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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스마르크의 손녀, Hannah von Bredow

독일 제3제국 시절 비스마르크 가문 사람들은 뭘 했나 싶은 의문이 있었다. 아무래도 비스마르크의 손자 손녀들은 나치에 찬성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인간사가 그러하듯 꼭 그렇지만도 않았었다. 이 기사는 비스마르크를 그대로 빼어 닮은 유일한 손자(…)라는 평을 받았던 장손녀, 한나 폰 브레도브(Hannah von Bredow, 1893-1971)의 이야기이다.

그러니까 비스마르크 장남의 딸인데, 아버지는 한 공주님과 바람이… 아 아닙니다. 제3제국 시절에는 아버지(비스마르크 장남)가 사망한 이후였다. 장녀로서 그녀는 1915년 폰 브레도브와 결혼하지만, 남편도 1933년에 병사했었다. 혼자 집안을 이끌었다는 얘기다.

독일 제2제국이 망한 이후인 바이마르 공화국 시절이기는 해도 비스마르크 집안이 갖는 의미는 상당했다. 그래서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나 폰 파펜 총리, 카를 구스타프 융, 막스 플랑크(!) 등 온갖 유명인사들이 그녀의 문안을 여쭈러 그녀 집안을 들락거렸고 그만큼 그녀가 지적으로 그들을 잘 이끌기도 했었다. 당연히 아돌프 히틀러도 그녀를 찾아 뵈었는데…

그녀는 취미가 일기였다. 1930년대 초 히틀러를 만났던 그녀는 일기에, “그가 만약 독재자가 된다면 독일은 정신병원(Irrenhaus)이 되고 말 것이다”라 적었다. 결코 호의적이지 않았다는 의미다. 그리고는 히틀러가 대통령이나 총리 둘 중 하나가 되리라고 예언도 했었다. 자기보다 그렇게 나아보이지 않던 남동생들도 마찬가지. 곧 그들 둘 다 나치당에 가입한다. (참조 1)

과연, 한나는 가만히 있지 않았다. 그녀의 개인 은행가와 개인 변호사 모두 유대인들이었고, 그녀는 그들의 탈출을 적극 도왔다. 게다가 나치에 반대하고 유대인들 탈출을 돕는 지식인들 모임(참조 2)도 주도했다. 또 있다. 나치에 반대하는 교회(Bekennende Kirche)에 가입했으며 히틀러식 인사를 거부했다. 게슈타포는 그녀를 투옥시키려 안달이었지만 남동생들이 그걸 막았다.

위기는 있었다. 폰 슈타우펜베르크의 히틀러 암살미수 사건(1944. 7.20)에 남동생 고트프리트가 연루됐다고 하여 체포된 것이다. 증거 불충분으로 풀려나긴 했지만 한나는 “히믈러가 결국은 동생을 수용소로 보낼 거라”고 일기에 적었다. 과연 그대로였다(참조 3). 게슈타포는 그녀도 심문했다.

그녀가 암살미수 사건에 동참하지는 않았었다. 과연 당당했다. 제목과 같다. “나치가 무섭냐고? 내가 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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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조

1. 표현이 매우 냉소적이다. “O(오토)와 G(고트프리트)는 분명(bestimmt) 입당하시겠지…” 그들 중에서는 G가 포츠담 특별시장(Regierungspräsident, 란트 취급을 받는 특수 행정구역 장을 의미한다)을 맡을 정도로 당 내 지위가 올라간다.

2. Solf-Kreis/졸프 서클이다. 바이마르 시절 주일본 대사를 지낸 빌헬름 졸프의 아내인 한나 졸프가 결성했으며 당연히… 회원들 대부분 잡혀서 투옥되거나 처형당한다. 그러나 제아무리 나치라도 비스마르크의 손녀를 처형시킬 수는 없었다.

3. 고트프리트는 1945년 2월에 강제수용소로 들어갔다.

P.S. 1. 전쟁 이후 소련이 밀려오는 광경을 보며 그녀는 스위스로 옮기고 미군에게 몰수됐던 영지를 되돌려 받는다. 비교적 편안한 노후를 보냈었다.

P.S. 2. 남동생 고트프리트의 손녀가 바로 한 때 메르켈의 왕자, 추 구텐베르크의 부인, 슈테파니 추 구텐베르크이다.

추 구텐베르크 남작 인터뷰(2016년 2월 28일): https://www.vingle.net/posts/14402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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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0년대의 영상 통화
불금에는 역시 스카이프죠. 한때 아마존 프라임의 대표적인 드라마, "높은 성의 사나이(The Man in the High Castle, 2015-2019)"를 보면 화상통화 장면(참조 1)이 나온다. 대체로 아시겠지만 이 드라마는 나치 독일이 승리했을 경우를 가정한 세상을 그리고 있으며, 드라마에 나오는 최신 기술들이 아예 근거가 없지 않다. 이 화상통화도 마찬가지다. 화상통화를 전세계에서 처음으로 개통한 나라가 미국이 아닌 독일이었기 때문이다. 때는 1936년, 베를린 올림픽(8.1-8.16)을 맞이하여 독일의 과학기술은 세계제일(...)을 드러내고 싶었던 나치 정권은 3월 1일, 베를린-라이프치히 간 화상통화 전선을 연결시킨다(참조 2). 정확히는 제국우정성에서 연결했으며, 가격은 3분당 2마르크. 통화상대가 없으면 라이프치히 우체국 관헌이 대신 통화해주는 서비스도 제공했다. 이 화상통화 서비스의 이름은 Gegensehn-Fernsehsprechstellen(화상텔레비전시스템), 나중에는 베를린과 라이프치히 외에 뉘른베르크와 뮌헨도 연결됐다. 사용자를 초당 25장으로 스캔하여 전송하는데, 이 화면은 4만 픽셀 수준(참조 3)이었다. 즉, 웹캠이 처음 나타났을 때와 별 차이 없었다는 의미로서, 만약 전쟁 없이 기술발전이 계속 됐다면 확실히 "높은 성의 사나이"에 나오는 화상통화가 가능했을 것 같다. 발명자는 게오르크 슈베르트(Georg Oskar Schubert, 1990-1955), 카메라 촬영 대상을 곧바로 필름에 씌워 전자적으로 스캔을 하고 곧바로 화면에 현상시키는 기술을 만들어서 화상전화가 가능했었다. 물론 전쟁 후, 소련에 사로잡혀서 시베리아로 간 까닭에 사망한 것은 안 자랑이지만 말이다. 그래서 키싱부쓰...가 아니고, 우체국마다 원격통화부쓰(Fernsehsprechstellen)가 생겨난다. 심지어 화상통화로 범인을 식별해내는 드라마도 나온다(참조 4). 나치는 이 업적에 신이 나서 나중에 이 시스템을 쾰른과 프랑크푸르트, 빈까지 확대시키겠다고 했지만 곧바로 전쟁이 터졌습니다. 이 화상통화 서비스도 1940년 문을 닫았고, 인프라는 텔레비전 방송 서비스용으로 바뀌었다. 1878년 현재의 AT&T가 전화통신 서비스를 시작하면서 전화통신이 화상통화로 이어질 것은 자명해보였다. 이미 1927년 영화 메트로폴리스(Metropolis)에 그런 장면(참조 5)이 나온 걸 보면 알 수 있을 텐데, 화상통화가 실제로 빈번하게 된 것은 스카이프나 애플 페이스타임이 뜬 이후니까 대략 150년 정도가 필요했다고 볼 수 있겠다. 통신수단으로서 음성이 곧바로 영상으로 이어질 거라는 생각이 예상보다는 현실적이지 않았다는 얘기다. ---------- 참조 1. 드라마 속의 화상통화: https://the-man-in-the-high-castle.fandom.com/wiki/List_of_Nazi_Science_and_Technologies?file=Relay_computer_of_the_reich.png 2. 짤방도 여기서 가져왔다. Eine Weltneuheit – die Eröffnung des Fernsehtelefon-Verkehrs Berlin - Leipzig - Berlin : https://radio-salon.blogspot.com/p/vor80-jahren-eineweltneuheit-die.html 3. Zum Auffrischen und Erinnern . . . .: http://www.fernsehmuseum.info/funkausstellung-38.html 4. Germany, 1939, crime drama. Film 12919: https://youtu.be/Fs4lQ_ESetA 5. Metropolis 1927 - Videophone: https://youtu.be/griiRL8Yvu0
함락된 도시의 여자
월요일은 역시 독서지. 이 책은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소련이 저지른 베를린 집단 강간에 대한 건조한 보고서다. 어떻게 보면 당연하게도 독일 여자가 쓴 이 일기가 독일어로 출판될 수는 없었다. 여러가지 이유가 있었을 텐데… 일기 원본은 그녀 스스로 마음 속의 검열 때문이었는지 약자나 암시하는 단어로 썼던 모양이다. 읽을 수 있는 글의 형태로는 1950년대 초에 그녀가 직접 옮겼던 것으로 보인다. 애초에 출판하려 마음 먹고 있었다는 얘기다. 그래서 1950년대에 영어판이 먼저 나왔고, 독일어판이 잠시 나오기는 했다. 그러나 그녀의 책은 50년대 독일 내에서 숱한 비판을 받았다고 한다. 독일 여자의 명예를 떨어뜨렸다면서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독일어판 재출판을 자기 살아 생전에는 못 하게 막았다고 한다. 그래서 독일어판은 그녀가 사망한 이후에서나 다시 나올 수 있었고, 영화(Eine Frau in Berlin)화도 그 이후에나 가능했다. 50년대 독일의 비뚤어진 심리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래도 2003년 이후 다시 나온 책에 대해서는 찬사가 이어졌고(하지만 저자는 사망했는 걸?), 역사 분석의 대상이 됐다. 자, 내용 이야기를 하자면 그녀는 1933-34년간 파리 소르본에서 역사/미술사를 공부했었고 그 후 러시아를 여행하면서 약간의 노어를 익혔다고 한다. 당시 기준에서는 상당한 지식인이었던 셈이다. 그래서 제3자인 양 건조하게 당시 상황을 쓸 수 있었을까? 상황 판단도 빨랐고, 결국 그녀는 생존할 수 있었다. 그래서 결국은 뭐라도 알고 있어야 생존이 가능하다는 얘기인데, 이 책이 드러낼 수밖에 없을 여성주의적 시각은 나보다 훨씬 잘 쓰는 분들이 많으니 검색해서 읽어 보시기 바란다. 물론 예상한 내용이 대다수일 테지만 말이다. 내가 눈여겨 본 부분은 역시 다양한 면모를 갖춘 러시아 군에 대한 묘사와 언어였다. 공산당이라고는 하지만 러시아 군을 구성하는 것도 인간들이었기 때문이다. 복수를 해야 했던 한편, 불쌍히 여기는 마음도 있었고, 착취하려는 마음도 있었다. 주인공이 잘 한 건, 그나마 장교들을 노렸다는 점이다. 여기서 그녀의 무기는 언어. 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 어눌하더라도, 어휘가 적더라도 자기 모국어를 말해주는 인물에게 마음이 열리게 되어 있다. 노어를 몰랐던 것보다는 아는 편이 생존에 훨씬 유리했다는 의미다. 게다가 제일 “서구적”인 잘 배운 러시아 장교는 그녀가 할 줄 아는 링구아 프랑카, 불어도 할 줄 알았었다. 물론 그가 큰 도움이 된 것 같지는 않아 보이지만 말이다. -------------- 그리 많은 양은 아니지만 읽기 참 힘들었다. 번역이 안 좋아서도 아니고 책이 지루해서도 아니라 너무 먹먹해서다. 전쟁이 끝나고 남은 사람들은 전리품이 되어버렸으며, 껍데기나마 남은 조국은 남은 사람들을 버렸다. 되돌아온 남자친구가 뭘 의미하겠는가? 실제 저자는 결혼하면서 스위스로 이주했다고 한다. 차마 베를린에서, 혹은 독일 내에서 제 정신으로 살 수 없었을 것이다.