나 굶주리게 되는 것. 돌아가는 길에 난관을 붙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따라 나도 난관에 붙어 노을 안에 선 에펠탑을 찍었다. 무엇을 보고 무엇을 쓰고 그래서 결국 무엇이고 싶은 걸까. 바람이 차서 상점에 들려 털모자를 사려다가 맞는 것이 없어 두고 나왔다. 그리고 우리는 작은 광장에 모여 초상화를 그리는 화가들을 지나 또 두어 번 긴 계단을 걸어 육중한 엘리베이터가 있는 Abbesses역으로 돌아갔다. 글, 이미지 레오 2019.11.25 파리일기_두려운 시간들이 우습게 지나갔
저게 에펠이야?
11월 11일은 1차 세계 대전이 종전한 날이어서 프랑스에서는 휴일이다. 올해는 그날이 마침 월요일이어서 토일월 3일간의 연휴가 생겼다. 지난주 서울에 다녀오고 또 바로 이사를 하다가 근육을 다쳐서 학교를 오갈 때 어려움이 많았는데 몸과 마음 모두 여유를 찾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질 수 있어 다행이었다. 토요일 정오에는 계좌 개설을 위한 헝데뷰가 있어 Place D’Italie역 근처의 LCL로 갔다. 담당 직원과 안 되는 영어로 소통을 하려니 등에서 식은땀이 다 났다. 이쪽도 저쪽도 영어가 완벽하지 않으니까 직원도 뭔가를 설명하려다 포기하는 듯하고 나도 뭔가 확실하게 들은 게 없어서 찜찜한 마음을 감출 수 없었다. 프랑스 은행은 한국과 다르게 계좌 유지비가 있고, 카드를 분실했을 때를 대비해서 드는 의무적인(하지만 확실하지는 않는) 보험이 있다. LCL은 학생의 경우 계좌 유지비가 거의 무료와 마친가지라서 학생들에게 인기가 높은데 직원이 나는 나이가 많아서 해당이 안된다고 했다.(그런데 결국 할인이 됐다.) 원래 엠마와 나 모두 선임급의 직원에게 헝데뷰를 잡았었는데 한 번에 한 사람씩 밖에 상담이 안된다 하여 나는 다른 신참 직원과 상담을 하게 되었다. 신참 직원은 머리와 생김새가 앙투완 그리즈만을 꼭 닮았는데 뭔가를 열심히 하긴 하고 또 꽤나 여유가 있는 척을 했지만 내 눈에 보기에도 많이 서툴렀고 계산이 자꾸 바뀌고 말도 자주 바뀌었다. 몇 번의 한숨, 포기, 번역기를 통한 번거로운 소통을 겪으며 나는 얼른 프랑스어를 잘해야겠다 하는 마음이 굴뚝 넘은 연기만큼 높아졌다. 결국 그 직원은 선임 직원에게 전화로 한소리를 듣고 또 한참을 헤매다가 수요일에 다시 오라는 말을 했는데.. 상담을 끝내고 받은 서류는 엠마와 틀린 게 없었다. 수요일 오라고 한 것도 맞긴 한 건지.. 찜찜한 마음을 안고 지하철을 탔다. 연휴의 시작을 앞두고 엠마가 물었다. “파리에서 제일 가보고 싶었던 곳이 어디야? 거길 가보자.” 나는 망설임 없이 대답을 했다. Place D’Italie역에서 6호선을 타고 서쪽을 향해 갔다. 6호선은 우리가 늘 타는 7호선과는 다르게 문에 있는 손잡이를 위쪽으로 돌려야 문이 열린다. 연휴의 시작이라 그런지 나들이를 가는 연인과 친구들 그리고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나온 젊은 부부들이 가득했다. 출근 시간과 다름없이 혼잡한 지하철이 Bir-Hakeim역에 도착을 하자 차 안의 승객 거의 대부분이 내렸다. 당연히 우리도 내렸다. 출구 번호를 찾을 필요도 없었다. 다들 La Tour Eiffel을 보러 온 거니까. 지하철 출구를 나와 센느 강변을 따라 오른쪽으로 발을 돌리자 거대한 철골구조가 두 눈에 들어왔다. “저게 에펠이야?” 가까이에서 본 에펠은 아름답기 보다는 조금 무서웠던 게 사실이다. 하지만 무언가를 가지기 위해서는 상징이 필요하니까 우리가 가지는 것은 결국 상징과 같은 그림들 사진들 그리고 몇 마디의 말이나 글뿐이니까. 상징이 상징다워질 수 있게 우리는 에펠을 지나 조금 멀리까지 걸어가 보기로 했다. 센느강을 따라 예쁘다고 소문이 난 알렉상드르 3세 다리까지 산책을 하기로 했다. 한주 내내 흐리고 비가 오던 파리는 그날만큼은 맑았고 노을이 내려앉은 센느강은 서쪽 끝이 온통 노랗게 불타올라 강이 아니라 커다란 태양이 내뿜는 하나 은색 빛줄기인 것만 같았다. 군데군데 포즈를 잡고 사진을 찍는 사람들을 요리조리 피해 가며 동쪽으로 조금 걸어 나가자 거대하고 검고 무섭기만 하던 에펠이 점점 친숙한 모양으로 변해가고 있었다. 한 손에 잡힐 듯 작아진 에펠은 노랗고 푸른 하늘을 걸치고 ‘이젠 어때?’ 말하는 듯했고, 우리는 몇 걸음마다 멈춰 서며 상징을 가지려 애를 썼다. 센느강을 따라 걷고 강변에 앉아 싸온 커피와 크로와상을 먹으면서 다리와 탑 그 자체만이 아닌 그날의 다리와 탑을 즐길 수 있다는 것에 무척 행복했다. 돌아서 가고 돌아가고 다시 또 올 수 있다는 것. 문득 엠마와 처음으로 라오스 여행을 갔을 때, 함께 차를 탄 독일인이 우리의 10일간의 여행 일정을 듣고 매우 놀라워하던 생각이 났다. 어디를 가는 것, 무언가를 가지는 것만 아닌 어디에선가 지내고 무언가를 쓰는 것 그래서 삶과 삶 아닌 것 둘 사이에서 오고 가는 것이 아니라, 이곳에서도 저곳에서도 가볍게 살아가는 것. 그래 그것이 우선 내가 바란 작은 욕심이었지. 어느새 파리를 외쳐대는 풍경들보다 집에 가기 싫다고 부모의 반대로 달려대는 붉은색 패닝의 꼬마 아이, 파리 안의 (파리가 아니라 그 어디에라도 안의) 사람들에게로 시선이 옮겨갔다. 버리고 온 것도 포기하고 온 것도 아니구나. 어느 곳에서도 피할 수 없는 질문이고 끊을 수 없는 관심이구나. “엠마, 나 잘해볼게.” ‘좋은 날이었다’ 라고 서로 말해주었고, ‘좋은 날이었다’ 고 쓰고 싶었다. 글, 영상 레오 2019.11.14 파리일기_두려운 날들이 우습게 지나갔다
6월에 딱 가기 좋은 제주도 힐링여행 코스
1️⃣ 문도지오름 - 방목된 말과 함께 멋진 풍경을 볼 수 있는 오름 - 주차: 명성목장/ 입장료: 무료 - 큰길에서 명성목장까지는 잘 다듬어지지 않은 숲길을 따라 10분 정도, 그리고 명성목장에서 오름 정상까지는 도보로 10분 - 본래는 사유지인데 목장 주인분의 배려로 자유롭게 탐방할 수 있는 말 방목지 2️⃣ 상효원수목원 - 1년 내내 꽃 축제가 열리는, 서귀포에 자리한 8만 평 규모의 수목원 - 천천히 걸으며 산책하거나 투어 기차를 타고 탐방할 수 있는 코스! - 다 둘러보는 데는 넉넉잡아 두 시간 - 입장료: 성인 9,000원/ 청소년과 경로 7,000원/ 어린이 5,000원 - 운영 시간: 하절기 오전 9시~오후 7시(마감 오후 6시) 3️⃣ 제주돌마을공원 - 30년간 수집해 온 제주의 수석, 자연석, 화산석 등을 전시해 놓은 곳 - 다 둘러보는 데는 40분 정도가 소요되며, 잘 정비된 산책로가 마련되어 있고나무와 꽃, 그리고 100% 자연 그대로의 제주돌을 만날 수 있는 곳 - 입장료: 6,000원/ (30개월~중학생까지) 3,000원 - 운영 시간: 하절기 오전 9시~ 오후 6시 4️⃣ 수산봉 - 애월 그네 포토존으로 유명한 곳 - 주차: 수산유원지/ 입장료: 무료 - 주차장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그네가 있으며, 그네에서는 수산 저수지뿐만 아니라 비행기 나는 모습도 볼 수 있음! 5️⃣ 제주 힐링스파족욕 - 제주도 인근에 자리한 제주힐링스파족욕 - 주차: 제주힐링스파족욕 뒤편 무료 공영주차장 - 비행기 떠나기 2시간 전 넉넉잡아 여행과 일상의 피로를 풀고 가기 좋은 곳 - 손욕과 족욕, 좌훈까지 가능하며, 1시간 1만 원에 이용할 수 있는 저온 찜질도 있습니다. https://youtu.be/U7vkdx1VN0o
100명의 작가들이 쓴 100개의 문장
잡지 ARENA에서 2014년에 기획했음 각자 부여받은 숫자로 한 문장을 완성하는 것 백 명의 작가가 한 문장씩, 모두 백 문장을 썼다. 전대미문(前代未聞), 전대미문(前代未文). 01. 주로 자정에서 새벽 1시 사이, 마음속으로 작은 조종을 울리며, 하루를 매장하고, 성호를 긋는 것으로 하루의 장례식을 치르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는 날들이 점점 더 늘어가고 있다. 정영문(소설가) 02. 항상 2명씩 짝지어 다녀야 했던 소녀 시절 교실은 간혹 홀수 총원이었기에 귀신처럼 남는 애가 꼭 있었다. 박민정(소설가) 03. 3(삼)촌은 찬물에서 건진 물고기를 입속에 흘려 넣어주는 것이었다. 박상수(시인) 04. 4층에서 이륙하는 절망. 안현미(시인) 05. 사실 손가락이 반드시 5개씩 달려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장은정(평론가) 06. 저녁 6시, 빛의 날개가 접히는 시간. 이영주(시인) 07. 베티, 블루한 7과 카페 ‘르’에서 파삭파삭한 뽀뽀를. 장수진(시인) 08. 무한이 기립하는 순간, 눈사람 같은 8자의 눈을 보았다. 강정(시인) 09. 구인회의 미스터리, 도대체 9번째 멤버는 누구였을까? 안웅선(시인) 10. 10일 그 후 코펜하겐 소년과 자주 항구를 걸었다. 주하림(시인) 11. 잊는다는 건 곁에 두고 만나지 못한다는 것, 저 멀리 사라지는 11자 기찻길처럼. 임경섭(시인) 12. 한 사람은 12명을 새롭게 하고, 12명이 한 사람을 영원에 이르게 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 있다. 이혜연(시인) 13. 13번째 연필을 깎아 13번째 네 얼굴을 그린다. 김근(시인) 14. 우리 집 작은 고무나무는 어느 날 14번째 잎을 피웠으나 그 잎이 무엇인지 나는 모르고 어느새 잎이 무성해진 고무나무에게 오늘은 물을 주었다. 김나영(평론가) 15. 보름 후에라도 이 사태의 최종 책임자가 물러나면 좋겠지만, 사실은 15초도 견딜 수 없어, 젠장. 송종원(평론가) 16. 키스를 해보기로 마음먹은 16세의 우리는 나란히 양치를 하고 돌아와 입을 맞추었다.이수진(소설가) 17. 17p. 이제 그만 이곳을 나가고 싶다. - [굿바이 줄리]. 몰인정과 무책임이 17들을 수장했다. 여기선 지금 죽음이 제일 젊다. 이현승(시인) 18. 18세-살아 있었다면 너는 더 먼 곳으로 여행을 갔겠지, 별을 세었겠지, 초여름의 신록을 입었겠지, 바닷물로 짠 수의 같은 건 절대로 입지 않았을 거야. 김은경(시인) 19. 정오까지는 19분 전, 한낮의 햇빛이 있었고, 무엇이 우리를 기다리는지 알 수 없었다. 이제니(시인) 20. 담배 한 갑 안에는 20개비가 들었습니다. 이강진(평론가) 21. 토요일 잠에서 깨어나, 21로 끝나는 제목의 주간지를 집어 든 여자는 지난밤 자신이 살고 있는 건 이 세기가 간절히 원하기 때문이라고 노래하던 남자가 떠올라 그 터무니없는 야심에 실소가 터졌다가 문득 그가 무사히 집에 들어갔을지 궁금해졌다. 황예인(평론가) 22. 애타는 여름의 초입에서 ‘대한민국 헌법 제 22조 1항 ‘모든 국민은 학문과 예술의 자유를 가진다’는 한 줄, 오랫동안 쓰다듬는다. 강지혜(시인) 23. 어느 날 나는 FM 방송으로 음악을 들으면서 동시에 장파로 뉴스를 들을 경우 쇤베르크의 작품 제 23번의 어려운 피아노 악보를 더 잘 이해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미셸 슈나이더 ‘글렌 굴드, 피아노 솔로’. 민구(시인) 24. 24시간이 모자라, [아레나]를 읽기엔…. 석지연(시인) 25. 세상에서 가장 긴 잠옷인 악몽의 25개째 단추를 채운다. 이용임(시인) 26. 26세에 요절한 단 한 명의 가수가 26년 동안이나 우리를 슬프게 만들었다면, 올해 물속으로 사라져버린 수많은 희망들을 우리가 26년이 훨씬 넘어서도 기억하는 일은 당연하다. 김상혁(시인) 27. 27명의 증인들이 문을 닫자 27마리의 새가 떨어졌다. 김선재(시인) 28. 동양 천문의 28수(宿)는 별자리를 28개 구역으로 나눈 것, 28수는 온누리 별들의 각축장, 빛을 뽐내는 별들의 [아레나]! 이현호(시인) 29. ‘사물의 의미를 파악하고 모호이자 비밀인 삼라만상의 지식을 구하는 정확한 계산법. - 오래전 상하 이집트 왕 니마트르 시대에 제작된 판본을 상하 이집트 폐하 오세르 치하 서른세 번째 해 아크헤트 네 번째 달에 서기 아메스가 필경하다.’ - [린드 수학 파피루스] (BC 1650년경, 대영박물관 소장), 소수 개념을 밝힌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문헌. 윤경희(평론가) 30. 30세의 첫날 밤, 나는 어둠을 향해 눈을 뭉쳐 던졌다, 손바닥이 아릴 때까지. 혹은 나는 30대의 전반을 이명박 정부 밑에서, 후반을 박근혜 정부 밑에서 보내고 있다. 신철규(시인) 31. 31은 11번째 소수, 11은 5번째 소수, 나눌 수 없는 수로서 나눌 수 없는 자리에 놓여 있으니 발을 쭉 뻗고 자기에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신해욱(시인) 32. 내가 한 달의 32번째 날을 발견한다면 여분의 나는 다른 숨을 쉬고 있겠지. 하재연(시인) 33. 33, 하고 적으면 늘어선 그것들이 하나는 안고, 하나는 안긴 것 같고, 또 멀리 날아갈 것 같았다. 김소희(시인) 34. 34명의 아이가 사라졌다. 김소형(시인) 35. 너의 체온은 35 ℃, 언제나 조금 차갑고 불안하다. 유연(소설가) 36. 우리는 36개의 아름다운 손가락 중 일부만을 겨우 펼치거나 꼽으며 살아가다가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모든 손가락을 필사적으로 펼치는지 모른다. 이진희(시인) 37. 37세의 생일에는 중소형 아파트 지하 주차장에서 고급 세단을 주차시키는 사람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당신과 당신이 모여 지금의 우리가 되어버렸네. 서효인(시인) 38. 어렸을 때는 광땡인 줄로만 알았고 커서는 여성의 날로 가까워진 38, 작년에 내 두 번째 시집의 번호가 되었다. 오은(시인) 39. 일본어로 39는 하츠네미쿠를 뜻한다고 한다. 송승언(시인) 40. 40수 코튼의 감촉이나 40도 술의 향기로움, 40대 오빠들의 팽팽함과 40주년 한정판 스니커즈의 착화감처럼 일찍 알수록 좋은 디테일들이 40가지쯤 된다. 정세랑(소설가) 41. 우리 반은 41명이었고 누군가에게는 우리가 그저 41명 중 하나였을지도 모르지만, 그 애는 한 번도 나에게 41분의 1이었던 적이 없다. 전삼혜(소설가) 42. 바람 한번 불었는데 42명이 죽었다, 는 문장은 바람이 불어 한 명이 죽었다 혹은 백 명이 죽었다보다 훨씬 그럴듯하다. 특성 없는 애매한 숫자는 가상의 세계에서 환영받지. 정용준(소설가) 43. 네이버에서 43을 검색하니 being three more than forty라고 한다. 한유주(소설가) 44. 잘라라, 44로운 그 감정을! 양경언(평론가) 45. 안녕 나의 외계 45호. 강성은(시인) 46. 그는 46호로 들어간다. 박지혜(시인) 47. 그는 47호로 들어간다. 이준규(시인) 48. 48시간, 그들이, 우리들이, 죽지 않는 죽음이 되어간 시간. 박시하(시인) 49. 49일이 지나자 그는 비로소 여자가 되었고 시간의 생식기는 기능을 잃었다. 김현(시인) 50. 어린 나는 부모 앞에서 “오, 십 (50)” 천천히 발음했고 그들은 망설이며 거무스름한 손을 감췄다. 최지인(시인) 51. 절반이 반절로 바뀌는 카운트다운, 51. 서윤후(시인) 52. 52번 버스를 타고 남한산성 계곡으로 가자, 평상을 하나 빌려 세상 모르게 취해보자. 박준(시인) 53. 53만원이 생기면 빚을 더 갚을 수 있어 좋겠구나. 백상웅(시인) 54. 54, 성에 낀 버스 유리창에 누군가 적어두고 내렸다. 유계영(시인) 55. 희망 몸무게 55. 성동혁(시인) 56. 56년 뒤에 안락사할 것이다. 이이체(시인) 57. 57명의 여자와 교접했다. 박희수(시인) 58. 58처럼 두 자리가 아닌, 한 자리 숫자는 야하다. 최정진(시인) 59. 59번 버스가 터널을 빠져나오면 나는 그 사람이 울고 있었을 어느 오후의 뒷좌석을 생각한다. 박성준(시인) 60. 나는 60세에 은퇴하고 요양원 차려서 친구랑 살려고 하는데 요즘은 그린란드에 차릴까 생각한다. 김승일(시인) 61. 내가 탄 61번 버스의 종점은 항구와 항구가 끝인 사람들이 있는 곳이지만 종점에 닿기 전에 나는 이미 많은 것들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영효(시인) 62. 그의 62번째 영화 속 주인공은 바로 나인데, 영화는 “왜 떠나지 않냐”는 물음에 “그가 좋아서요”라고 대답하는 장면에서 끝이 나고, 결국 그것은 내게 일종의 자해일 수밖에 없게 되었다. 황현진(소설가) 63. 그는 그녀의 숨결까지도 잊은 적 없다고 생각했지만 그녀의 미소를 보고서야 그는 63년 전의 희미한 무엇이 겨우 떠올랐다. 백가흠(소설가) 64. 그녀는 자신이 한 시간 전에 차를 세워둔 64구역으로 천천히 걸어갔고, 차에 타기 전 그 옆에 주저앉아 아주 잠시 동안만 울었다. 손보미(소설가) 65. 온난화에 관심 있어요? - 북위 65도 알래스카에 사는 갈색 곰으로부터. 김은주(시인) 66. “몇 시냐”는 물음에 6시 6분을 66분이라고 대답한 날, 나는 종일 시간의 형상에 대해 생각했다. 류성훈(시인) 67. 당신이 던진 67개의 날카로운 쉼표가 소화되지 않는다. 최호빈(소설가) 68. 68개 문 중에 출구는 하나뿐인데 도무지 모르겠고 잘못 열면 괴물이 나온다. 김덕희(소설가) 69. 69에 관한 상형문자적 레테르: 내가 물구나무를 섰을 때 그는 나를 빤히 쳐다보았다. 한세정(시인) 70. 70가지 색의 알약들이 빛 속에서 흔들릴 때 문을 열고 그가 걸어 들어왔다. 백은선(시인) 71. 오늘 아침 느닷없이 71번째 생일을 선고받은 당신은 자신의 조카뻘 되는 어린 여자와 금방이라도 가라앉을 것 같은 노란 종이배 안에서 세상이 모두 얼굴을 돌린 위태로운 사랑을 나누다가 문득 비 맞은 창밖의 세월을 바라보고 길고 긴 한숨을 쉬었다. 최창근(극작가) 72. 나로부터 72걸음 밖에는 죽은 아이들이 매달려 노는 큰 나무가 있다. 안희연(시인) 73. 73번씩 마음을 바꾸고 돌아누워도, 우리는 여전히 방법을 모른다. 안미옥(시인) 74. 74개의 낱말로 이어 붙인 밤의 내부로부터 우리들은 시작되었다. 박찬세(시인) 75. 75 B? 최진영(소설가) 76. 76년 후, 아무도 믿지 않았지만 혜성이 돌아올 거라 예견했던 핼리처럼 현존을 넘어선 확신으로 미래를 바라볼 수 있기를. 문자영(시나리오 작가) 77. 77을 거침없이 아래로 잡아당기자 11이 되었다. 안주철(시인) 78. 화성에 쏘아 올린 78마리의 실험 동물 중 오직 나만이 살아남았다. 김성중(소설가) 79. 이 문장이 79번째 비문이다. 김태용(소설가) 80. 그들 중 80명은 사기꾼이거나 얼간이다. 윤민우(소설가) 81. 경험상, 81년생 여자들은 무척 아름답지만 고집이 엄청나게 셌는데, 중성자탄이 생산되던 해에 태어났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한다. 이영훈(소설가) 82. 나는 미몽, 혹은 무한한 가능성의 82번째 원자, 납의 어둠에 있다. 함성호(시인) 83. 왜 그토록 키에 집착했는지 모를 일이지만 각설하고, 키가 한 83cm쯤 되는 남자라면 함께 누웠을 때 그의 발톱이나 엄지발가락에 난 털을 지그시 내려다볼 수 있겠다는 상상을 했더랬다. 김민정(시인) 84. 치매에 걸린 할아버지는 자신의 84번째 생일을 잊어버리고 아기와 같은 형태로 바닥에 앉아 있었다. 김혜나(소설가) 85. 85국가 번호가 85인 나라는 아직 없다. 그 나라가 어딜까? 김언 86. 86년에는 대학 새내기였다. 모두를 가졌으므로 모두에게 승리한 봄날이었다. 이병률 87. 권력14. 타고난 걸까 만들어진 걸까, 그 일종의 병 불행, 나와 여러분들의 세상과의 관계는 그리 좋지 않습니다. - 2013년 11월 정태춘 시집 [노독일처] 중에서 87p. 박송이(시인) 88. 미지근한 봄날, 친구의 결혼식, 방콕행 비행기표, 먼 나라에 살고 있을 여전히 88한 너를 만나러. 강효미(동화작가) 89. 89마리 토끼들이 흰 언덕으로 가려면 열한 걸음. 이성미(시인) 90. 90개의 땀구멍에서 땀방울들이 일제히 솟구쳤다. 정이현(소설가) 91. 오늘의 문제 91번은 답이 없다는 게 문제다. 김지녀(시인) 92. 92번째 어둠에서 기다릴 것. 이원(시인) 93. 그의 100m 달리기 기록은 93초로 그리 빠르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는 누구보다도 많은 박수를 받았다. 윤고은(소설가) 94. 그는 94번째 A매치에서 패배한 후 갑작스레 은퇴를 선언했다. 김지훈(시인) 95. 그가 95(구오)라는 이름을 갖게 된 건 9월 5일에 태어났기 때문이었는데 그건 8월 8일이나 7월 7일에 태어났을 경우보다 훨씬 나았으므로 그는 자신을 행운아라고 생각했다. 김금희(소설가) 96. 엄마, 나는 96번째 양을 셀 때마다 더러워져요. 이성민(소설가) 97. 나에게 부여된 숫자가 97이라는 얘기를 들었을 때 세 사람의 얼굴이 동시에 떠올랐다. 조수경(소설가) 98. 처음으로 사람을 보고 가슴 뛰었던 때는 98년의 여름, 그 감정이 무엇이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다. 황인찬(시인) 99. 네가 99번째 여자야. 이우성(시인) 100. 나무에 난 상처를 쓰다듬어주니 가지가 100개나 되는 팔을 흔들어주네. 김기택(시인) 출처ㅣ더쿠
오늘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오늘 파리행 티켓을 끊었다. 며칠 전 새벽 괜찮은 가격에 괜찮은 항공사의 티켓이 보인다며 그녀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래, 이거 라면 끊을 수 있겠다 싶어 결제를 하려다 덜컥 이게 맞을까 겁이 나서 이것저것 조금만 더 알려보자 하던 참에 가격이 많이 올라버렸다. 탓할 일은 아니랬지만 미안했고 속이 많이 아팠다. "이렇게 오래도록 기다렸는데 뭘 더 망설이는 걸까." 그런데 오늘 아침, 그때 본 가격보다 훨씬 싸게 같은 시간 같은 항공사의 티켓이 풀려서 잠도 못 깬 얼굴로 서둘렀다. 복잡한 화면들이 채 지나가기 전에 카드사에서 친절한 문자가 왔다. 됐구나. 그렇게 서른여덟의 가을, 나는 그녀를 따라서 이유 없는 유학을 떠난다. 몇 해 전에 그녀가 갑자기 유학을 가고 싶다고 말을 했을 때 나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이 함께 가자는 말을 돌려주었다. 혼자서 이런저런 걱정을 했던 그녀는 그만큼 많이 놀랐지만 나는 조금도 놀라지 않았다. 걷고 있던 삶이다. 마지못해서 집을 나서고 카페와 공원을, 다른 이의 학교에서 또 걷던 삶이다. 어렵지 않다. (고 생각 했다 그때는.) 서른일곱 해 동안 나는 끈질기게 삶을 미정의 상태 속에 녹여 두려고만 했다는 것을 안다. 무엇이 되려 하기보다 무엇도 안되려고 했었던 나날들. 나의 가장 강력한 마음은 나를 구속하려는 힘들 앞에서 일어난다는 것을 안다. 나는 사관학교 전체와 싸워 본 적이 있고, 도와준다는 수많은 손들을 적으로 돌리기도 했었다. 붙잡힐 거 같아서 여기에서 이렇게 살면 된다고 혼 내려는 거 같아서 모래 장난처럼 쌓다가도 발로 으깨 버리고 엄마의 한숨을 벽 너머로 들으며 반성하듯 씻고 잠든 나날들. 그곳에서는 우리가 마음먹고 준비를 기다리는 사이 많은 일들이 일어났다. 테러가 일어났고 매주 노란 조끼를 입은 분들의 격렬한 시위가 있었고, 공짜와 다름없던 학비가 올랐고, 가장 높은 첨탑이 무너져 내렸다. 그곳은 이제는 더 이상 세상을 이끌어 가는 곳도 아니고 새로운 시도들이 움트는 곳도 아니다. 예술적이기보다는 상업적이고 새롭기보다는 보수적일 수 있다. 넥타이와 턱시도를 강요하고. 시네마를 고정하려는 곳이기도 하다. 하지만 괜찮다. 그곳은 내게는 가장 먼 서쪽. 핑계 없이 감내할 삶을 이제야 가져 볼 이곳 아닌 저곳. 누가 떠민 것도 아니고 그곳의 누구도 나를 받아주겠다고 하지 않는 우리가 억지로 날아가서 내린 땅이기에 괜찮다고. 눈을 뜨고 느껴지는 낯선 공기에 날을 세우고. 오랫동안 끓이기만 하던 죽에 불을 끄고. 우리 함께 먹자. 안전한 나는 삶을 그리지 않고 구상만 하다 잠만 잤으니까. 위험한 우리는 우리보다 조금씩 더 큰일을 해야 할 거라고. 우리는 뭘 모르는 아이들처럼 서로를 안심시켰다. W 레오 P Earth 2019.05.21 파리일기_두려운 날이 우습게 지나갔다
때를 모르면 시끄럽게 내려야 한다
정오가 채 못 된 시간이었다 이른 점심을 위해 학교를 나와 마트를 찾아 걸었다 학교에서 왼쪽으로 꺾어 휘 데 뾔쁠리에를 따라 걸어 올라가다가 그만 짙은 녹색 천에 담긴 죽음을 보았다 너무나 자연스러워 한참을 뻔히 바라보았다 햇빛이 묻은 흰 주름을 따라 어림되는 덩치 아 그렇구나 더 이상 급할 일도 없어 쁘히베 데 뾔쁠리에 헝세 썽떼 병원 곁은 피가 흐르는 이에 내어주고  조금 떨어진 곳이라도 뭐 어때  수고를 감내하는 구조사의 배려 덕에 우리는 총총걸음 일상 위에서 그만 짙은 녹색 천에 담긴 이를 보았다 빛도 돌리지 않는 앰뷸런스에서 배송을 예약받은 택배처럼 차갑게 들것에 실려 천천히 길을 건너 가신 이 아무도 멈추지 않았다 아무도 멈추지 않게 좋은 타이밍에 매끄러운 바퀴로 길을 건넜다 병원에는 달려 나오는 이가 없었고 문은 자동으로 열리고 닫혔다 죽음이 지나가도 아무도 멈추지 않는다 아무도 멈추지 않았고 그만이 조용히 내렸다 꿀렁이지 않았다 보도를 오르고 내릴 때도 길을 건너 오른쪽으로 틀고 병원을 향해 왼쪽으로 틀 때도 붙들고 있는 것들이 더는 필요가 없겠지만 다행히 우리는 점심을 거르지 않았다 때를 모르면 시끄럽게 내려야 한다 지하철은 늘 만원이라 때를 놓치면 모두를 밀치고 파흐동 소리를 연발로 내지르고 때를 모르면 시끄럽게 내려야 한다 갑자기 툭 내리면 남은 이에게는 얼마간의 상처가 생긴다 가방에 쓸리고 옷이 벗겨진다 달려 나가는 파흐동 소리에 괜찮다는 말도 못 해준다 괜찮다는 말을 못 해줬다 입술을 뗄 만큼 아프지는 않아서 몸을 돌릴 만큼 가까이 있지도 않아서 매일 문은 열리고  얼마 간의 소란이 있고 문은 닫힌다 조금 넉넉하다가 더 비좁아지기도 한다 글, 사진 레오 2019.12.05 시로 일기하기_오늘 날씨 흐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